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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고려-김부식(金富軾)

耽古樓主 2023. 5. 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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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김부식(金富軾)

 

노정희(盧鼎熙)
생몰 연대 미상. 조선사 연구가.

 

 

1. 김부식의 가정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김부식은 김부일의 아우라 하였다. 그것만을 보더라도 그 인물이 명문의 출생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그 형 김부일을 찾음으로 인하여 김부식의 일반을 알 수 있다. 김부일은 김근(金覲)의 차자(次子)이고 김근의 선조는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출발되었고 경주에 거주하였다고 전한다. 김부식은 2형 1아우를 둔 4형제 중의 3남이었으며 형제 4인이 다 같이 등제(登第)하였고 예종은 부일, 부식, 부철(富轍;일명 富儀)형제 3인에게 다같이 문한시종(文翰侍從)의 관(官)을 주고 세 아들의 어미에게 세사(歲賜)를 내린 일까지 있다.

 

 

2. 조정에 입(立)하여

 

부식의 등제는 고려 숙종년간이었고 처음에는 안서대도호부 사록참군사(安西大都護府司錄參軍事)에 취임한 일이 있으며 고만(考滿)1)되자 한림원에 직사(直仕)하였고 좌사간 중서사인(左司諫中書舍人)을 역임하니 조정에 위신이 높았던 모양이다.

1)고만(考滿): 관리의 임기 만료.

 

이제 당시에 생겼던 몇 가지 사실을 찾아보면,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 (李資謙)이 국구(國舅)2)로서 정국에 임하여 그 권세가 높아졌을 적에 이자겸에 대한 궁중의 반차(班次)를 여하히 정할 것이며 국왕은 국구에 대하여 여하한 예로써 대하여야 하겠는가의 문제가 생겨 인종의 조서(詔書)로 양부양제(兩府兩制)와 모든 시종관에게 외조 이자겸의 예우에 관하여 물은 일이 있었다. 이때에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 정극영(鄭克永), 어사잡단(御史雜端) 최유(崔濡) 등이 국구에 대한 예우는 당연히 백관과 달리하여야 할 것이며 천자(天子)라도 신하로서 대우치 않음이 옳다는 의견을 제의하자 조내(朝內)가 거의 다 이 의견을 세움이 옳다 하였으나 유독 그때 보문각 시제(侍制)로 있던 김부식은 이에 반대하여 나섰다.

2)국구(國舅): 왕비의 친정 아버지.

 

김부식은 이 일을 옛날 한고조(漢高祖)와 태공(太公)의 관계로써 논하여 천무이일(天無二日)이요 지무이왕(地無二王)이니 왕자의 부일지라도 인신(人臣)인 이상 존호(尊號)가 없으면 인신 이외의 예우를 드릴 수가없고 왕정에는 군신의 예와 사속(私贖)에는 부자지친(父子之親)이 다름을 고제(古制)에 의하여 논리정연하게 진술하였다. 당시의 재보(宰輔)3)가 국왕에게 주(奏)하기를 양의(兩儀)로써 하였더니 왕이 역시 좌우를 결정하지 못하고 근신(近臣) 강후현(康侯顯)으로 하여금 이자겸의 의견을 듣고자 하니 이자겸의 김부식의 논이 천하의 공론임을 왕에게 주하게 되고 이 의견이 성립되니 김부식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3) 재보(宰輔): 재상.

 

인종 2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고 동료 박승중(朴昇中)이 이자겸에게 첨미(添媚)코자 왕이 자겸의 조고(祖考)4)를 추봉(追封)하는 기회를 타서 분황일(焚黃日)5)에 교방(敎坊)의 악(樂)을 사(賜)하도록 청하니 김부식이 이것을 불가하다 하고, 또 박승중이 이자겸의 생일을 호하여 인수절(仁壽節)이라 하자 할 때에도 역시 김부식이

“나는 인신(人臣)의 생일을 절(節)로 부름을 알지 못하노라.”

반박하니 평장사 김약온(金若溫)이 김부식의 의견을 찬성하여 그 의견이 실행되었다.

4)조고(祖考): 돌아간 할아버지.

5)분황일(焚黃日):분황의 의식을 하는 날. 분황이란 조선조 때의 의식의 하나로,관직이 추증된 경우 사령장과 누런 종이에 쓴 사령장의 부본(副本)을 주면, 그 자손이추증된 사람의 무덤 앞에서 이를 고하고 누런 종이의 부본을 불태우던 일을 말함.

 

4년에 김부식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고 그후 호부상서, 한림학사, 승지를 지내고 평장사가 되어 수사공(守司空)을 겸한 때였다. 인종 12년에 왕이 요승 묘청을 신임하여 서경에 행하여 피재(避災)를 도모하고자 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도 역시 김부식이 극언으로 간하여 불가함을 주하니 왕이 서경행을 중지하였다고 한다. 대강 이런 것으로 보아 김부식이 비록 여하한 때라도 국사의 중대한 일에 임하여 항상 태도를 분명히 가지며 자기 소신을 굳세게 주장하고 나서는 쾌남자의 기개가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3. 무장으로서의 김부식

 

인종 13년 정월에 묘청이 조광(趙匡), 유담 등과 같이 서경에 거(據)하여 고려조에 반(坂)한 일이 있었다. 국왕이 김부식을 원수로 하여 중군을 통솔케 하고 이부상서 김부의는 좌장군이 되고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주연(周衍)으로 우군을 통솔케 하여 서경에 출정케 하였다. 부식이 출발하기 직전에 이르러 왕이 김부식을 융복(戎服)으로써 천복전(天福殿)에 오르게 하시고 철월을 친수(親授)하며 명하시되 “곤외(閫外)의 일은 경의 전제(專制)에 맡긴다” 하시니 일국의 병권이 김부식의 장중(掌中)에 있었다.

 

김부식이 출정의 선두 제일에 있어서 서도(西都)의 적이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과 상통 밀모하였다는 혐의를 잡고서 이 3인을 초치(招致)하여 용사로 하여금 궁성 문 밖에서 참(斬)케 하고 참한 후에 왕에게 주하였는데 이 처단에 대하여 시인(人)이 논하되

“부식은 지상의 문명(文名)을 질시하였기로 내응(內應)을 탁(託)하여 이를 독단으로 살해하였다.”

하니 만일 이 일이 사실이라면 김부식은 자신의 권세와 영달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하는 인간으로서 미워할 존재라고 볼 수가 있다.

 

출정의 길에 오른 이후의 김부식의 활동은 군민(軍民)을 위무주급6)함에 유의하였고 용병의 술(術)에 있어서는 심모완행(深謀緩行)하는 지략은 있었을지언정 그 적을 恐怯하는 태도는 반드시 장재(將才)라고도 보기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6)위무주급:위로하고 진휼함.

 

김부식이 서경에 행군할 적에도 직로(直路)를 택하지 않고 우원(遠) 간도(間途)7)로 돌아 평양성의 배후인 안주(安州)에 먼저 향한 일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논의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7)간도(間途): 샛길.

 

평주판관(平州判官) 감순부(金淳夫)가 조서를 가지고 평양에 입성하자 묘청, 유담 등은 서인(西人)에게 피살되고 분사태부경(分司太府卿) 윤첨(尹瞻)으로 하여금 성중(城中)이 귀순할 뜻을 표함에 이르니 김부식이 이 뜻으로써 녹사(錄事) 백녹진(白祿珍)을 시켜 조정에 보고하고 적에게 대하여 금후의 관대한 처분을 청하였더니 재상 문공인(文公仁), 최유, 한유충(韓惟忠)등이 오히려 김부식의 천연무위(遷延無爲)8)한 태도를 책하고 윤첨을 하옥케 하니 잔적(殘賊) 조광 등은 필사를 각오하고 다시 반항함에 이르니 이로 말미암아 사태는 악화되었다.

8) 천연무위(遷延無爲):행동 없이 망설이기만 함.

 

이것은 물론 재조(在朝)의 재신(宰臣)들의 처치가 불명(不明)하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김부식의 처사에도 부족이 없지 못하리라고 보겠다. 전쟁이 지구(持久)에 들어가매 관병(兵)과 적군 사이에는 승패가 없고 김부식은 항상 위무(慰撫)에 주력하니 애민련생(愛民憐生)의 태도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국가의 전 병권을 잡고서 일개의 평양성을 얻지 못한다는 비방은 朝內에 점차로 높아져서

“수만 군사를 일으켜서 해가 다가도록 해결을 짓지 못함” (편집자 역)

을 책하되 군법 시행을 논하는 자 있었으나 국왕이 김부식의 주(奏)함을 신임하심에 의하여 무사함을 얻고 관병과 적병은 상치(相峙)하여 봄을 지내고 여름을 지내고 말았다. 동절에 들어가서 약간의 전투가 있었으나 자웅을 미결한 그냥으로 겨울을 지내고 익년 2월에 이르렀다.

 

지석숭(池錫崇), 윤언이(尹頌)등 수인의 급전론(急戰論)을 김부식도 듣지 않을 수 없어 총공격을 시작하였더니 그 결과로 평양성의 함락을 보았다. 관군으로서는 평적(平賊)의 목적을 달하였으니 병마판관(兵馬判官) 노수(魯洙)로 봉표(奉表)하여 전첩(戰捷)을 주상하니 왕이 승선(承宣) 이지저, 전중소감(殿中少監) 임의(林儀)를 보내어 부식에게 의복, 안마(鞍馬), 금대(金帶), 금주기(金酒器), 은약합(銀藥盒)을 사(賜)하시고 우조(優詔)를 내려 공(功)을 상(賞)하니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의 호(號)를 내리시고 검교태보 수태위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 감수국사 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上柱國 兼 太子太保)를 배(拜)하니 4월에 개선하였다. 인종 16년에 검교태사 집현전태학사 태자태사(檢校太師 集賢殿太學士 太子太師)의 임(任)을 가하고 왕이 국자좨주 임광(林光)을 김부식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칙령으로 금은, 안마, 미포(米布), 약물을 하사하니 인신으로 최고의 영예이고 26년에 상표(上表)하여 치사(致仕)를 걸하니 왕이 이것을 허하고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내렸다.

9) 전첩(戰捷): 전승(戰勝).

 

 

4. 문필가로서의 김부식

 

선시(先時)에 김부식이 보문각 시제로 있을 때에 박승중, 정극영과 같이 「예종실록」을 편수한 일이 있으니 이것이 아마도 김부식이 편작한 사편(史篇)으로는 처녀작일 듯싶다. 그 다음 인종 23년에 이르러 「삼국사기」를 찬하니 이것이 김부식의 대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侯)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찬케 하였다. 의종 5년에 졸하니 시년(時年)이 77이었고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내렸다. 그후에 중서령(中書令)의 증직(贈職)이 있었고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케 하니 김부식 일생은 마쳤다.

 

상기와 같이 표면에 나타난 김부식은 과연 문무가 쌍전하고 인간의 부귀영예를 누림에 부족이 없는 행운아였지만 일보를 나아가 그가 가진 문장량은 얼마만큼이 있으며 그가 남기고 간 문헌은 과연 여하한 가치가 있는가를 다시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그의 일생 소저(所) 20여 권은 금세(今世)에 부전(不傳)하니 재론할 여지조차 없고 일찌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자부심이 강한 김부식은 문무(文武)의 무슨 일을 막론하고 동조(同朝)에 출입하는 누구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자임하고 있었던 탓인지 대각국사의 비문을 찬함에 이르러 왕이 처음에는 윤관에게 명하여 찬하였으나 정교하지 못함이 있었든지, 김부식의 문도들이 고의로 비밀리에 왕에 주상함이 있었든지 그 방면의 사정을 상세히 구명하기 어려우나 김부식으로 하여금 개찬(改撰)시킨 일이 있다. 이 일은 김부식의 영광으로 돌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후 국자감(國子監)에서 왕을 모시고 역리(易理)를 강론할 때에는 충분히 그 보상을 받은 일이 있다고 한다. 즉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종횡무진하는 변간(辨間)에 김부식이 유한만면(流汗滿面)10)의 곤경에 빠진 일이 있었다 한다. 이것으로써 보아 김부식의 문장력은 당대의 제일인자로 추천키 어려움이 있지 않았던가 한다.

10) 유한만면(流汗滿面):흐르는 땀이 얼굴을 덮음.

 

또다시 그가 남긴 「삼국사기」에 대하여 고찰하건대 編史의 체재는 본기(本紀)에 열전(列傳), 잡류(雜類), 연표(年表)로 된 50권의 사전(史傳)인데 그 자료의 근거가 거의 다 지나 고대 문헌에 있다고 함이 오늘날의 통설이다. 그래도 당시까지는 잔존하는 점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고대 삼국사를 인용함이 적다는 것이 사가들의 동일한 평론이다. 김부식의 지위의 존귀함이 장상을 겸하였으니 그가 편사의 임(任)에 당하여 헌서(獻書)의 길을 열고 석학의 성원을 얻기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거늘 그 당연히 할 일을 하지 않고 단독한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사편(史篇)으로서의 규모가 약하다고 전 바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가로서 문장가로서의 김부식은 일보의 부족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5. 정치가로서의 김부식

 

정치가로서의 김부식의 수완은 과연 능함이 있는 듯싶고 특히 외교에 달(達)함이 있던가 한다. 그가 때로는 송(宋)에 출입을 하여 절대의 환영을 받은 일이 있으니 고려 예종 11년에는 송제(宋帝)가 「추성흠악도(秋成欣樂圖)」를 김부식에게 하사한 일을 보든지 또는 선화봉사(宣和奉使)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있는 김부식의 찬미문을 보든지 송국의 조야에 김부식의 명성이 높았던 것이 사실인 듯하다. 「고려도경」에 있는 문구를 들어 보면,

“풍모가 큰 체구, 얼굴은 검고 눈동자는 이슬 같으며 학문이 넓고 학식에 힘쓰더라.”(편집자 역)

라고 절칭(絶稱)을 하였으니 사실도 사실이려니와 외교의 능(能)이 없지도 않았던 듯싶다.

이 의미에 있어서 필자는 김부식을 무장으로보다 사가로보다 먼저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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