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 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 · 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등이 있음.
묘청은 고금을 통하여 반역계의 한 이채(異彩)이다. 고려 일대에 대반역이 여러 번 있었으나 묘청의 반역처럼 사상(思想上) 깊은 근거를 가진 것은 없다. 그는 왕건 태조 이래 아주 신성시하던 서경(西京) 그것의 역사적 배경에 당시 유행이던 음양 비술(祕術)이란 사회적 미신을 결합하여 자겸(資謙)의 난 이후를 타서 일어난 것이다.
자겸의 난리에 개성 왕궁이 불에 타매 묘청이 인종께 아뢰되
“상경(上京)은 그 업이 이미 쇠하였으니 서경에 국도를 옮기자.”
고 주창하였다. 그는 서경의 지덕(地德)을 성칭(盛稱)하여 임원역에 신궁을 두면 36국이 내항하리라 하며 인하여 칭제 건원(稱帝建元)을 역청(力請)하다가 유신의 반대로 인하여 천도 계획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매 이에 격분된 묘청은 마침내 고려 인종 13년에 서경에서 반기를 들게 되었다.
이것은 묘청이 반역을 꾀함에 이르게 된 그 동기와 경로의 대강이지마는 여기 주의할 것은 서경 천도와 아울러 칭제 건원이다. 서경은 고구려의 옛 도읍이니만치 고구려의 후계로 자임하는 고려로서는 거기 서울을 두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찌기 태조와 정종도 서경 천도를 꾀하던 일이 있었으며 예종도 서경에 용언궁(龍堰宮)을 지은 일이 있었으니 서경 천도는 거의 역대 전통적 사상이 되어 있어 기회를 따라 발로한 것으로, 이때 묘청을 통하여 또다시 표현하게 되었다. 칭제건원으로 말하면 고려가 비록 정면으로 칭제한 일이 없으나 임금에게 대하여 성제(聖帝)라, 해동천자(海東天子)라 일컬은 문구가 여기저기 보이며 그리고 여초에 건원하여 천수(天授)니 광덕(光德)이니 준풍(峻豊)이니 하는 편어(片語)가 정사(正史) 위에 보이는데 이 우렁찬 고려의 정치사상이 묘청에 의하여 가장 잘 고조된 것이다. 이로 보더라도 묘청은 고려 사상의 구현자(具現者)임이 틀림없다.
묘청은 본래 서경의 승으로 서경을 근거삼아 반기를 들게 되었지만 반기를 든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그가 전날에 주장하던 바를 그대로 실현하여 천개(天開)라 건원하며 또 인종께 몇 번이나 서경 신궐(新闕)에 이어(移御)하여 칭제함을 강청하였으니 그는 시종일관하여 참으로 그 주의 주장에 철저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 주의 주장은 필경 그 군사적 행동의 일패도지(一敗塗地)함을 따라서 수포의 운에 마치고 말았다. 그러면 묘청의 패망은 과연 사상계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하였는가. 그의 패망은 곧 고려에 전래하던 고유사상의 패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로부터 묘청을 중심으로 하였던 천도 칭제의 자존파(自尊派)는 아주 사라지고 천도 칭제를 반칭(反稱)하는 한화파(漢化派)는 고개를 바짝 들게 되어 대치힐항 1)하여 오던 사상계의 양 조류가 그만 일파의 독점이 되고 말았다.
1) 對峙頡頏: 서로 맞서서 버티고 대항함.
묘청의 인물에 대한 고금 평론이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훼예(毁譽) 양파로 나눈다면 한 파는 그를 성인이라고 칭예함에 반하여 한 파는 그를 요인(妖人)이라고 훼방한다.
그러나 서경사변 이전에 있어서는 훼방보다 칭예가 많았고 서경사변 이후에 있어서는 칭예보다 훼방이 많음은 또한 성패를 따라 훼예 포폄을 달리하는 세태 인정의 자연스런 경향이지만, 만일 묘청이 성공하였다면 길이 성인이란 칭예를 누릴 것이거늘 그만 그가 실패하였으므로 흔히 요인이란 훼방을 듣게 되었으니 그러면 묘청은 과연 요인인가.
인종 당시에 유신 일파가 묘청을 요인이라고 반대하던 이유는 묘청의 언론이 괴탄(怪誕)2)하여 믿을 수 없다는 데 있으니 그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 유신의 눈에 음양가(陰陽家)인 묘청이 요인같이 비쳤음이 당연한 일이다. 그 이른바 요인이야말로 묘청이 묘청된 까닭이니 그의 특색도 이 점에 있고 동시에 그의 패인도 역시 이 점에 있다.
2)괴탄(怪誕): 괴상하고 헛된 소리.
그가 신라 도선(道詵) 이래 당시 인심을 지배하는 음양화복의 설을 가지고 서경 천도를 건의하매 유신 일파는 그 설이 괴탄하다 해서 그를 요인(妖人視)한 것이며 요인시한 때문에 그의 수창(首唱)한 칭제 건원까지도 아울러 반대를 만나 좌절함에 이른 것이다. 비록 표면으로 금국(金國)의 강성을 핑계하나 그 실은 요인시하는 묘청을 꺾기 위하여 그리한 것이다.
이렇게 유신의 반대로 말미암아 자기의 주장이 차차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하여짐을 보게 된 묘청은 부득이하여 최후 수단을 써 그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거병한 뒤에도 개성 왕정에서 파견된 사자에게 대하여 오히려 뜰에 내려가 인종의 성체(聖體)를 배문(拜問)하며 또 인종께 상서하여 의연히 서경 천도를 역청한 것을 보면 그 측달3)한 지성과 호매(豪邁)한 기상이 요인이라고 함에는 너무나 위대한 바 있다. 그러므로 묘청을 한낱 요인이라고 함은 정론이 아니다.
3)惻怛:불쌍하게 여겨 슬퍼함.
그러면 묘청은 어떠한 인물인가. 당시에 그를 숭배하는 일파에서는 성인이라고 칭예하였으니 그러면 묘청은 참말 성인인가. 아니다. 그가 참말 성인일진대 강중(江中)의 유병(油餅)과 공중의 악성(樂聲)과 또 원종4)의 등화와 같은 아희(兒戱) 비슷한 만착(瞞着)5) 수단으로 그 주의 주장을 실현하려고 아니하였으리라.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택하지 아니함은 성인은 즐겨하지 않는 바다. 이 한두 일로써 보더라도 그가 성인이 됨에는 너무나 권모술수가 지나치다. 그러므로 묘청을 성인이라고 함은 정론이 아니다.
4)원종: 해 저물 때.
5)만착(瞞着): 남의 눈을 속여넘김.
다만 묘청이 성인의 과예(過)를 듣게 되니만치 당시의 한 인격자였던 것만은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가 한번 호령하매 서경 일대가 호응하게끔 대세력을 가졌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가 묘청 반란이란 정치적 대파란을 일으켜 역사상 뚜렷한 일대 존재가 되니만치 묘청은 어디로 보든지 당시 및 후세를 통하여 한 인걸됨을 잃지 않을 것이다.
묘청은 다른 역사상 인물에 비하면 누구와 비슷할까. 승려로서 정치를 뒤흔든 이는 묘청보다 앞서서는 궁예가 있었고 묘청보다 뒤져서는 신돈이 있거니와 그러면 묘청을 궁예와 신돈과 대비하면 어떠할까.
궁예는 군웅이 벌떼같이 일어나는 신라말의 난세를 당하여 발낭(鉢囊)6)을 벗어버리고 고검(孤劍)으로 일방에 할거하여 고구려왕을 자칭하던 일대 기걸(奇傑)로, 저 농가에서 뛰어나와 백제왕을 자칭하던 견훤과 함께 신라말의 풍운이 낳은 쌍생의 혁명아였다. 다만 그의 혁명이 정치상뿐만 아니라 동시에 종교상까지 아울러 혁명을 꾀하다가 이교도의 반항을 만났으니 그렇지 않아도 하극상의 풍조가 날로 격심해지는 판에 또 이처럼 유력한 불교도의 반항이 있으므로 그 일대 패업(業)이 장차 이루려고 하는 중도에서 그만 패망하고 말았다.
6) 발낭(鉢囊): ‘바랑’의 원말. 중이 등에 지고 다니는 큰 주머니.
묘청의 천도운동이 유신파의 반대로 해서 환멸의 운에 마치고 만 것이 마치 궁예가 불교도의 반항으로 해서 패망의 기(機)를 재촉하게 된 것과 방불한 바 있거니와, 하나는 칭왕 건원을 실현하니만치 정치상의 성공자요, 하나는 칭제 건원을 잘 실현하지 못하니만치 정치상의 실패자이지만 그 우렁찬 사상만은 거의 서로 비슷하다. 묘청과 궁예는 시대가 상격(相隔)하고 개성이 상위하므로 서로 비슷하고도 다르며 다르고도 비슷하나 땅을 바꾸면 묘청이 궁예도 될 수 있을 것이요 궁예가 묘청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묘청과 궁예와의 대비는 대강 그러하지만 그를 다시 신돈과 대비하면 어떠할까. 신돈은 정치가 아주 해이해진 고려말에 있어서 귀족계급의 인물은 여러 가지 폐습이 많으므로 모든 것을 초월한 승려계급에서 인물을 탁용(擢用)하는 바람에 그가 일약하여 공민왕의 사부(師傅)가 되고 다시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의정 대감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위력이 욱일(旭日)의 세력으로 커져 내치외교(內治外交)할 것 없이 일국 정사를 그의 뜻대로 좌우하게 되어, 말하자면 그가 집권한 뒤 7년 동안 고려의 천하는 거의 신돈의 천하인 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 기반이 없는 일개 승려라 기반이 잡힌 세가(世家)로도 까딱하면 저주의 화가 따르는 판에 신돈같은 승려가 아무리 득군행도(得君行道)7)하더라도 한번 쏠리기만 시작하면 그 운명이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가 실로 총혜변급(聰慧辯給)8)하지마는 세가 대족의 군방총소(群謗叢笑) 중에 싸인 고립한 몸으로 그 권세가 오랜다면 얼마나 오랠까 보냐.
어느 의미로 그가 국정을 장악하는 그날이 벌써 몰락의 과정을 밟는 그날이다.
7)득군행도(得君行道):임금의 세력을 얻어 세도를 부림.
8)총혜변급(聰慧辯給):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말을 잘 함.
9)군방총소(群誘叢笑):뭇사람들의 비방과 조소.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주목의 촛점이 되어 있는 신돈은 군총(君寵)이 깊어질수록 세가 대족의 질투를 받게 될 것이므로, 일례를 들면 인신공격을 하다 못해서 그의 음식과 거처에까지 들어가 취모멱자(吹毛覓疵)10)할새 오계(烏鷄)를 즐겨하느니 엽견(獵犬)을 무서워하느니 하여 노호정(老狐精)에 돌렸음을 보아도 그 밖의 것을 추찰하려니와, 이로 말하면 신돈의 실패는 세가에게 질시받는 데서 배태하여 역모의 발각으로써 종국을 짓고 말았다.
10) 취모멱자(吹毛覓疵):털을 헤쳐 가며 그 속의 흠집을 찾는다는 뜻으로 억지로 남의 드러나지 않는 결함까지 꼬치꼬치 들추어냄을 이르는 말.
그러면 묘청과 신돈의 비슷한 점을 억지로 구한다면 첫째 승려로서 득군 행도한 것이 서로 비슷하고, 둘째 득군 행도하다가 필경 반역아로 마치게 된 것이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인물로 말하면 묘청이 훨씬 신돈보다 어른지다. 신돈도 걸물이 아닌 것이 아니로되 요컨대 소인형의 걸물이요 묘청은 대인형의 걸물이니 걸물은 비슷하나 대소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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