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약력
사의 명은 탄연이요 속성(姓)은 최씨이며, 부는 숙(肅)이니 군공(軍功)으로 교위(校尉)가 되었고 모는 안씨라 한다. 사가 나오면서 이질(異質)이 있어 지기(志氣)가 비상하였으며 나이 겨우 8, 9세에 시문(詩文)에 능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또 서법(書法)에 능통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13세에 육경(六經)의 대의(大義)를 통하고 15세에 명경생(明經生)으로 뽑혀서 명성이 일세에 울렸으므로 노유(老儒)도 그를 추중(推重)치 않는 이가 없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고려 숙종이 그의 명예를 듣고 궁중에 소입(召入)하여 세자를 돕게 하였으니 세자는 곧 예종이다. 사가 일찌기 출가의 뜻이 있어서 신세를 부운과 같이 보고 명리(名利)를 폐사1)와 같이 버리면서 가만히 궁문에서 나와 경산(京山) 북 안적사(安寂寺)에서 낙발(落髮)하고 승이 되니 때에 나이 19세였다 한다.
1)폐사: 해진 삼신(삼으로 만든 신).
이로부터 참선에 전력하는 동시에 당대에 가장 유명한 혜소국사를 사사하여 심요(心要)를 전수하였고 선림(禪林)에 종사한 지 60여 년에 학덕의 성망이 산두(山斗)와 같으므로 마침내 국사의 존칭을 받았고 의종 무인에 입적하매 대감(大鑑)이라 추시(追諡)하였으므로 후인이 다 대감국사라 이르게 되었다.
2. 서법(書法)
그리고 동사(同師) 탑비에
“찰한(札翰)2)의 정묘함이 옛날 사람보다 뛰어나 이를 얻은 자는 지극한 보물로 여긴다.”
라 하여 국사의 필법이 정묘함을 찬탄하였고
「파한집(破閑集)」에는
“본조(本朝)의 대감국사와 학사 홍관(洪灌)이 글씨로 이름을 떨치니 무룻 보전화루(寶殿花樓)의 제액(題額)과 병장3)의 명문(銘文)은 모두 두공의 필체이다.”
라 하였으며
「보한집(補閑集)」에는
“대감국사 탄연은 필적이 정묘하다.”
라 하였고
「이상국집(李相國集)」에는
“왕사 탄연의 글은 행서(行書)에 더욱 장기가 있으니 매번 들여다보아도 정채(精彩)가 난만히 발하는 것이 연못으로부터 부용이 나오는 것과 같다. 그 가운데 강직함을 품고 옥 같은 피부를 가린 것 같으니 교묘한 공(工)의 베풀어짐과 같도다. 알맞게 서로 나아가는 것이 또한 다듬어 다진 흔적이 없으니 이 어찌 배워서 얻은 것이리오, 필시 하늘의 부여함을 받은 것이다. 그런즉 탄연을 신품(神品)의 두 번째에 놓음은 당연하다.”
라 하여 김생(金生), 탄연, 최이(崔怡), 유신(柳伸)의 4신품(四神品)을 열거하는 중에 국사를 제2위에 들었었다.
2)찰한(札翰): 편지.
3)병장:병풍과 장막을 아울러 이르는 말.
그리고 동서(同書) 신품사현찬(神品四賢贊) 탄연조(坦然條)에는
“명월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깨끗하며, 부용이 연못에서 나오는 것처럼 빛난다. 취약하다 말할 수 없으며, 아름다운 부인과 같다. 보기에는 아름다움을 구하는 것 같으나 그 가운데 단단함을 지닌다. 일점일획이 습자책에 들어맞아 마땅함을 얻는다. 뜻을 세워 만들어진 것이 아니요 신적인 것이 베푼 것이다.”
라 하여 명월과 같고 부용과 같으며 겉으로는 미인이요 속으로는 철근임을 찬탄하였다.
3. 청평산 문수원비(文殊院碑)
강원도 춘천군 청평산(淸平山) 문수원(文殊院)에 있는 비는 고려 인종 때에 문수원을 중수하면서 진악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의 도덕을 찬미하여 세운 비로서, 그의 전면에는 김부철(金富轍)이 지은 <문수원중수기〉요 후면에는 승 혜소(慧(惠)素)가 지은 <제진악공문(祭眞樂公文)〉이다. 그리고 그의 양면이 다 탄연의 쓴 바로서 반도 금석 중에 가장 유명한 비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행히 그의 半部가 결손되었으므로 오직 고탁본(古拓本)에 의하여 전모를 짐작하게 되었을 뿐이다. 본비에 대하여 평론한 고문헌을 들면 다음과 같다.
「파한집」에는
“청평 진악공이 죽으매 서호(西湖)의 승 혜소가 문을 찬(撰)하고 국사가 힘을 다하여 썼으며, 돌에 새겨서 전하니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 이른다.'
라 하였고
「나려임랑고(羅麗琳琅考)」에는
“문수원에 기록한 비문은 행서이고 비액(碑額)은 해서(楷書)이다. 사문(沙門) 탄연이 글을 썼다.(중략)
행서의 놀림이 봉황이 나는 것과 같다. 비록 기울어졌으나 돌은 이미 닳아서 미인(美人)이 늙어감을 한함이 없지 않다.”
라 하였으며
「경수당집(警修堂集)」에는
“해서는 솔경령(率更令)이요, 행서는 성교서(聖敎序)라.”(이상 인용문은 편집자 역)
하여 동비의 해서는 구양순체(歐陽詢體)요 행서는 왕희지의 성교서체(聖敎序體)와 같음을 말하였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금석학상 본비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하다 함을 알 만하다.
대감국사 탄연은 불교학자로 당대에 권위로써 국사의 존위에 오른 고승인 동시에 한편으로 서도의 대가로 불후의 영명(英名)을 백세에 전하게 되었다 할 만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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