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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고려-정지상(鄭知常)

耽古樓主 2023. 5. 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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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정지상(鄭知常)

 

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고려 500년간에 제일류의 시인이요 건악1) 한 諍臣2)이요 또는 열렬한 국수주의자인 사간(司諫) 정지상(鄭知常)은 당시에 성망(聲望)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말로에 비참한 화를 당하여 비명에 횡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1)건악: 거리낌없이 곧은 말을 함.

2) 쟁신(諍):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바른 말로 극력 간하는 신하.

 

금일에 전하는 고려사는 다 사대주의자의 손에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국수주의를 잡은 자에게는 사실을 전연 매몰시킬 뿐 아니라 도리어 기사(記事)를 무재(誣載)하여 그 진상을 알 수 없게 된 일이 적지 않다. 지상과 동시에 김부식이 있었다. 그는 유일의 사대주의자이므로 지상과 근본적 견지가 다르고 또는 지상의 문명(文名)이 항상 부식을 압도하므로 이에 대한 시기와 불평이 쌓여 있었다. 이것이 화태(禍胎)가 되어서 필경은 부식의 손에 참살을 당한 것이다. 이제 지상의 약력을 아는 대로 써 보려 한다.

 

지상의 초명(初名)은 지원(之元)이요 호는 남호(南湖)니 평양인이다. 고려 예종조에 괴과(魁科)에 탁(擢)하여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이르렀고 인종조에 사간 벼슬에 있어 성궐(省闕)에 출입하여 보과습유(補過拾遺)3)한 일이 많이 있으므로 시인(時人)이 그를 가리켜 옛 쟁신의 풍이 있다 하였다.

3)보과습유(補過拾遺):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게 함.

 

인종 때는 내우와 외환이 동시 병발하여 가장 다사다난할 때이다. 안으로는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만나 궁궐이 분탕하여 처참하기 짝이 없고 밖으로는 만주에서 금국(金國)이 신흥하여 요(遼)를 멸하고 송(宋)을 정별하여 영토를 개척하고 그 여위(餘威)를 떨쳐 고려를 협박하여 남공청신(納貢稱臣)케 하므로 뜻있는 선비는 항상 이를 통탄하였다.

4)납공칭신(納貢稱臣):공물을 바치고 신하 나라임을 칭하게 함.

 

그 때에 서경 승려 묘청(妙淸)이 검교소감(檢校少監) 백수한(白壽翰)과 통모하여 음양의 술(術)을 안다 하여 인종께 말하되

“상경(上京)은 그 업(業)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燒盡하였은즉 왕기(王氣)가 다하고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은 음양가의 이른바 큰 꽃송이 핀 형세다. 만일 그곳에 궁궐을 세우고 왕께서 이어(移御)하시면 가히천하를 통일하고 금국이 스스로 앞서 항복하고 36국이 다 신첩(臣妾)이 된다.”

하였다.

정지상은 원래 서경 사람이요 또는 국수주의자다. 자기의 고향인 서경에 궁궐을 짓고 왕이 이어한 후에 천하를 통일한다는 말에 찬동치 않을 수 없었다. 그때에 서장관 최봉심(崔逢深)도 또한 지상의 주의를 찬동하여 금국을 경멸히 여기고 왕께 상서하되

“폐하가 삼한을 평치(平治)코자 하실진댄 서경 3성인(三聖人)을 놓고는 더불어 일을 같이할 사람이 없다.”

하니 곧 묘청, 수한, 지상을 가리킨 말이다.

 

그러나 묘청은 와언혹중(訛言惑衆)하는 요승(妖僧)이다. 지상이 그를 과신하여 깨닫지 못한 것은 지상의 불찰이다. 그후에 묘청의 간계가 탄로되매 묘청이 의구심을 품어 드디어 서경을 웅거하여 반(反)하였다. 인종이 김부식을 명하여 원수를 삼아 이를 토벌할새 철원(鐵)을 주어 가로되

“대궐 밖은 장군이 다스려라(閫以外將軍制之)”하셨다.

 

김부식은 원래 사대주의를 가진 자로서 지상과 의견이 불합(不合)할 뿐 아니라 지상의 문명(文名)이 자기의 위에 있음을 혐기(嫌忌)하였었다. 어느 때에 부식이 지상과 동반하여 산사(山寺)에 놀다가 지상이 시 한 구를 얻었는데

“사원의 불경 소리 그치니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구나”(편집자 역)5)

라 하였다.

5)“琳宮梵語罷 天魚淨琉璃

 

부식이 그 시를 보고 천고절조(千古絶調)라 하여 욕심이 나서 지상에게 청하되 그 시를 자기의 이름으로 쓰겠다 하니 지상이 주지 않는지라, 이로 인하여 부식이 더욱 불평을 품었었다.

 

이때 부식이 묘청을 토벌하는 명령을 받아 생살(生殺)의 권(權)을 임의로 사용하는 기회를 타서 여러 재상들과 밀의(密)하여 가로되

“서경의 반역에 정지상, 김안(金安), 백수한 등이 참여한 형적이 있으니 이 사람을 제거하지 않으면 서경을 평정하지 못하겠다.”

하니 여러 재상이 유유(唯唯)6) 하거늘 이에 지상 등 3인을 불러 기밀사(機密事)를 의논한다 하고 가만히 부하 김정순(金正純)에게 명하여 용사로 하여금 지상 등 3인을 끌어내어 궁문 밖에 참수하고 그 사유를 왕께 여쭈었다. 시인(時人)이 말하기를 부식이 지상에게 사혐(私嫌)을 갚았다 하였다.

6) 유유(唯唯):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음.

 

지상의 글은 노장(老莊)에서 득력(得力)하여 그 청신준일(淸新俊逸)한 기격(氣格)은 연화구기(烟火口氣)로 나온 것 같지 않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그 글을 평하여 가로되

 

“사간 정지상은 노장을 좋아하여 동산(東山) 진정(眞靜) 선생을 위하여 비(碑)를 지으니, 경쾌하게 나부끼는 모양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산수의 느낌이 있도다." (편집자 역)

라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면 그의 문장이 어떠한 가치를 가진 것을 가히 알 것이다.

 

지상의 시는 당인(唐人)의 풍운을 배워 청려풍염(淸麗豐艶)한 것이 완연히 출수(出水)한 부용(芙蓉)이 색채를 꾸미지 않되 맑은 향기가 멀리 들리는 것 같다.

아래에 그 시를 소개코자 하노라.

 

그 〈서도시(西都詩)〉7)에 왈

“거리의 봄바람 보슬비 지나자

티끌도 일지 않고 실버들은 비꼈네

푸른 창 붉은 문(화류가)에서는 흥겨운 노랫소리

이 모두가 이원8) 제자(梨園弟子)의 집이라네”

7)“紫陌春風細雨過 輕塵不動柳絲斜 綠窓朱戶笙歌咽 盡是梨園弟子家

8) 이원(梨園): 당 현종이 몸소 무악의 기술을 가르치던 대궐.

 

그〈대동강시(大洞江詩)〉9)에 왈

“비 개인 긴 둑에는 다북한 풀빛

슬픈 노래 남포로 님을 보낸다

대동강 물이 어느 제 다할 것인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 창파를 보태니"

9)“雨敭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그 〈취후시(醉後詩)〉10)에 왈

“복사꽃 하늘하늘 새소리는 지지배배

집을 에운 청산은 아지랭이 자욱

기우 쓴 오사모11) 게을러 매만지지 않고

꽃동산에 취하여 강남꿈 즐기네” (이상 김감기 역)

10)"桃花紅雨鳥啼啼 繞屋靑山間翠嵐 一頂烏紗情不整 醉眠花塢夢江南"

11) 오사모(烏紗帽): 관복을 입을 때 사대부들이 쓰는 모자.

 

이 시는 다 청경향량(淸警響亮)하여 여조 500년간에 많이 얻지 못할 절조(絶調)이다.

 

그외에도

“푸른 묏버들은 8·9채의 집문을 열어 주고 명월은 3·4인의 주렴을 걷어 올리네” (편집자 역)12)

와 같은 구는 의경(意境)이 신묘한 데 들어가서 일폭(一幅)의 화도(畫圖)를 연 것과 같으니 동방(東方) 시학 대가(詩學大家)에 한 좌석을 점거하여도 조금도 부끄럼이 없을 것이다.

12) “綠楊開戶八九屋 明月捲簾三四人

 

이러한 희세의 大音을 가지고 국가의 융성을 울리지 못하고 시재호명자(猜才好名者)에게 속절없이 죽은 것은 과연 통석(痛惜)치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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