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34.고려-윤관(尹瓘) 본문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고려에 있어 구강회복(舊疆回復)의 사상은 초기부터 국인(國人)의 일부에 흐르고 있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는 예종시대의 윤관이었다. 원래 만주의 동남 일대에 웅거하던 여진족(말갈)은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에 예속하여 국민의 일부를 이루었으며 발해시대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태조)가 발해를 멸한 뒤로부터 발해의 동남고지(東南故地)에 있던 여진의 일부(生女眞)는 거란의 치외(治外)에서 각 부락에 나뉘어 분산적 독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속박을 받아 오던 그들은 일조(一朝)에 자유행동을 취하게 되매 이에 따라 고려와의 관계도 점차 복잡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함경도 일대에 걸쳐 반거(蟠據)하며 부모국(父母國)으로서 고려에 복사(服事)하여 왔었다.
그러나 인구의 번식과 세력의 발전에 따라 그들은 자주 고려의 변경을 시끄럽게 하며 때로는 해상으로 횡행하여 동해안 각 주와 울릉도를 약침(掠侵)하고 멀리 일본의 일기(壹岐), 대마(對馬) 등 도서와 북구주(北九州) 연안에까지 침해하였다. 그의 환(患)은 고려 현종(제8대)시대부터 특히 현저하여 이후 덕종, 정종, 문종, 선종, 헌종시대에 걸쳐 반복(反服)이 무상하여 입공(入貢)과 내구(來寇)는 실로 응접(應接)에 불가(不暇)할 이만큼 되었으므로 그들에 대한 고려측의 처단은 실로 국가의 대문제이며 두통거리였다.
선종 때에 안출호수(按出虎水; 哈爾濱의 남쪽)변의 완안부(完顔部)에서 추장 영가(盈歌;金의 穆宗)가 倔起함에 이르러 사린을 평정하고 그의 세력은 남으로 내려와 반도 내에 반거하던 여진부락에까지 미쳤다. 다음 우야소(烏雅束;金의 康宗) 때에 이르러 고려의 동북경 함흥부근(曷懶甸)까지 출병해 옴에 이에서 고려와 여진의 대충돌이 일어나 윤관의 여진 정벌을 보게 된 것이다.
윤관은 파평(坡平) 사람으로 태조 때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신달의 4세손이요,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小監)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그는 문무의 재(才)를 겸한 인물로서 어려서부터 특히 학(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처음부터 문관으로 출세하였으니 문종조에 등제하여 습유(拾遺), 보궐(補闕)에 이르렀고 숙종 3년 7월에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로서 조규(趙珪)와 같이 국사(國使)로 송(宋)에 건너갔었으며 그 후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역임하였다가 동 9년 2월에 비로소 제1차 여진 정벌에 출마(出馬)하게 되었다.
원래 고려에서는 동북 방면의 여진 방비가 큰 문제로 되어 있던만큼 邀攻하는 자는 자주 여진이 출몰하는 要徑을 막자고 건의하는 자도 있으며 숙종 7년에는 변장(邊將) 이일숙(李日肅) 등이
“여진이 허약하여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으니 지금 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일의 환(患)이 될 것이라.”
고 주상(奏上)한 일도 있었다.
그때에 여진에서는 우야소가 석적환(石適歡)을 보내어 갈뢰전을 경략한 다음에 동 9년 정월에는 그의 기병(騎兵)이 정주(定州 ; 定平)관 외에 내둔(來屯)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이 동북면행영병마사로서 당케 하였으나 동년 2월에 정주성 밖에서 싸워 패하여 병졸의 태반을 상실하였고 여진군은 이에 승세(乘勢)하여 정주 선덕관성(宣德關城)에 넘어들어 살략(殺掠)을 자행하였다.
숙종은 드디어 동월 하순에 추밀원사(樞密院使) 윤관을 임간의 대(代)로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을 삼아 중광전(重光殿)에 출어(出御)하여 철월(鐵鉞)1)을 주어 보냈다.
1) 철원(鐵鉞):출정하는 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군직의 관리에게 왕이 정벌과 중형(重刑)의 뜻으로 주는 것. 부월(斧鉞).
그러나 신흥 여진의 세력은 창졸간에 꺾기 어려운 것으로서 윤관은 저으기 후일을 기하고 비사(卑辭)로써 화(和)를 맺고 돌아왔다. 역대에 아방(我邦)을 부모국으로서 섬겨 오던 여진에게 두 번의 실패를 맛본 숙종은 크게 분을 발하여 천지신명에게 고하여 음조(陰助)를 빌고 적을 소탕하면 그 땅에 불우(佛宇)까지 세울 것을 발원하였다.
동년 11월에 윤관(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 겸 太子賓客에 임하였음)은 숙종께 그의 패한 원인으로 '적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므로 능히 당직하지 못할 것’을 지적하고 군비의 혁신적 확장을 건의하여 후일(後日戰)의 준비를 행함에 이르렀으니 이에서 유명한 윤관의 별무반(別武班)이라는 군제가 출현한 것이다. 그는 기병 양성의 목적으로서 ‘신기(神騎)’군을 조직하였으니 문무산관(文武散官) 이서(吏胥)로부터 상고(商賈) 복예(僕隷)와 주부군현(州府郡縣)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는 이에 편입하였으며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말을 가지지 못한 자로는 ‘신보(神步)’군을 편성하였으니 이에는 신보, 조탕(跳蕩), 경궁(梗弓), 정노(精弩), 발화(發火) 등 제반(諸班)으로 나누어 서반(西班)과 여러 진부(鎭府) 군인으로 하여금 사시(四時)로 훈련을 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승도(僧徒)를 뽑아 항마군(降魔軍)이라는 특별 부대까지 편성하였던 것이다.
윤관은 이와 같이 특수 군제를 창설하여 병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저축하면서 재거(再擧)를 도모하던 중에 그 익년에 이르러 숙종이 붕(崩)하고 예종이 뒤를 이었다. 일방 여진의 침구(侵寇)는 끊이지 아니하여 예종 2년에 여진 침입의 변보(邊報)가 이르는지라. 예종은 양부(兩府) 대신을 모아놓고 중광전 불감(佛龕)에 갈마둔 숙종의 서소(誓疏)를 꺼내 보였다. 그것을 봉독(奉讀)한 대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성고(聖考)의 유지(遺志)가 이같이 심절(深切)하시니 이것을 가히 잊을 수가 있으리까.”
하고 선왕의 뜻을 이어 여진 정벌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중서시랑 동평장사 윤관을 원수로,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에 임명하고 11월에(24일) 왕은 서경에 행행(行幸)하여 익월 1일에 그곳의 위봉루(威鳳樓)에 출어하여 윤관, 오연총에게 철월을 주어 출정케 하였다.
별무반을 조직 훈련하여 오랫동안 준비를 쌓으며 시기를 기다리던 윤관은
“만사(萬死)의 땅에 나아가 국가의 치욕을 씻겠다.”
는 결심 아래서 장도(壯途)에 올랐다. 윤관은 17만 대군을 통솔하고 동계(東界)에 이르러(지금 平元線 지대가 당시의 통로이었던 듯함) 장춘역(長春驛)에 유둔(留屯)하고 먼저 정ㆍ장(定長) 2주(二州)의 여진인 400여 명을 유인하여 그것을 섬멸한 다음에 드디어 부서를 정하여 진격할새 윤관은 스스로 53,000인을 인솔하고, 중거병마사(中車兵馬使) 김한충(金漢忠)은 36,700인, 좌군병마사 문관(文冠)은 33,900인, 우군병마사 김덕진(金德珍)은 43,800인을 각기 인솔하고 정주로부터 4도에 나누어 진격키로 하였으며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練)은 선병 2,600 을 거느리고 도린포(道鱗浦)로 나가기로 하였다.
윤관은 동방의 장성(長城)을 넘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 동북으로 행군할새 군세가 심히 성하였으므로 이를 본 근경(近境)의 여진인들은 모두 둔주(遁走)하고 오직 가축이 들에 헤맬 뿐이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러 동음성(冬音城)에 농성한 적을 급히 공격하여 구축하였고 좌군은 석성에 이르러 적과 충돌하여 전진치 못하거늘 윤관은 부장(部將)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부원(赴援)케 하였다. 척준경은 결사적으로 적진 중에 돌입하여 수명의 추장을 거꾸러뜨려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하매 이에 윤관의 휘하가 좌군과 호응하여 분격한 결과 적의 남녀노소까지 거의 섬멸하였으며 윤관은 다시 최홍정(崔弘正), 이준양(李俊陽) 등을 보내 이위동적(伊位洞賊)을 격파하여 1,200급을 베었다.
이와 같이 각 군은 파죽(破竹)의 세로써 적을 급습하여 도처에 성보(城堡)를 함락하고 촌락을 공파(攻破)하였으니 당시 수군(水軍)과 최홍정 등의 전과 이외에 4군의 전적만으로도 윤관의 군은 촌락을 공파하기 37에 2,120급을 베고 500을 포로로 하였으며 중군은 공파하기 35촌에 380급을 베고 230을 사로잡았고 우군은 공파하기 32촌에 290급을 참살하고 포획이 300이었으며 좌군은 31촌을 공파하고 950급을 베었다.
이에 윤관은 유영약(兪瑩若)을 보내 조정에 전첩(戰捷)을 보(報)함과 동시에 평정한 지역에 제장(諸將)을 분견(分遣)하여 지계(地界)를 획정하니 동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은 개마산(蓋馬山 ; 백두산) 기슭에 뻗쳤으며 남은 장·정 2주(定平 일대)에 접하여 사방 300리의 광대한 지역이었다. 윤관은 다시 이 지역을 영원히 확보하기 위하여 역내 중요한 곳에 9성을 쌓고 남계민(南界民)을 그곳에 옮겨 채웠던 것이다.
9성의 위치를 상고하여 보면(이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주로 「고려사지리지」에 의거키로 함)
① 영주(英州 ; 길주 부근인 듯하나 安嶺軍英州防禦使,兵民 1, 238丁戶에 護國仁王, 領東普濟의 2절을 창건하였음),
② 웅주(雄州;또한 길주 부근인 듯 寧海軍 웅주방어사, 병민 1,436정호),
③ 복주(福州;端川이니 복주방어사, 병민 632정호),
④길주(吉州 ; 길주니 길주방어사, 병민 680정호),
⑤ 함주(咸州 : 함홍이니鎭東郡 咸州大都督府, 병민 1,948정호),
⑥ 공험진(公嶮鎭;孔州 또는 匡州라 하여 지금의 경흥의 땅이라고 전하거니와 일설에는 春嶺 동남 백두산 동북에 있다고도 하고 또는 蘇下江가에 있다고도 하여 위치가 적확하지 아니함. 공험진 방어사에 병민 532정호를 두었음) 등 6성에 통태(通泰), 진양(眞陽), 숭녕(崇寧)의 3성을 더한 것이 유명한 윤관의 9성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윤관은 여진 방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의주(宜州;德源), 평융(平戎), 선화(宣化) 등 성을 쌓았고 다시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표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윤관의 의기가 어떠했음은
“고구려가 전에 잃은 땅을 지금 임금이 뒤에 찾았다."(윤관이 그의 막료 林彦을 시켜 그의 공적을 英州 벽에 銘記한 記文 중에 보이는 문구)
한 것과
“(이 사실을) 史冊에 서(書)하여 빛을 무궁(無窮)에 드리워지이다.”(당시 윤관이 드린 表에 보이는 문구)
라 한 것으로도 추찰(推察)할 수 있는 바이거니와 그의 웅대한 도략(圖略)과 신속한 경영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케 하는 것이다.
일방(一方)에 윤관의 급속한 공격으로 그의 소굴을 잃은 여진인들은 주야로 보복을 도(圖)하여 기회를 엿보아 발호(跋扈)하며 완안씨(完顔氏)도 또한 그들에게 복속되었던 지방이 고려에 돌아가매 무력으로 항쟁코자 하여 먼저 보기(步騎) 2만으로 영주성 남쪽에 내둔하였다. 이에 대하여 병마녹사(兵馬錄事) 척준경이 결사대를 인솔하고 성을 나와 영격(迎擊)하여 패주시켰으며 다시 여진군 수만이 웅주성(雄州城)을 포위하매 병마판관 최홍정이 사졸을 격려하여 사문을 열고 일제히 나와 적을 대파하여 부참(俘斬)2)과 노획(鹵獲)3)이 다수에 달하였다.
2)부참(俘斬):포로로 하거나 베어 죽임.
3)노획(鹵獲): 적의 군용품 따위를 빼앗아 얻음.
그리하여 윤관, 오연총 양원수가 광영(光榮)의 환영 속에 송경(松京)에 개선하기는 익 3년 4월 9일이었거니와 이에 앞서 예종은 윤관에게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를 제수하여 그의 위업을 포장(褒獎)하였다.
윤관 등이 개선하자 여진은 또다시 웅주를 내공(夾攻)하매 동월 23일에 부원수 오연총이 출정의 명을 받아 웅주에 부(赴)하여 5월 4일에 적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그의 내침은 끊이지 않으므로 동년 7월에 행영병마원수 윤관이 다시 여진 재정(再征)의 길에 올라 상당한 전과를 거두어 익 8월에 괵(馘)4) 31급을 헌(獻)하였으며 익월에 이르러 윤관은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식읍(食邑) 2,500호 식실봉(食實封) 300호에 봉하게 되었다. 그때에 여진의 내습은 끊이지 않아 양방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며 길주가 또 포위되었으므로 약 4년 4월에 오연총의 제3차 출정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오연총은 5월에 공험진에서 적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하매 원수 윤관이 또다시 길주로 출동하여 진어(鎭禦)에 당하였다.
4)괵(馘):목벰.
9성 역내에서 구축을 당한 여진부락의 곤궁은 물론이거니와 완안부의 우야소도 오랫동안 고려와의 싸움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할 수 없이 고려에 향하여 화(和)를 빌어 평화적으로 9성 환부를 받고자 동년 6월에 우야소는 분불사현 등을 보내왔다.
고려에서도 9성의 방어에 적지 않은 손실을 보았으며 또 9성은 서로 거리가 요원한 위에 적의 초략(抄略)에 비(備)코자 조병(調兵)이 다단(多端)하므로 중외(中外)가 소연(騷然)하던 것이다. 예종은 동월 하순에 재상과 대간(臺諫) 6부를 소집하여 9성 환부의 가부를 의논할새, 당시 조정에는 태평에 젖어 현상에 구안(荀安)하려는 퇴폐사상을 가진 자가 많으므로 환부를 가하다 하는 자는 최홍사(崔弘嗣) 등 28인임에 대하여 불가를 주장하기는 겨우 박승중, 한상(韓相) 2인뿐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신중을 기하여 다시 분불사현 등을 불러 그들의 의향을 듣기로 되었던 것이니 분불사현 등은
“우리의 전태사(前太師) 영가와 현 태사 우야소는 모두 대방(大邦)을 부모국으로 알아 왔으니 만일 9성을 돌려주면 하늘에 맹세하고 세세자손이 세공(歲貢)을 각수(恪修)5)할지며 와력(瓦礫)6)이라도 경상(境上)에 던지지 않을 것이라.”
고 말하였다.
5)각수(恪修): 정성스럽게 닦음.
6)와력(瓦礫): 기왓돌 부스러기.
그리하여 예종은 그 익월 을사에 다시 문무 3품 이상을 선정전(宣政殿)에 모아 9성 환부를 정식으로 결정하고 분불사현 등을 불러 그 뜻을 통고하는 동시에 전선에 있는 원수 등에게 통지함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과 동월 신유에 행영병마별감승선(行營兵馬別監承宣) 최홍정과 병마사이부상서 문관이 입회하여 여진 추장 등으로 하여금 함주성 문 밖에 단을 모아 세세자손이 악심을 품지 않고 연년이 조공(朝貢)할 것을 하늘에 맹세케하고 드디어 길주로부터 점차로 9성을 철수하여 전구(戰具)와 자량(資糧)을 내지로 옮길새 여진인들은 즐거워하여 그들의 우마(牛馬)로써 우리 인민의 유기한 것을 수송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윤관이 종생(終生)의 힘을 기울여 이루었던 구강 회복의 위업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것이니 이는 고려사상의 일대 통한사(痛恨事)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후일 여·금의 국교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믿는 바다. 우야소의 아우 아구타(阿骨打)가 세운 금제국(金帝國)의 세력은 오랫동안 동아를 휩쓸었으나 고려에 대하여는 그다지 큰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더우기 동북경은 전보다도 평온상태를 지속하였으니,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로되 특히 윤관의 여진 정벌은 그들로 하여금 고려의 세력이 만만치 아니한 것을 알게 하였으며, 또 고려는 일단 회수하였던 9성 지방을 환부해 주었으므로 그들은 이에 대하여 감사한 생각을 잊지 아니한 것이 중대한 원인이 아닐런가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최홍사, 김연(金緣) 배(輩)가 9성 환부에 기세를 얻어 다시 윤관을 탄핵하는 추태가 나타났으나 그들의 구실은 소위 무명의 사(師)를 일으켜 국가를 해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우(腐迂)7)한 무리의 열렬한 주장에 예종도 부득이하여 짐짓 윤관의 관직과 공신호를 삭탈하였다.
7) 부우(腐迂):부패하고 느림.
그러나 예종은 처음부터 그의 충량(忠亮)함을 믿고 있었으며 그의 위업을 가상히 생각하였으므로 뒤이어 간곡히 그를 돈유(敦諭)8)하여 고사함에도 수태보문하시중(守太保門下侍中), 판병부사(判兵部史)를 제수하였다.
8) 돈유(敦諭):임금이 의정(議政)과 유현(儒賢)에게 면려를 권하는 말.
예종 6년 5월에 졸하매 문경(文敬;뒤에 文肅으로 고쳤음)의 시(諡)를 사하고 인종 8년에 이르러 예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인종시대에 입원칭제론자(立元稱帝論者)로 유명한 윤언이(尹彦頤)는 그의 제4자니 당시에 김부식, 정지상과 문명(文名)을 다투던 문학가이며 묘청의 난에는 김부식의 막료로서 자못 군공(軍功)을 세웠었다(김부식은 사감으로써 드디어 그를 좌천시켰음). 윤언이는 일찍부터 조가(朝家)가 금국(金國)에 굴종하는 것을 분개히 여겨 열렬히 입원칭제, 즉 고려에도 연호를 세우고 제호(帝號)를 쓰자고 주장하였으니 여진을 공파하여 국위를 선양한 윤관의 기개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한글 文章 > 조선명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36.고려-정지상(鄭知常) (0) | 2023.05.07 |
---|---|
35.고려-의천(義天) (2) | 2023.05.05 |
33.고려-문종(文宗) (2) | 2023.05.05 |
32.고려-최충(崔沖) (0) | 2023.05.05 |
31.고려-강감찬(姜邯贊) (0) | 202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