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玄相允)
1893∼?. 신소설가, 사학자, 교육자. 호 기당(幾堂). 평북 정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의 1인으로 독립운동에 참가. 광복 후 서울대 예과부장을 거쳐 고려대 초대 총장 역임. 6·25 남침 중에 납북됨. 신소설 「한(恨)의 일생」, 「박명(薄命)」과 저서에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등이 있음.
1. 내력
태조의 성은 왕씨요 휘(諱)는 건(建)이요 자는 약천(若天)이니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 사람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장자요 모는 한씨이니, 턱이 네모지고 이마가 넓으며 어음(語音)이 홍대(洪大)하고 기도(器度)1)가 웅심하며 성품이 관후하여 제세(濟世)의 양(量)이 있었다.
1)기도(器度):재능과 도량.
17세 때에 궁예(弓裔)에게 나아가니 예가 철원군 태수를 삼았다. 그 후에 예의 명을 받아 각지를 공략하여 자주 대공을 세우고 또한 때때로 안변척경(安邊拓境)의 책을 진언하니 예 크게 기뻐하여 날로 중용하였다.
그러나 때에 궁예가 날로 교학(驕虐)하고 잔인하여 부하를 살해함이 많더니 태조가 이것을 보고 화단(禍端)이 미칠까 두려워하여 항상 곤외(閫外)2)에 있기를 원하여 한갓 근신을 힘쓰셨다.
2) 곤외(閫外): 문 밖 또는 성 밖. 조정의 밖 또는 출정군을 말함. 閫:문지방
하루는 궁예가 태조를 불러 노목숙시(怒目熟視)하다가 아연히 물어 가로되
“경이 작야(昨夜)에 중인(衆人)을 모아 가지고 반(叛)을 도모함은 하고(何故)이뇨.”
한대 태조 안색이 자약(若)하여 웃으며 대답하여 왈
“어찌 그럴 리가 있으리이까.”
한즉 예왈
“경은 나를 속이지 마라. 내 능히 사람의 마음을 보아 아는 바로라. 내 장차 정신을 모아 그 일을 역력히 말하리라.”
하고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얼마동안 있거늘 이때에 최응(崔凝)이 옆에 있다가 태조에게 귓속말을 하매 태조 또한 깨닫고 대답하여 왈
“신이 실로 모반한 일이 있읍니다. 죽은 죄를 지었나이다.”
한즉 예 대소 왈
“경은 과연 솔직한 사람이라.”
하고 도리어 태조를 상주었다.
2. 등극
처음에 궁예가 군도(群盜) 중에서 굴기(倔起)3)하여 사방의 초적을 이멸(夷滅)하고 요좌(遼左)를 3분하여 그 태반을 거유(據有)하고 나라를 세우며 도읍을 정하고 제도 문물을 갖추어 그 규모가 가히 볼 만한 것이 있었다.
3) 굴기(倔起):몸을 일으켜 출세함.
그러나 말년에 미쳐 공신을 시기하며 또한 음학하여 처자와 부하를 살해하므로 인심이 이반(離叛)하여 다시 현주(賢主)의 출현함을 바라더니 궁예 18년 6월에 태봉장(泰封將)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시중(王侍中 ; 태조)의 집에 야회(夜會)하여 추대를 밀모할새 부인 유씨에게 이 모의를 비밀히 하기 위하여 원중(園中)에 나가 신과(新瓜)를 따오라 한대 부인이 눈치를 채고 거짓 나가는 체하고 장중에 숨어서 엿듣더니 제장(諸將)이
“폐혼입명(廢昏立明)은 천하의 대의니 청컨대 명공은 은주(殷周)의 고사를 행하소서.”
하고 태조에게 혁명을 권하나 태조는 굳게 사양하여 응치 아니하거늘 유씨 갑자기 장중으로 나오면서 태조에게 향하여
“지금 제공의 말을 들으니 나도 오히려 분발하거든 하물며 대장부리이까. 이제 중망(衆望)을 좇지 않으면 이것은 천의를 위반함이니다.”
하고 손으로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니 제장이 또한 붙들어 일으켜 곡식더미 위에 올라앉게 하고 군신의 예를 행하고 만세를 부르며 이 뜻을 사방에 광포하니 분주히 와서 취회(聚會)하는 자 만여 인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태조가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고려라 정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칭하니 이때 태조의 춘추가 42세였다.
궁예는 이 사변을 듣고 놀라서 미복으로 북문으로 나가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였다가 수일 노숙한 후에 주림이 심하여 맥수(麥穗)를 절식(竊食)4)하더니 이윽고 부양(斧壤; 지금의 철원) 농민에게 살해된 바 되었다.
4)맥수(麥穗)를 절식(竊食): 보리 이삭을 몰래 훑어먹음.
3. 내치
태조 즉위한 익년에 국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관제와 조세를 정하여 정형(政刑)을 간명히 하며 부렴(賦斂)을 박하게 하여 궁예 말년의 악정과 구폐를 일거하고 선을 권하며 악을 징계하고 업을 힘쓰게 하며 산(産)을 일으켜 오로지 민력 휴양에 힘썼다.
일방으로 태조는 군신(群臣)에게 말하여 왈
“평양은 고도라, 황폐가 이미 오래여서 형극(荆棘)이 자무(滋茂)5)하여 번인(蕃人)이 그간에 유렵하고 또한 인하여 침략을 행하니 마땅히 이민을 행하여 그 지방을 채우고 또한 개척하여 써 번병(藩屛)을 굳게 할 것이라.”
하고 드디어 평양성을 수축하며 또한 황봉해 백염 제주(黃鳳海 白鹽諸州 ; 지금의 황해도) 인민을 이민하여 평양 부근을 채우고 평양을 서경이라 하고 군병과 대관(大官)을 주재케 하며 연년이 태조가 친히 순행(巡幸)6)하였다.
5) 자무(滋茂): 몹시 무성함.
6) 순행(巡幸): 거둥. 임금의 행차.
태조 또한 불교를 숭신하여 매해 중동(仲冬)에 팔관회(八關會;一曰 不殺生 二曰 不偸盜 三日 不淫佚 四曰 不妄語 五曰 不飮酒 六日 不坐高大床 七曰 不著香華 八日 不自樂觀聽)를 행하며 법왕(法王), 왕륜(王輪) 등 10사(寺)를 도내에 창립하고 양경(兩京)의 탑상을 수축하여 일변으로 자기와 자손의 계칙7)에 자(資)하며 일변으로 군국의 복을 빌었다.
7)계칙:경계하여 타이름.
또한 태조는 북계를 순행하여 진국성(鎭國城)을 수축하였다.
4. 국내의 통일
이때에 태조 비록 태봉의 영역과 평양 일대의 땅을 영유하였으나 삼한을 통일함에는 아직도 2개 대국이 남았으니 하나는 신라요 하나는 후백제라. 태조 비록 후백제의 견훤으로 더불어 자주 전진(戰陣)에서 친히 서로 대하며 혹은 장졸을 파견하여 연년이 교전하였으나, 홀로 신라에 대하여는 그 국력이 미약하여 감을 긍측(矜惻)하게 보아 도리어 보호하는 태도를 취하고 결코 침략의 정책을 취하지 아니하더니, 신라 경애왕 4년 10월에 견훤이 신라의 왕도(지금 경주)에 침입하여 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강욕(强辱)하고 군병을 놓아 도성을 약탈케 하여 부하로 하여금 왕의 빈첩을 겁난케 하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경순왕)을 삼고 왕의 아우와 재신을 사로잡아 가지고 자녀 백공(百工)과 병복진보(兵伏珍寶)를 약취하여 가지고 돌아가거늘 태조 이것을 듣고 대단히 신라를 동정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를 구원하다가 견훤을 공산(公山)의 오동나무숲에서 만나 크게 싸워 이(利)치 못하여 전군이 패주하고 대장 신숭겸이 전사하고 태조 겨우 몸만 면하였다.
그후 수년을 지난 태조는 신라 경순왕의 청에 응하여 신라의 국도에서 신라왕으로 더불어 회견하더니 임해전(臨海殿)에서 연음(飮)할새 신라왕이 왈
“소국이 불운하여 견훤에게 수욕을 당하였으니 이런 분한 일이 어디 있으리오.”
하고 현연8)히 낙루하거늘 좌우 또한 오열치 않은 이 없는지라.
8)현연(泫然):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양.
태조 또한 낙루하면서 위자(慰藉)하고 수순(數旬)을 유 한 후에 환국할새 신라왕이 혈성(穴城)까지 송별하더라. 이때에 태조가 솔래(率來)한 위병(衛兵;50여騎)이엄숙하여 추호도 지나는 바에 범함이 없으니 이것을 본 신라 인민들은 말하기를
“전자 견훤씨가 왔을 때에는 시랑(豺狼)을 만나 것 같더니 금일 왕공의 옴에는 부모를 만난 듯하다.”
고 하더라.
태조 견훤으로 더불어 해마다 싸워 혹 승 혹 패하더니 태조 18년 6월에 견훤이 그 아들 신검(神劍)의 반란으로 인하여 도망하여 고려로 오니 태조 후례로써 대접하고 상부(尙父)라 칭하여 남궁에 거하게 하였다.
처음에 견훤이 첩잉9)이 많아 아들 10여 인을 두었더니 제4자 금강(金剛)이 몸이 장대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훤이 특히 사랑하여 그 위를 전코자 하니 그 형 신검,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이 이 눈치를 알고 우민(憂悶)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그 아비 훤을 금산불당(金山佛堂)에 유폐하고 그 아우 금강을 죽이고 스스로 서서 후백제왕을 일컫더니 훤이 금산에 석 달 동안을 갇혀 있다가 수졸(守卒) 30여 인을 음취케 하고 계남(季男) 능입(能入)과 딸 애복(福)과 첩 고비(姑比) 등을 데리고 달아나 나주에 갔다가 사자를 보내어 태조에게 뵙기를 청하니 태조 허하고 장군 유금필(庾黔弼) 등을 보내어 해로로 영접하여 온 것이었다.
9)첩잉(妾媵):신부를 따라 그의 시가에 가서 첩실이 되는 것. 첩부(妾婦)라고도 함.
이해 10월에 신라 경순왕이 또한 고려에 내항하니 태조가 이것을 받고 왕을 유화궁(柳花宮)에 처하게 하고 장녀 낙랑공주로 처를 삼아 주며 왕을 낙랑왕(樂浪王)이라 칭하였다. 이때에 신라왕이 국세 미약하여 오래보전치 못할 것을 알고 군신으로 더불어 고려에 투항하기를 의논할새 왕자 굳게 반대하여 왈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로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죽기로써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둘 것이니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경(輕輕)히 남에게 주리이까.”
하였으나 왕은 국세의 위약함이 이같으니 보전키를 바랄 수 없는 것인즉 공연히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10)케 함은 나의 차마 못할 바로다 하고 중의를 수합하여 고려에 투항한 것이다.
10) 간뇌도지(肝腦塗地):참살을 당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엎질러졌다는 나라일에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다함을 이름.
이때에 신라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께 배사(拜辭)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서 마의초식(麻衣草食)으로 그 몸을 마치니 이것이 세(世) 소칭 마의태자(麻衣太子)이다.
익년 9월에 태조 후백제를 친정하니 신검이 항복하는지라. 태조 후백제 도성에 들어가 최초에 신검으로 하여금 모반을 권한 능환(能奐)을 참살하고 신검은 그 참위(僭位)가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여 특히 그 죄를 후(厚)하여 주고 인민을 위무하고 정령(政令)을 엄명히 하니 민심이 흡연하였다. 이때에 견훤은 태조를 도와 신검을 치다가 황산 불사에서 병사하였다.
5. 외교
태조가 이같이 국내 통일에 전력하는 동안에 북방에서는 동종국인 발해가 몽고족인 거란에게 침략을 받아 마침내 멸망을 당한 일이 있는데(태조 9년) 태조는 이것을 크게 유감으로 여겨 발해 세자 대광현(大光顯) 이하 문무대관과 민중 수만 호의 내분(來奔)한 이들을 후대하여 각각 관작과 직업을 주어 국내에 안도케 하였다.
그후에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친호를 구하고 폐물(幣物)로 낙타 50필을 드리거늘 태조는 거란이 일찌기 발해를 무도하게 멸망한 나라라 하여 그 교빙(交聘)을 사절하고 그 사자 30인을 해도에 유찬하고 낙타를 만부교(萬夫橋) 밑에 얽매어 두어 아사케 하였다.
6. 수훈(垂訓) 11 )
11) 수훈(垂訓):후세에 전하는 교훈.
태조가 이미 삼한을 정한 후에 신자(臣子)에게 절의를 장려코자 하여 드디어 정계(政誡) 1권과 백료(百僚)를 경계하는 서(書) 8편을 자제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만년에 다시 태조는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친히 「훈요십조」를 주면서 기술케 하여 왈
“내 한미(寒微)에서 일어나 외람되이 추대를 받아 하절에는 더운 것을 꺼리지 않고 동일(冬日)에는 추운 것을 피하지 않으며 노신초사(勞身樵思)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나 나는 지금 몸이 늙었도다. 후사가 종정사욕(縱情肆欲)12)하며 강기(綱紀)를 패란하여 전서(前緖)를 실추할까 두려워하므로 지금 훈요십조를 기술하여 후에 전하노니 후사는 조석으로 피람(披覽)하여 길이 귀감을 삼으라.”
12) 종정사욕(縱情肆欲):감정에 치우치고, 욕심이 극에 다다름.
그 훈요에 왈
① 우리 국가 대업이 제불(諸佛) 호위의 역(力)을 믿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므로 선교(禪敎) 사원을 창립하고 주지를 두어 분수(焚修)13)할 방법을 세워둔 것이 있으니 후세에 서로 환탈이 없게 할 일.
13) 분수(焚修):향을 피우고 도를 닦음.
② 제 사원은 다 도설(道說)의 추점(推占)한 것이니 후세에 망령되이 증설하면 한갓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할 터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힘쓸 일.
③ 적자적손이 전국전가(傳國傳家)하는 것이 비록 상례라 하나 단주(丹朱) 불초하매 요(堯), 순(舜)에게 선양함은 실로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니 원자 불초하거든 차자에게 주고 차자 불초하거든 그 형제 중에서 군하(群下)가 추대하는 자로 대통을 비승케 할 일.
④ 우리 동방이 오래 전부터 당풍(唐風)을 모방하여 예악 문물이 그 제도를 따름이 많으나 나라가 다르고 인성이 또한 부동하니 반드시 구차히 모방할 필요가 없는 것이요, 거란은 금수의 국이니 의관제도를 삼가 효칙(效則)치 말 일.
⑤ 짐이 삼한 삼천의 음우(陰祐)를 받아 대업을 이룬 것이니 서경(西京)의 수덕(水德)을 조순(調順)함은 아국 지맥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4중(四仲)에 순주(巡駐)하여 100일을 유과(留過)하여서 안녕케 할 일.
⑥ 연등(燃燈), 팔관을 가감 없이 의행할 일.
⑦ 인군이 민심을 얻기가 곤란하나 민심을 얻는 요령은 종간원참(從諫遠讒)에 있고 또 인민을 부르되 때로 하고 부렴(賦斂)을 박하게 하면 민심을 저절로 얻을 것이요, 또 인민으로 하여금 가색(稼穡)의 간난을 알게 하면 저절로 국부 민안할 것이니라.
⑧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은 지세 인심이 다 간교배역(姦巧背逆)하니 저 아랫녘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하여 정병(政柄)을 잡으면 혹 국가를 변란케 하며 혹 통합의 구원(舊寃)을 펴리니 비록 그 양민이라도 재위용사(在位用事)케 말 일.
⑨ 백관의 녹은 경경히 증감치 말고 또 작록을 사사로이 주는 일이 없게 하며 또 강악한 나라로 더불어 인접하여 있으니 병비(兵備)를 힘써 매년 추(秋)에 반드시 열병을 행할 일.
⑩ 나라나 집이 근심 없을 때를 경계할 것이니 경사(經史)를 널리 보아 고금을 감계(鑑戒)할 것이라. 주공은 대성(大聖)이라 무일(無逸) 1편으로 성왕(成王)을 진계(進戒)하였으니 마땅히 도게(圖揭)하여 출입에 근성(覲省)하라.
이렇게 나열한 후에 각 조마다 다 중심장지(中心藏之) 4자로 종결하였다.
7. 붕어
태조 왕위에 오른 지 26년 만에 붕하니 수 67이요, 통일 후 재위가 8년이다. 임종시에 태조의 병세 위중함을 보고 좌우에 시립하였던 제신들이 실성대곡하니 태조 웃어 왈
“부생(浮生)이 자고로 그런 것이라. 무엇을 슬퍼하리오.”
하고 말을 마친 후에 조금 있다가 붕하였다.
8. 규모와 덕량
궁예 견훤은 태조와 더불어 신라 말년에 있어서 다 같이 위대한 인물이다. 그러나 삼한 통일의 대업이 궁예 견훤에게 되지 아니하고 홀로 태조에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요, 또한 태조의 인물이 예·훤 배(輩)로 더불어 날을 같이하여 비론(比論)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 태조의 인품과 공덕에 대하여 몇 가지를 들어 보건대
첫째는 관후하고 성근(誠謹)하여 호생휼민(好生恤民)이 천성에서 발한 점이니 견훤 부자와 김부 군신에게 처한 것을 보아 이것을 넉넉히 살필 수 있는 것이로다. 우리가 이것을 저 이태조(李太祖)가 왕씨 일족에게 처한 것에 비교하여 보면 양 태조의 인물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국토의 영역을 삼한에 국한치 않고 멀리 생각을 대륙 경영에 달려 고구려의 구업을 회복하려고 힘쓴 점이니 우선 국호를 고려라고 칭한 것이며 자주 서경에 행행(行幸)하며 친히 북변을 순력한 것이며 발해의 멸망을 분히 여긴 것들을 보아 이것은 또한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이것을 저 이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과 명나라로부터는 호령 한마디도 없는데 불구하고 손을 비비며 자진 칭신(稱臣)한 데 비하여 보면 양 태조의 인물이 그 규모에 있어서 어떠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세째는 자주성이 있는 점이니 훈요십조의 제4조에서 예악 문물의 모든 제도를 당풍에 의하지 말고 동방의 특색을 발휘하라고 훈계한 것을 보아 태조의 생각과 주장이 나변(那邊)에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태조에게 오직 한 가지 미흡하게 생각되는 점은 태조가 산수참휘(山水讖諱)의 설을 믿은 일인데 형옥(荆玉)의 하자(瑕疵)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그 당시의 세태와 사조를 생각하여 보면 그 당시의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면치 못할 것이니 과히 태조에게 흠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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