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찬(車相瓚)
1887~1946. 저널리스트, 한시 시인, 수필가. 호 청오(靑吾). 강원도 춘천 생. 보성전문 졸업. 「개벽」의 창간 동인이며 신간 「개벽」의 발행인. 이어 「별건곤(別乾坤)」,「신여성(新女性)」, 「농민」, 「학생」등을 발간. <관동잡영(關東雜詠)〉 등의 한시 및 사화(史話), 수필 등 다수를 발표.
저서에 「조선사 천년비사」, 「해동염사(海東艶史)」, 「조선야담사화전집」등이 있음.
1
신라의 찬란한 황금시대도 어느덧 한 고비를 넘어가고 최후의 인군(仁君)인 제46대왕 문성대왕조차 마저 승하하던 그해 59년 정축이었다(즉 헌안왕 원년=당 선종 대중 11년, 857) (부기의 註 1 참조). 신라의 서울 사량부(沙梁部) 최씨가에는 소소하게 들려오는 계림(鷄林)의 황엽(黃葉) 소리와 아울러서 고고의 소리를 치고 탄생한 영형아(寧馨兒)1)가 있었으니 그는 곧 말년 동방문학에 한 종조(宗祖)가 된 최치원 선생이었다.
1) 영형아(寧馨兒):이렇게 착한 아이. 기린아(麒麟兒)와 같은 뜻으로 쓰임.
그의 자는 홍운(弘雲) 혹은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요, 호는 유선(儒仙)(부기 註 2 참조)이니 치원은 그 이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성질이 정민(精敏)하며 학(學)을 좋아하여 12세 때(경문왕 8년 무자=당의 의종 함통 9년, 868)에 일찌기 상선을 따라 서로 당나라에 유학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떠날 때에 그 부친이 훈계하여 말하되
“네가 당나라에 가서 10년 공부를 하여, 과거를 못 한다면 나의 자식이 아니니 아무쪼록 부지런히 하여 이 아비의 기원(企願)하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공을 이루게 하라….”
하였더니 치원이 명심불기(銘心不忌)하고 당에 들어가서 널리 현사(賢師)를 찾아 한편으로 부지런히 수학을 하는 동시 정신을 수양하기에 또한 힘써(終南山寺에서 申天師에게 소위 內丹 비결을 얻어 仙術을 공부한 것도 그 시대의 일이다) 그의 이른바 팔백기천(八百己千)의 적공(積功)으로 학업이 크게 성취되어 18세 되던 해 즉 당 희종 건부(乾符) 원년 갑오(신라경문왕 14년, 874)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의 검시하에 영광스럽게 탁과(擢科)하고 미구에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으니 때에는 녹후관한(祿厚官閒)하여 수학의 기회가 좋으므로 더욱 연구와 저작에 힘을 썼으니 그의 명작인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 5권을 그때에 이룬 것이요(중산은 그곳 지명을 취함이요 복궤는 爲山九仞에 功虧一簣2)의 의를 취함이다), 6조 사적에 오른 쌍녀분(雙女墳)의 기담(奇談)도 그때에 생긴 일이었다(부기 일화 참조).
▶팔백기천(八百己千): 人百己千(다른 사람이 100번 노력하면 자기는 1,000번을 하라.)의 잘못인 듯. 耽古樓主 註
2)위산구인(爲山九仞)에 공휴일궤(功虧一):아홉 길의 높이를 가진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을 더하지 못하여 이룰 수 없다는 뜻. 일이 완성될 때까지 정성을 다해야 함을 뜻함.
그리고 얼마 아니하여 또 승무랑시어사(承務郞侍御史), 내봉공(內奉公)으로 승차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의 어사(御賜)를 받게 되니 일개 해외 청년으로 일약하여 그러한 영직(榮職)을 하게 된 것은 당대 희귀한 일로 그의 시에 운한 바 “가문의 영광일 뿐 아니라 또한 국가의 영광(不獨家榮國亦榮)”이란 말과 같이 다만 그의 일신 일가의 영광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 해동의 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 후 당나라에는 마침 황소(黃巢)의 반란3)이 일어나서 그 세가 매우 창궐하니 당의 조정에서는 사천절도사(四川節度使) 고변(高騈)으로 제도행영병마도통을 삼아 적을 토벌할새 변은 평소부터 면식이 있고 그 인격과 문예를 추앙하던 선생을 자벽(도통순관(都統巡官)을4)하여삼고 군서서리(軍書署理)의 임을 당케 하니 전후 4년 동안에 선생이 그 군무에 국궁진췌(鞠躬盡膵)5)한 것은 당시 당토(唐土) 인사들을 능히 감격케 하였거니와, 공의 저서 「계원필경(桂苑筆耕)」에 기재된 누천만 언의 표(表), 장(狀), 서(書), 계(啓)는 모두 그때에 지은 명문으로 특히 광명2년(헌강왕 7년 신축 7월 8일)에 지은 〈檄黃巢書〉(전문을 뒤에 실었음)는 그 사의(辭意)가 웅호엄정(雄毫嚴正)하여 마치 추상열일(秋霜烈日)6)의 형작7)의 광(光)을 위압하고 신부용도(神斧勇刀)에 요마(妖魔)의 두(頭)를 斫下8)함과 같은 위엄이 있어 그 중,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드러내 놓고 죽이려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 속의 귀신들도 이미 몰래 죽일 일을 의논했다….”(편집자 역)
한 일구의 명문은 능히 그 완강무비한 황소로 하여금 一讀에 모골이 송연하고 심혼이 경패(驚悖)하여 부지불각에 상(床)에서 내리게 하였다.
3)황소(黃巢)의 반란 : 당나라 말엽에 일어난 농민 반란. 874년 왕선지(王仙芝)가 하북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황소도 산동에서 이에 호응, 왕선지가 패사한 뒤 황소가 그 잔당 및 많은 유민을 받아들여 각지에서 약탈, 사천(四川)을 제외한 거의 온 중국을 소란하게 하여 당나라 멸망의 근인이 되었다.
4)자벽(自辟):장관이 자기의 뜻대로 사람을 천거하여 아래 벼슬자리를 줌.
5)국궁진췌(鞠躬盡膵):국궁은 몸을 숙인다는 뜻이며 췌는 수고로움을 말한다.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한다는 뜻.
6)추상열일(秋霜烈日): 가을의 찬 서리와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라는 뜻으로, 지조·위력 따위가 썩 엄함을 이르는 말.
7)형작:반딧불.
8)작하(斫下): 베어 버림.
그로 인하여 그의 운명은 일시에 천하에 진동하게 되고 따라서 천유여 년을 지난 오늘까지도 내외국인의 화제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2
그러나 선생의 본의는 결코 일개 문예만을 가지고 남의 나라 무인(고변도 사실은 문장가요 무인은 아니다)의 막하에 자복(雌伏)9)하여 소위 ‘전어시 죽어시 '10) 하며 필경생활을 하는 데 있지 않고(선생 所「계원필경」에 있는 일절 인용) 장차 큰 포부와 쌓은 학식을 가지고 금의환국하여 치군택민(致君澤民)11)의 도를 행함에 있었다.
10) 전어시 죽어시:전과 죽은 모두 죽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생계를 여기에 매단다는 뜻.
11) 치군택민(君澤民) :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에게는 은택을 입힘.
그리하여 당 희종 중화(中和) 4년 갑진 10월경에 귀국하기로 결의하고(공년 28=부기의 註1 참조) 귀근계(歸覲啓)12)를 올렸더니 당 희종은 선생으로 송연사(送詒使)13)를 배(拜)하고 친한(親翰)을 주어 귀국케 하고 고변은 또 200관의 전(錢)과 그 외 행장을 후히 판비(辦備)하여 주며, 당시 당의 명사로 고운(顧雲), 양섬(楊瞻;進士), 오만(吳巒;秀才), 장상서(張尙書;이름 미상) 등 여러 명사들은 모두 석별의 시를 지어 선생에게 주었으니 그 중 고운은 선생과 동년으로 가장 친하게 지내던 터로 특히 선생에게 아래와 같은 별시(別詩)를 주었다.
12)歸覲啓:귀국을 허락해 달라는 장계
13)送詒使:사신의 일종
“내가 듣기로는 바다 위에 세 마리의 금자라가 있어
금자라 머리에 높고 높은 산을 이고 있다네
산의 꼭대기에는
구슬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궁전이 있고
산의 밑에는 천리 만리의 넓은 물결이라
가장자리엔 한 점 계림 숲이 푸르고
자라산(금오산)이 수재를 잉태하여 낳으니
열 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고
열 여덟 살에 과거장을 뒤흔들어
한 화살로 궁궐문을 깨뜨렸다네" (편집자 역)
또 선생은 중도 풍랑을 만나 체류하는 중 촉목(觸目)의 즉흥시로 석봉(石峰), 조랑(潮浪), 사정(沙汀), 야소(野燒), 두견(杜鵑), 해구(海驅), 산정위석(山丁危石), 석상왜송(石上矮松), 홍엽수석(紅葉樹石), 상류천(上流泉) 등 10수의 명시를 지어 고원(高員) 외에게 기(寄)하고 또 별지 5수의 문을 고태위(高太尉 ; 고변)에게 보냈었다.
그는 그렁저렁 중도에서 겨울을 지내고 그 익년 을사(희종 중화 5년=光啓 원년=신라 헌강왕 11년)의 봄에 고국에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특히 그를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 兼 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郎), 지서서감(知瑞書監)의 요직을 배(拜)하였으나 때는 신라의 국운이 이미 쇠미하여 정치가 문란하고 조정에는 이 군소배(群小輩)가 가득하여 선생의 포부와 이상을 도저히 실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선생의 일언일동을 모두 시의 질시하게 되니 시세를 잘 관찰한 선생은 내직에 안심하고 오래 있지 못할 것을 깨닫고 관한무사(官閒無事)한 지방관으로 떨어져 혹은 태산군(太山郡;지금 泰仁), 혹은 함양군(咸陽郡), 혹은 부성군(富城郡 ; 지금 瑞山)태수가 되었었다. 그후 진성여왕 7년 계축(당 昭宗 景福 2년, 893)에 신라에서는 납선절사병부시랑(納旋節使兵部侍郎) 김처회(金處誨)를 당에 사송(使送)하였는데 항해 중도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하게 되니 조정에서는 즉시 혜성군(충남면천) 태수 김준(金峻)으로 고주사(告奏使)를 삼고 또 당시 그 인군(隣郡)인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는 선생으로 하정사(賀正使)를 삼아 당에 가게 명하였으나 때마침 여러 해 흉년이 들고 도처에 도적이 많아 도로의 통행이 위험하므로 중지가 되고 또한 그 후에 다시 당에 사행으로 갔었으나 그 연대는 기록이 없어 가고(可考)치 못하겠고 다만 그 문집에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이란 그때 지은 글만 남아 있다고 「삼국사기」본전·에 기재되었다(원문은 뒤에 실었음).
그리고 진성여왕 8년 갑인(후백제 견훤왕 3년, 당 昭宗 乾寧 원년) 춘2월에는 시무십여책(時務十餘策)을 올렸더니 왕이 가납(嘉納)하고 아찬을 배하였으나 때에는 신라의 국정이 더욱 문란하여 궁중에는 소위 대각간(大角干) 위홍(魏弘)이 무상출입하며, 국권을 천롱(檀弄)14)하여 갖은 추행과 갖은 악정을 자행하고 사방에는 도적이 봉기하는 중 남의 견훤과 북의 궁예는 강대한 병력으로 넓게 국토를 점탈하고 날로 신라를 침략하여 들어오니 국보(國步)15)의 위태함과 인민의 곤고(困苦)함이 아주 형언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을 비관한 선생은 다시 조로(朝路)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산수간으로 방랑하며 혹은 대사16)도 영건(營建)하고 혹은 송죽도 심으며(쌍계사에는 그가 손수 심은 老槐가 있다) 서사(書史)를 침자(枕籍)17)하고 소풍농월(嘯風弄月)하기와 휘호농필(揮毫弄筆)하기로 일삼으니 그중에 가장 많이 유서(遊棲)하던 곳은 경주의 금오산(남산)과 강주(剛州)의 빙산(山)과 협주(陝州)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 쌍계사, 금포(金浦 : 창원)의 월영대(月影臺 ; 별장이 있음), 동래, 해운대 등이었다.
14)천롱(檀弄): 국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듦. 擅國
15)국보(國步): 나라의 운명
16)臺寺: 정자
17)枕籍: 책을 베개 삼음
그리고 최후에는 다시 가족까지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서 그 모형(母兄) 부도현준(浮屠賢俊)과 정현사(定玄師)와 더불어 도우(道友)의 교(交)를 결하고 둔세불출18)하였으니 (그때에 공이 경주 금오산 북쪽 書莊에서 고려 태조에게〈鷄林黃葉,鵠嶺靑松〉의 서를 보내고 見忌하여 입산하였다 운함) 세상에서 흔히 구전하는 그의 입산시 (入山詩)에
“스님아!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오
산이 좋으면 무슨 일로 다시 나옵니까?
다른 날 내 종적을 지켜보시오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편집자 역)19)
라 한 것은 그가 한번 입산하면 다시 출산치 않을 결심을 보인 것이요, 홍류동 계석(溪石) 위에 자작 자제(自作自題)한
“광분한 돌들이 뭇 언덕을 쪼으니
지척간의 사람소리도 분별키 어려워라
다투는 소리가 귀에 이를까 저어하여
흐르는 물을 가르쳐 귀머거리산(聾山)에 닿으라 하네” (편집자 역)20)
시는 이 세상의 시시비비를 모두 이외(耳外)로 돌리고 다만 자연과 놀고 자연과 즐겨하는 고결청정의 출세간적(出世間的)21) 지개(志槪)를 보인 것이다.
18)둔세불출: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 삶
19)“僧乎莫道靑山好 山好何事更出山 試看他日吾踪跡一靑山更不還”
20)“狂奔疊石啄重巒 人語難分尺間 或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聾)山”
21) 출세간(出世間): 불교 용어로, 세속을 떠난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세상과의 교제를 끊고 세상사에 초연한 경지를 뜻한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쌍계사에 있을 때에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지어준 시에 ( 「동국여지승람」참조)
“종일 머리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사람마다 말하는 마음 어렵다 하네
멀리 속세가 비록 기쁘나
다투는 바람이 그치지 않네
그림자는 맑음을 다투고 노을은 붉은 잎을 좇아
소리는 밤비를 이어 흰구름 사이에서 노는구나
혼을 좇아 경치를 대하니 굴레가 없고
사해는 깊고 마음은 더욱 편안하네" (편집자 역)22)
라 한 것은 그가 둔세 원리하여 수구침묵(守口沈默)하며 날마다 글씨쓰기와 시 읊는 것으로 일삼은 것을 또한 말한 것이다.
22)“終日低頭弄筆端 人人口話心難 遠離塵世雖堪喜 爭奈風情未肯蘭 影鬪晴霞紅葉經 聲連夜雨白雲間 吟魂對景無羈絆 四海深機憶道安”
그는 가야산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세월을 보내다가 하루는 남모르게 어디로 가버려서 종적을 알 수 없게 되고 다만 그의 사진(초상)이 취독서당(吹讀書堂)에 남아 있어서 운염옥협(雲髥玉頰)23)이 평소와 같고 그 위에는 항상 백운(白雲)이 가리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선화(仙化)하였다고 한다(「大東聯珠詩格」참조).
23) 운염옥협(雲髥玉頰):구름 같은 수염과 옥 같은 뺨의 뜻으로 고귀한 용모를 뜻함.
그러나 어떤 기록에는 그의 묘소가 지금 홍산(鴻山)에 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현종 11년 경신에는 왕이 선생에게 내사령(內史令)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문묘에 종사케 하였으며 동왕 14년 계해 5월(혹은 13년임술)에는 또 문창후(文昌侯)로 증시(贈諡)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그가 일찌기 왕건 태조에게(등극 전) 소위 <계림황엽 곡령청송〉이란 글을 보내 신라가 쇠망하고 고려가 신흥할 것을 예시하여 고려의 왕업을 암조(暗助)한 공이 있으므로 현종이 그 공을 생각하고 추작 추시(追爵追諡)하였다고 하나(「삼국사기」본전에도 역시 그리 말하였다) 그것은 일종 억측에 불과한 말이요, 사실은 왕이 그의 동방문학에 큰 공헌이 있는 것을 추창(追彰)함이니 그것은 그때에 설총에게도 홍유후(弘儒侯)를 추봉한 일을 미루어 보아도 족히 알 것이다.
그리고 광해조 을묘에는 그가 태수로 있던 전라도 태인(즉 太山郡)에 무성서원(武城書院)을 건(建)하고 숙종 병자에 사액하였으며(申潛, 丁克仁, 宋世林,鄭彦忠,金若默,金灌과 함께 配享) 현종 경술에는 경남 함양에 백연서원(柏淵書院)을 건하여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같이 배향하고(함양은 신라 때 天嶺郡이니 공이 태수로 있을 때 堤植林한 치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보다 앞서 명종 신유에는 경주에 서악서원(西岳書院)을 건하고 설총, 김유신과 같이 배향하며 (인조 계해 사액) 또 지리산 쌍계사에는 선생의 화상을 봉안하였다.
3
선생은 소년시대로부터 문학을 매우 좋아하였으니만큼 거기에 대한 공부가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저작도 또한 많았으며, 그가 저술한 「계원필경」자서(自序)에 의하면 그는 당에 가서 득과하던 시대 (17~18세 시대)에 정성(情性)을 풍영(諷詠)하며 우물성편(寓物成篇)하여 왈부왈시(曰賦曰詩)한 것이 거의 상협(箱篋)24)에 가득찼었으나 아직 年淺한 탓으로 출판하기가 미안하여 모두 버려 버리고 동도(東都)에 낭적(浪跡)하여 필(筆)로 반낭(飯囊)25)을 삼을 때(賣文생활시대)에 5언시 100 , 잡시부(雜詩賦) 30수를 합하여 3편을 이르고 선주 율주현위(慄州縣尉)가 되었을 때에는 관한식포(官閒食飽)하여 배우는 나머지에 공사 소위(公私所爲)의 작(作)을 모아서 5권을 만들되 위산(爲山)의 지(志)를 더욱 힘쓰기 위하여 복궤(覆蕢)라 이름하고 (위산구인에 공휴일궤의 뜻을 취함) 중심의 지호(地號)로 그 관(冠)을 수(首)하며(「中山覆蕢集」의 의의) 또 회남(淮南)에 종직(從職)하여 고시중(侍中) 군서위임(軍書委任)을 맡아보던 4년 동안에(都統巡官시대) 용심(用心)한 것이 1萬有餘 수에 달하였으나 그것을 도지태지(淘之汰之)26)하여 이룬 것이 이른바 「계원집(桂苑集)」20권인데 때마침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에서 우식(寓食)27)하여 소위 전어시 죽어시한 까닭에 '필경'이라 제목하였다 하고, 또 권두에 그 소저한 것을 구록(具錄)하되
“사사로이 시험한 금체부(今體賦) 5수 1권, 5언 7언 금체시 100 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계원필경집 1부 20권”
이라 하였다(당 희종 중화 5년 정월, 광계 원년=신라 헌강왕 11년 을사=즉 공이 귀국하던 해에 撰進하였다).
24) 箱篋: 상자
25) 반낭(飯囊):밥주머니. 무능하고 하는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 여기서는 생계 수단의 뜻.
26) 도지태지 (淘之汰之):가려서 좋은 것만 뽑음.
27) 우식(寓食): 남의 집에 붙어서 밥을 얻어 먹음.
이 저서는 우리 동방인의 최초 대저서로 「신당서」 예문지(藝文誌)에는 운하되
“최치원은 고려인이니 공빈28) 급제(貢賓及第)로 고변의 회남종사가 되어 사륙(四六)29) 1권과 「계원필경」20권을 저(著)하였다.”
하고 「통지예문략(通志藝文略)」에는 또 운하되
“최치원은 당인(唐人)이니 사륙 1권을 저하고 또 「계원필경」 20권은 당 치원의 표, 전(牋), 문(文), 격(檄).”
이라 하였은즉 역대 지나인들이 얼마나 그의 저서에 착목한 것을 가지(可知)하겠고 따라서 우리로서 한 자랑거리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이 찬한 「삼국사기」 선생의 본전에 의하면 상기 저서 외에 30권의 문집이 있어서 세(世)에 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석하게도 그것이 모두 전치 못하고 지금에는 다만 「계원필경」과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이 남아 있을 뿐이다.
28) 공빈(貢賓):빈공(賓貢). 당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보이던 과거.
29) 사륙(四六): 한문 문체의 하나인 변려문, 4언과 6언을 번갈아서 말을 아름답게 만들었음.
공의 문체는 당시 지나 문단에서 크게 성행하던 소위 변려46체(騈儷四六體 즉 六朝체)를 본뜬만큼 대개가 변려46체이나 가위 靑藍 氷冷30)으로 당시 지나인의 문처럼 구차한 기교를 가하거나 한갓 문필에 흘러서 그 전화(典畫)한 정(情)을 실(失)하는 통폐(通弊)가 없고 문장이 염려(艶麗)31)하고도 사의(辭)가 창달자재 (暢達自在)하여 엄연하게 독특한 일가를 이루었다.
30) 청람(靑藍) 빙랭(氷) : 「순자」전학편에 나오는 글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일컫는 말. “靑出於藍而靑於藍 永出於水而冷於水”의 준말.
31) 艶麗: 고움.
특히 숭복사비(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명(智證大師寂照塔碑銘),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명(無染國師白月葆光塔碑銘)같은 것은 동인(東人)의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그 문이 모두 변려체이나 한 자 한 구가 하나도 내력 없는 것이 없고 사의(詞意)가 창달하면서도 원만하여 해동비문의 원조가 되는 대걸작인 동시에 조선 선종(禪宗)의 한 역사라고도 칭할 만한 것이다.
여기에는 참고삼아 선생의 서, 장, 문 몇 편을 원문 그대로 초재(抄載)하는 바 그중〈상대사시중장〉은 「삼국사기」 본전에 기록된 것으로 그 주지(主旨)는 당시 신라의 사당주의(事唐主義)에 얽매이고 문체도 그리 취할 것이 없으나 조선 사료에 대한 참고가 되겠기에 특재(特載)하는 것이다.
격황소서(檄黃巢書)
“광명(廣明) 2년(당 희종 신축 신라 헌강왕 7년) 7월 8일에 제도도통 검교태위(諸道都統檢交太尉) 아모는 황소에게 알린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고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을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일은 마음으로써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왕사(王師)32)로 말하면 정벌은 있으나 싸움을 주로 하는 것은 아니며, 군정(軍政)으로 말하면 은덕을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앞으로 상경(上京)을 수복하고 큰 신의를 펴고자 하여 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간사한 것들을 치려 한다. 너는 본시 먼 시골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감히 상도를 어지럽게 하였다. 드디어 불칙한 마음을 품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침노하고 궁궐을 더렵혔으니 죄가 이미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로 되어서 반드시 여지없는 패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애닯다. 당우시대(唐虞時代)로부터 내려오면서 묘호(苗扈)33)따위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은즉 양심 없는 무리와 충의 없는 것들이란 바로 너희들의 하는 짓들이다. 어느 시대인들 없겠느냐. 멀리는 유요(劉曜)34)와 왕돈(王敦)35)이 진(晋)나라를 엿보았으며, 가까이는 녹산(祿山)36)과 주자37)가 황가(皇家)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막강한 병권을 쥐었었고 또한 몸이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호령만 떨어지면 우뢰와 번개가 치닫듯 요란하였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하듯 하였지만,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필경에는 그 씨조차 섬멸을 당하였다.
햇빛이 활짝 펴졌으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의 그물이 높이 걸렸으니 나쁜 족속들은 반드시 제거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짓으로알고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을 뿐,속죄할 수 있는 조그마한 착함도 없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 속의 귀신까지도 가만히 죽이려고 의논하였을것’이니 네가 비록 목숨은 붙어 있다고 하나 넋은 벌써 빠졌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일이란 제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자세히 듣거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덕이 깊고 결점을 따지지 않는 은혜가 지중하여 너에게 병권(兵權)을 주고 또 지방을 맡겼거늘 오히려 짐새의 독을 품고 올빼미와 같은 흉악한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하는 짓이 개가 주인을 무는 격으로 필경에는 임금의 덕화를 배반하고 궁궐을 침략하여 공후(公侯)들은 험한 길로 달아나게 되고 어가(御駕)는 먼지방으로 행차하시게 되었거늘, 너는 일찌감치 덕의(德儀)에 돌아올 줄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가니, 이야말로 임금께서는 너에게 죄를 용서해 주는 은혜가 있고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린 죄가 있을 뿐이니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하물며 주나라의 솥38)은 물어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의 궁궐은 네가 어찌 머무를 곳이랴. 너의 생각은 끝내 어찌하려는 것이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에 이르기를,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침을 가지 못하고 소낙비는 온종일을 갈 수 없다고 했으니 하늘의 조화도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하거든 하물며 사람의 하는 일이랴. 또 듣지 못하였느냐. 춘추전에 이르기를 하늘이 아직 나쁜 자를 놓아 두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죄악이 짙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흉악함을 숨겨서 죄악이 쌓이고 앙화가 가득하였음에도, 위험한 짓을 편안히 여기고 미혹되어 돌이킬 줄 모르니 이른바 제비가 막(幕)위에다 집을 짓고 막이 불타오르는데도 제멋대로 날아드는 것과 물고기가 솥 안에서 너울거리지만 바로 삶아지는 꼴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뛰어난 군략을 모으고 여러 군사들을 규합하여, 용맹스러운 장수는 구름처럼 날아들고 날랜 군사는 비 쏟아지듯 모여들어, 높이 휘날리는 깃발은 초새(楚塞)의 바람을 에워싸고 총총히 들어찬 함선은 오강(吳江)의 물결을 막아 끊었다.
진나라 도태위(陶太尉)39)처럼 적을 쳐부수는 데 날래고, 수나라 양소(楊素)40)처럼 엄숙함이 신이라 불릴 만하여, 널리 8방을 돌아보고 거침없이 만리를 횡행할 수 있으니 마치 치열한 불꽃을 놓아 기러기털을 태우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알을 짓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금신(金神)41)이 계절을 맡았고 수백(水伯;水神)이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 이때, 가을 바람은 숙살(肅殺)42)하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 이슬은 혼잡한 기운을 씻어주니, 파도는 이미 쉬고 도로는 바로 통하였다. 석두성(石頭城)에 닻을 내리니 손권(孫權)43)이 후군이 되었고, 현산에 돛을 내리니 두예(杜預)44)가 선봉이 되었다. 앞으로 서울을 수복하기는 한 달이면 되겠지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하늘의 깊은 덕화요 법을 늦추고 은혜를 펴려는 것은 국가의 좋은 제도이다.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아니하며 어두운 길에 헤매는 이를 깨우쳐 주는 데는 바른 말이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 장 글을 날려서 너의 급한 사정을 풀어 주려는 바이니 미련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찌기 기회를 보아 자신의 선후책을 세우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 만일 땅을 떼어 받아 나라를 맡고 가업을 계승하여서 몸과 머리가 두 동강이가 되는 화를 면하고 뛰어난 공명을 얻기 원한다면 몹쓸 도당들의 말을 믿지 말고 오직 후손들에 영화를 유전해 줄 것만을 유의하라. 이는 아녀자의 알 바가 아니요 실로 대장부의 할 일이니 그 가부를 속히 회보할 것이요, 쓸데없는 의심을 두지 말라.
나는 명령을 하늘을 우러러 받았고 믿음은 맑은 물을 두어 맹세하였은 즉 한번 말이 떨어지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매 은혜가 더 많을 것이요 원망이 짙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 날뛰는 도당들에게 견제되어 취한 잠을 깨지 못하고 마치 당랑(호嫏 ; 버마재비)이 수레바퀴를 항거하듯이 어리석은 고집만을 부리다가는 곰을 치고 표범을 잡는 우리 군사가 한번 휘둘러 쳐부숨으로써 까마귀 떼처럼 질서 없고 소리개같이 날뛰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이며 너의 몸뚱이는 도끼날에 기름이 되고 뼈다귀는 수레 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고 권속들은 베임을 당할 것이다.
옛날 동탁처럼 배(腹)를 불태울 그때가 되어서는, 사슴처럼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가 있을지라도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니45)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참작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 어찌 귀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다만 너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게 될 것이니 장부의 할 일을 택하여 표범처럼 변하기를 기할 것이요, 못난 이의 소견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품지 말라.”(최준옥 역)
32) 왕사(王師): 천자의 군대.
33) 묘호(苗扈):묘와 호는 각각 순임금과 우임금 때 제후의 나라로, 복종하지 않다가 토벌당한 나라.
34) 유요(劉曜):흉노의 후예로 서진 때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
35) 왕돈(王敦):동진 때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람.
36) 녹산(祿山):당나라의 절도사로서 반란을 일으킨 사람.37) 주자:당나라 창평 사람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
38) 주나라의 솥:하(夏)나라 우(禹)임금이 만든 솥인데 이것은 제왕 계승의 보기(寶器)로 전해 왔다. 주나라가 쇠약한 말기에 강성한 제후 초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솥의 경중을 물었다. 그것은 곧 자신이 천자가 되어 그 솥을 옮겨 가겠다는 뜻임.
39) 도태위(陶太尉):도태위는 도간(陶侃)인데 두수, 소준(峻) 등 반역자를 평정한 명장.
40) 양소(楊素):양소가 진나라를 칠 때 배를 타고 양자강으로 내려가는데 위의 가 엄숙하므로 사람들이 보고 강신(江神)과 같다고 하였음.
41) 금신(神) : 가을을 맡은 신이라고 함.
42) 숙살(肅殺): 쌀쌀한 가을바람이 풀이나 나무를 스쳐 말려 죽임.
43) 손권(孫權): 오나라의 왕으로 석두성에 도읍하였음.
44) 두예(杜預):진나라의 장수로 현산에서 오나라와 대치하고 있었음.
45) 噬臍莫及:그릇된 뒤에는 후회하여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로, 곧 사람에게 쫓기어 궁지에 빠진 노루가 그 배꼽의 향내 때문이라고 해서 배꼽을 물어뜯었다는 데서 온 말.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
“엎드려 아룁니다. 동해의 밖에 세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은 마한과 변한과 진한이온데 마한은 곧 고려요(고구려를 가리킴)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이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침범하였고 북쪽으로는 유주(幽州)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를 요란(撓亂)하여 중국의 큰 좀벌레가 되어 수황(隋皇)46)의 실어(失駅)47)한 것이 요동의 정벌로 말미암게까지 되었읍니다(수의 양제가 쳐들어온 것을 가리킴).
정관(貞觀)48) 중에 우리 태종황제께서 친히 6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손히 천벌을 행하시자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해서 강화를 청하므로 문황(文皇;당 태종)께서 항복을 받고 발길을 돌리셨읍니다(당 태종의 敗歸한 것을 직언하지 못하고 당인의 口氣대로 말한 듯하다).
우리 무열대왕이 견마의 성의로써 일방의 난을 조정(助定)49)하기를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가서 조알(朝謁)하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읍니다. 그뒤 고구려와 백제가 종전과 다름없이 막을 지으므로 무열왕이 향도 (嚮導)50)가 되기를 청하였던바 고종황제 현경(顯慶) 5년(신라 무열왕 7년경신)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칙명하시어 10도(十道)의 강한 군사와 누선(樓船)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대파하여 그 땅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두고 유민을 불러 모아 한관(漢官)으로 이림(伎臨)51)하였는데 냄새와 맛이 같지 아니하므로 여러 번 이반(離叛)한 소식이 들리자 드디어 그 사람을 하동(河東)으로 옮기었읍니다.
그뒤 총장(總章;당 고종 연호) 원년(신라 문무왕 8년 무진)에 영공(英公) 이적을 명하시어 고구려를 파하고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두었었는데 의봉(儀鳳;당 고종 연호) 3년(신라 문무왕 18년 무인)에 이르러 그 사람도 하남 농우(河南隴右)로 옮기었읍니다.
고구려의 잔얼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나라의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읍니다.
그들은 개원(開元;당 현종 연호) 20년(발해 무왕 14년 임신=신라 성덕왕 31년)에 천조(天朝)를 원망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엄습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읍니다.
이에 명 황제(明皇帝)께서 대노하시어 내사고품(內史高品) 하행성(何行成)과 대복경(大僕卿) 김사란(金思蘭)을 명하시어 군사를 출동시켜 바다를 건너 토벌하라 하시고 인하여 저의 왕 김모(金某; 성덕왕을 가리킴)를 정대위(正大尉)로 삼고 절월(節鉞)52)을 주어 영해군사(寧海軍事),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시었는데 겨울이 깊어가고 눈이 많이 쌓여 번국(蕃國)의 군사가 추위에 괴로와하였으므로 회군하라고 칙명하시었읍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300여 년 동안 일방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하였으니 이것은 저의 무열대왕의 공이옵니다.
이제 치원은 유문(儒門) 말학(末學)이요 해외의 범재(凡材)로 외람되이 표장(表章)을 받들어 낙토(樂土)에 조회하오니 무릇 정성을 올리는 예의에 피진(披陳)53) 하옴이 당연하옵니다. 엎드려 아뢰건대 원화(元和; 당 헌종 연호) 12년(신라 헌덕왕 9년 정유)에 본국의 왕자인 김장렴(金張廉)이 바람에 표류되었다가 그 이듬해에야 상륙하게 되었는데 절동(浙東)의 어느 관원이 발송하여 서울로 들여보내었고 중화(中和;당 희종 연호) 2년(신라 헌강왕 8년 임인)에 입사(入朝使) 김직량(金直)이 반신(叛臣)의 장난으로 도로가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인하여 초주(楚州)에 상륙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양주에 이르러서 성가(聖駕)가 서촉(西蜀)으로 행차하시었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고대위(高大尉)께서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시켜 감시하여 서천으로 압송하라고 하였읍니다. 이전의 사례가 분명하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대사시중께서는 굽어 대은(臺恩) 내리시와 특별히 수륙권첩(水陸券牒)54)을주시고 현지에 명령하시어 배와 숙식 및 길이 행할 수 있는 나귀와 말과 초료(草料)를 공급하도록 하시고 아울러 군장을 시켜 감송(監)하여 가전(駕前)에 이르도록 하소서.”(양상철 역)
46) 수황(隋皇): 수나라 양제를 말함.
47) 실어(失駅):나라를 잘못 다스려 패망함을 뜻함.
48)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의 연호.
49) 조정(助定):협조하여 난리를 평정함.
50) 향도(嚮導): 일정한 곳으로 길을 인도함, 또는 그 인도하는 사람..
51) 이림(伎臨): 어떤 장소나 일에 임함.
52) 절(節鉞): 옛날 중국에서 임금이 부임하는 절도사나 출정하는 장군에게 주어서 생살권을 상징하던 절(節)과 도끼.
53) 피진(披陳):속마음을 조금도 숨김없이 털어놓고 진술함.
54) 수륙권첩(水陸券牒):수로나 육로를 통행하는 데 구애없이 통행할 수 있는 증명서. 옛날 국내외 사신에게 주었음.
한식제진망장사문(寒食祭陣亡將士文)
“오호라, 생명이 끝이 있음은 고금에 한탄하는 바이나, 이름은 썩지 않으며 충의(忠義)는 앞서는 것이다.
그대들은 활을 당기느라 몸을 수고롭게 하였으며 수레를 타고 힘을 다하여 싸웠다. 熊羆55)의 대열에서 기운을 떨쳤으며, 거위와 학의 앞에서는 드러내기를 꺼렸다. 싸움에는 용맹스러움을 다했고 진실로 공을 논함에는 겸손히 물러났었다.
오늘은 들풀이 푸르고 숲속의 꾀꼬리 소리 좋으나 흐르는 내는 아득해지고 공중에 흐르는 한(恨)은 끝이 없도다. 쓸쓸한 무덤에서 누가 혼백이 안다고 증험하랴.
나는 옛 공로를 생각하며 좋은 시절을 슬퍼하노라. 비천한 자리를 베풀고 맛이 없는 술을 부어 명부(冥府)에 떠도는 혼을 위로하노라. 두회(杜回)에서 적에게 대항하기를 함께 모의하고 온서(溫序)에 돌아갈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이제 능히 장사의 뜻을 이루었으니 이를 음조(陰助)라고 할 것이다.”(편집자 역)
55) 웅비(熊羆): 곰과 큰곰. 용감한 병사를 비유.
선생은 문(文)에만 능할 뿐 아니라 시와 글씨가 또한 절특(節特)하였다. 시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의 평은 그만두고 「소화시평(小華詩評)」56)에 오른 것만으로도 족히 그 진가를 알 수 있으니 그 시평에 말하였으되,
“아동(我東)이 중국과 통하기는 멀리 단기시대(檀箕時代)57)로부터 시(始)하였으나 문헌이 蔑如58)하고 수·당 이래에 비로소 작자가 있었으니 을지문덕의 수장(隋將;字仲文)에게 준 시와 신라 여왕(선덕여왕)의 직금송(織錦頌) 같은 것이 그것으로 비록 간책(簡册)에 올라 있으나 족칭(足稱)할 것이 못 되며 오직 당 시어사(侍御使) 최치원에 이르러서 문체가 대비(大備)59)하여 드디어 동방문학의 조(祖)가 되었다…”
하고 그 일례로 선생의 在唐시에 지은 〈강남여시(江南女詩)〉를 게 (揭)하고
강남녀(江南女)
“강남땅은 풍속이 음탕하기에
딸을 길러 아리땁고 예뻐라
놀아나는 성품은 바느질을 싫어하고
단장 마치고 관현(管絃)을 희롱하네
고상한 곡조 배우지 않았기에
그 소리 대개 춘정에 이끌리네
스스로 꽃답고 아름다운 그 얼굴
언제나 청춘일 줄 생각하네
아침내내 베틀에서 북을 놀리는
이웃집 딸을 도리어 비웃나니
'비록 베를 짜노라 몸을 괴롭혀도
마침내 비단옷은 너에게 안 간다'고”(「국역 동문선」)60)
56) 소화시평(小華詩評):이조 인조 때의 홍만종(洪萬宗)의 시평집.
57) 단기시대(檀箕時代):단군과 기자조선의 시대.
58) 蔑如: 멸시.
59) 대비(大備):썩 잘 갖추어져 있음.
60)“江南蕩風俗 養女嬌且憐 性治恥針線 成照管絃 所學非雅音 多被春心牽 自謂芳草色 長占艷陽年 却笑隣舍女 終朝弄機杵 機杵縱勞身 羅衣不到汝”
또 제 2 예(例)로 〈범해시(泛海詩)〉를 게하며
범해(泛海)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 만리를 통하였네
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61)이 생각나고
불사약을 구하던 진나라 동자62)가 생각나네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의 가운데일세
봉래산이 지척간인 듯
내 우선 신선을 찾아보리라”(양상철 역)63)
61) 한나라 사신: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은하를 건너갔다는 고사.
62)진나라 동자:진나라 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500 사람을 해도(海島)에 보냈다는 고사.
63) “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乘搓思漢使 採藥憶秦童 日月無何外 乾坤太極中 蓬萊着恕尺 吾且訪仙翁”
제3예로 지광산인(智光山人)에게 지어 준 시를 게하고
증지광산인(贈智光山人)
“구름가에 정사(精舍)를 지어 놓고
조용한 선정(禪定)에 근 50년간
지팡이는 산 밖에 나본 일 없고
붓은 서울로 가는 글월 안 쓰네
대(竹)흠에 샘물 소리 졸졸
송창(松窓)에 햇빛이 성그네
맑고 높은 경지에 읊다 못하여
눈감고 진여(眞如)를 깨치려네”(「국역 동문선」)
최후에 여지도(輿地圖)에 제(題)한 1연
“곤륜산이 동으로 달려 오산(五山)이 푸르고
별무리 북으로 흘러 일수(一水)가 누르도다”(편집자 역)64)
64)“崑崙東走五山碧 星宿北流一水黃”
를 제한 후, 또 평하되
“아동(我東)이 문헌으로써 중국에 소문이 나서 중국이 소중화(小中華)라고 칭하게 된 것은 대개 문창(文昌) 최치원(崔致遠)이 전(前)에 울리고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후에 화(和)한 까닭이다. 문창이 당에 들어가서 부(賦)한 시로 가장 인구에 회자된 것은 <우정야우(郵亭夜雨)〉 시(詩)니 그 일절에 왈
“나그네 집 깊은 가을비는 내리고
창 아래 고요한 밤 차가운 등불
가엾다 시름 속에 앉았노라니
내 정녕 참선하는 중이로구나”(이은상 역)65)
65)“族舘窮秋雨 寒窓靜夜燈 自憐愁衷坐 眞個定中僧”
이라 운운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글씨는 지금까지 우리가 가끔 보며 감탄한 바이지만 제가(諸家)의 평이 또한 많으니 「대동운옥(大東韻玉)」에 말하되
“그의 글씨는 근육과 뼈대가 심히 사납지만 모양이 상하지 않아서 진실로 죽순이 돌을 깨치고 나오는 힘이 있다.”(편집자 역)
하고 조남명(曺南溟)의 「두류록(頭流錄)」에는 말하되 쌍계동문(雙溪洞門)에 있는
“최학사(崔學士)의 수사(手寫)한 쌍계(雙溪;우편), 석문(石門; 좌편) 4자는 획대(畫大)가 녹경(鹿脛)66)과 여(如)하여 석골(石骨)에까지 간입(刊入)되었다.”
하고 청파(靑坡) 이륙(李陸)은 거기에 평시(詩)를 쓰되
“하늘의 별들이 흉금에 가득해
네 자(四字)가 아직도 기이하도다
지난밤 용연(龍淵)에서 번개비(雷雨)가 다투더니
깊이 들어 이 산림 속에 응했다" (편집자 역)67)
66) 녹경(鹿脛): 사슴의 다리.
67)“一天星斗滿胸襟 四字奇蹤直至今 昨夜龍淵雷雨鬪 深入應在此山林”
라 하고 「동국금석(東國金石)」 평에는
“쌍계사비는 노공체(魯公體)로 숙이첩타(熟而捷橢)하고 홍류동 석각행서(石刻行書 ; 위에 기록한 籠山亭詩)는 고졸(古拙)하다.”
하고 또 「미수기언(眉叟記言)」에는 운하되
“최학사 진감국사비는 지금 천여 년에 苺苔68)간에 상견문자가독(尙見文字可讀)이라.”
하였다.
68) 매태(苺苔) : 뱀딸기와 이끼.
그 외 선생의 인물평에 있어서 또한 여러 사람의 말이 많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유가로 이퇴계 선생의 평과, 불가로 서산대사의 평이니 퇴계 선생은 일찌기 말하되
“최치원은 문화(文華)만 시상(是尙)한즉 문묘에 배향할 수 없다.”
하고 서산대사는〈지리산 쌍계사 중창기>에 말하되
“그 고래로 유(儒)와 석(釋)을 통정(洞精)하여 내외를 박달(博達)한 자는 공명을 탈리(脫履)하듯 하고 일표(一瓢)로 빈(貧)을 망(忘)하여 천지로 더불어 병립하고 신명으로 더불어 동왕(同往)하며 혹은 무위진인(無爲眞人)으로 더불어 놀고 혹은 시종이 없는 자로 더불어 무엇을 하다가 부득이한 후에 응하게 되면 만물을 육(育)하고 천하를 화(和)하여 척수69)로써 능히 군(君)을 요순의 상(上)에 치(致)하되 반장(反掌)과 같이하고 스스로 그 우(憂)를 우하고 스스로 그 낙(樂)을 낙하나니 그런 인물은 곧 아동의 최고운과 진감국사가(중략)한·당·송 이래로 유·석(儒釋)의 허명(虛名)을 부숴버리고 천지의 대전(大全)을 낙(樂)하여 초연하게 홀로 불고(不顧)하는 자는 오직 그 두 대인이다. " (하략)
라 하였다.
69) 척수(隻手): 한쪽 손. 외손.
퇴계는 비록 순실(純實)한 학자이지마는 이 평은 문묘를 일종 성리설 학자들의 독전물로만 생각하고 실제 문화상에 공헌이 있는 인물과는 몰교섭(沒交涉)함과 같이 생각하는 편견일 뿐 아니라 고운 선생의 당시 처지 환경 여하와 선생의 진수 여하를 불고하고 일시 둔세술로 음월농월(吟月弄月)하던 말지(枝)만을 가지고 말한 것 같고, 서산대사는 진감대사를 내세우기 위하여 역시 고운을 치켜세운 것 같지마는 고운의 진가를 잘 안 사람은 서산대사 만한 이가 없을 것 같다.
만일 고운으로 하여금 신라의 말엽에 태어나지 말고 중엽 전성시대에 태어났다면 퇴계의 운한 바와 같이 한갓 문화(文華)만 시상한 인물에 그치지 않고 서산대사의 평과 같이 반드시 군(君)을 요순의 상에 치(置)하기를 반장(反掌)과 같이 하고 국(國)을 반석의 안(安)에 치하기를 팽선(烹鮮)70)과 같이 하는 대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70) 팽선(烹鮮): 생선을 삶음.아주 쉬움을 비유.
다른 것은 그만두고 그가 일찌기 12세 소년으로 부모와 고국을 떠나 만리 이토(異土)에 가서 유학을 하던 결심이라든지 또 당에 있어서 그대로 나간다면 향상(鄕相)이라도 가득(可得)할 그 자리를 폐리(弊履)와 같이 버리고 자기의 배운 것과 품은 뜻을 본국에 와서 한번 시행하여 보려고 단연 귀국하던 그 충군애국의 성(誠)이라든지 또는 본국에 와서 혹은 내직(內職)혹은 지방관으로 그 무(務)에 진췌(盡)하고 최후 10여 조의 시무책까지 올렸다가 시운의 불리한 것을 보고 기관(棄官) 둔세하여 고결의 절(節)을 완전히 한 것을 보면 그의 인격과 지감덕량(智鑑德量)71)이 어떠한 것을 족히 짐작할 것이니 어찌 다만 문화 시상(文華是尙)하는 인(人)이라고만 말할 수 있으랴.
선생이 당나라에 있을 때에 강동(江東) 시인 나은(羅隱)과 서로 알게 되었는데 은(隱)이 자기의 재고시일(才高詩逸)72)한 것을 자부하고 항상 선생을 경시하다가 선생의 지은 시가5축(詩歌五軸)을 보고 감복하여 지기(知己)의 고우로 존경한 것은 당시에 한 일화거리가 되었거니와, 선생이 표수현위로 있을 때에 현에서 남으로 약 백 십여 리 되는 지방에 있는 초현관(招賢館)에서 휴게하는데 그 앞에 쌍녀분(雙女墳)이라는 큰 고총(古塚)이 있으므로 토인(土人)에게 그 사적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선생은 시를 지어 조(弔)하였더니 그날 밤에 어떤 여자들이 와서 칭사(稱謝)하며 말하되
“자기들은 원래 선성군(宣城郡) 개원현(開元縣) 마양리(馬陽里) 장씨의 두 딸로 어려서부터 자색(姿色)이 있고 문필의 재가 있어 장래의 행복을 자부하고 있었더니 무이해한 그 부모가 뜻밖에 재물에 욕심이 나서 일개 소금장수 천인에게 許嫁하였으므로 분한을 품고 두 형제가 동시 자살하여 천보(天寶) 6년(당 현종시대)에 여기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무도 찾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고적하게 지냈더니 이제 당신이 와서 그와 같은 좋은 시를 지어 조문하여 주시니 천만 감사하다….”하고
종야(終夜) 같이 놀다가 새벽에 돌아갔다는 기담(奇談)은 지나인의 기록한 「육조사적(六朝事跡)」에 있다. 그것은 일종 허탄(虛誕)73)에 가까운 이야기 같으나 시성읍귀신(詩成泣鬼神)으로 선생의 시가 능히 원사(免死)한 두 여성의 귀혼(鬼魂)을 감동시킨 것을 가지(可知)하겠다.
71) 지감덕량(智鑑德量):남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덕성을 헤아릴 줄 아는 것.
72) 재고시일(才高詩逸):재주가 높고 시를 잘 지음.
73) 허탄(虛誕):허망.
그리고 전라북도 옥구군 서해안에는 자천대(自天臺)가 있으니 그 대는 일소록(一小麓)으로 해정(海汀)74)에 직입(直入)하고 그 위에는 2석롱(石籠)이 있는데 선생이 옥구태수로 있을 때에 비기(祕記)를 만들어서 그 농중에 장치(藏置)하였으니 농은 즉 거석으로 누구나 감히 열지를 못하고 사람이 혹 그것을 움직이면 청천백일에도 별안간 폭풍우가 내습하므로 거민(居民)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큰 한재(旱災)가 있는 때에는 수백여 인이 모여 큰 밧줄을 가지고 그 석농을 끌어당기면 해우(海雨)가 갑자기 와서 전야에 물이 풍족하게 되고 또 사객(客)이나 경향의 세력가가 오면 반드시 그 구경을 하러 가게 되어 폐(邑)가 여간 크지 않으므로 그 읍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괴롭게 여겨 백여 년 전에 그 위에 있는 정자도 헐어 버리고 또 석농도 땅에다 매장하여 그 흔적이 없어지게 되었다 한다(「八域誌」).
74) 海汀:바닷가.
또 이지봉(李芝峰) 시화에 의하면 선조 신묘년간에 지리산에 있는 어떤 노승이 암굴에서 여러 질의 이서(異書)를 얻었는데 그중에는 선생의 친서한 시 1첩 16수가 있는 중 절반은 없어지고 8수만 남아 있었다. 그때에 구례군수 민대륜(閔大倫)은 그것을 가져다가 이지봉에게 보냈으므로 지봉이 본즉 그 필적이 분명한 최 선생의 필적이요 시도 또한 기고(奇古)한 것이 선생의 소작인 것이 무의(無疑)한데 참으로 진품이라 하고 그 시를 게 하였으되
“동쪽 나라 화개동(花開洞)은
병 속의 딴세계라
신선이 옥침(玉枕)을 베니
순식간에 천년이 되었네
일만 골짜기엔 우뢰소리 울리고
일천 봉우리엔 비맞은 초목 새로워
산승(僧)은 세월을 잊고
나뭇잎으로 봄을 기억하네
비 뒤의 댓빛이 고와
자리를 흰구름 사이로 옮기고
적막해 나를 잊었는데
솔바람이 베개 위에 스치네
봄에는 꽃이 땅에 가득하고
가을엔 낙엽이 하늘을 덮었는데
지극한 도는 문자를 여의고
원래 눈앞에 있다네
시냇달 처음 나는 곳
솔바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소쩍새 소리 귀에 들리니
그윽한 흥취 알 수 있으리
산중의 흥취 말은 들었다지만
어느 사람이 이 기틀을 알리
무심코 달빛 보며
묵묵히 앉아 기틀을 잃었네
진리를 말할 것 있나
강이 맑으니 달그림자 통하고
긴 바람은 온 골짜기에 불며
단풍잎은 가을 산을 비웠네
소나무 위엔 담장이덩굴 얽혔고
시내 가운데는 흰 달이 흐르는데
절벽 위엔 폭포소리 웅장하고
온 산골짜기엔 눈이 날리는 듯하네” (양상철 역)
그리고 「택리지(擇里志)」에는 또 운하였으되 사승(寺僧)이 석상(石上)에서 지(紙)를 습득하였는데 그중에 10절구가 있으되 제1수는 상기 제1수와 같고 제2수는 상기 제5수를 기(記)하였으되 ‘간월(澗月)’은 ‘명월(明月)’, ‘송풍(松風)’은 ‘청풍(淸風)'이라 하고 제3수는 상기 제3수와 같으며 소위 제4수 상기 중에 있는 것으로
“밝은 달은 시냇물에 짝을 지었고
맑은 바람은 읊조리는 다락에 들어오네
옛날 나그네로 왔던 곳
오늘은 그대를 보내며 노네”(편집자 역)75)
라 하였다.
75) “明月雙溪水 淸風八詠樓 昔年爲客處 今日送君遊”
하여간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가지고 또 말하되 최고운이 죽지 않고 신선이 되어 산간으로 돌아다니며 가끔 이런 시와 글씨를 써서 석벽간이나 암굴 속에 더러 버린다고 한다.
부기(附記)
(註 1) 공의 생년(生年)에 있어서 「삼국사기」 본전에는 명기한 것이 없으나 다른 기록에는 대개 당 대중(大中) 무인(戊寅)이라 하였다. 그런데 공의 자서문이나 모든 기록에는 공이 18에 등과하고 28에 귀국이라 하였는데 그 등과한 해가 건부(乾符) 1년 갑오인즉 만일 무인생이라면 17에 등과요 18 등과가 아닌즉 무인생이 아니라 정축생이 확실하다 (오세창, 「槿域書畵徵」에는 정축생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공을 정축생이라 한 첫 기록이다).
그러나 거기에 또 한 가지 의문이 있는 것은 공의 귀국 연령이다. 공이 28에 귀국이라 하고 「삼국사기」 기타 기록에는 광계(光啓) 원년 을사에 장조내빙(將詔來聘)이라 하였은즉 무인생으로는 을사가 28세가 되나 정축생으로는 29세가 되니 그것이 또한 오산 같다. 그러나 「계원필경」 제20권 공의 시집 중 고원 외에게 기(寄)한 영물(詠物) 10수 시 자주(註)에 운하되 중화 4년(즉 광계 원년 전해) 갑진 10월에 '장귀국(將歸國)'이란 말이 있고 또 중도에서 풍랑으로 체류한다는 의미로 〈별지문(別紙文)〉을 5차 보낸 것이 있고, 〈귀국로차(歸國路次)해산춘망(海山春望)>이란 시가 있은 즉 귀국의 길을 떠나기는 갑진 10월이나 실제 귀국은 을사이며 따라서 28귀국이란 것은 그 떠나던 해 갑진을 표준한 듯하다.
(註 2)공의 호를 유선이라 한 것은 「대동운옥(大東韻)」에 기재되고 또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동도시(東都詩)〉에도 '억석최유선 문장동중토(憶昔崔儒仙,文章動中士)’라는 구가 있고 「여람」 <홍류동모인시(紅流洞某人詩;작자 미상)>에 '신라유선 최학사(新羅儒仙 崔學士)'란 구가 있다. 여기에 관하여 혹설에는 유선은 후인의 찬미요 고운의 자호(自號)는 아니라 하니 미지숙시(未知敦是)76)다.
76) 미지숙시(未知是): 누가 옳은지 모름.
끝으로 또 한 가지 말할 것은 선생의 문벌이니 「삼국사기」 본전에도 그 선계(先系)는 가고(可考)치 못하겠다 하였은즉 여기에 구태여 캐볼 필요가 없으나 그가 유학하러 갈 때에 그의 부친이 훈계한 것을 보면 그 부친도 상당한 사람이었던 것을 가지(可知)하겠고 그 당제(堂弟) 서원(棲遠)은 입회사(入淮使)로 당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고심하였다는 기사가 「계원필경」에 있고 또 「해동금석총목(海東金石總目)」에는 치원 종제 인곤이 집사시랑(集事侍郞)으로 진성여왕 4년 신해에 남포(藍浦) 성주산(聖住山)에 신건(新建)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郎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을 썼는데(글은 치원 作) 그 전문이 4,800여 자로 문사(文詞)가 전아화섬(典雅華贍)하고 필법이 일취(逸趣)하여 그 자태가 교묘하다 운하였은 즉 선생의 여러 종형제가 또한 상당한 인물이었던 것도 추측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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