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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통일신라-월명사(月明師)

耽古樓主 2023. 5. 3.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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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월명사(月明師)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시조시인, 국문학자, 수필가.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 한성사범을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서울대, 단국대 교수, 학술원 임명 회원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 「시조의 개설과창작」, 「국문학개론」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 「가람문선」등이 있음.

 

동해 한 모퉁이에 오랫동안 쫓겨 지내던 조그마한 신라가 차츰 강성하여 그 무력으로 백제·고구려와 같은 강한 인방(隣邦)을 다 정복하였으나 그 문화로는 오히려 백제·고구려의 것을 많이 받았으며 또는 멀리 당나라와 사귀어 그것을 더욱 수입하기도 하였고 그 뒤 반세기를 지내어 제35대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한창 예술의 꽃이 피고 그 향기가 진동하였다.

 

유명한 석불사(석굴암), 장수사, 석가사(釋迦寺), 백률사(柏栗寺), 굴불사(掘佛寺)도 이때 창건되었고 불국사의 다보탑·석가탑, 화엄사의 금리탑(金利塔), 갈항사(葛項寺)의 쌍탑(雙塔)도 이때 구성되었고 분황사의 약사불(藥師佛), 황룡사와 봉덕사의 종도 이때 주조되었다. 이런 놀라운 건축·조제(彫劑)·주조 등은 더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향가와 같은 문학으로도 이때 가장 융성하였다.

 

향가는 신라의 초엽부터 있어 오다 중엽의 진흥왕 때 화랑의 제도가 진전됨을 따라 더욱 성하여지고 종종 그 명인(名人)도 있었으나 이 경덕왕 때처럼 우수한 작가가 배출된 적이 없다.

 

지금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14수 가운데 이때의 것이 여섯 수나 되는바, 전일 언약 잊음을 탓하고 백수(柏樹)에 노래를 지어 붙이고 득총(得寵)을 하고 남악(南岳)에 숨어 중노릇을 하고는 왕이 가악(歌樂)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궁문에 이르러 간주(諫奏)를 하던 신충(信忠)도 있었으며, 일찌기 기파랑(耆婆郞)을 기리는 노래를 지어 이름을 드날리고 납의(納衣)1)를 입고 앵통(櫻筒)을 메고 남으로 좇아와 이상한 차를 다리어 왕에게 드리고 '안민가(安民歌)'를 짓던 충담사(忠談師)도 있었으며, 아이가 난 지 다섯 해에 문득 눈이 멀매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의 천수관음불 앞에 가서 노래를 지어 기도를 하여 다시 밝았다 하는 일도 있었으며, 향가 시인으로 대표적이던 월명사도 이때 사람이었다.

1)납의(衲衣): 중이 입는 검정 옷

 

월명사는 능준대사(能俊大師)의 문인으로서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거주하고 저(笛)를 잘 부는데 어느 날 달 밝은 밤에 저를 불고 그 문 앞 큰길로 지나노라니 유량한 그 소리가 운소(雲)2)에 떠돌며 달도 가다가 그 바퀴를 멈추었다 하여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 하고 일찌기 그 누이(妹)를 여의고 재(齋)를 지낼 때

“생사(生死)길은/이에 잇아매 저히고

나는 간단 말도/모르다 이르고 가닛고

어늬 가을 일은 바람에/이에 저에 떠질 닙여

한 무리는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정

아야/미타찰(彌陀利)애 맞나온 나/도(道)닷가 기다리오나”3)

라는 이 노래를 지어 외었더니 문득 바람이 일어 紙錢이 불려 서쪽으로 날아가다가 없어졌다.

2) 운소(雲霄): 하늘

3)“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盼伊遣 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 如一等隱枝良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剎良逢乎吾 道修良是古如

 

또 경덕왕 19년(760) 경자 4월 삭 2일에 해가 둘이 돋아 열흘이 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 일관이 아뢰되

“연승(緣僧)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가히 물리치리이다.”

한즉 왕이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깨끗이 하고 청양루(靑陽樓)에 거동하여 연승이 오기를 바라더니 마침 월명사가 밭 들길로 하여 남쪽으로 가는지라. 왕이 불러 그 까닭을 알리고 단을 열고 그 계(啓)를 지으라 명하였다.

월명사는 아뢰되

“신승(臣僧)은 다만 국선(國仙)의 붙이로서 향가나 알 뿐이고 성범(聲梵)은 모르나이다.”

그래도 왕은

“기시(旣是) 연승을 얻었으니 향가라도 가하다.”

하니 월명사는 이에

“오늘 이에 산화(散花) 불러 베프삶온 곳이여

너는 곧은 마음의 명(命)을 바리어

미륵좌주(彌勒座主) 모서여라”4)

라는 도솔가(兜率歌)를 지으니 둘 되던 해도 없어졌다.

4)“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寶白乎隱良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왕이 이를 갸륵히 여기고 품다(品茶) 일습과 수정 염주 108개를 주니 의형(儀形)이 선결(鮮潔)한 한 동자가 나타나 꿇어앉아 그 차와 염주를 받아 가지고 전(殿)의 서소문(西小門)으로 나간다. 월명사는 그 동자가 내궁 부리는 이라 하고 왕은 사의 종자라 하며 퍽 이상하여 사람을 시켜 따라가 보라 하니 그 동자가 내원탑(內院塔) 속으로 들어 자취를 감추고 그 차와 염주만 남벽화 (南壁畵) 자씨상(慈氏像) 앞에 있다. 사의 지덕(至德)과 지성이 능히 지성(至聖)을 소가(昭假)함이 이와 같다 하고 이 소문이 조야에 알려지매 왕은 사를 더욱 공경하고 다시 비단 100필을 주었다.

 

이 밖에 더 자세한 일은 알 수 없으나 위에 적은 그의 노래를 보든지 이런 그의 기적을 말함을 보든지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잘 하는 자가 많았다. 대개 시를 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왕왕 천지의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편집자 역)

라 하고

“바람이 지전을 날려, 가는 누이의 노자를 삼고 피리소리가 명월을 울려 항아(姮娥)에게 가니 먼 하늘에 가는 것이 빠르다고 말하지 마라. 만덕(萬德)이 한 곡조의 노래를 즐겨 맞이하는데”(편집자 역)5)

라 하는 일연의 찬(讚)을 보든지 하더라도 그가 거룩한 시인이었음은 다시 의아할 것이 없고, 또한 그 시대가 마침 성당(盛唐)의 이백, 두보와 만엽(萬葉)의 시본인마(柿本人麿), 산부적인(山部赤人)과 한때이었음도 기이하다 아니할 수 없고, 그가 비록 능준대사의 문도라 하되 과연 승려도 아닌 한 화랑의 무리로서 선불(仙佛)의 묘체(妙諦)를 통하고 일생 간박(簡朴), 담소(澹素)한 생활을 하고 순결, 숭고한 지행(志行)을 가지고 때로 저나 불고 노래나 지었다.

5)“風送飛錢資逝妹 笛搖明月姮娥 莫言白率速天遠 萬德化迎一曲歌

 

萬葉: 영원한 세상. 만대(萬代). 만세(萬世). 영구(永久). 여기서는 만엽집을 말한다

만엽집이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 20권이며 4516수가 담긴 방대한 일본 최고의 고어체 시가집으로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84)의 말엽에 완성된 시가집이며 특징적인 시가풍은 힘차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이 있고 만엽집이란 서명(書名)은 많은 시화집을 모은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만엽집이 언제 엮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만엽집이 하나의 정리된 가집으로 어느 한 시기에 편집된 것이 아니고 긴 세월에 걸쳐 증감이 계속되면서 현재의 형태에 이른 것이다.

5세기 전부터 8세기 중반까지 전후 약 3백년에 걸친 노래를 수록하고 있으며 우리의 향가와 같은 시대에 나온 노래들이다.

당시 고유 문자가 없던 나라시대의 왜()는 우리의 향가와 같이 이두, 향찰과 같은 표기법을 써서 우리의 장단가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 만엽집에는 고대 생활 풍속이나 신앙 등이 생생히 담겨 있어 당시 우리 지도층들이 일본에 건너가 많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만엽시를 지은 가인 10명 중 8명이 한반도 출신으로 꼽히고 있으나 일본인들은 10명 중 4명 정도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정복인들이나 도일인들은 본국에서 해온 생활양식과 습속 또한 그대로 일본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한 실상이 만엽집 노래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수많은 만엽가인 중 3대 가인으로 불리는 궁정가인의 제 1인자인 여류가인 누카타노오오기미(額田王, 액전왕)와 인생의 어두운 면과 사회문제를 깊숙이 논한 야마노우에노오쿠라(山上憶良), 궁정가인으로 서경가의 제 1인자로 불리는 야마베노아카히토(山部赤人, 산부적인)등의 백제 가인들의 시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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