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광복 후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에는 동양문화의 가장 전성시기였었다. 지나에서는 당(唐)의 건국 후 약 100년으로서 부력(富力)이 증진되고 문화가 원숙한 때인 동시에 영주(英主) 현종(玄宗)의 통치하던 개원(開元) 천보시대(天寶時代)였었다. 유당(有唐) 문화의 발달이 절정에 오른 때요, 그중에도 가장 예술의 꽃이 만발하였었던 때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이른바
“시는 두자미(杜子美)가 지극하고 문(文)은 한퇴지(韓退之)가 지극하고 화(畵)는 오도자(吳道子)가 이르고 서(書)는 안로공(顔魯公)이 지극하니 천하의 능한 일을 다했노라”(편집자 역)1)
라 하던 그때이다.
1)“詩至於杜子美 文至於韓退之書至於顔魯公 天下之能事畢矣”
한퇴지는 이보다 약 50년 후에 났으나 시인 이백(李白), 두보(杜甫), 화백 오도자, 이사훈(李思訓), 왕유(王維), 書家 안진경(顔眞卿), 음악가 이구년(李龜年), 조각가 양혜지(楊惠之)같이 쟁쟁한 대가가 배출하여 동양 예술문명의 수준을 일층 올리던 때였었다. 지나 문명을 수입하는 동시에 그와 보조를 같이하여 가던 조선의 문화도 이때가 가장 전성시기였었다.
북에는 발해가 새로 건국하여 국민의 정신에 신흥의 기분이 창일(張溢)한 동시에 태조, 무왕, 문왕 등의 영주가 이어나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찬사를 받도록 문화의 건설이 되었었고, 남에는 신라가 반도를 통일한 후 약 50년으로서 삼국 투쟁에 종사하던 필사적 분려(奮勵)의 국민력을 문화 건설에 전주(專注)케 하던 동시에, 성덕왕, 경덕왕 같은 명군이 이어 났었다.
그래서 그때는 곧 신라 문명의 황금시대로서 조선 문화의 최고봉을 이루었던 때였다. 석굴암 벽불(壁佛), 봉덕사 범종 같은 위대한 조각품이 다 그때 이루어졌다. 인도와 지나의 음악이 수입되어 지금도 유명한 조선의 아악의 기원을 이루었다. 불교가 전성되고 한문학이 수입되던 때였었다.
위대한 서성(書聖) 김생도 마침 이 문화의 조류를 타서 이때 탄생케 되었던 것이다.
2
「삼국사기」 김생전에
“김생은 부모가 쇠약하여 그 세계(世系)를 알지 못한다. 경운(景雲) 2년에 태어나서(신라 성덕왕 10년 신해) 어려서부터 글에 능했으며 평생 다른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연륜은 80이나 오히려 글쓰는 것은 쉬지 않았다. 예서(隸書)와 행서, 초서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
라 하였었다.
다시 말하면 김생의 부모가 미천하여 그의 가계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성덕왕 10년에 탄생하여서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쓰므로 평생에 다른 재주는 배우지 않고 나이가 80세가 넘도록 오직 붓잡고 글씨쓰기를 좋아하여 쉬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예서와 행서와 초서가 신통한 지경에 들어갔었다. 간단하나마 김생의 역사는 이것이 근본적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주영편(晝永編)」에는
“혹자가 김생의 이름이 구(玖)라고 말하나 어느 책에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
라 하여 김생의 이름이 ‘구’라고 쓰면서도 출처가 미상하므로 신용키 어렵다 하였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김생이 두타행 (頭陀行)2)을 닦을 때 홍주(洪州) 금생사(金生寺)에 거하였는데 인하여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 '
라 하여 김생이 승려로서 홍주 금생사에서 수행하였음을 말하였다.
2) 두타행(頭陀行):바랑을 등에 메고 다니는 행각승의 수도.
또 동서(同書)에
“김생은 안동 문필산(文筆山)에서 글을 배우고 이에 이름짓고 또 경일봉(擎日峰)에 있는 김생굴(金生窟)에서 글을 배웠다. 고려 안축(安軸)의 시에 이르기를 신라대의 김생은 필법이 신이하니 산실(山室)에서 글을 배운 것이 이미 천 년 전이다.”
라 하여 김생이 안동 문필산과 경일봉 김생굴에서 서법을 수득(修得)하였다는 전설을 쓰고 다시 안축의 시를 인용하여 그 전설의 실재성을 증명한 바이다.
그리고 퇴계는 김생굴의 앞에서
“고아하고 기운찬 주자체는 종왕(鍾王)3)이 옛부터 개진(開陳)하지 못했다
우리 동방에 천년 만에 김생이 탄생하였으니 괴기한 필법은 암폭(巖瀑)에 머무는 듯 재주의 뛰어남이 참으로 경탄할 만하도다”
의 시를 지어서 그의 위업을 찬탄하였으며
「과재집(果齋集;成近默 著)」〈제 김생굴시서(題金生窟詩序)〉에
“김생은 이곳에서 글씨를 배웠으며 단풍나무 잎을 취해 거기에 그렸으니 샘물이 모두 검더라.”
라 하였고
「미수기언(眉叟記言)」에
“김생이 산에 들어가 나무를 꺾어 땅에다 그림을 그리니 우군(右軍)을 배워 입신(入神)에 들었다.”
라 하여 김생의 습자시에 혹은 풍엽(楓葉)에 쓰고 혹은 나무를 꺾어서 땅에 그어서 썼으며 고심근공(苦心勤工)의 결과로 천수(泉水)가 다 검었으므로 마침내 왕우군(왕희지)을 배워서 신경(神境)에 들어갔다 하였다.
3)종왕(鍾王):위나라의 종요와 진나라의 왕희지.
그리고「이계집(耳溪集)」에
“대저 김생은 서가(書家)의 시조라. 일찌기 계림 석굴에 들어가서 나무를 따서 잎사귀에 글자를 쓰고 40년을 나오지 않아서 글씨가 곧 신통한 경지에 들었다."
라 하여 김생이 경주 석굴 중에서 40년간 고심참담한 과공(課工)을 하여 오던 전설이 써 있었다.
3
김생의 서법은 오직 하나인 백월비(白月碑)가 남아서 그의 전형(典型)을 짐작케 되었음은 불행 중의 다행이나 친필을 얻어 보기 어려우므로 그의 서품(書品)이 어떠하였던가 함은 알기 어렵게 된 동시에, 오직 고문헌에 의하여 그의 가치의 일반(一斑)을 논의할 수밖에 없게 되었었다.
「삼국사기」 본전(本傳)에
“숭녕중학사(崇寧中學士)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서 변경4)에 묵었다. 이때 한림(翰林)이 양구(楊求), 이혁(李革)을 초대해 불러 제칙(帝勅)을 받들고 관(館)에 이르렀다. 서도(書圖)가 많았는데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一卷을 들어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가로되 ‘금일을 헤아릴 수 없도다. 왕희지의 글을 보는 것 같다' 하니 홍관이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신라인 김생의 쓴 글이라’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희지를 제외하고는 이같은 묘필을 쓸 자가 없다’ 하니, 홍관이 거듭 그것을 말해도 종내 믿지 않더라.”
라 하여 송조(宋朝)의 서가 양구, 이혁으로도 김생의 글씨를 왕우군의 진적(眞蹟)으로 오신(誤信)하게 되었다 함은 김생의 서품(品)이 얼마나 위대하였음을 증명하기에 족한 바이다.
4)변경:하남성 개봉현(開封縣)의 고칭(稱).
그리고「이상국집(李相國集)」에
“제일인자가 누구냐. 바로 김생이다. 이는 곧 신필이라. (중략) 그런즉 마땅히 김생이 신품(神)의 제일에 처하노라.”
라 하여 김생, 탄연(坦然), 최우, 유신(柳伸) 등 4대 신품(四大神品)의 가치를 평론하는 중에 김생을 제1위에 들었다.
그리고「파한집(破閑集)」에
“계림사람 김생은 붓놀림이 신과 같다.”
라 하였고,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우리나라의 글 잘 쓰는 자는 비록 많으나 모범이 될 만한 자는 더욱 적다. 김생은 서예에 능하니 가늘고도 호탕하며 모두가 정치(精致)하다”
라 하여 김생의 서법을 찬미하였었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필적인 영주(榮州) 태자사(太子寺) 낭공대사(朗空大師)의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는 보통 약하여 '백월비'라 한다.
「해동금석총목(海東金石總目)」에는
“봉화의 태자산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는 최인곤(崔仁滾)이 글을 짓고 중 단목(端目)이 김생의 글을 모았으나 경명왕 때에 난리로 인해서 세우지 못하고 고려 광종(光宗) 때에 이내 세웠다.”
라 하여 신라 경명왕 때에 최인곤이 글을 지었고 승 단목이 김생 서(書)를 모아서 각하였으나 세란(世亂)으로 인하여 세우지 못하였다가 고려 광종 때에 처음 건립한 연혁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태자사가 폐하매 동비(同碑)가 초래(草萊)5) 중에 매몰되었다가 중종 기사(己巳)에 군수 이항이 영주군 자민루(字民樓) 밑에 이치(移置)하였고 중년(中年)에 또 유실되었더니 상고자(尙古子) 김광수(金光遂)가 전간(田間)에서 다시 찾았고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보호와 선전으로부터 세인이 훤전(喧傳)케 되더니 근년에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이치하여 보관중이다.
5)초래(草萊): 황폐한 토지.
이 밖에도 옥각(屋角)을 남북으로 경측(傾側)케 하던 안양사(安養寺) 편액(扁額), 운무(雲霧)가 상농(常籠)하던 청룡사액(靑龍寺額), 광주(廣州) 대노원(大櫓院) 삼자소편(三字小扁), 강진(康津)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 육대자(六大字) 등의 김생 필적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하나도 얻어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청성집(靑城集)」에는
“백월비가 가장 뛰어나니 그 글씨는 장비의 천 근의 활과 같아서 한 번 쏘면 가히 천군(千軍)을 부술 만하다.”
라 하여 본비(本碑)의 서품이 위대함을 찬탄하였고,
「원교서결 후편(圓嬌書訣 後編)」에는
“동국의 필법은 신라의 김생으로 종(宗)을 삼는다. 이제 진적의 전하는 바 없으나 탁본이 역시 그 위대함과 법(法) 있음을 나타내니 고려 이후 사람이 미치는 바가 없다."(이상 인용문 편집자 역)
라 하여 김생의 진적이 없음을 애석해하는 동시에 본비의 탁본을 절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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