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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통일신라-김대성(金大城)

耽古樓主 2023. 5. 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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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김대성(金大城)

 

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 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 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등이 있음.

 

김대성을 전하는 가장 오래인 문헌은 「삼국유사」이다. 권5에 〈대성효이세부모 신문왕대(大成孝二世父母 神文王代)〉라 하여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모량리(牟梁里;浮雲村이라고도 하며 지금은 毛良里라 부른다)에 빈녀(貧女) 경조(慶祖)가 있어 아이를 낳았더니 머리는 크고 이마는 성(城)같이 평평한지라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이 困窘하므로 생육할 수 없어 화식(貨殖)의 복안가(福安家)에 역용(役傭)이 되었더니 그 집에서 밭 두어 고랑을 주어 그것으로써 의식의 자(資)를 삼게 되었다.

1)화식(貨殖) : 재물을 늘임. 돈을 밟.

2)역용(役傭): 고용인.

 

때에 漸開라는 개사(開士)가 있어 육륜회(六輪會)를 흥륜사(興輪寺)에서 개설하려 하여 복안가에 이르러 勸化를 청하였더니 그 집에서 포(布) 50필을 내어 시출(施出)하매 점개는 주원(呪願)하여 가로되

'단월(檀越)이 보시를 즐겨하오니 천신이 항상 호지(護持)하리로다. 하나를 베풀어 얻음은 만 배요, 안락하고 또 수명이 길리로다.‘

하였다.

3)권화(勸化):중이 보시를 청함.

 

대성이 이 주원을 듣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 어미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제 문 밖의 중의 誦唱을 들으오니 하나를 베풀어 얻음이 만 배라 하오. 내 생각컨대 반드시 宿善이 없었을 것 같사오니 곤궤(困匱)는 하오나마 이제 또 시공(施供)이 없으면 내세에 더욱 곤란할 것이라. 내 역용살이 밭을 법회에 시납(施納)하여 후세에 갚아짐이 있음을 꾀할까 하오니 어떠하오리까?'

하였더니 그 어미 좋다고 허락하여 이에 점개에게 밭을 시공하였다.

(4) 숙선(宿善): 전세에서 닦은 착한 행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아니 되어 대성은 죽었다. 물고(物故)한 그날 밤에 당시 국재(國宰)로 있던 김문량(金文亮) 집에 하늘에서 소리 있어 가로되

‘모량리의 대성을 네 집에 부탁하노라'

하였다.

5)물고(物故): 이름난 사람이 죽음.

 

집안사람들이 놀라서 모량리를 검사케 하였더니 과연 대성이 죽었고 그날 천창(天唱)이 있던 동시에 몸이 들어 아이를 낳았는데 좌수(左手)를 움키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여니 금간자(金簡子)에 대성(大城)이라 두 글자를 새긴 것이 그 손안에 있었다. 따라서 대성이라 또다시 이름짓고 이에 그 전생의 생모 경조도 제중(第中)에 겸하여 수양(收)하였다.

6) 제중(第中): 집안. ()는 집.

 

대성이 자라매 유렵을 좋아하여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을 잡아 가지고 산하촌(山下村)에 내려와 투숙하였더니 그날 밤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들어덤비면서

‘네 어이 나를 죽였느냐. 나도 너를 잡아먹으리라’

하매 대성은 무섭고 떨리어 용서하기를 빌었더니 귀신은

'그러면 나를 위하여 불사(佛寺)를 세우겠느냐’

하매 소청대로 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깨어나니 일장 꿈이었고 땀은 자리를 적시었다.

자후(自後)로는 원야(原野)에 유럽하기를 그치고 곰 잡은 곳에 곰을 위하여 장수사(長壽寺; 지금 내동면 마동 장수곡 3중석탑이 그 터이다)를 창건하고 인하여 심정에 느낀 바가 있어 비원(悲願)이 더욱 돈독해지는지라.

이내 현생의 양친을 위하여 불국사를 창(創)하고 전모(前母)의 야양(爺孃)을 위하여 석불사를 창하여 신림(神琳),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로 하여금 각 住刹케 하고 상설(像設)을 무장(茂長)하여 양친의 국양(鞠養)의 노(勞)를 수보(酬報)하였으니 일신으로 2세 부모에 효하였음은 예(古) 역시 듣기 어려운 바이며 선시(善施)의 영험은 가히 믿지 않을 것이냐.

7)야양(爺孃):본래 야()는 할아버지를, ()은 할머니를 뜻하지만, 합쳐서 쓸 때에는 양친을 가리킨다.

8)국양(鞠養): 어린 사람을 사랑하여 기름.

 

장차 석불을 새기고 큰 돌로 감개(龕蓋)를 만들려 할제 돌이 홀연히 세 쪽이 나는지라, 분하고 심사나는 끝에 어렴풋이 잠이 들었더니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그것을 맞추어 주고 가는지라. 대성이 마침 잠을 깨었다가 천신을 좇아 남령에 이르러 향목(香木)을 태워 천신을 예공하니 후에 그 땅을 향령(香嶺)이라 부르다.

9)감개(): 불상을 모셔 놓은 곳을 덮는 덮개.

 

그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과 조루(彫鏤)와 석목(石木)의 공은 동도제찰(東都諸利)에서 이에 더함이 없나니라.

10) 조루(): 새김

 

이상이 예로부터 향전(鄕傳)에 전해 오는 것이나, 불국사에 있는 사기(寺記)에는 경덕왕대 대상(大相) 대성이 천보(天寶) 10년 신묘(경덕왕 10년)에 불국사를 창건키 시작하여 혜공왕 때에 이르러 대력(大曆) 9년 갑인 12월 2일(혜공왕 10년)에 대성이 졸하매 국가가 필성(畢成)하고 유가대덕(瑜伽大德)을 청하여 항마주찰(降魔住刹)케 하여 이때까지 계등(繼燈)케 되었다 하니 고전(古傳)과 같지 아니하나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는 알 수 없는 바이다.”

 

그러나, 이상 대성에 대한 기록은 이 「삼국유사」뿐이요 「삼국사기」 등에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얼마만큼 그 인물의 존재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인지 의문이지만 그대로 그 존재를 믿는다 치더라도 시대에 있어 신문왕대 인물이냐 경덕왕대 인물이냐가 문제된다. 그러나 이것은 상기 전설 중에 나타나는 다른 인물들, 예컨대 신림, 표훈, 유가대덕 등으로써 얼마간 추정할 수 있으니 그중에 표훈은 의상(義湘)의 10대 도제(徒弟)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행적이 경덕왕대에 있던 것이 「삼국유사」에 소소히 남아 있으며(권 2 경덕왕條, 권 3 興相寺 金堂十聖條, 권 4 義輪傳敎條), 신림은 최치원이 찬한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新羅迦耶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東文選 64)〉 중에

“유약조(有若祖)는 순응대덕(順應大德)을 스승삼고 신림석덕에게서 효칙했으며 대력 초년(大曆初年)에 노담을 물었다.”(편집자 역)

라 했으니 신림이 역시 경덕·혜공대 사람임을 알 수 있고 유가대덕이란 유가사(瑜伽師)란 말일 것으로 반드시 고유명칭이 아닐 듯하나 그러나 유가대덕으로 이름이 드러난 대현(大賢;자칭 靑丘沙門이라 함)도 경덕왕대 있었음이 「삼국유사」(권 4 賢瑜伽)에 있으니 이러한 점을 보아 대성의 연대를 경덕왕대에 둠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11) 노담: 도덕경의 저자인 노자라고 알려진 인물. 이 문맥에서는 도교에 대한 공부를말함.

 

뿐만 아니라 그가 경영하였다는 장수, 불국, 석불 제찰의 유적 유물로 보더라도 모두 경덕왕 전후의 이당(李唐)의 미술, 나라(奈良)의 미술과 유사한 시대성을 가지고 있음에서도 대성의 생존 연대를 이때 둠이 가한 듯하다.

12) 이당(李唐): 중국의 당 왕조를 말하는데 고조(高祖)인 이연의 성씨에서 연유한다.

 

경주고적보존회 발행 「취미지경주(趣味之慶州)」라는 책자에는 불국사가 대성의 51세 때에 비롯하여 몰(沒)한 75세까지 25년 계속되었고 그 후 수년에 완성되었다 하였다. 경덕왕 10년부터 혜공왕 대력 9년까지는 24년간이지 25년간이 아니며 또 그 세령(歲齡)을 51이니 75니 계산한 수의 출거를 알 수 없지만 경덕왕 10년에 51세였다면 그 생년은 효소왕 10년일 것이다.

 

이 김대성의 세계(世系)에 관하여 다시 문제삼으려면 「불국사 고금창기(古今創記)」에 실린 〈대화엄종 불국사 비로자나 문수보현상찬 병서(大華嚴宗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幷序)〉, 〈대화엄종 불국사 아미타불상찬 병서(大華嚴宗佛國寺阿彌陀佛像讚幷序)〉, 〈왕비 김씨위고수 석가여래상번찬 병서(王妃金氏爲考繡釋迦如來像幡讚幷序)〉, 〈나조상재국척대신 등 봉위헌강대왕 결화엄경사원문(羅朝上宰國戚大臣等奉爲獻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 〈왕비김씨 봉위선고 급 망형 추복시곡원문(王妃金氏奉爲先考及亡兄追福施穀願文)〉 등 소위 최치원의 찬문(撰文)이란 제문(諸文)에서 다소 맥락을 설명할 수 있을 듯하나 이 찬문 자체가 여러 가지 모순이 있어 신빙할 수 없는 것임으로 해서 도리어 문제삼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다만 그의 경영이었다는 불국·석불 등 제찰의 유구유물(遺構遺物)에서 경영 주체의 탁월한 재능을 살펴볼까 한다.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로 불국사, 석불사, 장수사가 있음은 이미 「삼국유사」에도 보이는 바거니와 언전(諺傳)에는 다시 웅수사(熊壽寺), 몽성사(夢成寺) 등도 그가 창건하였다 한다. 「삼국유사」에는 곰 잡은 곳에 장수사를 세웠다 하는데 언전에는 곰을 처음 발견한 땅에 장수사를, 곰 잡은 곳에 웅수사를, 꿈꾼 곳에 몽성사를 세운 것으로 말한다(「불국사 고금창기」 또는 경주고적보존회 발행 「취미지경주」).

 

그러나, 웅수사는 토함산정에 있고 장수사는 산 밑에 있으니 말을 하자면 곰을 발견한 곳에 세운 것이 웅수사요, 장수사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곰 잡은 곳에 세웠다 함이 사리에 합당할 것이다.

 

하여간 지금 응수사에는 약간의 초석과 석불 1구만이 남아 있다 하며 장수사에는 불국사의 서석가삼중탑(西釋迦三重塔)과 같은 형식의 탑이나 규모와 기품이 다소 왜축된 삼중석탑이 1기 있고 몽성사는 장수사와 같은 동리인 마동(馬洞) 안 몽성곡에 있으나 아무 유물도 없는 모양이다. 따라서 김대성이 창건한 5사찰 중에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불국사와 석불사의 둘뿐이라 하겠다.

 

상술한 바와 같이 불국사·석불사를 위시한 5사찰이 전설에는 순전히 김대성 일인이 그 사가(私家)의 전세 야양과 현세 양친에 대한 효행 내지 살생의 속죄를 위한 창건인 것같이 말하나 필자는 반드시 그대로 준신(準信)치 아니하는 바이니,

그 첫째 이유로는 만일 이 제찰이 소전(所傳)대로 대성 일인의 사원(私願)에서 시종된 것이라면 대성의 몰후 국가에서 계공(繼功)하였을 리 없는 것이며, 또 「불국사 고금창기」에 의하면 경덕왕 이전의 모든 創修의 사실은 믿기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이후 역대를 두고서 왕가 종곤 등의 창수시납(創修施納)의 사실이 비일비재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조선 이후에 들어서도 국가적 귀의 숭앙(歸依崇仰)이 매우 높았던 모양이니 이로써 보면 불국·석불 등 제찰이 결코 일 私臣의 원당(願堂)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제2로는 불국·석불 등이 적어도 한 교리의 만다라적 전개를 보이려는 불교 교리 자체에 입각한 교상(敎相)의 상징으로 설교 목적의 한 큰 역할을 하려던 것으로 이해되며,

제3으로는 산배(散配)된 그 제찰의 위치와 환경에서 국가의 한 병략적(兵略的) 행정상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13) 교상(敎相):석가 일대의 설법의 형태. 또는 각 종()의 교리 이론.

 

이제 이 제찰의 산배된 외면적 의미, 지리적 환경의 내면적 의의를 본다면 제일로 이 제찰이 점거해 있는 토함산이란 신라 5악(五嶽)의 하나로서 동악(東嶽)이라 하여 중사(中祀)의 땅이었고(「東京雜記」) 신라 국도(國都)의 동관문(東關門)을 이루어 불국사는 남천(南川) 상원에 처하여 서북 도내(都內)로 통하는 지위에 처해 있고(이 길을 좇아 도내로 들어갈 양이면 그곳에 명활산성·남산성이 좌우의 관문을 또다시 이루고 있다) 겸하여 남산을 넘어 멀리 신라의 서관인 단석산 준령을 바라보고 남으로 봉서(鳳棲)·마석(磨石)간 계곡을 통하여 신라의 남관(南關)인 치술령(鵄述嶺)의 관문 성벽을 내다보고 있다.

14) 중사(中祀):나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보다 의식이 간단한 나라 제사의하나.

 

뿐만 아니라 불국사는 토함산을 동에서 넘어옴으로써 그 정문을 정향(正向)하여 직참(直參)할 수 있으나 국도변에서 불국사에 들자면 그 서측을 돌아 편향된 길을 밟게 된다. 말하자면 불국사의 정로(正路)는 토함산을 동에서 넘어들 때 있고 국도에서 나와 듦에 있지 않다. 이곳에 불국사가 석불사와 유기적으로 관련되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있는 것이다. 몽성사·장수사는 결국 이러한 의미깊은 불국사의 좌우 보처(補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창건 순차로 말한다면 전설과 같이 불국·석불 이전에 있던 것이 아니요, 이후에 있었을 것이니 이는 장수사에 남아 있는 유일한 3중석탑이 양식상 불국사의 석가탑보다 뒤떨어진 형식을 갖추고 있는 점에서도 용이히 증명할 수 있다.

 

또 토함산정에 있는 웅수사는 그 중복에 있는 석불사의 보찰(補刹)이니 석불사는 그 앉은 곳에서 멀리 동도 대종천(大鍾川) 계곡을 통하여 장기·감은(感恩)의 동해 제도(諸道)를 내다보고 있으나 그곳 동도의 여러 관문에서는 석굴암을 찾으려도 취대(翠黛)에 가리어 바라볼 수도 없다.

15) 취대(翠黛):눈썹 그리는 데 쓰는 푸른 빛의 먹. 여기서는 멀리 보이는 산의 경치를 일컬음.

 

이것은 괘릉(掛陵), 영지(影池) 등 신라의 남평(南坪)과 관문, 장성의 신라의 남관에서 역력히 불국사를 조견(照見)할 수 있음과 好箇의 대조를 이루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이 제찰이 한갓 일개 중신의 자복사(資福寺)·명복사(冥福寺)로서보다도 행병(行兵)의 중요한 참궐(站闕)이요, 보초찰방(步哨察防)의 비찰(秘察)한 문진(門鎭)임을 이해할 수 있으니 신라의 사찰은 다시 더 종합적 견지에서 관찰될 필요가 있다.

 

불국·석불 제사(諸寺)가 이미 이러한 의미가 있는지라. 따라서 그 개별적 작의도 그 경영 양식에 의하여 이해될 필요가 있다. 석불사는 촉지항마(觸地降魔)의 인상을 가진 석가보존이 동해를 굽어 살피시어 窟室 안에 태장(胎藏)되어 계시고 불국사는 대일(大日), 하염(河閻), 미타(彌陀), 석가(釋迦), 보생(寶生)의 5불정토(五佛淨土)가 전개되어 화엄세계가 그대로 사바(娑婆)에 현현되어 있다.

16) 사바(婆婆):범어의 Sabhā의 음역으로 인토(忍土)라는 뜻이다. 괴로움이 많은 이세상을 지칭한다.

 

전자는 적극적으로 현세의 모든 악마를 굴항(屈降)시킴에 그 주안이 있고 후자는 현세의 노고로부터 또는 속죄된 중생으로 하여금 왕생의 극락을 현전에 보이려는 상징에 있다. 석불사는 모든 죄장(罪障)을 가진 악덕이 혁파되고 다시 회유(懷諭)될 주안 아래 경영되어 있고 불국사는 참회된 중상(衆相)이 화엄미묘(華嚴微妙)한 정토세계로 인도되도록 경영되어 있다.

 

석불사에 드는 자 누구나 우선 그 전관(前關)에서 8금강(八金剛)의 위하(威嚇)를 느끼고 양 인왕(仁王)의 질타를 들을 것이다. 청렴무괴한 선식(善識)으로써도 오히려 다시 한번 어심(於心)을 반성케 함이 있거든 하물며 사악한 무리로써 그 위하를 넘길 수 있으랴.

17) 위하(威味): 위협.

 

연도 좌우의 사천왕의 위의(威儀)에서 다시 한번 정금(正襟)하고 석가본존 앞에 다다르면 구렁에 빠졌던 사악의 무리로서는 감히 이 대자(大慈)의 구제를 바랄 수도 없을 만한 장엄에 억색(抑塞)되고 말 것이다.

18) 연도(羨道):고분의 입구에서부터 시체가 있는 방까지 이르는 길.

 

그곳에는 자비로운 4보살의 온안(溫顔)이 가긍한 듯이 죄악의 덩이를 내려보고 10대 제자의 고삽(苦澁)된 면상들이 비난이나 하는 듯이 둘러보고들 있다.

천상(天上) 감실(龕室)에는 8보살이 천불(天佛)을 찬미하고 있고 석가 보괄의 위아래로는 조요한 원광이 떠돌고 있어 구제의 자광(慈光)이 손아귀에 곧 잡힐 듯하되 몸과 마음이 나락(那落)에 있으니 허둥거리는 손발에 마음만 설레일 것이다.

19) 나락(那落): Naraka의 음역. 지옥을 말함.

 

이때 사악된 무리는 마땅히 자아를 세존 앞에 던져 버리고 진심과 성의로 한껏 뉘우쳐야 할 것이다. 그런 뒤라야 저 광명들은 비로소 나에게 점차 가까와지고 이리하여 10대 제자의 인도를 받아 십일면관자재보살(十一面觀自在菩薩) 앞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때 보살은 그 자모(慈母)같은 온화로운 상으로 고해(苦海)에서 헤매던 그 고갈된 마음의 목을 보병정수(寶瓶淨水)로써 씻어 줄 것이요, 일지홍련화(一枝紅蓮花)로써 무명(無明)의 망상을 헤쳐 줄 것이니 보리정심(菩提淨心)이 이곳에서 비로소 피어날 것이다.

이곳에서 얻은 광명의 보리증과(證果)를 고이고이 간직하고 돌아 세존 앞으로 다시 나와 뵈오면 저렇듯 대자대비하신 상을 즉전에 어이 무섭게 뵈었던가 하여 순전(瞬前)의 자기의 혼탁을 의심하게 될 것이요, 감사에 찬 경숙(敬肅)된 예배가 비로소 본성에서 우러러 떠오를 것이다.

20)증과(證果):수행의 인연으로 얻는 깨달음의 결과.

 

떠나기 어려운 한 발을 사바세계로 다시 돌이켜 들일 제 그때 언뜻 눈에 보이는 저 창망한 광명의 세계! 아아 현궁창파(玄穹蒼波)의 저 광막한 광명의 대천세계(大千世界)는 곧 너의 마음일 것이요, 동해를 덮고 온 일체의 사악된 艨艟은 일진청풍에 흑운이 쓸리듯 한번에 불어 버릴 것이다. 이리하여 건곤(乾坤)은 마음과 함께 청징(淸澄)해질 것이니 이가 즉 석불사의 안목이다.

21) 대천세계(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의 별칭. 삼천세계의 세 번째.

22) 몽동(嶺瞳):병선(兵船).

 

이와 같이 석불사는 엄준(嚴峻)한 교회(敎悔)를 통하여 불성의 각오를 얻을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석불사는 응집적 결구체(結構體), 촛점적 결구체, 죄악이 병 속에 들어가 죄어짜질 압착기, 압착된 죄악은 보리정심의 청징옥수(淸澄玉水)가 되어 다시 그 보병에서 흘러나와 대천세계의 항하사(恒河沙)적 죄악을 청징케 소생시킬 수 있는 호리병, 그것은 일종의 호중세계(壺中世界)이니 형식은 비록 인도 이래의 '체다’에 있다 하더라도 용의(用意)는 벌써 다름이 크다.

23) 항하사(恒沙): 인도 갠지스 강의 모래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효가 많다는 뜻.

 

석불사에서 이와 같이 정화된 중생은 마음놓고 불국사를 찾을 수 있다. 불국사는 개방된 세계, 펼쳐진 세계, 연화정토(蓮華淨土)가 그대로 맡겨진 세계, 여래묘상(如來妙相)과 저절로 공생될 수 있는 세계, 유락(遊樂)할 수 있는 세계이다.

24) 연화정토(蓮華淨土): 극락세계.

 

취와단벽(翠瓦丹壁)은 창공에 그려 있고, 홍번금당(紅幡金幢)은 중천에 소스라쳐 있고 영롱한 종경 소리 운표(雲表)에 떠들리고 복욱(馥郁)한 연단향(蓮檀香)이 지상에 숨어 있다.

25) 복욱(): 풍기는 향기가 아주 그윽함.

 

인왕남문(仁王南門;지금은 없음)을 들어서면 홍련 백련이 난만한 청정연지(淸淨蓮池)가 오취오탁(五趣五濁)을 일거에 씻어 주고 인석(引石), 주석(柱石), 면석(面石), 만석(滿石)이 종횡자재(縱橫自在)로 층계단계를 이룬 그 위로 비맹무절이 그대로 수중에 몽환경을 이루고 있다.

26) 오취오탁(五趣五濁):오취는 사람의 업인(業因)에 따라 오르게 되는 다섯 가지세계로 천상(天上), 인간, 지옥, 축생, 아귀(餓鬼)를 말하고, 오탁은 이 세상의 다섯가지 더러운 것으로 겁탁(劫濁), 번뇌탁(煩惱濁), 중생탁(衆生濁), 견탁(見濁), 명탁(命濁)을 지칭한다.

27) 비맹무절:날아갈 듯한 지붕과 춤추는 듯한 기둥.

 

단단죽석(團團竹石)을 어루만지며 백운석제(白雲石梯)를 오를 양이면 홍예답도(虹霓踏道) 위에 좌우로 전개된 제불보살의 출유보도(出遊步道), 그 끝으로 좌우 경루(左右經樓)의 부용탱주의 환상적 가구(架構), 8각형 수미석산(須彌石山)위에 108성을 울어예는 종루 종각의 승천교(升天橋;지금 없음), 다시 또 청운석제(靑雲石梯)를 올라서면 표표한 비맹(飛甍) 형식의 무대 판석(舞臺板石)이 곧 묘상(妙想)이요, 자하중문을 들어서 눈앞에 보이는 보등(寶燈)을 격하여 대웅금당을 들어가면 소석가(塑釋迦)와 좌우4보처(左右四補處;彌勒·竭羅·阿難·阿葉)가 역시 수승(殊勝)하시며(지금 없음), 돌아나와 앞뜰을 보면 동의 다보여래(多寶如來) 상주증명(常住證明)의 미묘한 보탑(寶塔), 서의 석가여래 상주설법(常住說法)의 간엄(簡嚴)한 층탑, 실로 모두 묘상의 권화(權化)요 미기(美技)의 총집이 아닐 수 없다.

28) 권화(權化): 부처·보살 등이 중생을 건지기 위해 인간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

 

방(方)과 원(圓)이 평면에서 난투하고 입체에서 조화됨은 다보탑의 수상(殊相)으로 차별세계 평등세계의 즉일상(即一相)이요, 방규각체(方規角體)가 층층이 누적된 석가탑은 화엄묘리의 정제된 규격미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8부금강이 연화 석대 위에 석가층탑을 위요(圍繞)하고 있음도 특별한 착상인데(지금 없음) 공장(工匠)의 고심은 무영(無影)의 전설로 나타나 있다. 익랑(翼廊), 보랑(步廊)의 엄(嚴)도 장할 뿐 아니라 무설전(無說殿),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문수전, 응진전(應眞殿),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향로전, 천불전,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기타 무수한 당(堂), 전(殿), 누(樓), 각(閣), 요(寮), 실(室), 문(門), 낭(廊) 등이 시대의 변천, 교리의 변화를 입는 대로 정제되던 교종가람(敎宗伽藍)이 부정(不整)된 선종가람(禪宗伽藍)으로 후대에 들며 난화(亂化)되었으나 당대의 화엄 배치의 정제성을 우리는 회상하여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특히, 미타의 48원(願) 장엄의 땅인 극락정토가 48단 보계(步階)를 통하여 서역에 경영되어 있음도 다른 가람에서 볼 수 없는 착상이니 극락전(옛 積爲祝殿)과 좌우 승방은 후대의 것이나 안양문을 나서 칠보교, 연화교의 중중보계(重重寶階), 특히 연화교의 보단마다 새겨진 화판 굴곡, 중앙에 놓여진 부층보계(副層步階), 이곳을 밟고 내려오면 9품연지(九品蓮池)의 복욱한 향운(香韻), 수중에 뜬 범영루(泛影樓)의 기상(奇想), 당간쌍주(幢竿雙柱)를 격하여 은연중 내다보이는 남천평야.

 

불국사는 이리하여 위대한 건축가의 교상(敎相)에 밝고 예술에 깊고 행정에 눈빠른 종합적인 대건축가의 통제 있는 복안하에 통제된 경영임을 깨달을 수 있다. 김대성이 만일 실재적 인물이었다면 그는 조각가라기보다 우선 건축 설계의 대가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불국사에는 지금 당대의 조각으로 동조(銅造) 비로자나불, 동조 아미타여래불이 있고 무설전 동북 석정측(石井側)에 석조 배광(石造背光)의 파편이 있고 극락전 앞에 원래 다보탑에 놓였더라는 석제 사자가 있다(비로 전지 앞에 1보탑이 있지만 이것은 시대가 매우 뒤떨어지는 작품이다). 지금 이 제작(諸作)과 다시 저 석굴암(석불사)의 제작과 비교한다면 석굴암의 제작이 우선 그러하지만 반드시 동일인의 동년대의 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사에서 이 모든 조각이 김대성의 직접 착공에 의한 것 같이 생각한다면 그는 문리(文理)를 모르고 사실을 모른 사람일 뿐이다. 아무리 그가 천생의 대재(大才)이기로 그 여러 작품을 한손에 만들 수 없었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능력 명재(命才)가 한수(限數)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그는 당시의 국가의 중신이요 대상이었다. 그러한 그가 어찌 석철(石鐵)의 조용(彫鎔) 속에 몸을 묻힐 수 있었으랴. 공장(工匠)은 그러므로 반드시 따로 있었던 것이다. 무수한 무명의 명장(名匠)이 혈한간(血汗間)에 정력을 쏟아 놓은 것이 저 여러 가지 작품들이다.

 

우리는 일언으로써 김대성의 창건이라 하고, 김대성의 창건이란 말에는 그가 곧 승묵척목(繩墨尺木)간에서 구구영영(區區營營)하였을 것같이 생각한다.

29) 구구영영(區區營營):부지런히 일함.

 

이는 실로 그릇된 ‘이돌라’요 사실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소이가 아니다.

idola: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고정 관념. ‘우상(偶像)’이라는 뜻으로 베이컨(Bacon, F.)이 쓴 용어이다.

 

다만 그의 心寸의 획책 속에서 나온 것이요, 그의 획책이 본시 이 방면에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완미(完美)를 볼 수 없다 하여 그를 조각에, 건축에 일가견이 있고 일척안(一隻眼)이 있던 위재(偉才)였다고 하면 이는 사실에 가까울 수 있는 상정이라 할 수 있다.

김대성을 위대한 건축가, 위대한 조각가라 한다면 결국 이 뜻에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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