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김흠운은 신라인이니, 내물왕의 8세손이요 잡찬 達福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화랑 문노(文努)의 문하에 종사할 제 도중(徒衆)들로부터
“아무는 전사하여 그의 이름이 이제까지 남아 있다.”
라는 말을 들으면 김흠운은 문득 감격하여 개연히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자기도 그를 본받겠다는 빛을 보였다.
그리하여 동문들로부터
“이 사람이 만일 적에 부(赴)한다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하리라.”
라는 말까지 들었던 것이다.
백제는 늘 고구려와 맺어 신라의 숙적이 되어 오던 것으로서 특히 무열왕 2년(655)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북경(北境) 33성을 공취(攻取)함에 이르렀다. 이에 무열왕은 일면에 당에 향하여 원(援)을 구한 결과 당은 우선 그의 숙적인 고구려를 치기로 하여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과 좌위중랑장(左衛中郎將) 소정방을 시켜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그때 여·당 양군은 귀단수(渾河인 듯)에서 충돌한 다음에 당군은 드디어 신성(新城; 봉천 부근)의 외곽을 불지르고 별소득 없이 귀환하였음).
이에 신라에서는 백제를 치기로 되어 김흠운이 낭당대감(郎幢大監 ; 중대장)으로 출정의 임에 당하였다.
김흠운은 국명을 받자 집에 돌아가 쉬지도 아니하고 바람에 부딪치고 비를 무릅쓰며 사졸로 더불어 감고(甘苦)를 같이하며 백제의 경역(境域)에 이르러 양산(陽山;옥천의 남쪽)에 영(營)을 베풀고 조천성(助川城 ; 역시 옥천의 남에 있었던 듯함)을 진공코자 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백제군은 밤 사이에 疾馳하여 와서 미명에 벌써 陣壘를 넘어드는지라, 불의에 역습을 받은 신라군은 심히 낭패하여 군정이 동요되매 백제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급속한 공격을 가하므로 화살은 빗발치듯 하
였다.
▶疾馳: 급히 말을 달림.
이에 김흠운은 의연히 창을 쥐고 말에 올라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본 대사(大舍) 전지(詮知)는
“지금 어두운 가운데에 적이 일어나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으니 공이 비록 죽는다 해도 알 사람이 없을지며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골(貴骨;신라 골품제에 있어서 성골, 진골과 같은 골족을 가리킨 것임)이요 대왕의 반자(半子)이니 만일 적인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오인의 수치임에랴.”
하고 달래었다.
▶반자(半子):반자지명 (半子之名)이라 하여 사위를 일컬음.
김흠운은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허한지라, 사람이 알고 알지 못하는 것이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랴.”
하며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종자(從者)도 고삐를 부여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칼을 빼어 휘저으며 백제병과 싸워 수 명을 무찌르고 드디어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대감(大監) 예파(穢破)와 소감(小監) 적득(狄得)도 서로 더불어 전사하고 보기당주(步騎幢主;보기 대장) 보용나(寶用那)도 김흠운의 죽음을 듣고
“그는 귀골이요 위세를 누렸으며 세인들도 애석히 아는 바로되 오히려 죽음으로써 절(節)을 지켰거든 하물며 보용나와 같은 것은 살아도 유익이 없고 죽어도 손이 없음에랴.”
하고 드디어 적중에 뛰어들어 수삼 인을 무찌르고 거꾸러졌다. 김흠운이 당시 3군에게 준 충동이 과연 어떠하였음은 이로써 짐작할 수가 있거니와, 이 사실을 들은 무열왕은 크게 슬퍼하여 흠운·예파에게 일길찬의 위(位)를, 보용나·적득에게 대나마(大奈麻)의 위를 추증하였으며 그들의 장렬한 최후에 대하여 국민들도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애도의 정을 읊조렸다 한다.
원래 신라의 무사도는 화랑제도로부터 우러난 것이니 화랑의 도중(徒衆)은 서로 모여 산수간에 오유(娛遊)하며 훈련을 쌓는 것이다. 미려장엄(美麗壯嚴)한 명산대천에서 자연의 위력과 아울러 국토에 대한 애호심 또는 그를 신령시하는 정신적 감화를 받는 동시에 도의로써 서로 가다듬으며 가악으로써 감정을 도야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양장 용졸(良將勇卒)과 현좌충신(賢佐忠臣)이 거의 화랑 출신이었나니 그들 화랑 출신의 무사의 행동을 보면 대개 ① 위국봉공(爲國奉公)의 정신이 뛰어난 것 ② 의협심과 염결(廉潔)의 정조가 깊은 것 ③ 전진에 임하여는 유진무퇴(有進無退), 사(死)를 무서워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달게 받는 것 등을 들 수가 있는 바이니 여기에서 김흠운의 행적도 또한 그의 일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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