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백제의 계백과 신라의 김유신으로 말미암아 연출된 용양호박의 황산(黃山)의 일전은 실로 양국의 운명을 결한 것이며 동양사상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제 먼저 황산역이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추어 보면, 백제에서는 특히 그의 말기에 이르러 부질없이 신라와 전단(戰端)을 여러 연년이 싸운 결과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였으며 무왕과 의자왕은 모두 음사연악(淫奢宴樂)에 마음을 빼앗겨 국정이 문란하고 민원(民怨)이 높아졌다.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의자왕을 간하다가 하옥되매 다시 감히 간하는 자도 없게 되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죽을 때에 왕에게
“신이 항상 시세의 변함을 살펴보오니 반드시 兵革의 일이 있을듯하외다. 만일 외병이 침래하거든 육로로는 침(탄)현(沈(炭)峴)을 넘게 하지 마옵시고 수군은 기벌포안(伎伐浦岸)에 들지 못하게 하시고 험애에 거하여 막아지이다.”
라고 상서를 올려 최후까지 우국의 적성(赤誠)을 피력하였으나 의자왕은 조금도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의자왕 20년(660)에 신라와 당의 연횡(連衡)이 드디어 구체화하여 당의 소정방, 유백영 등은 13만 병을 인솔하고 성산(城山 ; 산동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 ; 남양만 덕적도)에 이르고 신라의 김유신은 정병 5만으로써 진격해 오게 되었다.
1) 연횡(連衡): 연횡이란 합(合從)에 반대되는 말로, 본래 전국시대에 진(秦)을 으뜸으로 하여 동서로 뻗친 여섯 나라를 연합하였던 것이다.
갑자기 수륙 양 방면으로부터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받게 되매 백제 군신의 작전계획은 자못 구구하여 혹은 속전(速戰)을 주장하며 혹은 노사(老師)의 책으로 완전(緩戰)을 고집하여 용이히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이에 고마미지(古馬彌知; 장흥 부근인 듯)현에 유배되어 있던 좌평 흥수(興首)에게 사자를 보내어 문의하였더니 홍수도 또한 성충의 의견과 같이 백강(白江 ; 기벌포를 가리킨 것이니 금강하류인 듯함)과 탄현(공주의 남쪽)을 굳이 지켜 적의 사졸이 피폐하고 적의 자량(資粮)이 핍절됨을 기다려 공파하기를 진언하였다.
당시 시의심(淸疑心)을 품고 있던 백제의 대신들은 홍수가 오랫동안 유수(幽囚)되어 있으므로 군국(君國)을 원망할 터인즉 그의 말을 믿지 못할 것이라 하여 도리어 반대의 계획을 세웠다. 즉 당군을 백강에 들여 선척(船隻)의 방진을 치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을 탄현에 오르게 하여 마필을 병구(幷驅)치 못하게 한 다음에 병졸을 풀어 엄격키로 하였다.
▶병구(幷驅): 마필을 나란히 달리게 함.
그리하여 어느덧 나·당 연합군은 각각 백강과 탄현을 지나 점점 수도 사비성에 가까이 쳐들어오는지라, 이에 백제에서는 용장 계백(벼슬은 達率)을 시켜 먼저 강적 신라군에 당케 하였다.
이에 형세가 심상치 아니함을 깨달은 계백은 최후의 각오를 굳게 하고 결사의 사(士) 5천을 뽑아 출전할새
“일국으로써 나·당의 대병에 당케 되니 국가의 존망을 가히 알지 못할지라.
나의 처자도 적의 노비가 될지도 모르는 바이니 살아서 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 쾌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그의 처자를 죽인 다음에 병사를 이끌고 황산들(連山 동쪽 10리)에 나아가 신라군에 앞서 험요한 지점에 점거하여 3영(三營)을 베풀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7월 9일에 김유신의 신라군과 만나 건곤일척의 격전을 시작할새 계백은 사졸에 대하여
“옛적의 구천(句踐월나라 왕)은 5천 인으로써 오(吳)의 70만 중을 파하였으니 이제 각원(各員)은 마땅히 분려(勵)하여 승(勝)을 결하여서 국은을 갚을지어다.”
라고 격려하며 드디어 분전한 결과 1로써 천에 당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신라군을 자주 물리쳐 혈전 4회에 모두 신라군을 제압하였다.
이에 신라의 사기는 沮喪이 되고 병졸의 피폐가 자못 심하매 신라측에서는 퇴세(頹勢)를 만회키 위하여 사기 진작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장군 흠순(純 ; 김유신의 아우)이 그의 아들 盤屈을 격려하매 반굴은 백제 진중에 돌입하여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이에 뒤를 이어 품일(品日)이 또한 16세의 소년인 그의 아들 관창(官昌 ; 화랑 출신)에게 3군의 표적이 될 것을 격려하니 관창이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백제 진중에 또한 뛰어드는지라. 계백은 관창을 사로잡았으나 그의 어린 데 용감한 것을 못내 사랑하여 차마 해를 가하지 못하고
“신라는 가히 당적치 못할 것이로다. 소년도 오히려 이러하거든 하물며 장사들이랴."
하고 탄식하며 그대로 돌려보내었다.
용사라야 용사를 사랑하는 것이다. 관창이 비록 적이라도 소년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용감히 덤비는 데에야 계백이 또한 감격치 아니할 수가 있으랴. 계백의 용장한 무사적 정신은 실로 이것으로도 그의 일반을 넉넉히 엿볼 수가 있는 바이다.
관창은 본진에 돌아와
"내가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베고 기(旗)를 쥐고 돌아오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고 다시 손으로 샘물을 움켜 마시며 백제 진중에 돌입하매 이에 계백도 할 수 없이 그를 베어 그의 머리를 마안(馬鞍)에 붙들어 매어 신라 진중에 보내었다. 이 꼴을 본 품일은 피가 흐르는 관창의 머리를 들고
“오아(吾兒)의 면목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다. 왕사(王事)에 능히 죽어 주었으니 다행이구나."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신라의 3군은 갑자기 감격과 흥분에 타올라 용기백배로 맹격에 나오게 되었다. 계백은 중과부적이라 과병(寡兵)으로써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힘이 다하고 세가 궁하매 계백은 드디어 사졸과 같이 장렬무비(壯烈無比)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이 황산의 역(役)은 백제 최후의 격전이며 용장 계백의 기백이 12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운명을 쌍견(雙肩)에 멘 계백의 최후는 백제의 종막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로부터 나·당 연합군은 결하(決河)의 세로써 진격케 되어 백제는 드디어 그들의 손에 쉽사리 평정됨에 이르렀다.
▶결하(決河): 홍수가 져서 제방을 무너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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