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10.백제-아비지(阿非知) 본문
권덕규(權悳奎)
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호 애류(崖溜). 경기도 김포 생. 휘문의숙 졸업.
휘문, 중앙, 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글학회에서 「큰사전」편찬위원 역임.
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등이 있음.
아비지는 백제 의자왕 때의 명장(名匠)이다.
신라 선덕여왕의 청에 응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우니 높이가 225척이요 그 장려함이 반도에 제일이다.
신라에 3대보(三大寶)가 있으니 진흥왕 때에 조성된 황룡사의 장육불상(丈六佛像)과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이 탑이다.
신라 법흥왕 15년 (528) 무신이라. 사인(舍人) 이차돈(異次頓 ; 속명 朴厭髑)이 순법(殉法)한 뒤로 불교가 걷잡을 새 없이 흥하여 유명한 불국사가 왕의 말년에 이룩되고 뒤미쳐 진흥왕 27년(566) 병술에 황룡사가 낙성되고 동왕대에 사문(沙門) 각덕(覺德)이 양(梁)에서 환(還)하니 신라 승려의 유학의 시작이며, 국경을 잡아 헤쳐 마운령(摩雲嶺)에 순경비가 섰으며 그대로 이어 진평왕은 처음으로 선부서(船府署)를 두니 밖으로 해구를 제어하자 함이며, 인물로는 김유신이 나고 원효 대성이 나고 동시에 고구려에는 을지문덕이며 연개소문이 있어 국세가 웬만치 강한 게 아니매 당(唐)이 스스로 불신(不臣)의 예로 대할 즈음이다.
삼국의 가운데 2위에 가라면 서러워할 신라의 선진인 백제가 또한 여간할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진사어나하(辰斯於羅瑕)의 궁실의 宏麗, 개로어나하(蓋齒於羅瑕)의 전성(磚城)의 장려(壯麗), 동성어나하(東城於羅瑕)의 임류각(臨流閣)의 화미(華美), 법왕(法王)의 왕흥사(王興寺), 무왕(武王)의 익산탑(益山塔 ; 미륵사탑)의 장려 등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건축의 호사가 놀라왔었다.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라는 나라(奈良)의 법륭사(法隆寺)도 백제의 뼈, 고구려의 살이 얽히고 설킨 작품인 듯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등 사공(寺工)의 성명이 남아 있고 당대의 불찰(佛刹)을 통틀어 백제양 가람(百濟樣伽藍)이라 칭한 만큼 백제 공장(工匠)의 건축이 아니면 건물로 알지 않을 지경이었다. 백제의 후진인 신라가 황룡사탑 성조(成造) 같은 큰 건축에 어찌 아비지 이하 수백 인의 백제 공장을 초치(招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냐.
간단히 말하면 이 황룡사의 9층탑은 자장법사(慈藏法師)의 청으로 세운 불사리탑이지만 다른 편으로 그 내용에 있어 따져 보면 단순히 그런 것만이 아니니, 바야흐로 일어나는 신라가 이만한 역사(役事)를 이룩할 때 어찌 다만 사리 봉안만이 본뜻이랴. 반드시 그 속에 엉큼한 수작이 있을 것은 사실이다. 물론 나승(羅僧)의 입당 구법(入唐求法)도 얼른 보면 한 행각이요 유학이지만, 그 속에는 외교가 있고 정찰이 싸인 것이다.
이번 자장의 구법 귀국에 제(際)하여 태화지신(太和池神)에게 빌기를, 우리 신라가 안으로 여·제(濟) 2국이 번갈아 지근대고 밖으로 말갈, 도인(島人)이 때없이 들싸여 백성의 걱정이 된다 한 것이 저간의 소식을 전한 것이며, 또 당 임금이 내린바 경상(經像), 사리, 가사, 폐백(幣帛)들을 가지고 돌아와 건탑(建塔)할 일을 왕께 아뢸새 신(神)의 말로 전갈하되
"너의 나라가 여왕으로 왕하여 덕만 있고 위(威)가 적으므로 이웃이 넘보나니 빨리 돌아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 절의 호법룡(護法龍)이 절을 돕고 왕조(王祚)가 영안케 하며 인국(隣國)이 항복하고 九韓이 조공하리라.”
하였다 함은 아무쪼록 건탑의 의(議)가 속결되기를 유착(楡捉)한 것이다.
▶왕조(王祚):왕의 지위.
그리고 건탑할 의가 결(決)한 뒤에 공장은 백제에 청해야 가하다 함은 증언한 바와 같이 자국의 건축술이 떨어짐을 뜻함이요, 아비지가 청을 입어 신라에 가 탑주(塔柱;中心柱)를 세우던 날 밤에 본국 백제가 망하는 상을 꿈꾸어 탑 역사에서 손을 떼려 하더니 문득 천지가 진동하고 도량(道場)이 어둑한 속에 한 노승(老僧) 한 장사(壯士)가 금전문(金殿門)으로부터 나와 심주(心柱)를 세우고 이내 간 데 없는지라.
아비지가 맘을 고쳐 역사를 마쳤다 함은 아비지가 아무런 줄 모르고 보백(寶帛)을 많이 받고 신라에 와 역사를 시작한 뒤에야 탑의 건립이 한갓 사리 봉안만이 아니라 인국을 멸하자는 뜻이요, 자국 백제도 그 속에 끼어 있음을 알고 역사를 그치려다가 말 잘하는 노승, 범 같은 장사의 꼬이고 으름을 못 이겨 역사를 끝냈는가 한다.
탑을 이루니 철반기(鐵盤己) 위의 고(高) 42척이요 기(己) 아래가 183척으로 총고가 225척의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자장이 주(主)하고 국왕이 임하신 아래에 욕심 많고 사망 클 낙성식이 벌어졌다. 물론 자장이 가져온 사리는 탑주 속에 봉안되었다. 사리는 통히 백립(百粒)으로 통도사계단(戒壇)과 울주(蔚州 ; 현재 울산) 대화사(大和寺)에 分安하였다 한다.
“탑을 세운 후에 천지가 개태(開泰)하고 삼한이 통일되니 어찌 탑의 영음(靈蔭)이 아니냐.”
라고 한 것은「삼국유사」의 찬문(贊文)이다.
▶영음(靈蔭):신령스런 도움.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 치기를 꾀하다가 신라에 3보가 있으니 범치 못한다 하고 그만두었는데 3보는 물론 황룡사의 장육상, 9층탑, 진평왕 옥대로 대(帶)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께 헌(獻)한 뒤에 그 귀락(歸落)을 알지 못하나 경주 고분에서 발굴된 금관대식(金冠帶飾)으로써 그 영자(影子)를 엿볼 것이요, 장육상은 고려 고종 때에 몽난(亂)에 재(災)한 바 되었으나 곳곳에 남아 있는 신라 불상으로 그 모형을 어림할 것이며, 탑은 원층(原層) 그대로는 아니나마 남은 3층을 미루어 원형의 웅장하였음을 알 것이다.
백제인 아비지의 손으로 조성된 자국 멸망의 방자탑 곧 9층탑은 기어이 백제를 망하게 하였다. 또한 그 주인 신라도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탑은 오직 우뚝 서서 아비지의 조성(造成)임을 말한다.
아! 예술은 영원하다.
*참고: 안홍(安弘)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빌어 층층이 대표된 9한(九韓)의 이름을 적으면 제1층 일본, 제2층 중화(中華), 제3층 오월(吳越), 제4층 탁라(托羅), 제5층 응유(鷹遊), 제6층 말갈, 제7층 단국(丹國), 제8층 여적(女狄), 제9층 예맥(濊貊) 이러하다. 모두 족속(族屬)으로 시(示)한 듯한데, 그렇다면 여·제는 예맥 속에 들었을 것이다. (삼국유사, 동경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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