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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73. 인체 시계

耽古樓主 2023. 6. 16. 03:22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현대 생활에서 시계를 갖는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계에 갇혀진 몸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를 사는 지혜랄 것이다.

 

이미 돌아가신지 20여 년이 됐지만 통도사(通度寺)에 구하(九河)라는 법명의 고승(高僧)이 있었다. 한말(韓末)에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에 붙어 요염을 부렸던 배정자(裵貞子)와 더불어 통도사에서 동승(童僧) 생활을 했다던 분인지라 노쇠하여 눈도 안 보이고 귀도 들리지 않으며 오로지 觸覺과 영감(靈感)만이 살아 있을 때 만나뵌 적이 있다.

 

스님은 빗물을 손바닥에 받아보는 것만으로 이 비 끝에 어느 법당 앞의 모란이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라고 하고, 아침 안개를 얼굴에 쐬어보고 종각 곁의 단풍이 오늘부터 붉어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등 시후(時候)를 단 하루도 어김없이 예언했다 한다. 그리고 거처하는 승방에 시계 걸어두기를 평생 동안 거부한 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마루에 내리쬐는 햇살을 손바닥에 받아보고 시간을 분단위(分單位)까지 알아맞히는데 가장 큰 오차가 10분을 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볕의 따습고 차갑고로 분간하는 것이 아니라 볕의 무겁고 가볍고로 분간했다 하니 속인(俗人)은 그 경지를 이해는커녕 상상하기도 힘들다.

 

구하스님만은 못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이처럼 시후와 생리와의 함수관계로 시간을 지각하고 살았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배시계라는 말도 있듯이 생리시계(生理時計), 곧 바이오리듬에 의해 '점심때가 됐구나'하고, 시간을 알고 논을 갈기 시작하고, 한 마지기를 갈고 나면 '새참 때가 됐구나'하고, 시간을 알았다. 곧 사람이 시간을 지배했던 것이다. 한데 시계라는 고달픈 미물이 생겨나면서부터 그에 의존하는 바람에 자연의 오묘한 생리시계가 퇴화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침 9시까지 출근하느니, 정오(正午)에 만나느니 하며 특정의 시간에 구속되고 지배받는 시간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자유로워야 할 인간이 시계를 가짐으로써 자유로워지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시계를 갖는다는 건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다. 시계를 갖고 안 갖고와 관계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굳이 잡아다가 각박하게 자르고 쪼개어 자신의 자유와 행동을 그 촌각(寸刻) 속에 구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시각각 죄어드는 구속의 올가미를 자신의 목에 거는 격이다.

 

《시간술(時間術)》이란 책을 쓴 베네트란 학자는 이 시계로부터의 탈주(脫走)를 장려하고 있다. 그 방법은 이렇다. 시계를 일부러 10분이나 15분쯤 앞서가게 해놓고 그 시계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쓴다든지, 일을 시작할 때마다 長針을 12시에 맞추어 내 시간으로 만들어 쓴다든지, 기차를 타러 갈 때 다음 기차 시각을 알고 느긋한 마음으로 나간다든지, 약속시간을 몇 시 몇 분 정시(定時)로 하지 않고 15분 사이, 하는 식의 시간대로 한다든지…………. 현대생활에서 시계를 갖는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계에 갇혀진 몸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를 사는 지혜랄 것이다. 자동차를 다니지 못하게 하는 도시로 소문난 스위스 알프스의 체르마트 인근에 시계탑을 없애고 시민 모두 시계를 갖지 않음으로써 시계 시간으로부터 탈주, 생리시간의 복고를 지향하는 소도시가 있다는 외신보도를 보고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들어 몇 자 적어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