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인은 별을 보고 그 많은 손을 요구하는 들에 나아가, 별을 보고 들어와야 했으며 이 한국적인 농경 구조가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유수한 조기 민족으로 만들어줌 직하다.
한국인의 노동관의 한 특성으로 부지런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 한국인이 별나게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조기민족(早起民族)인 것도 이 같은 부지런하다는 노동관의 한 나타남이라고 본다.
얼핏 보기에 부지런하다는 것은 시나브로이즘과 배치되고 모순되는 행동방식 같으나 한국의 농사가 시한에 쫓긴다는 구조적 특성에서 형성된 양면성의 노동관으로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구조란 절대적이라기보다 상황에 따라 정반대로도 나타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에 모순된 것끼리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상황이나 시대의 여건에 따라 어떤 것이 강하게 나타나고 또 어떤 것이 약하게 나타나기도 하며 또 잠재되기도 하는 것이다.
미국 서부의 백인 야채상인들이 성이 났다. 그들은 동업자조합을 통해 당국에 호소도 하고 집단시위마저 벌이기도 했다. 그들의 슬로건은 '한국 야채상에게 제재를 가하라'는 것이었다. 백인이라는 우세한 사회적 지위를 이용, 경합하는 동업자를 탈락시키려는 것도 아니요, 기득한 상권에의 새 도전자를 제재하려는 것도 아니다.
공정한 경쟁이 생리가 되어 있는 미국 사람들이 그러할 리는 없다.
미국인 야채상인들이 성난 원인을 살펴보면 곧 미국인과 한국인의 문화생리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이민 온 한국의 동포들은 적은 돈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함'만 투자하면 영위되는 야채상을 많이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영위해 왔던 야채가게가 적지 아니 우리 동포 손으로 넘어왔고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
다른 업종에 비해 남달리 일찍 일어나 농장에 차를 몰고 가서 야채를 사다가 남들 일어나기 전에 신선한 야채를 가겟머리에 늘어놓아야만 한다.
한데 미국인 야채상인들은 전날 저녁에 야채를 들여놓기에 아침에 가게를 여는 시간은 6시가 관례였다. 기득권 속에 침입자처럼 끼여들어야만 하는 한국의 야채상들은 그들 관례대로 6시에 일어났다가는 손님을 끌 수 없다. 한국 야채상끼리 조합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각자가 미국 상인보다 1시간 앞당겨 5시 이전에 일어나 농장에 차를 몰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전날 저녁에 들여놓은 미국인 가게의 야채보다 신선하고 이슬이 방울방울 맺힌 야채가 손님을 보다 유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야채상의 '5시 개점'은 관례가 되고 손님도 적지 아니 흡수하게 되었다. 당황하게 된 미국 야채상인들은 그들의공정한 경쟁심과 페어플레이 정신이 작동하여 그들의 조기(早起)시간을 한국상인처럼 한 시간 앞당겨, 저녁에 들여놓던 야채를 새벽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한국 야채상인들은 이 역시 서로 약속한 것이 아니지만 제각기 독자적으로 보다 한 시간 앞당겨 4시에 일어남으로써 보다 신선한 야채를 보다 일찍이 가겟머리에 늘어놓게 된 것이다. 역시 손님은 한국 가게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공정한 경쟁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생업에 종사하여 일하는 시간보다 그 여가시간을 한결 소중하게 여기는, 곧 여가를 위해 일하는 그들 생리로써 야채상을 집어치우면 치웠지 새벽 4시까지 잠을 단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데다가 만약 자기네들이 이를 악물고 '4시 조기'로 경합을 한다 해도 한국인들은 이는커녕 입술도 물지 않고 '3시 조기'를 할 것이라는 개연성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함'에는 항복을 하고 차선적인 방법으로 비한국계 야채상인들의 단합을 촉구하며 호소와 항의 행동으로 나왔던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과 미국의 야채상이 대변해주고 있는 조기의 비교문화 생리인 것이다.
민족이나 문화권에 따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일어나는 기상시간은 차이가 심하다.
옛날부터 우리 문화는 하루 가운데 아침에다 비중을 많이 두는 문화였다. 그러기에 아침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신앙적인 의미까지도 결부되었었다. 옛날 어머니들은 해 뜬 후에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간밤의 달이 서천에 사라지지 않은 미명에 일어나 그 달이 비친 샘물을 떠야 한다. 이 달그림자를 긷는 행위를 용(龍)을 걷는다 한다. 용알이 담긴 이 샘물이 '용왕수'로 신성이 담긴 물이다. 이 용왕수를 동쪽 담 아래 떠놓고 벌겋게 붉어 오른 동쪽 하늘을 향해 손을 비비며 큰절을 했던 것이다. 해님에게 가족의 안태(安泰)와 집안의 복을 그렇게 비는 것이 한국 부녀자의 조건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장소를 조정(朝廷), 조당(朝堂)이라 하고 또 나라를 다스리는 정승 재상 등을 朝臣이라 불렀던 것도 아침문화권의 필연이 아니었던가 싶다. 옛날 임금님들은 해뜨기 전에 일어나 정사를 본다는 것이 왕도였기에 정사에 아침 '조(朝)'자가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나라 이름으로 해뜨는 나라의 뜻인 부상국(扶桑國)이니 조선(朝鮮)이니 하는 아침과 연관이 많은 것도 아침에 가치를 많이 두는 아침 문화권이라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 성싶다.
아침이 별나게 늦은 것은 라틴 민족이다. 프랑스에서 점포의 문이 열리는 것은 대체로 10시 안팎이다. 스페인에서는 정오 직전에야 우리나라 8시 정도의 러시가 이뤄진다. '점심을 오후 2시에 먹고 저녁밥을 밤 9시에 먹는 사람은 바보'란 속담마저도 있다.
너무 일찍 먹는다는 것을 빗댄 것이다. 극장은 보통 밤 10시부터 시작되는 것이 상식이기에 아침이 늦은 이유를 알 만하다.
이탈리아도 대체로 늦은 편이다.
이에 비해 게르만 민족이나 앵글로 색슨 민족의 아침은 빠른 편이나 한국처럼 미명에 움직이는 법은 없다. 프랑스의 보편적인 인사말이 ‘봉주르’로 '날'이 들어가 있는데 비해 영국이나 독일의 그것에는 ‘굿모닝’, ‘구텐 모르겐’ 하는 '아침'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아침의 비중이 라틴 문화권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게르만이나 앵글로 색슨의 아침보다 미국의 아침이 더 빠르다. 노래의 오클라호마에도 아침이 나오고 프랭클린의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미덕으로 나와 있다.
아침밥에 얼만큼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조기(早起)에 얼만큼 가치를 두느냐의 척도를 삼을 수가 있다. 유럽에서는 비교적 영국이 아침밥을 든든하게 드는 편이나 대체로 가볍게 든다. 빵 한 쪽과 계란, 햄 두 쪽 그리고 커피로 이뤄진 간단한 아침밥을 콘티넨털 브렉퍼스트라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콘티넨털이란 영국에서 말한 유럽 대륙을 의미한다. 곧 유럽에서는 아침밥을 영국보다 가볍게 먹어 왔기에 간단한 아침밥의 대명사로써 콘티넨털이란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남구(南歐)로 갈수록 아침밥은 더 간단해지는데, 스페인의 경우 겨우 차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운다.
미국의 아침밥은 영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보다 든든히 먹는 편이다.
요즈음은 아침밥을 거르거나 간단히 먹는 풍조가 우리나라에도 번지고 있지만 우리의 전통 식사에서는 아침밥의 비중이 제일 컸다. 세끼 가운데 분량도 제일 많고 질도 제일 좋았던 것이다.
아침에 가치를 두는 문화비중을 전세계적으로 가려보면 유목생활의 전통이 긴 문화권일수록 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의 농경생활은 11세기 전후해서 시작된 것이기에 반유목 · 반농경성이랄 수가 있고 그 반조기민족이 개척시대의 농경생활을 영위하면서 유럽보다 아침 문화에 투철해졌다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미국도 유사 이래 순수한 농경만 영위해 온 우리 민족보다는 아침 문화에 덜 투철하고 따라서 조기 경쟁에도 우리를 못 따른다. 미국에 있어 야채상인들의 조기 경쟁은 곧 이 같은 문화생리의 경쟁이었다는 데서 주의를 끄는 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농경민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삼포식 농업이나 동남아의 삼모경작 같은 농경은 사람의 손을 그다지 요구하지 않는다. 씨앗을 뿌려 곡식을 거둘 때까지 겨우 세 번이나 네 번 손을 쓰면 된다. 이에 비해 사철의 기후 변화가 심하고 그 시한 기후에 맞춰 그때그때 손을 써야 하는 한반도의 벼농사는 너무나 많은 손을 요구한다. 곧 어느 시한에 무슨 일을 꼭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시한의 연속으로 농사를 짓는다.
아마 단위 면적에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가장 빈도 높은 농경지가 곧 한국의 농경지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은 별을 보고 그 많은 손을 요구하는 들에 나아가 별을 보고 들어와야 했으며 이 한국적인 농경 구조가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유수한 조기 민족으로 만들어줌 직하다.
왜 한국인은 서양 사람에 비교해서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렇게 항상 바쁘고 부지런하고 초조하기만 할까.
느긋하고 느긋하지 못한 행동상의 문화 차이를 측정할 척도로써 한국인이 초식 민족이라는 것과 서양 사람이 육식 민족이라는 데서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동물원에서 사자 우리를 들여다본 사람치고 사자가 일어서서 움직이고 있는 광경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 줄 안다. 항상 엎드려 지긋하게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사자의 상태다. 우리 속에 갇혀 있기에 그러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필자는 아프리카 케냐의 야생공원에서 사자를 본 일이 있다.
갖은 야수들이 야생하고 있지만 사자가 가장 인기가 있어, 사자만 발견되었다면 관광객들은 사파리카를 그곳으로 몰아댔던 것이다. 수풀 속에서 발견한 사자는 창경원 우리 속에서처럼 여전히 눈을 감고 엎드려 있었을 뿐이었다. 움직이는 사자를 볼 수 없느냐고 누군가가 영국인 관리인에게 물었다. 그는 볼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당신이 꼭 사자 움직이는 것을 보려거든 사나흘 먹을 음식을 준비, 밤잠도 자지 않고 사자 옆에 지켜 앉아 있으면 그중에 한번쯤은 움직일 것이다.”
사자가 더디 움직이는 이유는 사자가 전형적인 육식동물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사자는 거동을 시작, 전력투구해서 짐승 한 마리를 잡아먹는다. 살코기뿐만 아니라 영양분 많은 각종 내장이나 피까지도 먹어 치우기에 사나흘 동안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배가 부르기에 움직일 필요가 없고 없기에 저토록 느긋하게 누워만 있는 것이다. 이 사나운 맹수가 누워 있는 주변에 수백마리의 얼룩말이나 사슴 떼가 태평스레 풀을 뜯고 있는 것은 진풍경이 아닐 수 없는데, 그것은 이 나약한 초식 동물들이 사자가 배가 불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이 초식동물들은 어떤 작용으로 사자의 배고픈 시기를 알아내고, 신호를 교환해서 지그재그로 도망을 친다는 것이다.
이처럼 육식동물은 섭취한 살코기의 고영양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느긋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원숭이 우리로 옮겨보자. 현기가 날 지경으로 부산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자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어느 한 마리 잠시도 멎어 있질 못하고 브라운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반드시 움직일 필요가 있어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한군데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우리 속이라 답답해서 나불대는 것은 아니다. 야생의 원숭이도 뭣인가 먹고 있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움직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원숭이는 전형적인 초식동물이요, 초식은 저칼로리이기에 먹자마자 연소되어 버린다. 그러면 칼로리 보충을 위해 옮겨가야 하고 옮겨가는 동작 도중에 먼저 섭취한 칼로리가 소비되어 버린다. 그럼 다시 옮겨가야 하는, 그런 부산히 나불대야 하는 습성이 체질화될 수밖에 없다. 초식하는 원숭이가 한군데 느긋이 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초식동물인 말이 힘을 잘 쓰는 이유는 사람이 사육한 연후의 일이다. 사육하지 않고 방생시키면 8시간 풀을 뜯어야 겨우 2시간 일할 기운을 얻는다고 한다.
초식동물은 이처럼 먹기 위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느긋하지 못하고 항상 분주하고 초조하다.
초식을 주로 해온 민족은 -비단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대체로 침착성이 부족하고 반면에 부지런하다는 사실은 영국의 동물학자 데스먼드 몰리스가 입증해 놓고도 있다.
지금 빈자리가 더러 있는 기차에 두어 명의 승객이 탔다고 하자. 입구 쪽 빈자리를 잡고는 가운데 자리가 빈 것을 보고 그 자리로 옮겨간다. 그 자리가 창틀 때문에 전망이 가린다는 것을 알자, 전망이 틘 빈자리로 다시 옮겨간다. 대체로 두어 번 이동함으로써 안착을 한다. 잠재된 원숭이성이 그렇게 한다.
자리를 잡고 나면 갖고 온 보자기나 백을 펴고 계란 삶은 것을 꺼내먹는다. 홍익회의 상인들이 들고 밀고 다니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오징어를 사 먹고 사이다를, 우유를 사 마신다. 열심히 먹는다. 잠재된 원숭이성이 그렇게 먹게 한다. 먹고 마시고 나면 방광이 부풀어 올라 열심히 화장실에 오간다. 그래서 한국의 기차 속은 원숭이 우리처럼 온통 장 속 같다.
미국에서 기차여행을 해 봤지만 절간 같이 조용하고 승무원 이외에 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차 속에서 뭘 먹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잠재된 사자성이 그렇게 하게 한다.
비단 기차 속뿐 만이 아니라 공원이나 해수욕장 등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도 이 원숭이성과 사자성의 차이 때문에 서양과 한국은 판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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