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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75. 똑바로 알아야 할 우리의 것

耽古樓主 2023. 6. 16. 03:26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우리 선조들은 서양사람들처럼 신을 믿지 않았다신을 믿지 않았지만 나의 잘못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불행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죄의식을 원천적으로 지니고 살았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 조간신문까지만 해도 거북등처럼 갈라진 논바닥이나 저수지 바닥의 사진이 났고, 바다의 소금물이 강줄기를 따라 역류한다고 보도되었다. 아침에 세수하는 어린 아들놈이 물을 헤프게 쓰기에 아껴 쓰도록 꾸짖고 나온 터였다. 마음에도 습기가 말라 마치 육포나 북어 겉처럼 거칠거칠 메마른 그 마음의 살갗에 비듬이 일 것만 같은 각박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각박한 안팎에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빌딩 사무실 창밖으로 손바닥을 내어 밀고 비를 반기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래층, 위층 사무실마다 창을 열고서 비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건너편 빌딩, 오른쪽 빌딩, 왼쪽 빌딩, 비안개로 흐린 멀리 떨어진 빌딩들에서도 창을 열고 비를 반기고 있었다.

 

빌딩 틈으로 난 아스팔트길에 우산 쓴 아가씨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건너편 빌딩에서 어느 누군가가 이 우산 쓴 아가씨들에게 외쳤다.

 

“옷 좀 젖으면 어떠냐, 이 단비에 !”

 

이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마치 한복판에서 사통팔달한 메아리처럼 빌딩 여기저기서 이 우산 규탄의 고함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비 그칠라!”

 

"요망스럽게 가시나들이!"

 

“왕년에 우산 없는 사람 봤나!”

 

비 내리는데 우산 쓰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고 잘못도 또 실례될 바도 아니다. 한데 제각기 따로따로 위치한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가뭄 끝의 단비를 가리는 이 행위를 저주하고 욕하는 이 공감(共感)은 어떻게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가뭄 끝의 비라지만 옷을 적시지 않게 우비를 갖추는 것은 합리적이다.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합리적으로 따지는 유럽 사람이나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우산 쓰는 행위가 조금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비난하는 측이 비난받는 대상이 된다.

 

한데 한국 사람은 전혀 다르다. 웬지 이 가뭄 끝의 비를 가리는 행위가 불손하고 죄가 되며 그러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어떤 정서적인 인자(因子)가 합리적인 인자 이전에 앞서 작동한다.

 

개화기 때 신문에 서울 종로 큰 바닥에서 가뭄 끝에 내린 비를 도롱이나 지우산 받고 걷다가 집단 폭행당한 사건이 이따금 보도되고 있었다. 폭행자를 다스려야 할 당시 경무청에서는 오히려 피폭행자를 구금하고 폭행자들을 치하해 내보내는 이상한 치안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뭄 끝에 내린 비를 가리고 다닌 사람이 있으면 순검들이 그러하지 못하게 만류하고 다니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다중의 분노 때문에 일어날 폭행을 예방하는 뜻도 있겠지만 한국인 공통의 공감을 보호하는 뜻이 더 컸을 것이다.

 

왜 한국에 있어 비 같은 자연 현상은 법이나 질서 같은 인간사보다 더 힘이 컸을까. 그리고 개화기 이래 모든 사물이나 사고가 근대화되고 과학화되었으며, 합리화되어 왔는데도 여전히 가뭄 끝에 내린 비를 가리는 행위에 아련한 저항감을 여전히 느끼고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

 

■不德과 感天思想

 

깊은 산촌 두메에 있었던 우리 집은 비가 내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天水畓) 몇 뙈기밖에 없었다.

 

내가 예닐곱 살 때였던 어느 몹시 가물던 여름날,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가 산속에서 나는 생수를 끌어 논에 대기 위해 물꼬를 파는 일을 돕고 있었다. 점심결에 논둑에 앉아 주먹밥을 먹었을 때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반찬도 없이 소금물에 뭉친, 뭉쳤어도 보리쌀이 많아 뭉쳐진 것도 아닌 그런 삼베주머니에 싼 밥을 먹고 나서 나는 물을 떠다 할아버지에게 바쳤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흔들며 그 물 마시기를 거부하고 '너나 마셔라' 했다. 가뜩이나 소금밥이 목에 잘 넘어가지 않는 꽁보리밥을 먹는데 물이 먹기 싫을 이유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벼 끝이 노랗게 죽어 내리고 메말라 갈라진 논바닥, 그 논바닥의 가장 큰 균열 틈에 손바닥을 넣어 보고 한동안 눈동자를 굴리던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혼자말을 하는 것이었다.

 

“…동제(洞祭) 때 내가 혹시 부정탄 짓을 했나, 도랑 건너 과수댁을 빈 자루로 돌려보낸 것이 화근인가.”

 

할아버지는 우리 마을 부락제가 있을 때마다 제주(祭主) 노릇을 했다. 제주는 제사가 있기 전 일주일부터 부정타는 일, 이를테면 상가에 가거나, 짐승 잡는 것을 보거나, 개 짝짓기를 보거나 해서는 안 되는 등 많은 터부를 지켜야 한다. 할아버지는 가문 이유를 자신의 어떤 과오에 대한 하늘의 응징으로 합리화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 우리 마을 도랑 건너에 일찍 과부가 되어 가난하게 사는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 아주머니가 양식 좀 얻으려 왔는데 빈 자루 채 돌려보낸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곧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지 않은 부덕(不德), 그 과부가 품은 한(恨)이 감천(感天), 하늘이 내린 응징으로 이 가뭄을 합리화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저 말하면 할아버지는 이 가뭄을 하늘이 할아버지에게 내린 징벌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죄인이며 하늘이 그 죄에 대한 벌로써 내리지 않은 물이기에 아무리 목마르다 해도 그 물을 마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문 땅속의 습도를 측정하면서 아련히 스스로의 신앙적 부정과 인간적 부덕을 모색하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의 정신적 자질은 나의 할아버지 혼자에 국한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한국인에게 보편화되어 있던 정신적 자질이었던 것이다.

 

■順天意識과 敬天意識

 

우리 선조들은 서양 사람들처럼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을 믿지 않았지만 나의 잘못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불행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죄의식을 원천적으로 지니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인이 어떤 불행을 당하면 나의 어떤 잘못에 대한 응징인가를 모색하게 마련이다.

 

가뭄이 나의 할아버지에게 가져다 준 불행을 두고, 가엾은 한 여인의 구걸에 응하지 않았던 과오를 상기하여 그것에 대한 응징으로 여기듯이, 어떤 인과(因果)를 모색하는 한국인 나름의 죄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인과의 시간적 길이나 공간적 폭은 굉장히 길고 넓다. 이를테면 아이를 못 낳으면 어떤 조상이 저지른 잘못의 징벌로 여기거나 또 지금 저지른 잘못의 징벌이 당장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아들 손자대의 어떤 큰 불행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시간 폭을 크게 잡는다.

 

나의 할머니의 선조 가운데 역사적으로 소문난 악신(惡臣)이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가 손을 베기만 해도 그 선조를 연상, “니 외할아비 죄받이다.” 벌한테 쏘이기만 해도, "니 외할아비 죄받이다." 하고 곧잘 말하던 기억이 선하다.

 

이 같은 악행이나 잘못, 부덕을 보상받는다는 인과(因果)로 파악하는 의식구조 때문에 한국인은 본질적으로 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에게 매정하게 하거나 또 남을 궁지에 몰아넣게 하려면 굉장한 마음의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만한 어떤 응징을 감당해야 할 각오가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의 선한 마음은 그들이 믿는 유일신(唯一神)의 감시를 받는다지만 한국인의 이 같은 선한 마음은 누구의 감시를 받는 것일까.

 

하늘(天)로 대변되는 자연의 섭리(攝理)다. 그것은 서양 사람의 신(神)과는 다르다. 신을 숭배할 대상체가 있지만 이 한국인의 하늘은 구체적인 대상체가 없다.

 

자연의 섭리와 인간사는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인사가 어긋나면 그 자연의 섭리가 어긋나는 그런 밀접한 일체(一體)로서 파악하고 그 자연 현상과 인간사를 보다 높은 곳에서 통괄하는 절대적 힘을 하늘(天)로 막연히 여긴 것이다.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순천의식(順天意識)과 하늘을 공경한다는 경천의식(敬天意識)이 곧 우리 민족의 소중한 정신적 자질이었으며, 순천이나 경천을 한다 할 제 아무리 은밀한 나 혼자만의 일이라도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 아래서 나쁜 짓을 하거나 나쁜 마음을 품을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스리는 자연의 섭리를 인간사나 인간의 힘으로 또한 하늘(天)이 거역할 수 없으며, 거역한다는 것은 순천이 아니라 역천이 되고, 경천이 아니라 비천(卑天)이 되므로 인간사가 아무리 합리적이라도 이 섭리 앞에서 감히 그 합리성을 내세우는 것을 불경으로 여긴 것이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빗속을 우산받고 가는 합리주의에 한국 사람이 저항을 느끼는 데 공감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경천의 정신적 자질이 애오라지나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 우리 둘레에서는 안 된다, 하지 마라는 가르침이나 푯말이 너무 많다. 얼마 전에는 어른을 두들겨 패거나 선생에게 폭행을 하면 형법으로 다스린다는 검찰 당국의 발표가 있었다. 하지 마라, 하면 법으로 다스린다 하는 것은 바로 그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자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된다.

 

법이 발달하고 유용하게 쓰이는 나라일수록 도덕적으로 퇴폐하고, 법이 발달하지 않고 쓸모가 없는 나라일수록 도덕적으로 성숙한 나라라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슬프게도 어른을 때리고, 스승을 때리는 것을 법으로 막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도덕적으로 퇴폐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 어쩌면 우리 역사상 가장 도덕적으로 퇴폐되어 있다는 증명이요, 역사적 도표(道標)로써 이 현상과 스승 폭행의 금령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요즈음 청소년이 정신적으로 타락하고 퇴폐되어 있음은 근대화에 따른 부수적 요소가 복합된 때문이요, 그 복합 원인 가운데 하나로써 이 한국인의 전통적 정신 자질인 경천의식의 쇠퇴를 들고 싶다.

 

개화기 이래 우리 선조가 누렸던 전통적 자질을 선별없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 하여 열등 요소로서 소멸시켜 왔다.

 

곧 한국에 있어 근대화는 곧 전통적인 자질을 소멸시키고 서구적 자질로 가급적 많이 대체시키는 작업이라 해도 대과가 없었다.

 

법률의 발달 없이도 수천 년 동안 우리 사회를 평온하게 유지되어오게 했던 황금 같은 자질인 이 경천의식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 하여 근대화란 도매금에 팔려 소멸되어 왔으며, 그 소멸된 바탕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이 소중한 전통적 자질에서 소외되고 한국인 고유의 죄의식을 지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우리 한국의 전통적 자질이 자꾸만 복잡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유용한 효력을 갖는가에 대해 한 가지만 예시해 보겠다.

 

남에게 못할 짓을 했거나 양심에 꺼림칙한 일을 했을 때, 비록 그것이 나만이 알고 있는 일일지라도 어떻게든지 나의 불행과 직결된다는 학설이 날로 유력해져 가고 있다.

 

물론 그 같은 죄의식이 노이로제 유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근간에 기하급수로 늘고 있는 심신병(心身病)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심신병이란 세균이나 구체적인 병인이 없는데도 심한 복통이나 치통, 근육통을 비롯 통증을 느끼는 병이다. 진단해 보면 아무 병인도 없는데 몹시 아프다. 특히 요즈음 청소년들 간에 이 심신병의 통증으로 병원을 찾는 비율이 해마다 높아 가고 있다 한다.

 

내가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또 법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어떤 불행의 보상을 예상했던 우리 선조들의 선견은 비록 그 불행의 양상은 다를망정 비과학적이 아님을 이 심신병(心身病)이 입증한 것이다. 이 같은 논리는 곧 심신병이란 현대병의 불행을 예방하려면 자기 자신이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또 법적으로 선해야 되며 이야말로 현대 사회에 살아나갈 온고지신의 지혜랄 것이다.

 

■되돌아 보아야 할 우리의 精神遺産

 

미국사람은 미국적인 것을 자랑삼고, 영국사람들은 영국적인 것에 프라이드를 삼고 있다. 프랑스 사람도 또 중국 사람도 그러할 것이다. 전통 있는 민족, 그리고 강대한 나라일수록 스스로의 고유한 것을 자랑삼고 있다. 그리고 그 자랑이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데 한국인은 지금 한국적인 것을 눈곱만큼도 자랑으로 삼고 있지 않다. 학교에서도 거북선이나 한글, 고려청자 같은 몇 가지 이외에 한국적인 것, 좋다고 하는 것을 전혀 가르치고 있지 않다.

 

한국인이 선진국인 미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있지만 '미국적'인 것을 그대로 한국의 것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블루 진을 입히고 록 음악을 요란스럽게 울리고 매일 조석으로 햄버거를 먹인다 해도 미국의 역사적 체험이나 문화생활을 체질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독일 클래식을 피아노로 치게 하고 또 아무리 값비싼 파리의 고급품을 사서 지닌다 해도 유럽의 정신까지 사 올 수는 없는 것이다.

 

각기 그 민족에게는 그 민족 나름의 '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그 기억은 과거의 전통적 자질 속에 기생하고 있다. 한데 한국에서는 과거란 잘라서 버려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또 한국적인 것을 자랑삼고 있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나, 정치적 편견을 지닌 국수주의자로 몰아버린다.

 

유대인의 성서인 《탈무드》에 '미래를 향해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보트를 젓듯이 뒤를 돌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다. 편협한 폐쇄적 내셔널리즘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펼쳐진 국제주의의 차원에서, 무엇을 그 국제주의 세상에 우리 한국이 공헌할 수 있는가를 위해서 우리는 한국적인 과거를 자랑삼고 그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집어내야만 한다. 자원이라곤 돌과 물과 아름다운 풍광밖에 없는 우리 한국이 가진 가장 큰 자원은 곧 한국의 '과거', 과거 속에 스민 '기억'들인 것이다.

 

그 '기억'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천 의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