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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6.제너럴 셔먼 호의 복원

구글서생 2023. 6. 16. 03:15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한말에 우리나라에 와 있었던 알렌 미국공사는 만약 물리학이 유럽만큼 발달해 있었다면 한국인은 유럽에 백여 년은 앞서서 증기기관을 발명해냈을 것이라고 감탄했다.

 

한말 대원군이 집정하고 있을 때 제너럴 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무역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그 배는 화륜선이라 불리었던 증기 기관의 기선이었다. 당시 국책이 외국과 무역해서는 안 되게끔 되어 있었기에 거부를 하자 이 무장한 승무원들이 횡포를 부렸고 이에 평양감사였던 박규수(朴珪壽)는 화공법(火攻法)을 써서 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의 영토 공격이 잇따랐으며 대원군은 이 신무기인 화륜선의 위력을 실감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증기선을 만들어 볼 맘을 먹었던 것이다. 다 타버리고 잔해만이 남은 제너럴 셔먼호를 한강의 서강 앞까지 끌어오도록 시켰다. 팔도의 손재간 좋은 사람을 끌어들여 이 뼈대만 남은 화륜선을 복원시키도록 한 것이다. 물론 서양처럼 기초물리학이 돼 있는 나라 같으면 원리대로 복원할 수 있었겠지만 물리학에 대한 눈곱만큼의 지식도 없었던 당시에 증기선을 만들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서울 군수창고에 있던 쇠와 구리를 몽땅 끌어내서 이 화륜선을 복원하고 숯불로써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대원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진수식이 베풀어졌으나 불행하게도 겨우 1백여 미터 움직이다가 멎고 말았지만 원리도 모르고 또 모형도 없이 이만큼 움직이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재간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실을 두고 한말에 우리나라에 와 있었던 알렌 미국 공사는 만약 한국에 물리학이 유럽만큼 발달해 있었다면 한국인은 유럽에 백여 년은 앞서서 증기 기관을 발명해냈을 것이라고 감탄했던 것이다.

 

병인년에 프랑스의 동양 함대에 시달림을 받았던 대원군은 이 우세한 서양의 무력에 대처하고 우리나라의 무비(武備)를 강화코자 조선 팔도에 방을 붙여 무비 강화의 아이디어를 널리 공모했다. 이에 응모할 아이디어 맨들이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으로 밀어닥쳤던 것이다.

 

그 아이디어 가운데 학우선(鶴羽船)이라는 학의 털로 만든 제트선(船)이 있었다. 이 배의 동력은 가죽 주머니로 풍낭을 만들어 그 바람을 뿜으므로서 추진력을 삼았으니 초보 단계의 제트 추진력이랄 수가 있겠다. 이 풍낭을 복판에 두고 온통 뱃전이고 배 천장이고를 학털에다 아교를 이겨붙여 감쌌다. 학털로 감싸놓았기에 뒤집혀도 되고 가로 누어도 된다. 물기둥을 타고 하늘에 떴다 내려도 기능을 유지한다. 뿐만 아니라 학털로 돼 있기에 방수가 되고 또 총알을 맞아도 아물어 버리기에 물이 새어들지도 않는다. 또한 학털이기에 물이 먹지 않아 아무리 물속에서 뒹굴어도 무거워지질 않는다. 그러기에 적의 화력이 강해도 그 틈을 누비며 적함에 접근 전투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원군은 이 학우선을 만들고자 팔도의 포수들에게 학을 잡아 털을 헌납하라고 시달했다. 그러나 헌납된 학털로는 한 척의 학우선을 만들 분량이 되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학이 아닌 다른 새털로 징발하여 이 학우선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초 물리학이나 造船에 대한 기초이론 없이 만든 이 학우선이 예상했던 대로의 기능을 발휘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들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만든 학우선이 실전에 이용됐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학우선의 실용 이전에 이만한 공기 추진력의 배를 고안, 조선(造船)에 착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한국인의 슬기와 재능은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다. 만약 18세기에 싹텄던 실학을 당시 위정자나 문화풍토가 체계화되고 실용화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던들 과학 한국은 지금쯤 굉장히 달라졌을 것은 뻔한 일이다.

 

19세기 중엽인 헌종 때에 전라도 신지도란 섬에 프랑스 해군 군함이 고장으로 표류해 온 일이 있었다. 표류해 왔기로 프랑스 수병(水兵)들은 이 섬사람을 해칠 맘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생처음 백인을 본 섬사람들은 귀신들로만 알고 근처 산속에 숨어 마을로 내려오길 거부했다.

 

이때 프랑스 수병들은 유리 그릇, 단추, 비누 등 양품으로 섬사람들을 달래보려 했으나 막무가내였던 것이다.

 

프랑스 수병들이 배를 고치고 식수를 보급하고 이 섬을 떠나면서 선물로써 각종 양품을 한 토방 가득히 놓아두고 떠나갔다. 산에서 내려온 마을 사람들이 이 양품이 쌓인 토방에 와보고 놀라 자빠졌다. 왜냐하면 그 양품 틈에서 째깍째깍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기 때문이다. 이 섬사람들은 분명히 귀신의 소리라 하여 바닷가 외딴곳에 곳간을 짓고 그 속에 이 귀신 붙은 물건들을 옮겨놓고 왕실의 지시를 기다렸던 것이다. 째깍 째깍 소리를 낸 물건은 시계였다. 이 시계에 관해 무식했던 섬사람들이 귀신 소행으로 겁을 먹었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명종으로 불리운 이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그 2백여 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이 자명종이 발명, 제작되었던 것이다. 서양의 시계 발견보다는 늦지만 서양의 영향없이 독자적으로 이 시계를 발명했다는 사실은 바로 한국인의 슬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된다.

 

정승을 지낸 김육(金堉, 1580~1658)이란 분이 쓴 《잠곡필담》이란 문집 속에 경상도 밀양 땅에 손재간이 좋은 장인(匠人) 유흥계(劉興癸)란 사람이 있어 혼자 힘으로 시계를 만들었는데 시간에 따라서 종을 쳤다고 했다. 12시가 쓰여 있었으며 시간 오차도 굉장히 적었다고 쓰고 있다. 다만 장인에 대한 인식이 나빴던 데다가 신기하거나 교묘한 것들은 완물(玩物)이라 하고 뜻을 상한다 하여 배척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슬기는 이같은 사회풍토 때문에 녹슬지 않을 수 없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