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은 본심일수록 남들에게 감추려 든다. 본심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의식주 같은 본능충족을 위한 동작일수록 남들로부터 은폐하려 든다.
■ 입는 옷이 아닌 감싸는 옷
어떤 동사(動詞)에는 그 동사가 갖는 뜻 말고도 그 동사로 연상되는 다른 뭣이 있다. 이를테면 감싼다[包]라는 말을 들으면 대뜸 여자답다는 감각이 촉발되고 연상이 된다. 감싼다는 동사가 여자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내 또래 나이의 연대 감각인지는 모른다. 달리 말하면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감싼다는 동사에서 여자답다라는 감각이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감싼다는 것은 내향적인데 요즈음 젊은 여자들은 온통 외향적이기 때문이요, 또 입고 다니는 옷만 해도 옛날 여자 옷은 온통 감싸는 옷인데, 요즈음 옷은 집어 꿰는 옷이기에 감싼다는 감각에 익숙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나라의 한 동사가 나타내는 이미지는 수천 년 동안 수천만 명의 그 나라 사람들이, 알고 모르는 사이에 체질화시킨 동일성이요, 감각 문화이기에 그렇게 쉽사기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 감싼다는 여성 감각을 차근차근히 우리 생활 주변에서 찾아보려 하는 것이다.
맨 먼저 몸 가까이에서부터 찾아보자.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첼소나타>에서 등짝과 가슴팍을 드러낸 여자의 옷을 두고 부정적으로 논한 대목이 생각난다. 비단 소설 속에서뿐 아니라 나이든 성숙한 여자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무릎과 허벅지를 노출시킨 것을 보았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아직껏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여자의 미가 노출에서 우러난다는 현대적인 생각이 뒤진 그런 전근대적 생각을 가졌대서가 아니다. 비록 나이가 들었고 또 전근대적 가치 체계 속에서 잔뼈가 굵긴 했지만, 여자 옷의 노출 부위를 보면 나도 자율 신경이 움찔하곤 한다. 하지만 노출은 미나 색향을 현장에서 낭비해 버리는 행위요, 그것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그런 즉석미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옛 부녀자들은 행여나 그 미와 색향이 넘치거나 증발해 버릴까 봐, 억세게 옷으로 감싼 그것을 오래도록 간직하려 했던 것이다.
치마를 보자. 치마는 감싸는 옷이지 입는 옷이 아니다. 스커트는 그 속에 하체가 들어가는 구조인 데 비해 치마는 하체를 감아 싸는 구조다. 그러기에 펴놓으면 하나의 평면일 뿐이다. 그러기에 스커트는 어느 시절의 어느 체격에만 맞는 옷이요, 어느 시기의 그 사람밖에 입지 못하는 옷인데 비해 치마는 더 감고 덜 감고에 따라 평생을 입을 수 있고 또 엄마도 언니도 아우도 입을 수 있는 포용력이 푼푼한 옷이다.
■다섯 가지 옷매무새
내 몸의 육신(肉線)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면 느슨하게 감싸면 되고, 또 요염을 부리거나 육선을 드러내고 싶으면 바싹 죄어 감으면 된다. 옛날 평양 기생들은 치마를 다섯 단계의 조임새로 분간해서 입었다 한다.
완(緩), 연(軟), 부(浮), 급(急), 긴(緊)이 그것이다.
'완'은 육선이 전혀 드러나지 않게 감싸는 매무새요,
'연'은 감을 때나 움직일 때 육선이 드러날 정도로 감싸는 매무새요
'부'는 움직이지 않아도 어른어른 육선이 드러나게 감싸는 매무새며,
'급'은 하체의 모든 부분이 뚜렷하게 드러나게끔 감싸는 매무새며,
'긴'은 호롱불 켠 방에서 보면 마치 하체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바싹 죄어 감싸는 매무새다.
그래서 '긴'으로 치마를 죄어 입으면 보폭이 좁아져 마치 오리걸음처럼 뒤뚱뒤뚱했다 하며, 평양 기생의 매력이 이 오리걸음에 있었다 함은 바로 '긴'으로 옷을 죄어 입었기 때문이었다.
감싸는 문화의 농도를 실감케 해주는 치마 조임이다.
치마는 몸만 감싸는 옷이 아니다. 두려우면 들어 올려 얼굴을 감싸는 장막이 되고, 슬프면 들어 올려 눈물을 닦는 수건이 되며, 아이를 안을 때는 들어 올려 감싸는 포대기가 되고, 곡식을 나를 때 들어 올려 움켜쥐면 바구니가 되고, 임과 속삭일 때 내려 깔면 보금자리가 되고, 물에 빠져 죽을 때 둘러쓰면 수의가 되는 그런 치마다.
인생도 그렇게 감싸고 희비애노(喜悲哀怒)도 감싸며, 그 모든 것을 치마는 감싼다.
저고리도 입는 옷 같지만 면밀히 따져 보면 감싸는 옷이다. 소매만 입을 뿐 통은 속옷고름, 겉옷고름의 맺음새로 감싸는 옷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억세게 감싸 놓고도 보고 듣고 숨쉬고 먹는 그런 얼굴의 노출마저도 거북했던지 장옷으로 얼굴까지 감싸고 다녔던 우리 선조들이었던 것이다.
옷만이 아니다. 집을 보아도 온통 감싸는 포용 구조다.
비단 규방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규방의 필수물로 화조산수(花鳥山水)를 수놓고 그린 병풍이 둘러 있다. 나는 이 병풍 구조를 주의깊게 생각해 왔다. 그것이 외풍을 막기 위한 것만이라면 반드시 그 같은 구조로 됐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병풍은 어느 공간으로부터 어느 공간을 차단하는 구조가 아니라, 외부 공간으로부터 내부 공간을 감싸는 그런 포용 구조인 것이다.
병풍은 둘러 놓으면 마치 엄마 품에 안긴 듯한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놓는다. 그다지 넓지도 않은 방 안에다 그 같은 포용 공간을 다시 두려는 심리, 그 심리에서 감쌀 수 있게끔 된 병풍의 구조가 발상된 것이다.
이 포용 구조는 집 밖에도 있다. 서양 집에서는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외부 공간이다. 한데 우리 한국 집에서는 문을 열고 나가면 외부 공간이 아니라 담으로 둘러싸인 내부 공간임을 알 수가 있다. 외부 공간으로부터 내부 공간을 감싸기 위해 담을 두르는 것이 한국집의 기본 조건이 돼 있다. 물론 담에는 도둑을 막고 바람을 막고 시야를 가린다는 물리적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물리적 의미가 없더라도 담을 두르지 않고는 안정이 안 되는 심리적 의미가 적지 않게 복합돼 있는 것이다.
■풍수도 곧 감싸는 구조
서울 강남의 빌라 맨션으로 불리는 고급 단독주택의 집단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공동경비를 하려고 서양 집처럼 완전한 담들을 없앤 채 분양되었던 것 같다. 곧 담의 물리적 의미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대신 담을 없앤 것이 된다. 한데 좀 살다 보니 한 집, 두 집 담을 두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한 집 예외없이 모두 담을 두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 물리적으로 담을 칠 이유가 없는데도 담을 둘렀을까. 담을 두르지 않고는 안 되는 한국인의 질긴 피포용(被包容)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한국인은 무한히 감싸이지 않고는 못 견디는 무의식적인 어떤 충동이 활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시 담 밖을 나가 보자. 뒤쪽에는 마을이나 도시를 감싸고 있고, 앞쪽에는 냇물이 감싸고 돈다.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 생긴 마을이나 도시가 아닌 어떤 마을이나 도시도 이 감싸는 산수의 포용 속에 들어 있지 않는 곳이 없다. 곧 풍수(風水)란 감싸는 구조를 확인하는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뒤쪽에는 반드시 주산(主山,玄武)이, 왼쪽에는 청룡(靑龍)맥을, 오른쪽에는 백호(白虎)맥을 거느려 아득하게 감싸고, 바로 앞에 안산(案山,朱雀)으로 역시 허(虛)함을 막은 그런 자리에 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산수의 품에 안기듯 포용되지 않고는 안주를 못 하는 한국인인 것이다. 죽어서도 그토록 명당을 찾아 헤맸던 것도 바로 포용지형(包容之形)에서 영면하고 싶어서이며 묘지 풍수의 공통분모는 보다 아늑하게 감싸이려는 데 있는 것이다.
동구 밖에 반드시 숲 거리를 조성한 이유도 마을을 감싸려는, 감싸서 그 속에 안주하려는 내향 심리의 소치인 것이다.
산으로 감싸고 다시 냇물로 감싸고 숲으로 감싸고 담으로 감싸고 집에서 다시 병풍으로 감싸고 치마저고리로 감싸고 살아온 한국 여인인 것이다.
외국의 가정생활에서는 보지 못하는 그런 특유한 우리만의 생활문화로서 모든 것을 싸두려는 생활문화를 들 수 있다.
방석은 방석보로 싸서 쓰고, 의자는 의자 커버를 씌워 쓰고, 책상은 책상보로 싸서 쓴다. 식탁도 보로 덮어 쓰고, 심지어는 경대도 쓰지 않을 때는 경대보로 씌워 둔다. 텔레비전도 보로 덮어 두고, 이불도 보로 씌워 가리며, 옷도 옷보를 씌워 걸어 둔다. 이렇게 씌우고 덮고 싸는 생활문화를 가진 어떤 나라도 나는 보지 못했다.
단적으로 자동차에 의자 커버를 씌우고 씌운 그 위에 다시 보를 씌운 방석을 놓는 나라 사람들이, 우리 한국 말고 어디 있던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포장 문화가 별나게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백화점에서 하찮은 손수건 하나 사더라도 반드시 고운 포장지에 싸서 준다. 싸서 준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종이백에 넣어 주기까지 한다. 이중포장인 셈이다. 외국에서는 종이백에 넣어 주는 일은 있어도 낱낱이 싸주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책도 그렇다. 커버가 씌워져 있는데도 책갈피 속에 넣어 판다는 것 자체가 이중포장이다. 그 이중포장의 책을 사면 다시 책 곁에 종이 포장을 씌워 주고 그것을 다시 싸준다. 사중 포장인 셈이다.
신발 가게에 가서 신발 하나를 사더라도 상자에 넣어 주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아서 다시 겉포장을 한다.
과자집에 가면 어떤 과자를 사겠느냐는 말을, “어떤 것을 싸드릴까요?”하고 묻게 마련이다.
곧 싼다는 것이 매매 개념으로까지 비약하고 있으니 포장 문화의 깊이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쌈, 보자기, 포장 문화
미국 텔레비전의 현상 퀴즈 프로를 보면, 현상금을 직접 손에 들고 한 장 두 장 현장에서 지불하는 것이 상식이 돼 있다. 무척 혐오감을 느끼곤 하는데 상품을 사고팔 때를 제외하곤 돈을 싸지 않고 줄 수 없는 한국인의 포장 문화 체질에서 우러나는 느낌일 것이다. 곧 급료를 주거나 부의를 하거나 촌지를 주거나, 우리 한국 사람은 돈을 종이로 싸 봉투에 넣어 준다. 한국 음식의 특성 가운데 야채잎에 밥을 싸서 먹는 쌈 음식이 발달한 것도, 이 감싸는 한국인의 구심(求心) 감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18세기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우리 쌈 문화에 대해 이렇게 써놓고 있다.
<우리나라의 특유한 풍속으로 채소 중에 잎이 큰 것은 모두 쌈을 싸서 먹는데, 상추쌈을 제일로 여기고 집집마다 심어 먹는다.>
원나라 시인 양윤부(楊允孚)도 고려의 맛좋고 풍류적인 상추쌈을 부러워하여 시를 읊기도 했다.
비단 상추뿐만 아니라 배춧잎이며, 호박잎이며, 깻잎이며, 산채인 곰취잎이며, 해초인 김이며, 쌀 수 있는 넓이만 있고 또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뭣이든 싸 먹었던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디자인이 요란스런 책가방을 갖고 다니지만, 나는 책보자기에 책을 싸 등이나 허리에 질끈 감싸 메고 학교를 다녔다. 대학교에 다닐 때도 나는 책보를 들고 다녔었다.
이 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겹쳐서 뿐만 아닌, 보자기에 대한 야릇한 향수를 나는 느끼고 있다. 그 향수란 비단 나에게만 있는 향수가 아니라, 민족 심성의 심층에 깔린 공통 향수가 아닌가 싶어진다.
보자기는 모든 것을 감싸 주는 포용 문화의 가장 전형적인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가방은 용량 이상은 담지 못하고 또 용량 미달은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불편하다. 또 담은 물건의 형태나 질에 따라 담을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하지만 보자기는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또한 형태가 모나면 모난 대로, 질이 물컹하면 물컹한 대로 차별 없이 감싼다. 인자하고 평등하고 관대한 포용력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감싼다는 동사는 한국인의 생활을 크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심성 속 깊이까지 스며들고 있다.
이를테면 인도에서 고부간에 싸움이 나면 시어머니는 한동네 시어머니들에게, 며느리는 한동네 며느리들에게 급히 연락하여 온 동네 시어머니와 온 동네 며느리의 집단 싸움으로 번져 버린다고 한다. 집안 속의 일을 집 밖에서 외향 처리를 한다. 중국 사람들도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제각기 행인을 끌어들여 자신이 옳다는 것을 역설, 자기편을 들어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삽시간에 온 동네에 알려지게 된다 한다. 이를 거리에서 매도한다는 뜻으로 가매(街罵)라고 한다. 이 역시 꼼꼼히 감싸 두어야 할 내향 사항을 외향 처리하는 것이 된다.
한데 우리나라의 고부싸움이나 부부싸움은 철저히 내향 처리를 한다. 문을 걸어 잠그고 싸우다가 손님이 오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다가 손님이 가면 다시 싸운다. 쌈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이불을 덮어씌워 놓고 싸우기까지 한다.
곧 감싸는 문화는 이렇게 싸운 것까지 철저히 감싸 내향적으로 싸운다.
기찻길에서 노는 아이의 위험을 보고 달려간 서양의 어머니들은 십중팔구 아이를 잡아 등 뒤로 던져 버리는데 한국의 어머니들은 십중팔구 아이를 끌어안고 웅크리는 것도 바로 포용 문화의 처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母子 轢死 事故가 빈번히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감싼다는 정신인수(精神因數)는 이처럼 한국인, 특히 한국 여인의 모든 속성을 분석시켜 주는 것이다.
■예의는 은폐의식의 정신적 포장
외국에 견주어 우리 문화의 특색을 가려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특색 가운데 하나로 싸는 문화, 곧 포장 문화를 들 수 있다. 무슨 알맹이가 있을 때 우리 한국 사람은 그 알맹이가 보이지 않게끔 열심히 싼다.
이를테면 상자 속에 든 과자 하나를 보자. 열십 자로 묶은 끈을 풀면 포장지가 나온다. 포장지를 벗기면 종이상자가, 종이상자를 열면 얇은 薄紙가 덮여 있다. 그 박지를 벗기면 칸칸마다 올록볼록한 충격 흡수용 장치가 되어 있고 얇은 종이에 싸인 과자가 나온다. 그 얇은 종이를 벗기면 상표가 박힌 겉껍데기가, 그 껍데기를 벗기면 은박지의 속껍데기가 나온다. 그 은박지를 벗겨야 겨우 알맹이인 과자가 나타난다. 여덟 겹의 포장을 벗겨야 알맹이를 얻을 수 있으니 대단한 포장 문화가 아닐 수 없다. 그 모두가 칠중, 팔중의 포장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서너 겹의 포장은 우리나라에서 상식이 되어 있다. 그 포장에 소요되는 후지(厚紙), 박지(薄紙), 은박지며 특수지의 값을 따져보면 밀가루와 설탕 그리고 약간의 향료를 친 과자 값과 맞먹거나 더 들거나 할 것이다. 그 아무런 쓸모가 없는 가식용(假飾用)의 포장비 때문에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돈을 생각해봄 직하다.
특히 화장품의 경우는 내용물 값보다 포장용기나 포장지 값이 한결 웃돈다는 것은 상식이 돼 있다. 그 요란한 외형이며 환상적인 색깔의 용기, 그 원색적인 포장의 인쇄비가 알게 모르게 그 화장품값에 내포되어 소비자가 지출하게끔 되어 있다.
책을 곽 속에 넣어 팔고 그 책표지를 종이로 싸서 파는 것도 포장문화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1년에 단 한두 권씩의 책을 산다고 해도 한 해에 1억 권의 책이 팔리게 된다. 그 책표지에 씌워 파는 종이만도 4백톤이 소요된다. 이만한 분량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자란 침엽수 1천3백 그루를 베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책을 꿰는 곽과 가로띠[橫帶紙] 같은 짙은 책 화장(化粧)까지 감안하면 그 낭비는 더 커진다. 뿐만 아니라 서점에서 책을 씌우는 시간의 낭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조사한 바로는 문고판 책 한권 싸는 데 숙련된 점원의 최단 기록이 7.28초 걸린다 한다. 그렇다면 하루 1만 권쯤 파는 큰 서점에서는 책을 싸는 데만 약 20시간이 소요된다. 이야말로 10시간 노동의 종업원 2인 몫의 노동량인 것이다.
이 밖에도 한국의 포장 문화는 외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소비문화를 형성했다. 이를테면 승용차 속을 한 번 들여다보자. 외국의 승용차는 시트 커버가 없는 것이 상식이다. 공장에서 나온 그대로 쓴다. 한데 한국의 시트에는 예외없이 시트 커버가 씌워져 있다. 시트 커버만 씌워져 있는 게 아니라, 커버를 씌운 그 위에 방석을 깔고 있다. 그 방석에는 예외 없이 방석 커버가 씌워져 있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 시트에도 세 겹의 포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왜 이다지도 우리 한국에서는 포장 문화가 발달했을까?
의식구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한국인에게 유별나게 강한 은폐의식이 그 원흉이다.
한국 사람은 본심일수록 남들에게 감추려 든다. 본심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의식주 같은 본능 충족을 위한 동작이나 기구일수록 남들로부터 은폐하려 든다. 이를테면 잠자는 침구는 남들로부터 은폐시켜야 할 본능도구다. 서양에서는 침대를 쓰든 안 쓰든 밤낮으로 일정 공간은 노출되어 있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자고 나면 이부자리를 개어 벽장 속에 넣어 은폐시키거나 농짝 위에 쌓아올려 이불보로 덮어 남들의 시계(視界)에서 은폐시켜버린다.
손님이 오면 돗자리를 펴거나 방석을 내어놓음으로써 안락한 좌석공간을 만들었다가 손님이 가면 그 안락 공간을 걷어 환원시킨다. 서양의 의자처럼 앉든 말든 공간을 노출시켜 둔다는 법은 없다.
밥상도 먹고 나면 상다리를 접어 눈길이 잘 닿지 않는 선반에 얹어놓음으로써 먹는 본능 작업의 현장을 은폐시켜 버린다. 서양 사람처럼 식탁을 항상 노출시키지는 않는다.
병풍도 쓰고 나면 접어 없던 것처럼 환원시키고 부채도 쓰고 나면 접어서 환원시킨다.
따지고 보면 서양 사람이 입는 양복과 한국 사람이 입는 한복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양복이 맞춰 놓은 사이즈 속으로 몸을 집어넣는 구조라면 한복은 보자기처럼 몸을 은폐시키는 포장 구조로 되어 있다.
저고리 깃은 여미고 바지춤을 추키며 치맛자락은 감치고 소매나 바짓부리만 걷으면 웬만한 몸 크기의 차이가 있는 부자, 모녀, 형제자매끼리도 더불어 입을 수 있는 옷이 한복이다. 한복이 싸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가방은 그 외모로 보아 무엇을 담는 가방인지 내용물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슈트 케이스는 옷이요, 핸드백은 일용품이며, 책가방은 책이요, 룩색은 도시락이 들어 있는 등 내용물을 감지할 수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보자기는 그것으로 무엇을 싸건 그 내용물을 알 수가 없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단단한 것은 단단한 대로, 연한 것은 연한 대로 차별없이 쌀 수가 있으며 그 내용물은 감 잡을 수 없게끔 절묘하게 은폐된다.
이처럼 한국의 문화는 내용물이 뭣인가를 모르게 은폐하려 들고 은폐하기 위해 열심히 그것을 싸는 포장 문화가 발달했다고 본다. 들고 가는 선물도, 서양 사람들은 받은 선물을 준 사람 앞에서 펴보는 것이 예의이다. 한데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선물이나 선물한 사람이 간 후에 펴보는 것이 예의이다. 그만큼 은폐의식이 강하다.
이 은폐의식의 정신적 포장이 예의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 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예의가 발달된 것도 바로 이 은폐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예의가 은폐의식의 정신적 포장이라면 우리 소비 구조의 특색인 포장 문화는 그 물질적 포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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