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되면서 이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 정신이 이지러지면서 선물 문화가 오염되어 선물과 뇌물의 한계가 모호해진 것은 근대화가 몰고온 현대의 불행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평상시와는 다른 이상체험(異常體驗)을 하고 싶어 한다. 이를테면 술을 마시므로써 보통 때와는 다른 몽롱한 경지를 체험한다든지, 사찰에 들러 신성한 분위기에 젖고 싶어 한다든지, 여행을 떠나 색다른 경치와 문물에 접한다든지………
이 같은 인간본능의 욕구를 변신욕구라 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이 변신욕구를 제도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각종 문화가 발달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신령이나 돌아가신 조상과 만나는 제삿날을 두어 성스러운 이상체험을 한다. 한편 백일, 돌, 생일, 혼례, 회갑, 임종 등 일생에 마디를 두어 일상과 다른 이상체험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또한 쏜살처럼 흘러가는 세월에 설, 동지, 대보름, 한식, 단오, 칠석, 추석, 동지, 그믐처럼 인위적으로 마디를 두어 평일과는 다른 이상체험의 날을 갖고 있다.
인생에 있어서나 일 년에 있어서 평상체험 시간을 속(俗)시간이라 하면 새옷을 갈아입고 변신(變身)을 하는 이상체험 시간은 성(聖)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선물은 바로 이 성(聖)시간에 탄생된 것으로 인간 생존에 필요한 '변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선물의 어원은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제상에 올린 각종 제물을 뜻하는 '선물(膳物)'이다.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 신의 은총이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제상에 오른 '선물'을 신령과 더불어 나눠 먹는 共食을 해야 한다. 제사를 지낸 후 음복(飮福)이라 하여 제사 음식을 나눠 먹는 절차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제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가족과 친지들에게 신의 은총을 고루 나눠주기 위해 그 제상에 올랐던 제물을 갖고 돌아가 고루 나눠 먹었던 행위가 선물인 것이다. 즉, 신과 접했던 이상체험을 평등하게 나눠 갖는 행위가 선물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지에 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에 반드시 선물을 사 들고 오는 관습도 바로 외지에 가서 겪은 새롭고 신기한 체험을 가족이나 이웃, 친지와 고루 나눈다는 제사 선물에서 유래된 공동체 정신의 발현이다. 그 선물은 이상체험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과의 거리감을 메우는 심리적, 사회적 효과를 나타낸다.
곧, 나만이 보고 느낀 신나는 체험을 독점한다는 것은 가족, 이웃, 친지, 직장이라는 소공동체 속에서의 상호 평형감각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선물은 소공동체 속에서의 평등 정신의 표현인 동시에 제한된 좁은 생활경험의 장(場)에서만 살아왔던 우리 겨레가 생각해낸 문화적 발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서양인들도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버니어(Souvenir)라 하여 자신의 여행기념이나 추억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물건으로 우리 겨레의 선물처럼 타인지향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서양에서는 선물을 받으면 받은 그 자리에서 풀어봄으로써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확인하는 것이 에티켓으로 돼 있는데 이것은 선물이 갖는 정신적 가치보다 실리적 가치를 더 우위로 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행위가 우리 한국인에게는 실례가 되고 따라서 안에 든 것에 별반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주고받는' 행위 그 자체에 가치를 두는 것도 선물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추석이나 설날 등의 명절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이 성스러운 시간을 기하여 서로가 상부상조하는 공동운명을 지닌 상대적 인간임을 확인하는 수단인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기후에 쫓겨가며 벼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겨레는 서로가 서로의 손을 빌리며 살지 않을 수 없는 공동체정신을 강하게 요구해 왔다. 곧 공동체 정신이 해이하거나 공동체에서 소외당하면 바로 죽음을 뜻하였다.
그리하여 성(聖)스러운 날이면 선물이라는 자기 손해로 공동체의 상대에게 이익을 주므로써 화목한 공동체를 이룩해 나갔다.
그 공동체 구성원의 통과의례 곧 출생,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변신하는 날에 선물을 하는 것도 바로 이 '변신+공동체 정신'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향약이라는 규약이 있어 이 선물 문화를 규범으로 정해 놓기까지 했다. 곧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 하여 마을에 어려운 사람이 있거나 불행을 당하거나 또는 애경조사(哀慶吊事) 등 큰일이 있으면 응분의 출손을 하도록 하는 가장 이상적인 보험제도를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좁은 땅에서 많은 사람이, 또 땅 한 뙈기 없는 그 많은 가난했던 사람들이 위화감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선물 문화의 체질화 덕택이었다.
근대화되면서 이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동체 정신이 이지러지면서 선물 문화가 오염되어 선물과 뇌물의 한계가 모호해진 것은 근대화가 몰고 온 현대의 불행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독일어로 선물을 뜻하는 Gift가 독(毒)이란 뜻도 지녔듯이 선물과 뇌물은 바로 이웃하고 있다. 하지만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것이다. 빈대만을 잡아내고 집은 살려야 한다. 우리 겨레의 선물 문화를 되살리는 것은 각박해지기만 하는 현대의 인간 상실시대를 치유할 수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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