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서민들 집에서는 옷이라는 것이 어느 누구 특정인의 옷이 아니요, 그집 모든 사람의 옷이었다. 물려서 입는 옷물림의 습속이 그것이다.
■한국인과 비축 심리
악의건 선의건 간에 한국의 구두쇠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비축형(備蓄型) 구두쇠
규범형(規範型) 구두쇠
절검형(節儉型) 구두쇠
이 세 유형을 실례를 들어가며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물론 이 세 가지 유형이 독립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개의 경우 서로가 복합되어 나타나게 마련이요, 보는 사람의 입장이나 그 구두쇠 기질이 나타나는 상황에 따라서 복합 요인은 드러나지 않고 어느 한 단면만 나타나기도 한다. 미리 양해를 구해 둘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구두쇠'란 그 말이 갖는 상식적인 개연성, 곧 수전노(守錢奴)나 노랑이만을 뜻한다기보다 일상생활에서 節儉하며 사는 사람을 통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구두쇠에 내포된 부정적 의미뿐 아니라 긍정적 의미도 아울러 포괄해서 쓰고 있음을 알려두고자 한다.
비축형 구두쇠로서 우리 사서(史書)들은 조선 왕조 태종 때 대제학이라는 학부의 우두머리를 20년이나 지속했던 학자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을 든다.
공은 성품이 인색하여 변변치 않은 미물(微物)일지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을 뿐더러 동과(冬瓜)를 잘라 먹더라도 자른 자리에 표를 해두어 남들은 커녕 식구들도 먹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실 때에도 그 잔수를 헤아려 더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술병을 단단히 봉하여 두니 손님들이 그 인색한 얼굴빛을 보고 돌아가는 이가 많았다.
세종 때 흥덕사에 있으면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했는데, 임금님이 그를 소중히 여기어 음식을 내리길 자주 하였고, 재상들도 앞다투어 술과 안주를 보냈는데 공은 그것들을 방 안에 차곡차곡 쌓아 두는 바람에 날짜가 오래되어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온 집 안에 가득했다. 썩으면 구덩이에 버리면 버렸지 아랫사람이나 하인들에게 한 방울 한 점도 나누어 주질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비축하고 수전(守錢)을 하되 그것의 효용까지 무시하고 비축하고 수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자기중심적인 비축 심리는 그것이 크고 작고에는 차이가 있을망정 우리 한국인에게 어느 만큼은 공통된 심리이기도 하다. 기후가 심히 불안한 몬순 기후대에서 기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을 일으키는 벼농사를 지어왔던 우리나라에서는 자칫 時候가 맞지 않으면 농사를 망쳐버린다. 너무 가물거나 또 너무 장마가 오래가도 실농을 하고, 또 홍수가 나고 태풍이 불고 추위가 일찍 닥쳐도 실농을 하고 만다. 그래서 흔히들 4년 안에 한번 꼴로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런 데다가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외세의 침입이나 변방의 외적들 침입이 잦았고 내란도 많았다. 따라서 난리도 4년 만에 한 번씩 겪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이 잦은 흉년과 난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축을 해야 했다. 비축을 하지 못하면 굶주림이나 아사(餓死)와 직결되었기로 남을 배려할 수 없는 그런 비축 심리가 체질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절검한 생활이 선비의 기본
규범형(規範型) 구두쇠는 유교 문화의 보편화로 도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문화 구두쇠랄 수 있다.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인간적 욕망을 극소화하여 의식주에 필요한 최소한의 재물만을 가지고 아끼면서 사는 유형의 구두쇠다. 비축형과는 정반대의 유형이랄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나라의 부(富)와 돈을 한 손에 쥐었던, 호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했던 중종 때 학자 김정국(金正國)이 그 유형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답을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 두 벌씩 있는데도 아직도 눕고서도 남을 땅이 있다. 신변에는 여벌 옷이 있었으며 주발 밑바닥엔 남은 밥이 있었다.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 편하게 살았던 것이다. 비록 넓은 집 천 칸과 옥 같은 곡식 만 섬과 비단옷 백 벌을 보아도 썩은 쥐같이 여겼고 이 한몸 살아 가는 데 여유가 있었다. 그 밖에 나 사는 데 없을 수 없었던 것은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환기할 창 하나, 햇볕 쬐일 툇마루 하나, 차(茶) 다릴 화로 하나,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경치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가 전부였다. 이것들은 비록 번거롭기는 하지만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늙바탕을 보내는 데 있어 이외에 더 무엇을 구하겠는가. 분주하고 고단한 가운데서도 매양 이 열 가지 재미가 생각나면 문득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나니 누가 날더러 불쌍한 사람이라 이르리오"
이렇게 생활 자체를 節儉하게 사는 것이 우리 한국 선비 사상의 기본된 조건이요, 논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 때 정승인 유관(柳寬)이란 이는 장마철에 비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고, 성종 때 정승인 손순효(孫舜孝, 1427~1497)는 귀한 손님이 왔는데 박주 한 잔에 오이쪽 하나로 술대접을 했으며, 중종 때 판서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은 남산에 겨우 혼자 발뻗고 누우면 자리가 차는 단칸 헛가리집에서 살았던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회의 엘리트들, 관부의 최고 지도자들이 절검을 하는데, 어떻게 그 아랫사람이나 백성들이 낭비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빈곤하게 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받은 녹(祿)만으로도 사치스럽고 호화스럽게 살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녹을 가문의 못 사는 사람의 양식으로, 또 가문이나 동네 자제들의 紙墨값으로 돌렸고, 또 동네 다리 놓는 데나 원(院)에 수용된 행려병자들의 숙식비나 약값 등 공공 자선 사업으로 돌렸던 것이다.
백성들에게 근검 절약의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고을이 크지 않은 목천현(木川縣), 연기현(燕岐縣) 같은 고을에서는 현감의 밥상에 이두이변(二豆二籩), 곧 밥과 국과 간장 이외의 네 가지 반찬 이상은 놓지 못하도록 하는 절검 풍속이 제도화되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보면 옛날 선비들과 지도자들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그 모두가 선의의 구두쇠였던 것이며, 그 선의의 구두쇠 아래 살아 온 백성들도 근검 절약할 수밖에 없었을 필연성을 이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때도 재물
백성들에게 체질화된 양질(良質)의 전형적 구두쇠로서 여기 갑신정변 때 행동 대원으로 활약했던 이규완(李圭完, 1901~1961)이란 분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물론 이분의 구두쇠 생활은 우리 전통적 가치체계에서 살아 온 사람들에겐 보편화된 구두쇠 기질이었다. 그는 한말에 지금 도지사격인 강원도와 함경도 장관을 역임한 분으로 그 장관 시절에도 제복 한 벌 이외에는 여름에는 중의 적삼, 겨울에는 무명옷이 상복이요, 두루마기는 넝마 같았다. 일을 할 때는 무명에 물감들인 색옷을 입었기에 중국인 고용인으로 오인받기 일쑤였다. 구두는 강원도 장관 임관 당시에 사 신은 한 켤레를 30년 동안 기운 데를 다시 기워 신었다. 이것도 제복 입을 때만 한해서 신었을 뿐 그 밖에는 짚신이 상식이요, 짚신이 해지면 두 쪽을 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해어진 한 쪽만을 새 짚신으로 바꿔 신었기로 항상 짝신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부를 불러 곧잘 선의의 구두쇠 교육을 시키곤했다.
“빨래는 어떻게 하는가?"
"냇물에 가서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빨래는 집에서 하고 빤 물을 모아 두었다가 거름에 섞어서 밭에 주든지 퇴비에 끼얹도록 해라. 때도 재물(財物)이니라.”
또 식구 가운데 누군가가 굵직한 장작으로 불을 때고 있으면 이를 말렸다.
“나무를 살 때부터 그 나무를 손질해 딴 것으로 쓸 수 있나 여부를 따지면서 골라 사야 한다. 그리하여 용재(用材)로 쓸만한 것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후에 가느다란 놈은 도구 자루로 쓴다든가 하여라. 싸리나무는 모아서 비를 만들어 쓰다가 다 닳으면 때도록 하고……”
그는 모든 식구에게 뒷간에 갈 때 빈손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실꾸리라도 들고 가게 하여 뒤보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못하게 했다. 자기 자신은 변소에서 종이 노끈을 꼬거나 변소에까지 어망 얽는 장치를 해두고 잠시의 시간도 낭비하질 않았다. 아이들이 다 쓰고 버린 잡기장을 주워다가 그 행간에 자신이 글씨 연습을 하고는 이를 잘라 노끈을 꼬아서 그 노끈으로 자기의 종이 조끼를 떠 입기까지 했다.
공무로 출장을 가더라도 군수가 정해준 고급 여관은 마다하고 누추한 주막을 찾아 들었고, 비단 이불을 빌어다 펴놓으면 그것을 거두고 밤늦도록 짚신을 삼거나 버려진 대[竹]쪽을 주워와 늦도록 이쑤시개를 만들곤 했다. 그 짚신과 이쑤시개를 아전들에게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2천만 백성 가운데 겨우 10만 명이 일하고 있고 나머지 1천 9백 90만 명은 놀고 있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거지가 밥 얻어먹으러 오면 밥을 먹여 주고, 밥먹은 대가로 밭갈이 노동량을 정해 주고 그 일을 하지 않고는 내보내 주질 않았다. 먼 곳에 사는 사돈이 찾아와서 며칠 동안 묵으면서 자기 자식의 취직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 사돈에게까지 놀고 먹어서는 안 된다 하여 퇴비 운반을 시켰다. 물론 자기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언젠가 춘천 이 승지 집을 방문했을 때, 융숭하게 밥을 접대받았는데, 다 먹고 나서 반찬이 세 가지 이상 넘는 과분한 대접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나의 버릇이라면서 지게를 지고 퇴비를 나른 일이 있다. 이것이 소문이 나 그를 대접할 때는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내놓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절검 습속은, 강하게 지니고 덜 강하게 지니고의 차이가 있을 뿐 여느 한국인에게 보편화된 상식이었던 것이다. 의식주의 생활 민속에도 이 절검 정신이 스며들어 절검을 의식하지 않고도 절검을 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옷물림, 밥상물림의 습속이 그것이다. 옛날 서민들 집에서는 옷이라는 것이 어느 누구의 옷이라는 특정인의 옷이 아니요, 그집 모든 사람의 옷이었다. 아버지가 입고 나면 맏아들이, 맏아들이 자라면 둘째가, 둘째가 자라면 셋째, 넷째로 물려서 입는 옷물림의 습속이 그것이다. 어머니만큼 크면 큰딸이 어머니 옷을 입고 다음에는 둘째 딸로 차례를 물려 옷물림이 이뤄졌던 것이다. 밥상도 그렇다. 첫 밥상은 아버지와 아들들이 먹고, 먹다 남은 상을 안사람이 물려 먹고, 다시 종들이 물려 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옷은 닳고 닳도록 입었고, 음식은 콩나물 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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