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 식품의 특성은 혼자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나눠 먹는다는 데 있다. 곧 개체의 선택을 용서하지 않고 집단의 동질성을 똑같이 나눠 누린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설렁탕 집에서 수육 한 접시 시켜놓고 서넛이 둘러앉아 먹을 때마다 또 생률(生栗)을 안주로 시켜놓고 몇이 맥주를 마실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접시에 마지막 남게 마련인 고기 한 점, 생률 한 톨의 개연성 때문이다. 누구라 마지막 한 점, 마지막 한 톨을 먹지 말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또 마지막 한 점이나 한 톨을 먹으면 불행이 닥친다는 주술적(呪術的)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대개의 경우 접시에 남은 마지막 한 점의 고기는 아무도 손을 대려 하지 않고 끝내는 남은 채로 접시채 들려 나가게 마련이다.
이것은 나만의 체험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당해본 지극히 우발적인 개연성이다. 아이 돌집에 초대되어 가서 떡을 집어 먹다가 마지막 남은 한 점의 떡을 두고 그것에 손을 대기가 쑥스럽던 그런 기억도 매한가지다.
나는 잦은 외국 나들이에서 이 마지막 한 점을 기피하는 한국인의 食俗이 한국인 고유의 개연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이 개연성에 어떤 전통적인 문화적 요인의 뒷받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할 때 그 먹은 사람은 그것을 집어먹음으로써 남이 자기를 버릇없다고 볼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곧 평등한 분량을 먹음으로써 그 먹는 집단 속에 균형과 안정을 찾는 성향에 사로잡혀 있으며 마지막 남은 한 점을 집어먹는다는 것은 이 집단의 균형을 깨뜨린 과욕을 노출한 것이 된다.
그것은 집단생활에서 이단 행위이며, 따라서 개체는 항상 말없는 집단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서구 사회에서는 남은 고기 한 점을 먹고 싶다는 이만한 개인의 본능적 욕구는 집단에 의해 제재받는다는 법도 또 감시받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집단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는데 체질화되어 있고 서양인은 자기희생을 덜 한다는 그 차이에서 이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의 한국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국(湯)에다 밥[主食]을 말아 먹는 식속은 어쩌면 세계에서 우리 한민족뿐일 것이다. 서양에 수프가 있고 일본에 미소시루(된장국)가 있고 중앙아시아에 챠이[茶水]가 있으나 그것에 밥이나 빵을 말아서 먹는다는 법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은 말아먹을 것을 전제로 한 국이다. 콩나물국, 쑥국, 미역국, 시래기국, 고깃국, 무국, 토장국, 토란국, 근대국, 호박국……… 어떤 식품도 국거리가 된다. 비단 이 국뿐 아니라 이미 밥과 국을 혼합해서 형성되는 탕(湯) 종류의 다양성은 이 국물 민족의 특성을 단적으로 지적해 주는 것이 된다.
설렁탕, 갈비탕, 추어탕, 대구탕, 족탕, 꼬리탕, 도가니탕, 해장국, 개장국, 복국, 곰탕, 가릿국, 재첩국, 떡국, 만두국………… 헤아릴 수 없다.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 등 고서에 기록된 탕반류만도 무려 58여 종이나 된다.
한민족은 탕민족이다. 왜 탕반에 체질화되었을까.
세 가지 이유로 따져볼 수가 있겠다.
첫째, 한국인은 가난하고 식구가 많다. 작은 분량의 식품을 많은 사람이 나누어 먹기 위해서는 탕반을 만들어야 한다. 극도의 식량난에 허덕였던 전후 독일이 쓰레기통에서 썩은 감자를 주워다 국을 끓여 먹었던 그 쓰라린 시련을 잊지 않기 위해 '물망탕(勿忘湯)'이라는 신생 음식이 생겨난 것도 탕(湯)의 빈곤 발생설을 입증해 준다. 전화(戰禍)와 흉년의 연속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민중에 탕이라는 서글픈 식품의 지혜가 체질화되었던가. 대가족제도 때문에 형성된 스무남은 명의 식구가 겨우 한두 근의 쇠고기를 나눠 먹는다 할 때 고깃국으로 끓이지 않고 어떻게 나눠 먹을 수 있겠는가.
둘째, 한민족은 서양이나 중동 같은 정착하지 못한 유목 문화권과는 달리 일찍부터 정착하고 살아온 농경 문화권에 속한다. 유목 문화권에서의 식품은 가지고 다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건성(乾性)이다. 곧 국물이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착생활에서는 반드시 건성일 필요가 없기에 국물같이 습성화한다는 것도 그 이유로 들 수가 있겠다.
셋째, 한국인은 반도 풍토 때문에 倭寇 등 외침 앞에 항상 노출되어 왔고 흉년 등 기근으로 많은 이동을 하여 살아왔다. 육당 최남선은 한국인은 한평생 열 번 피난살이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행복한 편이라고 말해 놓고 있다. 필자의 경우만도 일제말의 疏開 피난, 6·25사변의 피난과 복귀, 1·4후퇴의 피난과 복귀 등 여섯 번의 폐허에로의 복귀, 유랑 살이를 했다. 피난 및 유랑생활의 식생활, 곧 쫓기면서 먹고살아야 하는 식생활은 가장 단순한 형태를 취해야 한다. 밥은 물에 말아서 후루루 마셔 버리는 그런 굶주림을 면한다는 '요기' 형태를 취해야 한다. 탕반의 비극적 발생론이다.
넷째, 신앙적 원인을 들 수도 있다. 신농(神農)사상에서 형성된 설렁탕→ 선농탕(先農湯)이 그것이다. 신라시대 때부터 농사의 신을 모시는 선농제(先農祭), 중농제(中農祭), 후농제(後農祭)를 베풀어 왔고 그 중 선농제는 한말까지 지속되어 왔었다. 서울 교외 전농동(典農洞)에 있었던 선농단(先農壇)에서 경칩 후 첫 해일(亥日) 축시(丑時)에 임금을 비롯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신농에 제사를 지낸 다음이 제사에 바쳐진 희생물인 소를 이 제사에 참여한 군(君) · 신(臣) · 민(民)이 고루 나눠 먹는 습속이 있었다. 희생물을 나눠 먹는다는 것은 신인융합(神人融合, Communion Theory)의 인류학적 습속으로 세계에 공통된 습속인 것이다. 이 선농제에서는 그에 참여한 수 많은 사람이 소 한 마리의 희생물을 고루 나눠 먹기 위한 수법으로 탕을 끓였고 그것을 선농탕이라 불렀던 것이다.
'탕민족'의 특성을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따져 보았으나 그 원인들이 한민족을 탕민족으로 형성한 어느 부분적인 요인일 수는 있으나 어느 한 그 원인이 전적인 요인이랄 수는 없음을 알게 된다. 국물 식품의 특성은 혼자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나눠 먹는다는 데 있다. 곧 개체의 선택을 용서하지 않고 집단의 동질성을 똑같이 나눠 누린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내 기호에 맞게 내가 먹고 싶은 대로 골라 먹는 서구식 개인주의에서 이 국물 식품은 존립이 허락되지 않는다. 어느 집단의 논리에 순종하고 그 집단 속에 개인의 이익을 소멸시킬 수 있는 그런 의식구조에서만이 국물 식품은 존립할 수가 있다.
서구인은 개체의 이익을 위해 집단의 이익을 희생하는데, 한국인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체의 이익을 희생한다.
1964년 8월 5일, 베트남의 미군은 북베트남 통킹만의 폭격을 감행했고 이 북폭에 참여했다가 제 1호로 포로가 된 이가 알바레스 미 해군 소령이다. 그는 약 8년 남짓 포로생활을 하다가 1973년 2월 12일 포로석방으로 그를 기다리던 조국과 가족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예상했던 상황과 전혀 달라져 있음을 보았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탄지는 3년 전에 일방적으로 이혼수속을 마치고 딴 남자와 재혼, 그 사이에 아이 하나를 두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포로생활을 기다리며 젊음을 소비할 수가 없었던 이 아내의 행위를 미국 사람, 아니 서구 사람들은 아무도 나무라거나 지탄하거나 탓한다는 법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알바레스 소령의 누이 데리아는 ‘북폭(北爆) 포로의 누이'라는 명분으로 백악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반전 운동을 지도했다. 알바레스의 어머니는 닉슨으로부터 사기당했다고 매스컴을 통해 하노이 폭격을 비난하는 데 불철주야했다. 누이나 엄마는 단지 그의 오빠요, 그의 아들이 고생한다는 개체의 이익을 위해 미국이라는 국가 집단의 이익을 여지없이 비난한 것이다.
가족이나 가문이나 촌락이라는 집단에서 한국인은 개체의 이익을 희생하거나 양보하는 것으로 한국인의 가치관의 터를 닦아 왔다. 그러기에 한국 어린이의 교육은 곧 집단의 요구에 응하는 인격을 형성하는 데 가치를 두었다. 구미의 교육은 개체로 독립하여 남에게 의지 않고 사회를 헤엄쳐 나갈 수 있게끔 가르친 데 비하여 한국의 교육은 남에게의 의리나 버릇 등 집단 속에서 우스갯감이 되지 않을 사람, 남이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지 않을 집단의 한 균형을 잡는 구성원으로서의 자질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에서 모나지 않는 집단의 논리가 음식에 적용된 것이 곧 국물 음식인 것이다. 국물 음식은 그것을 먹는 개체의 이익이나 욕구나 선택이 허락되지 않는다. 먹는 자가 그 개체의 성향을 묵살하고 평등하게 똑같이 집단의 동질성을 나눠 가짐으로써 집단성을 유지하는 그런 음식이다.
집단을 위한 몰아(沒我)의 생리………… 그것은 아름다운 한국의 유산이다. 그런데 서구의 개인주의는 이 집단의 논리를 흐트려놓고 있고 그 논리를 흐트려놓는다는 것으로 현대인을 자부하는 풍조가 지배적이다.
이제 탕을 먹는 아름다운 논리는 사라지고 그 遺習만으로 탕을 먹고 있다. 개체의 논리 시대가 한국의 한국다운 아름다움을 짓밟고 말 것이다. 정말 '국물도 없는 각박한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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