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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1.신바람의 정신

구글서생 2023. 6. 13. 08:53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종교나 신앙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한국인의 신바람 체질과 절충 융화되었던 데 예외가 없다우리 한국인은 신앙을 믿더라도 신이 나는 그리하여 신과 교감하는 황홀경에 젖고 싶어한다.

 

나는 한국의 사주팔자에서 소외받고 태어났던 것 같다. 여남은 살 때의 일로 기억된다. 명이 짧다 하여 명다리를 잇는 무당굿을 당한 일이 있다. 물론 이 무당굿의 주인공은 나였다. 굿판 한가운데에 나를 앉혀 두고 무당이 방울을 흔들고 주문을 외며 돌아대는 것으로 이 굿은 시작되었다. 넋을 빼는 절차였던 것 같다. 어느 지경에 이르니 동령(動鈴) 소리가 마치 바닷물 썰고 밀리듯이 멀리 들렸다 가까이 들렸다 하던 기억이 난다. 이때 나는 나도 몰래 그 동령 소리의 원근(遠近)에 맞추어 몸을 좌우로 흔들었던 것 같다.

 

이때 무당은 '신이 내렸다 !'하고 무명 한 필을 감아둔 장대를 세우고 그 무명 끝을 들게 하여 원심(遠心)을 그으며 돌게 했다. 무당이 치는 꽹과리의 템포에 맞추어 마냥 토끼처럼 뛰며 돌았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쌀과 돈을 던지고 신명을 불러대며 명다리를 잇게 해달라고 마냥 손을 비비며 큰절을 하는 것으로 이 명다리굿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렇게 나의 명다리는 이어지고 무당은 굿판에 던져진 쌀과 돈 그리고 명다리 구실을 한 무명 한 필을 거두어 들고 돌아갔다.

 

정말 이상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무당은 동령이나 꽹과리 그리고 주문과 무도(舞蹈)와 회전으로 내 속 깊이깊이 잠재되어 있는 원시적 ‘신’을 불러일으켜 그 '신'과 수명을 다스리는 '신명'과를 매개(媒介), 접속시켜 랑데부를 시킨 것이 된다. 달리 말하면 무당이 제공한 매체에 의해 나의 '신'이 유발당한 것이 된다.

 

그 신이 무엇일까.

 

이 '신'이야말로 우리나라 놀이 문화의 기조(基調)요, 특성인 것이다.

 

■한민족은 신바람 민족이다

 

사람의 심성(心性)은 채집수렵시대가 가면 그때 지녔던 심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농경시대의 새 심성이, 또 미신시대가 가면 과학시대의 심성으로 완전 탈바꿈하는 그런 진화론적인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있던 심성이 잠재 잠적된 채 퇴적층처럼 중층구조로 쌓여 나갈 뿐인 것이다. 그러기에 도시화되고 산업화되고 과학화된 오늘날에 사는 한국 사람의 심성을 종단(縱斷)해 보면 양파 썰어 놓은것처럼 중층으로 되어 있어 맨 곁이 과학적 심성이면 그 아래 유교적 심성이, 다시 그 속에 농경민적인 심성이, 다시 그 속에 샤머니즘적인 심성이, 다시 그 속에 원시적 애니미즘적인 심성이 잠재되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신이 난다.', '신바람이 난다.' 할 때 이 신은 바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이성적인 표층(表層) 아래 잠재되어 있으면서 과학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따져지지 않는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의 감성적 심성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신바람을 누구나 잠재시키고 있으나 민족이나 문화권에 따라서 그 신바람이 표층 가까이 있고, 깊이 있고 또 표층의 억압을 많이 받고, 덜 받고 또 그 신바람이 활성(活性)이고 비활성(非活性)이고의 차이가 있을 따름인 것이다.

 

유럽의 여러 민족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인의 신바람은 상대적으로 표층 가까이 있고, 표층의 억압을 덜 받으며, 활성인 편이다. 곧 한민족은 신바람 민족이다.

 

왜일까.

 

한국의 자연은 서양의 그것과 비겨 상대적으로 풍요하면서 왕성하게 살아 있는 활성이다. 날씨의 변화가 무상하고 그 아래 초목의 명멸이 무상하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풍토다. 그 산천초목, 암석이나 짐승이나 벌레 하나에까지 초자연적인 어떤 힘, 곧 신력(神力)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풍토인 것이다. 그래서 애니미즘적인 다신교가 발생하고 그 초자연적인 신력에 겸허하고 정성을 드리면 자연의 해코지를 받지 않고 혜택을 받는다는 순응의 자연관이 형성된 것이다. 이에 비해 자연이 비활성이요, 죽어 있는 서양이나 중동의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당하는 자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유일한 초월자인 일신교가 뿌리내리게 되지만, 우리 한국에서는 도처에 신을 인정하고 그 많은 신바람 속에서 수천 년 살아오다 보니 심성도 신바람에 민감하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인융합(神人融合)의 매체요, 매개사상인 샤머니즘이 딴 지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뿌리 깊은 이유도 이 때문이며, 긴 역사를 통해 그토록 압박받고 유린당하면서도 한국 무속이 끈질기게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도 이 때문일 것이다.

 

■ 돌림새 없이는 불가능한 한국춤

 

따라서 신바람을 유발하는 문화가 가장 발달한 것도 우리 한국이며, 우리 한국 문화에서 이 신바람 문화가 차지한 비중 또한 막대하다. 이를테면 한국춤의 추임새는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추임새보다 신바람을 유발하는 추임새다.

 

하이러는 그의 저서 <종교의 현상형태와 그 본질>에서 춤의 발생적인 기능에 대해 ①병이나 죽음이나 기근을 피하고 폭풍우나 홍수 등의 재해를 미리 예방코자 신명에게 호소하는 방재(防災)·방액(防厄)의 주술 수단으로서의 기능 ② 수렵이나 작물 수확, 전쟁의 승리, 기우(祈雨) 등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신명에게 그 뜻을 전하고자 유감시키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들고 '스스로 돌거나 집단으로 도는 윤무(輪舞)일수록 그 주술적인 호소력이 강화되며 발로 추는 춤보다 손으로 추는 춤이 황홀경에 빨리 이르게 한다.'고 했다.

곧 몸을 돌린다는 것은 현기(眩氣)를 유발하고 현기는 황홀상태를 유발하며 황홀상태는 바로 내재된 신바람이 촉발된 상태로 외재하는 신명과 접합하고 교감할 가장 좋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도는 것이 기초가 되고 있고 또 발보다 손을 너울거리는 한국춤이야말로 가장 신나는 춤이 아닐 수 없다.

 

한국춤은 독무(獨舞)도 돌림새 없이는 불가능하고, 집단무일수록 돌림새 없이는 불가능한 춤이다. 우리 한국의 군무(群舞)를 '돌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테면 7월 백중날 농악을 치며 논둑을 도는 군무를 '들돌이'라 하고 보름날 걸립패의 군무를 '집돌이'라 하며 절에서 탑을 도는 집단의식을 '탑돌이'라 한다. 강강술래도 현지에서는 '달돌이'라고 부른다. 곧 돈다는 것은 윤무요, 윤무는 춤 가운데 가장 신바람을 빨리 유발하는 춤인 것이다.

 

우리 민속춤인 칼춤, 승무, 농악, 살풀이, 탈춤, 허튼춤, 부채춤 할 것 없이 돌지 않는 춤이 없으며 이 한국춤에 있어 도는 요소가 한국인의 신바람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 팔과 손을 가장 다양하게 구사하는 춤

 

서양춤은 손을 묶어 놓고 발로 추는 춤이요, 중동의 춤은 손과 발을 묶어 놓고 배꼽으로 추는 춤이라면 한국춤은 어깨로부터 손끝까지 이르는 팔과 손을 가장 다양하게 구사하는 손으로 추는 춤인 것도 역시 한국인의 신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악기 가운데 가장 신바람을 잘 유발하는 악기는 타악기요, 타악기 가운데서도 금속성 타악기가 보다 민감하다. 타악기만으로 이루어진 '사물놀이'는 한국적인 음악 형태로 이 신바람을 나게 하는 최고의 매체라 할 수 있다.

 

서양 음악에 있어 금속성 타악기는 심벌즈가 고작이다. 하지만 심벌즈는 우리나라 금속성 타악기인 꽹과리에 비기면 리듬을 다양화하는 데 있어 후진적인 타악기라 할 수 있다.

 

농악에 있어 박자를 '채' 또는 '마치'라고 하는데, 이 채에도 일채, 이채…… 칠채까지 있으며, 그 박자의 다양성 말고도 강약과 사이잡음새 또 여운은 길게, 짧게 또는 당장에 멎게 하는 등을 다양하게 조합, 신을 돋우는 데 이처럼 발달된 악기가 없다. 이를테면 '깽깽깽깽- ' 치다가 '갱갱래 개개깽깽 개개갱' 친다. 또 '깬지 갯지깬지 갯지' 치다가 '지지 지지'하고 친다. '갱갱갱갱 개르갱 개갱깨 개르르르 갱깨 응깨 갱깨 개개갱깽……………’ 치는 것은 오채다.

 

이렇게 신나는 금속 타악기를 다른 문화권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꽹과리의 리듬에 맞추어 이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손추임새로 또 가장 효과적으로 신내는 상모를 돌리고 또 신내는 데 효과적인 돌이춤(輪舞)으로 진행되는 농악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 신이 나는 이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전통적으로 즐겨 놀았던 유희도 이 한국 사람에게 민감한 신바람 체질과 무관하지 않다.

 

■ 비애로도 희열로도 치닫는 시큼새

 

카이요이는 유희의 기능을 다림질이나 장기 같은 경쟁형 유희, 노름이나 윷놀이 같은 우연형(偶然型) 유희, 그리고 소꿉놀이 · 인형놀이 같은 모방형 유희, 그네 · 널뛰기 같은 현혹형 유희로 사대별(四大別)하고 있다.

 

놀이란 모두 신이 나는 것이지만 이 네 유형의 놀이 가운데 가장 신이 빨리, 그리고 많이 나는 유형이 현혹형 유희다. 우리 전통 유희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놀았던 유희가 그네뛰기·널뛰기 같은 신나는 현혹형 유희인 것도 한국인의 신바람 체질이 어떻게든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종교나 신앙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한국인의 신바람 체질과 절충융화되었던 데 예외가 없다. 우리 한국인은 신앙을 믿더라도 신이 나는, 그리하여 신과 교감하는 황홀경에 젖고 싶어한다.

 

이미 신라시대에 원효대사는 염불 불교를 제창하고 있는데 이는 이론 불교가 아니라 '나무아비타불'하고 염불만을 거듭함으로써 황홀경에 몰입, 신앙의 갈망을 충족하는 가르침이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1866년에 한국땅에서 순교한 프랑스의 베르누이 주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 민중의 신앙 성격은 매우 단순하여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성교의 진리를 가르치면 쉽게 감동하여 입신을 하고 입신을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어떤 희생도 무릅쓴다. 반면에 진리를 풀이하면 잘 못 알아듣는다. 부인이나 무지한 남자일수록 그런 성향이 강하다.

 

1867년에 잡혀든 천주교도 박화심(朴化心, 62세)은 포도청의 심문에 '성교에 귀의하면 영혼이 천당에 올라간다.'는 권유만으로 입신했다 했고, 같은 무렵 지식층의 신도였던 한성임(韓成任, 55세)은 '겨우 천주경이나 성모경, 십계(十戒)의 간단한 한 구절만 외고 입신하여 천당에 오를 것을 믿고 기꺼이 죽음을 감수한다. 마치 불속에 뛰어든 부나비 같다.'고 당시 천주교도의 개연성을 피력하고 있다.

 

이 같은 한국인의 신앙 태도는 무식하거나 무지하거나 또는 반드시 천당에 갈 것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에 구제를 바라는 한국인에게 별나게 강한 신바람 탓인 것이다.

 

판소리나 얘기책을 읽을 때 '시큼새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시큼새란 바로 시큼해 오르는 대목을 잘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신이 나는 목을 잘 파악하여 읊거나 읽으라는 뜻이다.

 

조선조 말에 헌종, 철종, 고종 3대에 걸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명창 이날치(李捺致)가 어느 날 당시 세도가 당당했던 한 양반 재상 집에 호출을 당했다.

 

“광대가 사람을 잘 울리고 또 웃긴다던데 그것은 천한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군자 도학을 익힌 사대부에게만은 그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네가 나에게 시큼새를 넘겨 울리거나 웃긴다면 百金을 내릴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목을 나에게 바치겠는가.”

하고 양반이 물었다.

 

이에 이 명창은 죽음을 걸고 <심청전>에서 심청이 아버지와 이별하는 장면을 읊었다.

 

'이것은 고기, 이것은 자반이요・・・・・・.' 하며 심봉사 이별 조반 권하는 대목에서 이 대감은 시큼새를 넘고 다시 동네 처자들에게 종종 우리 집에 들러 앞 못 보는 우리 아버지 옷에 이 잡아 주고……………하는 대목에서 두 번 시큼새를 넘기고는 더 이상 손을 들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한다.

 

시큼새는 바로 비애로도 치닫고 희열로도 치닫는 신바람이 우러나오는 감성의 도표(道標)인 것이다.

 

■ 신바람이라는 잠재력의 효과적 유발

 

한국 사람이 별나게 눈물에 약해 곧잘 우는 것도 바로 이성적인 겉층(表層)보다 감성적인 신바람의 속층 밀도가 한결 높은 탓이 아닐까 싶다. 서양 사람보다 어떤 감성적인 일에 부딪치면 신바람에 촉매되어 시큼새를 넘어서기에 손쉽게 웃고 울어버릴 것이다.

 

이처럼 신바람은 흥(興)으로도 나타나고 희열로 나타나며 눈물로도 나타나지만 논리적으로 따져지지 않는 저력(底力)으로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정상적인 사람의 노동력은 1 더하기 1은 2가 되지만 신바람이 난 사람의 노동력은 1 더하기 1은 3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곧 플러스 알파가 가산된다. 가을 추수 후 볏단을 운반할 때 '신바람'이라는 酒興을 베푸는데, 이 주흥으로 신바람을 유발시켜 놓으면 이틀 걸릴 일을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끝내 버린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다.

 

곧 한국인에게는 저돌적인 저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기도 하다. 이 신바람이라는 잠재력이 기업이나 단체나 집단에서 효과적으로 유발되었을 때 계산되지 않은 번창이, 그리고 국가 사회 차원에서도 이 신바람이 유발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놀랄 번창이 기약될 수 있는 것이다.

 

곧 신바람은 국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