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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觀命昇進(관명승진)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유래 조선 숙종 때 당하관 벼슬에 있던 李觀命(1661~1733)이 어명으로 영남에 내려가 백성의 실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수의어사 이관명 알현이오.” 옥좌에 정좌한 숙종은 용안에 희색이 만연하여 그를 맞았다. “얼마나 객고가 많았는가? 그래, 백성들을 직접 살펴본 소회는 어떠한고?” “상감마마께서 정사를 바르게 펴신 덕택에 지방 관리들도 모두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었습니다. 다만 통영에 있는 섬 하나가 후궁의 땅으로 되어 있사온데, 그곳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공물이 너무 많아 원성이 자자하였기로 감히 아뢰옵니다.” 숙종은 후궁의 땅이라는 데 크게 노하였다. “과인이 조그만 섬 하나를 후궁에게 주었기로서니 그것을 탓하여 감히 나를 ..
寡子倍學(과자배학)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유래 조선 명종(明宗) 때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본관이 광주(廣州)이며 호는 동고(東皐)이다. 중종(中宗) 17년에 생원이 되는 것으로 관직에 올라 명종(明宗) 20년(1565년) 때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 와중에 죄인을 변호했다가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 후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다시 복귀되었는데, 청렴하고 검소하여 덕망이 높았다. 준경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랐는데, 어머니 신씨는 효경편(孝敬編)의 내용대로 아들을 엄하게 교육했다. “효경에 과부의 아들과는 사귀지 말라 했느니라, 이는 과부의 자식은 자칫 버릇이 없을 수 있어 ..
求官不擢(구관불탁) 문헌: 조선인물고(朝鮮人物考),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유래 조선 明宗 때, 이조판서를 지낸 李後白(1520~1578)은 본관이 延安이고, 호는 靑蓮으로 인사관리를 공평무사하게 했던 청백리였다. 그에게 친척 한 사람이 찾아와서 벼슬 한 자리를 은근히 청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관리로 채용하려고 작성해둔 명단에 올려져 있었다. 이후백은 그 명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보시게! 나는 그대의 이름을 이렇게 적어 두고, 장차 순서대로 채용하고자 했는데 그대가 염치없이 벼슬을 달라는 말을 하니 만약 그대에게 벼슬을 먼저 준다면 이는 공평한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아깝게 되었네, 그대가 벼슬을 청탁하지 아니했다면 벼슬을 하게 되었을 텐데…….” 벼슬자리를 부탁한 친척은 부..
碁敗寄馬(기패기마) 문헌: 조선오백년기담(朝鮮五百年奇譚) 유래 덕원군(德源君. 본명:李曙.1449~1498)은 世祖의 아들로 成宗 때 종부서 도제조의 직을 맡아 종실의 규찰과 선왕 제향소를 관리했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였으며 잡기 중에 바둑 두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실력도 뛰어나서 주위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한 軍卒이 찾아와서 아뢰었다. “소인은 鄕軍이온데 이번에 번을 들기 위해 한양에 왔습니다. 오래전부터 대군마마께서 바둑을 잘 두신다는 말을 들어온 터라 한 수 가르쳐주십사 하고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알겠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한번 두어 보자꾸나!” 덕원군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바둑판 앞에 마주 앉았다. 애기가(愛碁家)는 원래 ..
面鬼心水(면귀심수) 문헌: 마산의 혼(馬山의 魂). 古今淸談 유래 고려 고종(高宗. 1192~1259) 때 주열(朱悅)은 첨의부사를 지냈다. 그는 치적이 쌓이자 관찰사로 승진했고, 그에 따른 위엄과 명성이 높아져 사람들이 다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낼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가 맨 처음 추천되어 사람들은 그를 전문 奉命使臣이라고 불렀다. 주열은 도량이 컸다. 한번은 어느 고을에 가서 유숙을 하는데 방바닥이 갈라져 있어 그 틈으로 불씨가 들어와 소지품을 다 태워버렸다. 아전들은 불호령이 내릴 것이라 예상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는 잠잠했다. 큰 태풍이 닥치리라 예상했으나 미풍도 불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또 한번은 어느 고을 수령이 뇌물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는 ‘탐욕스런 ..
覆椀之功(복완지공) 문헌: 人物韓國史 유래 고려의 李資謙(?~1126)은 둘째 딸이 제16대 예종(睿宗)의 비로 책봉되자 邵城郡開國伯의 자리에 올라 세력가가 되었다. 예종이 죽자(1122년) 그는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외손자를 인종(仁宗)으로 옹립하고, 자기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비(妃)로 삼게 했다. 인종은 2명의 姨母를 비로 삼은 셈이다. 그렇게 해서 막강한 위세를 얻자 자기 일파를 요직에 등용하고, 자기는 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또 매관매직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권세와 더불어 십팔자(十八子), 즉 이씨가 임금이 되리라는 참위설(讖緯說)을 퍼드렸다. 그리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인종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독살을 시도했다. 즉 자신의 딸인 왕비를 시켜 독이 든 음식을 ..
半船之運 朴淳(?∼1402)은 조선 전기 무신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출생이며, 음성박씨의 선조이다.본관은 陰城,시호는 忠愍.고려 平章事 박서(朴犀)의 후손이며 侍郞 朴文吉의 아들이다.효자문이 남아 있는 朴浩遠이 박순의 아들이며 대사헌까지 지낸 朴菽蔡가 손자이다. 조선 중기의 선비인 朴惟謙은 박순의 후손이다.박순의 처 長興任氏는 고려시대 大司憲 任獻의 딸이다. 박순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활동했던 인물로1388년(우왕14)요동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하였고,위화도 회군에도 관여하여 조선 개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성계와는 친구지간으로 조선이 개국되면서 상장군이 되었다.1398년(태조7)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고향인 咸州[지금의 함흥]로 갔다. 태종은 태조의 귀환을 ..
快刀亂麻快刀斬亂麻는 문선제 고양이 헝클어진 실을 칼로 몇 번 벤 뒤에 쉽게 풀었다는 이야기에서 由來된 故事成語로, 快刀亂麻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합니다. ‘어지럽게 얽히고 설킨 問題를 明確하고 빠르게 解決하다’, ‘複雜한 문제를 明快하게 處理하다’라는 뜻으로 많이 使用되고 있습니다. 由來 《北齊書》 〈文宣帝紀〉에 나오는 이야기. 남북조 시대 高歡은 북조 동위의 승상(천자를 보필하는 최고의 관직)이었습니다. 그는 한족이었으며 부하들은 대부분 북방 변방지역의 선비족이었습니다. 선비족은 흉노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한나라와 손을 잡고 북 흉노를 몰아낸 민족으로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습니다. 전투에 임할 때는 매우 용감무쌍하여 어느 군대도 감히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힘을 배경으로 고환은 정권을 유지하고..
信厚眞友(신후진우)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전라도 부안(扶安) 단산(丹山) 고을에 김재곤(金在坤)이라는 선비가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이마가 시원스러워 이름을 용진(容珍)이라고 불렀다. 용진은 친구 사귀기를 몹시 좋아해서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놀곤 했다. 아버지 김재곤은 아들이 친구들과 즐기는 것을 굳이 탓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나 가리지 않고 사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넌지시 물었다. “용진아, 넌 오래된 친구가 많으냐, 새로 사귄 친구가 많으냐?” 아들이 대답했다. “속담에 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이다.고대 로마에서는 遠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를 행진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이 말을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나바호족에게서도 이와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