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건이 사리는 상행위라는 경제적 개념으로보다 한 공동체의 공생공존을 위한 집단 휴머니즘으로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리 옛 조상들은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일제 초기 때 자연 취락한 단위 촌락의 빈부 조사한 것을 보면 열 집에 한 집꼴이 제 식구 먹고서 양식이 남을 뿐이요, 제 식구만 먹고 살 만큼인 집이 겨우 열집에 세 집꼴이었다. 나머지 열 집에 여섯 집이 제 식구도 못 먹고 사는 그런 가난한 처지였으며 그 중 세 집은 남에게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딱한 형편이었다.
이렇게 가난한 우리 옛 농촌이었는데도 요즈음처럼 남의 물건을 훔친다거나 사기를 친다거나 하는 범죄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법도 있고 그 법을 집행하는 관가도 있었지만 다스릴 대상이 없었으므로 유명무실했다. 우리나라가 외국에 비하여 법률이 가장 발달하지 않은 나라로 곧잘 거론되지만 문화적 후진성 때문에 법률이 발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법률이 발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발달하지 않았을 따름인 것이다.
그렇게 가난하면서 사람이 나빠지지 않는 이면에는 그럴 만한 한국인의 슬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孔子)가 우리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고 말했을 만큼 예의가 발달해서가 아니다. 또한 일찍부터 도입된 중앙집권제도의 행정력이 강해서도 아니다. 한국 사람이 별나게 선해서도 아니고 또 오랫동안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런 체질을 갖고 있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한마을에 같이 사는 사람끼리는 공생공유(公生公有)한다는 그런 협화의 전통이 우리 한국인의 정신적 유전질에 체질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정신이나 불교 정신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종교적 영향력 때문에 그 같은 공생공존의 협화력이 형성된 것은 아니다. 너무나 한국적인 아름다운 자질이 어떤 형태의 민속으로 나타났었는가를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30여 년 전만 해도 산촌 어린이들은 노리개가 빈곤하여 곧잘 인신노리개로 잘 놀았던 것이다. 몇 명이 작당하여 이 노리개 어린이를 오물 허방다리에 빠뜨려놓고 즐거워하거나 숲속에 데려가 옻나무껍질을 벗겨 알몸에 문지르므로써 옻을 올리게 하거나 짓궂은 가학유희를 즐겼던 것이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이 노리개 어린이를 곳간에 숨도록 유도해 놓고 곳간 문을 잠근 채 하루내내 가둬두기도 했다.
이 같은 노리개로 시달린 어린이는 울면서 집에 돌아간다. 집에 돌아가면 이 어린이의 어머니는 누구한테 놀림을 받았느냐는 심문을 한다. 후에 알게 되겠지만 이 심문은 내 자식을 학대한 데 분노한 모성(母性)의 개연성에서가 아니었다. 아무 누구에게 놀림을 당했다고 고백을 받으면 이 어머니는 우는 아이를 앞세우고 그 아무 누구의 집 문 안에 들어선다. 여느 어머니 같으면 발악을 하고 당장에 그 학대를 가한 아이의 어머니와 머리채를 맞붙들고 싸울 기세여야겠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싱글싱글 웃기만 한다. 아이는 울고 어머니는 웃고 서 있기만 하면 가학한 어린이의 어머니는 통찰로써 그 울고 웃는 모자의 말 없는 메시지를 눈치채게끔 되어 있다.
“우리 집 몇째 놈이요?” 라고만 물어 확인하고는 무언의 작업이 진행된다. 가학한 어린이의 어머니는 곳간에 가서 나락 말이나 알보리 되를 되고 따라 들어간 피학 어린이의 어머니는 이미 마련해 온 자루를 벌려 그 곡식을 얻어 담는다.
그리고 거래는 끝나고 울던 어린이도 울음을 멈춘다. 산촌의 아이 많이 기른 집에서는 대개 그 아이 수에 비례해서 加虐報償用의 곡식을 비축해 두게 마련이며 이를 농곡(弄穀)이라 불렀던 것이다.
비정한 일이긴 하지만 산촌에서 자급자족할 수 없는 어려운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이 어린이 노리개로 공인시켜 옷도 입히지 않은 채 놓아 기르는 풍조까지 있었던 것이다. 농곡을 노리는 미끼로 모정을 팔았으며 이 농곡 습속은 산촌 집단의 공생공존을 위한 경제유통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산나물 철은 산촌에서 넘기기 가장 고된 춘궁기였다. 이때쯤 되면 가난한 산촌 사람들은 양식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식도 떨어진다.
이 건건이가 떨어지면 아낙들은 산채를 뜯어 한 광주리씩 이고 그들의 생활권에 속하는 같은 마을, 이웃 마을, 읍내의 좀 잘사는 집에 떼지어 간다.
이를 '건건이 사리'라 하는데 한 산촌에서 건건이 사리 떠난다면 대개 10여 명 내지 20여 명까지 이르는 대부대가 되게 마련이다. 이들은 산채 광주리를 이고 줄지어 문 안에 들이닥친다.
마님이 이 사리 아낙들을 보면 머슴으로 하여금 뒤란에 덕석을 펴놓으라 시킨다. 아낙들은 줄지은 채 뒤란으로 돌아가 펴놓은 덕석에 산나물 광주리를 엎는다. 산채는 산더미처럼 쌓인다. 누구라 원했던 또 기대했던 산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부덕(婦德)이 아니었다. 이들은 주인마님의 허락도 없이 장독대에 가서 된장독을 열고 마련해 간 바가지나 호박잎에다 응분의 된장, 곧 건건이를 퍼담는다. 그것은 관행이었기에 더도 덜도 퍼담는다는 법이 없고 또 그것을 감시당한다는 법도 없다. 이렇게 퍼담고 나면 주인마님은 이들에게 따뜻한 점심을 먹여 보낸다.
이 과정이 일체 무언 속에 진행이 된 것이다.
건건이 사리는 수요자의 일방적인 강제 상행위란 경제적 개념으로 파악된다. 물물교환은 두 교환자의 필요에 의해 형성이 되는데 이 건건이 사리는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서 형성되는 어쩌면 온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색적 상행위가 아닌가 싶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기에 이 건건이 사리는 상행위라는 경제적 개념으로보다 한 공동체의 공생공존을 위한 집단 휴머니즘으로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 촌락의 경제유통은 이 같은 특수성을 지닌 채 휴머니즘의 다른 한 면을 동반하고 있음을 우리는 한국 전통의 플러스적 가치로 다시 봐야 할 줄 안다.
인간적 경제유통의 다른 한 습속을 하나만 더 예시하겠다.
산촌의 새벽잠이 없는 늙은 주인이 일찍 일어나 마당에 나와본다. 동이 트기 이전에 누군가가 와서 마당을 쓸어놓고 갔음을 본다. 이 주인은 동트기 전에 쓴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는 사랑에 가서 머슴을 부른다. 오늘 마당쓸이는 누가 했느냐고 묻는다. 물건너 아무개니, 외딴집 아무개니, 그 마당쓸이를 한 사람의 이름을 댄다. 그럼 주인은 그 아무개의 식구가 몇이냐고 묻는다. 머슴은 큰 식구 몇, 작은 식구는 몇이라고 대답하면 주인은 그 식구 이레 먹을 양식 또는 두 이레 먹을 양식을 퍼다 주라고 분부한다.
동트기 전에 마당쓸이를 한다는 것은 우리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는 무언의 사인이며 이것은 한국 촌락의 오랜 관행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마당쓸이로 얻어간 양식은 변상하거나 어떤 대가를 치뤄야 할 의무가 부과되지 않는 희사인 것이다. 하지만 여느 희사와는 달리 마당쓸이라는 사인으로 희사를 강요하는 것이기에 희사의 개념으로도, 또 갚아 줄 의무가 없기에 상행위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 역시 한국 농촌 사회의 특수한 인간적 관행이랄 것이다.
마당쓸이 같은 한국 농촌의 특수한 경제유통 속 때문에 옛 한국농촌이 아무리 빈곤하더라도 각박하다는 법이 없다. 겨울 양식이 없고 다음 달 양식이 없으며 내일 양식이 없어도 초조하다거나 각박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 같이 휴머니즘이 수반된 경제유통 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같은 관행은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의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농촌 사회의 질서를 근대의 개념인 법률, 도덕, 규범 등에 의해 결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유대로 결속해 왔음을 알 수 있겠다.
마당쓸이로 기아를 모면한 사람들은 그들이 받은 경제적 혜택을 변제할 의무가 없다고 마냥 은혜를 입은 사람을 도외시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들은 경제적인 대가로 상환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성의와 인간성으로 그 대가는 충분히 보상한다는 것이 역시 습속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류학에서 승력(繩曆)이라고 불리운 원시적 달력이 우리 옛 농촌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는데 이 새끼 달력의 효용이 바로 마당쓸이 등으로 혜택입은 빈민이 보은하는 날을 기억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마땅쓸이로 양식을 보내준 김참봉 댁의 대사가 시월 열하룻날이라면 서른 번 꼰 새끼 월력(月曆)의 열한 번째 마디에 도토리를 끼워둔다. 또 다른 은혜를 갚아야 할 아무개의 집 제삿날이 언제라면 다른 한 새끼를 꼬아 도토리를 꽂아 처마 밑에 주렁주렁 늘어놓고서 그 애상길일(哀喪吉日)을 기억해 둔다.
그날을 당해 메밀묵을 쑤거나 두부를 만들어 그 대사에 부조를 하므로써 보은을 한다.
비단 대사 때의 부조뿐만 아니라 요구없이도 논둑의 풀을 베어 주고 시키지도 않은 남의 밭 김을 매놓고 가기도 한다.
온 가족이 노력으로 보답할 그런 자세로 이 집집들은 결속이 된다. 이 농촌에서의 부(富)가 빈(貧)으로 이동하는 특유한 습속의 원인으로 노비제도의 유풍을 들 수도 있다.
어떤 가문에 사유되었던 노비가 개화기 이래 해방된 신분으로 한마을에 같이 살게 된다. 해방되기 이전에는 경제적인 걱정이 없었는데, 해방되면서부터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된다. 그러기에 형식적인 해방일 뿐 경제적인 예속은 불가피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경제적 예속이 차츰 변형되어 나간 과도적 관계가 곧 농곡이고 건건이 사리며 마당쓸이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다른 한 이유로서는 한국인의 강인한 촌락 공동의식에서 빚어진 상보상련(相保相憐)하는 미풍의 소산으로 보여진다.
중종 이래 전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향약에 보면 한마을에 굶는 자가 있는데 그자를 돕지 못한 그런 마을 사람은 인간파문에 가까우리만한 치욕으로 제재했던 것이다.
또 한 가문에 굶는 사람이 있으면 보리떡도 열 조각 내어 나눠 먹어야 했듯이 촌락의 공동체의식도 그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촌락보다 큰 단위의 집단에는 세계 어느 다른 민족보다 그 유대나 결속이 약하지만 촌락 이내의 단위 집단에는 세계 어느 다른 민족보다 유대 결속이 강한 우리 민족이었다.
그러기에 촌락이 하나의 유기체였다. 그 유기체의 부속품은 빈부귀천 없이 존재가치를 서로 인정하고 또 서로 그 부속품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도와가며 결속된 그런 유기체였던 것이다.
이 공동운명체의식의 경제적 표현이 마당쓸이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는 것이다.
나 어릴 때 고향이 가난하지만 적이 즐거운 그 숱한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자네 농사는 얼마나 짓는가.” 하고 물으면 “자그마치 서른댓 다랑이 짓네.”하고 대꾸한다던 친구 아버지………. 산골짝의 벼랑이라 서른다섯 마당이라야 겨우 한 마지기 반도 못 되는 빈농이다. 다랑이논 마지기 반에 아들딸을 열둘이나 낳아 놓고도 생계에 걱정 없이 마냥 낙천적이고 즐겁던 그런 얼굴 얼굴………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불우하면서도 그토록 각박하지도 않고 또 불안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었던 전통의 이면에는 이 같은 한국 특유의 경제유통 습속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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