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권(卷之三)
포전(褒典)과 진청(陳請)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 최강(崔堈)에게 하교하신 글
임금께서 이같이 이르셨다.
“몸을 잊어버리고 적개(敵愾)하여 나를 업신여긴 흉적을 이미 꺾었으니 뛰어난 공훈에 관질(官秩)을 올려서 가내(嘉乃)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므로 이에 탄고(誕告)하여 군정(軍情)을 크게 떨치게 하고자 한다. 생각건대 경(卿)은 규규(赳赳)한 간성(干城)으로 환환(桓桓)한 웅호(熊虎)와 같은 장수였다. 십 년 동안 전진(戰陣)에서 싸우면서 이미 시험한 공로 많았고, 삼품의 초반(貂班)의 관자에 있으면서도 오래도록 신지(信地)의 기여(寄與)에 전념하였다. 방비를 맡은 순칙(巡飭)에 부쳤음에 용양(龍驤)을 거머쥐고 선등(先登)하였다. 홍도(洪濤)가 하늘에 닿았으니 장한 뜻이 비록 주즙(舟楫)을 격침(擊沈)하는 데에 날카로웠어도, 맹풍(盲風)이 바다에 휩쓰니 건장(健檣)도 위기(危機)에서 힘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효장(驍將)이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여 미친 도둑을 죽여 보낼 수 있었도다. 물결을 헤쳐 가는 거함(巨艦)이 빠르기가 북(梭)이 나르는 것 같았고, 번개를 당기는 듯한 성항(星航)이 어지럽기가 구름이 모이는 것 같았도다. 제군(諸軍)은 기세만 바라보고도 움츠려 들었으되 오직 너만은 힘을 내어 혼자서 앞장섰다. 적의 융로(戎路)를 바다 가운데서 막았으니 적은 계책이 궁하여 나는 듯이 달아났고 매서운 불꽃이 목도(木道)에서 불어나서 경예(鯨鯢)를 모두 잡았도다. 승첩(勝捷)이 오로지 너의 지모(智謀)서 연유했고 부괵(俘馘)이 하물며 너의 손에서 나온 것임에랴? 고인은 폐과(廢袴)를 감추어 두고 유공자(有功者)를 기다렸나니 내 어찌 일자(一資)를 아끼리오? 무릎을 치고 감탄해 마지않으니 너는 삼석(三錫)을 사양치 말라.
아! 뒷날의 공효(功效)를 더욱 도모하여 마땅히 소성(小成)에 안주하지 말라. 장차 앞으로의 공이 많을 것이니 값진 용맹을 대적(大敵)에 발휘하도록 기약하라. 이러하여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생각을 올바로 하여 지실(知悉)하라.”
▶불초(不肖)가 항상 우리 선조(先祖)의 실록을 열람하다가 선묘(宣廟)의 포유(褒諭)가운데 ‘洪濤接天 壯志 雖銳於擊楫 盲風捲海健檣 無賴於危機’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아! 백공은 백의로 창의하시고 계공은 곧 한 진장(鎭將)일 뿐이었다. 일진(一陣)의 고군약졸(孤軍弱卒)로써 바다를 뒤덮은 수많은 강구(强寇)에 저항하여 팔인(八人)을 손바닥 위에서 계획하고, 백 척이나 되는 적선을 풍전(風前)에서 불태웠으며, 왕의 원수를 적대할 때에 몸을 돌보지 아니하였고, 풍도(風濤)를 평지와 같이 보아 한 사람의 군사도 잃지 않고 삼첩(三捷)의 풍공(豐功)과 위열(偉烈)을 함께 이룬 것은 모든 옛날 책에서 구한다 해도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적벽(赤壁)에서의 일착(一着)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병가(兵家)의 기략(奇略)이 되었으나 무리로서는 백만의 비휴(貔貅)였고, 물이란 일대(一帶)의 장강(長江)이었다. 눈앞에 접천권해(接天捲海)의 풍도(風濤)가 없었고, 수하(手下)에는 의리에 분발하고 충성을 자원하는 책사(策士)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처럼 고군을 이끌고서 기책(奇策)을 내어 대훈(大勳)을 대양의 가운데서 세운 것과 비교한다면 절로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은 외훈(巍勳)과 장렬(壯烈)로써도 지위가 덕에 차지 않고 상(賞)이 공(功)에 합당하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후인(後人)에 있어서 유감됨이 있는 것 같으나 우리 선조께서는 스스로 신도(臣道)를 다했을 뿐이었으니 또한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봉열(奉閱)하는 즈음에 새서(璽書) 가운데 한 구절의 말에 느낀 점이 있어서 감히 권단(卷端)에 기록하는 바이다.
6세손 익대는 삼가 기록합니다.
선무원종공신록훈(宣武原從功臣錄勳)의 교서(敎書)
만력(萬曆) 33년(선조 38년, 서기 1605년) 4월 16일에 행도승지(行都承旨) 신(臣) 신흠(申欽)은 삼가 전지(傳旨)를 받듭니다.
“나라에 전란이 많아 안정되지 못할 때 너는 이미 힘을 중흥에 폈으니, 그 공이 작지 않으나 보답이 없었도다. 이에 내가 원종공신으로 추은(推恩)함에 있어 여기에 신전(新典)을 거행하는데 구장(舊章)을 따른다.
남구(南寇)의 육량(陸梁)을 생각함에 서토(西土)의 파월(播越)이 있었고, 시호(豺虎)가 종횡으로 날뜀에 비참하게도 종사(宗社)의 몽진(蒙塵)을 보았으며, 산천을 발섭(跋涉)함에 차마 군신(君臣)의 중로(中露)를 말하겠는가? 하늘이 당나라를 일으키고자 함에 부모가 제 몸을 도왔고 사람이 진(晉)을 추대하려 함에 대소(大小)가 제 몸을 잊은 것과 같았다.
다행히 전란을 이기고 난(鑾)을 되돌리며 드디어 공훈을 정하여 정(鼎)에 새기게 되었도다. 생각컨대 너희들 경대부 및 사서인(士庶人)들이 혹은 우리의 무렬(武烈)을 들추어내고 혹은 우리의 군수(軍需)를 도와서 창을 잡고 구치(驅馳)함에 혹은 몸을 죽인 선비가 있었고, 군사를 이끌고 전벌(戰伐)을 함에 적의 머리를 바친 무리가 있었다. 그러기에 모두 이에 기록하여 깊이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 가볍고 무거운 것은 일시의 공훈을 구분한 것이다. 너희 자손들은 만세의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지실(知悉)토록 하라.”
동년(同年) 월 일에 행도승지(行都承旨) 신(臣) 신흠(申欽)은 삼가 전지(傳旨)를 받듭니다.
“선무원종공신의 일등에게 각각 한 자(資)를 가(加)하니 자손이 음덕을 이어받아 사면을 후세에까지 미치게 하고 부모에게는 작위를 봉한다. 이등에게도 각각 한 자를 가하고 자손이 음덕을 이어받아 사면이 후세에까지 미치게 하고 자손 중 자원(自願)에 따라 산관(散官)의 한 자를 더하게 할 것이며, 자손이 없는 자는 형제, 서질(婿姪) 중 자원에 따라 산관의 한 자를 더하게 한다. 삼등도 각각 한 자를 더하게 할 것이니 자손이 음덕을 이어받아 사면 후세에까지 미치게 하고 각등(各等)의 통훈(通勳) 이상은 형제, 생질(甥姪), 여서(女壻) 중 한 사람은 자원에 따라 산관의 한 자를 더하게 할 것이며, 물고(物故)한 사람은 각기 본 등급에 의지하여 시행토록 하되 각각 한 자를 추증한다. 범죄로 산인(散人)된 자는 아울러 본품(本品)에서 서용(敍用)하고 영구히 서용되지 못한 사람은 사로(仕路)를 허락해 줄 것이며, 직첩(職牒)이 수취(收取)된 사람에게는 모두 환급(還給)시키고, 첩자(妾子)는 품계를 한정함을 보류하고, 공사(公私)의 천구(賤口)는 단지 면천(免賤)하고, 역당(逆黨)에 관계된 자와 역당의 공사(公事)나 간사(間事)로 인하여 죄를 입은 사람은 관작 한가지를 거행하는 것을 보류할 것을 이조(吏曹)에 내리도록 하라.”
도유(道儒)들이 증직(贈職)을 청하여 상언(上言)함-진사(進士) 허담(許橝) 등 임신(壬申)
신 등이 가만히 엎드려 듣건대 덕이 많으면 힘써 벼슬을 주고 공(功)이 많으면 힘써 상(賞)을 준다 하였습니다.
예부터 성제(聖帝), 명왕(明王)이 이것으로써 무겁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진실로 공과 덕이 아울러 성한데도 벼슬과 상이 합당하지 않는다면 비록 연대가 오래되고 초야의 한미(寒微)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수방(搜訪)하고 유양(揄揚)하여 포미(褒美)하고 이증(貤贈)하는 은전이 있는 것은 후세의 사람이 보고 느껴서 그 마음을 흥기(興起)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조(聖朝)에서 충을 갚아주고 공을 보답하는 정사가 삼대(三代)처럼 아름답고 백왕(百王)을 높이 넘어서 어두운 곳에 있는 것도 비추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대훈(大勳)이 있으면 숭질(崇秩)로써 베풀었고 영전(令典)을 드러내어 태상(太常)에 실어 두었으며, 만약 천발(闡發) 되어 등문(登聞)하는 것은 일찍이 사림의 공의(公議)를 연유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사는 도내의 고성현(固城縣)에 고(故) 충신(忠臣) 최균(崔均), 최강(崔堈)의 형제가 있으니, 한 집에 쌍충(雙忠)은 고금에 드문 바인데 아직 이증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신 등은 개탄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감히 서로 이끌어 법가(法駕)앞에 호유(呼籲)합니다.
최균은 고 우윤(右尹) 신(臣) 최담(崔潭)의 손자요, 증 판서(贈 判書) 신 운철(云哲)의 아들로 천성이 순검(淳儉)하고 풍의(風儀) 준정(峻整)하였으며, 일찍부터 스스로 학문에 힘썼고 늦게 주역 읽기를 좋아하여 깊은 뜻을 궁리하고 탐구하며 모든 회린(悔吝), 소장(消長)의 이치와 생극(生剋)과 제화(制化)의 도리를 관섭(貫涉)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천문(天文)의 도수(度數) 또한 모두 널리 통달하였으나 빛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기를 싫어하여 그대로 장차 여생을 마치려고 하더니, 마침 임진란을 당하여 왜구가 창궐함에 열군(列郡)이 와해되었으나 최균은 일개의 서생으로서 관수(官守)의 책임이 없었으되 그 충분(忠憤)함을 이기지 못하여 아우 최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을 때 금상(衾裳)을 찢어 기치를 만들어 벌려 놓고 풍운장(風雲將)이라는 이름을 걸어 두고 담티의 영상(嶺上)에 진(陣)을 벌려 놓았습니다. 밤에는 사람들에게 각각 세 개씩의 횃불을 가지고 산 위에 벌려 서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숨기도 하면서 고조(鼓噪)로 향응(響應)토록 하니 적이 그 신기로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충의와 눈물로써 사졸들을 개유하니 사졸이 모두 감격하여 싸우면 반드시 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대개 그가 유악(帷幄)에서 운주(運籌)하여 병기를 조달하고 군량을 공급하며 꾀를 내고 생각을 발하는 것이 저절로 기정(奇正)에 합당하게 되니 비록 옛날 지략의 선비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항상 논공(論功)에 이르러서는 겸퇴(謙退)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이를 대수장군(大樹將軍)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녹훈(錄勳)에 미쳐서는 삼등원종(三等原從)에 참예하였고 수문장(守門將)에 추천되었던 것입니다.
을사년에 마침 아우 최강의 가리포 진소(陣所)에 있다가 갑자기 해적을 만나서 화공(火攻)의 계책을 써서 백 척의 적선을 모두 섬멸했는데 호백(湖伯)의 포계(褒啓)로 인하여 통정(通政)에 승계(陞階)되었습니다.
그다음 혼조(昏朝)에 이르러서 국정(國政)이 분란해짐에 종사(從仕)에 뜻이 없어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습니다.
“可笑功名等弊屣, 白頭微祿媿斯身, 何處蓴鱸秋正好, 扁舟擬向五湖濱”
곧바로 향리로 돌아와서는 계속하여 종신토록 나오지 않고 대질(大耋)에야 가선(嘉善)에 올랐습니다.
최강은 기국(器局)이 홍의(弘毅)하고 효우(孝友)가 출천하였으며 영략(英略)이 있었으므로 투필(投筆)하고 무과에 응시하여 주역을 배강(背講)하고 특별히 외방(嵬榜)에 참여하였다. 임진란을 만나서는 형 최균과 동심으로 창의하여 국치(國恥)를 씻을 것을 기약하였습니다.
임진년 여름에 적이 진주를 범했을 때 습격하여 이를 흩어지게 하였고, 10월에 또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구원할 때 망진산에 올라 군중이 각각 4, 5개의 횃불을 들게 하여 혹은 나아가기도 하고 혹은 물러나게 하니 적이 놀라 물러났습니다.
성안의 장사들이 기뻐하여 뛰면서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최의장(崔義將)의 형제분이 구원하려고 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사년 4월에 적이 진주를 포위했을 때에 형제가 또 군사를 남강(南江)의 물가에 드러내어 兵勢를 도우니 적이 마침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들의 둔막(屯幕)을 불태우고 그 적시(積屍)를 불사르고 도망갔습니다. 그로 인하여 진주, 사천, 고성, 진해 등 4, 5성이 회복되었습니다. 이해 9월에 복병을 웅천(熊川)의 안민령(安民嶺)에 설치하여 적을 돌격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적란이 평정됨에 원종일등(原從一等)에 책록(策錄)되었습니다.
을사년에 가리포첨사가 되었다가 적이 다시 대거(大擧) 침구해 와서 몽동거함(艨艟巨艦)이 바다를 뒤덮으니, 화공의 책략을 계획하여 적을 꾀어서 포구로 들어오게 하고 복노(伏弩)를 설치하여 이를 쏘고 또 마른 갈대를 배에 실어 불어 놓아 마침내 대첩을 이루었습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특별히 새서(璽書)를 내리시고 가상(嘉賞)하셨으니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몸을 잊고 적개하여 나를 업신여긴 흉적을 꺾었으니 뛰어난 공훈에 관질을 올려서 가내(嘉乃)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할 것이므로 이에 탄고(誕告)하여 군정을 크게 떨치게 한다. 생각하건대 경은 규규(赳赳)한 간성(干城)으로 환환(桓桓)한 웅호(熊虎)와 같은 장수였다. 다행히 효장(驍將)이 생(生)을 가볍게 여겨 미친 도둑을 죽여 보낼 수 있었다. 제군은 바람을 바라보듯 움츠려들었으나 오직 너만은 분발하여 홀로 앞장섰다. 융로(戎路)를 바다 가운데서 막으니 적은 꾀가 다하여 나는 듯이 달아났고 매운 불꽃이 목도(木道)에서 불어나서 경예(鯨鯢)를 모두 잡았도다. 장고(藏袴)로 기다렸으니 내가 어찌 한 자를 아끼겠는가? 무릎을 치고 감탄해 마지않으니 너는 삼사(三賜)를 사양치 말라.”
이어 가선에 오르고 특히 순천부사로 제수되었으며 좌수사(左水使)로 들어가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외의 벼슬을 역임할 때 일심(一心)으로 청백(淸白)하게 하여 장복(章服)을 항상 도총관 서성(徐渻)에게서 빌려 입으니 서성이 그 청개(淸介)함에 감복하여 연석(筵席)에서 상께 아뢰니, 상께서 크게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비단 한 단을 내렸습니다. 저 혼조에 이르러 병사의 수망(首望)에 올랐는데 한 상궁(尙宮)이 밤에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바야흐로 납은(納銀)을 기다려서 낙점(落點)하려 한다.’라고 하므로 최강이 정색을 하고 퇴척(退斥)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내침을 입어 교동별장(喬桐別將)이 되었으며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끝까지 잘 보호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차라리 죽음에 나아갈지언정 무고한 왕자를 차마 해칠 수가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이로 인하여 취리(就理)에 이르렀다가 얼마 후에 석방되어 충청수사(忠淸水使)에 배명(拜命)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문란해지고 윤리가 해이해지는 것을 보고 벼슬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형제가 곧바로 향리로 돌아왔으며, 또 포도대장으로 불렀으나 병을 칭탁하여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최균과 최강 형제의 출처(出處)한 종시(終始)이니 고(故) 유신(儒臣) 김성일의 문집 및 고 처사(處士) 조경남(趙慶男)의 일기에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오호라!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사람의 대륜(大倫)이니 진실로 한가지의 절개와 의리가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고 풍교(風敎)를 수립하는 데 관계된다면 이를 포미(褒美)하고 권장할 것입니다. 하물며 최균, 최강의 쌍충(雙忠)의 탁렬(卓烈)함이 한 집 안에서 병랑(炳烺)한 것이겠습니까?
집에 있어서 효우한 일은 제현(諸賢)이 찬한 글에 갖추어져 있고 나라를 지킨 충훈은 신사(信史)에 기재된 바가 소저(昭著)합니다. 천계(天啓) 계해년(인조 1년, 서기 1623년)에 이미 향리에서 조두(俎豆)하여 제사의 의례를 숭봉(崇奉)하였으니 비록 사림의 존숭이 아직 백 세까지 민멸(泯滅)되지 아니할 것입니다마는 엎드려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천문(天門)이 형격(逈隔)하여 아직 이증(貤贈)의 은전은 입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상전(常典)에 결여됨이 있을 뿐 아니라 하토(遐土)의 여정(輿情)이 마침내 억울함이 없지 않고 어리석은 충심에 감격한 바가 있어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진유(陳籲)합니다. 엎드려 빌건대 천지 부모께서 특별히 은명(恩命)을 내리시어 고 동지중추(同知中樞) 신(臣) 균과 고 부총관 강에게 아울러 포이(褒異)의 은전을 베푸시고 장권(獎勸)의 계기가 되게 하소서.
본손(本孫)이 청증(請贈)한 상언(上言)-7세손 광삼(光參), 맹악(孟岳)
신 등이 가만히 엎드려 듣건대 기(記)에 이르기를,
“조선(祖先)에게 착한 일이 있었는데도 후세에 전하지 아니하면 이는 어진 것이 못되고, 미덕이 없었는데도 이를 칭찬하면 속이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자손으로서 선열(先烈)에게 없는 덕을 과장하여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속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공렬(功烈)이 국가에 있고 절의(節義)가 명교(名敎)에 관계되어 전배제현(前輩諸賢)이 일찍이 추중(推重)한 바가 있는 것이면 또 어찌 감히 조선이라는 것으로써 혐(嫌)을 삼아 스스로 효리(孝理)의 천륜을 막아 거듭 불인(不仁)에 빠져서 되겠습니까?
신 등의 7대조 고 동지중추 신(臣) 균과 그의 아우 고 부총관 강은 고 부총관 담(潭)의 손자요 증형조판서 운철(云哲)의 아들입니다. 대대로 잠영(簪纓)을 이어받았고 집안이 충효를 전해 오다가 때마침 용사(龍蛇)의 난을 만나 열군(列郡)이 와해되니, 사람들은 조수(鳥獸)와 같이 도망하여 숨지 않은 자가 없었으나 균은 한낱 서생으로서 아우 강과 함께 분연(奮然)히 소매를 걷어붙인 채 가동(家童)을 불러 모으고 향려(鄕旅)를 소모(召募)하여 금상(衾裳)을 찢어서 기치를 만들어 벌려 놓고 풍운장이라는 이름을 걸어 두고 낮에는 힘을 모아 사수(死守)하고 밤에는 사람들에게 각각 세 개씩의 횃불을 주어 산 위에 늘어서서 숨었다가 나타나기도 하면서 고조(鼓噪)로 향응(響應)케 하니, 적이 그 신변(神變)을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충군보국(忠君報國)의 의리로써 사졸에게 눈물로 개유하니 사졸들이 모두 감격하여 싸우면 반드시 공을 거두었고, 연해(沿海)의 6, 7성을 보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항상 공을 논할 때는 겸퇴하여 자랑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이를 대수장군(大樹將軍)에 비유하였습니다.
을사년에 마침 강의 가리포 진소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해랑적(海浪賊)의 변을 당하여 서로 화공을 획책(劃策)하고, 그로 인하여 대첩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상으로부터 특별히 포상을 더하여 훈공을 기록하고 통정(通政)에 승계되었습니다. 혼조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곧바로 향리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습니다.
강은 무략(武略)으로 호방(虎榜)에 올라 일찍이 원도(遠圖)의 기망(器望)이 있더니 난을 당하여 형 균과 함께 동심으로 창의하여 국치(國恥)를 씻을 것을 기약하였습니다. 임진년 5월에 적이 진주를 침범했을 때 이를 습격하여 물리쳤고, 이해 10월에 또 진주로 달려가 구원했습니다. 계사년 4월에 적이 진주를 포위함에 강이 균과 함께 군사를 남강의 물가에 동원하여 병세(兵勢)를 도우니 적이 마침내 둔막을 불태우고 시체를 쌓아 불사르고서 도망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진주, 사천, 고성, 진해, 의령, 함안 등의 고을이 회복되었고, 9월에는 김해의 적이 웅천의 안민령으로 나와서 웅거하므로 강이 돌격하여 이를 쫓았습니다. 을사년에는 가리포첨사가 되었고, 적이 다시 쳐들어와서 해랑병이라 일컫고 몽동거함(艨艟巨艦)으로 바다를 뒤덮고 몰려 왔는데 강이 균과 함께 화공의 계책을 정하여 적을 포구로 꾀어 들어오게 하고 복노(伏弩)로 하여금 이를 쏘게 하고 또 마른 같대를 배에 실어 중류에서 불을 놓아 태웠으며, 잠수군(潛水軍)이 적선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켜 대첩을 거두었습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특별히 새서(璽書)를 내려 이를 포상하였으니, 그 뜻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경은 규규(赳赳)한 간성(干城)이요 환환(桓桓)한 웅호(熊虎)였다. 십년을 전진에서 싸워 이미 시험한 공로가 많았고, 삼품으로 초반(貂班)에 관자를 달고서도 오래도록 임지의 기여에만 전심하였도다. 얼마나 다행하랴. 효장(驍將)이 목숨을 아끼지 않아 광구(狂寇)를 죽여 보낼 수 있게 하였도다. 융로(戎虜)를 바다 가운데서 막아 적이 꾀가 궁하여 나는 듯이 달아났고, 매운 불꽃이 목도(木道)에서 불어나게 하여 경예(鯨鯢)를 다 잡았도다. 장고(藏袴)로 기다렸으니 내가 어찌 한 자(資)를 아끼리오? 무릎을 치고 감탄하노니 너는 삼사(三賜)를 사양하지 말라.”
이렇게 한 다음 특별히 순천부사를 제수하였고 다음 해에 또 경상좌수사를 제수하였으며 들어가 부총관이 되었습니다.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청백하게 하여 장복(章服)을 항상 남에게서 빌려 입으니, 도총관 서성(徐成)이 그 청개에 감복하여 상께 아뢰었습니다. 상께서 크게 가상히 여겨 특별히 비단 한 단(段)을 하사하였습니다.
혼조에 이르러서는 병사의 수의(首擬)에 참예했는데 한 상궁이 사람을 보내 뇌물을 요청하므로 강이 정색하고 대답하기를,
“신자(臣子)가 뇌물을 가지고 벼슬을 얻는단 말이냐?”
하고는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광해군이 내쳐서 교동별장(喬桐別將)으로 삼고 임해군을 죽이도록 명령하므로 강이 그 죄 없음을 측은히 여겨 끝까지 선호(善護)하다가 마침내 취리(就理)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죽이기를 핍박하여 명령하니 강이 의로써 항거하며 굴하지 않고 이르기를,
“내가 차라리 죽음에 나아갈지언정 무고한 왕자를 차마 해칠 수가 없다.”라 하였습니다. 광해군도 이를 의롭게 여겨 용서하고 얼마 후에 충청수사를 배하니 이때 정치가 문란하고 윤리가 해이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병을 칭탁하고 향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신 등 선조의 출처(出處)한 시종(始終)으로써 고(故) 유신(儒臣) 김성일의 일기와 고 처사 조경남의 야사(野史)와 중흥지(中興志)와 읍지(邑志)와 녹권(錄券) 등의 글에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대개 이 형제가 창의하여 적을 토벌한 것이 김성일이 초유사로 오게 된 이전에 있었고, 임기제변(臨機制變)하면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정도(正道)에 적중한 것은 형의 운주가 훌륭한 때문이었고, 적진을 가로질러 공격하여 소탕(掃蕩)하고 목을 베어 무찌른 것은 아우의 용맹이 장했기 때문입니다.
집에 있어서 효우했음은 제현이 찬한 글에 구비되어 있고, 나라를 위해 충근(忠勤)한 것은 신사(信史)에 기재된 것으로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천계(天啓) 계해년에 일방(一方)의 많은 선비들이 제사의 의례를 거행하였는데 정충대의(貞忠大義)가 사람의 마음에 깊이 심어져 백 세 이후까지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고 존속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세월이 점점 멀어져 조가(朝家)에서 포장(褒獎)하는 은전이 아직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내의 사림들이 연명(聯名)하여 도신(道臣)과 봉사신(奉事臣)에게 호소해 올린 것이 전후로 여러 번 있었는데도 인순(因循)한 것인지 정중(鄭重)한 처사인지 아직도 상문(上聞)에 오르지 못하여 뜻있는 선비의 여감(餘憾)이 없지 않습니다. 재작년 임신에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임란에 창의한 모든 신하에게 제물을 하사하고 아직 천양(闡揚)되지 못한 자에 이르기까지 포상하여 권장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일도(一道)의 장보(章甫)들이 서로 이끌어 연로(輦路)의 아래에 호소하였더니 해조(該曹)에서 품고(稟告)한 4건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과 상언(上言)에 위격(違格)이 있었다고 하여 전례대로 방치하고 거론하지 아니하니, 후손이 된 자로서 구구한 사정(私情)을 끝까지 억제할 수가 없어서 감히 고금의 사승(史乘)과 신적(信蹟)을 척취(摭取)하여 천 리 길을 달려와 법가(法駕)앞에 호소하옵니다. 엎드려 빌건대 천지의 부모께서는 빨리 장례(掌禮)의 신하가 신 등의 선조 고 동지중추 균과 고 부총관 강의 탁이(卓異)한 사적을 채취케 하시고 아울러 포상과 이증의 은전을 베풀게 하소서.
예조의 회계(回啓)-갑술 8월 24일
이 고성(固城)의 유학(幼學) 최광삼(崔光參) 등의 상언을 보니 그의 7대조 고 동지사(同知事) 균 및 고 부총관 강이 임진에 창의하였으므로 포장의 은전을 아울러 베풀어 주기를 청한 호유(呼籲)가 있으니 최균 형제의 임란 창의가 과연 상언 안에 있는 사연과 같다고 하면 의당 포장의 은전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연구(年久)에 관계되었으니 본도(本道)가 자세히 살피게 하여 보고가 온 뒤에 다시 상께 품고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행좌승지(行左承旨) 김교근(金敎根)은 다음에 상계(上啟)하여 윤허에 의할 것을 알린다.
예조의 관문(關文)-갑술년 12월 29일
상계한 것을 줄여서 하교(下敎)한다.
도내의 고성 유학 최광삼 등이 어가(御駕)앞에 상언한 것을 예조의 계목에 의거하여 아뢴 것을 첩부해서 내려보낸다. 상계한 것은 윤허에 의한 일로 아뢴 대로 내려보내는 것이니 계하(啓下)하는 안에 있는 말뜻을 자세히 살펴서 오거든 즉시 사실을 뽑아 적어 회이(回移)하라.
예조의 재상계(再上啟)-병자년 6월 9일
재작년에 고성의 유학 최광삼 등의 상언에 인하여 그의 7대조 고 동지사 균 및 고 부총관 강의 임진년에 창의한 실적을 본도에 명령하여 보고해 온 뜻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더니 복계(覆啓)한 분부(分付)가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존수(李存秀)의 이문(移文) 안에 붙여 왔습니다. 최균 형제의 임진 사적을 증참판(贈參判) 이로(李魯)가 찬한 용사록(龍師錄)을 취하여 상고해 보면 김성일이 사천을 수복할 때에 좌우익이 되어 이를 구원했고, 곽재우의 진주 전투에서 군사를 남강에 동원하였다고 하였으며, 함께 선무원종(宣武原從)의 훈렬(勳列)에 참예하였다고 했습니다. 균, 강의 사적은 다만 도사(道査)에서만 의거할 것이 아니라 삼가 성조(聖朝)께서 특별히 내린 새서(璽書)를 살펴보면 그 가운데에
“승첩이 오로지 너의 지모에 연유되었고, 부괵(俘馘)이 하물며 너의 손에서 나온 것이냐?”
라는 교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십분 고신(考信)이 되는 문자요, 그 앞에 창의하여 입공(立功)한 자의 신후(身後)에 있어서 이증(貤贈)한 것이 이미 예(例)가 많으니 그 백성을 격려할 정사에 있어서도 마땅히 일체로 허시(許施)해야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일이 은전에 관계됨에 신의 조(曹)에서 감히 천단하는 것이 편치 못하오니 상재(上裁)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내계(內啓)를 판부(判付)하시면 하계(下啓)한 바에 의하여 시행하겠습니다.
교지(敎旨)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최균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추증함
가경(嘉慶) 21년(순조 16년, 서기 1816년) 8월 일
충절이 탁이하였으므로 증직하는 일을 판정하여 내린다.
교지(教旨)
가선대부(嘉善大夫) 행경상도수군절도사(行慶尙道水軍節度使)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최강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훈련원사(知義禁副訓鍊院事)를 추증함.
가경 21년 8월 일
충절이 탁이하였으므로 증직하는 일을 판정하여 내린다.
분황(焚黃)告由文-승지(承旨) 구강(具康)
호폭(瀥瀑)도 육지처럼 여기셨고 소벽(燒壁)에 물소리 높았도다. 금률(嶔嵂)하고 영명(寧溟)한 행적, 그 공 새김에 지나치게 늦었도다. 훈(塤)이 운주(運籌)함에 지(篪)가 창을 잡았고 선우(扇羽)에 무구(鍪球)로다. 소하(蕭何)의 부림이요 제갈량의 지휘라네. 고래의 죽음이요 짐승이 죽었도다. 무적(茂績)은 썩지 않는 것이기에 적막한 듯 반드시 갚는도다. 이조판서 빛나고 병조판서 엄숙한데, 헤아려서 쌍으로 증직함이 좋은 짝이로다. 예(禮)가 천고에 넉넉하니 영광이 구유(九幽)에 미치리로다.
우(右)는 소호(蘇湖)이다.
우(又)-승지(承旨) 구강(具康)
봉시(奉豕)가 척촉(蹢躅)하니 황간(黃間)에서 분발하였도다. 돌아갈 것을 잊어버리고 화살을 당겼으니 육량(陸梁)하는 자는 왜놈이었도다. 풍운(風雲)의 금낭(錦囊)으로 헛되이 돌아온 적 없었도다. 천보(天步)가 서쪽에서 궁색하시니 이에 어려움을 막아 이겼도다. 공이 높으므로 갚기를 마쳤으니 이제야 빛난 윤음(綸音) 내렸도다. 신저(新楮)에 두 분이 빛났음에 고체(古棣)가 쌍으로 잡혔도다. 일이 드물기에 은전도 넉넉하니 소리가 향관(鄕關)에 가득했도다.
우(右)는 소계(蘇溪)이다.
청시(請諡)를 상언한 뒤에 예조의 회계
경상도 생원 이은순(李殷淳) 등의 상언을 보니 증 이조판서 최균과 그의 아우 증 병조판서 최강의 역명(易名)에 대한 전사(典事)로써 이러한 호류(呼籲)가 있었습니다. 최균은 몸소 행의(行儀)를 닦고 도(道)를 강하되 실천을 일삼았으며,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체(體)를 밝히고 용(用)을 적응시키어 일찍이 이미 수립한 것이 탁연하였습니다. 최강은 영매(英邁) 준위(俊偉)하여 붓을 던지고 무(武)를 숭상하였으며 또한 충용(忠勇)과 지략으로써 당세에서 자부했습니다. 용사(龍蛇)의 난에 판탕(板蕩)이 되는 날을 만나서 형제가 창의하여 의상(衣裳)을 찢어 깃발을 휘두르니 장사들이 다투어 따랐습니다. 세 번이나 진양이 위급한 때에 달려가서 박전(搏戰)하고 혹은 요병(耀兵)하니 적이 성을 에워싼 지 7일 만에 마침내 낭패하여 달아나고, 김시민이 보장(保障)의 공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밤에 고성을 공격할 때에 복병을 설치하여 섬멸하였고, 새벽에 사천을 겁박하여 추장(酋長) 평소태(平小太)를 추격해 사로잡았습니다. 두 번이나 이순신을 구하여 웅천과 사량(蛇梁)에서 대첩을 거두게 했고, 또 정세아(鄭世雅), 권응수(權應銖)와 함께 영천(永川)에서 화공하여 좌도(左道)가 이에 힘입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치돌(馳突)하여 전후 30회의 전투에서 향하는 곳마다 풍미(風靡) 조퇴(潮退)와 같았습니다. 을사년에 최강이 가리포진에 절제(節制)하였을 때 해적이 대거 이르렀는데 형제가 기계를 설치하여 불을 놓고 백 척의 적을 맞아 공격하여 모조리 빠지게 하고 순식간에 이를 크게 파하니 선조(先祖)에서 포유(褒諭)하여 충의를 권장하고 공훈을 기록하여 관질(官秩)을 더하였습니다. 이는 국승(國乘)과 야사(野史) 및 명신(名臣) 김성일, 정구(鄭逑)의 문집에 모두 기재되어 있으니 실로 중흥(中興) 의장(義將) 가운데서 걸연(傑然)한 자였습니다. 혼조에 정치가 혼란한 때를 당해서는 “순노(蓴鱸)의 시”를 읊고서 형제가 용퇴(勇退)하였으니 그 명교(名敎)의 가운데서 개결함이 그만이었고, 또 곽재우의 출처와 절조에 비길만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함께 창의한 여러 신하가 모두 이미 미시(美諡)를 받았는데도 최균과 최강만이 숭반(崇班)의 은전을 입지 못하고 마침내 광총(光寵)을 숨기고 말았으니 진실로 “향우(向隅)의 탄(歎)이 있는 것입니다.
최균, 최강 형제의 풍성한 공과 위열(偉烈)한 실적이 저와 같이 현저하므로 정경(正卿)의 증직을 받는 데에 이른다면 절혜(節惠)의 중전(重典)은 이로부터 응당 행해지는 올바른 예가 될 터인데도 지금 많은 선비가 진청(陳請)하여도 공의(公議)가 오래도록 막혀 있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호소한 바에 의하여 허시(許施)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까 합니다. 그러나 사항이 은전에 관계되어 신조(臣曹)들이 감히 천편(擅便)할 수 없으니 상재(上裁)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좌승지 서상교(徐相喬)는 다음에 회계대로 시행하도록 알리겠습니다.
시장(諡狀)
우리 순조(純祖) 16년 병자년에 경상도 관찰사 이존수(李存秀)가 일도(一道)의 많은 선비들의 공의로써 계언(啟言)하여 고성의 고 동지중추 최균과 고 수사 최강 형제의 창의한 사적을 들어 그 공을 포상하여 풍성(風聲)을 세우기를 청하였더니 상께서 옳다고 여겨 최균에게 이조판서를, 최강에게 병조판서를 증직하였다. 그 뒤 30년이 지나 을사년(순조 16년, 서기 1816년. 지금은 헌종 11년, 서기 1845년)에 많은 선비가 또 연도(輦道)에 엎드려 역명(易名)의 소이(所以)를 청하였는데 예조에서 거듭 주언(奏言)하기를,
“최균 형제의 공이 이미 찬란하고 작위 또한 준(準)할 만하니 법에 따라 시호를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 하니, 상께서 윤허하였다. 그 뒤 후손 최명악(崔鳴岳), 최태진(崔台鎭) 등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겨 두 분의 사행(事行)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원컨대 글을 지어 주시면 장차 태상(太常)에 아뢸 것입니다.”라 하므로 경모(敬謨)가 불문(不文)하나 사양하지 못한 것은 공(公)의 의리에 감동하고 공에게 후사(後事)가 있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삼가 행장(行狀)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동지중추 최공의 자(字)는 여평(汝平)이요 전주인(全州人)이니 여조(麗朝)의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성공(文成公) 아(阿)를 상조(上祖)로 삼고 5세를 연하여 잠조(簪組)가 선연(蟬聯)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휘 자경(子涇)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이었고, 이가 낳은 휘 수지(水智)는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써 서장관(書狀官)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 서울에 갔다가 돌아와서 육신(六臣)의 피화(被禍)를 보고는 벼슬에 나아가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산수 간에서 자취를 감추다가 세상을 마침에 지신사(知申事)를 증직하였다. 이가 낳은 휘 이식(以湜)은 문과로 군수를 역임하였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윤신(潤身)이니 첨사(僉使)였고, 조부의 휘는 담(潭)인데 유행(儒行)으로 재랑(齋郞)에 천보(薦補)되었다가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운철(云哲)인데 증형조판서였고, 비(妣)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청풍김씨(淸風金氏)로서 참봉(參奉) 김덕후(金德厚)의 따님이며 중종(中宗) 정유년에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우윤공이 함안으로부터 고성으로 옮겨 온 것은 대개 구만동(九萬洞) 곤계봉(昆季峯)의 청숙(淸淑)한 기운이 인재를 잘 기를만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집터를 물색하다가 거처를 정하지 못했는데 판서공에 이르러 집터를 곤계봉 아래 소대(蘇臺) 위에 가려 지었다. 바야흐로 기둥을 세우는데 한 걸미승(乞米僧)이 와서 말하기를,
“상량(上樑)할 때 만약 그 시각을 잃지 아니하면 마땅히 두 기이한 남아를 얻어서 이름이 온 나라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시각을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내일 철관(鐵冠)을 쓴 동녀(童女)가 남쪽으로부터 올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 시각입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과연 한 동녀가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오므로 그 시각을 따라 상량을 하였더니, 그 뒤에 공의 곤계(昆季)가 과연 이 터에서 태어났다. 형은 소호로, 아우는 소계로 호를 삼은 것은 저 소대의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공은 나면서부터 풍의(風儀)가 준정(峻整)하고 기국(器局)이 관후(寬厚)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교도(敎導)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한결같이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형제와 여러 종형제들 사이에서도 일찍이 희온(喜慍)으로써 서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형제 세 분이 화락으로 동거하며 힘써 사귀어 더욱 친목을 더하였다. 그러는 중에 집안이 점점 쇠락하여 스스로 지탱해 갈 수가 없으니 친척 중에 이를 근심하여 이르기를,
“종가의 모천(芼薦)하는 범절이 장차 궁색해지게 되었는데 형제가 어찌하여 각각 산업을 경영하지 않습니까?”라 하니, 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얻기 쉬운 것은 산업이요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이다. 봉제(奉祭)는 칭가(稱家)라고 옛날 사람의 말에 ‘형제 사이에 어찌 사사로운 재물을 가지겠느냐?’라 하였다”하니, 말한 자가 부끄럽게 여기고 감복하였다.
우윤공이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공의 대에 이르러 손증(孫曾)이 더욱 번성하여 모두 만족하여 자시(自恃)하므로 공이 글로써 이를 경계하여 이르기를,
“부귀라는 것은 교만과 사치의 근본이요, 교만과 사치는 실패를 거듭하는 기틀이다. 이러한 데도 경계할 줄을 알지 못한다면 크게는 반드시 그 집을 상(喪)하게 할 것이고 적게는 그 몸을 잃게 할 것이니, 어찌 너희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 되겠느냐?”라 하였다. 공이 일찍부터 스스로 몸소 조심하여 겸손하고 검약하며 조용한 것을 좋아하니, 행의(行儀)의 순박하고 돈독함이 홀로 가문의 어른이 될 뿐만 아니라 지려(智慮)의 굉심(宏深)함이 또한 고을의 귀감이 되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예(藝)에 노닌다는 것은 또한 성인(聖人)의 지극한 교훈이었거늘 지금 세상 사람들은 한갓 입과 귀만의 학문을 많이 힘쓰니 실로 성인의 본뜻을 어긴 것이다. 도(道)가 방책(方冊)에 있지마는 그 요긴한 점은 이치를 궁구하고 실천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라 하고는 마침내 거업(擧業)을 폐하고 뜻을 구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으로써 주본(主本)으로 삼고 덕을 근거로 하며, 인(仁)에 의지하는 것으로써 실행하여 조차(造次) 전패(顚沛)에도 일찍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심(誠心), 정기(正己)의 공부를 잊지 아니하였다. 백천(白川) 강응황(姜應璜)에게 준 “논도(論道)”라는 글에서 가히 그 조이(操履)의 돈독한 것을 징험할 수가 있다. 그 글의 대략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니 그 문(文)은 시(詩), 서(書), 예(禮), 악(樂)과 공맹(孔孟)의 서적이다. 본(本)과 말(末)이 서로 따르고 종(終)과 시(始)가 찬연(粲然)하니 일용(日用)의 사이에 수유(須臾)라도 떠날 수 없다. 대개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법칙과 사단(四端)과 오상(五常)이 나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니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쉬는 것이 아님이 없다. 옛날 군자가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유추하여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하였고, 안으로의 생각과 밖으로의 만사에 그 시초를 구명하여 귀착점을 드러내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니 중리(衆理)가 소연(昭然)하게 스스로 나타나고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지(知)의 극치이다.”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근세에 성인의 도가 전해지지 못하는 것은 말류(末流)의 학문만을 힘써 익혀 각구조장(刻句雕章)으로 스스로 자만에 빠져 나만이 착하고 옳다 여기고 만족하게 여기니 슬프다. 도가 밝혀지지 아니하고 행해지지 아니하는 것이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도에는 풍요함도 인색함도 없는 것이요 사람에게도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니 한번 쉬고 한 번 먹는 것과 한 번 앉고 눕는 것이 모두 도에 있다. 요순우탕(堯舜禹湯)의 도는 사람마다 본래부터 가진 것이다. 공자께서 사람을 교화할 때 반드시 이르기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이를 구하라’라 하였고, 증자(曾子)께서 이르기를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한다’라 하였으니, 이는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모두 성정(誠正)에서 미루어 극치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부자(夫子)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증자의 말씀을 본떠서 자자(孜孜)하고 조조(慥慥)하게 지(知)에 그칠 바가 있게 하고 행(行)에 극진한 연후에 조정에 서서 나라를 다스려 천하에 그 선을 함께 하고 우리의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게 하며, 우리의 백성을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어 시를 지어 아래와 같이 읊었다.
“마음은 본래 가장 영허(靈虛)한 것으로 가고 오는 정한 곳이 없도다. 놓은 마음 거두라는 교훈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온 시초부터 살펴라. (心本最靈虛, 去來無定居, 欲遵收放訓, 先審所之初)”
모년(暮年)에 이르러서는 더욱 묘한 뜻을 탐색(探賾)하여 희역(羲易)에 깊었고, 다른 나머지 천문(天文), 지리(地理) 및 병가(兵家)의 도략(韜略)을 널리 통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나 도광(韜光) 산채(鏟彩)하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임진의 창란(搶亂)을 당하여 삼경(三京)이 실수(失守)되고 거가(車駕)가 서수(西狩)하게 되니 계씨 소계(蘇溪)가 공에게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대대로 충효를 지켜왔는데 지금 봉시(封豕)와 같은 왜적이 돌기(突起)하여 인민들이 어육(魚肉)이 되는 것을 보게 되니 어찌 중인(衆人)처럼 구차스럽게 임수(林藪)의 사이에서 살려고만 하겠습니까? 저는 창의를 하여 신절(臣節)을 다하고자 합니다.”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뜻이다. 다만 위란(危亂)의 즈음에 함부로 혼자 달려가는 것은 옳지 못하니 내가 비록 늙었더라도 함께 가서 동사(同事)하겠다.”라 하였다. 곧바로 자제와 가정(家丁)을 불러내고 또 향병(鄕兵)을 불러 모으니 순일(旬日)의 사이에 무리가 수십백인이 되었다. 공이 평일에 비록 깊이 자양(自養)하여 재주를 숨겼지만 지금 와서는 사람들이 모두 공의 형제분의 지력(智力)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인만(引滿) 초거(超距)의 선비와 의용(義勇) 담략(膽略)의 사람들이 즐겨 달려와서 합쳤다. 이때 적이 갑자기 구만동에 들어와 크게 포략(暴掠)을 함부로 하니 동네의 나씨가(羅氏家)가 제일 먼저 屠戮을 당하였다.
소계와 함께 수십 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말에 올라 치돌(馳突)하여 칼을 휘둘러 모두 무찌르고 나씨의 노정(奴丁)으로 흩어지고 숨은 자들을 불러 모아 그의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지내게 하니 노정들이 그 의리에 감복하여 모두 종군하기를 원하였고, 산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의지하여 돌아왔으며, 일방(一方)이 이에 힘입어 안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의 표질(表姪) 이달(李達) 또한 군사를 모아 와서 도우니 소계 및 이공을 장수로 삼고 공은 모주(謀主)가 되어 주책(籌策)을 찬획(贊畫)하고 궤향(饋餉)을 판급(辦給)하였다.
소계가 정예병을 인솔하여 진주, 사친, 창원 등 여러 고을에 위급함을 달려가 구원하고, 공은 군사를 나누어 담티 고개에 둔쳐서 왕래하면서 포략질하는 적을 잡고 막아 성세(聲勢)를 떨쳤다. 대개 이 고개는 두 고을을 연결하는 요충의 교차 지점으로 길이 험하고 막힌 곳이 많았으며 민속이 자못 순고(淳古)하였으므로 고수(固守)할 만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어 산 위에 벌려 놓고 스스로 이름을 풍운장(風雲將)이라 하고, 거리 위에 글을 써서 걸어 두며 의병을 많이 설치하여 적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산 아래에 사는 백성들이 낮에는 농사에 힘쓰게 하고 밤에는 남녀노소 모두 산봉우리 위에 모이게 하여 한 사람이 각 5, 6개의 횃불을 들고 좌우로 나열시켜 놓고서 고조(鼓噪)의 소리로 천지를 진동하게 하다가 홀연히 불을 꺼버려 적적하기가 마치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같이 하며, 잠시 후에 다시 이같이 하고 밤마다 그 횃불을 배(倍)로 더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고 장사 수십 명을 뽑아서 각각 궁노(弓弩)를 가지고 산골짜기를 출몰하면서 수가 적은 초구(鈔寇)는 쏘아 죽이고 많은 것은 공격하여 쫓았다. 그리고서 날마다 쇠고기와 술을 준비하여 사졸에게 먹이니 사기가 배나 되어 한 사람이 백 명을 당할 만하였으며 적이 크게 의구심을 내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공이 사졸을 어루만지기를 가인(家人)과 같이하여 은혜와 신의를 두루 쓰고 항상 군사의 음식을 조달함에 친히 감시하였으며, 학봉 김공의 초유문(招諭文)으로써 면면히 위유(慰諭)하여 이르기를,
“군부(君父)께서 몽진하셨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라 하고 눈물을 흘리니 사졸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노약자는 진소에 머물게 하고 정용(精勇)한 군사를 뽑아 소계의 진(陣)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소계는 토적(討賊)에만 마음을 기울여 향하는 곳에 당적할 자가 없었으니 저 진해에서 적추(賊酋)를 목 베어 죽인 일과 웅천의 안민령에서 전군(全軍)의 포위를 풀어 준 일, 진주 두골평(頭骨坪)에서 용감한 군사를 모아 적을 섬멸시킨 일들이 또한 후계(後繼)에 의지한 바가 있었기에 그렇게 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소계가 진양으로부터 담티 고개로 돌아와서 진세(陣勢)를 두루 살펴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님은 본래 유자(儒者)이었는데 지금 용병하는 것을 보니 규모가 곧 이와 같구나.”라 하였다.
이때 초유사 김공이 공의 형제가 창의한 것을 듣고 만나 보기를 요청하므로 공의 형제가 함께 가니, 김공이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이어 조종도(趙宗道), 곽재우(郭再祐), 이로(李魯), 이정(李瀞)과 함께 적을 쳐서 나라에 갚을 것을 맹세하고 또 권응수, 정세아, 조희익(曺希益), 신해(申海)와 평소 서로 잘 지내더니 이에 이르러 소리를 같이하여 호응하고 각각 강의 좌우에 웅거할 때 항상 군량이 모자라서 공에게 도움을 구하게 되면 공이 힘닿는 대로 보내 주었다. 적이 웅천의 안민령을 점거함에 공이 소계와 함께 가서 토벌할 때에 좌우익군이 적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장차 위급하게 되었는데 소계가 말을 타고 달려가 구원하려 하였으나 적의 진용이 너무 견고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작은 돌을 적진에 던져서 진군(晉軍)에 뛰어들었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 계책을 써서 돌을 던져 스스로 어지럽게 하고 틈을 타서 치돌하여 한 방면을 뚫으면 포위가 풀릴 것이다”라 하니, 소계가 그 계책과 같이하여 전군이 온전하게 돌아왔다. 또 창원, 진해에 둔을 친 적이 고성에 있는 적과 서로 왕래할 때에 공의 형제를 두려워하여 감히 낮에는 다니지 못하고 밤에만 왕래하므로 공이 정탐하기 위하여 흰 모래를 길에 깔아 두었더니 과연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찍혀 있었다. 이에 복병을 요로에 설치하고서 이를 공격하니 적이 감히 다시는 왕래하지 못하고 세 고을이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있었다.
을사년에 해랑적이 대거 와서 몽동거함이 바다를 뒤덮고 제주의 대양으로 들어오니 열진(列鎭)이 풍미하여 감히 막는 자가 없었다. 이때 소계가 가리포를 지키고 있었고 공이 때마침 이르러니 소계가 공에게 계책을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강약(强弱)이 대적하기 어렵고 수륙이 매우 다르니 병력으로써 서로 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오직 적벽(赤壁)에 화공의 계책이 있으니 그것을 이렇게 한다면 반드시 적은 섬멸될 것이다.”라 하니, 소계가 그 계책을 써서 적선을 한 개의 횃불 가운데서 모두 불태웠다. 여러 장사들이 하례하여 말하기를,
“오늘의 대첩은 최노야(崔老爺) 형제의 기책(奇策)과 신용(神勇)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승첩이 조정에 들려지니 상께서 크게 가상히 여겨 공에게 작위 한 등급을 더하고 통정의 품계에 승진시켰다.
공이 평소 벼슬에 뜻이 적더니 혼조에 정치가 어지럽고 이륜(彛倫)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소계와 함께 掛冠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출발에 이르러 시를 써서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가소(可笑)롭다 공명(功名)이란 폐리(弊履)와 같은 것을
백두(白頭)에 미록(微祿)이 이내 몸에 부끄럽네.
어느 곳에 순노가 이 가을에 좋다더냐?
편주(片舟)를 저어 가서 오호빈(五湖濱)에 가고 싶네.”
고향에 돌아와서는 형제가 한 방에서 함께 거처하면서 우애가 늙어갈수록 더욱 두터워지니 사람들이 그 집을 이름지어 부르기를 효우려(孝友廬)라 하였다. 광해조 정미년에 장수(長壽)로써 가선대부에 올랐고 병진년에 졸(卒)하시니 향년 80세였다. 현(縣)의 북쪽 당항(堂項)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配)는 정부인 진양정씨이니 진사 정관(鄭寬)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흥호(興虎)요, 둘째는 산호(山虎), 셋째는 기호(起虎), 넷째는 진호(振虎)인데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두 따님은 봉사(奉事) 서순개(徐舜凱), 이명원(李明愿)에게 시집갔다. 중호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흡(洽)과 홍(洪)이다. 홍은 찰방을 지냈고 산호와 기호는 무후(無後)하였다. 진호에게 세 아들이 있었으니 염(溓), 즙(濈), 오(澳)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께서 돌아가시니 향인들이 사당을 세워 공의 형제를 배향하고 제사로 정성을 다했으니, 덕을 기리고 공을 갚는 것이 이렇게 빠른 것은 당시에 몸소 보고 사귀었던 사람들이 마음에 진실로 열복하여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지금 공의 세대가 이미 수백 년이 지났고 여러 번 회신(灰燼)을 겪어서 고증할 만한 문자가 산실(散失)되어 남은 것이 없다. 그 후손들이 제현의 문집 및 국승과 야사를 엮어 수록하였으나 그것은 백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공의 난중(亂中) 수첩(手帖)을 다행히 얻어보니 그 충군(忠君), 애국의 정성과 시국을 근심하고 위급을 건지려는 일념이 문장에 넘쳐 흘렀으며, 그 문장은 간결하면서 고졸하며 그 뜻은 간곡하면서 절실하니 도(道)가 있지 않고 능히 그럴 수 있겠는가? 비록 전쟁터에 있으면서도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는 공부가 곳을 따라 항상 존속하였으며, 화순(和順)으로 덕을 쌓고 겸공(謙恭)으로 몸을 다스려 일찍이 빠르고 갑작스런 말씀이나 낯빛을 가지는 일이 없었다. 평생토록 힘쓴 것은 오직 충신(忠信)과 독경(篤敬)뿐이어서 신심(身心)을 수렴하되 구애되고 절박한 데에 이르지 아니하고 처사(處事)를 조용히 하되 유완(悠緩)하여 실수하지 않았다. 유인(儒人)으로서 무술을 깨달아 백도(白徒)을 일으켜 병인(兵刃)을 무릅쓰게 했고 진(陣)에 임하여 적을 대함에 있어 의기가 안한(安閒)하였으며, 지휘와 주책(籌策)에 거의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어진 이를 추대하고 능력이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은혜를 베풀고 신의를 지켰으니 한마(汗馬)로 승리를 취하는 공은 비록 소계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조병(調兵)과 전조(轉漕)로 스스로 강회(江淮)의 보장을 이루었다. 주부(奏膚)하는 일에는 또한 사양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므로 이로써 사람들이 대수장군에 비교하였으니, 그 독학(篤學) 거경(居敬)의 뜻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아! 공이 집에 계실 때는 가학(家學)을 전하셨고, 밖에 나가서는 국난(國難)에 달려가서 강적을 물리치고 막아내어 결국엔 공훈을 세울 수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문무를 겸한 길보(吉甫)는 온 세상의 모범이 되도다.”라 하였으니, 공이야말로 거의 이에 가깝지마는 한가지 절개로써 이름 붙일 수는 없다. 예부터 사람을 논할 때 ‘덕행을 먼저하고 일과 공을 뒤에 한다’고 하였으니, 공은 이미 두 가지를 겸했으되 일과 공은 말절(末節)이니 여기에서도 공을 알만 한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공이 가신 뒤 200여 년 만에 비로소 천유(闡幽)하고서 아름다움을 들추어내어 이미 관직을 추증하고 또 시호를 더하니, 어찌 한 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격감(激減)하기만 하겠는가? 장차 뒷날 인신(人臣)이 된 자에게 권하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삼가 위와 같이 찬하여 그 시호를 청함에 있어 시장(諡狀)으로 하는 바이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경모(洪敬謨)는 삼가 찬한다.
시장(諡狀)
공의 휘는 강(堈)이요, 자는 여견(汝堅)이며 호는 소계이니,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소호(蘇湖) 균(均)의 아우이다.
임진년 훼이(卉夷)의 난을 당하여 백의로 투몌(投袂)하여 국난에 달려갔을 때 형은 주책(籌策)하였고 아우는 공격해 싸워서 발거(拔距)로 요해지를 막으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마침내 중회(中灰)의 공렬(功烈)을 도왔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난형난제(難兄難弟)’라는 것을 소호의 곤계(昆季)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세벌(世閥)은 이미 소호공의 행장에서 자세히 적었거니와 고(考)의 휘는 운철이니 증형조판서였다. 청풍김씨를 맞이하여 아들을 양육하였으니 공은 그 막내이다.
공이 명종 14년 기미년(己未年 서기 1559년)에 탄생하니 넓은 눈썹, 모난 이마에 빛나는 채색과 영민한 기운이 풍기었고, 풍의(風儀)가 준상(峻爽)하고 효용(驍勇)이 절륜(絶倫)하니 사람들이 원대한 희망으로 기대하였다.
효우함이 천성에서 나와서 판서공이 돌아가신 뒤로 두 형을 어버이처럼 섬기니 사람들의 간언(間言)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접(接)함에 휴진(畦畛)을 설하지 아니하고, 비록 엄준한 성격이라 하더라도 화유(和柔)로써 대처하니 현우(賢愚)나 귀천이 열복(悅服)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학업을 소호공에게서 받을 때 독실한 뜻으로 경서를 궁구하여 온오(蘊奧)한 데까지 정통하였다. 명경(明經)으로 향해(鄕解)에 여러 번 합격했으나 성시(省試)에서 좌절되었다. 주위의 어떤 관상가가 말하기를,
“제비 턱에 호랑이 이마(燕頷虎額)에 육식(肉食), 봉후(封侯)가 될 모습이다.”라 하니, 소호공이 투필(投筆)을 권하였다. 만력 을유년(乙酉年: 선조 18년, 서기 1585년)에 무과에 올라 스스로 주역(周易)을 암송하니 문시관(文試官)이 글의 뜻을 거듭 물었으되 공이 대답하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다. 시관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경학이 이와 같은데 무예로써 입신하려는 것은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라고 하니, 무시관(武試官)이 말하기를 ,
“그렇게 말하지 말라. 그 기상을 보니 가히 호독(虎纛)을 끼고 용절(龍節)을 잡아 三軍을 통솔할 장수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여기에서 호방(虎榜)의 일등으로 뽑혔으나, 공이 본래부터 지절(志節)을 숭상하여 급급(汲汲)하게 진취(進取)할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진년에 이르러 왜구가 떼 지어 날뛰니 공이 소호공에게 청하여 이르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를 지켜 전해왔으니 어찌 의려(義旅)를 창기하여 국은에 보답하지 않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소호공이 이르기를,
“바로 내 생각과 같다. 사생(死生)을 마땅히 함께하겠다.”라 하니, 공이 곧바로 가동(家童) 불러내고 지방의 장정들을 불러 모았다. 고을 사람 중에서 박연홍(朴連弘). 최한(崔僩), 정준(丁俊)과 같은 사람은 모두 호랑이를 잡을 만한 장사였는데 다투어 서로 따르기를 원하였다. 바야흐로 군사(軍事)를 의논할 때 소호공이 이르기를,
“초야에서 창의를 하는 것이니 마땅히 왕인(王人)에게 알리어 그 절제(節制)를 받아야 명분이 정당하고 말도 순리에 맞을 것이다.”라 하니, 공이 박연홍과 함께 주쉬(主倅)에게 들어가 거의(擧義)의 상황을 고하여 군기(軍器)를 청하고 돌아왔다. 이때 적이 이미 구만동 입구에 닥쳐왔으므로 공이 필마와 단창(單槍)으로 위이(逶迤)하여 반가령을 넘어가다가 문득 암석 사이에서 어린아이가 부르짖는 소리로 “아저씨, 나를 살려 주세요.”라 하였다. 공이 보니 곧바로 종질 정호(廷虎)였으므로 끼고 말에 올라 가슴에 안고 말을 돌려 반격하니, 적이 바람을 맞은 듯이 분궤(奔潰)하였다. 소호공도 최한, 정준 등과 군사를 합하여 맞아 싸워 모두 쳐서 죽이니 시냇물이 붉어졌다.
이는 기병한 때의 초전(初戰)이니 그 뒤를 이어 적개(敵愾)하여 한어(扞禦)하는 방법과 전승(戰勝)으로 공취(攻取)한 공적이 한두 가지의 계산에 그친 것이 아니었으나 집에서 전해오는 문자가 산일(散逸)되어 보존된 것이 없으니, 국승(國乘)과 야사에서 보이는 것을 공의 실기(實紀)로 삼을 수밖에 없다.
명장록(名將錄)에 이르기를,
“의병장 최강이 고성으로부터 내원(來援)할 때 밤에 망진산에 올라 횃불을 벌려 세우고 함성을 지르면서 북을 쳐 산골짜기를 진동시켜 추격하여 참획(斬獲)하고서 돌아왔다.”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김덕령장군(金德齡將軍)이 최강의 효과(驍果)를 사랑하여 이끌어 별장으로 삼으니 군세가 더욱 떨쳤다. 이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갈 때 격문을 왜노(倭奴)에게 전달하니 원근이 향응하고 사기가 배로 더하여 용약(踊躍)하여 싸우고자 하였다.”라 하였다.
[국조기사(國朝記事)] 및 [산서야사(山西野史)]에 이르기를,
“영천(永川)의 진사 정세아(鄭世雅), 신녕(新寧)의 봉사 권응수, 하양(河陽)의 봉사 신해(申海), 고성의 봉사 최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토벌하였다.”라 하였다.
또 「조야회통(朝野會通)]에는 이르기를,
“최강 등이 향병을 이끌고 영천의 적을 토벌할 때 화공으로써 이를 공격하니 불에 타서 죽은 자가 많아 냄새가 몇 리에까지 번졌다.”라 하였고,
「중흥지」에 이르기를,
“적병이 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와서 둔치고 있다가 장차 진주로 향하려고 하니 김성일이 날랜 장사 수십 명을 뽑아 강을 건너 치격하게 하였다. 이에 적이 물러나서 고성에 둔침으로 곧바로 김대명(金大鳴), 최강을 보내어 군사를 합하여 공격하게 하였더니 적이 웅천, 김해 등지로 패주하였다.”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계사년 6월에 왜추(倭酋) 30만이 동래로부터 바로 진주로 향하는데 형세가 풍우와 같았다. 도원수(都元帥) 이하가 모두 달아나고 호남의 이빈(李薲)이 곽재우에게 정진을 막게 하였으나 곽재우의 군사가 적었기 때문에 대적하지 못하고 퇴각하니 적이 마침내 오직 성을 공격하는 데에 전력하였다. 이때 최강과 이달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구원하다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되돌아오니 적이 추격하여 포위하므로 최강이 만중(萬衆)의 가운데서 충돌하여 적을 풀 베듯이 많이 베었다. 이리하여 적이 풍미하여 썰물처럼 물러나고 피난했던 사민들이 온전하게 되니 사인(士人) 한계(韓誡)가 산에 올라가 최강이 적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이를 가리켜 감탄하여 이르기를
”천고의 사책(史冊) 가운데 이와 같은 용장(庸將)이 있었던가? 애석하다. 맡겨진 것이 제대로 되지 못한 일이로다.”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9월에 적이 창원으로부터 함안으로 와서 둔치고 또 김해로부터 갑자기 웅천의 안민령으로 들어오니 하도(下道)의 모든 장수가 그들에게 포위되었다. 이에 최강이 말을 달려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쓰러지고 마침내 한 면(面)이 열리어 나오게 되어 모든 군사가 안전하게 되었다. 이미 포위에서 풀려난 장사들이 서로 하례하여 이르기를 ‘오늘 살아남게 된 것은 최공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영영고적기(嶺營古蹟記)에 이르기를,
“최강 등이 밤에 망진령에 올라가 군중(軍中)이 각각 4, 5개씩의 횃불을 들고 혹은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북을 치고 눌함(吶喊)하게 하니 메아리가 산골짜기를 진동시켰다. 성중의 장사들이 이를 듣고 기뻐 뛰면서 하는 말이 ‘이는 반드시 최의장이 와서 구원하는 것이다.’라 하였고, 적도 또한 놀라서 구원병이 많이 온 줄로 알고 곧바로 그들의 둔막을 불사르고 그들의 시체를 쌓아 불태우고 도망쳤다.”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적이 다시 진해, 고성을 함락시키고 사천으로 와서 진을 쳐서 장차 진주를 범하려고 하니 판관 김시민이 최균, 최강과 함께 가만히 대둔령을 넘어 새벽에 성 아래에 겁박하여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니 적이 외축(畏縮)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최강이 또 요로에 은복(隱伏)하여 적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더니 적이 과연 밤을 틈타 도망하므로 곧바로 몸을 떨쳐 이를 공격하였다. 이에 적이 대패하여 진해에 둔친 적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이를 파하고 진해의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마침내 세 성을 회복시켰다.”라고 하였다.
정기룡(鄭起龍)의 문집(文集)에 이르기를,
“무술년 4월 9일에 군수 노윤중(盧允中)은 함양의 요로에 매복하고 별장 최강은 안음현(安陰縣) 남쪽에 매복하여 기다리더니 적이 밤을 타서 도망해 가다가 두 곳의 복병이 있는 곳에서 죽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이르기를,
“최강이 젊어서는 문학을 잘하였고 늦게 무과에 올랐으나 구차스럽게 벼슬에 나아가는 행동을 부끄럽게 여겼다. 또 성품이 강직하여 뜻을 굽혀 남을 따르지 아니하다가 지금에 이르러 군사를 일으켰다. 군사가 비록 많지 않더라도 그 마음을 얻었고 싸움에 임하여 몸소 선봉에 섰으니 정기룡, 안신갑에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으나 많은 사람을 부리는 재주는 이들보다 뛰어났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실적(實蹟)이다.
난이 평정된 뒤에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에 제수되었다가 가리포첨사로 특별히 옮겨갔다. 을사년 3월에 해랑적이 대거 와서 몽동(艨艟) 거함이 바다를 덮어 제주로 들어오니 열진이 감히 막지 못하였다. 이때 공이 화공의 계책을 써서 적선을 다 불태우니 적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음이 또한 영천의 싸움과 비슷하였다. 관찰사가 조정에 포상하기를 청하니 상께서 크게 가상히 여기고 특별히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몸을 돌보지 않고 적개(敵愾)하여 이미 나를 업신여기는 흉적을 꺾었으니 관질(官秩)을 높여 근병(勤兵)의 공을 밝히고 가내(嘉乃)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기에 탄고를 들어 군정(軍情)을 비용(丕聳)하게 한다. 경은 규규한 간성(干城)이요 환환(桓桓)한 웅호(熊虎)로다. 10년 동안 정전(征戰)의 진소에서 이미 시험한 공로가 많았고 삼품, 초이(貂珥)의 반열에서 또 임지의 기여에만 전념하였도다. 신방(訊防)의 순칙(巡飭)에 붙였음에 용양(龍驤)을 어깨에 메고 항상 선등(先登)만 하였도다. 큰 파도가 하늘에 닿았는데 장한 뜻은 적을 공격하는데 비록 날카로웠으나 광풍이 바다를 뒤흔드니 큰 돛대도 위기에서 의지할 수 없었도다. 얼마나 다행이다. 날랜 장수가 제 목숨을 버리고서 미쳐 날뛰는 도둑들을 죽음으로 보내게 하였도다. 거센 파도를 타고 넘는 거함이 빠르기 북(梭) 같았고, 번개같이 빠른 배는 어지러운 구름처럼 모였도다. 모든 군(軍)이 바람을 바라보듯 소축(小縮)이 되었으되 오직 너만은 타수(唾手)하고 앞장섰다. 적의 진로를 바다 가운데서 막았으니 적은 계책이 궁해져서 나는 듯이 달아났고, 맹렬한 불꽃이 목도(木道)에서 넘치게 하여 악인을 모두 잡았도다. 장고(藏袴)로써 기다렸으니 내 어찌 일자를 아끼리오? 무릎을 치고 감탄해 마지않으니 너는 삼석(三錫)을 사양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어 관질을 높여 가선대부를 제수하고 순천부사를 배(拜)하니 화리(化理)가 엄명(嚴明)하고 옥송(獄訟)이 공평하고 청명했으며, 관봉(官俸)과 물선(物膳)이 포민(浦民)에게서 나오는 것을 모두 경감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비석을 세워 기리었다. 병오년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배명되어 순천의 배리(陪吏)들이 마교(馬轎) 화잔(畵盞) 한 쌍을 받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물리쳤다. 수사(水使)에서 갈려질 때 영속(營屬)들이 가만히 포백(布帛)을 붙였으나 중도에서 알고서 이를 되돌려 보냈으며,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복피(襆被)가 소연(蕭然)하여 한 선비의 모습과 같으니 그때 보는 자가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을 때 관복을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 입었다. 당시 약봉(藥峯) 서성(徐渻)이 도총관이었는데 이를 보고 그의 청렴개결에 감복하여 경연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이에 선조가 크게 감탄하여 특별히 비단 한 단을 하사하고 관복을 지어 입게 하였더니 사람들이 제준(祭遵)에게 기의(奇衣)가 없었던 것과 비교하였다. 그 뒤 광해군에게 미움받아 출척(黜陟)되어 교동별장이 되고 임해군을 죽이도록 명령함에 공이 그의 죄 없음을 측은히 여겨 끝까지 잘 보호하니 여러 소인배가 미워하고 모함하여 마침내 국문(鞫問)을 받기에 이르렀으나 공이 의리로 항거하여 굴복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죽음에 나아갈지언정 무고한 왕자를 차마 해칠 수는 없습니다”라 하니, 광해군도 의롭게 여겨 이를 석방하고 곧바로 충청수사에 제수하였다. 공이 시정(時政)이 매우 분란하고 이륜(彛倫)이 어그러지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는 변경에서 투필(投筆) 한 사람으로 불행히 난을 만나 우연히 적은 공을 세워 외람되게 재열(宰列)에 올랐으니 국은이 이미 극에 이르렀다. 내가 여기에서 그만두는 것이 옮겠다.”하고는 곧 인부(印符)를 풀어놓고 소호와 손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는 이소(二疏)의 행적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또한 평일에 독서한 뜻을 볼 수 있다. 뒤에 포도대장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서사(筮仕)에서 곤수(閫帥)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간(睿簡)에서 나온 것이요 일찍이 권행(權幸)의 문에 간진(干進)하지 아니하였다. 어느 때에 당로(當路)한 노상(老相)을 만났으나 즐거이 무릎을 굽히지 아니하고 다만 이르기를,
“무인은 배례(拜禮)할 줄 모릅니다.”라 하였으니, 그 지기(志氣)가 이와 같았다.
갑인년(甲寅年: 광해군 6년, 서기 1614년) 2월 16일에 사제(私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광해군이 크게 슬퍼하여 예관을 보내 조제(弔祭)하고 두텁게 부의하였으며, 또 지관하는 관리가 땅을 가려 장사지냈으니, 묘는 구만 묘동 곤향(坤向) 언덕에 있다. 순천의 어부 수십 명이 공의 상을 듣고 포복(匍匐)하고 달려와서 곡하고서 고을의 북쪽 당항(堂項)의 포구에 살면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제수(祭需)로 바치기를 3년동안 계속하다가 돌아갔으니, 그 남긴 은혜가 사람의 마음 깊은 데까지 들어간 것을 알만한 것이다. 돌아가신 뒤 10년 만에 향인들이 사당을 도산(道山)에 세워 소호와 병향(並享)하였다.
병자년(丙子年)(순조 16년, 서기 1816년)에 도신(道臣)의 상언으로 인하여 공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훈련원사(知義禁副訓鍊院事)를 추증하였다.
배(配)는 정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니 통정대부 남세운(南世雲)의 딸이요, 묘는 공과 같은 영(瑩)에 쌍조(雙兆)이다.
한 아들과 한 딸이 있으니, 아들은 명호(鳴虎)이니 주부(主簿)를 역임하였고, 딸은 강진선(姜晉善)에게 시집갔다. 명호의 아들은 낙(洛)으로 찰방이었고, 낙은 네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이 밖에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슬프다! 임진의 난은 참혹하였다. 삼경(三京)이 함락되고 임금이 피난하였으나 나라가 망하지 아니한 것은 실로 명나라의 힘에 의지한 것이니 7년의 간과(干戈)에 생령(生靈)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되 인심이 마침내 둘로 떠나지 아니하여 중흥의 공렬(功烈)을 잘 지킨 것은 또한 제도(諸道)의 창의의 군사에 힘입은 것이다. 당시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음에 성패가 같지 않았으나 공의 형제는 몸이 먼 지방에 있어 이른바 어떤 모습인 줄도 알지 못하고 척검(尺劍)을 집고서 흉봉(凶鋒)을 당적할 때에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마침내 기훈(奇勳)을 이루었으니 세상의 공을 논평하는 이들이 곽재우의 출처, 훈절(勳節)에 비기었고, 무리를 부리는 재주는 또한 정기룡, 안신갑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 저 두 공은 의용과 명절(名節)이 세상에 추앙하는 바가 되지만 오히려 그보다 뛰어난 것은 공의 성취한 바이니, 어찌 조세(早歲)에 힘을 경학에 쏟아 지용(智勇)을 겸한 데 연유함이 아니리오? 몸을 혼조에서 깨끗이 함에 이르러 끝까지 완인(完人)이 되었고 그 임해군을 보호한 의기가 더욱 짝이 드문 일이었다. 사람이 능히 큰 공훈을 세우고 정절을 보전함이 겸전(兼全)하여 가진 이가 고금을 역수(歷數)해 보아도 대개 몇 사람이 되지 않으니, 탁절하고 웅위한 불세(不世)의 준걸(俊傑)은 진실로 쉽게 얻지 못하기 때문이 어찌 아니겠는가? 고 이충무공이 이르기를,
“다행히 최균, 최강의 힘을 입어 웅천의 싸움에서 대첩하였고 또 부해(浮海)의 오랑캐를 섬멸하였으니 어찌 마음에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라 하였고, 약봉 서성이 이르기를,
“최균, 최강은 기국이 관중(管仲)보다 못하지 아니한데 어찌 우도(牛刀)를 사용하리오?”라 하였다. 백사(白沙), 한음(漢陰), 권율(權慄) 등 제공이 모두 서신으로 물었고 인재(訒齋) 최현(崔晛)이 만사서(挽詞書)에 이르기를,
“남자가 몸소 천하의 일을 당해 내니 재명(才名)을 어찌 병든 문원(文園)에서 취할 것인가? 긴 허리는 주문(朱門)을 항해 굽히기를 부끄러워했고 웅장한 칼은 일찍 추로(醜虜)의 넋을 놀래었다. 옛 사졸은 양숙(羊叔)의 사랑을 생각해서 울었고 남은 백성은 적공(狄公)의 은혜를 기꺼이 말했도다. 천 리 먼 곳에 떨어져 살아 장례에 가지 못하는데, 남쪽 하늘 바라보고 눈물지니 해일(海日)이 흐리도다.”라 하고, 같은 시절에 여러분들의 추후(推詡)한 바이니 이에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지금 여러 백 년 뒤에서 다시 무슨 군말을 하겠는가? 삼가 국승, 야사에 밝게 드러난 것을 가지고 태상씨(太上氏)에게 고하는 것으로 쓴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경모(洪敬謨)는 삼가 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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