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실기

雙忠實紀 卷之五(쌍충실기 제5권)

구글서생 2023. 3. 26.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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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忠實紀 卷之五(쌍충실기 제5권)
국회소장 쌍충실기

 

제 5 권(卷之五)


종유제현록(從遊諸賢錄)


김성일(金誠一)

학봉(鶴峯) 김성일은 자가 사순(士純)이요 문소인(聞韶人)이다. 문과에 올라 사국(史局)에 뽑히어 들어가 사가(賜暇)로 호당(湖堂)에서 공부하였고, 삼사(三司)의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선 지 30년 동안 말을 다하고 꺼리지 않아 옛날 간신(諫臣)의 풍모가 있었다. 신묘년(선조 24년, 서기 1591년)에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는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아니하였고, 임진년에는 초유사에 임명되어 영남의 의병을 일으켜 중흥의 기틀을 튼튼히 이루었으며, 계사년에 진주에서 졸하였다. 일찍이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심학(心學)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았고 덕행과 훈업(勳業)이 백대에 찬란하게 빛났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를 문충공이라 하였다.

조종도(趙宗道)

대소헌(大笑軒) 조종도의 자는 백유(伯由)요 함안 사람이다. 일찍이 남명(南冥)선생을 사사(事師)하였고 사마시에 합격하여 안기(安奇)에서 찰방을 지냈고, 선복(宣福)의 제현과 함께 수학하고 퇴계 문하의 지결(旨訣)을 들었다. 기축년(214: 선조 22. 서기 100년)에 무옥(誣獄)으로 피체(被逮)되었고 임진년에 초유사 김학봉을 따라 경상도의 의병을 이끌었으며, 정유년(선조 30, 서기 1597년)에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됨에 떠나지 않고 북향하여 두 번 절하고 죽었다. 벼슬이 함양군수에 이르렀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충신려(忠臣閭)로 표장(表獎)되었고 시호를 충의공(忠毅公)이라 하였으며 황암(黃巖), 덕암(德巖) 두 서원에 향사한다.

김대명(金大鳴)

백암(白巖) 김대명의 자는 성원(聲遠)이요 학성(鶴城)사람이다. 일찍 문장을 이루어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삼개(三价)로써 명나라에 초빙되어 대칭(對稱)의 뜻을 아뢰니 명나라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옥룡연(玉龍硯)을 하사하였다. 임진년에 학봉이 불러서 소모장(召募將) 을 삼았고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으며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김시민(金時敏)

충민공(忠愍公) 김시민의 자는 면오(勉吾)요 안동 사람이다. 임진년에 진주통판(晉州通判)이 되어 초유사의 명령으로 주사(州事)를 겸하였고, 군사를 모아 성을 지켜 그 공적으로 목사로 승진되었다가 얼마 후에 또 병사(兵使)에 배명되었다. 적이 성을 포위한 지 7일이 되었는데도 구원병이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항상 조용히 기다리다가 마침내 성을 온전히 보존하였고, 이로 인하여 남도(南道)가 보장되었으며 창상(創傷)으로 병들어 죽었다. 영의정을 추증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을 봉하였다

정세아(鄭世雅)

호수(湖叟) 정세아의 자는 화숙(和叔)이요 연일(延日) 사람이다. 임진왜란에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적을 박연(朴淵)에서 만나 크게 파하였다. 또 영천의 적을 칠 때 화공으로 공격하였고 군사를 계연(鷄淵)으로 진군시켜 적을 수 없이 무찔러 죽였다. 그리고 박진(朴晉)의 군사가 무너짐에 아들 의번(宜藩)이 포위병속에 들어가 창상을 입고 죽었다. 여기에서 적이 또한 기세가 꺾여 이곳을 버리고 달아나니 강 왼쪽이 안전할 수 있었다.
황산찰방(黃山察訪)으로 천수(薦授)되고 병조판서를 추중하였으며 시호를 강의공(康毅公)이라 하였다.

정승윤(鄭承尹)

남계(南溪) 정승윤의 자는 임중(任仲)이요 진주 사람이며, 의민공(義敏公)의 처제(妻弟)이다. 문장과 행의(行誼)로 동료의 영수(領袖)가 되었고, 친상(親喪)을 당해서는 죽을 마시면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평생에 궁색하게 살면서 검약을 지켜 가난 때문에 그 지조를 바꾸지는 않았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청계원(淸溪院)에 배향되어 있다.

이광악(李光岳)

광남군(廣南君) 이광악의 자는 진지(鎭之)요 광주(廣州)사람이다. 진사요 무과에 합격했다. 임진왜란에 곤양군수가 되어 적이 진주를 핍박하므로 초유사 김공이 김시민과 함께 성을 고수하고 독전케 하여 적을 물리쳤다. 갑오년에 곽재우의 부장이 되었고 또 일어나 다시 청주의 수령이 되었다. 벼슬이 병사에 이르렀고 군(君)의 칭호를 이어받았으며 시호를 충장공(忠壯公)이라 하였다.

강칭(姜偁)

송와(松窩) 강칭은 자가 사앙(士盎)이요, 진주 사람이다. 문학과 행의로 과거공부를 폐하고 지조를 구하여 이름이 당세에 떨쳤다. 감역(監役)에 천거되고 사복(司僕), 판관, 시강(侍講), 자의(諮議)에 천임(遷任)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임진년에 김학봉을 따라 창의하여 적을 토벌하고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다. 정유년에 진주에서 순절하니 도백(道伯) 약봉 서성이 나라에 계주(啓奏)하여 승정원좌승지를 추증하였다.

이노(李魯)

송암(松巖) 이노의 자는 여유(汝唯)요 고성 사람이다. 젊어서 조남명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고 항소(抗疏)하여 을사년의 충신과 간신을 변별하였으며 문과에 올라 최수우당(崔守愚堂)의 신원(伸冤)을 청하였다. 임진왜란에 일어나 학봉 초유사의 막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소집할 때 그가 모획하는 것을 김학봉이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따랐다. 벼슬이 정언(正言)에 이르렀고 증이조판서였으며 시호를 정의공(貞義公)이라 하였다. 낙산원(洛山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용사일록(龍蛇日錄)」이 있다.

이순신(李舜臣)

충무공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海)요 덕수(德水) 사람이다. 무과에 올라 신묘년(선조 24, 1591년)에 전라좌수사를 배하고 거북선을 만들어 방어할 병기를 수리하고 갖추었다. 임진년에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명량(鳴梁), 한산(閑山), 당포(唐浦)에서 여러 번 이기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계사년에 통제사를 겸하였고 정유년에 진린(陳璘)과 함께 적을 노량(露梁)에서 맞아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우의정을 추증하고 선무일등훈(宣武一等勳으로 기록하였으며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으로 봉하고 시호를 내리어 조제(弔祭)하였다.

김덕령(金德齡)

충장공(忠壯公) 김덕령의 자는 경수(景樹)요 광주의 석저촌(石底村)사람이다. 신용(神勇)이 절륜하더니 임진년에 토지와 집을 팔아 병기를 만들고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으니 세자(世子)가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갑오년에 군호(軍號)를 충용(忠勇)이라 이르고 조정에서 모든 의병을 충용군에 예속시켜 진주에 유둔케 하였다. 임금이 거제도의 둔적(屯賊)을 토벌케 하니 비어(蜚語)로 말미암아 마침내 고문(拷問)으로 옥사하였다. 왜적이 듣고 날뛰며 서로 경하하기를 “금나라 사람이 악비(岳飛)의 죽음을 듣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고 한다.
찬성(贊成)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광주 의렬사(義烈祠)에 배향되어 있다.

이정(李瀞)

모촌(茅村) 이정의 자는 여함(汝涵)이요 재령(載寧)사람이다. 남명 선생을 사사하였고 임진년에 학봉이 본도(本道)에 초유사로 왔을 때 공을 소모장(召募將)으로 삼으니 기계를 설치하여 방어하고 여러 번 기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창하니 학봉이 신의가 본래 뚜렷한 것을 칭찬하였다. 벼슬이 청주목사에 이르렀고 대각원(大覺院)에 배향되어 있다.

권응수(權應鉄)

백운재(白雲齋) 권응수의 자는 중평(仲平)이요 안동 사람이다. 두 아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의 적을 진격할 때에 화공술을 써서 종횡으로 달리면서 쏘니 한 번 발사에 반드시 쌍첩(雙疊)이 되어 적의 머리 수백 급을 얻었다. 또 경주의 둔적을 습격하니 군사의 성세(聲勢)가 크게 떨쳤으며 학봉이 추대하여 의병대장으로 삼고 모든 의병장을 여기에 소속시켰다.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고 선무이등훈에 기록되었으며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찬성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충의공(忠毅公)이라 하였다.

박성

대암(大庵) 박성의 자는 덕응(德凝)이요 밀양 사람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사우(師友)하여 학문하는 것이 독실하고 실천에 힘써 변화하는 기질을 궁행(躬行)하고 심득(心得)하는 것으로 대요를 삼았다. 벼슬이 상사(上舍)에 올랐고 유일(遺逸)로써 관직에 여러 번 제수되었는데 혹은 나아가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청송부사에 이르러 임진왜란을 만나 학봉과 오리(梧里)를 따라 군사에 참모하였고 봉사십육조(封事十六條)를 올려 국가의 대계(大計)를 극진(極陳)하니 말이 매우 개절(凱切)하였다. 학자들이 송림서원(松林書院)에 제사지낸다.

조희익(曺希(益)

진사 조희익의 자는 군망(君望)이요 창녕 사람이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왜란의 처음에 호수(湖叟) 정세아와 함께 정성을 다하여 군사를 불러 모으고 초유사의 진영에 올려 강좌(江左)의 여러 장수가 의병을 억제하는 상황을 개진(開陳)하였다. 그 후로 초유사의 절제를 받들어 영천의 적을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었다. 호수 정세아가 병들자 그 군사를 여기에 소속시켰고, 얼마 안 있어 공이 또 병들자 그의 아우 조광익(曺光益)이 대신 영솔하였다.

한계(韓誡)

봉사(奉事) 한계의 자는 신백(愼伯)이요 청주 사람이다. 문학과 유행(儒行)으로 명예가 일찍 드러났고, 한강 정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선생이 이를 벗으로 대접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에 천거되고 벼슬이 봉사에 이르렀다.
「조은집(釣隱集)」에 의하면,
“임진왜란에 공이 수사(水使) 최강(崔堈)과 함께 창의하였다.”라고 하였다.

서성(徐渻)

약봉(藥峯) 서성의 자는 현기(玄紀)요, 달성(達城) 사람이다. 문과에 올라 임진년에 황정욱(黃廷彧)의 종사(從事)가 되어 북관(北關)에 가서 군사를 경성(鏡城)에서 일으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에게 붙였다. 뒤에 경상감사에 발탁되어 전후로 6도(六道)를 편력(遍歷)하였다. 광해군 계축년에 단양으로 귀양갔다가 병진년에 다시 영해(寧海)로 쫓겼다. 인조반정으로 형조판서로 기용되어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 기사(耆社)에 들어갔고 시호를 충숙공(忠肅公)이라 하였다.

조응도(趙凝道)

참의(參議) 조응도의 자는 사성(士成)이요 함안 사람이다. 임진년에 고성에서 임시 수령으로 있었는데, 적이 이르렀는데도 미처 방비를 갖추지 못하여 성안의 병마(兵馬)가 고약(孤弱)했기 때문에 지탱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나 오히려 보루를 의지하여 굳게 지켰다. 사람들이 나가 피하기를 권하니 대답하기를,
“국토를 지키는 신하가 임지에서 죽는 것이 직분일 뿐이다.”라 하고, 몸을 던져 나가 싸웠는데 화살을 헛되게 쏘지 않았고 화살이 다 떨어지자 단도를 가지고 적을 베다가 힘에 부쳐 전사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병조참의를 추증하였다.

곽준(郭䞭)

존재(存齋) 곽준의 자는 양정(養靜)이요, 현풍 사람이다. 정한강과 박대암을 따라 교유하여 각려(刻勵)하고 분발하였으며 정학(正學)을 강명(講明)하였다. 거상(居喪)을 잘하여 3년을 여묘살았고, 임진년에는 김면(金沔)의 군막을 도와 군정을 비보(裨補)하였으며, 학봉이 군로(軍勞)를 조정에 올려 우관(郵官)을 제수하였다. 정유년(丁酉再亂)에 안음현감이 되어 황석산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평상에 걸터앉아 대장의 용의(容儀)를 하고서 안색도 변하지 않고 죽으니 두 아들 또한 아버지를 끌어안고 죽었다. 이때 시집간 딸이 함께 성안으로 들어오다가 그 지아비가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목을 매어 죽으니 일문(一門)에 삼강(三綱)이 함께 섰다고 일렀다.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공(忠烈公)이라 하였다.

곽재우(郭再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의 자는 계수(季綏)요, 현풍 사람이다. 젊어서 남명 선생을 섬겨 독서를 좋아하고 겸하여 무예에도 통달하였다. 임진년에 가재(家財)를 팔아 향병을 모으고 분의(奮義)하여 적을 칠 때에 스스로 호를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하고 신기한 계책을 내어 적을 맞아 여러 번 싸워 모두 승첩을 거두었다. 정유년에는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가등청정이 성아래까지 이르자 밤새 싸우지 않으니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공적으로 여러 번 승진하여 함경도 관찰사에 이르렀고, 갑인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집을 창암강(滄巖江) 위에 짓고 여생을 마치니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익공(忠翼公)이라 하였다.

정승훈(鄭承勳)

매죽당(梅竹堂) 정승훈의 자는 선술(善述)이요 진양 사람이며 남계(南溪) 정승윤(鄭承尹)의 종제(從弟)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문장으로 명성을 드러내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창의하고 적을 토벌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신해(申海)

봉사 신해는 하양(河陽) 사람이다. 임진년에 창의하여 화산(花山) 권응수와 함께 계책을 세워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에서 성을 점거하고 있는 적을 덮쳐 공격하였다. 또 군사를 추평(平)으로 출동시켜 적을 추격하여 강가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감히 나오지 못하므로 달려가 포위하여 성문을 쳐부수고 관사(官舍)에 불을 놓아 적을 거의 다 죽였다.

정유경(鄭惟敬)

주부(主簿) 정유경은 진주 사람이다. 초유사가 처음으로 진주에 도착하여 공과 허국주(許國柱)를 차출하여 복병장(伏兵將)을 삼고 훈련주부로 있었는데 임진에 성이 함락되자 촉석루(矗石樓)에서 절사(節死)하였다.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하고 창렬사(彰烈祠)에 배향하였다.

최담령(崔聃齡)

의장(義將) 최담령은 남원 사람이다. 힘이 세고 담략이 있었다. 충장공(忠壯公) 김덕령이 격문을 영남에 전하고 군사를 이끌고 남원으로 가려 할 때 공을 얻어 별장으로 삼았다. 이몽학(李夢鶴)의 옥사에 적의 모함에 연루되어 충장공과 함께 수사(收司)되었고 충장공은 결국 옥에서 죽고 공은 얼마 후에 석방되었다. 조정에서 공이 충장공을 대신하여 그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으나 공이 비분(悲憤)하여 항소를 올린 다음 군사를 버리고 돌아왔다.

강응황(姜應璜)

백천(白川) 강응황의 자는 위서(渭瑞)요 송와(松窩) 강칭의 아들이다. 일찍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 두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임진년에 학봉선생을 따라 격문을 날려 군사를 모아 의성(義聲)을 크게 떨쳤다. 행재소(行在所)로 분문(奔問)하여 많은 주책(籌策)을 세우니, 영상 유영경(柳永慶)이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교관부솔(敎官副率)로 제수되었다. 서애선생(西厓先生)의 천거로 예산(禮山)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임자년(壬子年)에 다시 서울에 들어가 시사(時事)가 옛날 같지 않음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취한정(翠寒亭)을 짓고 살았다. 인조반정 후에 사어(司禦)에 제수되었다가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고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김경근(金景謹)

대하재(大瑕齋) 김경근의 자는 이신(而信)이요 상주(尙州) 사람이다. 젊어서 하각재(河覺齋)를 따라 학문을 성실히 익히고 신묘년(임진왜란 1년전)에 앞으로 장차 환란이 있을 것이라 예견하여 지방 수령들에게 성첩(城堞)을 보수할 것을 권유했다가 민심을 소란케 한다는 것으로 피체(被逮)되었다. 그러나 왜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최패(摧敗)의 공을 이루었고, 정유재란 때에 적을 만나 적이 협박하여 항복하기를 재촉했으나 의관을 정제하고 창날을 받아가면서 적을 꾸짖는 소리가 입에 끊이지 않은 채로 죽었다. 사헌부감찰을 추증하였다.

정기룡(鄭起龍)

매헌(梅軒) 정기룡의 자는 경운(景雲)이요 곤양(昆陽) 사람이다. 담력과 용맹이 남보다 뛰어났고 눈빛이 횃불과 같았다. 처음 조경(趙璥)의 돌격장이 되어 거창의 적을 공격함에 표범의 위엄으로 적을 보니 적이 착악(錯愕)하여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적의 목을 백여 급이나 베고 학봉(鶴峯)이 상주판관으로 보내 성을 점거하고 있던 적 휘원(輝元)을 분격하니, 휘원이 패하여 달아났다. 목사로 승진 임명되고 체찰사의 격문을 받들어 고령(高靈)에서 크게 싸워 쓰러진 시체를 짓밟고 베니 적의 수만 명 중에서 탈출하여 돌아간 자가 천 명도 되지 않았다. 우병사(右兵使)에 승진된 뒤로 영남과 호남에 치돌하여 크고 작은 60여 회의 싸움에서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다. 벼슬이 보국삼도통제사(輔國三道統制使)에 이르렀고 시호를 충의공(忠毅公)이라 하였다.

최현(崔現)

인재(訒齋) 최현의 자는 계승(季昇)이니 의민공(義敏公)의 삼종숙이다. 김학봉과 정한강 두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생원으로 처음 벼슬하다가 등제(登第)하여 한원(翰苑)에 추천되고 홍문관에 뽑혀 광해군이 사친(私親)을 추숭하는 잘못을 논한 글을 올렸으며, 조정이 영창대군을 안률(按律)함에 이르러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탄핵을 입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조반정 후에 폐관(廢官)에서 부르는 명령을 받아 안현(鞍峴)의 싸움에서 독전하였고, 동벽(東壁) 삼사(三司)의 부제학을 역임하였고, 강원도의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북로(北虜)가 창궐하므로 군사 천명을 가지고 한진(漢津)을 막았고 오랑캐가 물러간 뒤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양병보장(養兵保障)의 급선무를 말하였다.
좌찬성을 추증하고 시호를 정간공(定簡公)이라 하였으며, 송산원(松山院)에 배향하였다.

심광세(沈光世)

휴옹(休翁) 심광세의 자는 덕현(德顯)이요 청송(靑松)사람이다. 25세에 과거에 올라 춘추관에 천입(薦入)되어 춘방(春坊)과 홍문관을 거쳤다. 계축년에 광해군이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후 고성으로 귀양보냈다. 인조반정 후에 소환되어 응교(應敎)를 제수함에 시무13조(始務十三條)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여 서쪽 변방을 순찰하고 돌아와 안변십책(安邊十策)을 올리고 사인(舍人)으로 옮겼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임금의 수레를 따라 급히 달려가다가 부여에 이르러 길에서 죽었다. 고금의 역사를 보기를 좋아하고 경략(經略)으로 자부하여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았으며, 저술로는 『휴옹집(休翁集)」과 「해동악부(海東樂府)」가 있다.

정곽(鄭廓)

남포(藍圃) 정곽의 자는 청여(淸汝)요, 진양 사람이다. 강개하고 절이 있어 약관에 무과에 올랐다. 임진년에 창의하여 배둔역(背屯驛)에 웅거하고 적에게 항거하였다. 소계, 운포 등 여러 사람과 소리를 같이하고 서로 호응하여 진주가 포위를 당했을 때 함께 군사를 남강에 출동시켜서 적을 추격하여 반성(班城)까지 이르니 살상된 적이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이 후퇴하여 삼가(三嘉)에 둔치고 있을 때 군사를 이동시키면서 독전하다가 지나는 화살에 부상을 입어 병이 위독함에 두 아우에게 부탁하여 대신 거느리게 하고 군중에서 죽었다. 벼슬이 훈련판관(訓鍊判官)에 이르렀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하였으며, 원종훈이등(原從勳二等)에 기록되고 여(閭)로 정표하였다.

창의제현(倡義諸賢)


이달(李達)

운포(雲圃) 이달의 자는 명숙(明叔)이요 함안 사람이며 의민공의 종생질이다. 일찍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였고 무예도 겸하여 통달하였다. 임진년에 일병(日兵)이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치자 상(喪)중에 있었으나 척검(尺劍)으로 세 왜구의 목을 베고 검은 상복을 입고 창의하였다.
이때 의민공과 의숙공 두 형제가 이미 먼저 창의하였으므로 이들과 합진(合陣)하여 끝까지 전란을 이겨 여러 번 진주, 고성, 창원, 진해, 웅천, 사천 사이에서 승첩을 거두었다. 초유사 및 도순찰사가 그 공적을 조정에 올려 교지로 벼슬을 제수하였다. 충장공 김덕령이 글로써 권장하여 말하기를,
“전후의 교봉(交鋒)에서 이기기를 많이 하고 패한 일은 적었으니 마치 일을 성취하기에 알맞은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충무공 이순신이 포계(褒啓)하여 말하기를
“우도(右道)에서 의려(義旅)가 일어난 것은 이달의 공 또한 많았습니다.”라 하였다. 조정에서 무훈을 권장하여 집을 하사하였고 벼슬은 양산군수(梁山郡守)를 역임하였으며, 원종훈 이등에 참예하였다. 광해군 때에 부름을 받아 판교에 이르렀고 영창대군을 죽일 의논을 한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스스로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진 것을 칭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안신갑(安信甲)

장암(壯庵) 안신갑의 자는 의용(義用)이요 순흥(順興) 사람이니 의민공의 생질이다. 담이 몸보다 크고 강용(剛勇)이 평소 드러나 아버지 감찰공께서 김해에서 절사(節死)함에 곧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였다. 가동을 불러내고 의사(義士)들을 모아 몸을 잊고 분전하여 적의 장수 평성상(平盛常)을 베어 죽이고 동남쪽을 막은 공이 있었다. 정유년에 적을 산음에서 만났으나 부대 편성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크게 몰려오는 한 떼를 만나 힘이 다하고 화살마저 다 떨어져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음을 알고 마침내 갑옷을 입고 칼을 집고서 스스로 환아정(換鵞亭) 아래 깊은 못에 몸을 던졌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여(閭)를 정표하고 원종훈 이등을 기록하였다. 추천을 거쳐 처음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어 벼슬이 초계군수(草溪郡守)에 이르렀고,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추증하였으며, 두릉원(杜陵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임금이 하교하여 이르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씻었으니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구할 것이다.”라 하였다.

박연홍(朴連弘)

신암(新庵) 박연홍의 자는 이서(以瑞)요 밀양 사람이다. 남보다 담략이 뛰어나 왜란 초에 준마가 있어 긴 칼을 차고 이르렀다. 곧 창의하여 처음으로 적을 만났는데 적장이 제 용맹만을 믿고 바로 달려오므로 공이 박격(搏擊)하여 이를 베고 큰 돌을 들어 던지니 쓰러져 죽은 자가 수백 명을 헤아렸으며, 지금까지 그 돌이 남아 있다. 곽재우가 그 충용을 인정하였고 의숙공이 사방으로 달리면서 구원할 때 반드시 함께하였다. 진양성이 포위되었을 때 몸에 세 발의 탄환을 맞고도 의용이 조금도 꺾이거나 저하되지 않았다. 벼슬이 장예원판결사에 이르렀고 삼등훈에 기록되었으며, 병조참판을 추증하였다.

최흥호(崔興虎)

최홍호의 자는 문중(文仲)이니 의민공의 장자이다. 의민공을 의병의 진영에서 모시고 좌우에서 번갈아 가면서 일을 도맡아 돕고, 흩어져 도망가는 군사들을 규합하며 기발한 책략을 세워 적을 잡아 베고 힘을 다하여 군량을 운반하여 몫을 나누어 민첩하게 지급하니 성세가 더욱 떨치게 되었다. 이것은 공이 아침저녁으로 도운 데 힘입은 바가 있었다. 아우 찰방공 진호(振虎)와 함께 웅천, 진주, 함안에 달려가 싸워 모두 승첩을 거두니 강송와가 글을 주어 칭찬하기를 ,
“군과 같은 형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께 효도하는 사람이라 이를 수 있다.” 라 하였다. 또 군무(軍務)로 모든 의진(義陣)을 왕래하니 백천 강응황이 평소 공에게 감복하여 어려운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려 하였으되 의민공이 본진에 조금도 비울 틈이 없다는 것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전란이 끝난 후 자제들을 불러 모아 가학(家學)을 강명(講明)하였고 다시 명리(名利)로써 그 마음에 누가 되게 하지 않았다. 덕천서원이 중창되었으나 원의 모습이 구차스럽고 어려울 때 공이 계공과 함께 여러 해 동안 그 자리에 머물면서 경비와 계획을 극진히 하여 옛 모습을 회복시켰다. 『청금록(靑衿錄)』을 수찬할 때에 봉강(鳳岡) 조겸(趙㻩)의 『수창제집(酬唱諸什)』이 있고, 음사(蔭仕)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최용호(崔勇虎)

최용호의 자는 무숙(武叔)이요 의민공의 종질이다. 무예를 익혀 알았고 여력(膂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왜병이 갑자기 몰려와 마을을 포략하므로 어버이를 모시고 가막동(可幕洞)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칼날을 피하고 있었다. 이때 의숙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따라가서 스스로 휘하의 군관이 되어 부오(部伍)를 단속하여 군사의 양식을 모아 운반하였다. 을미년에 부친상을 만나 비록 난리 중일지라도 몸을 조심하고 관(棺)을 만들어 예법대로 하였다. 이때 적에게 왕래하는 길이 막혔는데 장사 조언신(趙彦信)과 함께 밤을 타서 운반하여 고산(故山)으로 돌아가 장사지내고 일어나 다시 군진으로 달려가 협찬(協贊)과 공취(攻取)의 공을 분별하였다. 전란 후에 무과에 올라 벼슬이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최진호(崔振虎)

최진호의 자는 병숙(炳叔)이요 의민공의 소자(小子)이다. 문장에 능하고 지략이 있어 의민공 형제가 창의하여 국란에 달려갈 때 공이 몸을 던져 따르기를 청하였다. 그때 나이 20이었다. 의숙공이 싸움터에 나갈 때마다 반드시 좌우에 있도록 명령하였고 그가 이충무공을 웅천에 가서 구원할 때에도 공이 이달, 안신갑과 함께 수행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어 방어하고 대첩을 거두었다. 곽망우당, 조대소헌, 강백천의 진영에 내왕하면서 군량을 모으고 군무를 힘껏 도와 끝까지 힘써 노력하여 칭찬받았다. 난이 평정된 뒤에 공을 기록하여 훈련봉사에 제수되었고,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에 제수되었을 때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초복(初服)으로 돌아가 좌우도(左右道)의 명승지를 두루 다니면서 도(道)를 논하고 의를 강명하였다. 또 종백형(從伯兄) 통덕공(通德公)을 따라 여러 번 덕천서원에 들어가 남명 문하의 제현과 교류하여 청금록을 수찬하였다. 강송와의 글에 답하여 말하기를,
“용산(龍山)에 가서 우연히 별장 김응남을 만나 간신히 산음으로 가서 적진을 대파하고 16일에 진영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수일 전에 조종도, 곽재우 어른과 합진하여 장산(牆山), 정진(鼎津)의 적을 막으시고 아직도 진영으로 되돌아오지 않으시어 소식조차 들을 수가 없으니 재하자(在下者)로서 초조한 마음을 어떻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서순개(徐舜凱)

서순개는 달성(達城) 사람이며, 의민공의 여서(女婿)이다. 사장(詞章)을 배워 일찍부터 향당에서 명성이 있었다. 의민공이 의병을 창솔(倡率)하고 군부(軍簿)를 부촉(付屬)하니 크고 작은 문서가 날마다 쌓이는데도 응접하기를 물 흐르듯이 하고 회계(會計)가 매우 합당하여 재성(才聲)이 일세를 덮을 만하였으나 마침내 연수(年壽)를 다하지 못하였다.

정준(鄭俊)

정준의 자는 준선(俊善)이며 창원 사람이다.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용력이 세상에 뛰어났다. 당시 장사로 일컫는 여덟 사람 중에 지략은 이들보다 뛰어났다. 의민공이 향병을 모집할 때 그가 충담이 있음을 알고 격문을 보내 불러 휘하의 군관을 삶으니, 맡은 일을 각시(恪視) 하고 기계(器械)를 정돈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였다. 적이 구만동 입구에 충척(充斥)하여 크게 포략을 함부로 하므로 의숙공을 따라 공격하여 사살하니 시냇물이 붉게 되었다. 또 김해에서 적을 만나 선봉이 되어 베고 사로잡아 대첩을 거두고 돌아왔다. 을미년에 진주로 달려가 구원하다가 중도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분내고 꾸짖고 창을 던지면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다가 세 발의 탄환을 맞아 상처를 싸매고 집으로 돌아와 5일 만에 죽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병조참판을 추증하였다.

최각호(崔角虎)

최각호는 의민공의 중제(仲弟) 게(垍)의 서자이다. 힘이 범을 잡을만하였고 강개하고 높은 절개가 있어 휘하의 군관으로 삼았다. 적을 대하여 공격해 싸울 때마다 말을 타고 치돌하였고 종일토록 싸워도 의기가 더욱 씩씩하였다. 벼슬이 첨지중주부사에 이르렀다.

최한(崔僩)

최한은 고성의 장사 여덟 사람 중 한 사람이다. 평소 의숙공을 신복(信服)하여 섬기더니 이때 풍문을 듣고 와서 휘하에 있게 되었는데 군관으로 차출되어 풍력(風力)으로 군사를 불러 모으는 데 능하였다. 처음 구만동 입구에서 싸울 때 정준과 함께 좌우익이 되어 군사를 몰아 적을 섬멸하니 시냇물이 붉어졌다. 의숙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오늘의 승첩은 제군의 힘이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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