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실기

雙忠實紀 卷之二(쌍충실기 제2권)

耽古樓主 2023. 3. 25.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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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소장 쌍충실기

 

제 2 권(卷之二)


가승(家乘)

만력(萬曆) 임진(壬辰: 선조 25년, 서기 1592년) 4월 13일에 왜구(倭寇)가 부산(釜山), 동래(東萊)를 함락시키니, 열진(列鎭)이 와해(瓦解)되었다. 적이 내지(內地)로 난입(攔入)하여 인민(人民)을 도략(屠掠)하니 계공(季公)이 평소에 담략(膽略)과 기절(氣節)이 있었는데, 강개(慷慨)하여 백공(伯公)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忠孝)를 지켰고 또 저가 이미 국은(國恩)을 받았으니 중인(衆人)과 같이 배의(背義)로 투생(偸生)만 하여 임수(林藪)의 사이에서 구차스럽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의려(義旅)를 일으켜서 충절(忠節)을 다하도록 합시다.”
라 하니, 백공께서 듣고 기특하게 여기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너의 포부(抱負)가 녹녹(碌碌) 하지 아니한 줄을 알고 있었는데 지금 판탕(板蕩)한 때를 만나 나라의 은혜 갚는 일을 도모하여 결의(決意)하고자 하니, 이는 진실로 나의 뜻과 합당하다. 내 비록 서생(書生)이나 또한 함께 동사(同事)하여 사생(死生)을 같이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곧 서로 함께 모획(謀劃)함에 백공의 소자(小子) 진호(振虎)도 또한 종군하기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모든 가루(家累)는 중공(仲公)에게 부탁하여 의령(宜寧) 자굴산(闍崛山)으로 보내어 피난토록 하고, 날짜를 가리어 기병(起兵)할 때 자제(子弟)와 노정(奴丁)을 다 동원하고 또 향병(鄕兵)을 불러 모으니 일순(一旬)의 사이에 무리가 수백인(數百人)이 되었다.
이에 가재(家財)를 다 내어 종군자(從軍者)의 가속(家屬)에게 나누어주고 마음을 풀어헤쳐서 무양(撫養)하면서 충의(忠義)로써 개유(開諭)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동, 분발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이때 표하(票下)의 군관(軍官)에 종질(從姪) 용호(勇虎), 서질(庶姪) 각호(角虎) 및 장사(壯士) 박연홍(朴連弘), 최한(崔僩), 정준(丁俊)등 충의(忠義)와 담략(膽略)이 있는 사람들이 풍문을 듣고 와서 합세하니 군세(軍勢)가 자못 떨치었다. 여기에서 부오(部伍)를 단속(團束)하고 기계(器械)를 정돈(整頓)하고서 백공이 계공에게 말하기를,
“지금 오배(吾輩)가 초래(草萊)에서 창기(倡起)하였음에 왕인(王人)에게 품고(稟告)한 연후라야 명분이 정당하고 의리가 순조로울 것이다.”라 하니, 계공이 곧 박연홍과 함께 달려가서 뜻을 갖추어 고하였으므로, 현쉬(縣倅)도 또한 장하게 여기고 이를 허락하였다. 이어서 군기(軍器)를 빌어서 돌아오는 회로(回路)에 구만동구(九萬洞口)에 들어오니 적이 이미 온 골짜기에 미만(瀰漫)하여 포략(暴掠)을 크게 함부로 하고 있었다. 공이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바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위이(逶迤)하여 반가령(反加嶺)을 넘어가는데, 마상(馬上)에서 갑자기 어린아이가 부르짖는 소리가 바위틈으로 나오는 것을 들었다. 아이가 말하기를,
“아저씨, 나를 살려 주소서.”라는 것이었다. 공이 경황(驚惶)하여 돌아보니 곧 종질(從姪) 정호(廷虎)였다. 급히 아이를 붙들어 말에 태울 즈음에 적이 쫓아와서 요구철(腰鉤鐵)을 던져 발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즉각 반격하여 적의 머리 둘을 베어서 말안장에 달고 돌아왔다. 이때 백공이 소대계(蘇臺溪) 위에 진(鎭)을 벌려 놓고 적과 서로 대치하면서 계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호군(犒軍)할 물건을 갖추었으므로 재촉하여 먹이기를 마치고서 계공이 곧 수십 명의 정예(精銳)를 이끌고 스스로 선봉(先鋒)이 되어 말에 올라 치돌(馳突)하면서 칼을 휘둘러 난작(亂斫)하고, 모든 장사도 또한 일시에 함께 발(發)하여 뒤를 따라 추격해 베니 혈육(血肉)이 낭자하였다.
일찍이 우연히 신구(神駒)를 얻어 싸움에 임하여 항상 이를 타고 다니더니, 산판(山坂)을 오르내릴 때 그 빠름이 나는 것과 같아서 적이 비록 일제히 활과 총을 쏘아도 모두 맞히지 못하였고, 밤새 감전(酣戰하여 다 오멸(鏖滅)시키니 시냇물이 다 붉었다.
이로부터 적의 기세가 돈좌(頓挫)되어 원근(遠近)에 있던 모든 왜인(倭人)들이 모두 바람을 맞은 것처럼 분궤(奔潰)되었고, 일방(一方)이 이에 힘입어 안도(安堵)하게 되었다.
다음날에 또 나씨(羅氏) 집을 범해(犯害)한 적을 나아가 섬멸하여 남김이 없게 하니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통쾌함을 금치 못하였다. 이로부터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니 산중으로 피난했던 사람들이 점차 나와서 다투어 서로 의부(依附)하였다.
표종질(表從姪) 이달(李達)공이 마암(馬巖)으로부터 원수 갚기를 성언(聲言)하고 군사를 모아 와서 군세(軍勢)를 도우니 대개 그의 친분(親墳)이 적에게 침해를 받았기 때문에 검은 상복을 입고 부진(赴陣)하였다.
여기에서 계공이 이공은 장수가 되고, 백공을 모주(謀主)로 삼아서 주책(籌策)을 찬획(贊畫) 하고 궤향(饋餉)을 판급(辦給)하더니 생질 안신갑(安信甲)이 또한 소리를 같이하여 적을 쳐서 공훈을 많이 세웠다.
6월에 비로소 대가(大駕)가 서천(西遷)하였다는 말을 듣고 형제가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휘하의 사졸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학봉(鶴峯) 김선생(金先生)이 초유사(招諭使)로서 진주(晉州)에 와서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에게 성첩(城堞)을 수축하게 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분발하는 기운을 가다듬었다.
이때 공의 형제분이 담티(墻峙)에 진을 치고 진주와 고성을 왕래하면서 표략(剽掠)질하는 적을 막아 꺾는데, 계공은 항상 정예를 이끌고 진주의 위급을 달려가 구원하고 백공은 군사를 나누어 여기에 유둔(留屯)하여 성세(聲勢)를 떨쳤고 겸하여 선영의 불우(不虞)를 대비하니 대개 이 재는 진주와 고성 두 고을의 경계를 거험(據險)하여 깊고 좁으면서 조애(阻隘) 한 곳이 많고, 또한 산 아래 거민(居民)의 풍속이 자못 순고(淳古)하였으니 공이 이르기를,
“이곳은 지킬만하고 의병(疑兵)을 설치하기에 알맞다.”라 하고 이에 금상(衾裳)을 다 찢어서 기치(旗幟)를 만들어 산 위에 많이 벌려 놓고 풍운장(風雲將)이라 자칭하여, 이 이름을 거리에 걸어 두고 적을 현혹케 하였으며 또 거민과 약속하여 낮에는 농사에 힘쓰고 밤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영상(嶺上)으로 모여서 각각 4, 5개의 횃불을 들어 좌우로 벌려 세우고 고조(鼓噪)하면서 소리를 지르다가 홀연히 불을 꺼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같이 하며 아경(俄頃)에 또다시 이같이 하고 밤마다 그 횃불을 배(倍)로 늘리어 군사가 많게 보였다. 그리고 장사 수십 인을 뽑아서 각각 큰 활을 가지고 산곡(山谷)을 출몰케 하여 좌치우돌(左馳右突)하면서 유병(遊兵)으로 오전(鏖戰)하는 모습을 짓게 하고 날마다 소고기와 술을 먹여 군정(軍情)을 기쁘게 하니, 여기에 쓰이는 사졸들은 용기가 백배하여 하나가 백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여기에서 적이 크게 의구심(疑懼心)을 내어 ‘신병(神兵)이 여기에 있다’ 이르고 마침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백공이 사졸을 어루만지기를 집안사람과 같이하여 은신(恩信)을 두루 고르게 하며, 군사들의 음식을 조달함에 언제나 몸소 살펴보고 면면(面面)히 서로 위로하며 충의(忠義)로써 권장하여 이르기를,
“군부(君父)께서 몽진(蒙塵)하셨으니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겠느냐?”라 하고 체읍(涕泣)이 연연(漣漣)하니 사졸이 또한 모두가 감읍(感泣)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싸우고자 하였다.
그때 최각호(崔角虎), 최한(崔僩), 정준(丁俊) 등이 모두 군관(軍官)이 되었더니 항상 승첩을 거둘 때마다 공이 자기의 공(功)으로 하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돌리니 모든 장사(將士)가 이로써 열복(悅服)하여 즐거이 명령에 따랐다. 이달 29일에 계공이 진주로부터 담티의 진소(陣所)로 돌아와서 포치(布置)한 것을 두루 돌아보고 이르기를,
“우리 형님은 본래 유자(儒者)인데 용병(用兵)의 규모가 이와 같구나.”라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쉬게 한 지 5일 만에 초유사 김공이 만나 보기를 청하여 형제분이 곧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가서 융복(戎服)으로써 들어가 보이니 그때 조공종도(趙公宗道), 이공노(李公魯), 강공칭(姜公偁), 이공정(李公瀞), 곽공재우(郭公再祐)도 또한 모두 만나서 서로 적을 토벌하여 나라에 은혜 갚기를 허락하고 드디어 동맹(同盟)하고 헤어졌다. 여기에서 백공은 군사를 담티로 돌리고 계공은 판관 김시민과 함께 합세하여 독전(督戰)하고 추격하여 사천성(泗川城) 아래에 이르니, 적이 성을 버리고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위 두 조항은 종질(從姪) 최정호(崔廷虎)가 기록한 것이다.
정유년(丁酉年: 선조 30년, 서기 1597년) 6월에 평수길(平秀吉)이 다시 그 장수 목하금오(木下金吾)를 보내어 대거하여 입구(入寇)하니 나라 안이 또다시 소란하였다. 이때 사대부(士大夫)들이 김덕령(金德齡)이 모함을 입고 원통하게 죽은 것을 알고 다시 창의(倡義)하는 자가 없었다. 공의 형제분도 또한 문을 닫고 자취를 숨기고 있다가 다만 수십 명의 정예로써 때때로 몇 명의 왜적이 근방을 침범하면 나가 격퇴하였다.
7월에 적의 일진(一陣)이 갑자기 구만동에 들어와서 독산(獨山)을 평평하게 하고 보루(堡壘)를 만들어 점거하므로 공의 형제가 이를 격퇴하여 모두 섬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9월에 백공이 이 일로 다시 배둔(背屯)의 산적(山賊)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영천(永川)의 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 생원(生員) 조희익(曺希益)과 신녕(新寜)의 봉사(奉事) 권응수(權應銖), 하양(河陽)의 봉사 신해(申海)등 제공과 평소 서로 친분이 좋더니 이에 이르러 동성(同聲)으로 창의하여 각각 강(江)의 좌우를 점거하고서 적의 진로를 막아 여러 번 경적(勁賊)을 꺾었다. 이때 제공들이 만약 군중(軍中)에 양식이 모자라면 문득 완급(緩急)으로써 서로 공에게 고했는데, 그럴 때마다 닿는 대로 구제하기를 힘을 다하여 베풀었다. 이로 인하여 왕복(往復)한 수찰(手札)이 지금까지 그 집에 남아 있다고 한다.
임계(壬癸: 壬辰, 癸巳) 이후로 변경(邊警)이 쉬지 아니하므로 조정이 이를 걱정하여 따로 용맹과 무술로 장재(將才)가 있는 자를 가리어 이에 대비하더니 이때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특별히 제수되었다.
그 후 을사년(乙巳年: 선조 38년, 서기 1605년) 3월에 적이 다시 대거 입구해 와서 스스로 해랑병(海浪兵)이라 일컫고 몽동거함(艨艟巨艦)으로 바다를 뒤덮으면서 제주(濟州)의 대양(大洋)에 이르니 열진(列鎭)들이 모두 그 위세만 보고서도 외축(畏縮)되어 감히 막는 자가 없었다. 계공이 여러 장수와 공제(控制)할 방략(方略)을 획책할 때에 백공께서 나이 70으로 마침 진소(鎭所)에 머물러 계셨다. 계공이 물어 이르기를,
“지금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 칼날을 맞대어 다투기 어려우니 계책을 장차 어떻게 내어야 하겠습니까?”라 하니. 백공이 이르기를,
“앞서 비록 철둔(撤屯)하여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를 엿보는 마음을 어떻게 잊었겠는가? 지금 그들은 곧 미친 듯이 생심(生心)해서 군사를 있는 대로 이끌고 깊숙이 들어옴에 그 칼날이 심히 날카롭고, 또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병력으로써 서로 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한가지 계책이 있으니 내가 지형을 살펴보고 또 풍세(風勢)를 봄에 적벽(赤壁)의 계책을 쏠만하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제치(制置)를 이렇게 한다면 적을 사로잡기를 앉아서 획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가 모두 이르기를,
“옳습니다.”하고, 곧 마른 가시 섶과 마른 갈대를 취하여 수십여 척의 배에 싣고 우인(偶人)을 만들어 그 위에 벌려 세워 놓고 이에 포장(布帳)으로써 오색(五色)의 채색으로 용(龍)의 무늬를 그리어 둘러싸서 덮고 강노(强弩)의 예졸(銳卒)을 포구(浦口)의 깊숙한 곳에 매복시키고서 격문(檄文)을 전하여 이르기를,
“내일 우리 장수가 출전(出戰)할 것이다.”하고, 간사(間使)를 망명자(亡命者)와 같이 꾸며 보내어 적진에 가서 속여서 말하게 하기를,
“진장(鎭將)이 수전(水戰)을 익히지 못하고 공연히 출전하라고 말하나 실제로는 교전할 마음이 없고 당장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피신하려는 것이다.”라 하여 마치 음사(陰事)를 고하는 것 같이해서 적의 마음을 게으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잠수(潛水) 잘하는 자를 모아 중상(重賞)을 주고 각각 요구철(腰鉤鐵)을 가지고서 요해처(要害處)에 숨어 엎드려 있게 하고 약속하기를, ‘내일 적의 배를 유인하여 포구에 들어오거든 물밑으로 잠입(潛入)하여 요구철로써 적선을 끌어매어 회선(回旋)을 할 수 없게 하라’ 하고, 명조(明朝)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누선(樓船)을 옹위(擁衛)하여 노를 두드리면서 중류(中流)에서 바로 대양으로 나가니 적이 바라보고 기뻐하여 이르기를,
“과연 성을 버리고 도망간다.”하고 곧 정예들을 다 이끌고 해도(海濤)를 거슬러 나아가다가 바다의 반쯤에는 채 미치지 못하여 태풍(颱風)이 크게 불어서 적선의 돛대가 부러지고 노를 잃어 경황산락(驚惶散落)하더니 얼마 후에 바람이 그쳐 곧 부오(部伍)를 거두어 정돈하고, 과연 포구로 향하였다.
이때 아군(我軍)은 작은 섬을 의지하고 풍랑을 피해 있다가 적이 포구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면서 돛대를 돌리니, 적이 우리의 적고 약한 것을 보고 또 군사를 되돌려 추격해 왔다. 이에 여러 장수가 외겁(畏怯)하여 감히 앞서지 못하므로 공이 말씀하기를,
“난(亂)에 임하여 구차스럽게 피하려는 것은 병가(兵家)의 수치이다.”하고 타수(唾手)로 홀로 앞장서서 먼저 갈대 실은 배를 놓아 보내고 계속하여 수척의 배를 보냈다. 이리하여 마치 적들에게 응전하는 것 같이하여 서로의 거리가 2리(二里) 남짓 되었을 때 배를 멈추고 군중에 명령하여 안정하고 움직이지 못하고 하고서 오직 피리와 북소리만 은은하게 들리게 하니, 적이 바라보고 그 단예(端倪)를 헤아리지 못했다. 얼마 후 별안간 징을 울리면서 돛대를 돌리어 거짓 패하여 물러나니, 적이 전선을 다 출동시켜 이를 추격해 왔다. 이들이 매복병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공이 갑자기 기(旗)를 흔드니 여기에서 복병이 그들의 뒤를 엄습하고 모든 군사가 그 앞을 범했다. 이에 적중(賊衆)이 바야흐로 분주하고 요란스러웠으며 그 배들이 또 요구철의 줄에 걸려서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고 한갓 서로 소란만 더하게 되었다. 이에 갈대를 실은 배를 끌어서 이를 묶고 일시에 불을 놓으니, 불이 적선에 번져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었고 적선이 삽시간에 다 타버렸다. 이리하여 불타서 빠져 죽은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아군은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다. 개선(凱旋)하여 돌아옴에 제군(諸軍)이 모두 하례하여 이르기를,
“오늘의 승첩은 실로 최노야(崔老爺 )의 기계(奇計)에서 나온 것입니다.”하고 공을 백공께 돌렸으나 공이 퇴양(退讓)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하기를,
“나는 국외(局外)로 생각해야 할 사람인데 비록 다행히 적중하였다 하더라도 무슨 공을 논하겠는가? 모두 제군(諸君)들이 풍도(風濤)를 무릅쓰고 죽기로 싸운 공이다.”라 하니, 모든 장수들이 감탄하였다. 이에 호백(湖伯)이 조정에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크게 칭상(稱賞)을 더하고 교서를 내리어 이를 포장(褒獎)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4월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기록하여, 백공은 삼등(三等)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추(簽樞: 僉知中樞副使)에 오르게 되었고 계공은 일등(一等)으로 가선(嘉善: 嘉善大夫)에 오르게 되어 순천부사(順天府使)를 배하였다.
담티(墻峙)의 영상(嶺上)에 전장(戰場)의 기지(基地)가 있어 아직도 완연(宛然)하니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이는 곧 최의장(義將)이 유진(留鎭)하던 곳이다.”하고 산 아래 거민(居民)들이 왕왕(往往) 토지를 개간할 때 창과 활촉, 병기 등 물건을 많이 줍는다고 한다. 처음에 판서공(判書公)이 구만동(九萬洞) 곤계봉(昆季峯) 아래 소대(蘇臺)의 위에 집터를 잡아 바야흐로 개기(開基)를 하는데 한 늙은 행각(行脚)이 초관나대(草冠蘿帶)로 문밖에서 쌀을 빌다가 반환(盤桓)하기를 오래 한 뒤에 말하기를,
“여기는 길지(吉地)입니다. 상량(上樑)할 때 시(時)를 잃지 않으면 마땅히 두 기남(奇男)을 얻어 명성이 온 나라에 가득할 것입니다.”라 하므로 그 일자와 사주를 물으니 이르기를,
“명일(明日)에 철관(鐵冠)을 쓴 동녀(童女)가 남쪽으로부터 올 것이니 바로 그때입니다.”라고 하였다. 익일(翌日) 홀연히 한 비자(婢子)가 솥뚜껑을 이고 들어오므로 여기에서 깨달아 상량하였더니 과연 백공과 계공을 낳은 것이다. 이로써 중의 말이 곧 영험으로 나타난 것이다.

서술(敍述)

학봉(鶴峯) 김선생(金先生)이 임진년(壬辰年) 10월에 포계(褒啓)하여 이르기를,
“의병장(義兵將) 최강(崔堈), 이달(李達), 정곽(鄭廓) 등이 남강(南江)의 물가에서 군사를 이끌고 활약하여 적을 반성(班城)으로 추격하고 또 능히 참괵(斬馘)하였으니 또한 가상하다. 성을 공격함에 적의 시체를 다 불태웠고, 남은 시체는 성외(城外)에 쓰러져 있는 자들이니 참괵한 것은 각기 별계(別啓)에 있습니다. 상항(上項)의 제장(諸將)을 먼저 각각 따로 포상(褒賞)하면 인심(人心)을 격려(激勵)할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이 찬(撰)한 학봉선생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공(公)이 오랫동안 거창(居昌)에 머무를 때 창원(昌原)을 점거한 적이 진주(晉州)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 진해(鎭海)의 적과 함께 대거(大擧) 침구(侵寇)하므로 공이 위급함을 듣고 성치(星馳)하여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두 발(發)하여 달려가게 했다. 김시민을 독려하여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또 이광악(李光岳), 최강(崔堈), 이달(李達) 등에게 지시하여 군사를 나누어 좌우익(左右翼)을 삼게 하니 곽재우(郭再祐)가 이미 입성(入城)하여 군세(軍勢)가 자못 떨쳤다.
적이 누각(矗石樓) 앞에 이르러 강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감히 핍박해오지 못하였다. 공이 계속하여 독전(督戰)하니 모든 장수가 명령을 받아 합세하여 추격하였다. 이에 적이 몰래 밤을 타서 도망함에 사상(死傷)이 매우 많았고, 마침내 사천, 고성, 진해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창원의 적이 부산(釜山), 김해(金海)와 연결하여 도량(跳梁)하면서 진주를 열 겹으로 포위하니 수십 리에 만연(蔓延)되었다. 공이 고성의 가수(假守) 조응도(趙凝道)와 최강(崔堈), 정유경(鄭維敬) 등에게 명령하여 남강의 물가에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게 하였다. 적이 공위(攻圍)한 지 7일 만에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상(死傷)한 자가 서로 침자(枕藉)하게 되었다. 드디어 그들의 둔막(屯幕)을 불태우고 또 그 적시(積屍)를 불태우니 낭패(狼狽)하여 도망해 버렸다”라고 하였다.

[국조실록(國朝實錄)]에 이르기를,
“김덕령(金德齡)이 체포되어 하옥(下獄)됨에 임금이 친히 국문하였는데, 김덕령이 치대(置對)할 때 말의 증거로써 근거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울러 그 휘하의 사람 최담령(崔聃齡), 최강(崔堈) 등에게 물었으나 모두 단서가 될 것이 없었다. 김덕령이 이르기를,
‘다만 신(臣) 등은 지금 명(命)이 다 되어 다시 말할 것이 없으나 신이 모은 용사(勇士) 최담령 등은 무고(無辜)하게 문초를 받았으니 원컨대 죽이지 마시고 이를 쓰게 하소서’라 하고는 끝까지 다른 말이 없이 죽으니 듣는 이가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로부터 남방(南方)의 사민(士民)들이 김덕령을 경계로 삼아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감추고 숨어서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다. 최담령· 최강을 석방하였다.”라고 하였다.

약봉(藥峯) 서성(徐渻)이 백천(白川) 강응황(姜應璜)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최별장 균(均)과 강(堈)의 그릇이 관중(管仲)이 아니거늘 어찌 우도(牛刀)를 쓰겠는가?”라 하였다.

이충무공 순신(李忠武公 舜臣)이 강백천에게 준 글에 이르기를,
“다행히 최별장 균과 최강의 힘에 힘입어 웅천(熊川)의 싸움에서 대첩(大捷)하였고, 또 바다에 떠 있는 오랑캐를 섬멸하였으니 어찌 심상(心上)에 하나의 쾌한 일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이송암 로(李松巖 魯)가 찬한 [龍蛇日錄]에 이르기를,
“공(公)이 오랫동안 거창에 머물렀더니 창원에 웅거한 적이 진양(晉陽)에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고서 진해의 적과 함께 서로 호응하여 고성을 거쳐 사천에 단만(澶漫)하고 대거 진주를 침범하였다. 공이 급보를 듣고 성치(星馳)하여 단성(丹城)에 이르러 함양(咸陽), 산음(山陰), 단성(丹城)의 군사를 모두 일으켜서 달려가게 하고, 김시민을 독려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하였다. 또한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 및 최강, 이달 등에게 알려 좌우익을 나누어 구원케 하였더니 곽재우가 먼저 이미 입성하여 군세(軍勢)를 자못 떨쳤다. 그러자 적이 누각 앞에까지 이르렀으나 한 줄기 강물만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이 계속 독전하니 모든 장수가 더욱 명령을 받아 합세하여 추격하였다. 이에 적이 낭패하여 도망하니 살상(殺傷)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마침내 사천, 고성, 진해를 회복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김해의 적이 부산을 함락시키고 곧바로 진주를 짓눌러 오니, 공이 목사(牧使)에게 힘쓰도록 이첩(移帖)하여 마땅히 죽음으로써 국은(國恩)에 보답토록 하고, 이광악 등이 협력하여 수어(守禦)토록 하였더니 적이 성을 열 겹으로 에워싸고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곽재우와 선봉장(先鋒將) 심대승(沈大承)이 밤에 북산(北山)에 이르러 횃불을 벌려 들고 고조(鼓噪)하고, 고성현령(固城縣令) 조응도와 최강, 정유경 등과 함께 수백 명을 거느리고 남강 건너편에서 군사를 출전시키니 적이 공위(攻圍)한지 7일 만에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적의 사상자 수가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군막을 불사르고 시체를 불태우며 황급히 물러갔다. 진양의 첩서(捷書)가 이름에 공이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모든 장수를 불러 이르기를,
‘만약 이 성을 실수(失守)하게 하면 성안의 수만 명 인명(人命)이 모두 어육(魚肉)이 될 뿐만 아니라 한 도(道)의 남은 성도 보존한 길이 없을 것이다.’ 라 하니, 그제야 사람들이 비로소 지켜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휘하의 군교(軍校)가 들어와서 하례하니 공이 위로하여 이르기를,
‘이는 목사의 공이요 모든 장수의 힘이다. 내가 어찌 참여하겠는가?’”라 하였다.

노봉 민정중(老峯 閔鼎重)이 찬한 [중흥지(中興志)]에 이르기를,
“임진 5월에 적병이 진해와 고성에 들어와서 연안(沿岸)의 열읍(列邑)을 분탕(焚湯)시키고, 사천에 와서 주둔하여 장차 진주로 향하려고 하므로 김성일이 용감한 장수를 뽑아서 강을 건너 치격(馳擊)케 하니, 적이 고성으로 물러가 달아났다. 이에 김대명(金大鳴) 등을 보내 의병장 전(前) 훈련봉사 최강과 군사를 합하여 공격하게 하였더니 적이 웅천, 김해 등지로 궤주(潰走)하였다. 최강은 고성인(固城人)이니 천성(天性)이 강직(剛直)하고 담량(膽量)이 있었으며 효용(驍勇)이 남보다 뛰어났다. 이에 이르러 동지(同志) 장사 이달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군사가 비록 많지 않더라도 능히 선비들의 마음을 얻어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명성을 가지런히 하였고, 많은 사람을 통솔하는 재주는 이보다 뛰어났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임진년 10월에 등원랑(藤元郞)이 군사를 이끌고 진주에 육박하여 기치(旗幟)를 많이 벌려 놓고 복식(服飾)을 기궤(奇詭)케 하여 햇빛에 빛나게 하고 바람에 나부끼게 하며, 만상(萬狀)을 현훈(眩暈)케 하고 뇌포(雷炮)를 일제히 놓으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김시민이 군중에 명령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저들의 소리가 쇠해지기를 기다려 곧 방포(放砲)와 고조(鼓噪)로 응하면서 밤에는 악공(樂工)이 다락 위에서 피리를 불게 하여 한가(閑暇)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때 의병장 최강과 이달이 고성으로부터 와서 구원하였는데 밤에 망진산(望陣山)에 올라가 횃불을 벌려 들고 함성을 지르면서 북을 쳐서 산을 진동시켰다. 심대승이 고을의 북산에 지름길로 올라가 뿔피리를 불고 북을 울려 성중(城中)과 서로 호응하니 적이 크게 놀라 요란하였다. 등원랑이 치중(輜重)을 실어내어 거짓으로 물러감을 보인 연후에 불을 끄고 몰래 행하여 안쪽의 동문(東門)에 육박하였다. 이때 김시민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혈전(血戰)하면서 연이어 만포(彎炮)를 쏘고 번갈아 달군 쇠를 던지고 끓인 물을 퍼부으니, 적병이 오는 대로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麻)대와 같았다. 이에 등원랑이 비로소 포위를 풀고 군사를 후퇴시키면서 약탈한 부녀(婦女)와 우마(牛馬)를 모두 버리고 도망가니 최강 등이 추격하여 참획(斬獲)하고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계사년(癸巳年) 6월에 평행장(平行長)이 평양(平壤)에서 패하고, 평수가(平秀家)등이 영남 변경지방으로 물러나서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평수길(平秀吉)이 듣고 대노(大怒)하여 군사를 이끌고 비전주(肥前州)에 이르러 여러 장수를 독려하고 평수가등으로 하여금 모든 추병(酋兵)을 합하게 하여 삼십만이라 이르고 동래로부터 바로 진주로 향해 오니 형세가 풍우(風雨)와 같았다. 이빈(李蘋)이 곽재우에게 정진(鼎津)에서 차알(遮遏)케 하였더니 곽재우는 적은 군사로 당적하지 못하여 후퇴하였고 오직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이 진주로 들어와 적이 이르는 대로 이를 포위하였다. 김명원(金命元) 등이 감히 구원하지 못하고 이여송(李如松)이 유정(劉綎) 등에게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유정 등의 병세(兵勢)가 도리어 당적하지 못하여 모두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러므로 적이 마침내 오직 공성(攻城)에만 뜻을 두었는데, 이때 최강, 이달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서 구원하다가 들어갈 수가 없어 되돌아가니, 적이 추격하여 이를 포위하였다. 이에 최강이 만중(萬衆)의 가운데를 충탕(衝盪)하여 풀을 베듯이 매우 많은 무리를 베니 적이 풍미(風靡)하여 썰물처럼 물러났다. 이로 인하여 하도(下道)로 피난했던 사민(士民)들이 온전함을 얻었으며, 이때 사인(士人) 한계(韓誡)가 산에 올라가 최강이 적을 공격하는 것을 바라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천고(千古)의 사책(史冊) 가운데에 이와 같은 용장(勇將)이 있었던가? 애석하다. 맡은 것이 전일(專一)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계사년 9월에 왜병(倭兵)이 창원으로부터 함안(咸安)에 나와 둔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들임으로 선거이(宣居怡)등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공격하여 왜병을 크게 패주시켰다. 또 김해로부터 갑자기 웅천의 안민령으로 들어오니 하도(下道)의 여러 장수가 그들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최강이 말을 달려 충돌하니 가는 곳마다 모두 쓰러져 마침내 일면(一面)이 열리어 나오게 되었으므로 제군(諸軍)이 모두 온전하게 되었다. 포위에서 풀려난 장사(將士)들이 서로 하례하여 이르기를,
‘오늘에 살게 된 것은 최공의 힘이다’
라고 하였다. 최강이 전후(前後)로 역전(力戰)함에 효용(驍勇)을 당적할 자가 없어 명성이 남변(南邊)에 무거웠으나 이때 이르러 비로소 통정(通政)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갑오년(甲午年) 4월에 조정에서 모든 의병의 공궤(供饋)에 폐단이 있다 하여 곧 의병을 모두 파(罷)하여 충용장군(忠勇將軍)에게 예속시키니 여기에서 정인홍(鄭仁弘), 임계영(任啟英), 변사정(邊士貞) 등이 모두 군사를 놓아두고 돌아갔다.
김덕령이 최강으로써 별장(別將)으로 삼으니 군세가 더욱 떨쳤다. 병신년(丙申年) 8월에 김덕령이 감옥에서 죽고 곽재우, 최담령, 최강 등이 모두 연루되어 옥에 들어갔다가 뒤에 석방되었다.”라고 하였다.

[국조기사(國朝記事)]에 이르기를,
“영천(永川)의 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 신녕(新寜)의 봉사(奉事) 권응수(權應銖), 하양(河陽)의 봉사 신해(申海), 고성(固城)의 봉사 최강이 모두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다.”라고 하였다.

[조야회통(朝野會通)]에 이르기를,
“권응수가 정세아, 신해, 최강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영천의 적을 토벌할 때에 화공(火攻)의 계책을 썼더니 불에 타서 죽은 자가 많아서 냄새가 수 리(數里)까지 퍼졌고, 나머지 적이 모두 도망가 좌도(左道)가 온전하게 된 것은 영천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중흥지」에 이르기를,
“임진년 8월 1일에 수군(數郡)의 의병들이 영천으로 진공(進攻)함에 사졸이 적을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않으므로 권응수가 곧이어 몇 사람을 베어 서로 다투어 분발하여 성을 넘어 성문을 쳐서 부수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들어갔다. 이때 적이 달아나 창고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명원루(明遠樓)로 기어 올라가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권응수가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태우니 냄새가 수리에까지 전해졌다. 제군(諸軍)이 승세를 타서 칠백여 급(級)을 베니 남은 적이 모두 강에 빠져 죽었다.
의성(義城), 안동(安東), 예천(醴泉), 풍산(豐山)에 둔했던 적들이 모두 바람에 쏠리듯 둔진을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합하고 군위(軍威)의 둔적(屯賊)이 또한 철수하여 개령(開寧)으로 달아나니 적의 좌로(左路)가 드디어 차단되었다. 여기에서 적이 모두 좌우로(左右路)를 상실하고 다만 중로(中路)만을 경유하여 왕래하였다.” 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이르기를,
“임진년 10원에 적이 진주를 크게 포위하였을 때에 고성의 의병장 최강, 이달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니 성안의 장사들이 듣고 기뻐서 펄펄 뛰었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계사년 6월에 고성의 의병장 최강, 이달이 달려와 진주를 구원하니 적세가 상년(上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수(下手)할 수가 없어서 고성으로 되돌아가는데 때마침 함안에 피난했던 사람 중 최강을 따르는 자 삼백여 명이 적에게 포위되어 핍박을 당하여 거의 탈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최강이 말을 타고 치돌하여 날이 저물도록 싸워 적을 죽임으로써 사민들이 안전하게 되니, 이를 바라본 자들이 가리켜 천고의 용장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고성의 봉사 최강이 젊어서는 문학을 잘 하였고 늦게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출세하기를 구하는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자기의 뜻을 굽히어 남을 따르지 않더니, 이때 군사를 일으켰다. 군사는 비록 많지 않았으나 능히 그 마음을 얻었고 출진(出陣)에 임해서는 몸소 선봉을 섰으니 정기룡, 안신갑(安信甲)과 명성을 가지런히 했으나 무리를 이끄는 재주는 이들보다 뛰어났다.”라고 하였다.

「정매헌집(鄭梅軒集)」에 이르기를,
“무술년(戊戌年) 4원 9일에 군수(郡守) 노윤중(盧允中)은 함양의 요로에 매복하고 별장 최강은 안음현(安陰縣)의 남쪽에 매복하여 기다리더니 적이 밤을 타서 도망해 가다가 두 곳의 복병(伏兵)에게 살해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운포(李雲圃)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가동(家童) 30여 인으로 창의(倡義)의 기치를 세워 일진(一陣)을 배치하니 표종숙(表從叔) 최강이 또한 기병(起兵)하였고, 안신갑, 정확(鄭廓)이 또한 모여서 겹으로 서로 바라보면서 둔치니 은연(隱然)히 장사수미(長蛇首尾)의 형세였다. 10월에 적이 진양을 포위하므로 공이 최공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할 때에 선등(先登)으로 적을 공격하여 참괵(斬馘)이 매우 많았다.
그 뒤에 적이 또 촉성(矗城)을 겁박하므로 공이 최공과 함께 좌우익이 되어 서로 호응하여 공격하니 적이 광겁(恇㤼)하여 도망갔다. 곽재우가 듣고 기뻐하여 이르기를, ‘최, 이 두 분의 장수가 진양에 계시면 내가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산서(趙山西) 경남(慶男)의 잡록(雜錄)에 이르기를,
“경상도영천의 진사 정세아, 신령의 봉사 권응수, 하양의 봉사 신해, 고성의 봉사 최강이 모두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최강이 젊어서는 문학을 잘하였고 늦게 무과에 합격하였다. 담략(膽略)이 있었으며 간진(干進)과 청탁(請託)하는 행동을 부끄러워하였고, 성품이 강직하여 뜻을 굽히어 남을 따르지 않았다. 이때 이르러 그의 형 최균(崔均)과 함께 기병하였다. 군사가 비록 많지 않았으나 능히 그 마음을 얻었고 출진에 임해서는 몸소 앞장섰다. 정기룡, 안신갑과 명성을 같이하였으나 무리를 이끄는 재주는 이들보다 뛰어났다.”라고 하였다.

이계 홍양호(耳溪 洪良浩)가 찬한 「명장전(名將傳)」에 이르기를,
“임진년 10월에 등원랑(藤元郞)이 승세를 타서 함안으로 들어와서는 세 갈래 길을 나누어 곧바로 진양을 포위하니, 목사 김시민이 군사를 나누어 각각 성첩(城堞)을 지키게 하고 조용히 기다리면서 밤에는 악공이 문루(門樓)에서 피리를 불게 하여 한가한 것을 보이었고, 의병장 최강, 이달이 고성으로부터 와서 구원했는데 망진산에 올라가 횃불을 벌려 들고 함성을 지르며, 북을 쳐서 산을 진동시키면서 역전(力戰)한 지 5일 만에 등원랑이 비로소 포위를 풀고 군사를 퇴각시켰으며, 약탈한 부녀와 우마(牛馬)를 모두 버리고 도망함에 최강이 추격하여 참획하고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갑오년 2월에 충용장 김덕령이 영남(嶺南)에 진군(進軍)하여 최강의 효과(驍果)를 사랑하여 별장(別將)으로 삼으니 군세가 더욱 떨쳤다. 곧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격문(檄文)을 왜노(倭奴)에게 전하니 원근(遠近)이 향응(響應)하고 사기(士氣)가 배나 더하여 용약(踊躍)하여 싸우고자 하더니 병신년에 김덕령이 모함(誣)을 입어 체포되고, 곽재우, 최강, 최담령이 함께 옥에 연루되었다가 뒤에 모두 석방되었다.”라고 하였다.

「영영고적기(嶺營古蹟記)』에 이르기를,
“5월 20일에 적의 무리가 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와 둔하고서 장차 진주를 침범하고자 함에 초유사 김공이 장사 가운데 용맹스럽고 건장한 자 수십 인을 뽑아서 강을 건너 치격(馳擊)하니 적이 물리나 고성에 둔을 쳤다. 곧 김대명(金大鳴)을 보내어 추격케 하였더니 김대명이 최강, 한계, 정승훈(鄭承勳), 이달 등과 합세하여 혹은 유인(誘引)하기도 하고 혹은 복병을 설치하여 밤으로 공격하니, 얼마 안되어 적의 무리가 웅천, 김해 등지로 궤주(潰走)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8월에 적이 다시 진해, 고성을 함락시키고 사천에 와 둔쳐서 장차 진주를 침범하려 하므로 판관 김시민이 최균, 최강, 이달과 군사를 합하여 사천에서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이 고성으로 퇴각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가 군사를 나누어 몰래 대둔령(大芚嶺)을 넘어서 새벽에 성 아래에 겁박하니 적이 외축(畏縮)되어 수일 동안을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최강이 또한 도로에 은복(隱伏)하여 적이 후퇴하기를 기다리더니 적이 과연 밤에 도망하므로 곧바로 분신(奮身)하여 공격하니 적이 대패(大敗)하고 진해의 둔적(屯賊)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달아났다. 이를 추격하여 부수고 진해의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마침내 세 성을 회복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10월 6일에 최강이 이달과 함께 밤에 망진령(網陣嶺)에 올라 군중(軍中)으로 하여금 각각 네 다섯 개의 횃불을 들고 혹은 앞으로 나아가고 혹은 뒤로 물러서기도 하면서 북을 치고 납함(吶喊)하여 메아리가 산골짜기를 진동케 하니 성안의 장사들이 듣고 기뻐 뛰면서 이르기를,
‘이는 필시 최의장의 내원(來援)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적이 또한 경해(驚駭)하여 ‘원병이 많이 이른 것이다’라 하고 곧바로 그들의 둔막을 불사르고 쌓은 시체를 불태우고 낭패하여 도망쳤다.”라고 하였다.

이탁영(李擢英)의 [정만록(征蠻錄)]에 이르기를,
“관찰사(觀察使) 김수(金睟)의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고성의 복병장 최강이 치보(馳報)한 글 속에 왜적 2천여 명이 7월에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들어오므로 군사 이십여 명을 거느리고 먼저 나아가 접전(接戰)하여 왜군 3명을 쏘아 죽이니 적세(賊勢)가 점점 물러났습니다. 노약군(老弱軍)은 전부를 산으로 올려 보내고 다시 정용(精勇)한 군사 삼십여 명을 이끌고 요처(要處)에 은복시켜 둔 뒤에 한편으로 촌가(村家)의 폐탕(弊盪)한 곳에 궁노(弓弩)를 많이 설치해 두었더니 회환(回還)할 때에 선봉의 두 왜병이 또한 활을 맞아 죽었으며, 적이 실은 것을 중로(中路)에 버리고 갔으므로 그대로 불태웠습니다.’라 하였으므로 이를 치고(馳告)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성읍지(固城邑志)」에 이르기를,
“최균은 증(贈) 형조판서(刑曹判書) 운철(云哲)의 아들로서 효우(孝友)가 출천(出天)하였고, 형제 세 사람이 같은 담 안에 살았으며 소대(蘇臺)의 위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호(號)를 소호(蘇湖)라 하였다. 학문에 전심(專心)하여 더욱 역리(易理)에 정통하더니 임진란을 만나 아우 강(堈)과 함게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수문장(守門將)에 배(拜)하였고, 통정(通政)에 올라 선무원종훈삼등(宣武原從勳三等)을 기록하였으며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배향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최강은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최균의 아우로서 용의(容儀)가 간중(簡重)하고 기국(器局)이 준정(峻整)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출천하고 온화하게 여러 사람을 대하니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고 존경하였다.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고 사장(詞章)에 정교하여 선묘(宣廟) 을유년(乙酉年)에 무과에 올랐다가 임진의 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서 화공(火攻)으로 적을 제주(濟州)의 대양에 토벌하여 대첩(大捷)하니 임금이 친히 새서(璽書)를 하사하고,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이배(移拜)하였으며, 선무원훈일등(宣武原勳一等)을 기록하였고 벼슬은 수사(水使), 부총관(副摠管), 포도대장(捕盜大將)을 역임하였다. 호는 소계(蘇溪)요, 형 소호와 함께 도산서원에 병향(並享)되었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증직되었다.”라고 하였다.

유사 외(遺事 外)

 

소호공(蘇湖公)의 유사(遺事)  -6세손 익대(益大)

공이 대종(大宗)을 이어받아 그 선대의 청백(淸白)을 답습하였고 가업(家業)이 넉넉하지 못하였으나 형제 세 분이 한 울타리 안에 동거(同居)하며 사사로운 재물을 쌓지 않고 장획(臧`獲)을 나누지 아니하니 형세가 더욱 방락(旁落)하여 거의 떨치지 못하였다. 친척 중에 간절히 걱정하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종가(宗家)의 모천(芼薦)이 간심(艱甚)한데 어찌 전민(田民)을 구별하여 각각 산업(産業)을 힘써 나가도록 하지 아니합니까?”
하니, 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봉사(奉祀)에 칭가(稱家)라는 것은 고인(古人)이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요 구하기 쉬운 것은 전민이다. 형제 사이에 어찌 사재(私財)가 있겠는가? 한 자의 베(尺布)와 한 말의 곡식(斗粟)이란 노래를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라 하였다. 공이 집에 계실 때 항상 자제들을 훈계하여 말씀하시기를,
“부귀라는 것은 교사(驕奢)하게 되는 근본이요, 사람을 함정에 빠지게 하는 기틀이니 사람이 스스로 살피지 아니하면 그 풍요와 안일을 틈타서 음탕해지기가 쉽고 사치해지기가 쉬운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 단서를 열게 되면 형세를 막을 수 없게 되어 크게는 그 집을 잃게 되고 작게는 그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냐?”라 하였다.
왜구가 처음으로 육지에 내렸을 때 사람의 무덤을 많이 파헤쳤는데, 공의 선롱(先壟)이 구만동(九萬洞)의 깊은 곳에 있었다. 창의했을 때에 먼저 이 환란을 염려하여 담티에 유둔(留屯)하시면서 불우(不虞)에 대비하니 산 아래 거민들이 이에 힘입어 농사짓는 일에 안도(安堵)할 수 있어서 오곡(五穀)의 풍성함이 평일과 다음이 없었고, 굶주린 군사와 무너진 사졸들이 다투어 와서 서로 의지하였다. 이에 공이 정용(精勇)한 장사를 보내어 계씨(季氏)를 위하여 군사를 조달하고 군량을 운반하여 일찍이 모자라거나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 나응벽(羅應璧), 나언린(羅彦鱗), 나치문(羅致紋)이 모두 만석(萬石)의 거부(巨富)로써 작지동(鵲旨洞)에 살더니 어느 날 대연(大宴)을 개장(開帳)하고 술에 취해 있었는데 왜도(倭刀) 들이 갑자기 이르러 그 집이 모두 섬몰(殲歿)되고 이어서 적의 근거지가 되었다. 공의 형제분이 급히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서 혹은 베어 죽이고 혹은 축출하고서, 흩어지고 숨었던 노복(奴僕)들을 불러 모아서 그 주인의 시신을 수렴(收斂)토록 하여 친히 검시(檢視)한 다음 후하게 장사지내니, 그 노속(奴屬)들이 높은 의리에 감복하여 주인의 가재(家財)로써 군량에 충당하기를 원하고 자원(自願)하여 종군하였다. 공이 항상 담티의 북쪽에 유진(留陣)하고 계공이 이달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니, 공이 크게 호군(犒軍)을 준비하여 장사들을 위로하여 말씀하시기를,
“제군들이 오랫동안 군사 일에 고생하였으니 기갈(飢渴)이 없었겠느냐?” 하고 종일토록 배불리 먹고 취하게 하였다.
창원, 진해의 둔적(屯賊)이 고성의 적과 서로 왕래하므로 공의 형제가 이달과 함께 진(陣)을 성산(城山)과 배둔(背屯)의 지방에 나누어 치고 적의 길을 막으니 적이 감히 낮에는 다니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 서로 통래하였다. 이에 공이 그 기미를 알고 흰 모래를 길바닥에 뿌리고 기다렸더니 과연 사람이 왕래한 흔적이 있으므로 복병을 요로(要路)에 설치하여 이들을 베어 죽여서 남기지 않았다. 이로부터 감히 다시는 잠통(潛通)하지 못하여 사천, 고성, 진해의 인민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계사년 4월에 담티의 진중에 계시다가 학봉선생이 연관(捐館)하였다는 전갈을 듣고 악연(愕然)히 통곡하면서 이르기를,
“장성(將星)이 갑자기 가시니 변기(邊機)가 이에 이르렀구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겠는가?”하고 형제분이 곧바로 달려가서 조곡(弔哭)하고 조대소헌(趙大笑軒:趙宗道), 이송암(李松巖), 박대암(朴大庵), 곽망우(郭忘憂), 곽존재(郭存齋), 이모촌(李茅村), 이광남(李廣南) 제공과 함께 상사(喪事)를 다스렸다.
적이 웅천의 안민령(安民嶺)을 점거함에 공이 계공 및 이달, 안신갑과 같이 가서 토벌할 때 좌우익의 여러 군사가 적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계공이 말을 몰아 달려가서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적진이 이미 견고하여 투입(投入)할 수가 없었는데 공이 일러 말하기를,
“옛날 제(齊)나라 고고(高固)가 책석(磔石)을 진중에 던짐으로써 진(晉)나라 군중으로 달려들어 갔으니, 지금 이 계책을 써서 돌을 적의 진중에 던져서 이들을 스스로 어지럽게 하고서 그때를 틈타 치돌(馳突)하여 한 면(面)을 뚫게 하면 그 포위가 풀릴 것이고 제군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니, 계공이 이와 같이하여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다.

소계공(蘇溪公)의 유사(遺事)-종6세손(從六世孫) 익대

공이 소시(少時)에 주역(周易)을 백공(伯公)에게서 배워 문의(文義)에 정투(精透)하고 또 사장(詞章)에도 정교하여 여러 번 향해(鄕解)에 합격하였으나 성시(省試)에서 실패하니, 한 상자(相者)가 이르기를,
“유업(儒業)으로는 마침내 성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투필(投筆)을 하면 곧 크게 울릴 것이다.”라 하였다. 나이 27세에 곧 무(武)로 돌려서 을유년(乙酉年)의 회시(會試)에서 주역으로써 배강(背講)을 하니 문시관(文試官)이 여러 번 문의(文義)를 물을 때마다 촉처(觸處)에 통연(洞然)히 대답하였다. 시관이 이르기를,
“저 사람의 부형(父兄)이 이와 같이 재주 있는 자제를 무예(武藝)를 시키게 하는 것은 진실로 가석(可惜)한 일이다.”라 하니, 무시관(武試官)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말하지 말라. 그 기우(氣宇)를 보니 조만간에 반드시 호독(虎纛)을 잡고 용절(龍節)을 거머쥐고서 삼군(三軍)의 장수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평거(平居)에는 화유(和柔)하여 사람들이 모두 열복(悅服)하였으나 관직에 있으면서 일에서는 직절(直節)로 의리를 세워 항거하여 무변(武弁)이라는 것으로 스스로 굴(屈)하지 아니하여 이로써 많이 질시(嫉視)를 당하였고, 여러 해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권문(權門)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어느 때에 정인홍(鄭仁弘)을 만나 몸을 굽히지 않고 앉아서 말하기를
“하관(下官)은 무인이므로 무릎이 있어도 능히 굽히지 못합니다.”라 하였으니, 그 지절(志節)이 이와 같았으나 저쪽은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종질(從姪) 정호(廷虎)가 일찍이 호시(怙恃)를 여의고 다만 노비(老婢) 남춘(南春)이 있어서 이를 의지하다가 졸지에 난을 만나 남춘이 창황(蒼黃)하여 업고 도망가서 월계산(月桂山) 암석(巖石) 사이에 몸을 숨겼더니 왜도들이 많이 몰려와서 산곡(山谷)을 샅샅이 뒤졌다. 남춘이 스스로 탈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곧 주인을 깊은 숲속에 숨겨두고 몸소 적을 맞아서 죽으니 적이 숲속에 아이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공이 반가령(反加嶺)을 넘을 때 아이의 부르짖는 소리가 있어 돌아보니 정호였다. 드디어 움켜 안고 말에 오르려는 찰나에 적이 요구철(腰鉤鐵)을 던져 공이 족부(足部)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공이 말을 돌려 칼을 휘둘러 왜적 몇 명의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달고 돌아왔다. 다음날 다시 가서 남춘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 준 뒤에 의비총(義婢塚)이라 표지(標識)를 세웠다. 그리고 정호를 국육(鞠育)하여 백공의 진중에 머물게 하였더니 점점 자라나서 재지(才智)가 자못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군(軍)에 도움도 되었으므로 백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가리포진(加里浦鎭)으로부터 순천부사로 이배(移拜) 되었을 때 격서(檄書)를 받드는 날에 척척(戚戚)하여 기뻐하지 않는 기색을 가지고 이르기를,
“아우가 공(功)을 거둔 것은 형님의 지휘에 연유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지금 나 혼자 은명(恩命)을 입게 되었습니다.”라 하니, 백공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아우의 영광이 곧 형의 영광이다. 너는 마땅히 봉직(奉職)에만 부지런히 하여 성명(聖明)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고, 권문(權門)에 드나들어 몸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하였다.
전후로 군진에 임하여 군의 내부를 제어할 때 추호(秋毫)도 범하지 아니하였고, 순천부사로 있을 때 각가지의 관봉(官俸) 및 포민(浦民)의 물선(物膳)을 한결같이 모두 견감(蠲減)하였다.

소계(蘇溪)를 만(挽)함-삼종숙(三從叔) 현(晛)

남자로 태어나서 천하의 일 감당하니,
재명(才名)을 어찌 병든 문원(文園)에서 취할 것인가?
장요(長腰)로 주문(朱門)을 향해 굽히기를 싫어했고,
큰 칼로 일찍이 추로(醜虜)의 혼을 놀라게 했네.
옛 군졸은 양숙(羊叔)의 사랑을 생각해 울었고,
유민(遺民)은 적공(狄公)의 은혜를 기뻐하여 말했도다.
천 리에 분거(分居)하여 장례 참석하지 못하고,
울면서 남천(南天)을 바라보니 해일(海日)도 흐려지네.

우(又)-심광세(沈光世)

버들잎을 뚫는 묘한 재주(활을 잘 쏘는 일)는 일찍이 짝이 없는 일이었고
홀륭한 풍채는 추추(酋酋한 준인(俊人)이었네.
두 번이나 용도(龍韜) 쥐고 창해(漲海)에 임하였고
일찍이 우선(羽扇)을 휘둘러 요진(妖塵)을 맑게 했네.
전 생애에 군은(君恩)을 크게 입으셨고
이역(異域)에서 옛 정 새로운 줄 깊게 알았노라.
같이 앓던 누신(累臣)은 아직 살아 있는데
오늘에 눈물 젖은 수건 견디기 어렵구나.

증직분황운(贈職焚黃韻)-판서(判書) 홍의호(洪義浩)

쌍충유록(雙忠遺錄)을 읽어 보니 자세한데
호월(湖月), 계운(溪雲)의 광채 모두 빛나도다.
병과(兵戈)를 물리치고 효우(孝友)에도 두터웠고,
부절(符節)을 부여잡고 장량(張良)을 본받았네.
크나큰 그 은혜 금권(金券)으로 다 갚으랴.
구양(歐陽) 노웅(老雄)이 알았다면 철창(鐵槍)에 기록했으리.
백발의 현손(賢孫)들이 효성으로 추원(追遠)하니
상경(上卿)이 작위 주어 고향에 제사했네.

우(又)-이동벽(李東璧)

칼날을 밟은 듯이 위태로운 그 성터에 높은 의리 소상히 드러나니
쟁영(崢嶸)한 기절(氣節)이 일성(日星)처럼 빛났도다.
나라를 회복한 위대한 공적은 주보(周甫)와 같고,
승리를 판단하는 기주(奇籌)는 한량(漢良)과 견주리라.
백대(百代)되는 맹서(盟書) 철권(鐵券)에 남겨 두고,
팔년(八年)의 충곤(忠悃)이여 천창(天槍)을 비쳤도다.
가엾어라 증직을 받는 제현(諸賢)이 모인 자리에
병들어 참예 못하고 벽향(僻鄕)에 누웠으니.

우(又)-김면운(金冕運)

용사(龍蛇)의 난(亂)에 소호선생(蘇湖先生) 최공 형제는 백의(白衣)로써 대의(大儀)에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고 수립(樹立)하신 바가 탁락(卓犖)하였으며, 또 가리포에 계실 때 적벽(赤壁)의 고사(古事)를 쓰시어 적위(敵僞)를 실은 한 척의 배로 해구(海寇) 수백 척의 배를 바다 한가운데서 불태우고, 대첩의 보고가 이름에 조정(朝庭)이 특별히 포상을 더하니, 대첩의 보고가 중흥(中興) 의장(義將)의 걸연(傑然)한 것이다.
이미 장공(長公)께서는 장재(將才)가 있는 것으로써 천거되었고, 계공(季公)은 청백(淸白)한 것으로써 드러났으니 영명함을 날리고 풍채를 떨쳐 명성(名聲) 크게 떨쳤도다. 그러면서도 혼조(昏朝)에 부치어 북문(北門)의 풍설(風雪)을 보고서는 강동(江東)의 순로(蓴鱸)를 노래하고 형제가 괘관(掛冠)코 남쪽으로 돌아와서 퉁소 불고 시 읊으며 노년을 마쳤도다.
아! 그 전란(戰亂)을 다스리고 적개(敵愾)한 의리와 덕행을 즐기시고 잘못을 근심하신 충절이 모두가 당세(黨世)에 표병(彪炳)하였으되 연대가 침강(寢降)하고 부을(鳧乙)의 낢이 점점 멀어지니, 자못 지사(志士)의 개앙(慨仰)의 마음을 일으키도다.
금상(今上)의 병자년에 춘조(春曹)의 진달(進達)로 인하여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증하였으니 실로 국조(國朝)의 성전(盛典)이로다.
분황(焚黃)하는 날에 장보(章甫)들이 모여 함께 경하(慶賀)하는 것으로써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뜻을 펼침에 비록 시율(詩律)에 익숙치 못하나 염탄(豔嘆), 감복(感服)한 바가 깊어서 문득 화호(畵葫)의 옹졸함을 잊어버리고 속초(續貂)의 자(資)에 이바지하려 한다.
누가 운편(雲編)을 잡고 점검(點檢)을 자세히 했던가?
여기에서 징적(徵蹟)을 엮어 휘광(輝光)을 드러냈네.
참군(參軍)의 위찬(韋璨)은 형(兄)이 동창(同倡)한 것이고
어떻게 드러낼까? 안경(顔卿)은 아우도 좋았음을.
백면(白面)의 운주(運籌)는 범을 잡는 계략이요,
적심(赤心)으로 순국(殉國)함에 정창(霆槍)을 날렸도다.
신충(宸衷)이 멀리 느껴 베푼 은혜 무거운데
우리 남쪽 추로향(鄒魯鄕)으로 생색(生色)이 되었도다.

우(又)-안몽백(安夢伯)

녹권(錄券)에 실린 외훈(巍勳) 자세히 드러나니
명공(名公)의 문호(門戶)가 용광(龍光)에 가깝네.
재주를 논한다면 주(周)의 신(臣) 란(亂)에 견줄 것이요,
좋은 행적을 정포(旌褒)한다면 어찌 한(漢)의 장량(張良)만이 독점하랴?
장막 안의 신비로운 운주(運籌)는 체악(棣萼)을 연(聯)하였고,
병진(兵陣) 앞에 영특한 계략 이창(梨槍)을 빛냈도다.
금신(襟紳)들이 모두 숭반(崇班) 내리심을 치하(致賀)하니,
준석(樽席)에 연화(烟花)가 재향(梓鄕)에 빛났도다.

우(又)-박지서(朴旨瑞)

죽백(竹帛)에 소소(昭昭)하게 지난 사적 자세하니,
제형(弟兄)의 충용(忠勇)이 아울러 휘광(輝光)했네.
적(賊) 또한 날쎈 기운 뽐낼 길 없게 됐고
하늘은 응당 뜻이 있어 재량(才良)을 내리셨네.
동국(東國)에서 영구토록 산하(山河)를 맑혔으니,
남성(南星)이 어찌 감히 다시 창을 찌를 것인가?
천추(千秋)의 뒷날 인신(人臣)에게 권하노니,
성대(聖代)에 이 은장(恩章)이 영향(嶺鄕)에 빛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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