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실기

雙忠實紀 卷之一(쌍충실기 제1권)

耽古樓主 2023. 3. 25.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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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실기 제1권
국회소장 쌍충실기


제 1 권(卷之一)



선계(先系)

최씨(崔氏)의 선대(先代)는 중국(中國) 박릉(博陵)의 족(族)으로 수(隋)나라 군사가 동정(東征)할 때 드디어 동인(東人)이 되어 완산(完山)에 살았으니, 지금 전라도(全羅道)의 전주부(全州府)가 이곳이다. 그는 완산에서 객으로 생활했으므로 또한 객산지세(客山之世)라고도 일컫는다고 하였다.

●시조(始祖)는 아(阿)요, 자(字)는 형지(衡之)며 고려(高麗)의 충숙왕(忠肅王) 때에 등제(登第)하여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러,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였고, 시호(諡)는 문성공(文成公)이었다.
청덕(淸德)과 선행(善行)으로써 명성이 일시(一時)에 드러났으며 찬성(贊成)으로 있을 때 시관(試官)을 맡아 이암(李嵒)등 삼십칠인(三十七人)을 선발하니, 세상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칭송하였다. 묘(墓)는 전주(全州) 소양면(所陽面) 주덕산(周德山) 유좌(酉坐)에 있고, 판서(判書) 이효순(李孝淳)이 신도비(神道碑)의 글을 찬(撰)하였다. 아드님은 용생(龍生)이요, 다음은 용각(龍角)인데 대호군(大護軍)이었으며, 다음은 용갑(龍甲)인데 판사(判事)였고, 다음은 용봉(龍鳳)인데 중랑장(中郎將)이었다. 따님은 유지(柳地)에게 시집갔는데 문과(文科)에 올랐고, 다음은 최선능(崔善能)에게 시집갔는데 찬성(贊成)이었다.

●십세조(十世祖)는 용생(龍生)인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성품이 강정염직(剛正廉直)하고, 스스로 검약(儉約)을 지키며 총명(聰明)이 절륜(絶倫)하고 경사(經史)를 전습(傳習)하더니 충정왕(忠定王) 2년 경인(庚寅:서기 1350년)에 지평(持平)으로 계시다가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察使)가 되었다.
여사(麗史)에 “안렴사 최용생은 환시(宦寺)들이 상국(上國)의 사랑을 받는 것을 믿고 동민(東民)에게 해독을 유포(流布)하므로, 그 악한 것을 방(牓)을 부쳐서 국인(國人)에게 보이니, 어향사(御香使)의 환자(宦者) 주원지첩목아(朱元之帖木兒)가 왕(王)과 공주(公主)에게 참소하여 김유겸(金有謙)이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라 하였다.

●족보(族譜)에 “사천(泗川)으로 옮겨 계속해서 살았으니 영남(嶺南)의 최씨가 있게 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라 하였다. 묘(墓)는 사천(泗川) 풍정동(豊井洞)의 간좌(艮坐)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되고 갑자년(甲子年)에 단(壇)을 모아 해마다 제사지내고 있다. 맏아드님은 군보(君甫)였는데 무후(無後)하였고, 다음은 전우(田雨)였으며, 따님은 본조(本朝) 개국훈(開國勳) 보성군(寶城君) 오몽을(吳蒙乙)에게 시집갔다.

●구세조(九世祖)는 전우(田雨)인데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판도정랑(版圖正郎)에 이르고 그 아드님은 택(澤)이었다.

●팔세조(八世祖)는 택(澤)인데 벼슬이 복창원(福昌院) 위전(衛典)에 이르렀으며 아드님은 사필(斯泌)이었고 둘째 아드님은 사지(斯沚)였는데 무후(無後)하였으며, 셋째 아드님은 사강(斯江)이었다.

●칠세조(七世祖)는 사필(斯泌)인데 본조(本朝)의 문과(文科)에 올라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고 아드님은 자경(子涇)이며 둘째 아드님은 득경(得涇)인데 문과에 올라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 추증되었다. 득경의 오세손(五世孫)은 기필(琦弼)인데 호(號)를 모산(茅山)이라 하였고 진주판관(晉州判官)에 천수(薦授)되었다가 계사년(癸巳年)에 촉석루(矗石樓)아래에서 순절(殉節)하니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하고 창렬사(彰烈祠)에 배향(配享)하였다. 기필의 조카 탁(濯)의 호는 죽당(竹塘)인데 익위사(翊衛司)의 익찬(翊贊)을 지냈으며, 명나라(明)에 대한 절의(節義)가 있더니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였고, 인계서원(仁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육세조(六世祖)는 자경(子涇)인데 진사(進士)로 문과(文科)에 올라 봉훈랑(奉訓郞)으로 개령현감(開寧縣監)을 역임하였더니 증손(曾孫) 응룡(應龍)의 귀(貴)로 인하여 판사(判事)를 추증하였다. 이때 비로소 진주(晉州) 강주촌(康州村)에 살게 되었는데 삼세(三世)에 연이어서 진양지(晉陽誌)에 실리어졌고, 묘는 고성(固城) 상리면(上里面) 고곡(古谷)의 간좌(艮坐)에 있으며 응룡이 진주에 목사(牧使)로 있을 때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고 묘도(墓道)에 세웠다.
그리고 증숙인(贈淑人)은 진양정씨(晉陽鄭氏)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교리(校吏) 정길방(鄭吉邦)이었으며 묘는 진주(晉州) 축곡면(杻谷面) 대동(大洞)의 서쪽 위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되었다가 순묘(純廟)의 갑신년(甲申年)에 편갈(片碣)을 얻어 ‘증손 응룡 근찬(曾孫 應龍 謹撰)’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드디어 수묘(修墓)를 하였다.
맏아드님은 수지(水智)요, 다음은 수인(水仁)이었는데 장사랑(將仕郎)을 역임하였으며 무후(無後)하였다.
증숙인(贈淑人)은 진양강씨(晉陽姜氏)인데 그 아버지는 판사(判事) 강천명(姜天命)이었고 그 아드님은 수용(水勇)으로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났다.

●오세조(五世祖)는 수지(水智)인데 자(字)는 윤보(潤甫)요 호는 검재(儉齋)이며 허경암(許敬庵) 조(稠)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여 문장(文章)과 행의(行義)가 일세(一世)에 탁관(卓冠)하였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경태(景泰) 계유년(癸酉年: 단종 1년, 서기 1453)에 문과(文科)에 올랐는데, 성삼문(成三問)이 좌주(座主)가 되었다. 전한(典翰) 옥당(玉堂)의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갔는데 황제(皇帝)가 사조(詞藻)를 가상히 여기고 전대(專對)를 기뻐하여 주자(朱子) 수서(手書)의 수조가(水調歌), 패각(貝刻)의 서안(書案) 및 문장정종(文章正宗), 용연(龍硯)을 상(賞)으로 하사(下賜)하여 총애하였더니 아직도 전해 온다. 일선서지(一善書誌;善山邑誌)에 “걸군치양(乞郡致養)으로 현풍(玄風), 비안(比安)의 현감(縣監)에 제수되었고 성종조(成宗朝)에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참여하였으며 김영달(金英達)의 손서(孫壻)가 되어 해평(海平) 강산(江山)의 좋은 지세를 사랑하여 이어서 살다가 향년 구십(九十)에 졸(卒)하였다”라 하였다. 손(孫) 응룡(應龍)의 귀(貴)로써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을 추증(追贈)했으며 묘는 선산(善山) 조계산(曹溪山) 오리동(梧里洞)의 간좌(艮坐)에 있다. 증숙부인(贈淑夫人)은 함평모씨(咸平牟氏)인데 그 아버지는 사인(舍人) 모순(牟恂)이요, 아드님은 이식(以湜)이며 증숙부인은 해평김씨(海平金氏)로서 교도(敎導) 김유사(金由舍)의 따님인데 묘는 아래에 부(祔)하였다. 맏아드님 이회(以淮)는 사복시(司僕寺)의 주부(主簿)였고, 다음은 이하(以河)이었으며 그 다음은 이한(以漢)인데 정주(定州)의 교수(敎授)를 역임하였고, 따님은 생원(生員) 김영수(金甯壽), 생원(生員) 김준(金俊)에게 출가하였다. 이한의 아드님 응룡(應龍)의 호는 송정(松亭)인데 진사(進士)로 급제(文科)에 급제하여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였고,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문인(門人)이었으며, 송산서원(松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회의 증손(曾孫) 현(睍)의 호는 인재(訒齋)인데 문과에 올라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학봉(鶴峯) 한강(寒岡) 두 선생의 문인이었으며 좌찬성(左贊成) 완성군(完城君)으로 추증되었고, 시호(諡)를 정간공(定簡公)이라 하였으며 송산서원에 병향(並享)하였다. 현의 아드님 산휘(山輝)의 호는 낙남(洛南)인데 부사(府使)를 역임하였고 영사훈(寧社勳)에 책봉되었으며 완해군(完海君)을 봉하고, 시호를 효헌공(孝憲公)이라 하였다.

●고조(高祖)는 이식(以湜)인데 문과에 올라 군수를 역임하였고 대를 이어 황갑(黃甲)이었으니, 남명선생집(南冥先生集)에서 대가(大家)라고 칭명(稱名)하였으며 함안(咸安) 안인리(安仁里)에 옮아 살았다. 맏아드님 윤옥(潤玉)은 무후하였고 다음은 윤신(潤身)이었으며, 다음은 윤재(潤才)요, 또 다음은 윤종(潤終)인데 무후하였으며, 따님은 변윤종(卞潤宗)에게 시집갔다.

●증조(曾祖)는 윤신(潤身)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경력(都摠經歷)을 거쳐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어서 함허정(涵虛亭)을 지으니 서천(西川) 어상공(魚相公) 세겸(世謙)이 명명(命名)하였다.
일찍이 필재 김선생(畢齋金先生:佔畢齋 金宗直)을 따라 영남루(嶺南樓)에 올랐더니 선생이 그 승경(勝景)을 기념하여 시(詩)를 지어 주어 이르기를,
“승지(勝地)가 도리어 승인(勝人)에게 부칠만 하네(勝地還應屬勝人)”

이라 하였으니 대개 공을 중(重)히 여겼기 때문이다. 벼슬이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에 이르렀다.
탁영(濯纓) 김문민공(金文愍公) 일손(馹孫)이 함허정기(涵虛亭記)를 지었으니 대략 이러하다.
“금관(金官)에는 기적(奇迹)이 많았으니, 최후(崔侯)가 대단한 재간(才幹)으로 만들어서 연자루(燕子樓)를 말끔히 새로 꾸며 모든 문물(文物)을 분식(賁飾)한 바가 그 극(極)을 다 쓰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누각 바로 북쪽에 못을 파고 물을 끌어 들여 파심(波心)에 섬을 쌓고, 집을 지어 정자(亭子)로 하였으니 경면(鏡面)이 징징(澄澄)하여 마치 넓은 주름살을 펴는 것 같으매 태허(太虛)를 함혼(涵混)케 하였고, 풍월(風月)이 쌍(雙)으로 맑았으매 물이 하늘을 담고 하늘이 물을 담갔던가? 어공(魚公)의 명명(命名)한 것이 여기에 들어맞는다. 최후(崔侯)의 즐거워함도 또한 보통 풍류(風流)가 아님을 알겠도다. 청컨대 후(侯)는 가만히 앉아 고요히 바라보고 그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 생각을 맑게 하여 본체(本體)의 허(虛)를 구(求)하여 사소(些少)한 사재(査滓)가 나의 흉차(胸次)에 누(累)가 될 수 없도록 하여 천연(天淵)에 비약(飛躍)하는 묘(妙)도 또한 이회(理會)하기에 요긴하게 여기소서.”
정부인(貞夫人)은 진양강씨(晉陽姜氏)인데 사직(司直) 강수지(姜秀之)의 따님이었고 생원(生員) 강임생(姜任生)의 손녀이었으며 그의 오세조(五世祖)는 태상소경(太常少卿) 진천군(晉川君) 강위상(姜渭祥)이었다.
아드님은 담(潭)이었고 둘째는 홍(泓)이었으며 셋째는 하(河)인데 참봉(參奉)으로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이 있었으며 두 분 따님은 권응장(權應章), 노숙광(盧淑匡)에게 시집갔다.

●할아버지는 담(潭)인데 유행(儒行)으로써 덕릉참봉(德陵參奉)에 천수(薦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손자 강(堈)의 훈공(勳功)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추증하였고 고성(固城) 구만리(九萬里)에 우거(寓居)하였으니, 묘는 구만의 당산(堂山) 자좌(子坐)에 있다.

증정부인(贈貞夫人)은 광주노씨(光州盧氏)인데, 아버지는 노숙우(盧淑佑)이었고 할아버지는 현령(縣令) 노조경(盧趙卿)이었으며 외조부(外祖父)는 상장군(上將軍) 김보(金寶)였고, 묘는 쌍조(雙兆)로 하였다.
맏아드님은 운걸(云傑)인데 참봉이었으나 무후하였고, 둘째는 운덕(云德)인데 현릉참봉(顯陵參奉)이었으며, 셋째는 운철(云哲)이었고, 넷째는 운준(云俊)이었으며, 다섯째는 운명(云明)이었고, 여섯째는 운제(云悌)이었으며, 일곱째는 운개(云愷)인데,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이었고, 따님은 장악주부(掌樂主簿) 이면(李㴐)에게 시집갔다.
운걸의 따님은 이세렴(李世廉)에게 시집갔으니, 세렴의 아들 이달(李達)은 군수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호를 운포(雲圃)라 하였으며, 두 분과 함께 의려(義旅)를 불러일으켰다.
운덕의 손자 용호(龍虎)는 직장(直長)이었는데 이공(二公)의 표하군관(票下軍官)이 되었고 운개의 아들 훈(塤)은 판관(判官)인데 처음 두 분의 의진(義陣)을 따라 적(賊)을 만나서도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다.

●고(考)는 운철(云哲)인데 아들 강(堈)의 훈공으로써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추증하였고, 묘는 구만의 평령산(平令山) 묘좌(卯坐)에 있으며, 증정부인(贈貞夫人)은 청풍김씨(淸風金氏)인데, 아버님은 참봉(參奉) 김덕후(金德厚)요, 할아버지는 진사 김윤견(金允堅)이었으며, 증조(曾祖)는 진사 김충신(金忠信)이었고, 묘는 합부(合祔)로 하였다.

맏아드님은 균(均)이요, 둘째는 기(垍)로서 통덕랑(通德郞)이었는데, 임란(壬亂)에 가중(家衆)을 거느리고 자굴산(闍崛山)에 들어가 적병을 피하니 한 가족 백구(百口)가 이에 힘입어 온전함을 얻었고, 셋째는 강(堈)이었으며, 따님은 이집(李楫), 권관(權管), 안민(安愍)에게 각각 시집갔다. 안민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었는데, 임진년에 김해에서 절사(節死)하였고, 안민의 아들 안신갑(安信甲)은 두 분을 따라 창의(倡義)하여 산음(山陰)에서 순절(殉節)하니, 벼슬은 군수였고, 판결사(判決事)를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호를 장암(壯庵)이라 하였고, 부자(父子)가 두릉서원(杜陵書院)에 병향(並享)되었다.

사실(事實)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시(諡) 의민(義民) 소호(蘇湖) 최공(崔公)

공(公)의 휘(諱)는 균(均)이요, 자(字)는 여평(汝平)이다. 중종(中宗) 정유년(丁酉年)에 곤계봉(昆季峰) 아래 소대(蘇臺)위의 본가에서 탄생하였는데 스스로 호를 소호(蘇湖)라 하였다. 풍의(風儀)가 준정(埈整)하고 기국(器局)이 굉원(宏遠)하였으며 자취를 임천(林泉)에 감추고 문달(聞達)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며, 수간(數間)의 정사(精舍)를 가져 형제(兄弟)가 함께 살면서 언제나 서로 담담(湛湛)하게 즐기고 빈한(貧寒)을 잊고 의(義)를 지켰으며, 학문의 이치를 궁구하고 실천(實踐)하였고, 만년(晩年)에는 주역(周易) 읽기를 즐겨 하여 오지(奧旨)를 궁탐(窮探)하였으며 천문도수(天文度數)도 또한 모두 다 널리 통달하였으나, 도광(韜光)으로 채색을 깎아 숨기니 남이 그 총명예지(聰明叡智)를 알지 못하였다.
마침 임진(壬辰)의 난(亂)을 당하여 해구(海寇)가 창궐(猖獗)하니 조야(朝野)가 창황(蒼黃)하였다. 이때 계제(季弟) 소계공(蘇溪公)과 함께 칼을 집고 의병(義兵)을 일으키니, 두 생질(甥姪) 이달(李達), 안신갑(安信甲)도 또한 적을 쳐서 복수(復讐)하기로 맹세하고 와 모여서 눈물을 씻고 동심(同心)하였다. 이때 계공(季公)은 장수가 되고, 공은 모주(謀主)가 되어 방략(方略)을 찬획(贊畫)하고 병기(兵器)를 조달하는 위에 군량미를 공급하였으며, 아우에게 정예(精銳)를 이끌고 급히 달려가 오전(鏖戰)하게 하고 공은 담치(牆峙)에 유둔(留屯)하여 스스로 풍운장(風雲將)이라 이름 짓고 의병(疑兵)을 많이 설치하여 왕래(往來)하면서 표략(剽掠)하는 적을 막으니 방군(旁郡)의 인민(人民)들이 이에 힘입어 안도(安堵)하고 농업을 권장하여 곡식을 거둠이 평일(平日)과 다름없게 되니 굶주린 군사와 흩어졌던 병졸들이 서로 다투어 몰려 왔다.
여기에서 성세(聲勢)가 더욱 떨치게 되니, 초유사(招諭使) 김공(金公)이 명성을 듣고 만나 보기를 요청하므로 형제가 함께 가서 그 절제(節制)를 받고, 이어서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모촌(茅村) 이정(李瀞), 송와(松窩) 강칭(姜偁), 송암(松巖) 이로(李魯)와 동심(同心)하여 토적(討賊)할 것을 맹세하였고, 또 권공(權公) 응수(應銖), 정공(鄭公) 세아(世雅), 조공(曺公) 희익(希益), 신공(申公) 해(海)와 평소 서로 친히 지냈으므로, 각각 강(江)의 좌우(左右)에 웅거하여 순치(脣齒)의 형세를 만들어, 제공(諸公)이 만일 완급(緩急)으로써 서로 고(告)하면, 군사를 이동시키고 군량을 옮겨 주면서 전력을 다하여 헤아려서 베풀어 주었다.
대개 유악(帷幄)에서 운주(運籌)하여 지모(智謀)를 내고 심려(深慮)를 찾아서 동합(動合)에 기회를 적의(適宜)하게 하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서는 험준(險峻)한 곳을 점거하도록 하여 계공이 홀로 가지 못하게 하였으나, 계공이 능히 분신(奮身) 한마(汗馬)하여 마침내 전승(戰勝)으로 공취(攻取)하는 공(功)을 이루었으니 이는 공에게 의지한 것이었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사량(蛇梁)에서 위급을 당하고 웅천(熊川)에서 싸울 때 형제분이 달려가 구원하여 일면(一面)을 한어(捍禦)하고, 참괵(斬馘)이 수없이 많았으며, 특히 안민령(安民嶺)에서 포위를 당했을 때는 공이 책석(磔石)을 던져서 적을 스스로 어지럽게 만들고 계공이 곧 달려 들어가서 좌우(左右)를 풀었다.
언제든지 논공(論功)을 함에 이르러서는 겸퇴(謙退)하여 자랑하지 아니하시니 사람들이 풍대수(風大樹)에 비유하였다. 조정(朝庭)에서 공이 장재(將才)가 있는 것을 알고 수문장(守門將)을 천거하였다.
을사년(乙巳年: 선조 38년, 서기 1605년)에 또 계공과 함께 화공(火攻)의 계책을 써서 해적(海賊)을 제주(濟州)의 바다 가운데서 크게 파하니 호백(湖伯)의 논계(論啟)로 인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키고 삼등공신으로 녹훈(錄勳)되었다.
공은 평소 환정(宦情)이 없어서 종사(從仕)하기를 즐거워하지 않더니 혼조(昏朝)를 당함에 미쳐서 국정(國政)이 문란(紊亂)하고 이륜(彛倫)이 역패(斁敗)하는 것을 보고 형제가 호연(浩然)이 남쪽으로 내려올 때 시(詩)를 지어 읊었으니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가소(可笑)롭구나. 공명(功名)이란 폐리(弊履)와 같은 것을.
백두(白頭)에 미록(微祿) 이내 몸이 부끄럽네.
어느 곳 순채나물 노어회가 가을철에 정말로 좋다던가?
편주(片舟)를 잡아타고 오호빈(五湖濱)을 향해 간다.
(可笑功名等弊履 白頭微祿愧斯身
何處蓴鱸秋正好 片舟擬向五湖濱)

바로 전리(田里)로 돌아와서 형제간에 우애(友愛)의 정이 늙어가면서 더욱 두터우니 세상 사람들이 그 집을 가리켜 이르기를 효우려(孝友廬)라 하였다.
정미년(丁未年:선조 40년, 1607년)에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승진되고 병진년(丙辰年:광해군 8년, 1616년) 9월 16일에 졸(卒)하시니 향년(享年) 80이었다. 남계(南溪) 정승윤(鄭承尹), 인재(認齋) 최현(崔晛) 제공과 사림(士林) 수백명(數百人)이 현(縣)의 북쪽 당항(堂項) 자좌(子坐)의 언덕에 회장(會葬)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겸(兼)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증겸(贈兼) 지의금부(知義禁府) 훈련원사(訓鍊院事) 시(諡) 의숙(義肅) 소계(蘇溪) 최공(崔公)

공(公)의 휘(諱)는 강(堈)이요, 자(字)는 여견(汝堅)이며 명묘(明廟) 기미년(己未年:명종 14년, 서기 1559년)에 곤계봉(昆季峰) 아래 소대(蘇臺) 위의 본가에서 탄생하셨는데 스스로 호를 소호(蘇溪)라 하였다.
의용(儀容)이 간중(簡重)하고 기국(器局)이 홍의(弘毅)하였으며, 효우(孝友)함이 천출(天出)이어서 일찍 고(孤)가 되었으되 두 형(兄)을 섬기기를 어버이와 같이하여 모든 일에 대소(大小)가 없이 반드시 먼저 품의(稟議)한 뒤에 하였고, 감히 혼자 천단(擅斷)하는 일이 없었다. 책상을 연이어 놓고 이불을 같이 덮었으며 일월(日月)로 힘써 매진(邁進)하매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고 사장(詞章)에도 뛰어났으나 여러 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니 이에 투필(投筆)하고, 시(詩)를 지어,
“큰 웃음 한 번 하고 투필(投筆)코 일어서니
천지(天地)가 활시울인양 이렇게도 가볍구나(大笑投筆起 天地一弦輕)”
라는 구절이 있었으니 그 기개(氣槪)가 이와 같았다.
을유년(乙酉年:선조 18년, 서기 1585년)에 무과(武科)에 올라 주역(周易)을 배강(背講)하였더니, 시관(試官)이 글 뜻을 발문(發問)함에 응대(應對)가 물 흐르듯 함을 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경학(經學)이 이와 같은데 무(武)로써 발신(發身)한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하고, 제일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지절(志節)을 숭상하여 급급(汲汲)하게 진취(進取)할 뜻이 없더니 용사의 난(龍蛇之亂)을 당함에 미쳐서 백씨 소호공(蘇湖公)과 함께 분신(奮身)하여 창의(倡義)하시니, 두 생질 이달(李達), 안신갑(安信甲)이 또한 의병을 이끌고 왔다. 때마침 적(賊)이 사방(四方)에 충척(充斥)하였더니, 5월에 초유사(招諭使) 김공(金公)의 지휘를 받아 김대명(金大鳴), 이달(李達)과 합세하여 사천(泗川), 고성(固城)의 적을 공격하니 적이 낭패하여 밤을 타서 도망하였다. 8월에 적이 진주(晉州)로 향하여 오므로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이를 대파(大破)하고 적장(賊將)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드디어 삼성(三城)을 회복하였다.
10월(十月)에 적이 다시 진주(晉州)를 열 겹(十匝)으로 포위하므로, 공이 조응도(趙凝道), 정유경(鄭維敬)과 함께 군사를 남강빈(南江濱)에 들어내어 배치해 놓고, 밤에 망진산(望陣山)에 올라가서 횃불을 벌려 들고 함성을 지르면서 북을 울려 하늘을 진동시키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여 포위망을 풀고 물러가므로 이를 추격하여 참획(斬獲)하고 돌아왔다.
다음 해 계사년(癸巳年) 6월에 적이 또 대거(大擧) 진주를 에워싸니 제장(諸將)이 당하지 못하고 물러나서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때 공이 이달과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다가 성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두골평(頭骨坪)으로 되돌아오니 적이 따라와 포위하므로 공이 만중(萬衆)의 가운데로 돌격(突擊)하여 삼처럼 베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고 썰물에 밀리듯이 물러가고 피난했던 남녀 삼백여(三白餘)명이 이에 힘입어 온전히 살게 되었다.
또 권응수(權應銖), 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영천(永川)의 적을 토벌할 때 화공(火攻)으로 공격하니 불에 타 죽은 자의 악취가 수리(數里)에 미쳤다.
일찍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을 구원하여 적을 웅천(熊川) 및 사량(蛇梁)에서 이기니, 충용공(忠勇公) 김덕령(金德齡)이 영남(嶺南)에 진군(進軍)하여 공의 효과(驍果)을 알고 이끌어 별장(別將)으로 삼으니 군세(軍勢)가 더욱 떨치었다.
처음에 훈련봉사에 제수되었고, 도총경력(都摠經歷)을 거쳐 외직으로 나와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가 되었더니 그때 해경(海警)이 심히 급하매 백공(伯公)의 화공책을 써서 배 수백 척을 아경(俄頃)에 태우니 첩서(捷書)가 조정에 알리어져 임금이 특별히 포유문을 하사하여 공(功) 일등(一等)을 기록하고 순천부사(順天府使)를 배하였다.
병오년(丙午年: 선조 39년, 서기 1606)에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에 승진되어 갈려서 돌아올 때, 순천(順天)의 배리(陪吏)들이 가마와 술잔을 받아 주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고, 영례(營隷)들이 또 사은(私恩)으로 몰래 포백(布帛)을 체행(遞行)에 붙였으나, 중로에서 알고 이를 되돌렸으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복피(襆被)가 소연(蕭然)하여 한 빈한한 선비와 같았다. 부총관으로 계실 때 항상 장복(章服)을 남에게 빌려 입으니, 도총관(都摠管) 서성(徐渻)공이 그 청개(淸介)에 감복하여 임금께 삷았다. 임금께서 크게 가탄(嘉嘆)을 더하시어 비단 1단(一段)을 하사하니 사람들이 제준(祭遵)에게 기의(奇衣)가 없었던 것으로써 비유하였다.
광해군(光海)때 비국(備局)에서 추천하여 병사(兵使)의 수망(首望)에 들었더니 김상궁(金商宮)이 사람을 시켜서 밤에 와 말하기를,
“은자(銀子)를 기다려 낙점(落點)이 될 것입니다” 라 하므로 공이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뇌물로써 벼슬을 얻는다면 누구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라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이어 광해주가 마침내 내치어 교동별장(喬桐別將)으로 삼고 임해군(臨海君)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으나, 공이 그 무죄(無罪)함을 측은히 여기어 끝까지 잘 보호하다가 소인(宵人)들에게 무질(誣嫉)되어, 결국 국문을 당하기에 이르러, 죽기를 협박하니 공이 항의(抗議)하여 이르기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무고(無辜)한 왕자(王子)를 차마 해(害)할 수는 없습니다.”라 하니 임금이 의롭게 여기어 석방하고 곧 충청수사(忠淸水使)를 배하였다. 이에 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내가 우연히 촌공(寸功)을 세워 적으나마 국은(國恩)에 보답하려 한 것인데, 몸이 이미 영귀(榮貴)하게 되었으니 내가 여기에서 그만두어야 옳을 것이다.” 하고 곧 병을 고(告)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포도대장(捕盜大將)으로 소명(召命)하였으나 병을 칭탁하고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서사(筮仕)로부터 곤수(閫帥)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지혜와 정성에서 나온 것이요, 한결같이 남의 도견(陶甄)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갑인년(甲寅年:광해군 6년, 서기 1614) 2월 16일에 졸하시니 향년이 56이었다. 부음(訃音)을 들은 광해군이 통석(痛惜)하게 여기어 넉넉한 부의(賻儀)로 치제(致祭)하고, 지사(地師)를 보내어 땅을 가려 잡아서 예장(禮葬)하였다. 이때 순천(順天)의 해부(海夫) 수십인(數十人)이 상(喪)을 듣고 달려와 곡(哭)하고 이어 가까운 포구(浦口)에 살면서 고기를 잡아 제수(祭需)로 바치기를 삼 년을 한 뒤에 돌아갔다. 유애비(遺愛碑)를 세워 아직도 순천에 있다고 하였으며, 묘는 구만(九萬) 묘동(廟洞)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

유고(遺稿)


시(詩)


계제(季弟) 여견(汝堅) 강(堈)을 부거(赴擧)하며 -소호(蘇湖)

일기(逸驥) 탄 장도(長途)의 이 걸음이
머나먼 십이한(十二閑)과 통하리.
만리에 후(侯 )로 봉해질 큰 뜻
투필(投筆)한 너이기에 반초(班超)같기를 바라노라.

강위서(姜渭瑞) 응황(應璜)의 상사사(相思詞)에 차운(次韻)한 네 수(四首)

상사시(相思詩)
시어(詩語)가 양양(洋洋)하고 의미 또한 유연(悠然)하구나.
칼을 치며 그대 그려 눈 닦고 생각한 지 얼마나 되었던가?
봉서(封書)를 벗에게 붙여
정암 나루터에 하룻밤 정답게 지내어 즐거웠고,
담티 고개에서 삼순(三旬)동안 쌓였던 수심 막히었네.
내 홀로 한영(寒營)에 누워 무엇을 생각하랴?
추월(秋月)이 서주(西州)에 비쳤으니 그 걸 보고 알 뿐이네.

상사몽(相思夢)
꿈속에도 청초한 그 모습 생생도 하네.
지난 날 삼진(三陳)의 계책
오늘 아침 배(倍)도 더 생각나네.
왜추(倭酋)를 섬멸할 때 뉘와 함께 하였던고?
홀로 위루(危樓)에 기대어서
밤마다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
후기(後期)를 점치기 어렵구나.

상사수(相思樹)
강(江)가에 푸르른 마무 멀리 뻗친 정(情)이어라.
봉악(鳳嶽)을 넘는 구름 사흘 밤 꿈이로고.
용만(龍彎)의 활 (缺字) 이 일조(一朝)에 울었도다.
음서(音書)는 바로 수심을 따라 내 곁에 이르렀고
사율(詞律)은 바야흐로 어지러운 속마음 보겠구나.
불행(不幸)히도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소(晝宵)로 원하는 건 혈진(血塵)을 맑게 하는 일이었다.

상사화(相思花)
그 꽃이 어제 동풍(東風)에 피었구나.
해바라기 이슬방울 흰 옷자락 적시는데
봉화 불꽃은 붉었구나.
그대 그리는 마음 꿈속에서 간절한데
우국(憂國)의 그 심정 글 속에서 부탁했네.
다른 날 화산(華山)에 모인다면
어느 누가 나와 함께 의논할꼬?

약봉(藥峰) 서성(徐渻)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강위서(姜渭瑞)에게 부친다-소호(蘇湖). 소계(蘇溪)

이 세상에 상봉(相逢)이란 참으로 드문 건데
언젠들 두 사람 생각지 않으리요?
걱정되는 마음 오직 임(임금) 생각뿐이오라.
서로 사귄 깊은 정을 시(詩)로써 전(傳)하오리.
나의 군사 모은 일 부끄럽기 짝이 없고
그대의 봉가(鳳駕) 뫼신 일 부러울 뿐이외다.
장차 이 도둑 섬멸할 일 기약하고
함께 태평(太平)의 술잔 드리오리.

강위서(姜渭瑞)가 보낸 시에 차운한다

바닷가에 봉화불이 구름 속에서 거듭 오니
이 몸 남번(南藩)에 있어 불충(不忠)이 부끄럽네.
먼 변방까지 용여(龍輿)가 가시다니 천고(千古)의 치욕인데,
청반(淸班)의 원여(鵷侶)들은 일조(一朝)에 흩어졌네.
백성이 신음하는 이 날 아침 광복(匡復)을 생각하는데
천자가 도와주는데 어느 때에 첩공(捷功)을 드리오리.
여기에서 오군(吾君)의 비분(悲憤) 간절할 줄 알지마는
몇 번이나 신검(神劍)으로 가을 무지개 쏘는 것 보겠는가?

강위서에게 줌

마음이란 본래부터 가장 영허(盈虛)한 것이니
가고 오는 길 정한 곳 따로 없네.
수방(收放)할 교훈 따르려고 하온다면
맨 먼저 그 온 곳부터 살펴보세.

난(亂)이 평정된 뒤에 고산(故山)으로 돌아오다.

스스로 강호(江湖)의 약속 저버리고
풍진(風塵) 속에서 십 년(十載)의 세월 흘러갔네.
고달픈 간과(干戈)가 지금이야 그쳤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골짜기 수풀 속에서 쉬리로다.

계제(季弟)와 함께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다.

가소(可笑)롭다 공명(功名)이란 폐리(弊履)와 같은 것을
백두(白頭)에 미록(微祿)이 이내 몸에 부끄럽네.
어느 곳에 순나물 노어회가 이 가을에 좋다더냐?
편주(片舟)를 저어 가서 오호빈(五湖濱)에 가고 싶네.

투필(投筆)-소계(蘇溪)

큰 웃음 한 번 웃고 붓 던지고 일어서니
천지(天地)에 한 가닥 활시위가 가볍네.

손아(孫兒)의 출생을 기뻐한 두 수

무신(戊申) 양월(陽月) 이십사일(二十四日)
한 아들이 생남(生男)하여 후사(後嗣)를 이었구나.
아마도 명명(冥冥)중에 이신(而信)의 교훈 받았으리.
학문은 다른 날에 (缺字)

평생(平生)에 기이한 꿈 내 믿기 어렵더니,
오늘 아침 장자(長者)가 태어나서 비로소 믿어지네.
공석(孔釋)이 엄연(儼然)히 내게 와서 물었으니,
성현(聖賢)이 (缺字) 우리 집에서 이뤄지리.

서(書)


강사앙 칭(姜士盎 偁)에게 줌

어제 초유사(招諭使) 김영공(金令公)의 서신을 보고, 오존(吾尊)께서 행재소(行在所)에 분문(奔問)한 줄 알았더니, 홀연히 혜장(惠狀)을 받아 체도(體度)가 위중(衛重)함을 알게 되매 위위(慰慰)됨이 만만(萬萬)입니다. 이곳 균(均)과 강(堈)은 五월 八일에 이웃 동네 나치문(羅致文)이 적병(賊兵)에게 합몰(合沒)되었기 때문에 안신갑(安信甲)과 합세(合勢)하여 토평(討平)하고 청암(淸巖)까지 물리쳤으니 마음이 심히 쾌연(快然)합니다.
근간에 들으니 이승지(李承旨) 자상(子常)이 서신을 오존에게 보냈다고 하였는데, 나변(那邊)의 효상(爻象)은 어떠하였습니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답답하여 매양 한 번 진배(進拜)코 문안드리려 하였으나 군무(軍務)가 분주하여 뜻과 같이 이루지 못했습니다. (중간에 글자가 없음) 향일(嚮日)에 김공(金公) 좌하(座下)로부터 받은 경십(瓊什)은 아직 화답하지 못하였으니 여창(茹悵)하고 여창하오나 뒷날 봉정(奉呈)할 작정입니다. 묘군(卯君)과 내일 사량진(蛇梁津)으로 출발해야 하겠으므로, 잠깐 이 글을 써서 문후를 드리옵고 나머지는 행패(行旆)에 어지러움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강사앙(姜士盎)에게 줌

전날에 군중(軍中)에서 소맷자락을 받들어 모시게 된 것은 비록 하늘이 빌려주신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인데, 마침내 숙연(倏然)함을 깨달으니 황홀하여 춘몽(春夢)과 같았습니다. 더욱이 한스러운 것은 분문(奔問)한 일자(日字)를 전문(轉聞)할 수 없었으니 유연(悠然)한 한 생각이 언제쯤 풀어지겠습니까? 이에 미아(迷兒)를 보내어 효상(爻象)을 자세히 살펴 듣고자 하오니, 존형(尊兄)은 이미 분문을 하였으매, 존형의 막하(幕下)에 있는 김별장(金別將)을 우리와 서로 의지하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미아는 여러 날 지체하지 말고 곧 기송(起送)하시기 바라오며, 부탁하신 중에 병마(兵馬) 일대(一隊)는 하교(下交)대로 보내도록 명령하겠습니다. 남은 말씀은 우리 아이의 구보에 있아옵기 다 갖추지 못합니다.

강사앙(姜士盎)에게 답함

김별장(金別將)이 도착하여 무양(無恙) 물었더니 그 뒤에 곧 혜서(惠書)를 배독(拜讀)하게 되니 오존(吾尊)께서 진심(盡心)하심이 이에서 더욱 심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근간에 들으니 도승지(都承旨) 이자상(李子常)이 평양(平壤)에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한다 하오니, 인신(人臣)으로서 자처(自處)하는 도리를 어찌 이때 다하지 않겠습니까?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공이 의병(義兵)을 불러일으키니 바람을 따라온 자가 오존(吾尊)과 우제(愚弟)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찌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은 것으로써 걱정만 하겠습니까? 들으니 이천(伊川)의 제독관(提督官) 조헌(趙憲)이 처음으로 금산(錦山)에서 적추(賊酋)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하오니,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별장(別將) (글자 없음) 서신을 우제에게 보냈는데 글 가운데 사의(謝意)가 근간(懃懇)하였습니다. 그러나 열진(列鎭)이 와해(瓦解)된 이때를 당하여 어찌 이명보(李明甫)가 부탁한 바를 보아 넘길 것이며, 권광주(權光州)의 주획(籌畫)을 거역하겠습니까? 남은 말은 조만간(早晩間)에 회답을 받는 데에 두기로 하고 더 올리지 못합니다.

강위서(姜渭瑞)에게 답함- 임진년(壬辰)에 소호

봉성(鳳城)에서 손을 나눈 뒤에 촉수(矗樹)도 정을 머금었을 것입니다. 경경(耿耿)한 진중의 등불 아래 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오래였습니다. 돈아(豚兒)가 돌아와서 홀연히 전하기로 마음이 황홀하여 세 번이나 등잔 앞에서 반복해 보니 자리를 함께한 듯 미미(娓娓)하였습니다. 뜻밖에 김별장(金別將)이 천리(千里)의 수자(手滋)를 바치니 이는 곧 행패(行旆)한 뒤의 평안한 소식이었습니다. 균(均)은 향자(嚮者)에 정진(鼎津)에서 군오(軍伍)를 잃었다가 마침 조종도(趙宗道)군과 곽재우(郭再祐)군과 함께 겨우 본영(本營)에 이르러 대루(對壘)의 거사가 있었으나 묘군(卯君)은 월전(月前)에 별장 이달(李達), 안신갑(安信甲)과 함께 이수사(李水使)를 웅천진(熊川鎭)에서 구원하러 가서 아직 본영으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마은은 심히 의아스럽고 울적합니다. 부탁하신 일 중에 흥아(興兒)를 기송(起送)하라는 하교는 은근(慇懃)할 뿐만 아닙니다만, 진아(振兒)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어제 웅천진으로 보냈으므로 수하(手下)에 사람이 없어서 성교(盛敎)에 부응(副應)하지 못하오니 한스럽기 짝이 없으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맙게 보내온 상사사(相思詞)에 대한 율(律)은 옹졸함을 잊고 화답하여 올리옵고 남은 말은 다 갖추지 못합니다.

강위서(姜渭瑞)에게 답함-을미(乙未)에 소호(蘇湖) . 소계(蘇溪)

수일(數日) 전에 본영(本營)으로부터 보내어 온 글은 손아귀에 넘치는 여주(驪珠)를 받은 것이요 일천리(一千里)를 넘은 마음의 선물이오니 가히 쉽게 얻지 못할 희품(稀品)이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강의(强意)로 효빈(爻嚬)코자 하오나 이 고루(孤壘)한 저 자신을 돌아보아 대방(大方)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합니다. 지시하신 일은 반드시 남에게 양보를 많게 할 수는 없지만 병사(兵事)는 가히 기약치 못할 것이기에 이와 같이 된 것이니 다만 저 창천(蒼天)의 처분 여하(如何)를 기다릴 뿐입니다. 전자(前者)에 부탁하신 군미는 가지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 비록 서강(西江)의 물을 트고자 하였으나 힘이 진실로 미치지 못하였고 하동(河東)의 곡식을 옮기려고 하였으나 형세가 이미 방책이 없으니, 존형(尊兄)께서 하량(下諒)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서영공(徐令公)이 부친 시(詩)는 비록 우제(愚弟)에게 미치지 않았으나 우제도 또한 삼가 차운(次韻)하여 보낼 것이니 한바탕 웃음을 지으소서. 나머지는 갖추지 못합니다.

강위서(姜渭瑞)에게 답함

현시(弦矢)처럼 잠시 만나자 이별하니 그리운 회포가 운수(雲樹)에 만 겹이나 얽히었고 용만(龍彎)을 첨망(瞻望)하매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나의 형을 생각하는 것으로써 형이 나보다 현현(懸懸)한 것을 알겠습니다. 삼추(三秋)가 저물어 가려 하는데 한 번도 만나 뵈올 방도가 없더니, 편편(翩翩)한 한 장의 서찰(書札)이 원방(遠方)으로부터 오니 간간(侃侃)한 의모(儀貌)는 비록 안중(眼中)에 접(接)하지 못했으나 신신(申申)한 후의(厚誼)는 또한 지상(紙上)에서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반복하여 읽으면서 놓지 못하오매 나도 몰래 감격스러운 눈물이 흐르려 합니다. 이 균(均)의 어리석은 사람으로는 앞에도 알맞지 못하였고, 비록 강안(强顔)을 남보다 뒤에 하여 군오(軍伍)의 대열(隊列)에 참여하고자 하오나, 세상이 나와 어긋나고 뜻이 일과는 틀어져서 평지(平地)에도 구절(九折)이 있사오매, 논병(論兵)의 여지가 없음을 한탄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 두 사람을 만나서 군오(軍伍)를 연결하고 대열(隊列)을 맞대하게 되어 도(道)가 합하고 마음이 맞으매 마음속 깊은 사랑을 어느 날인들 잊어버리겠습니까? 정안(征雁)이 서릿발에 부르짖고 서토(西土)가 일찍 추워지니 존리(尊履)께서는 물론이요, 군사가 찬바람에 떠는 한탄이 없고 갑옷이 얼어붙는 근심이 없으십니까? 원컨대 오존(吾尊)께서는 자애(自愛)에 노력하시고 때때로 덕음(德音)을 보내시어 천리(千里)의 면목(面目)을 서로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앞으로의 계책을 거듭 생각하니 황연(怳然)한 꿈결 같고 서천(西川)을 한스럽게 바라보니, 근심되는 마음이 충충(忡忡)합니다. 악수(幄手)하고 회포를 풀어 이야기할 날이 정히 언제쯤이 되겠습니까? 언념(言念)이 여기에 이르니 다만 그곳으로 분비(奮飛)하고 싶습니다. 고맙게 보내온 경십(瓊什)은 읽을수록 상쾌한 기운이 아협(牙頰)에서 나오니 감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에 졸구를 가지고 삼가 화운(和韻)드리고 다 갖추지 못합니다.

강위서(姜渭瑞)에게 답함-병신년(丙申)에 소호(蘇湖)

일찍이 존형(尊兄)에게서 물음에(글자 없음) 우제(愚弟)가 듣건대 “도(道)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와서 부부(夫婦)에서 시작되고 국가(國家)와 천하(天下)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성인(聖人)의 업(業)입니다. 그리고 그 문(文)이라면 시서(詩書), 예악(禮樂), 춘추(春秋), 공맹(孔孟)의 서적(書籍)에 다 갖추어져 있어서 본말(本末)이 서로 응(應)하고 시종(始終)이 찬연(燦然)하여 일용(日用)의 사이에서 수유(須臾)라도 떠나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대개 천리(天理)와 민의(民懿)이기 때문에 사단(四端)과 오상(五常)이 나의 방촌(方寸)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한번 움직이고 한 번 쉬는 것이 도(道)가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밖에서 빌려 가지고서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옛 성인(聖人)이 이 도를 천하(天下)의 후세에 밝히고자 하매, 그 은미곡절(隱微曲折)의 사이에서 문자(文字)에 의탁하지 아니하면 능히 스스로 전(傳)하지 못할 것이므로 삼대(三代) 이후로 여러 성인이 이어 오다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에 이르러 그 (글자 없음) 이치가 찬연히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대개 옛날 군자가 반드시 이를 연유하여 추구하고 천하의 이치를 궁구하였으며 안에서의 일념(一念)과 밖에서의 만사(萬事)와 미세한 것으로의 만물에 이르기까지 그 시초를 궁구하여 그 귀결점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그 한 가지 이치를 통달하여 그 만 가지 이치를 알게 되니 중리(衆理)가 소연(昭然)하게 스스로 드러나고 만물이 모두 나에게 구비되니 이를 지(知)의 지극함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또 지(知)의 지극한 것으로부터 이를 미루어서 성(誠), 정(正), 수(修), 제(齊)에 이르게 되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天下)가 태평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그 동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온 것이면서 그 용(用)은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요(堯), 순(舜), 우(禹), 탕(湯)이 능히 이를 미루어서 운용(運用)한 것으로서 그 도는 외외(巍巍)하고 탕탕(蕩蕩)하여 백성이 능히 이름 지을 수가 없었던 것인데 주공과 공자께서 능히 이를 미루어 알아서 이 도를 운용할 때에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맹수(猛獸)를 몰아냈으며, 정묘(丁卯)를 베고 춘추(春秋)를 수찬(修撰)하였으며,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물러서며 혹은 주기도 하고 혹은 뺏기도 한 것은 곧 천지의 용(用)과 조화(造化)의 묘(妙)를 다른 데서 구(求)하지 않고 마땅히 이것으로부터 구한 것입니다,
아! 근대(近代)이래로 성인(聖人)의 도가 전해지지 아니하여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말류(末流)의 학문만을 힘써 익히어 시구(詩句)를 새기고 문장(文章)이나 잘 다듬어서 자고(自高)하여 이르기를 “나는 이것을 잘하니 이것으로 족하다”라고 하고, 안으로는 제 마음을 속이고 밖으로는 남을 속이어 성인의 도에 이르는 데에도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도는 높고 아름답다. 저 하늘에 오르는 것 같아서 미칠 수가 없다”라고 하니 아! 우리 도가 밝혀지지 않고 행하여지지 않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도에는 풍색(豊嗇)이 없고 사람에게 현우(賢愚)가 없으며 도는 요, 순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유여(幽厲)로 인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쉬고 한 번 밥 먹는 것과 한 번 앉고 한번 눕는 것이라든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사이에도 모두 다 도가 있는 것은 곧 요, 순, 우, 탕의 도는 사람마다 본래부터 고유(固有)하기 때문입니다. 도가 비록 사람마다 마음에 갖추어져 지만 능히 사람이 성(聖)이나 현(賢)이 되게 못하는 것은 한갓 도로서 되는 것이 아니요, 선(善)을 행하는 것은 사람의 능률(能率)에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아! 선비로서 대명(大名)을 누리어 당세(當世)에 드러나고 빛을 후세(後世)에 비출 자는 성의(誠意), 정심(正心)을 경유하여 이를 추구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지극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것은 조화(化)요, 생각하는 것은 신(神)인 것입니다. 천지와 그 덕(德)을 합하고 두 기운(陰陽)과 함께 그 용(用)을 합하는 것이니 이것이 요순우탕의 정일집중(精一執中)한 전도(傳道)의 일통(一統)인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이르기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추구하라”라 하였고
증자(曾子)께서는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핀다”라 하였으니 이는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모두 다 스스로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추구함으로써 극치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자(夫子)의 교훈을 지키고 증자의 말씀을 본떠서 반드시 자자(孜孜)하고, 조조(慥慥)히 하여 일조(一朝)에 활연(豁然)히 관통(貫通)하면 앎이 이르는 곳이 있을 것이요, 행(行)함에 극진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후라야 남의 조정에 서서 남의 나라를 다스릴 만할 것이요, 천하에 그 선(善)을 한가지로 하고 우리 임금을 요순의 임금이 되게 하며 우리 백성을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한다면 만세(萬世)의 종사(宗師)가 될 만한 것입니다.
아! 오직 이와 같이 한 연후라야 나라를 경영하는 비책(祕策)과 용병(用兵)의 지휘(指揮)가 나리(那裏)에서 자재(自在)로우면서 거조(擧措)를 마음대로 할 것이니 힘쓰지 않겠습니까?

강위서(姜渭瑞)에게 답함-소호(蘇湖) 소계(蘇溪)

오존(吾尊)께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한 뒤로부터 다시 서로 알만한 친구가 없더니 뜻밖에 두 분이 같은 날에 왔고 오존(吾尊)께서 개유(開諭)하신 뜻이 또 심히 간측(懇惻) 했습니다. 그러하오나 만약 유익한 일을 용루(庸陋)하고 자천(疵賤)한 구인(寠人)에게서 구하신다면 가히 불심(不審)도 심하다고 이를 것입니다.
묘군(卯君)은 김덕령(金德齡)의 별장(別將)으로 잠시 지시를 받았습니다. (글자 없음) 성상(聖上)이 신하의 총명을 알아보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통사(李統使)가 주사(舟師)을 이끌고 대첩(大捷)을 거두어 적선이 감히 서족으로 향하지 못한다 하오니 마음이 심히 쾌연(快然)합니다. 근자(近者)에 중국 요동(遼東)과 광주(廣州)의 대병(大兵)이 출래(出來)하니 종사(宗社)의 경행(慶幸)이 어떻겠습니까? 별지(別紙)는 삼가 충분히 알았으니 여기서도 나의 미천한 행적을 긍휼히 여기시고 미도(迷道)를 이끌어 주신 성의(盛意)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제(愚弟)는 일찍이 김영공(金令公) 성일(誠一)을 따라 고인(古人)의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케 한 전술에 뜻을 두며 이로써 실천해 가려고 합니다.(缺字)

장(狀). 행장(行狀)


관찰사(觀察使)에게 올림-소계(蘇溪)

왜적 이천여명(二千餘名)이 금 7월 초 (글자 없음) 일에 세 갈래 길로 나누어 들어오므로 군사 이십여 명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접전하여 세 사람이 왜인을 쏘아 맞히니 적세가 잠시 물러났습니다.
노약(老弱)한 군사는 전부를 산으로 올려보내고 다시 정용(精勇)한 군사 삼십여 명을 이끌고 한때 요처(要處)에 은복(隱伏)시키고 궁노(弓弩)를 촌가(村家)의 폐탕(弊盪)한 곳에 많이 설치시켰다가 회환(回還)할 때에 선봉에 선 두 명의 왜적을 쏘아 죽이니 적도(賊徒)가 싣고 가던 것을 중로(中路)에서 다 불태웠습니다. 이를 치고(馳告)합니다.

의민공(義敏公) 행장(行狀)

공(公)의 휘(諱)는 균(均)이요, 자(字)는 여평(汝平)이며 호(號)는 소계(蘇溪)요, 성(姓)은 최씨(崔氏)이다.
그 조선(祖先)은 전주인(全州人)이니 고려(高麗)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시(諡) 문성공(文成公) 휘(諱) 아(阿)가 비조(悲調)이다.
이 분이 휘(諱) 용생(龍生)을 낳으니 문과(文科) 출신 안렴사(按廉使)요, 휘 전우(田雨)를 낳으니 판도정랑(版圖正郎)이었으며, 휘 택(澤)을 낳으니 복창원위전(福昌院衛典)이었고, 휘 사필(斯泌)을 낳으니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문과(文科) 사복시정(司僕寺正)이었으며, 휘 자경(子涇)을 낳으니 문과로 개령현감(開寧縣監)이었는데 증(贈) 판사(判事)였고, 휘 수지(水智)를 낳으니 문과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증(贈) 도승지(都承旨)였는데 문장(文章)으로 세상을 울렸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서울에 갔다가 황제(皇帝)로부터 기안(丌案)을 상(賞)으로 받았다. 휘 이식(以湜)을 낳으니 문과로 군수를 지냈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윤신(潤身)이니 무과(武科)로 첨사(僉使)였고 조(祖)의 휘는 담(潭)인데 유행(儒行)으로서 재랑(齋郞)에 천보(薦補)되고 증 한성우윤(漢城右尹)이었으며, 고(考)의 휘는 운철(云哲)인데 증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비(妣)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참봉 김덕후(金德厚)의 따님이었다.
이보다 앞서 판서공(判書公)이 집터를 구만동(九萬洞) 곤계봉(昆季峯) 아래에 잡아서 개기(開基)를 할 때 마침 걸미승(乞米僧)이 있어 말하기를,
“상량(上樑)할 때 시각(時)을 놓치지 않으면 마땅히 두 기남(奇男)을 얻을 것입니다.” 하므로 그 시각을 물으니
“명일(明日)에 철관(鐵冠)을 쓴 동녀(童女)가 남쪽에서 올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 시각입니다.”라 하였다. 익일(翌日)에 과연 한 동녀가 쇠솥을 이고 왔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공이 중묘(中廟) 32년(서기 1537) 정유(丁酉)에 탄생하니 나면서부터 이질(異質)이 있고 풍의(風儀)가 준정(峻整)하였으며 품성(稟性)이 순후(醇厚)하고 효우(孝友)가 출천(出天)하였다.
형제(兄弟) 세 분이 일실(一室)에 동거하매, 사재(社財)를 쌓지 않고 장획(臧獲)를 나누지 아니하였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로 금서(琴書)를 스스로 즐겼고 항상 자손(子孫)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부귀(富貴)라는 것은 교만과 사치의 근본이 되고, 교만과 사치는 사람을 함정에 빠지게 하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크게는 그 집을 잃게 되고, 적게는 그 몸을 잃게 되니 심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만년(晩年)에 주역(周易)을 즐겨 소장(消長)과 회린(悔吝)의 상(象)에 대한 것을 잠심(潛心)하여 숙고(熟考)하였으며, 그 밖에도 천문(天文), 지리(地理)와 일월(日月)의 도수(度數)와 성력(星曆)의 추보(推步)에 엄관(閹貫) 통효(通曉)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나 도광(韜光) 회채(晦彩)하여, 스스로 나타내지 않더니 용사의 난(龍蛇之亂)을 당함에 미쳐서, 공의 아우 소계공(蘇溪公)이 이르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忠孝)로 세상에 드러났으니 어찌 중인(衆人)들과 같이 조해(鳥駭),서찬(鼠竄)하여 구차스럽게 임수(林藪)의 사이에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의병(義兵)을 불러 모아 적을 토벌하여 신절(臣節)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 하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참으로 나의 뜻이다. 내 비록 서생(書生)이지마는 또한 너와 동사(同事)하여 사생(死生)을 함께 하겠다.”하고 곧 자제(子弟)와 노정(奴丁)을 동원하고 또 향병(鄕兵)을 불러 모으니 순일(旬日)의 사이에 수십백인(數十百人)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적이 구만동구(九萬洞口)에 들어와서 공이 소계공과 함께 정예(精銳)를 이끌고 말에 올라 치돌(馳突)하고 칼을 휘둘러 난작(亂斫)하니 모든 적이 달아나고 일방(一方)이 이에 힘입어 안도(安堵)하게 되었다.
또 적이 나씨(羅氏) 집을 도륙(屠戮)하고 이어 그 집을 점거하므로 공의 형제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달려가서 모두 다 베어 죽이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쫓으니 이로부터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서 산중으로 피란 갔던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의부(依付)하였다.
이때 표질(表姪) 운포(雲圃) 이달(李達)공이 또한 군사를 모아 와서 도우므로 이에 소계공(蘇溪公)과 이공(李公)을 장수로 삼고 고을 모주(謀主)가 되어 주책(籌策)을 찬획(贊畫)하고 궤향(饋餉)을 판급하였다.
소계공(蘇溪公)이 진주(晉州), 고성(固城), 사천(泗川), 창원(昌原)의 모든 군사가 위급하게 된 것을 구원할 때, 공은 군사를 나누어 담티(墻峙) 북쪽에 둔(屯)치고 왕래(往來)하면서 표략(剽掠)하는 적을 물리치고 사로잡아서 성세(聲勢)를 떨쳤다.
대개 이 고개는 두 고을 요충(要衝)의 경계에 걸쳐 있어 길이 험하면서 급하게 막힌 곳이 많았으며 민속(民俗)이 자못 순고(淳古)하여 가히 고수(固守)할 곳이라 생각하고 이에 금상(衾裳)을 찢어 기치(旗幟)를 만들어 크게 산 위에 벌려 놓고 스스로 풍운장(風雲將)이라 이름 지어 거리 위에 크게 써서 달아 놓으며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적의 마음을 현혹(眩惑)시켰다. 그리고 산 아래에 사는 백성을 낮에는 농사에 힘쓰게 하고 밤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고개 위에 모두 다 모아서 한 사람이 각각 四, 五개의 횃불을 들어 좌우(左右)에 나열(羅列)시키고 고조(鼓噪)의 소리로 천지(天地)를 진동(震動)케 하다가 홀연히 불을 꺼 버리어 적적(寂寂)하게 사람이 없는 것같이 하고 아경(俄頃)에 또다시 이같이 하면서 밤마다 횃불을 배로 늘리어 군사가 많은 것을 보이며 장사(壯士) 수십 명을 뽑아서 각각 궁노(弓弩)를 갖게 하여 좌충우돌(左衝右突)하니 적이 크게 의구심(疑懼心)을 내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이 사졸(士卒)을 어루만지기를 가인(家人)처럼 하니 은신(恩信)이 주편(周遍)하였으며 매양 병식(兵食)을 조달할 때 몸소 감시(監視)하고 면면(面面)이 위유(慰諭)하여 이르기를,
“군부(君父)께서 몽진(蒙塵)하셨으니 우리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하고 이어 흘리는 눈물이 연연(漣漣)하니 사졸도 또한 감격하여 울고 팔을 걷고 싸우고자 하였다.
최각호(崔角虎), 최한(崔僩), 정준(鄭俊) 등이 다 공의 군관이 되었더니, 매양 승첩을 얻는 일이 있으면 자기의 공(功)으로 하지 않고 이를 여러 장사에게 돌렸으므로 열복(悅服)하지 않는 자가 없어 즐거이 쓰게 되었다.
소계공(蘇溪公)이 진양(晉陽)으로부터 담티(墻峙)로 돌아와 포치(布置)한 것을 두루 돌아보고 책책(嘖嘖)하게 칭탄(稱歎)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님은 본래 선비이신데 용병(用兵)이 이와 같다”라 하였다.
이때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공의 형제의 성명(聲名)을 듣고 서로 만나 보기를 요청하였으므로 함께 가서 뵈이니 선생이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이어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송암(松巖) 이로(李魯), 모촌(茅村) 이정(李瀞) 등 제공(諸公)과 삽혈(歃血)로 동맹(同盟)하여 적을 쳐서 나라에 보답하기를 맹세하였다.
또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화산(花山) 권응수(權應銖), 생원(生員) 조희익(曺希益), 봉사(奉事) 신해(申海) 제공과 평소에 서로 친하더니 이에 이르러 소리를 같이하여 의병을 일으켜 각각 남강(南江)의 좌우에 웅거하였는데, 제공이 매양 군량이 모자라면, 곧 반드시 공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므로 공이 힘이 닿는 대로 보내었다. 적이 웅천(熊川)의 안민령(安民嶺)을 점거하매, 공이 소계공과 함께 가서 토벌할 때 좌우익(左右翼)의 모든 군사가 적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는데 소계공이 말을 타고 달려가서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적진(敵陣)이 이미 견고하여 투입(投入)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적진에 돌을 던져 스스로 어지럽게 하고 틈을 타서 치돌(馳突)해서 일면(一面)을 뚫음으로써 포위를 풀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소계공이 계책대로 하여 군대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다. 창원, 진해(鎭海)에 주둔한 적이 고성의 적과 서로 내왕(來往)하였으나 공을 두려워하여 낮에는 감히 다니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 서로 통하므로 공이 그 기미를 알고 흰 모래를 길에 깔아 두었더니 과연 사람의 흔적이 모래에 찍히었다. 이를 보고 복병을 요로에 설치하여 참살(斬殺)한 것이 수없이 많으니 적이 감히 다시 통과하지 못하여 사천, 고성, 진해의 세 고을이 여기에 힘입어 생업을 편안히 하였다. 조정(朝庭)에서 공이 장재(將材)가 있음을 알고 특별히 수문장(守門將)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을사년(乙巳年)에 적이 다시 대거(大擧) 입구(入寇)하여 해랑병(海浪兵)이라 자칭(自稱)하고 몽동거함(艨艟巨艦)으로 바다를 덮고서 이르러서 제주대양(濟州大洋)에 들어왔다. 이때 소계공이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가 되고 공이 마침 진소(鎭所)에 도착하였더니 소계공이 묻기를,
“지금 적세(賊勢)가 강성(强盛)하고 우리 군사는 적고 약해서 이와 예봉(銳鋒)을 다투기가 어려우니 계책을 써야 하겠습니까?”라 하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옛날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화공(火攻)의 계책을 써서 적벽(赤壁)에서 대승을 취하였으니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매 바로 화공에 합당하다. 그 제치(制置)하는 방략을 이러 이렇게 하면 오랑캐를 사로잡는 것은 앉아서 꾀할 만하다”라 하였더니 소계공이 그 방략을 써서 적선(賊船)을 일거에 다 불태워 버렸다. 개선하고 돌아오매 여러 장수가 모두 하례하여 이르기를,
“금일의 전첩(戰捷)은 곧 최노야(崔老爺)의 기계(奇計)때문입니다.”라 하니 공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씀하시기를,
“국외인(局外人)인 내 생각이 비록 우연히 적중할 수 있었으나 어찌 공을 논(論)할 수 있겠느냐? 이는 모두 여러 장수들이 풍도(風濤)를 무릅쓰고 죽기로 싸운 공이다.” 라 하매 제장이 모두 탄복(歎服)하였다.
호백(湖伯)이 형제가 승첩을 거둔 것을 포상토록 상계(上啟)하니 임금이 크게 이를 가상히 여겨 공훈을 기록하고 품질(品秩)을 올렸는데 소계공은 원종(原從一等)에 가선(嘉善)으로 승진시켜 순천부사를 배하고 공을 원종삼등(原從三等)으로 통정(通政)에 승진시켰다.
혼조(昏朝)를 당함에 미쳐서는 국정(國政)이 문란(紊亂)하고 이륜(彝倫)이 역패(斁敗)하는 것을 보고 형제분이 벼슬을 버리고 남으로 돌아왔다. 출발에 임하여 한 수의 시를 지어 이르기를,
“가소(可笑)로운 공명(功名) 낡은 신발 같은지고
백두(白頭)에 적은 녹봉 이내 몸에 부끄럽다.
어느 곳에 순채나물 농어회에 가을이 정히 좋다더냐?
작은 배를 저어 오호(五湖)의 물가로 향해 간다.”라 하였다. 곧 향리(鄕里)로 돌아와서 형제가 같은 곳에 살면서 우애(友愛)의 정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해지니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 불렀다. 정미년(丁未年:선조 40년, 서기 1607)에 우로(優老)로 가선동지중추(嘉善同知中樞)를 가자(加資)하였다.
공은 몸소 말을 타지 않고 활을 쏘아 과녁을 뚫지 아니하였으나 기국(器局)이 굉대(宏大)하고 지모(智謀)가 연심(淵深)하여 변화(變化)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꾀를 발(發)하고 생각을 냄에 있어서 동(動)하고 합(合)함이 기이하고 바르니 한마(汗馬)로 공취(攻取)하는 용맹은 비록 소계공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앉아서 운주(運籌)하고 병기를 조달하며, 군량을 보급하여 스스로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을 짓고, 고군약졸(孤軍弱卒)로써 강적(强賊)을 가로막아 마침내 능히 대훈(大勳)을 수립(樹立)하였으니 비록 옛날 맹장지수(猛將智帥)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승첩(勝捷)을 아뢰어 공을 논할 때 겸퇴(謙退)를 숭집(崇執)하여 촌공척로(寸功尺勞)라도 모든 장수에게 사양하니 사람들이 대수장군에게 비교하였다.
광해(光海) 8년(서기 1616년) 병진(丙辰) 구월 십육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시니 향년(享年)이 팔십이었고 묘는 회화면(會華面) 당항(堂項) 자좌(子坐)에 있다.
공의 신주(神籌), 장략(將略), 외충(巍忠)과 수훈(殊勳)으로서 진실로 당세(當世)에 천양(闡揚)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조가(朝家)가 그 훈로(勳勞)에 보답한 것이 삼등(三等)의 녹권(錄券)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고, 아직 증시(贈諡)와 정포(旌褒)의 은전을 입지 못했으니 족히 천고(千古)의 유감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도내(道內)의 사림(士林)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이를 모시고 이름을 도산사(道山祠)라 일러 형제를 병향(並享)하였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진양정씨(晉陽鄭氏)이니, 진사(進士) 정관(鄭寬)의 따님이요, 참봉(參奉) 정석찬(鄭碩贊)의 손(孫)이며, 생원(生員) 정이신(鄭以信)의 증손(曾孫)이다. 네 분의 아들과 두 따님을 두었으니, 아드님은 흥호(興虎), 산호(山虎), 기호(起虎), 진호(振虎)인데 진호는 김천찰방(金泉察訪)을 지냈고, 따님은 서순개(徐舜凱), 봉사(奉事) 이명원(李明愿)에게 출가하였다.
홍호(興虎)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흡(洽)과 찰방 홍(洪)이요, 흡이 한 아들과 두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유립(由砬)이며, 딸은 성제영(成濟永), 이삼석(李三錫)에게 시집갔다. 유립이 한 아들과 두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윤태(允泰)요, 딸은 정천구(鄭天衢), 안일장(安日章)에게 시집갔다. 홍이 두 아들과 세 딸은 두었으니, 아들은 유잡(由磼), 증(贈) 형조참의(刑曹參議) 유갈(由硈)이요, 딸은 이이오(李而梧), 김익겸(金益兼), 이위(李煒)에게 시집갔으며, 유잡이 세 아들과 한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응원(應元), 중태(重泰), 우태(于泰)요, 딸은 이덕유(李德裕)에게 시집갔는데, 열부(烈婦)로 정려(旌閭)되었다. 유갈이 세 아들과 네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응태(應泰), 증참판(贈參判) 원태(元泰), 형태(亨泰)요, 딸은 하진화(河晉華), 하응문(河應文), 곽문식(郭文湜), 이송년(李松年)에게 시집갔다.
진호(振虎)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염(濂), 즙(濈), 오(澳)이요 염이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유반(由磐), 유후(由厚)인데 출계(出系)했고, 셋째는 유구(由久)요, 딸은 정필장(鄭必章), 곽진구(郭震衢), 조시형(趙時衡)에게 시집갔다. 유반이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진첨(震瞻), 증참의(贈參議) 진망(震望)이요, 딸은 조석조(趙碩祖), 이병연(李炳然), 이인보(李仁寶)에게 시집갔다. 유구가 한 아들을 두었으니, 진추(震樞)요, 즙(濈)의 계남(繼男) 유후가 두 아들과 네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진태(震泰), 진두(震斗)요, 딸은 권임형(權任亨), 김하현(金夏賢), 이함(李諴), 강찬제(姜贊齊)에게 시집갔다.
욱이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유적(由磧), 유전(由塡)이요, 딸은 조시한(趙時翰)에게 시집갔다. 유적이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진극(震極), 진준(震峻)이요. 딸은 조절(趙梲)에게 시집갔다. 유전이 두 아들과 네 딸을 두었으니, 아들은 진보(震寶), 진표(震標)요, 딸은 이석진(李錫震). 이중담(李重聃), 조반(趙攀), 주남시(周南始)에게 시집갔다. 그 나머지 자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광릉(廣陵) 이동급(李東汲)이 삼가 짓다.

의숙공(義肅公) 행장(行狀)

최씨(崔氏)는 전주(全州)에서 나왔으니, 그 비조(鼻祖)는 고려(高麗)의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시(諡)는 문성공(文成公)이요. 휘(諱)는 아(阿)이며 문과(文科) 안렴사(按廉使) 휘 용생(龍生)을 나았다.
이로부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휘 자경(自涇)이 있어, 문과로 개령현감(開寧縣監)을 역임하고 증판사(贈判事)였으며, 이 분이 낳은 휘 수지(水智)는 문과에 급제하여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증도승지(贈都承旨)였는데,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 서울에 갔더니, 황제(皇帝)가 기안(丌案)을 상으로 하사(下賜)하였다.
고조(高祖)의 휘는 이식(以湜)이니 문과 군수(郡守)였고 증조(曾祖)의 휘는 윤신(潤身)이니 무과(武科) 첨사(僉使)였으며, 조(祖)의 휘는 담(潭)이니 유행(儒行)으로써 참봉(參奉)에 천보(薦補) 되고, 증(贈) 한성우윤(漢城右尹)이었으며, 고(考)의 휘는 운철(云哲)이니 증(贈) 형조판서(刑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였고, 비(妣)는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니, 참봉(參奉) 김덕후(金德厚)의 따님이다.
명묘(明廟) 14년(서기 1557) 기미(己未) 2월 10일에 공(公)을 구만동(九萬洞) 이제(里第)에서 낳으니 공의 휘(諱)는 강(堈)이요 字는 여견(汝見)이며 호(號)는 蘇溪이다.
풍의(風儀)가 준상(峻爽)하며 기상(氣象)이 호매(豪邁)하고 효용(驍勇)이 絶倫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다 遠大한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효우(孝友)가 천성(天性)에서 나와 두 형을 어버이와 같이 섬겨 무릇 대소사(大小事)에 있어 반드시 품(稟)하고서 행하였고 이불을 연(聯)해 덮고 베개를 같이하며 화락(和樂)하고 또 사람들을 사랑하니 남이 간언(間言)하지 못하였다.
그는 사람을 대접하고 사물을 접할 때 표박(表襮)을 하지 아니하였고 휴진(畦畛)을 베풀지 아니하였으며 한결같이 화유(和柔)로써 절도를 삼으니 현우귀천(賢愚貴賤)이 열복(悅服)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고 또한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역경(易經)을 백씨(伯氏) 소호공(蘇湖公)에게서 배워서 온오(蘊奧)한 데까지 정투(精透)하였고 사장(詞章)에도 정교하여 여러 번 해액(解額)에 이겼으니 문득 성위(省圍)에서 굴(屈)하였다. 한 상자(相者)가 이르기를, 「연함(燕頷)에 호두(虎頭)이매 식육(食肉)으로 봉후(封侯)가 될 상이다」라 하니, 이에 붓을 던지고(投筆)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한바탕 크게 웃고 붓 던지고 일어서니 온 천지(天地)에 한 활시울이 가볍구나(大笑投筆起天地一弦輕)” 라 하니 그 기상이 과연 이와 같았다. 만력(萬曆) 을유(乙酉: 선조 18년, 서기 1585)의 무과 회시(會試)에서 주역(周易)으로 배강(背講)하고 문시관(文試官)는 반문(盤問)하는 글 뜻에 대하여 응대(應對)하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다. 시관(試官)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너의 문학(文學)이 이와 같은데 무예(武藝)로써 발신(發身)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기괴한 일이다.” 하니 무시관(武試官)이 이르기를,
“그 기우(器宇)를 보니 깃발을 부여잡고 절부(節符)를 가지고서 삼군(三軍)의 장수가 될 만하다.” 하였다. 여기에서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사로(仕路)가 치지(差池)되어 급급(汲汲)히 진취(進取)할 뜻이 없더니 용사의 변(龍蛇之變)에 도이(島夷)가 육양(陸梁)하니 공이 백씨공(伯氏公)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집은 대대로 충효(忠孝)를 전(傳)하여 왔는데, 이 판탕(板蕩)하는 때를 당하여 임수(林藪)의 사이에 찬복(竄伏)하여 구차스럽게 투활(偸活)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마땅히 의려(義旅)를 일으켜 신절(臣節)을 다해야 합니다.” 라 하니 백씨공이 크게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고 곧 가정(家丁)을 다 동원하고 향병(鄕兵)을 초집(招集)할 때 공이 운포(雲圃) 이달(李達) 공과 함께 장수가 되고 백씨공을 추대하여 모주(謀主)로 삼아 기계(器械)를 정돈하며 부오(部伍)를 단속하니 백씨공께서 말씀하기를,
“초야(草野)에서 창의(倡義)하는 자는 마땅히 왕인(王人)에게 고(告)하여 그의 절제(節制)를 받아서 명분을 바로 하고 의리를 순서롭게 해야 한다.” 하니, 공이 군관(軍官) 박연홍(朴連洪)과 함께 주쉬(主倅)를 만나 보고 군기(軍器)를 빌어서 돌아왔다. 이때 적이 이미 구만동구(九萬洞口)에 충척(充斥)하여 크게 포략(暴掠)을 함부로 하고 있으므로 공이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위이(逶陁)로 재를 넘어가는데 갑자기 바위 큼에서 어린아이가 부르짖어 말하기를,
“아저씨! 나를 살려 주세요” 하므로 돌아보니 곧 종질(從姪) 정호(廷虎)였다. 즉시 겨드랑이에 끼고 말에 오르니 적이 요구철(腰鉤鐵)을 던져 족부(足部)에 작은 상처를 입혔다. 이에 공이 적의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달고 돌아와서 수십 명의 정예(精銳)를 이끌고 말에 올라 치돌(馳突)하면서 칼을 휘둘러 난작(亂斫)하니 시냇물이 다 붉었다. 이로써 적이 바람에 쓰러진 듯이 무너져 달아나서 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며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서 피난했던 백성들이 다투어 와서 의부(依付)하고 일방(一方)이 이에 힘입어 안도(安堵)하게 되었다.
대가(大駕)가 서천(西遷)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형제(兄弟)가 재배(再拜)하며 통곡(痛哭)하니 사졸(士卒)들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 적이 함양(咸陽), 단성(丹城), 고성(固城), 의령(宜寧), 진해(鎭海), 사천(泗川), 창원(昌原) 등지에 미만(彌滿)하여 왕래(往來)하면서 포략(暴掠)하니 사경(四境)이 어육(魚肉)이 되었다.
백씨공이 군사를 나누어 담티(墻峙) 고개에 진을 치고 방략(方略)을 지휘하며 궤향(饋餉)을 판급(辦給)하였고 공을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합세(合勢)하여 전전(轉戰)하면서 유격(遊擊)하니 학봉(鶴峯) 김선생(金先生)이 초유사(招諭使)로서 함양(咸陽)에 도착하여 공의 형제의 성명(聲名)을 듣고 서로 만나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이어서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송암(松巖) 이로(李魯), 모촌(茅村) 이정(李瀞) 등 제공(諸公)과 삽혈(歃血)로 동맹하여 적을 쳐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다. 적중(賊衆)이 고성으로부터 사천에 둔을 치고서 진주를 침범할 뜻을 보이니 초유사가 장사(壯士) 수십 인을 뽑아서 강을 건너 치격(馳擊)할 때, 공이 또한 한계(韓誡), 정 승훈(鄭承勳) 등과 합세하여 혹은 유인하고 혹은 복병을 설치하여 공격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궤주(潰走)하였다.
창원에 웅거한 적이 진양(晉陽)의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 진해의 적과 상응(相應)하여 고성을 거쳐서 진양으로 입구(入寇)해 오니 초유사가 위급함을 듣고 성치(星馳)하여 여러 고을의 군사를 발(發)하여 달려갈 때 공이 이달(李達)과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과 나누어 좌우익(左右翼)이 되어 협격(挾擊)하니 적이 밤을 타서 도망하였다.
8월에 적이 다시 진해, 고성을 함락시키고 사천에 주둔하여 장차 진주로 향하려고 하매 공이 김시민과 함께 가만히 대둔령(大屯嶺)을 넘어서 고조(鼓噪)하면서 성을 공박하니 적이 외축(外軸)되어 감히 나오지 못하므로 공이 요로(要路)에 은복(隱伏)하여 적이 후퇴하기를 기다렸더니 적이 과연 도주하였다. 이에 곧 분신(奮身) 추격하여 진해의 적장(賊將) 평소태(平小太)를 죽이어 드디어 삼성(三城)을 회복하였다.
10월에 적이 진양을 열 겹으로 포위하니 그 군세가 수십 리에 만연(漫然)하였다. 이에 공이 이달(李達), 정유경(鄭惟敬),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과 함께 급보를 듣고 달려가 구원하여 살상(殺傷)이 심히 많았으며 밤에 망진령(網陣嶺)에 올라 군중(軍中)에 명령하여 각각 4, 5개의 횃불을 들게 하고 혹 앞으로 나아갔다가 혹은 뒤로 물러나기도 하면서 북을 치고 납함(吶喊)하니 그 메아리가 산곡(山谷)을 진동시켰다. 성중(城中)의 장사들이 이를 듣고 기뻐서 뛰면서 말하기를,
“이는 필시 최의장(崔義將)께서 내원(來援)하는 것이다.”라 하였고, 적이 경해(驚駭)하여 그들의 둔막(屯幕)을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진양성의 첩서(捷書)가 이르매 학봉 김선생이 크게 기뻐하여 여러 장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성이 실수(失守)되면 성중의 인명(人命)이 모두 다 어육(魚肉)이 될 뿐만 아니라 일도(一道)의 남은 성이 보존(保存)될 수 있는 형세가 못될 것이다.”라 하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지켜야만 될 줄을 알게 되었다. 휘하(麾下)의 군교(軍校)들이 들어와서 하례하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여러 장수의 힘이니 내가 무엇을 하였겠는가?” 라 하였다.
계사년(癸巳年: 선조 26년, 서기 1593) 6월에 수길(豐臣秀吉)이 평행장(平行長)이 평양(平壤)에서 패(敗)한 것을 듣고 군사 삼십만(三十萬)을 대발(大發)하여 동래(東萊)로부터 바로 진주로 향하니 기세가 풍우(風雨)와 같았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권율(權慄), 이빈(李薲), 선거이(宣居怡) 제공이 능히 救하지 못하고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유정(劉綎) 등에게 명령하여 가서 구원토록 하였으나, 형세가 당적하지 못하여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공이 이달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으나 성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되돌아서 두골평(頭骨坪)에 이르니 적이 뒤따라서 포위하므로 공이 만중(萬衆)의 가운데서 충돌하여 풀을 베고 삼대를 베듯이 적을 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고 썰물이 물러가듯이 도망하여 피난민 삼백여 명이 온전함을 얻는 데에 크게 힘입었다. 이때 한계(韓誡)가 산에 올라가 적을 공격하는 상황을 바라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천고(千古)의 사책(史冊)에 이와 같은 용장(勇將)이 있었던가?”라 하였다. 9월에 적이 창원에서 나와서 함안에 진을 치고 또 김해로부터 웅천의 안민령에 둔취(屯聚)하였는데, 이달과 안신갑이 좌우익이 되었다가 적에게 포위를 당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하게 되었으므로 공이 백씨의 계책을 써서 돌을 적진에 던져서 혼란을 일으킨 뒤에 충돌하여 난작(亂斫)하니, 향하는 대로 모두 다 쓰러졌다. 드디어 일면(一面)을 열고 제군(諸軍)의 장사들이 탈출하게 되니 나와서 서로 치하하여 이르기를.
“오늘의 살아남은 것은 최공의 힘이다.”라 하였다. 이밖에 전승(戰勝)으로 취한 공로와 적개(敵愾)로 한어(扞禦)한 공은 가히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조정에서 그 공훈을 가상히 여기어 도총경력(都摠經歷)을 거쳐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를 특별히 제수하였다. 을사년(乙巳年: 선조 38년, 서기 1605) 3월에 적이 다시 대거(大擧)하여 입구(入寇)해와서는 해랑병(海浪兵)이라고 자칭하고 몽동거함(艨艟巨艦)이 바다를 뒤덮어 이르러서 제주(濟州)의 대양(大洋)으로 들어오니 열진(列鎭)이 풍미(風靡)하여 감히 막아내지 못하였다. 이때 공이 백씨의 방략을 사용하여 마른 가시나무와 마른 갈대를 취하여 수십 척의 배에 싣고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그 위에 벌려 세워 놓고 오채(五彩)의 용문(龍文)을 포장(布帳)에 그려 둘러싸서 덮고 강노(强弩)의 예졸(銳卒)을 포구의 심수(深邃)한 곳에 매복(埋伏)시켜 놓고 적진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이르기를,
“명일에 바다 가운데로 출전(出戰)할 것이다.”라 하고, 또 간사(間使)를 내어 망명(亡命)한 자와 같이 꾸며서 적진에 가서 조작하여 이르기를,
“진장(鎭將)이 수전(水戰)을 익히지 못하였으면서 공연히 큰소리만 하나 실제로는 출전할 뜻이 없고 바야흐로 성을 버리고 도망하려고 한다.”라 하여, 음사(陰事)로써 고(告)하여 적의 마음을 늦추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물에 능숙한 자를 모아서 중한 상을 주고서는 각각 요구철색(腰鉤鐵索)을 가지고 요해처(要害處)에 숨어 엎드려 있게 하고 약속하기를, 「명일에 적을 포구로 유인해서 물 밑에 잠입(潛入)해 있다가 요구철로써 적선(賊船)을 연결해 묶어서 회선(回船)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아침이 되어서 여러 장수가 누선(樓船)을 에워싸 바로 큰 바다로 나가니 적이 바라보고는 「도망하여 달아난다」고 이르고 곧 정예를 이끌고 바로 포구를 향해서 추격하니 여러 장수들이 겁에 질려 감히 앞장서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난(亂)에 임하여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부끄러워할 바이다.” 하고 타수(唾手)하여 홀로 앞장서서 갈대를 실은 배로써 먼저 가게 하여 장차 응전할 듯이 하고, 또 수척의 배를 놓아서 혹진혹퇴(或進或退)하면서 변태(變態)를 무상(無常)하게 하며 오채(五彩)의 용문(龍文)을 황홀하게 비추었다. 상거(相去)하기 이리(二里)정도에서 배를 멈추고 먼저 격문을 보내어 강화(講和)로 싸울 뜻이 없는 것을 보이고서 이어 군중에 명령하여 안정(安靜)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오직 북소리 피리 소리만이 은은(隱隱)히 배 위에 들리게 하니, 적이 이를 바라보고 단예(端倪)를 헤아리지 못하여 두류(逗遛)하면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양구(良久)에 징(錚)을 올리고 배를 돌려 거짓 패한 것처럼 물러가니 적이 배를 다 몰아 쫓았다. 이때 매복한 곳에 이르렀을 즈음에서 공이 기를 휘둘러 크게 부르짖으니 복병이 그를 엄습하고, 제군이 그 앞을 범하매 적중(賊衆)이 바야흐로 분황(奔遑)하여 배를 되돌리려 하나 요구철에 걸린 바가 되어 벗어날 수가 없고 한갓 서로 요란(擾亂)만 피웠다. 이에 갈대를 실은 배로써 불을 놓아 핍박하니 불꽃이 바람에 뒤고 연기가 하늘에 치솟아 아경(俄頃)에 적선이 다 불타서 죽은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아군(我軍)은 한 사람의 피상자(被傷者)도 없었다. 승첩의 글이 조정에 들리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특별히 포상(褒賞)을 더해서 공 일등(一等)을 기록하고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승배(陞拜)하니 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나의 입공(立功)은 백공의 지휘하는 방략이 아닌 것이 없는데, 내 홀로 은명(恩命)을 입게 되니 마음이 매우 괴롭다.” 라 하였다. 관직에 임함에 미쳐서는 교화의 도리가 엄명(嚴明)하여 옥송(獄訟)이 맑고 공평하게 하였으며 여러 가지 관봉(官俸)과 포민(浦民)의 물선(物膳)을 한결같이 모두 크게 감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비(碑)를 세워 덕을 기리었다.
병오년(丙午年: 선조 39년, 서기 1606) 여름에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승진되어 순천으로부터 갈려서 돌아갈 때 배리(陪吏)들이 마교(馬轎)와 그림 잔 한 쌍을 받기를 청했으나 모두 다 물리쳤고 좌수사에서 갈렸을 때 영속(營屬)들이 몰래 포백(布帛)을 조금 부쳤으나 중로(中路)에서 알고서 이를 되돌려 보내었다. 집에 돌아오던 날에 복피(襆被)가 소연(蕭然)하여 한 빈한한 선비와 같으니 도로(道路)에서 보는 자들이 자차(咨嗟)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부총관(副摠管)에 배명(拜命)되었을 때에 입는 장복(章服)을 항상 남에게서 빌리니 도총관(都摠管) 약봉(藥峯) 서공(徐公) 성(渻)이 그 청개(淸介)에 감복하여 선묘(宣廟)께 아룄더니 크게 가탄(嘉嘆)을 더하시어 특별히 비단 한 단(段)을 하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제준(祭遵)에게 기의(奇衣)가 없던 것으로써 비교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비국(備局)이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추천하여 수망(首望)에 올랐는데, 김상궁(金尙宮)이 사람을 시켜서 밤에 와서 고(告)하기를,
“바야흐로 낙점(落點)하려 하는데 아직 은(銀)을 바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였으나 공이 정색(正色)하고 이를 거절하니 광해군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내쳐서 교동별장(喬桐別將)을 삼고 임해군(臨海君)을 죽이라고 명령하므로 공이 그 무죄함을 불쌍히 여기어 끝까지 잘 보호하였다. 여기에서 뭇 소인배(小人輩)들이 질투하고 모함하여 마침내 국문(鞫問)을 받기까지에 이르렀는데 공이 의리로 항거하여 굴복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내가 비록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무고(無辜)한 왕자(王子)를 차마 해칠 수가 없다.”라 하니 광해군이 의롭게 여겨 이를 석방하고 곧 충청수사(忠淸水使)를 배(拜)하였다.
공은 그 정치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위연(喟然)히 탄식하여 이르기를,
“나는 바닷가의 한 무부(武夫)로서 불행히도 난(亂)을 만나 우연히 촌공(寸功)을 세우고 외람되게도 국은(國恩)을 입어 지나치게 재위(宰位)에까지 올랐으니 몸이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 여기에서 내가 그만두는 것이 옳겠다.” 하고 형제분이 손을 잡고 함께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뒤에 또 포도대장(捕盜大將)으로 소명(召命)하였으나 병을 칭탁하고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광해 六년(서기 1614년) 갑인(甲寅) 2월 16일에 집에서 고종(考終) 하시니 향년(享年) 56세였다. 부음(訃音)을 들은 광해군이 통석(痛惜)하기를 마지아니하여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우부(優賻)로 제사를 올렸다. 순천의 해부(海夫) 수십 명이 듣고 곧 달려와서 곡(哭)하였으니 그 은택(恩澤)이 사람의 가슴 깊이 들어간 것을 알 수가 있다. 도내(道內)의 사림(士林)들이 사우(祠宇)를 오도산(吾道山) 아래에 세워 소호공과 함께 병향(並享)하였고, 묘는 구만 묘동(廟洞)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세운(南世雲)의 따님이요 묘는 쌍조(雙兆)로 하였다.
한 분의 아들과 한 분의 딸이 있었으니 아드님은 명호(鳴虎)인데,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였고, 따님은 강진선(姜晉善)에게 시집갔다.
명호에게 아들 낙(洛)이 있었는데, 평구찰방(平丘察訪)이었고, 낙이 4남 3녀를 두었으니 첫째는 유석(由碩)이요. 둘째는 유방(由磅)인데,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셋째는 유박(由礡)이요. 넷째는 유질(由礩)이었다. 따님으로 첫째는 노한주(盧漢鑄)에게, 둘째는 선전관(宣傳官) 김만겸(金萬兼)에게, 셋째는 노순필(盧舜弼)에게 각각 시집갔다.
유석이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드님은 진태(震泰)요, 따님은 정달겸(鄭達謙), 박태림(朴泰臨) 에게 시집갔다.
유박이 3남 2녀를 두었으니, 첫째는 진형(震衡)이요, 둘째는 진숭(震嵩)이며, 셋째는 진화(震華)이다. 그리고 따님은 곽문익(郭文瀷), 윤대명(尹大鳴)에게 시집갔다. 유박이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드님은 진종(震宗)이요, 따님은 노성필(盧成弼)에게 시집가서 열부(烈婦)로 정려(旌閭)되었으며, 유질에게 한 아드님 진한(震翰)이 있었다.
그밖에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광릉(廣陵) 이동급(李東汲)이 삼가 쓰다.
병자년(丙子年: 숙종 22년, 서기 1695년)에 당하여 임진(壬辰) 창의(倡義)의 공으로 소호공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추증하였고 소계공에게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훈련원사(訓練院事)를 추증하였으니 실로 광세(曠世)의 은전(恩典)이다.
행장(行狀)이 신미년(辛未年:숙종 17년, 서기 1691)에 이루어진 것이다. 다만 행적에 나타난 이력(履歷)만을 근거로 한 것이요. 이증(貤贈)한 사실에는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 장후(狀後)에 부쳐서 조가(朝家)에서 포록(褒錄)한 뜻을 보이려 한다.
계미(癸未: 숙종 29년, 서기 1703년) 4월 상순(上旬)에 유심춘(柳尋春)이 기록하다.

묘갈명(墓碣銘)


의민공(義敏公) 묘갈명(墓碣銘) 병서(並書)

공(公)의 휘(諱)는 균(均), 자(字)는 여평(汝平)이며, 호(號)는 소계(蘇溪)요, 성(姓)은 최씨(崔氏)니, 전주(全州)에서 계출(系出)되었다.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예(後裔)이니, 이로부터 사세(四世)를 지나도록 관면(冠冕)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또 개령현감(開寧縣監)을 역임하고 판사(判事)로 추증된 자경(子涇),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된 수지(水智), 군수(郡守) 이식(以湜)에 이르니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의 휘는 윤신(潤身)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사(僉使)를 지냈고, 조(祖)의 휘는 담(潭)이니, 유행(儒行)으로 참봉(參奉)에 천보(薦補)되었으며, 고(考)의 휘는 운철(云哲)이니, 증 형조판서(刑曹判書)였고, 비(妣)는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니 참봉 김덕후(金德厚)의 따님이다.
중묘(中廟) 정유(丁酉: 中宗 32년, 서기 1537년)에 탄생하였으니, 특이한 바탕이 있었다.
성품이 준정(峻整) 순후(醇厚)하고 효우(孝友)가 출천(出天)하여 형제(兄弟) 세 분이 한 집에 같이 살면서 재물을 한가지로 하니 혹 석저(析箸)하기를 권하면 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가히 산업(産業)으로써 담락(湛樂)을 바꾸겠는가?”라 하고, 항상 자제(子弟)들을 경계하기를 교만과 사치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늦게 역경(易經) 읽기를 좋아하여 잠심(潛心)하고 묵묵히 탐구하여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를 널리 통달하였다.
용사(龍蛇)의 난을 당하여서 아우 소계공(蘇溪公)과 함께 의려(義旅)를 불러일으키니 순일(旬日)의 사이에 무리가 수십 백인(數十百人)에 이르렀다.
이때 적(賊)이 구만동구(九萬洞口)에 들어왔으므로 공이 소계공이 정예(精銳)를 이끌고 말을 달려 분격(奮擊)하게 하였더니 적이 분궤(奔潰)하고 일방(一方)이 이에 힘입어 안도(安堵)하게 되었다.
이웃 동네에 나씨(羅氏)라는 사람이 있더니 합족(闔族)이 적에게 죽고 적이 그 집에 들어가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공의 형제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공격하여 쫓아 보내고 그 흩어지고 숨어있던 노정(奴丁)들을 불러 모아서 시신(屍身)을 거두어 장사지내게 하니 노비들이 모두 감복(感服)하여 자원하여 따랐으며 군성(軍聲)이 더욱 떨쳐서 산중(山中)으로 피난갔던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돌아와 부치었다.
여기에서 소계공과 표종질(表從姪) 이달(李達)을 장수로 삼고 공이 모주(謀主)가 되어 주책(籌策)을 찬획(贊畫)하고 궤향(饋餉)을 판급(辦給)하였다.
마침 소계공이 진주 고성 사천 창원 등지의 위급한 것을 달려가 구하게 되었는데 공이 담티(墻峙)의 북쪽에 군사를 나누어 진을 쳐 깃발을 많이 벌려 놓고 스스로 풍운장(風雲將)이라 이름 지어 크게 길거리 위에 써서 걸어 두고서 현혹(眩惑)시키어 이를 공액(控扼)하였으며 산하(山下)에 사는 백성들이 낮에는 농사에 힘쓰고 밤에는 모두 고개 위에 모이게 하여 각각 4, 5개의 햇불을 들고 좌우(左右)에 나열(羅列)시키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갑자기 불을 끄고 적적(寂寂)하게 하기를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하며 얼마 후에 또다시 이와 같이하여 밤마다 그 횃불을 배(倍)로 늘려 병력이 매우 많은 것처럼 보이고 장사(壯士) 수십 명을 뽑아 궁노(弓弩)를 가지고 산골짜기를 출몰하면서 치돌(馳突)케 하니 적이 크게 의구심(疑懼心)을 내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선생(金先生) 공의 형제의 명성을 듣고 불러 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그 자리에서 창의(倡義)한 제공(諸公)과 삽혈(歃血)로 함께 맹세하여 각각 강(江)의 좌우에 웅거해있을 때에 제공이 모자라는 군량(軍糧)에 대해서는 공의 도움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적이 웅천(熊川)의 안민령(安民嶺)에 웅거했을 때에 공이 소계공과 함께 토벌하려 하는데 좌우익(左右翼)의 제군(諸軍)이 그들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 때에 공이 어지럽게 투석(投石)을 하도록 하여 일면(一面)을 무너뜨리고 치돌(馳突)하여 구출했다. 또 창원의 적과 고성의 적이 공을 두려워하여 몰래 서로 왕래하므로 모래를 길바닥에 깔아 그들의 발자취를 확인하고 복병을 설치하여 참살(斬殺)한 것이 수없이 많았다. 조정이 이를 듣고 매우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수문장(守門將)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 뒤 을사년(乙巳年: 선조 38년, 서기 1606년)에 적이 대거(大擧) 입구(入寇)하여 스스로 해랑병(海浪兵)이라 일컫고 주함(舟艦)이 바다를 덮어 몰려오니 열진(列鎭)이 바람에 쓰러지는 것 같았다. 이때 소계공이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가 되었더니 공이 마침 진소(鎭所)에 도착하여 계책을 세워 이르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은데다가 그 칼날이 날카로우니 병력(兵力)으로서는 항거하지 못할 것이다. 그 형세(形勢)를 살펴보니 바로 화공(火攻)에 합당하겠다. 그 제치(制置)하는 방략(方略)을 이러 이렇게 하면 적을 사로잡을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 하니 소계공이 그 계책과 같이하여 적선(賊船)을 다 불태웠다. 호백(湖伯)이 포문(褒聞)하니 임금이 공훈을 기록하고 관질을 더하도록 명령하였다. 공은 평소에 환정(宦情)이 없더니 혼조(昏朝)를 당하여 이륜(彛倫)이 역패(斁敗)해짐을 보고 형제가 관(冠)을 벗어서 걸어 놓고 남쪽으로 돌아올 때 출발에 즈음하여 한 수의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가소(可笑)롭구나, 공명(功名)이란 낡은 신발 같은 것을.
백두(白頭)에 미록(微祿) 이 몸에 부끄럽네.
어느 곳에 순노(蓴鱸)가 가을철에 좋을 것인가?
편주(片舟)로 노를 저어 오호빈(五湖濱)으로 향하노라.
(可笑功名等弊履 白頭微祿愧斯身
何處蓴鱸秋正好 片舟擬向五湖濱)” 라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형제가 한 곳에 거처하여 우애(友愛)의 정이 늙어갈수록 더욱 두터우니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 일렀다고 한다.
광해 8년 병진(丙辰: 서기 1616년) 9월 16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에 80이었다. 묘는 회화면(回華面) 당항산(堂項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다.
공은 기국(器局)이 굉대(宏大)하고 지략(智略)이 연심(淵深)하여 임기제승(臨機制勝)에 있어서는 변화(變化)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한마(汗馬) 건기(搴旗)의 공은 비록 내제(乃弟)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앉아서 기주(奇籌)를 운용(運用)()하여 스스로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을 만들고 고군약졸(孤軍弱卒)로써 경적(勁賊)올 한어(扞禦)하여 마침내 능히 대훈(大勳)을 수립(樹立)하였으니. 비록 옛날 말을 타지 않고 과녁을 뚫은 자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였겠는가?
그 승첩을 아뢰어 공을 논함에 미쳐서는 모두 여러 장수에게 사양하니 사람들이 이를 대수장군(大樹將軍)에 비교하였다. 그 겸퇴(謙退)를 숭집(崇執)하는 것을 더욱 숭상할 만한 것이지마는 돌아보건대 조정에서는 수보(酬報)한 소이(所以)가 삼등(三等)의 녹권(錄券)에 지니지 않았으니 어찌 천고(千古)에 지사(志士)들의 유감된 일이 아니겠는가?
부인(夫人)은 진양정씨(晉陽鄭氏)이니, 진사(進士) 정관(鄭寬)의 따님이다. 4남 2녀가 있었으니 아드님은 흥호(興虎), 산호(山號), 기호(起虎), 진호(振虎)인데 진호는 김천찰방(金泉察訪)이었고, 따님은 사인(士人) 서순개(徐舜凱)와 봉사(奉事) 이명원(李明愿)에게 시집갔다.
흥호의 두 아들은 흡(洽)과 찰방 홍(洪)이요, 산호와 기호는 모두 무후(無後)하였으며, 진호의 세 아들은 염(濂), 즙(濈), 오(澳)이다.
흡의 아들은 유립(由砬)이요, 홍의 두 아들은 유잡(由磼), 증(贈) 참의(參議) 유할(由硈)이며, 염의 세 아들은 유반(由盤), 유후(由厚), 유구(由久)인데 유후는 출계(出系)하였고, 즙의 사남(嗣男)은 유후이며, 오의 두 아들은 유적(由磧), 유전(由塡)이요.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어느 날에 공의 8세손(八世孫) 상우(祥羽)가 이만각(李晩覺) 동급(同汲)이 찬(撰)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보이면서 명(銘)을 구(求)하여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는 이미 도산사(道山祠)에 배향되었으나 오직 이 묘도(墓道)에 현각(顯刻)이 없으므로 감히 청하는 것입니다.”라 하므로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위와 같이 서차(敍次)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 한다.
장하도다. 소호공(蘇湖公)이시여, 특이한 바탕은 천부(天賦)이었도다.
역경(易經)의 이상(理象)을 통달했고, 윤상(倫常)은 효우(孝友)에서 돈독했네.
국난(國難)에 창의(倡義)하매 도검(韜鈐)이 가슴에 가득했도다.
세작을 쓰는 일은 장량(張良)과 같았고, 활쏘기에 소홀한 건 두예(杜預)와 같았도다.
궤향(饋餉)을 앉아서 분별했고, 방략(方略)을 넉넉히 행했도다.
적(賊)을 헤아려서 승리를 거두었고, 포위를 풀고 적을 내쫓았도다.
신주(神籌)가 있는 곳에 기효(奇效)가 당장에 나타났네.
해함(海艦)을 화공(火攻)하니, 저에게는 유추(遺醜)마저 없었도다. (수장의 뜻)
공(公)을 미루어서 남에게 물려주고 계략도 내 것으로 아니 했네.
맹지반(孟之反)이 후퇴할 때 맨 뒤에 선 것과 풍병(馮屛)의 대수(大樹)로다.
조정이 공을 기록함에, 겨우 통정(通政)이었네.
혼조(昏朝)에 이르러서 이륜(彛倫)이 무너졌네.
관(冠)을 걸어 두고 먼 곳으로 돌아오니, 아득한 저 운수(雲岫)에서 담락(湛樂)으로 흰 머리 되시었네.
장수의 지략(智略), 유자(儒者)의 덕행(德行), 공께서는 모두 다 갖추셨네.
많은 선비, 경모(敬慕)하여 조두(俎豆)를 모셨도다.
운손(雲孫)이 정성을 기울여서 농비(壟碑) 여기 세웠도다.
공적을 모아 시로 나타내니 천추(千秋)에 빛나리라.
통훈대부(通訓大夫) 전(前)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 진양(晉陽) 정종노(鄭宗魯)가 삼가 찬한다.

의숙공(義肅公) 묘갈명(墓碣銘) 병서(竝序)

공(公)의 휘(諱)는 강(堈)이요, 자(字)는 여견(汝堅)이며, 호(號)는 소계(蘇溪)요,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비조(鼻祖)는 아(阿)이니, 고려(高麗)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시(諡)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이로부터 규조(珪組)가 천혁(燀爀)하다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현감(縣監)으로서 증(贈) 도승지(都承旨) 수지(水智)가 계셨는데, 문장(文章)으로서 세상에 뛰어났고, 이 분이 낳은 군수(郡守) 휘 이식(以湜)은 즉 공의 고조(高祖)이었으며, 증조(曾祖)의 휘는 윤신(潤身)인데, 첨사(僉使)였고, 조(祖)의 휘는 담(潭)인데, 유행(儒行)으로써 참봉(參奉)에 천보(薦補)되었다가 증(贈) 한성우윤(漢城右尹)이었으며, 고(考)의 휘는 운철(云哲), 증(贈) 형조판서(刑曹判書)였고, 비(妣)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서 참봉(參奉) 김덕후(金德厚)의 따님이다.
명묘(明廟) 기미년(己未年:명종 14년, 서기 1559년)에 공을 낳으니 용모가 준상(峻爽)하고 마음씨가 홍의(弘毅)하며, 기상(氣象)이 호매(豪邁)하고 효용(驍勇)이 절륜(絶倫)하였으니, 사람들이 원대(遠大)한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을유년(乙酉年:선조 18년, 서기 1585년)에 무과(武科)에 올랐더니 용사(龍蛇)의 난(亂)을 당하여서 백씨(伯氏) 소호공(蘇湖公)과 의려(義旅)를 창기(倡起)하여 백씨를 추대하여 모주(謀主)로 삼고 공은 스스로 대장(大將)이 되었다. 적이 이미 동구(洞口)에 충척(充斥)하였는데 공이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정예(精銳)를 이끌고 적의 속을 충탕(衝蕩)하여 밤새도록 감전(酣戰)해서 다 섬멸(殲滅)하니 모든 적이 바람에 쓰러지듯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또 나씨(羅氏) 집을 침범해서 해친 적을 목베니 이로부터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서 피란 갔던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의지하였다.
학봉(鶴峯) 김선생(金先生)이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함양(咸陽)에 도착하여 공의 형제(兄弟)의 명성을 듣고 초청하여 만나 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겼으며, 이어서 창의(倡義)한 제공(諸公)과 삽혈(歃血)하여 동맹(同盟)하였다.
때에 적이 장차 진주(晉州)를 침범하려 하므로 공이 김시민(金時敏) 등과 함께 합세하여 공격하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또 진양(晉陽)에 입구(入寇)하려 하므로 이달(李達),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과 군사를 나누어 좌우익(左右翼)이 되어 공격하여 물리치고 또 김시민으로 과 함께 가만히 대둔령(大芚嶺)을 넘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성(城)을 겁박하고 또 要路에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그들이 달아나기를 기다려 추격하여 적의 장수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고 드디어 진주 고성 사천의 세 성을 수복하였다. 적이 또 진양을 열 겹으로 포위하므로 공이 이달(李達), 정유경(鄭維敬), 조응도(趙凝道)와 함께 달려가 구원하니 殺傷이 심히 많았다.
밤에는 망진령(網陣嶺)에 올라가 군중(軍中)이 각각 네 다섯개의 횃불을 들게 하고 북을 쳐서 산골짜기를 진동케 하니 적이 경해(驚駭)하여 둔막(屯幕)을 불태우고 도망하였다.
첩서(捷書)가 이르매 김선생이 크게 기뻐하여 여러 장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성이 보전되면, 일로(一路)의 남은 성도 모두가 장차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 수길(秀吉)이 다시 삼십만병(三十萬兵)을 발(發)하여 진양을 함락시킬 때에, 공이 이달(李達)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구원하였는데 두골평(頭骨坪)에 이르니 적이 포위하므로 공이 말을 달려 충돌하여 풀을 베듯이 쓰러뜨렸다. 적이 바람처럼 무너지고 썰물처럼 물러났으며 피란했던 사민(士民) 삼백여 인이 이에 힘입어서 안전하게 되었다. 적이 김해(金海)로부터 웅천(熊川)의 안민령에 둔거했을 때 이달(李達), 안신갑(安信甲)이 공의 좌우익이 되었다가 그들에게 포위되었는데 공이 백씨의 계책을 써서 전군(全軍)이 탈출하게 하였다. 이밖에 전승공취(戰勝攻取)한 공은 다 기록할 수가 없이 많았으니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도총경력(都摠經歷)을 거쳐 특별히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를 제수하였다. 을사년(乙巳年)에 적이 또 대거(大擧)하여 제주(濟州)의 대양(大洋)으로 들어오니, 열진(列鎭)이 감히 구원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백씨의 화전계(火戰計)를 써서 적선을 다 불태웠다. 첩서가 조정에 들리매 임금이 크게 가상히 여기어 새서(璽書)로써 증질(增秩)하고 녹공(錄功)하기를 일등(一等)으로 하며 순천부사(順天府使)를 배(拜)하였다. 이에 공이 엄하고 분명하게 다스리고 해선(海膳)을 감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입게 하니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덕을 기리었다.
병오년(丙午年) 여름에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승진되어 앞과 뒤로 갈려서 돌아올 때 이속(吏屬)들이 마교(馬轎)와 포백(布帛)을 부쳤던 것을 일체(一切)로 다 돌려보냈고, 복피(襆被)가 소연(蕭然)하여 한사(寒士)와 같았다.
부총관(副摠管)으로 배명되었을 때에 장복(章服)을 또한 여러 사람에게서 빌려 입으니 임금이 듣고 비단 일단(一段)을 하사하여 지어 입게 하니 사람들이 제준(祭遵)이 기의(奇衣)가 없는 것으로써 이를 비유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비국(備局)이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추천하였는데 한 상궁(尙宮)이 있어 말을 전하기를,
“은(銀)을 바치기를 기다려 낙점(落點)을 할 것이다”라 하니, 공이 정색(正色)하고 말하기를,
“신자(信者)가 군부(君父)에게 뇌물로써 벼슬을 얻어야 하겠는가? 내가 선조(宣朝)에게서 은혜를 입어 지위가 재렬(宰列)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극치이다.”라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더니 광해군이 불쾌(不快)하게 여기어 강등하여 교동별장(喬桐別將)으로 삼고 임해군(臨海君)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공이 차마 그렇게 못하여 끝까지 잘 보호하였으므로 취리(就理)하기에까지 이르렀다가 얼마후에 석방되어 충청수사(忠淸水使)로 배명되었다.
공은 정치가 문란하고 윤상(倫常)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위연(喟然)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는 한 무부(武夫)이었는데 어찌 다시 영달(榮達)을 구하겠는가?”라 하고 드디어 백씨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에 또 포도대장(捕盜大將)의 명령이 있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일어나지 아니하다가 광해군 갑인(甲寅)에 졸(卒)하시니, 향년이 오십육이었다. 임금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우부(優賻)로 치제(致祭)하고 또 지사(地師)를 시켜서 산(山)을 정하여 구만(九萬) 묘동(廟洞)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해민(海民) 수십인이 와서 제수(祭需)를 바치기를 삼년상을 마치도록 게을리하지 아니하였고 사림(士林)들이 사당을 오도산(吾道山) 아래에 세워 소호공과 병향(並享)하였다.
공은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우(孝友)하여, 두 형을 섬기기를 어버이와 같이하여 일의 대소(大小)할 것 없이 반드시 품고(稟告)하여 명령을 받고서 행하였고, 이불을 연(聯)하고 베개를 같이하여 화락(和樂)이 또 흐뭇하였으니, 내행(內行)이 이와 같았으므로 마땅히 그 충절이 저와 같았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니 통정(通政) 남세운(南世雲)의 따님이요. 공과분묘를 같이 하였다. 한 아들과 한 딸이 있었으니 아드님은 명호(鳴虎)인데,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이었고, 따님은 강진선(姜晉善)에게 시집갔다. 명호의 한 아드님은 낙(洛)인데 평구도찰방(平丘道察訪)이었고, 그의 넷 아드님은 유석(由碩), 유방(由磅), 유박(由礴), 유질(由礩)인데, 둘째 유방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또 셋 따님은 노한주(盧漢鑄), 선전관(宣傳官) 김만겸(金萬兼), 노순필(盧舜弼)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어느 날 공의 방손(傍孫) 상우(祥羽)가 만각(晩覺) 이동급(李東汲)이 찬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내게 명(銘)을 구하므로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열열(烈烈)하신 공이시여! 무략(武略)은 하늘이 주셨도다.
모습은 연함(燕頷)을 닮았고, 재주는 원비(猿臂)를 가졌도다.
호방(虎榜)의 그때부터, 용절(龍節)에 비기었네.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하여 도이(島夷)가 날뛰었네.
우리 영남(嶺南), 첫 수난을 겪었으니, 열진(列鎭)이 풍미(風靡)했네.
공께서 떨친 그 의기는 투메(投袂)코 일어섰네.
적을 무찌르고 도구에 들어와서 창려(倡旅)의 깃발 세우셨네.
서수(西狩)를 듣고서는 죽음을 맹세하고 적개(敵愾)를 하셨도다.
모봉(矛鋒) 향하는 곳에 싸워서 이기고 쳐서 무찔렀네.
혹은 그 길을 막아내고 혹은 겁박하여 무찔렀네.
기세만 보고서도 도망친 적이 있고, 북소리 듣고서는 즉시 놀랬도다.
삼성(三城)이 회복되니, 남은 성도 그랬도다.
학로(鶴老)가 대희(大喜)하고 아진(鵝陣)이 하례했네.
진양(晉陽)이 함락될 때 적병(賊兵)이 십배(十倍)였네.
말을 달려 칼 휘두르니 풀잎이 쓰러지듯 적의 목이 떨어졌네.
적이 곧 붕궤(崩潰)하니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있었도다.
적의 포위당했더니, 공에게 힘입어서 면하게 되었도다.
해구(海寇)가 비여(匪茹)하매 만소(萬艘)가 싸우려 하도다.
상궁(傷弓)의 변읍(邊邑)들이 손을 움츠리고 펴지도 못하였네.
공께서 화공(火攻)하여 횃불 한 개로써 모두 다 불태웠네.
적벽(赤壁)의 기주(奇籌)를 여기에서 다시 보네.
호백(湖伯)의 포문(褒聞)으로 전각(篆刻)을 웅주(雄州)에서 보았도다.
우도(牛刀)로 돌에 새겨 길가에 세웠도다.
지위는 곤수(閫帥)에 올랐으되, 담담하기 한유(寒儒)와 같았도다.
더욱더 존경할 건 청빈을 즐기어 속요(粟謠)를 수치(羞恥)로 여기셨네.
비늘을 긁히우고 날개를 꺾이어도 고고(孤高)한 충성심은 가만히 간직했네.
자족(自足)을 아시고 굽이지 않으시니, 그 정절(貞節) 뛰어나게 다르시네.
돌아와 형문(衡門)에 누웠으니, 조촐하신 발자취를 혼구(昏衢)에 남기셨네.
공의 종시(終始) 보아하니 금고(今古)에 비유하기 어렵네.
신령께서 편안히 계시오니 세월이 흘렀어도 옷깃을 여미도다.
구만동(九萬洞) 일면(一面)에 운손(雲孫)들 길이길이 사모하네.
시(詩)를 분유(墳幽)에 새겼으니 내 말이 거짓이 아니로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전(前)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 진양(晉陽) 정종노(鄭宗魯)는 삼가 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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