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권(卷之四)
포전(褒典)
시장(諡狀)
아! 용사(龍蛇)의 변란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임금이 피난하고 삼경(三京)이 함락되니 나라의 점위(阽危)함이 근근이 일발(一髮)의 사이였다. 화란(禍亂)을 잘 평정하여 사직이 회복되고 안정된 것은 오직 명나라가 두 번에 걸쳐 도와준 은혜요, 7년의 전쟁에서 마침내 중흥의 공을 이루게 된 것은 또한 여러 도에서 창의한 힘이었으니, 그때를 당하여 소계 최공 또한 그 한 분이었다.
공의 휘는 강(堈)이요 자는 여견(汝堅)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상조(上祖)의 휘는 아(阿)이니 고려조의 문하시중이요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5세대를 이어 잠조(簪組)가 연속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사필(斯泌)은 문과에 올라 시정(寺正)을 지냈고, 휘 자경(子涇)은 문과에 올라 현감을 지냈다. 자경이 낳은 수지(水智)는 홍문관응교로 서장관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 서울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사육신의 피화(被禍)를 보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자취를 산수 사이에서 지내더니 지신사(知申事)에 추증되었다. 수지가 낳은 이식(以湜)은 문과 군수였는데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윤신(潤身)인데 첨사(僉使)였고, 조부의 휘는 담(潭)인데 유행(儒行)으로써 참봉에 천거되었다가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운철(云哲)이니 증형조판서였고, 비(妣)는 증정부인 청풍김씨인데 참봉 김덕후(金德厚)의 딸이다. 세 아들을 양육하였으니 공은 그 막내였다. 공이 명종 14년 기미년(1559년)에 탄생하니 넓은 눈썹, 모난 이마에 빛나는 채색과 영민한 기운이 풍기었고, 풍의가 준상하고 효용이 빼어나니 사람들이 원대한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효우(孝友)함이 천성에서 나와 판서공이 돌아가신 뒤로 두 형을 어버이처럼 섬겼고, 사람을 접함에 휴진(畦畛)을 두지 아니하였으며 성품이 비록 엄준하였으나 모든 일을 화유(和柔)로써 대처하니 현우(賢愚)나 귀천이 열복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학업을 소호공에게서 받을 때 독실한 뜻으로 경서를 궁구하여 온오(蘊奧)한 데까지 정통하였으므로 명경(明經)으로 여러 번 향해(鄕解)에 합격하였다. 어떤 관상가가 말하기를,
“제비 턱에 호랑이 이마가 고관, 봉후가 될 상이다.”라 하니, 소호공이 투필할 것을 권하였다.
만력 을유년(선조 18년, 1585년)에 무과에 올라 『주역」을 암송하기를 스스로 원하여 문시관이 글의 뜻을 거듭 물었으되 공이 응대하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다. 문시관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경학이 이와 같은데 무예로서 입신하려는 것은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라 하니, 무시관이 이르기를,
“그리 말하지 말라. 그 기상을 보니 가히 호독(虎纛)을 끼고 용절(龍節)를 잡아 삼군을 통솔할 장수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여기에서 호방(虎榜)의 일등으로 뽑혔으나 공이 본래부터 지절(志節)을 숭상하여 급급(汲汲)하게 진취(進取)할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진년에 이르러 왜구가 떼 지어 날뛰니 공이 소호공에게 청하여 이르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를 지켜 전해 왔으니 어찌 의려(義旅)를 창기하여 국은에 보답하지 않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소호공이 이르기를
“바로 내 생각과 같다. 사생을 마땅히 함께하겠다.”라 하니, 공이 곧바로 가동(家童)을 불러내고 지방의 장정들을 불러 모았다. 그중 한 고을 사람인 박연홍, 최한(崔僩), 정준과 같은 사람은 모두 호랑이를 잡을 만한 장사였는데 다투어 서로 따르기를 원하였다. 바야흐로 군사(軍事)를 의논할 때 소호공이 말하기를,
“초야에서 창의하는 것이니 마땅히 수령에게 알리어 그 지시를 받아야 명분이 정당하고 말도 순순할 것이다.” 라 하니, 공이 박연홍과 함께 주쉬(主倅)에게 들어가 거의(擧義)의 상황을 고하여 군기(軍器)를 청하고 돌아왔다. 이때 적이 이미 구만동 입구에 닥쳐왔으므로 공이 필마와 단창(單槍)으로 위이(逶迤)하여 반가령을 넘어가다가 문득 암석 사이에서 어린아이가 부르짖는 소리로
“아저씨, 나를 살려 주세요.”라 하였다. 공이 보니 바로 종질 정호(廷虎)인지라 끼고 말에 올라 가슴에 안고 말을 돌려 반격하니, 적이 바람을 맞은 듯이 분궤(奔潰)하였다. 소호공도 최한, 정준 등과 군사를 합하여 맞아 싸워 모두 쳐서 죽이니 시냇물이 붉어졌다.
이는 기병한 때의 초전이니 그 뒤를 이어 적개(敵愾)하여 한어(扞禦)하는 방법과 전승(戰勝)으로 공취(攻取)한 공적이 한두 가지의 계산에 그치지 않았으나 집에 전해오는 문자가 산일(散逸)되어 보존된 것이 없으니, 국승(國乘)과 야사에서 보이는 것을 공의 실기(實紀)로 삼을 수밖에 없다.
명장록(名將錄)에 이르기를,
“김덕령장군(金德齡將軍)이 최강의 효과(驍果)를 사랑하여 이끌어 별장으로 삼으니 군세가 더욱 떨쳤다.”라 하였다.
[국조기사(國朝記事)] 및 [산서야사(山西野史)]에 이르기를,
“고성의 봉사 최강이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였다.”라 하였다.
또 「조야회통(朝野會通)]에는 이르기를,
“봉사 최강 등이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영천의 적을 토벌할 때에 화공을 써서 불에 타서 죽은 자가 많았다.”라 하였고,
중흥지에 이르기를,
“적병이 고성으로부터 사천으로 와서 둔치고 장차 진주를 향하려고 하므로 김대명(金大鳴), 최강이 군사를 합하여 공격하니 적이 패주하였다.”
또 이르기를,
“계사년 6월에 왜추(倭酋) 30만이 동래로부터 바로 진주로 향하는데 형세가 풍우와 같았다. 도원수(都元帥) 이하가 모두 달아나고 호남의 이빈(李薲)이 곽재우에게 정진을 막게 하였으나 곽재우의 군사가 적어서 대적하지 못하고 퇴각하니 적이 마침내 오직 성을 공격하는 데에 전력하였다. 이때 최강과 이달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구원하다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되돌아오니 적이 추격하여 포위하므로 최강이 만중(萬衆)의 가운데서 충돌하여 적을 풀 베듯이 많이 베었다. 이리하여 적이 풍미하여 썰물처럼 물러나고 피난했던 사민들이 온전하게 되니 사인(士人) 한계(韓誡)가 산에 올라가 최강이 적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천고의 사책(史冊) 가운데 이와 같은 용장(庸將)이 있었던가? 애석하다. 맡겨진 것이 제대로 되지 못한 일이로다.’”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9월에 적이 창원으로부터 함안으로 와서 둔치고 또 김해로부터 갑자기 웅천의 안민령으로 들어오니 하도의 모든 장병이 그들에게 포위되었다. 이에 최강이 말을 달려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쓰러져 마침내 한 곳이 열리게 되고 모든 군사가 온전하게 되었다. 포위에서 풀려나온 장사들이 서로 치하하여 이르기를 ‘오늘 살아남게 된 것은 오직 최공의 힘이다.’라 하였다.
영영고적기(嶺營古蹟記)에 이르기를,
“최강 등이 밤에 망진령에 올라가 군중이 각각 4, 5개씩의 횃불을 들고 혹은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북을 치고 눌함(吶喊)하게 하니 메아리가 산골짜기를 진동시켰다. 성안의 장사들이 이를 듣고 기뻐 뛰면서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최의장이 와서 구원하는 것이다’라 하였고, 적도 또한 경악하여 구원병이 많이 이른 것으로 알고 곧바로 그들의 둔막을 불사르고 시체를 쌓아 불태우고 도망쳤다.”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
“적이 다시 진해, 고성을 함락시키고 사천으로 와서 진을 치고 장차 진주로 향하려고 하니 판관 김시민이 최균, 최강과 함께 가만히 대둔령(大屯嶺)을 넘어 새벽에 성 아래로 핍박하여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니 적이 놀라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최강이 또 요로에 은복하여 적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더니 적이 과연 밤을 틈타 도망함으로 곧 몸을 떨쳐 이를 공격하였다. 이에 적이 대패하여 진해에 둔친 적과 군사를 합하여 달아남으로 추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진해의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고 마침내 세 성을 회복시켰다.”라 하였다.
정기룡(鄭起龍)의 문집에 이르기를,
“무술년 4월 9일에 군수 노윤중(盧允中)은 함양의 요로에 매복하고 별장 최강은 안음현 남쪽에 매복하여 기다리더니 적이 밤을 틈타 도망해 가다가 두 곳의 복병이 있는 곳에서 죽게 되었다.”라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이르기를,
“최강은 젊어서는 문학을 잘하였고 늦게 무과에 올랐으나 구차스럽게 벼슬에 나아가는 행동을 부끄럽게 여겼고 성품이 또 강직하여 뜻을 굽혀서 남을 따르지 아니하다가 지금에 이르러 군사를 일으켰다. 군사가 비록 많지 않아도 능히 그 마음을 얻었고 싸움에 임하여 몸소 선봉에 섰으니 정기룡, 안신갑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였으나 사람을 부리는 재주는 이들보다 뛰어났다.”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실적이다.
난이 평정된 뒤에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에 제수되었다가 가리포첨사로 특별히 옮겼다.
을사년 3월에 해랑적이 대거 와서 몽동거함이 바다를 덮어 제주로 들어오니 열진이 감히 막지 못하였다. 이때 공이 화공으로 계책을 써서 적선을 모두 불태우니 적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 수를 헤아릴 수 없음이 또한 영천의 싸움과 비슷하였다. 관찰사가 조정에 포상하기를 아뢰니 임금께서 크게 가상히 여겨 특별히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몸을 돌보지 않고 적개하여 이미 나를 업신여기는 흉적을 꺾었으니 관질을 높여 근병(勤兵)의 공을 밝히고 가내(嘉乃)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기에 탄고(誕告)하여 들어보여 군정(軍情)을 크게 앙양시키게 한다. 경은 규규한 간성이요 환환한 웅호로다. 10년 동안 전장에서 이미 시험한 공로가 많았고 삼품 초이(貂珥)의 반열에서도 임지에서의 기여하는데만 전념하였도다. 신방(訊防)의 순칙(巡飭)에 맡아 용양(龍驤)의 군사를 앞서 선봉이 되었다. 큰 파도가 하늘에 닿았는데 장한 뜻은 싸우러 가는데 날카로웠지만, 광풍이 바다를 뒤흔드니 큰 돛대가 위기에서 의지할 수 없었도다. 얼마나 다행한가? 날랜 장수가 제 목숨을 가벼이 여겨 미쳐 날뛰는 왜적들을 죽음으로 보내게 하였도다. 거센 파도를 타고 넘는 거함이 빠르기 북(梭)같았고, 번개같이 빠른 배는 어지러운 구름처럼 모였도다. 모든 군(軍)이 위풍만 바라보고서도 소축(小縮)이 되었으되 오직 너만은 타수(唾手)하고 앞장섰도다. 적의 진로를 바다 가운데서 막았으니 계책이 궁해져 나는 듯이 달아났고, 맹렬한 불꽃이 목도(木道)에서 넘쳐 악인을 모두 잡았도다. 장고(藏袴)로써 기다렸으니 내 어찌 일자(一資)를 아끼리오? 무릎을 치고 감탄해 마지않으니 너는 삼석(三錫)을 사양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어 관질을 높여 가선대부를 제수하고 순천부사를 배하니 화리(化理)가 엄명(嚴明)하고 옥송(獄訟)이 공평청렴하였으며 관봉과 물선이 포민(浦民)에게서 나오는 것을 모두 경감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비석을 세워 기리었다.
병오년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배명되었다. 순천의 배리(陪吏)들이 말과 가마, 화잔(畵盞) 한 쌍을 받아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물리쳤다. 수사(水使)에서 갈렸을 때에 영속(營屬)들이 가만히 포백(布帛)을 붙였으나 중도에서 알고서 이를 되돌렸으며,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관과 의복이 소연(蕭然)하여 빈한한 선비의 모습과 같으니 그때 본 사람으로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을 때에 관복을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 입었다. 약봉 서성이 당시 도총관이었는데 이를 보고 그의 청렴개결에 감복하여 경연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이에 선조께서 크게 감탄하여 특별히 비단 한 단을 하사하고 관복을 지어 입게 하였더니 사람들이 제준(祭遵)에게 기의(奇衣)가 없었던 것과 비교하였다.
그 뒤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아 출척되어 교동별장이 되고, 임해군을 죽이도록 명령함에 공이 그의 무죄를 측은히 여겨 끝까지 잘 보호하였더니 소인배들이 미워하고 모함하여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공이 의리로 항거하여 굴복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내가 차라리 죽음에 나아갈지언정 무고한 왕자를 차마 해칠 수는 없습니다.”라 하니, 광해군도 의롭게 여겨 이를 석방하고 곧바로 충청수사로 제수하였다. 공이 시정(時政)이 매우 문란하고 이륜(彝倫)이 어그러지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는 변경에서 투필(投筆)한 사람으로 불행히 난을 만나 우연히 적은 공을 세워 외람되게 재열(宰列)에 올랐으니 국은이 이미 극에 이르렀다. 내가 여기에서 그만두는 것이 옳겠다.”하고는 곧 인부(印符)를 풀어놓고 소호와 손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는 이소(二疏)의 행적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또한 평일에 독서한 뜻을 볼 수 있다. 뒤에 포도대장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서사(筮仕)로부터 곤수(閫帥)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간(睿簡)에서 나온 것이요 일찍이 권행(權幸)의 문에 간진(干進)하지 아니하였다. 어느 때에 당로(當路)한 노상(老相)을 만났으나 즐거이 무릎을 굽히지 아니하고 다만 이르기를,
“무인은 배례(拜禮)할 줄 모릅니다.”라 하였으니, 그 지기(志氣)가 이와 같았다.
갑인년(甲寅年: 광해군 6년, 서기 1614년) 2월 16일에 사제(私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광해군이 크게 슬퍼하여 예관을 보내 조제(弔祭)하고 부의를 두텁게 하였으며 또 지관(地官)을 보내 묘지를 잡아 장사지냈으니, 묘는 구만 묘동 곤향(坤向) 언덕에 있다.
순천의 어부 수십 명이 공의 상을 듣고 포복(匍匐)하고 달려와서 곡하고서 고을의 북쪽 당항(堂項)의 포구에 살면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제수(祭需)로 바치기를 3년 동안 계속하다가 돌아갔으니, 그 남긴 은혜가 사람의 마음 깊은 데까지 들어간 것을 알만한 것이다. 돌아가신 뒤 10년 만에 향인들이 사당을 도산(道山)에 세워 소호와 병향(並享)하였다.
순조 병자년(丙子年: 순조 16년, 서기 1816년)에 도신(道臣)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공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훈련원사를 추증하였다.
배(配)는 정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니 통정대부 남세운(南世雲)의 따님이요, 묘는 공과 같은 영(瑩)에 쌍조(雙兆)이다.
한 아들과 한 딸이 있으니, 아들은 명호(鳴虎)이니 주부(主簿)를 역임하였고 딸은 강진선(姜晉善)에게 시집갔다. 명호의 아들은 낙(洛)으로 찰방이었고, 낙은 네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이 밖에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과 같은 분은 어떤 모습인가를 알지 못하지마는 형은 주책(籌策)으로 하였고 아우는 공전(攻戰)에서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마침내 기이한 공적을 세웠으니 세상에서 공을 논하는 자가 곽재우의 출처와 비겼고, 무리를 부리는 재주는 또한 정기룡, 안신갑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저 몇 분들은 의용과 명절이 세상에 추앙받는 바가 되었으니, 공이 더 그 앞쪽에 나갔다고 한 것은 공이 성취한 바가 어찌 경학을 근본으로하여 충과 지(智)로써 구제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몸을 혼조에서 깨끗이 하여 끝까지 완인(完人)이 되었고 임해군을 보호한 의리는 더욱 우뚝하여 짝이 드물다 할 것이니 여기에서 가히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고 판서 홍경모(洪敬謨)공이 일찍이 공의 형제의 시장(諡狀)을 찬하였고, 금상 신미년(辛未年:순조 11년, 서기 1811년)에 소호공에게는 의민(義敏)이란 증시(贈諡)가 있었으나, 공에게는 내려지지 아니하여 그 청시(請諡)하는 문자가 한 장의 종이에 아울러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오직 공의 역명(易名)의 장(狀)에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법도에 부당하므로 홍공이 서차(序次)한 바에 따라 대략 은괄(檼栝)을 가하여 태상씨에게 신고하는 바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안동 김병학(金炳學)은 찬한다.
시망(諡望)
의민(義敏)이란 의를 보고 능히 충성하는 것을 의라 이르고, 일에 응하여 공(功)이 있는 것을 민(敏)이라 이른다.
정민(貞敏)이란 청백을 몸소 지키는 것을 정이라 하고, 일에 응하여 공이 있는 것을 민(敏)이라 이른다.
장숙(莊肅)이란 적과 싸워 이기고 뜻이 강직한 것을 장이라 하고, 몸을 바르게 하고 아래 사람을 잘 다스리는 것을 숙(肅)이라 이른다.
우(又)
의숙(義肅)이란 의를 보고 능히 충성하는 것을 의라 하고, 몸을 바르게 가지고 아래 사람을 잘 다스리는 것을 숙(肅)이라 이른다.
무숙(武肅)이란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하는 것을 무라 하고, 제 몸을 바르게 가지고 아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숙이라 이른다..
정민(貞敏)이란 청백을 스스로 지키는 것을 정이라 하고, 일에 응하여 공이 있는 것을 민이라 이른다.
교지(教旨)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최균에게 시호 의민공(義敏公)을 증(贈)한다.
동치(同治) 11년(고종 9년, 서기 1873년) 2월 28일.
교지(教旨)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 행가선대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최강에게 시호 의숙공(義肅公)을 증한다.
동치 11년 2월 28일.
선시(宣諡)한 때의 고유문(告由文)-판서 허전(許傳)이 지음
아! 혁혁한 문성공(文成公)은 그 조조(肇祖)로다. 완산(完山)의 세벌이요, 고려의 석보(碩輔)로다. 씨엽(氏葉)이 뛰어나고 신령스러웠으며, 덕이 무무(懋懋)하게 세워졌도다. 우리 조선에 이르러서 선연(蟬聯)한 규조(珪組)로다. 서울의 사구(司寇)가 할아버지의 아버지로다. 여경(餘慶)이 진진(臻臻)함에 공께서 그 무(武)를 이었도다. 소대(蘇臺) 멧부리에 기상을 길렀고, 철관(鐵冠)은 독실히 도왔네. 준정(峻整)한 풍의요 관후한 기우(氣宇)로다. 이미 유술(儒術)에 통하여 널리 고금을 넘쳤도다. 감석(甘石)의 보전(步躔)이요, 손오(孫吳)의 행부(行部)로다. 벌레같은 검은 이빨들이 우리의 강토를 범했도다. 이에 충의를 떨쳐내어 졸오(卒伍)를 창기했도다. 아우는 장수가 되고 형은 모주(謀主)가 되었도다. 소옹(笑翁:大笑軒)과 송노(松老:松巖 李魯)가 소리를 같이하여 서로 화답하였도다. 초유사가 기이하다고 이르셨고, 경상우도가 안도할 수 있었도다. 승첩이 알려지고 고시(誥示)하여 기리는데 가상히 여겼으되 내 마음 괴로웠도다. 삼급(三級)에 진계(進階)되니 임명을 공경으로 받았도다. 백 세의 공의(公議)를 관찰사가 채취했도다. 직위를 추존하여 은혜를 가리시니 진실로 은수(恩數)가 성하도다. 감히 그 사유를 고하고 예포(禮脯)를 이에 드리나이다.
위의 것은 소호공에 대한 것이다.
차(次)
하늘이 영준(英俊)한 사람 내어 집안은 충효를 전해 왔도다. 탁절한 용략(勇略)이었고 호상(豪爽)한 형모(形貌)였도다. 젊어서 비로소 학문을 알아 재주가 뛰어나고, 경학이 밝았도다. 자라서는 병가(兵家)를 열독(閱讀)하여 뜻을 공명(功名)에 두었도다. 반초를 본받고자 붓을 던졌고, 활쏘기를 익혀 뜻대로 맞혔도다. 이에 갑과(甲科)에 으뜸이 되니 기절(氣節)이 더욱 굳었도다. 불우(不虞)에 만이(蠻夷)들이 크게 엉켜 공극(孔棘)이 되었도다. 형님과 아우가 동심동력(同心同力)하였도다. 충성심을 떨쳐 적개하여 의로써 군사를 모았도다. 범을 잡을 장사들이 향응하여 다투어 붙었도다. 처음부터 선봉을 일삼았고, 일거(一擧)에 대첩을 하였도다. 진양의 함락을 구하였고, 웅천의 포위를 풀었도다. 저 평추(平酋)를 섬멸하고 또 삼성(三城)을 회복했도다. 정의(廷議)에서 가상하다고 하였고, 그 공을 다툴 자 없었도다. 마침내 도총부경력에 제수되고 곧이어 가리포첨사로 옮겼도다. 교서로 계속해 포상하여 품계를 뛰어넘어 나아갔도다. 두 번이나 절도(節度)로 옮겼고 뒤에 부총관에 올랐도다. 모두 마음과 덕망에서 나왔고, 정말로 시망(時望)에 있었도다.
순조께서 공훈을 기념하여 현위(顯位)를 주었도다. 지금 우리 성명(聖明)께서 미시(美諡)를 주셨도다. 한때의 영광이요 백대의 권장이로다. 삼가 고하고 정성들여 고하며, 조그마한 향기로운 제수(祭需)를 갖추어 올리나이다.
위의 것은 소계에 대한 글이다.
정려(旌閭)를 청하는 상언을 한 뒤 예조의 회계(回啓)-신묘년 10월 29일
경상도의 진사 김경락(金景洛) 등이 상언한 것을 보니 고성 증이조판서 최균과 그 아우 증병조판서 최강의 충절로 정려의 은전을 아울러 청하는 호유(呼籲)였습니다. 최균은 용사의 변을 당하여 한 서생으로 그 아우 최강과 함께 분연히 투몌(投袂)하여 가동을 모으고 기치를 장렬(張列)하여 낮에는 사수하면서 밤에는 각각 세 개의 횃불을 가지고 산 위에 벌여놓아 혹은 숨어서 고조(鼓噪)하고 메아리치게 하니 적이 감히 그 경계에 가까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연해의 6, 7개의 성이 보전할 수 있게 되니 원종(原從)에 녹권(錄券)되었습니다.
그 아우 최강은 일찍이 무과에 올라 동심하여 창의할 때 적이 침범하니 이를 습격하여 격파하였고, 계사년 4월에 적이 또 진주를 포위함에 그 형 최균과 함께 군사를 남강 물가에 몰아내어 병세를 도우니, 적이 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을사년에 가리포첨사가 되었고, 적이 다시 대거 들어옴에 주함(舟艦)이 바다를 뒤덮고 몰려왔는데 방략(方略)을 설치하여 적선을 모두 불태우고, 이에 녹훈(錄勳)의 은총을 입어 품질(品秩)을 더했던 것입니다. 무릇 그는 임기(臨機)하여 제압하여 승리했고, 앉아서 기책을 운용하여 마침내 대훈(大勳)을 수립하였으니 비록 사시(賜諡), 이증(貤贈)의 은전을 입었으나 아직 정포(旌褒)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군 및 그 아우 최강의 충의가 탁이하여 훈공을 기록하고 시호를 내렸으나 아직 정포를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정려의 은전을 아울러 베풀면 수풍(樹風)의 정사에 합당할 듯합니다만, 은전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신(臣)의 무리로서는 감히 편리한 대로 천단(擅斷)하지 못하겠으니, 상재(上裁)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동부승지 신병휴(申炳休)는 다음에 아뢴 일을 알고 나서 회계에 따라서 시행하겠으니 판단하여 내리소서.
예조의 입안(立案)
위의 입안은 충신의 정려에 대한 사절(事節)이다. 교조(敎曹)에 계하(啓下)한 것을 계목(啓目)을 붙여서 계하한다.
경상도의 진사 김경락의 호구(戶口)를 대표하여 친정(親呈)하기에 적실(的實)한 것을 그대로 올렸다. 이 상언을 보니 곧 고성의 증 이조판서 최균과 그 아우 증 병조판서 최강의 충절을 위하여 정려의 은전을 함께 베풀어 줄 것을 청한 일로 이 호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정려를 세울 때 재목(材木)과 목수는 예(例)에 따라 관으로부터 거행할 것이니, 그 자손의 집안 연호(烟戶)가 환상(還上)할 것 등의 제반 잡역은 한결같이 모두 면제하게 하여 우리 조가(朝家)에서 정충(旌忠)하는 뜻에 맞추어 드러내도록 하라. 합해서 입안하는 것이다.
사원(祠院)
사원(祠院)
처음 천계(天啓) 3년(서기 1623년) 우리 인조대왕 원년 계해년에 사당을 소대(蘇臺)에 세워 소호, 소계 두 분 형제를 봉안하고 내외의 모든 자손들이 춘추로 향례를 행하였다. 정조(正祖) 신축년(辛丑年:정조 5년, 서기 1781년) 3월에 도내에서 사림들의 여론이 함께 일어나 오도산(吾道山) 아래에 자리를 가려 사당을 옮겨 세우고 향사를 모셨는데 운포(雲圃) 이달(李達)을 병향(並享)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이라 불렀다. 그리고 무오년(戊午年 정조 22년, 서기 1798년) 10월에 강당을 중건하여 구제(舊制)에 증가시키고 기미년(1799년)에 낙성하였다. 헌종(憲宗) 정유년에 모든 유생의 이업(肄業)을 위하여 흥학재(興學齋)를 설립하고 병오년(헌종 12년, 서기 1846년) 5월에 또 사우(祠宇)를 중건하여 7월에 되돌려 모셨더니 태상황(太上皇) 기사년(고종 6년, 서기 1869년)에 방금(邦禁)으로써 훼철(毁撤)당하여 위패를 후록(後麓)에 매봉(埋奉)하였다. 그 뒤 44년 계축년 4월에 옛터를 다시 닦아 서당을 회복하여 설치하고 아울러 흥학재(興學齋)도 서당의 동쪽에 세웠다.
사우의 상량문(上樑文)-진사 이우육(李宇錥)
사직에 어진 이가 있어 반드시 제사드리는 것을 어찌 백 세가 된들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공(功)이 나라에 있으면 마땅히 존숭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두 충신의 미덕을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이제야 비로소 그 전례(典禮)를 들어 지난날의 아름다운 공적을 천양(闡揚)하려 한다.
삼가 생각해 보건대 소계의 한 구역에 최공의 쌍절(雙節)이 빛났도다. 훈(塤)과 지(篪)를 번갈아 불며, 책상에는 책이 있고 평상에는 거문고 놓였도다. 체형(棣荊)이 연이어 빛남을 내가 지니니 내가 즐거워지도다. 국가가 판탕(板蕩)되는 즈음에 적개하여 적을 섬멸하는 정성을 떨치었고, 혼조로 밝은 빛이 무너지는 때에 있어서 깨끗한 몸으로 용퇴(勇退)하는 지조를 힘썼도다. 백공은 창을 잡고 창의하여 진양에서 보장을 이루었고, 계씨는 도끼를 잡고 충성을 다하여 염해(炎海)에서 경관(京觀)을 쌓았고 이미 맹부(盟府)에 훈로(勳勞)가 현저하도다. 천양(闡揚)이 오랫동안 궁향(窮鄕)에서 궐(闕)했으니 안상산(顔常山)의 충정을 누가 한 가문의 장적(壯績)으로 알 수 있고 제정로(祭征虜)의 염근(廉謹)을 어찌 옛 장수의 유풍이라고 사모할 수 있겠는가? 춘추의 필분(苾芬)은 비록 후손의 세천(歲薦)이 있었으나 고향의 제사를 유자(儒者)가 함께 존중하기에는 틈을 얻지 못하였도다. 사전(祀典)이 닦여지려 함에 힘을 다하여 금법을 지켰으며, 공의(公議)가 더욱 성함에 마침내 묘당을 열고 사당을 만들기로 꾀했도다.
여기 한 언덕 맑은 구역을 가려 수가(數架)의 신사(神舍)를 비로소 경영하게 되었도다. 공이 불일(不日)에 이루어져서 다행히 동량(棟梁)의 증휘(增輝)가 있었으니 신(神)이 어찌 사람과 다르겠는가? 거의 갱장(羹墻)의 우모(寓慕)를 바라게 되었도다. 욕례(縟禮)를 묘동(廟洞)에서 올리니 일이 진실로 징험할 만하게 되었고, 가명(嘉名)이 이미 곤봉(昆峯)에 부합하니 도(道)가 합한 바 있었도다. 산골짜기 물, 반석과 바위틈 계수나무는 아직도 장구(杖屨)의 여향(餘香)을 피었으니 주정(朱井)과 안천(顔泉)이 어찌 정령(精靈)에서 흐르는 바가 없었으리오? 감히 장송(張頌)을 도와 이에 노래를 듣도다.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쌓인 돌이 창창(蒼蒼)하여 해일(海日)이 붉었도다. 당년(當年)에 충의의 기상을 알고자 하니 봄 산의 초목도 오히려 위풍(威風)을 알려 주도다.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버들잎 푸르고 꽃 빛은 밝은데 봄풀이 성했도다. 왕사(王事)에 아름다운 숨은 뜻 이루지 못하더니 이제까지 원학(猿鶴)이 가까이 와서 우는구나.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바다는 잔잔하고 강물은 맑은데 장무(瘴霧)가 짙었도다. 우리나라 백 년에 장한 업적 남겼으니 몇 사람이나 고금에 기남(奇男)이 되었던고?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성신(星辰)이 다투어 북극을 고았도다. 장부의 한결같은 절개 무엇으로 비교할까? 오도산이 높으니 이름도 적합하네.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 흰 구름 아침저녁으로 청장(靑嶂)에서 나오는구나. 하의(霞衣)에 달빛을 차고 다시금 어디로 놀아볼까? 응당 광진(狂塵)을 웃었으니 하계(下界)가 넓었도다. 들보 아래로 던지니 소나무, 전나무가 빽빽이 울창하고 간수(澗水)도 쏜살같네. 언덕에 누른 파초 있고 물에 말밤 있어 해마다 산의 위쪽에서 무성하리다.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上樑)을 한 뒤에 온갖 상서로움이 함께 이르고 백 명의 신령들이 다투어 지키소서. 단술에 향을 갖추고 생뢰(牲牢)를 깨끗이 하였으니 보사(報祀)에 더욱 정성을 다하는 것이요. 현송(絃誦)이 일어나고 시(詩)와 예(禮)를 일삼아 습속(習俗)의 점변(漸變)을 저견(佇見)하리라.
강당(講堂) 중수(重修) 상량문-현감 권사호(權思浩)
왕이 분노(憤怒)하는 바를 대적하여 없애고 나라의 원수를 갚는 것을 충이라 하는 것이니, 삼현(三賢)께서 적의 내습을 막은 공이 위대하였던 것이요, 능히 나라의 큰 화란을 막았기로 제사드려야 하는 것이니 한 사당에 연감(聯龕)하여 배향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로다. 지금 윤환(輪奐)이 개도(改圖)됨에 바로 예를 본떠서 결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로다. 엎드려 생각건대 소호 최선생은 문성공이 선조이시니 고려조에 선연(蟬聯)하였고 효우가 출중하였으며 고을에 본보기가 되었도다. 소계 최선생은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셨고 늦게야 투필하니 반초(班超)와 같은 봉후의 포부를 가졌었다. 형제가 이불을 같이 덮어 집안에 사사로운 재물이 없었으니 산 남쪽에 선사(善事)의 본보기가 되었도다. 운포(雲圃) 이선생은 필마로 적에게 달려가서 무덤을 파헤치는 왜구를 준책(峻責)하고 효수(梟首)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작변(作變)하는 군졸을 선 채로 베었도다. 드디어 용사의 해를 당하여 군대를 함께 일으켜 충의 마음을 격동시켰고 능히 원학(猿鶴)의 참변을 막아내어 함께 기공(奇功)을 세움으로 번폐(藩蔽)의 견고함을 만들었도다. 혹은 유악(帷幄)에서 운주(運籌)하였고, 궤향(饋餉)을 끊이지 않게 하셨으니 소하(蕭何)의 인공(人功)이었다. 혹은 복병을 바다와 산에 설치하여 적선을 다 불태웠으니 완연히 적벽(赤壁)의 대첩이로다. 문충공(文忠公)의 절제(節制)를 받아 여러 번 기공을 올리고 묘당이 포가(褒嘉)를 내려 다 같이 높은 품계에 올랐도다. 광해조의 벼슬을 부끄럽게 여겨 불일(不日)로 벼슬을 버리고 강동(江東)의 고향을 생각하여 가을바람에 귀향하였도다. 효도를 돌아가신 어른에게 옮길 만하였으니 쌍절(雙節)이 한 집안에 모였도다. 덕이 외롭지 아니하여 이웃이 있었으니 세 현인이 같은 고을에서 솥발처럼 되었도다. 돌아가신 후에 사당에 제사드리는 것은 사인(斯人)이 아니고 누구를 숭배함이겠는가? 공적에 보답하는 일에 어찌 공의(公議)가 민별(泯滅)하겠는가? 묘동(廟洞)에 자리를 마련하여 이에 묘우를 세우고 오도산을 연유하여 원명(院名)을 정했도다. 제사를 뒤따라 올릴 때 일방의 유자들이 모여 갱장(羹墻), 우모(寓慕)함에 지난날 아름다운 전형을 생각게 하도다. 백 년이 지났으니 동우(棟宇)가 기울어지고 엎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지난 세월에 비록 검약하게 하였으나 어찌 장수(藏修)하는 일을 소홀히 늦추리오? 공역(公役)이 한 번 일어남에 규구(規矩)와 준승(準繩)이 넘치지 아니하고 사림이 힘을 합치고, 전화(錢貨)와 미곡이 각각 합당하였도다. 옛것을 그대로 본뜨고 새것을 세우니 십 수 간(間)의 광하(廣廈)로서 먼 장래에 오래도록 갈 것이니 천백 재(千百載)의 명구(名區)로다. 사방으로 들보를 장차 얹으려 하니 한 쌍의 무지개가 높이 솟았도다. 들보 동쪽을 바라보니 아침 해가 하늘을 비추어 붉었도다. 도이(島夷)가 섭복(慴伏)하여 먼바다 물결이 잔잔하니 응당 이는 당년의 의사(義師)의 공적이로다.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곤계봉이 높이 솟아 하늘에 닿았도다. 저 멧부리에 내린 신은 형과 아우 두 분이니 우주의 장부남(丈夫男)이 부끄럽지 않도다.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대야(大野)가 연천(連天)하여 길도 엇갈리지 않겠도다. 쓸 때는 행하였고 들 때에는 그쳤으니, 벼슬 그만두는 당일에 제휴(提携)가 좋았도다.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오도산에 난 빛이 북극을 비추었도다. 사람이 간지 천년이 되었어도 전형은 남았으며, 충효가 쌍전(雙全)함에 이것이 법칙이 될 만하도다.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 높은 하늘처럼 고금에 한가지로 우러러보리라. 병이(秉彝)가 모두 한 근원에서 나왔으니 활수(活水)로 피비린내 씻으시고 해랑적을 평정시켰도다. 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 많고 적은 행인들이 말에서 내려 예를 올리는구나. 천부(天賦)의 유래로 함께 이를 얻었으니, 청컨대 선달(善達)께서는 사당에서 제사드리는 것 지켜보아 주소서.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을 한 뒤에 춘추의 향사(享祀)를 게을리하지 않아 더욱 성경(誠敬)하는 방도를 다하고 시서(詩書)의 강독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서로 성취할 도리를 권장하게 하소서.
불행하게도 대란을 당하면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고, 태평하여 밝은 시대에는 도를 배우고 사람을 사랑하리로다. 대대로 의발(衣鉢)이 서로 전해지고 집안의 현송(絃誦)이 끊이지 않으리로다. 이것이 중수하는 뜻이요 영구히 읍양(揖讓)하는 광장(廣場)을 만들 것이로다.
소호공의 봉안문(奉安文)-진사 송이석(宋履錫)
선비가 집에서 닦을 것은 효와 충입니다. 충이 아니면 효가 없고 효가 아니면 충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항상 푸른 산매자(棣)는 위위(韡韡)하게 빛납니다. 훈지(壎篪)가 함께 화합하여 이에 힘쓰고 나아갔습니다. 어찌 그 쓰임새를 구하리까? 함 속에 든 옥과 같았습니다. 마침 용사의 난을 당하여 도이(島夷)가 창궐했습니다. 종묘사직이 피난하고 임금이 파천했습니다. 군신(君臣)이 한 몸이 되어 잘 간난(艱難)을 막았습니다. 백의(白衣)로 창을 잡고 향려(鄕旅)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형님과 아우께서 사생을 서로 맹세했습니다. 초유사께 돌아가니 학야(鶴爺)의 막하였습니다. 의장으로 추대되어 참괵(斬馘)하는데 많이 도왔습니다. 관찰사가 그 공적을 올렸더니 관질(官秩)로써 상 주었습니다. 유악(帷幄)의 운주(運籌)였고 문장의 문채였습니다. 나아가는 길 바야흐로 열렸으니 어디로 쓰인들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늦게 혼조를 만나 그 곡식 먹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우리의 초복(初服)을 닦았고, 우리의 본분을 즐겼습니다. 순로(蓴鱸)의 흥(奧)을 일으킴에 시를 읊어 파하시고 남행하였습니다. 소호 땅에 두어 채의 모영(茅楹)이었습니다. 금서(琴書), 화석(花夕)에 남긴 풍도 본받을 만합니다. 사당에 백세토록 모시는 일은 공의로 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백 년을 기다리다가 지금에야 처음으로 이루게 되었습니다. 윤(輪)하고 환(奐)하여 그 궁(宮)을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좋은 아침으로 드리오니 신위(神位)께서는 편안히 쉬옵소서. 많은 선비가 크게 힘씀에 길이 그 성취를 볼 것입니다. 제사가 질질(秩秩)하옵고 척강(陟降)이 양양(洋洋)할 것입니다. 생각에 감격을 더하고 삼강오륜을 더할 것입니다. 춘추로 게으르게 하지 아니하여 계우(啓佑)가 무강(無疆)할 것입니다.
소계공의 봉안문(奉安文)-진사 송이석(宋履錫)
임진난에 우리 임금께서 매우 분노하였습니다. 동래부가 가장 먼저 쓰러지고 열군이 기와장처럼 무너졌습니다. 적기(賊騎)가 장구(長驅)하니 누가 그 쏘는 화살을 대적하겠습니까? 종묘사직이 유리(流離)되고 임금이 북쪽으로 피난하였습니다. 이때 우리 공께서 분연히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아니하였습니다. 형제가 함께 학부(鶴府)로 돌아갔습니다. 형님은 창을 잡으시고 아우는 활을 잡으셨습니다. 남쪽 길이 보장되었으니 어찌 장순원(張巡遠)과 비슷하다 하겠습니까? 달아나는 적선을 불태우고 다시 충무공을 뵈었습니다. 공적을 막부에 올리니 누가 그 오른쪽에 있겠습니까? 나가서는 곤얼(閫臬)을 거느리고 들어서는 신거(宸居)를 따랐습니다. 벼슬이 높았고 녹봉도 후했으며, 덕이 밝고 명망도 드러났습니다. 그 사이 간혹 동발(銅鈸)을 차니 작은 강 남쪽이었습니다. 고주(孤舟)를 가볍게 저어 돌을 싣고 돌아왔습니다. 한 단의 내린 비단은 청백한 이에 대한 천포(天褒)였습니다. 남쪽 백성에게 남기신 사랑, 재와 산처럼 우뚝 높으셨습니다. 혼조에 정사가 어지러우니 북녘 바람이 그렇게 차가웠습니다. 손을 잡고 함께 돌아오시니 형악(荊萼)이 더욱 향기로웠습니다. 출처가 분명하였고, 진퇴가 바르셨습니다. 그 근본을 따라 묻는다면 효우가 성품이었습니다. 환한 얼굴로 많은 사람을 대하니 남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굴소(屈騷)와 같았고 늦게는 반필(班筆)과 같았습니다. 그 시종(始終)을 깨끗이 하셨으니 앙부(仰俯)에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소계의 한 구비는 공을 포근히 싼 갖옷이었습니다. 어진 이의 집을 지나가는 사람, 사모하는 덕이 더욱 깊을 것입니다. 사당을 세워 세상의 의표(儀表)로 삼은 것은 한결같은 공의(公議)였습니다. 현회(顯晦)에 때가 있으니 지금에야 비로소 정해졌습니다. 여기에서 제사를 받되 좋은 날 가려 신령님을 편안케 하옵니다. 훈지(壎篪)의 소리 들리는 듯하고 상체(常棣)의 꽃 잡은 것 같습니다. 옷깃을 여미고 띠를 맨 선비들이 이르러서 예의가 제제(濟濟)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기에 강림하여 이 형작(泂酌)을 받으소서. 춘추의 향의(享儀)하노니 계우(啓佑)가 끝없이 이어지오리다.
소호공의 상향축문(常享祝文)
백의로 창의하여 보국을 충성으로 하셨고, 끝까지 정절로 거처하셨으니 백 세의 높은 풍도였습니다.
소계공의 상향축문(常享祝文)
임금의 간난을 막았으니 예로써 공훈에 보답함이 합당하옵고, 쌍벽이 연상(聯床)하였으니 우리 백성에게 충정(充情)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사우(祠宇) 중수 상량문-참판(參判) 정홍경(鄭鴻慶)
엎드려 생각건대 안고경(顏杲卿), 안진경(顏眞卿)의 쌍절은 진실로 순신(殉身)에서 논할 것이 없고, 오부왕(吳涪王), 오신왕(吳信王)의 병명(幷名)은 더욱 보국에서 광채가 있었다. 반드시 이기고 반드시 취하는 것은 대개 덕을 같이 하고 마음을 같이 하는 데서 연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흥회(興恢)하는 때를 만나면 하늘이 영걸을 낸다고 하는데 백육(百六)의 액운을 당하게 되면 정사하는 사람이 비색(否塞)한 때가 가고 태평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요, 때맞춰 두세 명의 호걸을 내는 것이니 이렇게 하여 반드시 하늘이 맑아지고 땅이 평평해지는 공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소호, 소계 두 분 선생께서는 유학도 하시고 무(武)도 하셨으며 난형난제이었도다. 정영(精英)함을 한군데로 모은 것이 높기가 곤계봉의 맥과 같았고, 행의를 촉려(鏃礪)하여 충효의 가성(家聲)을 실추시키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소강절(邵康節)이 구슬을 희롱함에 용이 멀리 움직이는 것을 꿰뚫어 보았고, 반정원(班定遠)처럼 투필함에 모두 호두(虎頭)라 일컬었다.
불행히도 용사의 창양(搶攘)한 때 악인이 비희(贔屭)하는 것을 어떻게 하였겠는가? 왜인들이 바다와 육지에서 육량(陸梁)하니 어찌 지사(志士)가 통탄을 금할 수 있었겠는가? 임금이 의주(義州)로 파월(播越)하니 명나라 군사가 구원하기에 이르렀도다. 오호라! 백의로써 신정(新亭)의 눈물을 뿌리고 적수(赤手)로 일어나서 수양(睢陽)의 충절을 떨쳤도다. 홍안(鴻雁)이 줄을 이룸에 의기(義旗)를 불러모아 진지를 배열했고, 척령(鶺鴒)의 급난(急難)에 적봉(賊鋒)을 무릅쓰고 언덕에 계셨도다. 융기(戎機)를 가만히 헤아림에 운주(運籌)가 유악(帷幄)에서 계획되었고. 병식(兵食)을 지급함에 양향(糧餉)을 주거(舟車)로 운반하셨도다. 진양 포위의 위태로움을 풀었으니 누가 현녀(玄女)의 신술(神術)을 헤아렸겠으며, 제주에서 화공의 계책을 써서 마침내 적벽의 기이한 공적 이루었도다. 달마다의 승첩이 여러 번 조정에 올라가서 곧 천포(天褒)의 천강(荐降)이 있었도다. 팔순에 천작(天爵)으로 서추(西樞)에 올라 원종삼등(原從三等)이 되었고, 이품의 은함(恩銜)은 수군을 거쳐 오위(五衛)에 도총관을 겸했도다. 조운(趙雲)의 한 몸에 지닌 모든 담력, 백 번 싸워도 지친 일 없이 남았었고, 범려(范蠡)의 오호(五湖)로 가던 경주(輕舟)는 일곱 가지 계책에서 으뜸이었다.
어언(於焉)에 조정이 양전(兩銓)의 관직을 내리셨고, 사림들은 병향(並享)의 의논이 있었도다. 전에 영왕(寧王)이 공을 도모하되 끝맺음을 당부한 것은 실로 그 시대를 구제한 전략이었고, 향선생(鄕先生)을 사당에 제사할 때에도 예를 갖추는데 하물며 적개(敵愾)의 충절임에랴? 깊이 춘추의 제향을 어긋남이 없게 할 것이로다. 휘휘(翬翬)하게 창건을 맡기었고 완연히 풍우가 밤에 서로 대한 것 같으니, 제물에 좋은 향을 올릴 것이로다. 근자에 동우(棟宇)가 무너지려 한 지가 몇 해가 되었던고? 고고(鼛鼓)가 백도(百堵)에서 재촉하도다. 이미 헐리어 또 고침에 모인 유자들이 구름 같았고, 옛것을 유신함에 공역을 마친 것이 불일(不日)이었도다. 현산(峴山)의 머리에 남긴 사적은 느슨한 관대(冠帶)에 가벼운 갖옷을 상상하게 하고, 금궁(錦宮)의 옛 사당은 누른 꾀꼬리 푸른 풀잎에 새 빛이 나도다. 이에 장로(張老)의 송(頌)을 본떠서 용렬하나 노반(魯班)의 노래를 돕는다.
영차! 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돌을 쌓은 세 봉우리 햇빛을 받아 붉었도다. 풍운장이란 이름을 드러내고 수놓은 그림 흩날리니 왜구가 섭복(懾伏)되었는데, 이것이 누구의 공이던가?
영차! 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뾰족한 머리에 원기가 하늘에 닿았도다. 하늘이 쌍벽을 소대 위에 내리시니 백씨는 호(湖)요, 중씨(仲氏)는 계(溪)이시네.
영차! 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두 용이 잠겼다가 나타나 큰 못을 이루었네. 바람과 우뢰가 불러일으켜 천고(天鼓)를 울리는데 봉시(封豕)와 장사(長蛇)를 모두 죽이려 하는구나.
영차! 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오도산이 푸르러서 북극을 바쳤도다. 어느 곳에서 훈지(壎篪)소리 아직도 들리는고? 무우정(舞雩亭) 아래에 유궁(儒宮)이 열렸도다.
영차! 들보 위쪽으로 던지니 좌우의 제왕 곁에서 신령님의 성한 덕을 기리도다. 天吳에게 분부하여 우리나라를 도우라 하였으니 바람 없이 깊이 쉬는 푸른 먼 바다의 물결일세.
영차! 들보 아래로 던지니 나란히 타고서 밤마다 신마(神馬)를 놀게 하리로다. 농인(農人)이 자주 전진(前塵)을 말하지만 부러진 창날들을 주워 와서 사야(四野)에서 갈았도다.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을 한 뒤에 만민이 우러르고 백령(百靈)이 잘 지키시며 청금(靑衿)들이 모여와서 당실(堂室)로 올라오고 깨끗이 재계하고 붉은 정성으로 식전이 베풀어져서 차례대로 제사를 올리되 엄숙함이 있게 하소서. 전진(戰陣)에 용맹이 없는 것은 효도도 아니니, 옛 도리를 사모하여 배우고 닦아서 국가에 난이 있으면 목숨을 바치는 유풍(遺風)을 받들어 본보기로 삼을 것입니다.
사우(祠宇) 중수기(重修記)
어진 이를 제사지내는 서원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을 존숭하는 까닭이니 그 덕을 본받아 권장하고 사모하여 사민(斯民)을 흥기시키려는 것이다. 철성(鐵城)에 예부터 도산서원이 있어 증 이조판서 소호공과 그 아우 증 병조판서 소계공을 모셨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묘우(廟宇)가 기울어지고 구부려지니 지금 통제사 백은진(白殷鎭)이 부임한 이듬해 병오년에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당이란 높은 모습을 본뜨려는 것인데 진실로 그 면모를 바꾸지 않으면 사람들이 또 권태해질 것이니 무엇으로 뒷사람에게 보일 것이냐?”
라 하고, 곧 재목을 내어 발기하니 인사들이 다투어 서로 권하고 공사하는 사람이 많이 모였으며 백성들이 달려와 몇 달 만에 준공을 고하게 되었다.
이에 7월 어느 날 영위(靈位)를 모시게 되어 후손 상순(祥純)이 북으로 오백 리 길을 달려와서 그 일을 써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사람의 마음에 느낌이란 오래되면 잊어버리는 것인데 오래되고도 잊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그 느낌이 깊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 분께서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이 되었는데도 인심이 더욱 권장하니 그 위열(偉烈)을 알 수 있다.’ 고 생각했다. 바야흐로 도이(島夷)가 시돌(豕突)함에 열군이 숨기만 하였다. 이때 두 분이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팔을 걷고 적개하여 산대(籌)를 잡으면 적을 헤아리기를 손바닥 가리키는 것같이 하고, 칼을 가로 들고 휘두르면 굳센 적을 꺾기를 썩은 나무토막을 자르듯 하였으니 신운(神運)이 번개처럼 날카로워 일가(一家)의 충의를 이루었고, 이미 벼슬로써 명성을 이루었을 때에도 고향으로 돌아가 거조(擧措)를 물색하여 손을 이끌고 함께 돌아와 세상 밖에서 하촉(遐躅)을 이루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벼슬하는 자의 앞장이 되었고 때가 혼미하면 깊숙한 곳의 정취를 즐겼다. 아우와 화답하기를 일삼았고, 학문을 부지런히 배우고 힘씀이 본래 있었지만, 단지 공명에만 뜻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대절(大節)이 사람들의 마음에 있어 오래되어도 그치지 못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개 국가를 위하여 사절(使節)을 다하는 데는 사람에게 충성을 권장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백공은 가히 힘쓸 바를 알았다고 할 것이다. 생각건대 여정(輿情)이 한 가지로 칭송할 바가 아니면 또 어찌 숨겨진 빛을 드러내어 즐거이 불러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는 기록할 만한 일이며 시종토록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은 사인(士人) 허용규(許容圭)와 후손 최상운(崔祥雲) 그 사람이다.
금상(헌종) 12년 병오년(서기 1849년) 백로절(白露節)에 통정대부 전(前) 행사간원(行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지제교(知製敎) 완산(完山) 유치명(柳致明)이 찬한다.
소호공 환안(還安) 고유문(告由文)-유치명
전란에 임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을 사람들은 지략이라 이르나 어찌 한갓 그것뿐이겠는가? 근본이 바로 선 뒤에야, 눈은 크게 뜨고 적(敵)은 작게 보며, 의리는 무겁게 하고 일신(一身)은 가볍게 하여, 일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만이 자신을 던져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우리 소호공의 사람됨을 생각해 보건대,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소매를 떨치고 일어났으니, 그 의기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한 구만동에서는 지휘하는 대로 적중하였고, 한편으로 전투하고 한편으로 의려(義旅)를 모집하였습니다. 형제가 일체가 되어 창원과 진주에 이르러서는 모책(謀策)과 기요(機要)를 내었습니다. 스스로는 고군(孤軍)으로서 유둔(留屯)하여 적을 차단할 때에는 밤에 횃불을 밝히거나 기치를 성하게 하여 적을 현혹하였습니다. 풍운장이란 이름을 길거리에 크게 내걸자, 적이 두려워 도망하여 인민이 믿고 안도하게 되었습니다. 문충공 김성일이 만나보고 상을 주었으며, 다른 의병과 두루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모래와 책석을 이용한 기계(奇計)도 자기의 공으로 하지 않고 사양하였습니다. 공이 가리포진에 갔을 때 海浪이라 칭하며 바다를 덮은 적의 주함을 1개 횃불로서 태워 없앴으니, 공을 거둔 것은 계공에개 있지만 籌畫은 오직 공의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사랑하여 관질(官秩)을 더하고, 고관으로 임명하여 모두가 존숭하였으나, 뒤에 정치가 혼미하고 문란해지니 손을 잡고 함께 귀향하여, 끝까지 대절을 지켰고 형제간의 우애가 빛났읍니다. 뒤에 임금이 공로를 기록하고 증작을 펴서 이 도산서원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종전에는 새로 고치지 못하고 끌어 오다가, 통제사가 재목을 내니 많은 선비가 다 모였습니다. 높은 모습을 극칭(克稱)하여 공손히 옮겨 신궤(神几)에 모셨습니다. 좋은 때를 가려 고하오니 척강(陟降)을 한층 가까이 하옵소서.
소계공 환안(還安) 고유문(告由文)-유치명
운(運)에 응하여 뛰어나게 탄생하셨으니 그 덕은 외롭지 않으셨고 재(峙)를 연이어 함께 빼어났으니 영구토록 특수하였습니다. 환환(桓桓)하신 소계공은 소호공이 형님입니다. 백장(伯長)은 운주(運籌)를 하셨고 아우는 영성(英聲)을 떨쳤습니다. 해구가 미쳐 날뜀에 차례대로 서로 의지하였습니다. 절제(節制)는 형이 하셨고 공께서는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었습니다. 그 무용(武勇)을 떨쳐 매처럼 치고 범처럼 잡아 무찔렀습니다. 단창(單槍)과 필마에 뭇 오랑캐들이 숨을 죽였습니다. 이웃 원수가 이미 굴복함에 피난민들이 사방에서 모였습니다. 그 명성을 크게 떨치시니 문충공께서 무릎을 쳤습니다. 모든 의장이 협동하여 하늘을 우리러 피로 맹세하였습니다. 깃발이 가리키는 곳마다 성적(聲績)이 있었습니다. 이미 진주성을 회복하고 앞질러 대둔령에 이르렀습니다. 또 북치고 복병을 설치하니 왜구가 사로잡혔습니다. 나아가면서 싸우고 물러서면서 도륙(屠戮)함에 공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안민령의 대첩에 많은 장수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포위를 뚫고 많은 군사를 구해내니 삼군이 모두 안전하였습니다. 공이 왕부(王府)에 기록되어 가리포첨사 벼슬을 받으셨습니다. 탐라의 바다에서 또 기공(奇功)을 거두었습니다. 바람을 기다려 불을 놓으니 수만의 적함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성주(聖主)께서 가상히 여겨 관질(官秩)을 내리시고 녹권을 주셨습니다. 무(武)를 가지고서 문(文)으로 다스리시니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저절로 없어졌습니다. 용호(龍虎)의 부절이요, 금학(琴鶴)의 행장이었습니다. 명명(冥冥)한 먼 거조(擧措)에 백씨께서도 함께 나르셨습니다. 윤강(倫綱)이 성하지 못하니 우리의 천리(天理)를 즐기셨습니다. 이에 여기 사림들이 외경(畏敬)하고 숭앙하옵니다.
제탁(祭卓)을 연하여 함께 모시니 우리 군몽(群蒙)을 인도하옵소서.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기둥과 서까래가 헐었습니다. 통제사가 한탄하는 마음을 일으켜 헐고 떨어진 곳을 수리하였습니다. 사림이 권장하여 공역을 끝내고 좋은 날을 가려 신위를 모십니다. 오르고 내림에 우리에게 광명을 베푸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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