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玩物을 배척하는 기절(氣節)
인조 병술년에 이시백에게 나라에서 집 한 채를 내려주었는데 그 집 뜰에 전부터 한 포기 희귀한 꽃나무가 있었다.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꽃인데 중국에 사신 갔다 온 사람이 애지중지 옮겨 심은 것이었다.
하루는 중국에서 내관 한 사람이 일군을 거느리고 이 집을 찾아들었다. 임금의 하명을 받고 그 꽃을 궁궐 뜰에 옮겨 심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공은 임금의 하명에 응한다 응하지 않는다는 말도 없이 그 꽃 가까이 가서 꽃을 꺾어버리고 꽃뿌리까지 파내어버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내관에게 말했다.
『오늘날 국세가 아침에 어떨지 저녁에 어떨지 알지 못하는데 주상(主上)께서 어진 인재는 구하지 않고 꽃을 구하고 있는 것은 웬일일까.
나는 차마 꽃을 가지고 임금에게 아첨하여 나라 망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모름지기 이 뜻을 아뢰어라.』
하였다.
이 강직하고 기절있는 말을 들은 후 임금은 이 공을 대하길 더욱 후하게 했다 한다.
우리 옛 선비사상의 기틀 가운데는 대의 속에 사리를 매몰시키는 이같은 기절(氣節)과 강직이 신선하게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꽃이나 색다른 기물(器物) 등 완물(玩物)은 상지한다 하여 정사를 다스린 사람이 완물을 줄기면 곧 정사를 기울게 하는 요소로 받아들였기로 완물로서 아첨하여 사리를 취하는 것을 소인시하였던 것이다.
숙종은 군수 홍민회의 집에 남방 식물인 종려목이 있다는 말을 듣고 궁중하인을 시켜 가져오라고 시켰다.
이는 홍민회가 비단 신하뿐 아니라 임금님의 외척(外戚)이기에 그다지 맘의 부담 없이 그 완물을 가져오라 시켰던 것이다. 이에 홍군수는 뜰에 내려와 대궐을 향해 엎드려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신의 정수리에서 발굽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데 비록 털과 살이라도 감히 아끼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이 하찮은 초목 한 그루가 아깝겠읍니까. 다만 아무리 외척이라도 외정(外庭)의 신하가 되었는데 초목을 바치는 것은 심죄가 되므로 감히 하지 못하겠으며 신 또한 그것을 감히 그대로 가질 수가 없읍니다.』
하고 당장에 이 종려나무를 뽑아버렸던 것이다.
궁중 하인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리니 임금은 홍군수를 몹시 칭찬하고 명령하여 대궐 후원에 있는 종려나무를 캐어 그 나무를 캐어왔던 민간 옛주인에게 돌려 보냈던 것이다(국조보감).
완물을 두고 이같이 기절을 세운 이야기는 이밖에도 많다.
충무공 이순신이 훈련원에 말직으로 벼슬하고 있을 때, 당시 정승인 유전(柳㙉)이 이공에게 좋은 전통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활쏘기 시합을 할 때 공을 불러서 전통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엎드려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전통을 바치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받는 것을 어떻다고 말하겠으며, 소인이 그것을 바치는 것을 어떻다고 말하겠읍니까.
전통 하나 때문에 대감과 소인이 함께 비루하고 욕된 이름을 얻는다면 깊이 미안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유정승은,
『그대의 말이 옳다』
고 거듭 말했던 것이다. <충무공전서〉
민백형(閔伯亨)은 기천 사람으로 왕자의 스승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그가 정성 들여 기른 매화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가 외직에 보임되어 남도로 갈 즈음에 왕자가 매화를 달라면서
『부왕에게 갖다 바치려 하오』
하였다.
이에 민공은,
『소동파의 시에
「낙양 상공은 충효한 집인데도 / 가련하여 역시 요황화를 바치누나」
하였습니다.
바깥 사람들이 왕자께서 바친 것인 줄을 모르고서 내가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바친 것이라 한다면 사람들의 희롱하는 바가 될까 두렵습니다』
했다. 이에 왕자는,
『그렇다면 나의 책상 옆에 놓고 볼 때마다 스승을 생각한다면 그 아니 좋지 않겠는가』
하니 그때야 민공이 분매를 바쳤던 것이다.
어떤 권력 사회이건 권위 앞에서는 의로움과 의롭지 않음과의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오히려 의로움으로써 그 권위자의 비위를 거슬르고 눈 밖에 나는 것보다 의롭지 않음을 통해 이 권위자에 아첨함으로써 눈 안에 들려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 御命을 어기는 氣節
이 인간상정에서 의로움을 구제하는 것이 우리 옛 선비의 기풍이었던 것이다.
조징규(趙徵奎, ?~?)는 어의였다. 항상 임금 곁에서 가까이 모시어 의술이 자못 효험이 있었기로 효종이 잘 보아서 내관을 불러들여 뜰에 세우고 어의에게 높은 품목을 받게 해주라고 명령했다.
이 임금의 명령을 당시 판서이던 허적에게 고하니 허공이 말하기를,
『임금의 명령이 승정원에서 내려오지 않고 중간 사람으로부터 전해졌으니 따를 수 없다 』
하고 일부러 어명과는 달리 하품의 녹을 주었던 것이다.
임금이 크게 성을 내어 하명했던 내관을 잡아들여 곤장 80대를 치니 내관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일이 있은 직후 허적은 경연에서 이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그 태형을 가했던 내관에게 한등 높은 벼슬을 내리고 뉘우치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 <공사견문록>
단종 계유년에 「역대병요」의 편찬이 완성되었다. 처음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이 책을 편찬케 하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그 편찬의 총책임을 맡게 했는데 그 책이 문종을 거쳐 그때야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말하여 이 편찬에 참여한 여러 학사들 벼슬의 계급을 승진시켜 그 공로를 보상했던 것이다.
하위지(河緯地)도 당시 사헌부 집의로서 편찬에 참여했기로 중훈대부의 계급에서 중직대부로 승진되었는데 굳이 이 승급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임금이 어리고 국가가 불안한데 대군이 벼슬과 상을 가지고 조정의 신하들을 농락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의하며 뿐만 아니라 조정의 신하들도 종실의 농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기절의 뜻에서였다.
여러 번 글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므로 하루는 임금과 면대하여 생각한 바를 다 말하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세종 때 하위지가 책을 펴낸 공으로써 승급을 주었을 때 사양하지 않았던 전례를 들어 변덕이 심하니 만나지 않는것이 좋겠다는 주변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않자 하 위지는,
『세종때에는 은혜가 임금에게서 내려왔으므로 받았지만 지금은 은혜가 아래에 있는 대군에게서 나왔으니 받을 수 없읍니다. 신은 사세가 극히 난처하여 조정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부득이 집의의 관직을 고쳐서 집현전 직제학을 삼았던 것이다. <서애집>
정말 선비의 행동은 용기있는 것이었다.
인조가 세자와 더불어 어수당에 나와 앉아서 이시백 등 두어 신하를 불러들여 임금이 친히 술잔을 잡아 공에게 주어 마시게 하고 또 세자를 돌아보고,
『너도 한 잔을 부어 주어라』
하니 이공은 황송하고 감사하여 모두 받아 마셨다.
■ 오늘에 되살리고픈 精神
임금이,
[근일에 신하들이 나라일에 충실하지 못함이 심하다』
고 하자 이에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신하들이 나라일에 성실치 못한 것을 걱정하지 마시고 전하의 마음이 신하들에게 성실치 못한 것을 걱정하소서』
하였던 것이다.
여간한 기절과 용기없이 할 수 없는 말을 그는 했던 것이다.
■ 氣節小兒病
이충무공이 이미 무과에 등과했으나 권세있는 집에 찾아 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이가 판서가 되었을 때에 공의 사람됨을 듣고 또 일가간의 정의로 사람을 시켜 한 번 만나기를 청했더니 공은 이를 사양하고,
[일가간에는 서로 볼 수 있지만 그가 지금 판서로 있으므로 만날 수 없다』
했다. <택당집>
선비의 뼈대인 이 기절과 강직이 고식화하여, 경우와 상황을 무시해서 행해짐으로써 부작용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월정만필」에 보면 다음과 같은 정사가 기록돼 있다.
조인규의 가친이 꽤 강직한 데가 있었다.
그 가친이 연산군 때 장령 벼슬에 있었는데 어느 날 출근할 때 새로 제주목사에 임명된 어떤 사람이 종루 옆 남의 집에 기식하면서 장령보기를 청했던 것이다.
그 집에 찾아 들어가니 임명받은 제주목사는 다음과 같이 청을 한 것이다.
『본래 몸에 병이 있고 게다가 제주는 바다 밖의 땅인데 만약 그곳으로 부임하게 되면 장독에 걸려 살아 돌아오기 어려우니 장령이 만약 나를 제주목사의 직에 합당치 못하다고 논박하여 체직케 해주면 매우 다행이겠읍니다』
이에 이 장령은 그 집에서 나와 직장인 사헌부로 출근하지 않고 바로 대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에 제주목사 모(某)가 길옆에 서 있다가 신을 보기를 요구하여, 자기를 체직되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본시 풍절이 부족하였기로 그가 감히 사사로이 청탁한 것이오니 청컨데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연산군은 이 말을 듣기가 바쁘게 그 제주목사를 잡아들여 국문한 끝에 마침내 죽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조인규는 가친이 이 일을 두고 평생 동안 한탄하고 후회하였으며 자기에게 자손이 없는 것도 이런 적악(廣惡)의 소치라고 말했다 한다.
물론 강직한 것은 좋으나 청탁하는 현장에서 거절을 하거나 또는 나무라는 것으로 그쳤던들 이같은 후환은 없었을 것이다. 최소한은 이 청탁을 묵살해 버렸다 해도 그의 강직한 인품에 누가 된다는 법은 없었을 것이다.
이를 굳이 임금에게 고한다는 것은 일종의 선비사회의 저류에 깔렸을 강직 소아병의 소치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소아병이 형성되었으리만큼 우리 선비들 간에는 강직과 기절이 보편화돼 있었던 것이다.
옛 벼슬아치의 일생처럼 부침이 심한 일생은 드물다.
더러는 심했던 당파 때문이라지만 그보다 이 선비의 조건인 강직과 기절에 와서 부딪치는 상황과의 갈등과 알력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현대인이 상실한 가장 소중한 전통적 황금 가운데 하나로서 이같은 선비의 조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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