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이의 犯禁을 告発한 閔判書
민지제는 강직하여 법을 잘 지켰다. 형조판서로 있을 때 비(妃)의 누이동생의 시집인 참봉 홍우필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지제는 본시 술을 즐기므로서 누이가 집에서 정성들여 빚은 술을 내왔다.
술맛은 아주 좋았으나 안주가 김치 한 가지 뿐이었다.
『너희 가난한 집에서 이런 맛좋은 술을 어디서 구했느냐』하며 입맛을 다셔가며 마셨다.
바로 그 전날이 홍참봉의 생일날이었기에 술을 담갔다. 또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집안사람을 대접했던 것이다. 당시 금육(禁肉)의 금령이 내려있던 때고, 또 민공의 법 지키는 것이 엄하였기로 겁이나 감히 쇠고기를 내놓지 못하고 다만 술만 대접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에 누이는一
『어제는 시아버님의 생신이므로 술은 조금 빚었습니다』
고 대꾸하자 민공은 술을 자꾸 청하여 마시며 기뻐하더니―
『참으로 이른바 유주무효(有酒無着)라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
했다.
누이는 이 말을 듣고 고기를 내어놓고 싶은 생각이 문득 나서 한참 머뭇거리다가 미리 다져놓고 내놓으려고ㅡ
『한 가지 사연이 있는 데 나무라지 아니하겠읍니까.』
고 물었다.
말해보라는 오라버니 앞에서 다시 염려가 되어 머뭇거리고 있자 민공은
『무슨 일이 있기에 이같이 다심(多心)하느냐. 비녀라도 잡혀서 안주를 사 오너라』
했다.
이에 누이는 이실직고를 한 것이다.
『시아버지가 본래 오빠의 강직한 성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 감히 고기를 내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했다. 이에
『빨리 그 고기를 구어 들여라』
했다.
누이는 됐구나 싶어 기뻐하여 구워 올리니 지제가 술과 더불어 실컷 마시고 먹었다.
그가 일어나자 누이는 옷을 붙들고 당부하길
『너무 살피지 마시오. 』
하자 그는 웃을 뿐이었다.
문을 나오자마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조의 아전들에게
『이 집은 범도(犯屠)를 했으니 이 집 종을 잡아 가두어라』
고 분부하여 집안은 일대 소란이 벌어졌던 것이다.
무안해진 누이는 밥도 먹지 않고 울었으며 홍참봉은 이 며느리의 소행을 성내어 꾸짖었던 것이다.
단 하나뿐인 종이 갇혔는데도 그 종을 끌어낼 28량의 속전을 마련할 수 없어 그냥 있었는데, 민 판서가 자기의 봉록 가운데서 28량을 내어 속전을 갚고 그 종을 풀어 주었던 것이다. 홍참봉의 불만에도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공이 법을 엄하게 지키는 것은 가상한 일이긴 하나, 금육을 먹지 말고 종을 가두든지 할 일이지 그것을 먹고 나서 금령을 집행한단 말인가』
이에 민 판서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 것이었다.
『지친의 정으로 여동생이 이미 권하는데 어찌 먹지 않을 수 있으며 또 금도(禁屠)를 범한 사실이 내 귀에 들어왔는데 어찌 사정(私情)을 쓸 수 있겠읍니까.
만약 집에서 잡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들 비록 백 마리의 소라도 내가 먹기만 했을 뿐이지 어찌 법으로 다스렸겠읍니까』
민지제는 이와 같은 일이 매우 많았다. 비록 지친(至親)일지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지만 일단 다스리고는 그 뒷일은 자기가 감당함으로써 지친의 정이나 도리와 양존시켰던 것이다.
이러했기로 사람들이 비인정이라고 책하진 않았다 한다. 〈二旬錄〉
한국인은 흔히들 의리, 인정이 강하여 그 인간적 요인을 기강(紀綱)에 선행시킨다고 한다. 곧 인정이 통하는 종적 인간층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무릅쓴다는 점에서 한국적 인간관계가 성숙되었다 하고 또 한국적 인간관계의 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가족적 인간덕목에 중점을 두는 한국적 가치관에서 민지제의 행동은 기강도 구제하고 인간적 덕목도 구제하는 이상적 처세를 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이처럼 두 가치관을 양존시키고 또 그 모두를 구제하게끔 된다는 법은 없다.
사회적, 국가적, 대의(大義)적 가치를 선택하느냐 가족적, 인정적 가치를 선택하느냐의 양자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숱한 상황에서 우리 한국인은 어떻게 처세했던가.
이 택일의 시련에서 한국인의 정신적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 告尊長論
인조 4년 10월에 임금은 형조에서 올린 죄인들의 죄안을 읽어보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왜냐면 그 중에는 상전(上典)의 범죄를 관에 고발하지 않았다는 상전불고지가 죄가 되어 잡혀든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당장에 형조에다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부자(父子)의 의리와 노주(奴主)의 분이 지엄하고 지중한데 종으로 하여금 상전을 고발케 하고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고소케 한다면 이야말로 패속(敗俗)이 아니고 뭣이랴. 형조가 하는 일이 심히 그릇되고 어긋났으니 해당 당상(堂上)은 깊이 배려하여 금후로는 비록 아버지에 관해 아들에게, 형에 관해 아우에게, 상전에 관해 종에게 설사 증거를 얻기 위해 물어볼 일이 있더라도 묻지 않음으로써 풍속을 돈독히 하고 명교(明敎)를 밝히도록 하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바로 이듬해 7월에 김경현이란 이가 그의 누이동생 말치가 쓴 한글 편지를 근거로 하여 누이의 남편 김홍원이 윤운형, 유인창 등과 모반을 음모했다고 고변을 했다
국가변란을 미리 알리는 고변인데도 인조는 음모 여부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남편을 고발하는 처첩이 생기다니 한탄을 하고 아무리 미천한 계집이기로서니 강상을 무너뜨리는 쪽이 보다 중죄라고 하고, 말치를 잡아가두게 했던 것이다.
또 인조는 병자호란의 대공신(大功臣)인 완풍부원군 李曙(이서, 1580~1637)와 호조판서 최명길을 파면하는 용단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형조에 근무했을 때 종을 잡아다가 그 상전의 죄를 입증시킨 사건과 아내를 잡아다가 남편이 지은 죄의 증인을 삼은 일이 각각 뒤늦게 발각되어 하교(下敎)를 어겼다는 이유로 중신을 파면시켰던 것이다.
그 후에도 인조 24년에 아버지의 절도죄를 고발한 딸을 사형에 처해 그 목을 시장에 걸어 효수까지 하는 극형을 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법치(法治)보다 강상(綱常)을 우선시킨 사실은 한국 특유의 사상적 배경의 필연이며 그 필연은 어떤 진리보다 강상을 선행시키는 선비사상의 단적인 표현이다.
강상이란 곧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약칭으로 삼강은 군신 · 부자 · 부부의 도요, 오상은 부는 의(義)로 모는 자(慈)로 형은 우(友)로 제는 공(恭)으로 자는 효(孝)로 사람이 행하여야 할 다섯 가지의 바른 행실을 가르친 것이다. 통틀어 사람이 지켜야 할 대도(大道) 최고의 도덕률을 뜻한다.
이 강상을 보면 삼강 중에 군신을 제외한 강, 그리고 오상의 모두가 가족중심적인 윤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본다.
아들이 부모를 숨기고, 아내가 남편을 숨기고, 손자가 할아버지를 숨기는 것은 모두 이 삼강오륜에 준한 미덕으로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숨겨주는 것은 장려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강상을 법치에 우선시킨 것은 태종때 비롯되어 세종, 중종도 특히 강조하였고 유교에 체질화되기 시작한 성종 이후부터는 선비체질로 정착해 내려 인조 때에 이르러 극치에 이른다.
인조의 이 강상정치로 고존장론(告尊長論)은 불법의 판례로 정착되고 만다.
대흥산성에서 군수의 은을 훔친 혐의자가 잡혔었다. 포도청에서는 이 혐의자의 열두 살 난 아들을 잡아 와서 그의 아버지가 은을 훔친 절차를 문초했다. 겁에 질린 이 아이가 그 자초지종을 고백했고, 어머니가 포청에 가거든 말하지 말라고 한 말까지 고백을 받았던 것이다.
또 인빈묘를 도굴하려는 작변이 있자 이 무덤을 봉사(奉祀)하는 왕자가 혐의자의 아들을 잡아다가 고문, 자백하지 않자 임의로 정죄하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두 사건을 두고 포도대장과 형조판서 간에 격론이 있었을 때 당시 좌의정이던 남구재는
『벽을 뚫고 은을 훔치는 일은 기사지소(事小至小)하고 강상을 패상(敗傷)시킴은 기사지대(其事至大)하다』
고 전제하고 이 문제를 사회적, 대의(大義)적으로 처리하질 않고 가족적, 인정적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사고구조는 지친지상(至親至上)주의였다.
□ 人情과 義理 사이
사회학에서 어느 한 개인은 4개의 인간층을 동심원적으로 거느리며 살고 있다고 개념짓고 있다.
곧 나를 중심으로 하여 가장 인근한 동심원은
제1인간층이라 하는데, 이 인간층이 바로 부모·형제·처자를 비롯, 이해를 초월하고 서로 희생할 수 있는 친근한 사람으로 이룩된 그런 가족적 인간관계로 맺어진 인간층이고
제2인간층은 직장에서 매일 만나는 동료, 또는 한마을에서 같이 사는 비교적 친밀한 인간층으로 의리가 통하는 층이다.
그 밖의 동심원인
제3인간층은 옛날 동창생, 사돈의 팔촌 등 내가 알고 있지만 비교적 친밀하지 않은 인간층이고
제4인간층은 내가 모르는 타인으로 무한대 인간층이다.
민족이나 종족 문화권에 따라 이 인간층에 대한 친밀도의 농도에 큰 차이가 있어 그 민족, 문화권의 특성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이를테면 미국 사람들은 제1인간층이나 제4인간층이나 친밀도에 있어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물론 형제간이 보다 친밀하지만 낯선 외국인도 그다지 낯설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낯선 사람끼리 모이는 파티에 길들어 있으며 비록 낯선 사람과 만났더라도 화제가 무궁무진하여 즐겁기만하다.
이에 비해 한국인은 제1인간층에서는 완전할 정도로 친밀도의 농도가 짙으면서 제4인간층에게는 적대감정을 품을 정도로 친밀도가 희박하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방어 본능이 작동하고 또 제4인간층의 사회인 공공(公共)에 대해 그토록 미숙하고 공공정신이 부족한 것도 모두 이 탓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또 인류의 역사가 생긴 이래 이해타산이 없으며 서로를 희생하는 가장 성숙된 인간관계가 바로 한국인의 이 제1인간층에 있어서의 인간관계일 것이다.
만약 한국인의 제1인간층에서 형성된 인간관계가 가족이란 폐쇄적 테두리를 뚫고 지역사회 공공사회로 확대해 나간다면 어쩌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양질의 인간사회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그 같은 자원을 가장 풍부하게 잠재하고 있는 그런 세계인인 것이다. 결국 종전 같이 가족이라는 폐쇄적 테두리로부터 사회 국가라는 개방된 차원으로의 이 인간 관계의 확대야말로 현대 한국인이 한국사에 지고 있는 의무가 아닌가 싶다.
한국인의 의리 · 인정을 두고 「세계의 문화중 별난 도덕 의무 가운데서도 가장 진기한 것의 하나」라고 인류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렇게 색다르고 이색적인 의리와 인정이며, 또 그것이 그토록 한국적인 것이다.
인정이 사실상 있지 않은 데 인정이 있는 체 보이려는 발상은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허례에 가까운 정초나 추석의 선물에는 인정보다는 어떤 타산이나 노리는 것이 내포될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속으로는 싫어하는 자의 송별회에 나간다든지 또 달갑지 않은 상관의 자녀 결혼식에 얼굴은 내어 보여야 한다든지 하는 의리상 교제 등 이런 의례들은 역시 의리 · 인정의 차원에서 성립된다.
이것은 한국에서 심한 편일 뿐 한국 특유의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세계에 공통된 것이다. 다만 그것은 소위 제1인간층으로 불리우는 정이 통하는 동심원(同心圓) 밖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습화 · 형식화된 의리의 적용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1년에 몇 번씩 「걸 스카우트」의 소녀들이 기금모집을 위해 호별방문을 하면서 과자를 팔고 다닌다. 이 아이들 가운데 아는 아이가 있으면 그 과자를 사주게끔 돼 있다. 대체로 이 과자는 맛이 없게 마련이므로 속맘으로는 사기 싫으면서 사주게끔 돼 있는 것이다.
본래는 인정이나 애정의 표시여야 하는 「팁」도, 본래의 그 같은 감정에서 준다는 법은 희귀해지고 있다. 「파티」란 것도 그저 사교적 접촉의 필요에 의해 초대하고 또 초대될 뿐, 인정의 교류를 위한 본래적 목적은 퇴색돼 가고 있다.
이 같은 의리 인정의 격식화에도 긍정적인 가치와 부정적인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부정적인 가치란 어떤 인간관계에서 인정이나 의리를 유지하는 척함으로써 그 관계에서 얻어지는 공리적 면을 노리는 경우, 그것은 부정적 가치요 의리·인정이 다른 목적에 이용당하는 것이 된다.
반면에 아무리 의리ㆍ인정이 격식화됐다 치더라도 퇴색하기 쉬운 그런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의리와 인정을 확인하는 행위, 공리적인 저의나 여타의 목적이 개재되지 않는 그런 인정행위나 의리행위는 긍정적 가치를 형성하며 이 세상에 드문 미덕의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 덕목을 우리 선조들이 희귀하게 누렸던 것이다.
이 같은 인정·의리의 지속을 우애의 덕목이라 한다. 물론 구미사상 가운데 도 우애의 덕목은 있으나 그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우애인데 비해 한국적 우애는 비합리적이고 정념적(情念的)이며 불가변의 우애인 것이다.
■ 忠臣과 奸臣과의 友愛
조선왕조 중종때 학자 김안국(金安國)은 성질이 꾸밈이 없고 지성으로 사람을 사랑하였다. 간신으로 유명한 김안노(金安老)와 젊었을 때부터 절친하였는데, 그 후 김안노가 하는 일들이 사람들의 눈을 거슬리게 할 때마다 김안국은 항상 충고하고 책망을 하곤 했다. 딴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항상 원한을 품고 있다가 복수하게 마련이었던 표독한 김안노도 김안국의 충고에는 성낸다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김안노가 정권을 휘어 잡던 때 일이다.
어느 날 김안노가 김안국 · 김정국(金正國) 형제가 사는 집에 놀러 와서 이 형제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을 잔 일이 있었다.
잠자리에서 김안국은 김안노에게 너무 준열하게 충고하길래 그 말을 듣고 있던 김정국이 민망할뿐더러 반드시 화가 돌아올 것이라는 공포까지 느끼었다. 그래서 옆에 누워있는 형의 발을 꼬집으면서 말하지 말도록 하니, 김안국은 일부러 모른 척하고,
『너는 왜 자지 않고서, 내 다리를 꼬집느냐.』
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후 김안노가 형벌을 받아 처참하게 죽어가자 김안국은 아우 김정국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안노의 간악한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마는 우리 형제는 이미 그와 교분이 두터웠으니 부디 그 죄악을 말하지 말 것이다』
하고, 매양 먹을 것을 어렵게 사는 그의 유족에게 보내주곤 하였던 것이다.
우애라는 덕목은 그 사람의 간악한 성품이나 그 사람의 죄과에 선행돼 있었다는 것이다. 일단 맺어진 우애가 그 사람이 죄인이나 위험인물이라서 그 우애를 절단한다는 법도 없고 또 그 사람이 위인이나 정권을 쥐었다 해서 우애를 돈독히 한다는 법도 없다. 우애의 순수한 차원에서 의리를 지속시키는 슬기를 우리 옛선비들은 누렸던 것이다.
김남창(金南窓)이 금산의 원으로 있을 때 옛 친구였던 조관(朝官)이 사명을 띠고 금산고을에 내려왔다.
이 소식을 듣고 역시 더불어 옛 벗이었던 중봉 조헌(重峰 趙憲)이 옥천에서 일부러 만나보고저 금산까지 와서 이 세 친구는 등불을 달고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했다.
이 세 친구와 더불어 절친했던 경함 이발(景涵 李潑)에 말이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발은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음을 당해 모두 원통해하는 선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는 서슬이 파래서 기묘옥사 이야기를 입 밖에 낸다는 것마저도 위험시했던 때였다.
조관이 말을 꺼냈다.
『경함이 역모에 같이 참여하였다는 것은 전혀 그럴 이치가 없지만 그가 역적과 친근하게 지냈으니 사실을 따져 죄를 정하자면 죽는 것도 또한 괴이할 것도 없다』
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체제적인 발언이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중봉 조헌은 들고 있던 술잔을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등을 지고 돌아앉으며 그 조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함은 본래 자네와 친한 사이가 아닌가. 경함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자네 말이 오히려 가하지만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자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군자의 사우(師友)에 대한 도리가 과연 이와 같은가』
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애와 의리는 이같이 표리가 되어 한국인의 맘속에 체질화돼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우애는 죽음 같은 종말에도 구애받지 않는 영속성의 것인데서 보다 가치를 형성한다.
■ 義理타고 遺傳하는 友愛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북방으로 귀양가게 되어 있을 때는 자타가 사사(賜死)당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한 사람이 묻기를
『지금 나라일이 이와 같고 또 북방에 오랑캐의 걱정이 날로 심해지는데 대감의 집안일을 누구에게 부탁하고 가십니까』
하니 공은 태연한 기색으로 다음과 같이 대꾸했던 것이다.
『나에게 두 친구가 있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한 사람은 먼 데 있어 작별하지 못하고 그저 간다. 』
죽은 분은 한음(漢陰)을 뜻하고 먼 데 있다는 분은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를 뜻한 것이었다.
백사가 죽기 전에 그의 서자 기남(箕男)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정경세가 이조판서가 되면 반드시 너의 궁한 것을 돌보아줄 것이니 네가 가서 보고 나의 아들인 것을 알게 하라』
인조 때에 정경세가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기남을 만나자 백사의 아들인 줄 알고는 놀라고 슬퍼하며 그 궁하게 사는 것을 듣고 상당한 관직을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애는 의리를 타고 유전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우애의 유전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사생관(死生觀)을 달리해 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백사가 아무리 도량이 크고 용기있는 분이었다 하더라도 이제 가면 죽을 마당에서 그의 가족이 먹고살 가산의 마련이 없다는 데 맘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애라는 선비사회의 의리가 확고부동한 것이었기에 그토록 태연스럽게 떠날 수 있고 또 죽어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죽음을 각오한 의로운 일을 용기 있게 저지를 수 있는 용기 또한 이 우애의 의리, 내가 죽어 없어도 내 식구는 돌봐줄 사람이 있다는 그런 심산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선비의 사생을 건 용기의 원천으로 이 같은 의리가 수반되었음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옛 선조가 이 우애를 어느 만큼 중요시했고 그 가치를 크게 두었던가는 다음 일화에서 엿볼 수가 있겠다.
정승 윤승훈(尹承勳)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 황으로 수찬(修撰) 벼슬에 이르렀는데 둘째 숙은 공부를 하지 않고 방탕만 하여 윤정승이 항상 꾸짖기를 일삼았던 것이다..
하루는 정승이 숙을 모시고 다니는 하인에게 물었다.
『네 주인이 어디를 잘 다니며 같이 잘 노는 자가 누구이냐』
『구내금위(具內禁衛)란 이가 있는데 항상 대감이 나가신 틈을 엿보고 사랑방에 와서 놉니다』
정승이 그 하인과 은밀히 약속하여 거짓 나가는 척하고 뒷문으로 해서 도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 틈에 구(具)가 란 아들 친구가 사랑방에 기어든 것이었다. 정승이 몰래 엿보고 들으니 이들은 베개를 나란히 하여 누워서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具: 『네가 기생 아무 누구와 정을 통했는가. 』
尹: 『은 백냥을 내라 하는 데 그 같은 거금을 내가 어디서 구하나. 그래 엄두를 못내고 있다. 』
具: 『어째 사나이가 은 백냥 때문에 하고 싶은 바를 못 할 수가 있느냐. 내가 은을 둔 것이 있어 너를 위해 성사시켜 주겠다. 네가 심복으로 부리는 종이 있는가.』
구는 글 몇 자 적어서 윤의 종으로 하여금 목화대(木花臺) 근처에 있는 아무개에게 전하게 하였더니 조금 있다가 은 백냥을 갖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서 한 번 재미볼 자금으로 하라면서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것을 숨어보던 윤정승은 탄식을 하며 다음과 같이 되뇌였던 것이다.
『내가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벼슬이 수상에 이르렀어도 은 백냥을 주는 우애있는 친구가 없었는데 이 아이는 이와 같은 친구를 사귀었으니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고 그 하는 대로 맡겨두었던 것이다.
이만한 우애면 어떠한 가치라도 이루고 만나는 옛 선비 사회의 보편화된 인식 때문이었다.
숙이 후일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원수·병조참판에 이르렀고 구는 곧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인 구인구(具仁垢)였던 것이다.
표리관계에 있는 우애와 의리의 덕목은 한국인을 도덕적으로 성숙시키고, 또 한국인을 가장 한국인답게 한 문화적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이 같은 덕목이 근대화된 과정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적 성향 때문에 증발돼 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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