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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22.寬容性向(관용성향)

구글서생 2023. 6. 11. 05:01

선비의 의식구조-22.寬容性向(관용성향)

■ 官權에 눌린 人權의 숨결

 

백인걸이 과거에 올라 창평현감으로 있을 때 늙은 어머니를 위해 자주 잔치를 베풀었다. 이에 고을을 잘못 다스린다는 훼방이 있어 당시 전라감사이던 최보한이 이를 탓하여 파면을 시켰던 것이다.

백인걸이 정언벼슬 시절에 최보한을 탄핵한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를 보복한 것이라고들 말했다.

 

인종 초년 국상(國喪) 중에 최보한이 기생을 끼고 놀다가 적발되어 파면되었다가 명종이 즉위한 후 대사령을 내려 복직하게 되었으나 사간원에서는 이를 부당하다고 탄핵하려 했다.

 

이때 사간원(司諫院)의 헌납 벼슬에 있던 백인걸은 이 탄핵거론에 반론을 폈다.

『최가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것은 풍문으로 들은 것이니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옛말에 군자는 너무 심한 일을 하지 않는다 했는데 어찌 다시 태평 세상에 남의 앞길을 막을 것인가』

이 반론 때문에 최는 탄핵을 받지 않고 기용되었던 것이다. 최는 사간원에 백이 있는 줄 알고 전날의 사감(私感)으로 탄핵받는 줄 알고 있다가 이 뜻밖의 관용에 전비를 뉘우치고 인간적으로 성숙했다 한다.

 

그 후 을사사화 때 맨 먼저 걸려든 백인걸이 맨 처음 그물에 걸렸다가 죽음을 면했는데 그것은 최보한의 힘이었던 것이다.

〈倍溪紀聞〉.

 

관용은 이처럼 덕을 주변에 발사한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복사열처럼 주변을 훈훈하게 하고 이해와밤목과 갈든과 타산과 원한과 이기와 모험 같은 악으로 이어진 인간관계를 녹여 흘려버리고 선으로 인간관계를 재구성시킨다.

 

다른 실례를 들어본다.

 

경주부윤으로 있던 유량은 어떤 일로 박공언을 위협했더니 박은 이에 굽히질 않고,

『공의 나이에 이르면 나도 또한 공과 같은 지위에 오를 것인데 어찌 구박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고 항변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태조 정축(丁丑)년에 유량이 항복한 왜인과 결탁하여 배반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고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다스림을 받았다.

큰 옥사를 다룰 때 사헌부에서는 그 피의자와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물색하여 옥사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시사벼슬에 해당되는 품수의 벼슬아치로 유량과 원한관계에 있는 인물을 물색했던바 박공언이 지목되어 임명된 것이다.

 

박공언이 사헌부에 들어앉자 유량이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공이 반드시 옛날의 원한으로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리를 다 끝내고 사헌부 아전이 문서를 갖고 시사 앞에 나아가자 박시사는 붓을 던지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

『죄 없는 사람을 죽음에 빠뜨리는 것을 나는 하지 못하겠다』

하고 끝내 서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유량을 죽음에서 구제했던 것이다.

 

이로써 사헌부의 뜻에는 거슬렸지만 그 관용으로 그의 후광은 길이 뻗었던 것이다. 〈朴氏家乘〉

 

이 같은 대사로부터 사소한 신변의 일에 이르기까지 옛 한국인의 가치관 속에 관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그 사소한 일시의 관용에 대한 실례를 들어 본다.

 

鄭陽坡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수청든 기생을 옆에 두고 변소에 갔더니 그 사이에 통인(通引)이 이 수청든 기생을 가로채어 공이 자는 방에서 간음을 했던 것이다.

이 간음 현장을 아전 하나가 엿보고 이를 감사에게 고한 것이다. 그 무렵 그 고을 수령들이 그가 사랑하는 계집을 관계하면 대개 웃사람의 명예를 욕보였다는 죄목을 적용하여 곤장으로 때려 죽이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고 또 그런 사례가 자주 있었던 터라 통인은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대령이 내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전의 고함을 듣고 난 정양파는 크게 웃으며,

『이것이 어찌 나한테 고할 일인가. 내가 그놈이 좋아하는 계집을 안고 노는 것이지 그놈이 어찌 나의 좋아하는 계집을 관계한 것이냐.』

고 했다. 〈柳翁聞錄〉

 

관용은 관권사회에서 유리되게 마련인 인본주의의 숨결이기도 했다. 곧 관권사회에서 벼슬을 하면 그 벼슬에 따라붙는 녹 이외에 권세라는 벼슬 덤이 붙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 옛 선조들은 그 벼슬 자체보다 그 벼슬에 따라붙는 벼슬 덤에 보다 관심이 컸으며 이 벼슬 덤 지향은 현대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마이너스 가치를 형성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관리의 봉급이 적은 이유는 이 같은 권세라는 벼슬덤으로 경제적 수탈이 가능했기 때문이며 벼슬이 좋고 나쁨을 그 직위에 두지 않고 직능에 두는 오늘날의 취향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이같이 하여 벼슬덤은 여느 백성에게 횡포로 작용하게 마련이며 사회적 계급관보다 이 권세에 의한 비평등화가 평등주의와 인본주의를 말살해 온 것이다.

이 결함을 메워온 것이 곧 관용이라는 덕목이었다.

 

선조때 명상 이항복이 조정에서 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여염여인이 말 앞으로 가로질러 갔다. 이것은 상신의 권위와 권세를 모독하는 행위다. 이에 전도(前導)하는 하인들이 이 여인을 꾸짖고 밀치어 땅에 엎어지게 하였다.

공이 집에 돌아와서 하인을 준엄하게 꾸짖기를

『내가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비록 한 사람이라도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나의 수치가 된다. 길가는 사람을 밀치어 땅에 엎어지게 한 것은 심히 부당한 일이다. 너희들은 조심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했다.

조금 있다가 그 여인이 쫓아와서 집 앞 언덕에 올라서서 발악하며 다음과 같이 외쳐대는 것이었다.

『머리가 허연 늙은 인물이 종들을 놓아 행패를 하여 길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엎어지게 했으니 네가 정승이 되어 국가에 유익한 일을 한 것이 뭣이기에 이런 위세를 부리는 것인가. 너의 죄는 귀양을 보낼만하다. 』

이밖에도 욕설이 말할 수도 없었다. 정승의 집 앞에서 이 같은 욕설과 발악은 비단 죽음뿐 아니라 일족멸문의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한데도 공은 이를 못 들은 체했고 당장에 잡아족치려 들었을 하인들도 앞선 꾸지람 때문에 또 상전의 분부가 있어 깊숙히 들어앉아 머리를 내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 자리에 손님이 있다가 이 발악과 욕소리를 듣고 해괴하게 여겨 공에게 물었다.

『저 여인이 욕설하는 것이 어느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까.』

이에 공은 웃으면서

『머리가 허연 늙은 인물은 내가 아니고 누구이겠소』

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손님은 이를 내쫓거나 잡아드리지 않은 소명에 의문을 표시하자

『내가 먼저 잘못하였으니 그 여인이 성내어 욕설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마음대로 욕설을 하여 분을 풀고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마땅하오』

그것이 곧 백성의 원한을 푼 정승의 일인 것이며 그 일을 관용이란 가치관으로 대형시킨 것이었다. 〈柳川箚記〉

 

■ 寬容은 局量의 바로미터

 

역시 선조 때 명상 이원익의 옛날 집이 서울 여의동 서쪽 구석인 호동의 외딴 데 초라하게 있었다.

어느 날 그 인근에 새로 들어온 산지기가 소나무를 베는 아이 하나를 잡아가다가 해가 저물자 이 외딴집에 맡기고자 들렀다. 물론 그것이 정승의 집인 줄은 몰랐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앉아있는 집주인 더러-

『이 아이는 금송을 범한 죄인이니 주인이 잘 붙들어 지켜야 하오』

하고 분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이 묵묵부답하자,

『 만약 이 아이를 잃으면 일이 날 것인데 어찌 거만스레 대답을 하지 않나』

하고 반말로 호통치며 돌아갔다.

잡아놓고 간 아이가 묻자 공은

『어디에 사는 아인데 왜 가지 않느냐』

하니, 그 아이는

『죄가 더할까 겁이 나고 또 주인집에 걱정을 끼치게 될까봐 감히 가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공은 이 아이를 달래 보냈고 이튿날 아침 산지기가 와서 그 아이를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다가 의정부 하인에게 주먹을 맞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가 영의정 시절에 있었던 일이며 일개 산지기에게의 관용도 이만하였던 것이다. 〈西郭雜錄〉

 

곧 관용의 덕은 선비의 조건이었다. 논어의 양화(陽貨)편에

『관대한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맘을 사로잡을 수 있다. [寬則得衆]』

는 가르침이나 통속편(通俗篇)에

『물이 깊고 넓으면 큰 고기가 산다.[水寬魚大]』의 가르침, 논어 공야장(公冶長) 편의

『남의 지난 악사(惡事)를 묻지 않으면 사람으로부터 원망받는다는 법은 없다. 마치 백이와 숙제처럼.(子曰伯吏叔齊不念舊惡怨是用希)』

란 가르침 등은 옛 선비들이 길이 익혔던 기초적 덕목이었다.

 

그리하여 이 관용이 어느 만큼 체질화되었는가를 그 인격이나 장래성을 가늠하는 측정 기준으로 삼기까지 했다.

 

이동고가 수상이 되어 재상을 지내는데 이양원과 이수광의 사람됨의 우열을 따져보고 싶었다.

이들과 더불어 기생방에서 술을 거나하게 먹고서 이동고는 기생에게

『나하고 동침하겠는가』

고 말을 건냈다.

 

이 기생은 좌중의 이양원과 이수광을 번갈아 보면서,

[천첩이 만일 대감을 잠자리에 모신 다음 자식을 낳는다면 이 두 영감 처지가 될 터인데 그 어찌 영광이 아니오리까]

하였다.

이 두 분은 모두 종실의 천첩들 자식이었기 때문이며, 이 천첩으로 하여금 이처럼 욕된 말을 대담하게 하게 한 것은 이동고가 이들 맘을 떠보고자 미리 각본을 짜아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양원은 안색을 태연하게 하여 못들은 척하고, 이수광은 발끈하여 안색이 돌변했다.

이동고는 이로써 두 사람의 국량의 크고 작은 것을 정하고 등용에 참작하였으며 그 뒤에 이양원은 정승까지 승진하였던 것이다. 〈梅翁聞錄〉

 

이같은 관용의 복사열로 훈훈했던 한국인의 인간관계 형성은 특히 구미문화의 유입과 도시화에 따른 인구 집중형상 등 근대화 과정에서 차갑고 타산적이며 이기적인 관계로 변질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맨 먼저 되찾아야 할 정신적 동일성이 되고 있는 것이다.

 

■ 私怨은 이슬처럼

 

관용은 도량의 모태요 또 도량은 관용의 모태로 이 두 개의 덕목(德目)은 일체의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다.

 

세종 때 집현전 유제학이던 학자 신석조(辛碩祖)가 춘추관(春秋館)에서 국사를 편찬하고 있을 때 일이다.

 

그는 하관(下官)한 사람과 같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이 하관이 한 서리를 향하여 큰소리로-。

『신석조, 벼룻물을 가져 오너라』

고 외쳤다. 물론 신석조가 곁에 있다는 것을 깜박 잊고 한 말이었다. 말을 하고서야 상관이 곁에 있는 줄 알고는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신공은 재빨리 그 하관 앞에 가서 손을 쥐고

『우리들이 젊었을 때에 선생과 어른 앞에서 실언한 것이 이 정도 뿐이겠는가』

하고 곧 술을 가져오게 하여 수작을 했던 것이다. 〈筆苑雜記〉

 

사제 김정국(思齋 金正國)은

『풍문을 듣고 일을 논하다가 그릇된 것 중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두 번 있었다.』

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은 선비의 도량을 엿보게 하는 체험담을 남기고 있다.

 

그가 헌납 벼슬로 있던 계유년에 이계맹이 평양감사로 있었다. 한재로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을 때 일이다. 이 평양감사를 헐뜯는 사람이 김정국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공이 따로 덕암(德岩) 위에다 큰 누각을 짓는데 제도가 굉장하고 역사(役事)가 커서 백성이 심히 괴로와하고 원망한다』

이 말을 듣고 김정국은 혹시 사실과 다르지나 않을까 하여 평양에서 온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 그 또한 같았던 것이다.

『나의 생각에 먼저 나에게 말한 사람이 미더운 사람이니 그 사람 하나의 말만으로도 믿을 만한데 뒤에 들은 말도 서로 같으니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하고, 사간원의 동료들과 의논하여 이계맹(李繼孟)을 탄핵하였던 것이다.

『평양은 놀고 구경할 곳이 많기로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니 따로 누각을 지을 필요가 없고 더우기 흉년이 들어 백성이 어려운데 그것이 급무가 아니니 추고(推考)하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이 탄핵을 받아들여 이 감사를 체직시켰던 것이다.

그 후 바로 몇 놀고 있는 관속만을 사역하여 두어 칸 작은 정자를 지어 열흘도 못 되어 끝냈다는 사실을 듣고 전문한 바의 착오됨을 뉘우쳤던 것이다.

『이공은 마음이 너그럽고 후진을 마음껏 사랑하여 훼방함이 종종 있어도 사소한 혐의도 두지 않고 오히려 겁내지 않고 말하는 선비를 가상히 여기어 장려하였다.』

 

그런 일이 있는 지 얼마 후에 이계명이 참찬 벼슬에 올랐을 때 김정국이 검상(檢詳) 벼슬로 이공의 집에 가 뵈었는데, 전일의 탄핵이 착오에서 비롯되었음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부끄러운 낮으로 사죄하였더니 공이 술을 내고 흉금을 털어놓고 크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들으니 나를 탄핵하기를 주장한 사람이 너라고 하는데 이것은 듣기를 잘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혐의를 두겠는가. 내가 일찍부터 네 형제의 뜻과 절조를 가상하게 여겨 온 터이니 더욱 힘써 게을리하지 말라』

 

그 후에도 그는 선진들 사이에 김정국을 칭도해 마지 않았으며 그의 앞길을 위해 많은 보필을 해주었다.

 

선비의 도량이란 이만한 실수마저도 무화(無化)시켰던 것이다. 정말 나와 나의 가족과 나의 조상과 나의 스승에 끼친 원한을 도량 속에 무화시키기란 굉장한 정신적 성숙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눈은 눈으로, 칼은 칼로 대치시키는 서양의 사고방식에서 생각할 때 종교적 경이의 성숙된 정신이 아닐 수 없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정축년(丁丑年)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하성(下城)하여 청부(淸婦)에게 굴욕의 항복을 하였다.

정축하성(丁丑下城)한 후에 김상헌(金尙憲)이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 돌아가 있는 것을 보고 장령 박계영 (掌令 朴啓榮)이 좋지 못한 어투로 탄핵하였다.

 

후에 김상헌의 손자 김수흥(金壽興)이 이조판서가 되고 박계영의 아들 박신규(朴信圭)가 낭관(郞官) 벼슬로 이판 아래서 일하게 되었다.

 

이에 박신규는 그의 아버지의 소행 때문에 판서가 대면하지 않을까 미리 겁을 먹고 병을 핑계하여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이 판서는ㅡ

『사사로는 비록 사귀지 아니하나 어찌 내 집안 사사로운 원수로써 국가의 유용한 사람을 폐하겠는가 하고 권하여 출근케 하고 각별히 잘 지도하여 일을 같이 하였던 것이다. 〈槍岩輯語〉

 

갑자년 이괄(李适)의 반란 때 인조가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에게 임진강을 지키는 대임을 맡겼었다.

이귀가 어명을 받고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방어하는 군열이 모두 흩어져 적이 임진강을 건너오고 있었던 것이다.

관군이 패했다는 보고가 서울에 들어오자 옥당장관(玉堂長官)인 장유(張維)가 사간 오후(吳珝)와 더불어 임금 앞에 나아가 군법을 시행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귀의 잘못이 아님을 형세로 살피어 알고는 이귀의 군법처단을 윤허하지 않았다.

 

장유는 이귀의 아들 연양군 이시백(延陽君·李時白)과 동문의 법으로 그 정의가 형제처럼 두터웠지만 사정에 끌려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이귀는 그의 아들 이시백에게 경계 하기를-

『군기를 실오(實誤)한 것은 군법에 따라 마땅히 베어야 하는 것이니 장유(張維)가 법을 시행하기를 청한 것은 당연한 그의 직책인 것이다. 너희는 부디 원수를 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장유를 불러 아들과 더불어 당면시키니 이시백 형제 또한 감히 어기지 못하여 왕래하기를 이전과 같이 했던 것이다.〈公私見聞錄〉

 

선조 때의 을축옥사(乙丑獄事)가 신묘년(辛卯年)에 가서 번복이 되어 을축년에 의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도리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윤두수, 윤근수 형제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유배길에 오를 때 윤두수가 당시 대사헌으로서 이 을축옥사를 번복시킨 장본인인 이원익을 찾아보고 인사를 하려 했다.

이에 그의 동생 윤근수가 말리면서

『나를 탄핵한 사람을 어찌 보려고 합니까』

했다.

이에 윤 두수는 -

『그렇지가 않다. 이것은 이원익 혼자 말한 의론이 아니다』

하고 유배길에 이원익을 찾아가 정중히 작별 인사를 하면서,

『내 죄가 문외출송(門外黜送)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할 것인데 귀양을 보내는 것은 너무 과하니 더이상 죄를 더하지는 말아 주시오』

했다.

 

그 후 이원익은 동료들이 말썽부리는 것을 극력으로 진정시켜 그에게 죄를 더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西郭雜記〉

 

두 사람의 도량이 잘 나타나는 일화이다.

도량면에서 윤두수는 전형적인 선비였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당파가 갈린 뒤에 서인측에서 비방이 자자하였다.

사헌부 한 관원이던 그가 무사에게서 말 한 필을 뇌물로 받았다는 말을 듣고 탄핵을 하고자 헛말인가 참말인가를 가리기 위해 윤공을 찾아가 물었던 것이다.

이에 윤두수는 마판에 있는 말 한 마리를 가르키며ㅡ

『이것이 바로 그 말이다. 무사가 일찌기 나의 관하에 있던 사람인데 내가 말이 없는 줄 알고 선물로 보냈기에 내가 주저않고 받았다』

하였다.

이같이 서로 대하여 마주 앉았을 때에 마침 어떤 시골 사는 일가 한 사람이 편지를 보내어 시량를 보조하여 주기를 청했다.

윤공이 그 편지를 보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계집종을 불러 모단(毛緞) 두 필을 내어 오라고 분부하는 것이었다. 그 종이 안에 갔다 나오더니 그런 물건이 없다고 하자, 윤공은

『일전에 아무 기관(記官)이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나한테 열 필을 보내었기에 받아서 안에 간직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있을 것이다. 가져오너라』

고 사헌부 관헌 앞에서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갖고 나온 모단 두 필을 편지를 가져온 시골 하인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마침 얻은 것이 있어 보내거니와 잔치에 쓸 것은 그 임시에 와서 가져가거라』

이것을 시종 지켜보고 있던 사헌부 관원은 마음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대감이 비록 선물을 받기는 하나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뿐, 자기만이 살찌려 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 받은 것을 숨기지 아니하니 죄를 줄 수 없다 하고 탄핵할 것을 중지하고 오히려 흠모하여 여생을 모셨던 것이다. 〈西郭雜記〉

 

□ 銀도둑과 金判書

 

인조때 호조판서 김진국(金盡國)이, 중국에다 바칠 은을 감봉할 때 직접 현장에서 감독를 했다.

이때 은을 헤아리는 산원(算員) 하나가 김공이 다른 곳을 돌아보는 틈을 타서 은 한 덩어리를 집어서 품에 숨기고 곧 일어나 변소에 가는 것처럼 하여 다른 곳에 두고는 본 자리에 돌아와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다른 이는 아는 사람이 없고 오로지 김판서 만이 이를 눈치채고 눈여겨 보았던 것이다.

 

김판서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자리를 피하면서, 그 산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내가 이전에 앓던 산증(疝症)이 다시 발동하려고 해서 오래 앉아 있지 못하겠다.』

하고는 그 은을 한방에 몰아두고 그 산원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분부하고 내일 다시 봉하겠다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왔던 것이다.

산원이 곰곰히 생각해 보니, 만약 은이 수량에 맞지 않으면 그 허물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 틀림없으므로 훔쳤던 은을 도로 그 속에 갖다 놓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튿날 감봉할 때 은이 축나지 않았다.

십여 일이 지난 뒤 김판서는 그 사람의 죄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조그만한 다른 일을 핑계삼아 파면시켰던 것이다.

대인관계에 성숙했던 선비들의 도량과 아량이 이만하였던 것이다.

 

곧 선비들은 인간관계에 있어 타산을 거부하고 또 이해를 초월시키므로서 그 관계를 승화시켰던 것이며 이 승화과정이 바로 도량이나 아량이나 관용같은 덕목으로 나타난 것이다.

선비의 조건은 바로 이 도량과 비례했으며 도량이 없고 편협하면 바로 소인이라 하여 소외당했던 것이다. 나한테 해를 끼쳤다고 그 해를 당장에 보복한다는 상대성의 가치관은 곧 소인시당하게 마련이다. 그 해를 도량으로 소화시키므로서 오히려 해를 끼친 사람이 해를 끼친 만큼 자책으로 자신이 벌을 받게 하는 종교적 경지의 인간적 성숙이 바로 선비의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