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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21.道仙性向(도선성향)

구글서생 2023. 6. 11. 04:59

선비의 의식구조-21.道仙性向(도선성향)

 

■ 現代에 살아있는 道術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금강(金剛) 이남의 제일 산수로, 괴산(槐山)의 선유동문(仙遊洞門)을 치고 있다. 청화산(靑華山) 밑까지 이르는 아홉 구비마다 망선대(望仙臺), 격천벽(擊天壁), 은선암(隱仙岩) 등 선(仙)에 관련되지 않은 지형이 없다. 이 동문이 바로 한국에서 토속화한 선도(仙道)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속리산(俗離山)을 단숨에 뛰어오르는 단술도장(丹術道場)으로 이곳을 택한 선인(仙人) 남궁두(南宮斗), 불사연년(不死延年)의 양생도장(養生道場)으로 이곳을 택한 진인(眞人) 최도, 새처럼 날아다니려다가 끝내는 왜적(倭賊)에게 몰려 못 날고 만 화담문인(花潭門人) 박지화(朴枝華)의 축지도장(縮地道場)도 바로 이곳이다.

 

도교(道敎)의 원전(原典)인 「포박자(抱朴子)」, 「황정경(黃庭經)」, 「참동계(參同契)」 등을 보면 카오스(混沌)는 만물의 원천이라는 「창현설(暢玄說)」과 마음의 정수(精髓)인 신(神)은 단(丹)이라는 시련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형체는 그 신에 의해 「카오스」로부터 형성된다는 「금단설(金丹說)」, 그리고 사람의 운명은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개척할 수 있다는 「지리설(至理說)」이 그 철학 체계의 본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도교가 한국에 토착하면서부터 행동적이고 진취적인 지리설(至理說)을 배제하고, 고식적인 금단설이 모든 추상적 이론을 구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한국적 사유(思惟)에 결합되어, 귀괴변화(鬼怪變化), 양생연년(養生延年), 신선방약(神仙方藥) 등 당착(撞着)적인 행동으로 발전하였다.

 

사람의 오장육부에는 신이 깃들고 그 신을 길러 자연의 이치에 일치시키면 죽지 않는다는 「양생(養生派)」, 역리(易理)를 빌어 자연현상을 내관(內觀)하여 먼 것을 가깝게 보고, 높은 것도 낮게 볼 수 있는 「단도파(丹道派)」가 그것들이며 이것이 우리나라 도술과 선술의 주류를 이루어 온 것이었다.

 

이 토착화한 선풍은 근대에까지도 많은 「넌센스」를 빚고 있음을 본다.

 

–용암포(龍岩浦)에서 뛰면 중국의 산동반도(山東半島)에 떨어진다고 장담하며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뛰다가, 노도(怒濤)에 말려 죽은 묘향산도사(妙香山道士) 이야기(1926년)

 

-울릉도 모시개에서 말바위까지 날아갔다 온다고 하다가 역시 노도에 말려 죽은 선인봉도사(仙人峰道士) 이야기. (1933년)

 

-천황봉(天皇峰) 하암대에서 뛰어내리다가 연쇄 박살당한 속리산(俗離山)의 세 젊은 도사(道士) 이야기(1968년) 등이 이 선습의 잔영(殘影)을 어렴풋이 엿보여 주고 있다.

 

■ 主静説

 

서경덕(徐敬德)은 15세에 처음 글을 깨친 만학으로 당대 학풍인 독서 위주에서 궁리(窮理) 위주의 새 학풍을 세웠고, 또 행실위주의 주자 학풍이 아니라 술수의 횡거학(橫渠學) 학풍을 진작시킴으로써 후학의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가 자신의 구속을 강요하는 주자학에 저항을 느꼈던 것은 분명하다.

 

하늘 천(天)자를 크게 써서 벽에 붙이고 천이 가진 깊은 이치를 며칠씩 두고 궁리한 것이라든지, 목탄(木炭)을 깔아 놓은 위에 단정히 앉아 사고를 펴는 奇習이라든지, 좋은 산수를 당하면 너울너울 춤을 추며 산수의 정(精)을 속으로 들이는 품이라든지, 그의 모든 기태(奇熊)는 그의 선풍 취향으로 주자학에의 저항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수제자인 허엽(許曄, 1517~1580)이 공을 찾아 개성 화담(花潭)에 가는데 장마가 계속하여 물이 넘쳐 건너지 못하고 엿새째 저녁에야 물을 건너 공의 처소에 이르렀다.

 

이때 공은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허엽이 자기가 먹을 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가 솥뚜껑을 열어보니 이끼가 소복하게 끼어 있었다. 허엽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이끼 낀 솥의 사연을 물었더니 공은,

[물에 막혀 집사람이 엿새째 오지 못하므로 내가 오래 먹지 않았더니 그런가 보다.]

하였다.

허엽이 어이없어 그 얼굴을 우러러보니 주린 빛이 없더라 하였다. <식소록(識小錄)〉

 

선습(仙習)의 초보는 단곡(斷穀)에 있으며 화담은 이 단곡선습(斷穀仙習)이 체질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주정설(主靜說)을 생활철학으로 삼았던 민순(閔純・掌令)은 한국에 있어 도교선습의 한 정착형태를 대변해 주는 일생을 살았다. 그는 서화담으로부터 역리를 배워 주정설을 확립하고, 산다는 것은 오로지 정(靜)을 배운다는 것이라 하여 그의 서재를 「습정(習靜)」이라고까지 하였다. 평시에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후 의관을 정제하고는 홀로 방안에서 습정(習靜)을 하는 데 꼭 흙으로 만든 우상처럼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서화담의 역리가 선술로 뻗어 선비화한 것과 대조되기도 한다.

한국 도교사에서 비중이 큰 仙人 박지화(朴枝華, 1513~1592)도 서화담의 도술 학통을 이어받아 유도석(儒道釋)의 삼학(三學) 일치를 꾀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만 먹고 살았다. 반드시 책을 베개 삼아 자는 데 보름 동안 좌와(左臥)해서 자고 또 보름 동안 우와(右臥)해서 잤다. 평생 베옷을 입었는데 입기 편하게 창안한 것으로 그의 차림새를 보고 모두들 웃었다.

인촌(人村)에 들면 바위처럼 정좌만 하고, 산속에 들면 사람 키만한 단애나 동문을 뛰어넘고 두어 길 깊이의 물이나 바위틈을 수월히 날으듯이 뛰었다. 70 노인이 그러하므로 모두들 선인이라 불렀음 직하다.

임진왜란 때 정굉(鄭宏)과 더불어 백운산(白雲山) 사탄촌(史吞村)에 피했었다. 왜적이 산 가까이 왔다고 하자, 정굉은 다시 피난 길을 떠났는데, 박지화는 이제 늙어서 더 갈 수가 없으니 훗날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고별을 하였다.

훗날 정굉이 그 산골짜기에 찾아오니 골짜기 위에 오언시를 적은 종이쪽지가 나무가지에 묶여 있었다. 그 종이에는 왜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나무 밑의 계심(溪心)에 잠겨 죽는다고 쓰여 있었다.

정굉은 그 물속에서 이 도사의 시체를 꺼내어 잘 묻어주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 도사가 등선(登仙)한 것으로 믿고, 산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기적을 모두 박지화에게 미룸으로써 설화 속에 그를 영상화시켰다.

 

전설적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패랭이를 만들어 생계를 잇다가 재기용이 되어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있었는데, 붕당이 심하고 나라 꼴이 어지러워지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과격한 이유를 든 사직소를 올렸다.

 

조정이 수군 방비에만 골몰하고 육군 증강에 전혀 등한한 점이 그가 물러갈 이유 중의 하나요, 전후의 황폐된 전렬을 가다듬지도 못하면서 조정에서는 실속 없이 척화(斥和)라는 의리만 내세워 일본의 사신을 가두는 등 감정을 사납게 하고 있으니 앞날이 우려되고, 겉으로 화(和)한 체하고 속으로 실속을 거두도록 진언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는 현상에 실망한 것이 물러갈 두 번째 이유며, 또 이원익(李元翼) 같은 충성의 중신을 신임하지 않음이 물러갈 세 번째 이유라 하였다.

 

이 소가 화근이 되어 이 의로운 명장은 잡혀 들어 유배를 당했다가 유배 끝에는 고향 현풍(玄風)의 琵琴山 속에 들어가 신체의 운동과 호흡조절로 신선양도(神仙養道)하는 도인법으로 선도를 닦았다. 그는 곡식을 끊고 조그맣게 뭉친 송화가루만 먹고 여생을 살았다 한다.

 

정희량, 김시습 등 시폐(時弊)에 저항적이던 선비들이 산야에 숨어 살 때 무료한 세상을 살아낼 지혜로서 이 선습을 닦았듯이, 모든 저항적 일생과 이 선풍 사이에는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어 온 것이다.

 

도술로 한국도교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북창(北窓) 정렴(鄭𥖝)은 벼슬을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그치고, 도술 단련과 방랑으로 여생을 살았다.

을사사화에 그의 아버지(鄭順朋)가 고변할 때 강력히 간하여도 듣지 않자, 그 후 계속 아버지의 행실에 저항하였는데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아우가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하여 해치려 하므로 이를 피하여 과천(果川) 청계산(淸溪山), 양주 괘나리(掛蘿里)에 숨어 살았던 점 등을 미루어, 그의 도술은 그의 아버지 때문에 행세하기가 사나워진 세상에서의 기피요, 또 그의 맑고 높은 학식은 아버지에 대한 저항의 엉뚱한 결정(結晶)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아는 이는 혹 있을 수 있어도, 그 소리로 말을 해서 새나 짐승과 뜻을 통한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나면서부터 여러 나라 말을 알았다.」

「대낮에 그림자 없이 걸어다녔다. 」

북창을 둔 기적의 구전은 끝이 없다.

그는 술도 잘 마셔 두서너 말에도 취하지 않고 풍악산 골짜기에서 휘파람을 불곤 했는데 그의 풍류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깊이 숨어 신선수양을 하더니 문득 자기의 만가(挽歌)를 지어놓고 죽었다.

일생에 글을 읽길 만여 권이고

하루에 술을 먹길 천여 잔이요

드높게 복희(伏羲)보다 고상한 말만 했고

세속 이야기로 입에 때를 묻히지도 않았다.

안회顔回)는 서른에 죽어도 아성(亞聖)이라 불렸는데

선생의 수명은 어찌 그다지도 길었는가.

 

그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북창의 일생은 도가로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마이너스」적 [이미지」와 보상작용으로서 깊히 추궁해 볼 소재이기도 하다.

 

정렴의 아우 정작(鄭碏) 역시 이인(異人)이 되어 수련하였는데 36세에 이르도록 독신으로서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 옷의 斤量을 달아입는 멋

 

또한 이 한국의 토착 선풍은 한국인의 멋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 멋은 섬세의 극을 다할 뿐 아니라 방대 (厖大)의 극 또한 다한 초생명의 현상학적인 멋이었다. 명종조의 명신 심봉원(沈逢原・知敦寧府事)은 명신으로보다 심양(心養)하는 선인으로서 더 알려졌다.

태화산(華山) 기슭에 집을 짓고 효창노인(曉窓老人)으로 불리며 하얀 수염을 날리고 산수 틈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그의 생활 법도가 주의를 끈다. 옷은 반드시 무게를 달아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지어 입었으며, 밥도 반드시 숟갈을 세어서 먹었고, 씹는 것도 그 속도나 횟수가 정해져 있었다. 동작과 휴식 또한 조절하였고 마음 쓰는 것도 그 심로의 분량을 근량(斤量)으로 재듯 하였다.

 

그가 서른 살에 병들어 10년간 폐인 노릇을 하면서 터득한 심기안정법(心氣安定法)이 그같이 체질화한 것이었다.

 

황희(黃喜)와 더불어 이조 초의 쌍명상(雙名相)으로 꼽히는 허조(許稠, 1369~1439)는 수신제가(修身齊家)에도 이조에서 굴지의 본을 이루었다. 평생 첫닭이 운 후에 일어난 적이 없다는 절도(節度)로 그의 수신(修身)을 일관하였다. 공이 밤중에 단정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도둑이 집에 들어 물건을 훔쳐 갔었다. 이때 공은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처럼 앉아 있었다. 도둑이 간 지 오래되어 집안사람이 이를 알고 쫓았으나 미치지 못하니 분통해서, 눈 뜨고 있으면서 도둑맞은 것을 탓하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여가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겠는가. 』〈靜菴集〉

이 허조의 대꾸는 수신의 삼매경을 나타내는 고사로 후세에 곧잘 인용되었다.

 

이토정(李土亭)에게 영향을 받은 속칭 해선(海仙) 송제민(宋齊民)은 그의 기모이책(奇謀異策)이 많이 구전되고 있으며, 호를 해광(海狂)이라 하고 바다를 무척 좋아했다. 정처없이 배를 타고 바다 끝을 향해 간다고 나가길 곧잘 하였고, 풍파에 쾌감을 느끼곤 하였다. 바다와 생명을 동화시킨 희대의 낭만을 산 멋있는 인물이요, 모든 선비가 산속에 숨는데 비겨 바다에 숨은 그의 감성이 주의를 끌게 한다.

 

이 선풍이 육체의 노예인 인간에게 얼만큼 기적을 가능케 했느냐의 본보기로, 다분히 과장된 표현으로 전해내린 전우치(田禹治)의 선적(仙跡)을 들 수가 있다.

선도로서 초자연적 일화를 많이 남긴 전우치는 선술에 의한 기담(奇談)을 많이 남긴 전설 속의 인물처럼 돼 버렸다. 「오산세림(五山說林)」 「조야집요(朝野輯要)」에 그의 환상적 선술이 마치 사실인 양 기록되고 있다. 이를테면 송인수(宋麟壽), 신광한(申光漢) 등과 노는 자리에서 그가 밥을 토하니까 밥티가 나비들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 등.

 

좌중에서 천상에 있는 천도(天桃)를 따올 수 있겠느냐고 했다. 전우치가 쇠파리 수백 마리를 잡아 하늘로 내던지니까 구름 속으로 사라지더니 하늘에서 천승(天繩)이 한 가닥 내려왔다. 한동자에게 이 줄을 타고 오르면 천도가 있으니 따오라 시켰다. 좌중이 동자가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올려 보고 있자 벽도엽(碧桃葉)과 그 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먹어보니 감액(甘液)이 더없이 맛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 피가 떨어지는지라 전우치는 놀라면서 이것은 천도를 지키는 자가 천제(天帝)에게 일러 그 아이를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그 아이의 팔과 다리, 몸뚱이, 머리가 찢긴 채 떨어졌다.

전우치가 이 촌단된 유체를 주어 이으니 동자가 예전대로 살아났다. 좌객이 크게 웃었다. 〈朝野輯要〉

 

사람이 초자연적인 어떤 가능성을 믿으려는 성향은 그것이 비록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고하게 안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태초에의 향 수같은 것이 잠재의식으로 정착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고금을 통하여 이 초자연과 직결된 무의식 행사는 겉으로 나타나는 양상만 달랐을 뿐 항존해 온 것이었다.

 

어느 역사적 시간 동안 한국 서민들은 그런 무의식 작용을 선도로 해소시켰다. 그러므로 한국의 도교는 그 교리로서보다 이 초자연의 공감성 속에 정착하였고, 도교의 도인들은 그 공감에서 자신을 초연화하여 자신을 속세에서 소외시킴으로써 그 공감 속에 구제했던 것이다.

 

즉, 그 도인이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런 도인을 대상으로 하여 백성들의 그 같은 무의식 성향이 해소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 대상의 극치요 한 표현방식이 도인 전 우치로 하여금 대행된 것이다.

 

이 같은 태고에의 향수의 무의식적 방황이 대상을 잡으면 대개 혹세무민(惑世誣民)으로 귀착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도참과 야합하여 정권 교체나 권력 투쟁의 「파워」로 진전했고, 또 종교와 야합하여 사교 또는 신흥종교로서 「파워」를 형성했으며, 동학같은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야합하여 동학혁명이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전우치도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처형을 받았다. 전우치의 죽음은 태고에의 향수의 무의식적 투사가 살인을 당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이 투사체를 잃어 버린 무의식의 집체는 계속 그의 신비력을 포기하진 않았다. 그는 신천옥(信川獄)에서 죽어 수령이 가매장시켰는데 가족이 이장(移葬)하고자 무덤을 파고 관 뚜껑을 열어보니 시체는 없고 빈 관이었다.

 

-선군(先君)이 말하길, 어느 날 전우치가 찾아와서 <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한 질을 빌려갔는데 후에 알고 보니 그 책을 빌려 갔을 때는 전우치가 죽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한다. 〈五山說林〉

 

선풍은 기적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이처럼 믿을 수 없는 기적은 선풍에 기적을 믿고 싶은 우리 선조들의 개념의 보편화를 인지시켜 주는 자료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