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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24.謙遜性向(겸손성향)

구글서생 2023. 6. 11. 05:04

선비의 의식구조-24.謙遜性向(겸손성향)

■ 밥상에서의 겸손 教育

 

4형제의 막내동이였던 나는 어릴 때 할아버지와 겸상을 해서 밥을 먹었다. 대여섯 살 때의 일로 기억된다.

 

밥상이 들어오기 전에 어머니는 몰래 나를 불러내어 그날 밥상에 오른 반찬 가운데 뭣, 뭣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손가락질과 눈매만으로 금기(禁忌) 음식을 지시했다.

이 금기 음식은 대개 시식(時食)이나 절식(節食) 또는 고기반찬이거나 먹고 싶은 반찬이게 마련이었다.

 

사실 욕망을 억누르기에 길들지 않은 어린 시절에 금기 음식을 앞에 두고 밥을 먹기란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할아버지를 위한다는 차원을 벗어나 남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극소화시키는 일종의 인간수련의 한 수법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도 어린 것이 오죽 먹고 싶을까 하는 정이 동하겠지만 그 정을 결코 남용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그 금기 음식을 숟가락으로 떠다 나의 밥그릇 위에 올려 주곤 했던 것이다.

언젠가 된장찌개가 밥상에 올랐는데 그 된장찌개 속에 고기 몇 토막이 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이 찌개가 금기 음식인가 아닌가의 여부를 두고 고민하였다.

왜냐면 된장은 관례적으로 금기 음식이 아니며 그 속에 든 고기는 관례적인 금기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된장찌게 같으면 먹어도 되지만 고기찌게라면 먹어서는 안 된다. 그날따라 어머니의 무언의 교시(敎示)도 없고 해서 된장찌게일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러나 불안해서 엄마를 불러 이거 된장찌게야, 고기찌게야 하고 할아버지 밥상머리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나는 여지없이 불려 나갔다. 뒤안으로 끌려 나간 나는 호되게 종아리를 맞았다.

그때 훈계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임마, 네가 먹고 싶은 것일수록 안 먹도록 하라 하잖았어?』

 

이 금기 음식 때문에 다시 한번 소동을 겪었다.

가난한 시골 살림이라 계란찜도 금기 음식 가운데 하나였다.

할아버지가 그 금기 음식을 한 숟가락 떠서 나의 밥 위에 얹어주었다. 이 따금씩 밥상에 오르는 반찬이라 이렇게 할아버지가 떠준다는 것은 곧 그 반찬에서 금기가 사라진 것으로 어린 소견은 여기게 되었다.

 

금기는 사라지고 나는 마냥 계속해서 그 계란찜하고만 밥을 먹었다.

물론 밥먹는 것을 멎고 그 계란찜 탐식하는 나를 노려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의식하지도 못했다.

쪼꼬맹이인 나는 날벼락을 맞았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밥상을 내 앞에 엎어 버렸기 때문이다.

『저렇게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놈이 커서 뭣이 되겠느냐』

는 일갈과 함께.

 

물론 이 행위에 대해 너무 모질었다는 여운도 남지만 자제의 교육을 위해 이같이 모진 행위도 감행해야 했던 그런 용기도 또한 우러러 보이기만 했다.

 

손자에 대한 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요즈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현실적인 정에 패배하여 미래적인 교육효과를 희생한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후자를 위해 현재의 정을 희생할 줄 알았으며 그러하기가 그러하지 않기보다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면 마냥 고개가 숙여진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실을 통한 교육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겸손을 익히게 한 요체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光而不耀

 

겸(謙)하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견이나 욕구나 재산이나 지식이나 직위나 영예 같은 것을 남 앞에 드러내지 말고 또 그것들로서 자신의 직책에서 불로소득을 취하지 말며 또 그것들로서 오만하지 말라는 덕목이다. 남이나 공동체를 우선시킨, 자신을 극소화 시키는 덕목이 곧 겸이다.

 

「노자」 58장에 광이불요(光而不耀)라 하였음은 곧 광은 바람직하지만 그 광은 겉에서 빛나는 광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인간의 수양은 밖으로 번쩍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같은 노자의 가르침으로 피갈회옥(被褐懷玉)이란 말이나 지불지상(知不知上)이란 말도 그것이다. 훌륭한 사람은 옥을 가슴에 품고 있어도 밖은 누더기를 입는 법이며,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세상에 나아가서는 그것을 안 체 말고 모른 체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최상이란 뜻이다.

 

「논어」에도 증자(曾子)의 말로 학문지식이 있어도 없는 자처럼 실력이 있어도 무력한 자처럼 겸허하게 이유없이 남으로부터 침범당해도 그자는 무법자이기에 굳이 맞대어 싸울 것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기에 겸의 반대말인 만심(慢心)은 손(損)을 부르고 겸손은 익(益)을 가져온다고 [서경(書經)]이 가르쳤고 겸양은 덕의 본이요 덕에게 이길 장자는 세상에 없다고 좌전(佐傳)이 가르쳤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원문: 滿招損 謙受益

 

모든 전통적 덕목이 이지러진 것으로 특성지어지는 현대이지만 유독 겸의 이지러짐은 오늘날의 사회구조변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겸의 덕목은 안정된 공동체사회에서 가능하다.

 

이를테면 옛 농촌같은 지역사회에서는 평범하다는 등가치적유형화(等價値的類型化)가 존재요 당위였다. 너무 안 체해도 잘난 체해도 또 너무 희망이 커도 엉뚱한 짓을 해도 이질 행위로 소외받는다. 높은 가지가 바람을 잘 타고 높이 솟은 말뚝이 발에 잘 걸린다 한다.

 

곧 평범할수록 촌락공동체에서는 편하게 살 수 있다.

 

이 촌락공동체에 사는 지혜가 곧 겸이었다.

 

한데 이 전통적 촌락공동체를 부수는 과정으로 현대화가 진행되었고 아울러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집단의 일원으로부터 완전히 이탈된 그런 독립된 개체의 집합체로 재구성된 것이다. 이 독립적 개체사회에선 전통적 집체 사회에서 없었던 경쟁이 싹트고 경쟁원리에서 남을 위해 자신을 극소화시키는 행위는 손해요 경쟁에 뒤지는 요인이 되기에 오히려 경쟁자를 헐뜯고 모략하고 음모하고, 또 허세를 피우며 없는 것도 있다 하며 오만이라는 악덕을 형성해 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대화와 도시화는 공동사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공동사회와는 구성이 다른 또 하나의 공동사회에로의 과도적인 과정을 뜻한 것이기에 겸의 덕목은 현대화된 새 공동사회에서도 필수의 덕목으로 재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겸이 어떻게 현대화되어야 하느냐는 앞으로의 과제가 되겠으며 이 새로운 의미의 겸손의 나무는 곧 우리 옛 겸손에 뿌리박아야 할 것이다.

 

■ 現代人과 謙遜反逆

 

그 전통적 「겸(謙)」의 유형을 실례로써 분류해 본다.

첫째, 자신의 객관적 지위를 파악하여 그 지위에 대한 오만과 자만과 허세적 요소를 절하하는 행위다. 현대화 사회란 성격이나 지식수준이나 능력 수준을 서로 모르는 복합된 사회다. 그런 구조적 성격을 이용하여 현대인들은 항상 자기의 객관적 위치보다는 항상 상향되고 과장된 상태로 자기를 파악하고 있다. 이 과장된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자꾸만 오만해지고 남을 깔보는 악덕이 체질화되게 마련이다.

 

선조 때 퇴계 이황은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있었는데 당시 대제학은 박순(朴淳)이었다.

박순은 직책상으로 퇴계의 우두머리지만 자기 자신의 학식이나 덕망보다 높다는 그런 객관적 현상에 비추어 자신을 겸하(謙下)시킨다.

박 순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대제학인데 이황이 제학이 되어 나이 많은 큰 선비는 작은 벼슬에 있고 오히려 후진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인재를 쓰는 것이 거꾸로 된 것이오니, 청하옵건대 신의 관직을 갈아서 이황에게 주옵소서』

임금도 이 박순의 미덕을 기리고 선양(宣)한 뜻에서 이를 받아들여 박순의 자리와 이황의 자리를 맞바꾸게 했던 것이다.

 

이 고사(故事)에 대해 성호 이익(星湖·李翼)은,

『아름답도다. 사암(박순)의 어진 것이 세속에 모범이 될만한데 어찌하여 지금 세상에서는 이욕(利慾)을 방자하게 행하여 그것을 본받는 이가 없는고, 슬픈 일이로다』

고 개탄하고 있다. 이 성호의 개탄은 지금에도 절실한 개탄임에 두말할 나위가 없다.

 

둘째, 자신의 공적이나 명예에 대해 과장하는 현대인 기질은 곧 겸의 덕목에 크게 저촉되는 바다.

 

임진왜란 때 북으로 피난했던 당시 이조참의 박정복(朴廷馥)이 연안 땅을 지나갈 때 일이다. 연안부사를 역임했던 그는 그 고을에서 크게 민심을 얻었던 후광을 이용, 5백여 명의 민병을 모집, 연안성을 사수하였다.

적병에게 포위당한 지 사흘만에 군세를 많이 잃은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쳤는데, 이 연안 포위 소식을 들은 임금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즈음 승전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이 전투에서 공의 지전(智戰)은 전설적이리만큼 영웅적인 것이었지만 그가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다만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적이 아무날 성을 포위하였다가 아무날 포위를 풀고 갔읍니다.』

한 마디도 자신의 공을 적은 말은 없었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보면,

『적을 패배시키기는 쉽지만 공을 자랑하지 아니 하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고 칭송하고 있다.

박정복(朴廷馥)이 아니라 이정암(李廷馣)이다. 耽古樓主 註

 

세째, 경쟁에 이기고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랑도 서슴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 요즈음 풍조가 돼 있으나 이 같은 자화자찬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정립은 남이 알아줌으로써 이루어지는 자기 정립에 비해 그 기반이 허약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옛 우리 선비들은 절대로 자신이 자기 정립을 한다는 법이 없었으며 오히려 자기 정립이 될 어떤 기회도 겸손으로 거부하는 미덕을 누렸던 것이다.

 

선조 때 재상 이덕형(李德馨)은 서총대(瑞蔥臺)의 어전시작(御前詩作)에서 일등하여 명성이 자자하였고 감히 견줄 재력(才力)을 지닌 사람이 당시에는 없었다.

하루는 임금이 문신들에게 정시(庭試)를 보이는데 누군가가 뻔하지 이덕형이 또 내일 일등할 텐데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이튿날 정시(庭試)에 그는 병을 핑게하고 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네째, 겸의 반대는 오만이다. 오만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붙어 있는 특권의 과시다. 그 특권을 부정하고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겸이다.

 

이덕형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동료인 허작(許鈼)과 홍적(洪迪)이 허작의 집에서 회의하기를 요청하여 찾아갔더니 문전에 병조좌랑인 서익(徐益, 1542~1587)이 서 있었다.

왜 들어가지 않는가고 물었더니 들어오라는 전갈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이덕형이 먼저 들어가 사연을 알아봤더니 두 사람은,

『우리들이 회의하는 곳에 감히 병조좌랑 따위가 명함을 통하다니』

하고 있었다.

곧 옥당이란 권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이덕형은 사람 대접하는 도리가 직급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타일러 서익을 들어오라 시켜 대접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서 이덕형이 집에 돌아와 자제들에게 훈계하길, 교만하게 권세의 후광에 집착하는 것은 흉한 것인데 허작과 홍적은 반드시 크게 성취시키지 못할 것이니 너희들은 잘 기억해 들어라 했다 한다.

 

곧 겸(謙)은 원대하게 자신을 위하는 길이요 만(慢)은 눈 앞의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는 적절한 교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