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선비의 의식구조-20.護國性向(호국성향) 본문
■ 龜岩老人의 이야기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란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의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 의거에 참여한 저항 군졸이었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군들은 어깨의 견장을 떼고 은사금(恩賜金)명목으로 80원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동 대대 소속 다른 군졸이 모두 그러했듯이 지폐를 찢어 버리고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군과 접전을 벌였었다.
그길로 일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을 했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을 마지막으로 패주,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던 것이다. 그 무렵 금강 하류 군산 연안인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 들어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영 탈영 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는 수련(水棟)이라는 것을 하고 비록 발은 절룩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높였다 낮추었다, 뒤로 돌았다 좌로 돌았다 하곤 하였다.
왕궁이 있는 또 옛날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삭망(朔望)에는 북쪽을 향해 요배(遙拜)하는 것을 걸르는 법이 없었다. 여자선교사들은 웃통을 벗어 젖힌 수련에 질색이지만 그는 아랑곳이 없었다.
그가 선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보다 더 큰 원인은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설득해도 막무가내었다는 점과 왕궁요배를 이단시했다는 점이다. 예배시간에 그들에게는 이단(異端)행위인 구령이나 외치고 요배만 하고 있으니 미워할 수밖에 없었겠다. 어느날 귀암노인은 급전(急錢)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 좀 돌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무골의 고집을 아주 꺾어주고 말리라 단단히 맘을 먹고 몸에서 떼질 않는 그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홀 고민하다가 근 20여 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일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귀암노인이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온데간데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는데 펴보니, 무사로서 양인(洋夷) 밑에 천생(賤生)을 이어가고 있는 것만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몰래 훔쳐 가지고 나간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그의 시체를 발견했던 것이다.
한국의 병사정신에 감동한 그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가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기도해 주었던 것이다.
해방 전만 해도 그 십자가가 남아 있었다고 현지 주민들은 말하고 있었다.
이 귀암노인의 죽음은 어쩌면 이 나라에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게나마 계승되어 온 한국 나름의 마지막 兵士道義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귀암노인에 표현된 호국의 전위정신이다. 그런 정신이 옛 한국민에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 왔던가.
보다 소급되어 생각해 볼 문제라고 본다.
■ 陽山思想과 護國人脈
영동과 금산의 접경지대에 유명한 신라가요 [양산가」의 고장인 [내가」란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신라 명장 김흠운(金運)은 신라 호국사상의 화신으로서 훌륭하게 죽어갔고 그의 죽음을 불러주는 양산가를 타고 그 호국정신이 은연중에 계승돼 내렸던 것이다.
김흠운이 백제군에 포위되었을 때 피신할 것을 권고받았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몸을 나라에 바친 다음에야 남이 알건 모르건 마찬가지다. 』
뭣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남이 알아주고 또 알리는 것은 중요한 것이 못 된다. 내가 국민의 하나, 시민의 하나, 한 단체의 하나, 직장의 하나인 단위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이같은 기조사상을 지니고 국민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그의 부하와 함께 옥쇄하였다.
조선왕조 선조년간의 선비 사상 조헌(趙憲)은 그의 수많은 문하생들에게 김흠운의 양산사상을 가르쳤다. 곧 신라 호국사상을 선비사상에 접목시키는 소중한 매체로서 중봉(重峰)을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이(理)가 앞서느니 기(氣)가 앞서느니 하고 싸우고 제사 절차 하나를 두고 싸우는 그런 유풍에서 진취적인 선비사상을 승화시켰다.
『몇 번이나 대궐 난간을 꺾고 몇 번이나 임금 옷자락을 끌어당겼던고』
이것은 퇴계가 조헌을 두고 한 말이다. 그가 올린 疏文만 해도 수십만 자가 되며 끌어내면 대궐 난간을 붙들고 늘어졌고 임금이 피하면 그 옷자락을 붙들고 곧은 말을 하는데 특공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해에 대궐 앞에 거적을 깔고 도끼 하나를 든 다음 왜란이 일어나니 대비하시라』고 소를 올리고 이 疏가 불칙하거든 도끼로 목을 쳐 달라고 며칠 동안 엎드려 있었던 강골선비였다.
왜란으로 서울이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자 옥천향제(沃川鄕第)에 있던 조헌은 그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1천여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유명한 금산전투에서 마치 김흠운이 옥쇄하듯 7백 의사와 더불어 옥쇄하고 만다.
『내가 그동안 글을 읽어 확고하게 안 것은 단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단 한 번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
이 양산사상이 접목한 선비사상의 화신은 깃발을 꼭 쥔 채 죽어 있었다고 시체를 거두러 간 그의 아우 도범(道範)이 목격담을 남기고 있다. 이 양산사상을 접목받은 그의 문하생은 계속 호국의 기치 아래 장렬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나이 80에 아들 시신(時愼)과 함께 나가 싸우던 이문범(李文範·영동)은 맨주먹 쥐고 적진에 단신 뛰어 들어가 큰소리로 왜적의 비리를 꾸짖었다. 왜적들은 이 노인의 입에 큰 돌을 물려 죽였다.
또 그의 문하생 박몽설(朴夢說)이 진주성에서 순국할 때까지의 전과는 전설적이다. 충청도의 조 헌이면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이가 호국 선비임을 구현하였다.
임진국난을 당하자 장원급제하고 호남 유림의 숭앙을 받던고 경명은 늙고 병들었음에도 거의(擧義)의 맹주(盟主)가 되어 전라도 선비들에게 격문을 띄웠다.
「군사는 정의가 힘이니 강하냐 약하냐는 논할 바가 아니다. 대소의 인사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말이 같으며 원근의 지방에서 소문만 듣고도 다같이 일어서니 우리의 각 군 수령들과 각 도의 선비와 백성들이 충성으로 어찌 임금을 잊겠는가, 의로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혹은 병기로 돕고 혹은 군량으로 구조하며 혹은 말을 달려 행진의 선두에 일어서 나오라, 힘이 미칠 수 있는 대로 오직 의로운 길로 나아갈 뿐이니 능히 임금이 어려울 때 가서 구출할 일이 있거든 나는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노라」
이 고경명의 격분에 호응하여 6천 의병이 모였다.
「경명이 의병을 일으킬 때 경기도 이남의 선비들이 모두 따랐으나 다만 충의의 맘으로 서로 힘썼을 뿐이요, 실상은 군사 쓸 줄은 알지 못하였었다. 경명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이 피난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죽어야 할 때라고 깨우치니 뛰어 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군사의 행진에 기율이 없고 이르는 곳에 진영의 설비가 없어서 마침내 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寄齋雜記〉
영남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아버지가 감사요, 명승 조식(曺植)에게 글을 배웠고, 조식이 외손녀의 배필을 삼았을 만큼 출중한 선비였다.
국난 때마다 의거를 하고 의거에 참여한 것은 주로 선비였다. 비록 군률이나 병법에 어두어 효과적인 호국은 하지 못했을 망정 그의 의로운 기상은 선비사상의 소중한 플러스적 가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복수 軍号의 義兵
한국 선비의 호국사상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이 정신의 부자 계승이다. 곧 부자의 일체관, 곧 조상과의 혈연적 유대를 사상과 정신적 유대로까지 발전시켰던 강인한 조상관의 작용이 이 호국정신의 유전이라는 특이할 현상을 빚어놓기에 이른다.
경기 의병장인 홍언수(洪彦秀)가 왜병에게 포위되어 전사를 하자 그의 전취(前娶)의 아들 홍계남(洪季男)은 단기(單騎)로 적진에 뛰어 들어가 외쳤다.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또한 너희들에게 죽겠다』
왜적은 아버지의 시체를 던져주고 그동안에 홍계남을 포위하였으나 그는 왼손으로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분전, 수백 포위망을 단독으로 뚫고 나왔을 뿐 아니라 오히려 두어 명의 목을 비롯 수십 명의 중상자를 냈기 때문에 적이 무척 두려워하는 존재가 됐다. 그 후부터 왜적이 노략질할 때면 사람들이 홍계남의 이름만 불러도 적이 놀라 도망쳐 달아났다고 할 만큼 유명했던 것이다.
홍계남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했는데 그 통문의 내용이 한국인의 의로움을 자극한 호소로서 가족적 의리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입증해주는 것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이 지극한 흉화를 당하여 흉악한 왜놈들의 칼날 아래 아버지와 형의 목숨을 빼앗겼다. 어찌 구차하게 살아서 이 적과 한 하늘 밑에 있겠는가. 생각하니 멀고 가까운 곳의 선비와 백성으로 나와 같이 슬프고 마음 아픈 사람이 반드시 백명, 천명 뿐이 아닐 것이다.
이에 이들을 규합하여 한 부대를 만들고 「복수」를 군호로 내걸며 아버지와 형의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한다. 부형과 처자의 해골이 들에 그대로 드러나 뒹굴고 있어, 원통한 혼백이 의지할 곳이 없는데 내 어찌 홀로 안연히 있으면서 원수 갚기를 소홀히 하겠는가, 따라서 저승에 알음이 있을 때 그들이 “나는 아들이 있다. 나는 아우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호남 의병장 고경명의 맏아들 고종후(高從厚)도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는 의병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홍계남의 통문에 자극을 받고 충청의병장 조헌의 아들 조완배(趙完培)와 더불어 역시 [복수」란 군호를 내세우고 광주에서 의거를 이르켰다. 그의 의거 통문도
『어찌 부자형제의 원수가 잊겠는가.』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혈연의식을 호국의식에 전형시키고 있다.
이 같은 선비의 호국사상은 한말 화서 이항로(華西・李恒老)의 문하인맥으로 계승되어 한말 항일군병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화서의 3대 문인이 김평묵(金平默), 유중숙(柳重叔), 최익현(崔益鉉)으로 모두 항일의거로 호국에 살신성인(殺身成仁)한 분들이요 그분들의 門部가 다시 유인석(柳鱗錫), 홍재학(洪在鶴), 이소응(李昭應) 등 역시 의병장이요 다시 유인석(柳鱗錫)의 문하가 신예수(申藝秀), 이범직(李範稷), 이춘영(李春永), 안승우(安承禹), 주용규(朱庸奎), 서상열(徐相烈) 등 역시 항일로 살신성인한 분들이다. 화서의 호국인맥 말고도 경상도의 이강년(李康年), 허위(許蔿), 전라도의 기우만(奇宇萬)등 한말의 의거는 모두 선비들에 의한 호국사상의 구현으로 현대인이 망각한 전통의 진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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