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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19.忠義性向(충의성향)

구글서생 2023. 6. 11. 00:21

선비의 의식구조-19.忠義性向(충의성향)

 

■ 피보다 진한 弘文館의 물

 

한국선비의 근본사상을 풀이하는데 「忠」이란 말뜻의 풀이가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이 글씨를 뜯어 보면 가운데 「中」자와 마음 「心」자의 함의(含意) 문자임을 알 수가 있다.

 

「中」이란 한복판을 뜻하지만 아울러 가운데가 가득 찬 상태, 가슴 속이 꽉 차 빈틈이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허위가 없는 충실한 참마음이 중심이요 충이다.

 

오늘날 우리들은「충」은 단지 나라에 투사되는 참마음만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은 좁은 의미의 충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빈틈없는 참마음을 나라에 투사했을 때의 충이 된다.

그러나 이 빈틈없는 참마음은 비단 나라에 뿐 아니라 그 밖에도 투사될 많은 대상을 찾고 있으며 그 투사체가 달라짐에 따라 가치도 또한 달라진다.

 

이를테면 의로운 일에 투사되었을 때 절(節)이 되고 부모에게 투사되었을 때 효가 되며 어느 인간에게 투사되었을 때 인(仁)이 되고 도덕적 규범에게 투사되었을 때 예(禮)가 된다.

 

많은 무고한 선비가 죽어갔던 갑자사화때 그 화에 말려든 홍언충(洪彦忠ㆍ대제학)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옥문 밖에 버려져 있었다.

그 옥문 앞을 때마침 후에 간신으로 소문난 김안로(金安老)가 지나갔다.

 

홍언충과는 홍문관에서 글을 같이 읽었던 동문이었다.

 

이 처참한 꼴을 본 김안로가,

『참혹하다. 이게 웬일인가』

고 물었다.

이에 피범벅이 된 홍언충은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홍문관의 물이 묻어 그렇네.』

 

홍문관은 글 읽는 관립학교다. 곧 홍문관의 물이라면 학문에서 익힌 의리를 홍문관의 물로 비긴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홍문관에서 익힌 의리를 굽힐 수 없어 이 처절한 꼴을 당했으며 고문을 당하고 범벅이 된 피가 곧 홍문관의 물이란 뜻이다.

 

이에 김안로의 유혹이 시작된다.

『들어 보게, 친구야. 지혜를 죽이고 학식도 몽매해져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못가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고

 

이 유혹은 곧 참마음(中心)의 의로운 투사에서 사리사욕에로의 투사전환을 시사한 것이다.

그까짓 학문이며 의리가 뭣이 그다지 중요하여 이같이 참혹한 고통을 당하는가, 비록 연산군의 횡포가 의롭지 못할지라도 일부러 몽매해지면 이 같은 고문은 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된 자유를 버리고 편한 노예를 택하라는 김안노 철학의 유혹인 것이다.

 

이에 대한 홍 언충의 대꾸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여보게, 자네 말대로 한다면 지옥에 가서 의로울 게 아닌가.』

의란 이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 의를 버리고 편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죽은 후에 지옥에서 「저자는 의를 버린자」라고 따돌림당하면 외로와서 어떻게 사나 하는 의로움에의 강한 집념이 나타나 있다.

 

그래서 홍언충은 선비고 김 안로는 선비가 못 된 것이다. 홍언충은 진보땅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사람을 죽일 때 귀양을 보내 놓고 귀양가는 도중에 사약(賜藥)을 내려 죽이는 것이 상투적인 수법이다.

 

□ 폭군에 忠節한 홍언충

 

그러기에 홍 충은 사약을 가진 금부도사가 오늘 내려오려나 내일 내려오려나 하면서 귀양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죽는 것을 미리 알고 그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묘비명까지 초를 잡아놓았던 것이다.

『한평생에 迂闊하고 옹졸함은 학문의 공이라. 설흔 두 살에 세상을 마치니 명은 어찌 그다지 짧으며 뜻은 어찌 그다지 긴고

옛고을 무림땅에 무덤을 정하니 푸른산은 위에 있고 물굽이는 아래에 흐르도다.

천추만세 뒤에 누가 이 들판을 지날런지 반드시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며 슬퍼할 사람이 있을지어다. 』

 

이같이 묘비명과 만장까지 초잡아 놓고 문경새재를 넘어 대탄원(大灘院)에서 쉬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던 사신행렬이 뒤따라 달려왔다.

 

사사약(賜死藥)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인 줄 알았더니 의외에도 연산군이 폐군(廢君)되고 중종이 반정(反正)했다는 소식과 새 조정에서 급히 돌아오라는 매우 기쁜 전갈이었다.

죽음의 길이 영광의 길로 돌변한 것이다.

 

한데 홍언충은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마냥 구슬피 울었다. 새임금을 위해 우는 기쁜 울음이 아니라 옛 임금을 위해 우는 슬픈 울음이었다.

홍 언충은 영광의 길을 등지고 귀양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고향에 가서 은거, 거듭된 조정의 출사(出仕)요구를 거절하였다.

 

이 선비의 행동은 현대인에게는 쉽게 납득은 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의를 위해 가혹한 고난을 당해가며 불의와 싸워 이겨놓고서 승자의 개선길을 등지고 패자의 길을 택하는 이 선비의 소행을 뭣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인가.

홍문관의 물은 피보다 진했다.

선비에게는 또 다른 대의(大義)가 부여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군불사(二君不仕)가 그것이다. 임금이 잘나건 못나건 한 임금에게 출사한다는 것은 곧 빈틈없는 충실한 마음인 충의 조건이었다.

그러하므로서만이 포학(暴虐)한 임금의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군불사(二君不仕)라는 의가 없으면 굳이 포학한 임금에 저항할 필요도 없고 또 굳이 포학한 임금의 비위를 맞춰 입사(入仕)하지 않고 은둔이라는 편리한 제3의 길을 택해 보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군불사는 오로지 한 임금만을 섬겨야 하기에 제3의 길이라는 구제가 있을 수 없다.

 

홍언충은 낙향한 후 고향 땅에서 연산군이 유배돼 있는 강화도를 향해 요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거듭되는 조정의 입사를 끝내 거절하고 그를 죽이려 했던 연산군을 위해 절개를 지키다가 죽어갔던 것이다.

자신의 영리나 부귀 그리고 육체적인 것을 극소화하고 義나 節 같은 정신적인 것을 극대화하는 사고방식이 곧 한국선비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二君不仕列傳

 

육체적 부귀영화는 짧고 정신적 행복은 영원하며 그 정신적 영원을 위해 비록 모든 세상이 모르고 있고 또 욕하지 않더라도 단지 자기 양심에 汚辱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가난한 초야(草野) 생활을 택하거나 또 죽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의 음란하고 포학함이 날로 심해졌을 때 항간에는 반정할 기미가 있었다. 홍언충의 집안사람이 그에게 전고하기를,

『당세에 이름이 드러난 이진곤(李辰坤) 같은 이도 망명했는데 공은 어찌 지금까지 가지 않고 있읍니까. 』

고 물은 일이 있었다.

이에 그는,

『인륜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부자관계가 그 첫번째이고 군신관계가 그 둘째이다. 나로서 지금 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떠났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다만 군신의 의리가 있을 뿐이다. 지금 만약 망명한다면 이는 아버지도 없는데 또 임금도 없게 되는 셈이다. 임금과의 의리에서 어찌 도피하리오』

했던 것이다.

 

이같이 이군불사의 의리를 지켜내는 선비가 많지는 않았지만 또 적지도 않았다.

연산군 때만 해도 손꼽을 수 있는 선비로서 유기창(兪起昌·정평부사), 김숭조(金崇祖·전한), 남 세주(南世周·전한) 등을 들 수가 있다.

 

유기창 역시 연산군의 눈 밖에 나 거제에 귀양가 있었다. 같은 때 거제에 귀양가 있는 사람이 세 사람이 있었는데 매양 서로 이끌고 산에 올라 북쪽을 향해 그들을 쫓아낸 임금을 향해 망배를 하였다.

어느 날 금부도사가 달려와 그 중 한 사람을 잡아다 죽였기에 유기창도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급한 심부름꾼이 바다 건너오는 것을 바라다보고 집안사람들을 불러 영결(永訣)을 했다. 한데 뭍에 오른 그 심부름꾼은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알리고 그를 병조참지(兵曹參知)벼슬로, 그의 아들 유여림(兪汝霖)을 한림(翰林)벼슬로 승진시킨다는 전갈을 갖고 온 것이다.

이 편지를 본 유기창은 기뻐하는 집안사람들에게 엄숙하게 말하길,

『나는 마땅히 옛 임금을 위하여 울어야 되겠다』

하고 자리를 펴고 북향하여 큰 소리로 울었다.

아들에게 편지를 하길, 너는 충성을 다하여 새 임금을 섬기라고 말하고 자신은 고향인 비인으로 돌아가서 한평생 마칠 때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고 죽을 때 신주에는 전 임금때 벼슬인 첨지중추(僉知中樞)라고만 쓸 뿐, 새 임금이 내린 증직은 쓰지말라고 단단히 타일렀던 것이다.

 

연산군이 폐위되자 김숭조는 눈 뜬 장님을 핑계하고 벼슬을 거절하였고 남세주는 고질이 있다고 핑계대고 이군불사의 의리를 지켜 내렸던 것이다.

 

〈장빈호찬(長貧胡撰)〉이란 문헌에 보면 이 두 사람은

『연산주가 쫓겨나고 중종조가 일어나는 천명을 어길 수 없음을 알지 못함이 아니로되 자기의 주견과 의리를 지켜 세속을 따르지 않고 혼자 행하여 변하지 아니하였다.』

했다.

 

명상 정광필(鄭光弼ㆍ영의정)은 이조참의 때 연산군의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상소하였다가 귀양가기 시작, 삼흉(三凶)에 거슬려 관력의 절반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유배자는 유배지에서 관문을 쓸거나 종노릇을 하기로 법에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유배인들은 거의 고급 관원이거나 당상관이므로 그 법은 유명무실하였다.

 

그런데 정광필은 유배지의 관문 앞을 비질하는 노역(奴役)을 굳이 하는 고집을 부렸다.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었을 때 그는 갑자기 육식을 끊었다.

이유를 물으니,

『전 임금(연산군)의 생사를 확실히 모르는 처지에 전주에 대한 도리라』

하였다고 한다.

 

중종반정을 주모한 공신 성희안(成希顔)은 그의 이같은 도량을 높이 평가했었다.

『광필 같은 이는 소리 없는 데 듣고 형상이 없는 것도 본다』

 

연산조에 절의를 지켜 유명한 박삼길(朴三吉·참판)은 여러 면에서 전설적이었다.

그의 용력(勇力)은 어릴 때부터 소문 나 있었다. 송아지를 겨드랑에 끼고 수 길의 담을 뛰어넘는 건 예사고, 줄타기를 거뜬히 해내며 달리는 말을 뛰어가 잡아 오곤 하였다. 그의 아버지 박 효순(朴孝順)은 이 용력으로 무장이 될만하나 무식하면 약한 무장이 될 것을 걱정하여 공부를 시켰다. 그는 낮에는 사냥해서 양식을 대고 밤에는 관솔불로 공부를 하여 나이 30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그는 연산군의 소행에 대해 낱낱이 무저항으로 단독 시위를 하였다.

 

윤비(尹妃)를 폐비하였을 때 두문(杜門)을 널리 선언하고 들어앉았었고, 연산군이 단상제(短喪制)를 공표했을 때 미처 삼년상을 못다 치루었던 그는 회양부로 전근령이 내리자 임지에 가서 무저항의 수단으로 남은 상기(喪期)를 치렀다. 즉 백성들에게 초달(楚達)하는 가형(加刑)을 하지 않고 갖가지 공무에서 변상 수법을 썼던 것이다. 임기가 만료되자 임금께 낙향을 고하고 내려가는데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그의 짐짝을 수색케 하였다. 그의 짐이라곤 쌀 되박과 간장병, 조복 한 벌밖에 없었다. 연산군은 그것을 보고 웃으며 뭘 먹고 살려고 낙향하느냐고 붙잡아두어 오히려 그걸로 대사간(大司諫) 참판벼슬로 올라갔다.

 

박원종(朴元宗)이 연산군에 대한 「쿠데타」를 음모할 때 박삼길에게 내통을 하였다. 그는 이 거사가 의로운 것이나 일단 이 임금에게 입사하였으므로 배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반정 후 반정세력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고향에서 연산군에의 절개를 지켰다. 악군일지라도 군의(君義)를 지킨 절신(節臣)으로 홍언충과 박삼길을 들 수 있다. 그는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쳐「기로선생(耆老先生)」이란 애칭으로 불리었다.

 

이효원(李效元·참판)은 광해군 때 권신인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거제도에 유배당한 것을 비롯하여 압박을 가장 많이 받은 절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 반정이 의로운 것이 못된다 하여 낙향 불사했다. 그의 아들이 반정의 훈신(勳臣)이 되자 평생 그 아들을 보지 않고 죽었다 한다.

 

반정은 그의 의로움의 적을 숙청하는 것이요, 또 이지러진 불의를 바로 잡으며 그의 유배생활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었다. 여느 사람 같으면 간절히 바라던 계기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효원은 어떤 시간적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 원천적 불의인 반정이 동원된 것에 저항을 느꼈던 것이다.

 

이같이 역사상 드문 저항을 한 데에는 역사상 드문 인간적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저항의 크기는 그의 아들이 멀리서 수십 번 찾아와도 문을 잠그고 외면했던 데서 보이듯이 인간 정리의 억압도로 가늠할 수가 있겠다. 이 같은 한국 선비 생리의 한 단면은 불사이군(不仕二君)이라는 유학(儒學)의 가르침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일신상의 영화나 개인적인 어떤 속성보다 의로움을 숭상하여 고차원의 정신적 안정을 얻는 유풍(儒風)의 소치로 보인다.

 

육체적 행복은 짧고 정신적 행복은 영원하며, 그 영원한 정신적 생활을 위해 비록 모든 사회가 욕하지 않는 데도 단지 자기양심에 한 오점을 남기기 싫어 가난한 초야생활을 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金德生의 射虎事件

 

동양의 문명을 자율 문명 서양의 문명을 타율의 문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곧 한국의 선비는 자율문화의 핵심적 자인(存在)이요 졸렌(當爲)이었다. 타율의 무기인 법률이 발달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법률 이전에 자율하는 가치형성이 되어 있었기에 필요가 없었다. 한데 서양문명의 침투는 곧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인 자율의 역량을 둔화하거나 약화시켰다.

 

이같이 서구적 실리주의와 합리주의에 젖은 현대인에게 이 같은 선비의 요소는 넌센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대의에 강하게 집착할수록 더욱더 넌센스로 느껴지는 감이 강하다.

 

여기 몇 가지 실례를 역사 속에서 얻어보자.

 

태종이 집권할 때 공신으로 김덕생(金德生)이라는 명사수가 있었다. 공신에 명사수였기로 태종은 궁 가까이 두어 경호의 임무를 부여했었다.

어느 날 태종이 숲이 우거진 후원에 쉬고 있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임금 가까이로 기어들고 있는 것을 김덕생이 발견하 였다.

 

한말까지도 경복궁 뒷길엔 금호방(禁虎膀)이 붙어 있었고 실록에도 호랑이의 궁궐침입 기사가 잦은 것으로 보아 이 후원의 호랑이 침입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김 덕생은 화살을 뽑아 일시(一矢)로 호랑이를 명중시킴으로써 태종이 당할 호환을 미리 막아냈던 것이다.

임금의 생명을 구한 김덕생은 다시 한번 공신일 수가 있었다. 한데 그는 이「功」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이치에 얽매이게 된다.

 

이 김덕생의 사호사건(射虎事件)은 그렇게 일대 의리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곧 임금을 향해 화살을 쏜다는 것은 그 방시(放矢)의 목적여부에 선행하여 비리이며 이 비리는 선례에 따라 대역죄에 해당된다는 주장이 비록 비리이나 그 뜻이 임금을 살리는 일이기에 목적을 참작 대역일 수 없다는 주장보다 한결 우세했던 것이다.

의리를 존중하고 해리(害利)를 배격하는 한국적 가치관으로 이 한 사건을 판단하는데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임금으로 화살을 겨냥했다는 것은 진리에의 배반이고 임금을 호환에서 구제했다는 것은 실리라고 판단하는데 이론이 제기될 수 없었으므로 그 결과는 뻔한 것이다. 의리가 지상인 당대 선비의 모럴은 비록 임금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일이 있더라도 비리는 용납될 수 없다는 용기있는 논쟁의 마무리를 한 것이다.

 

결국, 김덕생은 대역죄로 사형(死刑)을 당했다. 이는 다분히 소피스케이트된 충의 개념이긴 하나 서양적 합리주의에 대한 한국적 비합리주의의 콘트라스트이며, 서양적 공리 실리주의에 대한 한국적 의리와 대의주의와의 콘트라스트이고, 목적이나 결과를 중시하는 서양의 실리주의와 원리나 원인을 중시하는 한국의 정신주의와의 콘트라스트이며, 서양의 독선적이고 가변성인 관념론과 사회 내 존재로서 연대적이고 불변성인 한국의 격론과의 콘트라스트이기도 하다. 선비의 휴머니즘은 의리에 비해 차선적이며, 휴머니즘은 인간 쪽의 아리(我利)에 속하므로 의리를 위해 희생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의로운 일이었다.

 

■ 柳成龍의 御前放砲

 

이와 비슷한 사건이 선조 때에도 있었다. 군비 강화의 필요성에 쫓겨 훈련도감을 신설하고 신무기인 조총을 홍이(紅夷)할 등을 수입해온 유성룡(柳成龍ㆍ영의정)은 이 신무기의 위력을 임금을 비롯 조신(朝臣)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전방포를 하였다. 이 어전방포를 두고 다시 의리논쟁이 불붙었다.

 

어전에서 살상의 흉물인 화약을 터뜨리는 것이 비리이며, 재인(才人)이 아닌 수상이 방포했다는 것은 곧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켰다는 상소문이 그 불씨가 되었다. 그 소두는 영남선비인 박 동현(朴東賢)이었다.

 

명상인 유성룡은 이 소문이 정당하며 자신이 의리에 죄졌다 하여 사임하고 낙향함으로써 일단락이 지어졌다.

나라의 중흥이 병비라는 실리보다 체모라는 의리에 있다는 것은 당시의 모럴에서 당연한 귀착이었다.

 

그리고 이 병비의 소홀 때문에 파죽지세로 임진·정유의 양 국난을 겪고 또 병자의 국치를 당한 연후에도 선비들은 유성룡의「실리정치」보다 박 동현의「의리정치」를 바르다고 생각해 집요한 정신적 전통을 과시했던 것이다.

 

현대인은 선비들의 실리보다 명리(의리), 합리보다 비합리의 성향이 우리나라를 가난하게 하고 망쳤다고 생각한다. 그 실례로서 유성룡의 병비가 좌절된 사실을 든다. 하지만 병비가 좌절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박동현의 의리소(義理疏)가 아닌 다른 데 있는 것이다. 곧 의리지상의 체통을 지키자는 박동현의 상소는 병비를 거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전의 시방포(試放砲)와 정승의 신분적 체통에 대한 의리 유지에 있는 것이니 병비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경우 병비의 좌절은 병비를 주장한 사람의 의리상의 결함 때문에 생긴 것이지 병비 자체가 의리와 모순되어 좌절된 것이 아니다. 참마음 진심의 투사는 결코 나쁜 결과를 낳는 법이 없다. 다만 이 참마음의 투사가 절대 가치관이 된 것을 이용하여 참마음을 위장한 사심(邪心)의 투사가 곁들었기에 선비사상이 부정적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했을 뿐이다.

 

인조 효종 년간에 명신 이후원(李厚源ㆍ우의정)이란 분이 있었다. 그는 선비 사회에서 의형 (議衡)이란 별명으로 불리운 분이다. 이 별명은 사소한 인간사에서부터 국사에 이르기까지 그판단이 의로운가 의롭지 않은가를 재어 볼 수 있는 「인간저울]이란 뜻이다. 병자호란으로 국치를 당하고 임금의 굴욕적 예가 강요되었으며 세자의 인질문제가 겹쳐 침통해진 남한산성의 이궁에서 그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직언을 했었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은 오직 나라를 위해 죽고 신하들은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한다. 』

고 역설했다. 의리를 구제하기 위해 임금보고 죽으라는 이 대담한 용기는 한국선비의 전통적 가치관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임금은 항상 이후원의 주장에 불만이었다. 이정승은 우활(迂闊)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주장이 항상 현실이나 실제와는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의는 현실의 가치보다 과거나 미래의 가치에 치중하고 현실문제를 과거나 미래에 조사(照射)하여 연조(連祖)적으로 가치판단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잘린 손에 쥐어 있는 官印

 

세종 때 천문 과학자 김조(金欽·이조판서)는 천문 측정기인 간의대(簡儀台)와, 천추전(千秋殿) 서쪽 마당에 흠경각을 짓고 자격루(自擊漏)를 만든 사람으로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으로서도 이름났었다. 또 그의 이름은 임금에게 무분별한 맹종을 뜻하는 대명사로서 후세에 곧잘 인용되기도 했다. 임금의 분부나 행실이 아무리 사리에 어긋나고 악의 소행이라 할지라도 맹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을 모시고 금규화(金규(葵)花) 앞에 엎드려 진퇴를 묻기를 원합니다』

고 대답했던 그였다. 〈筆苑雜記〉

 

이와 같은 맹충(盲忠) 습속은 다음과 같은 극한적인 인간 상황에서 얼마나 한국인에게 체질화되었던가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정기가 가산(嘉山) 원(郡守)으로 있을 때, 기의 아우 질과 더불어 가산에 있다가 홍경래의 난을 당했는데 기가 피난을 권했으나 국적(國)을 막아야 한다고 관군을 독려하여 싸우다가 삼부자(三父子)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 정씨 삼부자의 죽음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산성을 함락하고 관가에 쳐들어온 반란군은 군수 정기더러 빨리 당하(堂下)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임금의 표신(標信)인 관인을 바치라고 호통을 쳤다. 정씨 삼부자는 단정히 앉아,

『관인은 임금이 내린 것인데 목숨이 다하기 전에 내어 줄 것 같으냐』

고 창과 칼로 위협하고 있는 난군을 크게 꾸짖었다.

난군이 무릎을 꿇으라고 호통을 치자 차라리 무릎을 자르라고 버티었다. 난군이 강제로 꿇게 하려다가 너무 완강히 버티므로 발을 잘랐다. 그러나 정기는 남은 다른 한 발마저 꿇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마저 잘렸다. 하반신을 잘리우고도 그의 손에는 관인이 악착같이 쥐어 있었으며 쥔 손을 칼로 잘라내자 다른 손으로 그것을 재빨리 쥐고서 버티었다고 한다.

 

서구문명은 한국인을 너무나 당세적이고 이기적인 맹물로 변질시켜 놓았다. 선비 사상쯤은 이제 향수 속에도 남아 있지 않다. 과거와 미래의 링커로서 현대인은 한국 사상 가장 정신적으로무책했다는 지탄을 받을 것이 뻔하며 그 지탄이 자기가 신고 있는 양말 구멍만큼도 아랑곳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또한 현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