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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17.相戒性向(상계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31

선비의 의식구조-17.相戒性向(상계성향)

■ 金宗瑞를 구박한 黃喜의 底意

 

역사를 앙가쥬망(참여)과 드가쥬망(비참여)의 끝바꿈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곧 나와 나의 부모형제, 친구, 사회, 국가 등 나 밖의 모든 것과의 대결에서 그 속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앙가쥬망이라고 하고 나 밖의 것은 그것이 악하건 선하건 아랑곳없이 나에 관련된 일에만 국한해서 관심을 갖는 것을 드가쥬망이라 한다.

 

오늘 한국인의 성향을 정의하면 분명히 드가쥬망 시대에 살고 있다 하겠다.

 

본래 한국인은 가족 중심적이기에 가족을 한계로 한 그밖의 것에 무관심하고 그 안의 것에는 철저한 참여를 했었다. 그러나 서구화의 의식변천과 대가족제도의 붕괴때문에 이 내향참여(內向參與)의 전통마저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 나와 아랑곳없는 나 밖의 일이면 그것이 아무리 악한 일일지라도 관여하지 않고 방관하거나 무관해 버린다. 이 같은 공공에의 무관심은 우리나라의 미래에 가장 큰 위기로 작용할 요소이며 공공의 기반에서 이탈하여 독립하려는 이 드가쥬망은 민족이 살아나갈 저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옛 선비사회에서는 나 밖의 남에게 관하여는, 앙가쥬망의 기풍을 기본 자질로 삼고 있고 비록 그 앙가쥬망의 규모가 국가나 민족에 미치는 대폭적인 것은 못했을 망정 적어도 이웃이나 지역사회 등 소사회(小社會)에 미치는 소폭적인 앙가쥬망에는 철저했었다.

 

황희가 수상이 되었을 때 김종서(金宗瑞)가 병조판서로 있었다. 한 가지 일이라도 착오되고 실수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공이 반드시 꾸짖고 혹은 그 종을 매로 때리고 혹은 구사(丘史)를 잡아 가두었다. 동렬(同列)들이 모두 심하다고 여겼고 종서도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하루는 맹사성(孟思誠)이 묻기를,

『김 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공이 어찌 너무 심하게 허물을 잡으시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내가 종서(宗瑞)를 잘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종서는 성질이 거만스럽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하는 것이 과감하니 다른 날에 우리의 이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 신중하지 아니 하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이므로 꺾고 깨우쳐서 뜻을 다스리고 정중하게 하여야 이 뒤에 일을 처리함에 있어 경솔히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내가 곤혹을 주자는 것이 아니오 』

하니 사성이 감복하였다. 뒤에 공이 노퇴(老退)할 때에 종서를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던 것이다.

 

세조·성종 간의 선비 전림(田霖, ?~1509, 한성판윤)은 당시 왕자 회산군(檜山君)과 절친한 사이었고 그의 벼슬에는 이 왕자의 후관이 영향을 끼쳤으리만큼 절친한 사이었다.

 

그가 판윤으로 있을 때 출사길에 회산군의 집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때마침 회산군은 집을 크게 증축하는 역사(役事)를 벌리고 있어 담 넘어 한참 들여다보았다.

한데 기둥의 형태나 높이 그리고 집의 칸수가 법도보다 과감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보고 역사를 주관하는 도목사를 불렀다.

『집을 지음에는 칸수와 높고 낮은 치수에 법도가 있는 법이니 네가 죽기를 싫어하거든 아예 지나치게 하지 말라.』

고 분부하고 회산군에게도 내가 말하더라고 여쭈라 했다.

저녁에 돌아올 때 다시 그 집 곁을 지나오게 되었는데 도목수가 마중 나와 꿇어 엎드려 고했다.

회산군에게 알리자, 무릎을 치고 뉘우치더니 당장에 법도대로 하라고 분부하여 많은 것을 헐고 긴 것은 잘라 감히 법을 범하지 않았읍니다고 고한 것이다.

이에 전 림은——

『 애초에 제도를 어긴 것은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규정을 지켜 행했으니 용서한다. 후에 다시 범하면 마땅히 죄까지 합쳐서 다스릴 것이다.』

고 일렀던 것이다. 〈寄齋雜記〉

 

옛날 선비들은 동료나 상관이나 아랑곳없이 과(過)가 있으면 이를 지탄하는 데 서슴이 없었다. 후환을 겁내거나 또 반목을 꺼려한다는 법이 없었고 또 과를 지적받았다 하여 반목을 하거나후환을 부리는 자는 선비가 아니라 소인시하여 선비사회에서 소외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선조 때 재상 이원익(李元翼)이 사헌부의 말직에 있을 당시 재상이던 윤두수(尹斗壽)가 뇌물을 배척하지 못한다고 맞대놓고 과실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이 원익이 공사가 있어 윤두수를 찾아뵌 일이 있었는데 윤두수는 조금도 괘씸해 하는 기색이 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빈한한 친족들이 혼인이나 상사가 있을 때 모두 나에게 의뢰해오기 때문에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물품이 보내오면 받아두는 것이 관례이며 그 때문에 탄핵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 진심으로 말했던 것이다. 때마침 시골에서 먼 친척이 와서, 혼인을 정했는데 혼수 좀 도와주십사 하고 말하자 윤두수는 하인을 시켜 일전에 어디서 누가 가져온 옷감을 내어다 주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원익이 그 큰 도량에 탄복하고 평생 존경하였으며, 이원익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 윤두수의 후손과 친근히 지내는 것을 가풍으로 삼았다 한다.

 

한명회(韓明僧)·임사홍(任士洪) 등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들을 탄핵했던 선비 홍훙(洪興)은 이육(李陸)과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살면서 매우 친했었다.

이육이 헌 집을 헐고 새집을 짓는데 주춧돌에 둥근 기둥을 정연하게 세워 놓고 있었다. 당시 법도로는 사대부 집일지라도 기둥을 둥글게 할 수 없게 돼 있었던 것이다.

홍흥은 출사길에 그 집 사람을 불러내어,

『가서 너희 주인에게 말하라. 나라에 엄연한 제도가 있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제도에 어긋난 점이 있으면 마땅히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

고 일렀다.

퇴근길에 넘나 보니 모두 헐고 기둥을 잘라 모나게 하고 감히 한자 한치도 어기지 않았다 한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廳政)을 할 때 정승 노수신(盧守愼)은 소인들에게 모함을 당해 진도로 귀양가 있었는데 갖은 고생을 다 겪었어야만 했다.

당시 노정승을 감시하던 진도군수는 홍인록(洪仁祿)이었는데 어찌나 혹독하게 굴어 이불을 덮고 자면 죄인이 따숩게 자라는 법이 없다고 이불을 빼앗아 갔고 쌀밥을 먹으면 죄인이 무슨 쌀밥이냐고 밥상을 엎곤 했던 것이다.

 

선조 초년에 노수신은 석방되어 돌아와서 높은 벼슬을 두루 거쳤는데 당시 조정의 의론이 홍 인록을 공박하여 여러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노정승은 홍인록이야말로 법도대로 유배죄인을 다스렸으며 잘못한 건 죄인인 나였지 그는 떳떳하다고 일부러 불러들여 벼슬을 한층 높여 풍천관사(豊川官使)에 임명했던 것이다.

이 같은 선비의 품도는 어느 개인에 국한된 속성이 아니라 선비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서로 과실을 규제하는 규제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 「知面不知乎」

 

세조 때 이조판서 이승소(李承召)는 판서 벼슬에 있으면서도 겨우 삼 칸 되는 초가에서 살았다. 임금이 불러 공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당시 병조판서이던 모(某)가 입원하였다. 병판은 이 승소와 앞뒷집에 사는 친한 사이었다. 한데도 이 승소는 이 병판을 보고도 모른 체 한지라 세조가 이상하게 여겨

『이판은 병판을 모르는가』

고 물었다.

이때의 이승소의 대꾸는 유명하다.

『알지만 모릅니다. 』

이웃에 사는 겨우 6명의 판서이기에 서로 잘 안다. 한데 병판이 어느날 누각 같은 호화주택을 짓는지라, 이승소는 높은벼슬에 있으면서 주택 사치를 한다는 건 그만큼 벼슬을 모독하고 백성의 원성을 일으키니 삼가하라고 충고를 했다. 곧 상규를 한 것이다. 한데 이 병판은 선비로서 정신적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지 이 충고를 묵살하고 그 집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이승소는 이 상규를 어기는 병판은 상종할만한 선비가 못되며 소인이라 간주하고 모른체 한 것이다.

 

이 사연을 알고 난 세조는 알면서도 모른다는 뜻인 「지면부지호(知面不知乎)」란 말을 쓰므로서 선비정신에 어긋난 행위를 곧잘 채근했다 한다.

 

□ 郷約相戒

 

숙종 때에 정승을 새로 임명하게 되었는데 여성재(呂聖齊)가 자못 운동을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분애(申汾涯)가 가서 보고 말하기를,

『오늘날 일은 오직 김문곡(金文谷)에게 달렸으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힘을 쓰겠네.』

하고 자못 친절한 뜻을 보였다. 여가 처음에는 농담으로 알았다가 그가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좋아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문곡을 찾아가 보려고 하니 자네도 같이 가세.』

하고 동행하여 문곡과 인사를 마치자 분애가 묻기를,

『방금 정승을 새로 임명하는데 소인이 옛 친구가 있어서 감히 이렇게 청합니다. 』

하니 문곡이 웃으며 말하기를,

『정승을 어찌 청할 수 있는가. 』

하였다.

분애가 여공을 돌아보고 바로 그 성명을 부르며 말하기를,

『너는 대감의 분부를 들었는가. 정승은 구하고 청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말씀하셨다.』

하였다. 이토록 심하게까지 친구를 계고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악을 방관하지 않는 선비의 기품, 그리고 악을 지탄받고도 악의를 품지 않는 선비의 기품은 유교의 교리에서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 중종이래 풍미했던 향약의 교화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향약은 향리 자체로 서로의 도덕과 규범을 규제하는 것으로 한족의 선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교화 요소였던 것이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기본으로 하여 각 향토에 알맞게 변형시킨 이 향약은 대체로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과실은 서로 다스리며 〔過失相規〕

예의는 서로 나누고〔禮俗相交〕

어려움은 서로 돕는다〔患難相恤〕 등 네 가지로 돼 있다.

 

대개 여섯 가지로 대별했다.

술먹고 떠들며 음탕하고, 잡기 유희에 빠져 방탕하고 공부하지 않는 것이 첫째 과실이요,

조그만한 일로 서로 원한을 품고 그중 상규(相規)하는 과실은 욕하고 싸우며 관에까지 소송하는 것이 둘째 과실이며,

몸가짐을 허술히 하고 연장과 대답을 완만히 하며 잘 살고 높은 자에게 아부하고 가난하고 천한 자를 깔보며 집안을 잘못 다스리는 것이 세째 과실이며,

말에 실이 없고 남을 기만하며 단점을 두둔하고 과실을 숨기며 약속을 어기고 거짓말을 하며 모함하는 것이 네째 과실이며,

재산 늘리기에 급급하여 남을 해치고 이를 취하거나 절제 않고 낭비하며 검약 않고 사치하며 이웃이 굶는데 돕지 않고 관에 증리하여 이권을 얻는 것이 다섯째 과실이며,

미신을 믿어 가산을 탕진하거나 풍수에 현혹되어 이장을 일삼거나 또 제례를 소홀히 하는 것이 여섯째 과실이다.

 

이 같은 과실에는 상규할 의무가 주어졌으며 이 같은 과실을 알고도 묵과하는 것 또한 과실로서 지탄받았던 것이다.

 

이 같은 과실은 고발돼야 하며 그 과실이 확인되면 다음과 같은 향약에 정해진 벌칙에 의해 제재가 가해진다.

 

이 벌칙 역시 향약에 따라 다르나 다음은 이이(李珥)가 정한 향약에 정해진 벌칙이다. 이 벌칙에는 선비와 장자 그리고 천인으로 구분하여 그 벌칙이 달라진다.

 

상벌

선비→ 동네 뜰에 벌로 오래 세워 두므로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회식 때는 가장 말석에 따로 앉히므로서 벌로 삼는다.

장자→ 여러 사람이 앉아있는 가운데 면책을 한다. (滿坐面責)

천인→ 태(笞) 40대를 때린다.

 

차상벌

선비→ 滿坐面責

장자→ 서벽(西壁)에 얼굴을 대고 앉혀 면책한다.

천인→ 태 30대

 

중벌

선비→ 서벽면책

장자→ 향약집행부가 질책한다.

천인태→ 20대

 

차중벌

선비→ 향약집행부의 질책

장자→ 사람없는 곳에서의 좌벌(坐罰)

천인→ 태 10대

 

하벌

선비→ 좌벌

장자→ 과실을 통고한다.

천인→ 면책한다.

 

이상 벌칙을 보면 천인은 체벌이지만 선비나 장자는 체면이나 위신을 손상시키는 심벌(心罰)이며 이것은 체면을 존중히 하는 한국인에게는 중한 벌이 되었다.

 

이 벌칙규정 적용의 과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안색을 바꿔 이론을 말하는 자, 친상을 입고 한 달 안에 술을 마신 자, 하인으로 상전 앞에 말이 공손치 않은 자 등이 상벌이요,

이치는 옳으나 사람을 때려 상처가 나거나 남의 과실을 보고도 상계(相戒)하지 않고 무관심하면 차상벌,

말질을 할 때 속이는 행위, 남의 논물을 빼돌리는 행위 등은 중벌,

선비 앞에서 장자가, 장자 앞에서 천인이 편안히 앉아있거나 하마(下馬) 않고 지나가는 행위는 하벌이다.

 

이같이 벌칙은 상세히 정해놓긴 했으나 범과한 즉시 벌칙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향약에 든 사람끼리 서로 경계하여 조심시키는 근신기간을 두고 그 상규 상계에도 개심않고 그 과실을 재범했을 때 이 벌칙을 적용시켰던 것이다.

 

이같이 향약에 체질화된 선비들은 벼슬자리에 올라도 상규상계하는 마음이 작동하고 계고(戒告)하는 자나 또 계고받는 자 앞에 불화나 알력이 극소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