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徐居正의 罪案이 된 金時習의 詩
옛날 바닷가에 한 어부가 살았다. 그는 바닷가에 날아드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가면 가까이 날아와서 놀기까지 했다.
어부는 이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가깝게 와서 노는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어부는 그렇게 하려고 맘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다.
한데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어부 가까이 날아들질 않았다. 이것은 어부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심은 옛 한국 선비들의 사고나 행동에 막중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 기심의 유무를 두루 깊이 통찰하므로써 교우 여부를 정하였다. 또 말을 주고받는데도 기심이 있나 없나 여부를 따지는데 세심하였다.
기심은 곧 교작(巧作)의 예비심이다. 機計란 말의 본뜻은 교활한 지혜요 남을 속이려는 공작이며 기사(機事)란 말의 본뜻은 은밀한 음모를 뜻하였다.
[천지간에 기계로운 자는 반드시 기사가 있으며 기사가 있는 자는 반드시 기심이 있다. 』
고 했다. (莊子)
즉 기심은 표현되지 않은 전행동적 준비심이다. 기심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의 인정으로 인격을 인정하였으며, 아무개에게 기심을 통찰당했으면 그 통찰당한 사람은 선비 사회에서 소외당해야만 했다.
세조때 문신 서거정(徐居正)은 생육신인 김시습으로부터 기심을 통찰당하고 그 기심을 시인한 선비였다. 서거정이 평소에 숭배하는 김시습을 초치하여 강태공이 고기를 낚는 그림 한 폭을 내놓으며 시 한 수를 청했다. 이에 김시습이 써내린 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비바람 소소히 낚시터에 뿌리니
위수의 고기와 새는 기심을 잃었네.
무엇하러 늙게사 날쌘 응양장(鷹揚將)이 되어
백이숙제(伯夷叔齋)를 굶주리게 하는가.
이 시는 서거정이 절의를 버리고 세조에게 중용되려는 그런 기심을 찌른 절구(絶句)였다. 기심을 찔리운 서거정은 이 시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자네의 시는 곧 나의 죄안(罪案)이네 』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候鯖瑣言)
■ 狎鷗亭의 갓쓴 원숭이
정난(靖難), 좌익(佐翼), 익재(翊戱), 좌리(佐理)의 사공신이요, 세조, 성종을 옹립하여 왕위에 올렸으며 두 왕국의 국구일 뿐더러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으로서 73년간이나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한명회(韓明治)——. 그 한대감이 권력이나 벼슬이나 영화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세평을 듣고 싶어 한강 건너 경치 좋은 강벼랑에 정자를 짓고 마치 그곳으로 은퇴한 양 했다.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의 은사(隱士)가 되어 여생을 보낼 셈이면 왜 하필 서울에서 겨우 강 하나 건너 정자를 지어야 했던가 말이다. 그러고서 하루가 멀다 하고 성안에 드나들면서 권력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한명회는, 송나라 승상 한충헌(丞相 韓忠獻)이 왕통계승에 공을 세웠던 것으로 자기를 항상 한 충헌으로 비기고, 한충헌의 정자 이름이 압구정(狎鷗亭)임을 흉내내니, 이 한강변의 정자를 압구정으로 이름지었던 것이다. 갈매기와 친한다는 강호의 상징적 이름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친하겠다는 갈매기는 한 마리도 날아 오지 않았다 한다.
이 정자 주인은 명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이 압구정에 불러 호화스런 잔치로 응대를 했다. 심한 경우로는 궁중에서 임금이 행차할 때만 치게 되어 있는 용봉(龍鳳) 차일을 압구정에 치고 그 호사를 다했기로 대간(臺諫)의 규탄을 받아 유배까지 당했던 한명회였다.
주색을 즐기고 이욕(利慾)에 눈이 어두운 그의 정자에는 팔도 방백 수령이 보내는 진상의 행렬이 줄을 잇고 기생의 여색이 요란한 이 정자에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들이 날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왜냐면 압구정은 기심이 깔린 정자이기 때문이다. 이 정자 주인이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망기노(忘機老>라고 불렀지만 그 정자 밑을 지나다니던 많은 선비들은 이 <망기노>의 기심을 풍자하여 적지 않은 시를 남겨 놓고 있다.
판사 최 경지(崔敬止)는,
정자는 있어도 와서 놀지 않으니
가슴속 기심이 고요하면
벼슬바다에서도 갈매기와 친할 수 있으련만
하고 읊었다.
이 시 때문에 최경지의 벼슬길은 사양길로 접어 들었지만 압구정에 위장된 한명회의 기심을 둔 선비들의 풍자는 심화돼 갔던 것이다.
부제학벼슬에 있었던 선비 이윤종(李尹宗)이 베옷입고 이 압구정 정자 밑을 지나면서 읊은 시는, 권세와 부귀에 탐닉하면서 겉으로는 그것과 떠나 산 것처럼 치장하는 위선적인 인간상을 비꼬는 상징적인 시구로 후대에까지 무척 애송되었던 것이다.
정자는 있으나
그곳에 돌아가 쉬는 자 없으니
누구라 갓쓴 원숭이라
일러 예이지 않으리오.
갈매기와 친(狎)한다는 압구정은, 정자 주인의 기심을 알고 갈매기가 날아들 터문이 없다 하여 친할「狎」자를 누를「押」로 바꾸어 압구정(押鷗亭)이라 불리우기도 했던 것이다.
기심배제에 철저했던 선비 남효온은 기심잃은 경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갑진년에 행주에서 농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갈밭 사이에 썰묻진 곳에서 그물질을 하다가 해를 쳐다보니 훤하게 밝아 있었다.
내 마음 속으로,
『사람이 사는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사람을 용납할 수 있구나. 어찌 이를 속일 수가 있으랴.』
고 생각했다. 내 곁에서 물새들이 매우 외롭게 지저귀며 노는 것을 보고 나는 문득 기심을 잊었다.
갈매기는 날아가고 내가 기심을 잊었다고 믿는 까닭은 곧 기심을 위하기 때문인가.
기심 없는 경지의 미화를 이렇게까지 했다.
〈회문쇄록(謏聞鎖錄)〉 등 문고를 남긴 조신(曺伸)은 만년에 여생을 금산에서 살았다.
그는 아름다운 자연의 기심을 잊지 못하게 한다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있다.
새벽에 술 석 잔 마시고
나이 일흔 된 것을 자랑 삼네.
손들어 남쪽으로 난 창을 열고
시 한 수 읊조린다.
샘구멍에서 솟는 물이 못에 넘치니
고기가 뛰어 놀고
나무숲이 집을 둘렀으니
새가 모여드누나.
꽃은 비갠 뒤에 안색이 나고
바람이 불때 버들은 허리를 휜다.
아 누가 적암(조신의 아호) 더러
아무일 없다고 하던가.
매냥 절물(四時의 경치)로 인하여 기심을 잊지 못하는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취향도 기심으로 이해했던 선비들이었다.
어떤 교사하고 상지(喪志)를 불러일으킬 마음이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행색으로 통찰하고 또 통찰당하는 것으로 알고 언행을 했던 선비들의 기심 습속은 한국인을 의로운 기반에 귀착시켜 온 소중한 유산이기도 했다.
한국 도학의 비조인 한훤당 김굉필은 경현록(景賢錄)에서 선비의 행실 조건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중에서 「지신」,「지기」를 강조하고 있음은 선비에게 있어 기심의 통찰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경에
「사람을 알아보는 이는 순이니 요(堯)임금도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
하고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말에서 기심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장차 배반하려는 자는 그 말이 부끄럽고(漸)
마음에 의심을 가진 자는 그 말에 지엽(枝葉)이 많고,
길한 사람의 말은 적으며(寡)
조급한 사람의 말은 많고
착한 이를 모함하는 사람은 그 말이 들떠 있으며
그 지킴을 잃은 자는 그 말이 비굴하다.」<주이(周怡, 1515~1564)>
인(仁)한 자는 침묵하고
용맹스런 자는 떠들고
말을 잘하는 자는 믿음성이 적고
순수하기만 하는 자는 결단이 적고
꾀있는 자는 음험함이 많고
글 잘하는 자는 중심이 적으니
이러한 이치로 미루어 보면 말은 알아들을 수 있으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훤당은 말로서 사람을 미리 통찰하도록 가르쳤다.
또 지기의 계명에서도
「일의 징조를 아는 이는 신이로다. 징조를 아는 이는 신이로다. 징조는 움직임의 미세한 것이요, 길하고 흉한 것이 먼저 보이는 것이다. 군자는 징조를 보고는 일어서서 그날이 저물기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는 공자의 말
「군자는 미세함을 알고 드러남을 알며 부드러울 줄을 알고 강한 줄을 아는 것이다. 」
는 주이의 말을 인용하고 기심을 통찰하고 지혜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위태로운 징조를 알고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어야 할 것이 있으면 죽음을 보기를 집에 돌아가듯 하여 구차스레 면해서는 안 된다. 웃사람에게 교제하는 자는 반드시 공손하되 아첨이 되는 징조를 알아서 조심하고 아랫사람에게 사귀는 자는 반드시 화평하고 간소하게 하되 위신 없고 실없게 될 징조를 알아서 조심하여, 일에 대해 징조를 알고 사건에 따라 징조를 알아서 일마다 다 그 징조가 있으니 각기 그 도리대로 진퇴하여 미세한 것, 드러난 것, 부드러운 것, 강한 것을 막론하고 이를 모두 안다면 어찌 뭇 사람의 큰 신망을 얻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고 기심 통찰을 강조했다.
이 같은 기심에 예민한 선비의 체통은 곧 한국인의 의식구조로 정착하기도 했다.
■ 天主당 뒤에 火輪船이
국가의 시책이 나왔을 때마다 백성들은 그 시책에 무슨 기심이 있지나 않나 하고 일단 생각해 보는 습성이 체질화한 것도 이 선비의 정신적 유물이다.
비단 시책뿐 아니라 외래의 사조나 진보적인 운동에 대해서도 한국의 민중이 보수적이었던 데는 민족의 체질이 보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뒤안에 숨겨져 있는 기심이 있나 없나를 확인해 보려는 조심성에 연유된 것이다.
이를테면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한 것은, 천주교가 전통적 유교의 도학에 배치한다는데서 자연발생한 저항이라기보다 천주교의 배후에 숨어있는 어떤 기심을 추정했기 때문이었다. 천주교를 앞에 둔 서양의 세력과 문물의 침입을 그 교리보다도 수천배 두려워했던 것이며, 바꿔 말하면 천주교에 기심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천주당 신부 뒤에 화륜선이 따라 든다」
는 당시의 속요가 그 기심을 입증해 주고 있다. 화륜선이란 당시 대포를 단 군함을 뜻하였으니 바로 무력 침략을 의미했다. 한말의 개화풍조에 한국의 민중이 그토록 저항적이었던 것도 한국의 민중이 보수적이었다는 면보다도 개화운동을 주도했던 개화당으로부터 기심을 몰아냈기 때문이었다.
곧 호시탐탐하고 있는 일본이, 그의 침략 야욕을 충족시키는 발판으로서 개화당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 민중의 통념이 돼 있었던 것이다. 개화사상이 싫어서라기보다 개화사상을 탄 일본의 야욕을 기심으로 포착했기 때문인 것이다.
일제가 한국민족의 상징적 복장인 백의를 말살하고저 장터마다 물감솥을 상설하고 장꾼의 흰 옷에 깜장물을 끼얹으므로써 염색을 불가피하게 했으나, 한국인이 끝까지 백의를 버리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한국인이 기심을 통찰하는데 도사가 돼 있다는 사실을 들 수가 있는 것 같다.
백의가 어느 만큼 불경제적이고 불편하며, 품이 많이 든다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 그 옷을 입고 살아온 한국인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악착같이 입어내린 데는 전통에의 집착이 강했다기보다는 백의말살의 이면에 도사린 민족말살의 기심을 통찰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기심을 일단 감지하고 나면, 그 명분이 얼마큼 훌륭하고 또 합리적이고 경제적이고 또 과학적일지라도 일체 돌아보지 않고 관심 밖에 둔다.
걸핏 보기에 어리석고 또 미련하며 융통성이 없을뿐더러 무지하고 바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같이 무관심을 가장하고 속으로는 그 기심에 항거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기심을 통찰하고, 이를 소외시키는 선비의 굳건함은우리 한국인을 도덕적으로 성숙시키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벌률이 발달하지 않은 이상적 모럴풍토가 형성돼 내린 데는 악의 온상인 기심의 존립을 허락치 않은 이 같은 선비들의 정신체질 때문이었다.
곧 기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이미 악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고 기심을 기피했기에 도덕적으로 성숙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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