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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15.清貧性向(청빈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27

선비의 의식구조-15.清貧性向(청빈성향)

 

□ 庇雨思想과 그 人脈

 

동대문 밖을 나와 동덕여중고의 뒷녘으로 돌아든다. 신설동과 보문동의 경계 즈음해서 우산각(雨傘閣)골이라는 옛 마을 이름을 확인한다. 옛 서민들은 이 지명을 우산각골이라 불렀지만 선비들이나 식자들은 비우당(庇雨堂)골이라고 불렀었다.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초라한 당집이 하나 있었으며 그에 연유된 지명이었다. 우산각은 곧 비우당의 서민들 칭호였던 것이다. 구한말이나 일제 초기만 해도 이 비우당의 주춧돌과 비우당을 뒤덮는 노송 한 그루가 남아 있었다는데 일제 때 도시계획에 의한 신설동의 신설 때 그 흔적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은 이 우산각골에 호화주택들이 들어서 있어 마냥 무상했다. 비우당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에도 호화로운 한옥이 들어서 있었다. 행여 그 주춧돌이라도 뜨락에 남아 있나 싶어서 찾아들었더니 찾아볼 길도 또 물어볼 길도 또 알아볼 길도 없었다.

 

다만 나의 눈에 강렬한 인상과 여운을 남겨 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 비우당터의 호화주택 기둥에 붙여진 주련(柱聯)들이었다. 그중에 다음과 같은 예서체(隸書體)의 글이있었다.

 

「賢而多財 則損其志

愚而多財 則益其過」

 

현명한 이가 큰 재물을 가지면 곧 그 뜻[志]을 해치며 어리석은 이가 큰 재물을 가지면 곧 그 과실을 더할 뿐이라는「소학(小學)」 외편에 나온 명언으로 우리 옛 선비들의 행동을 규제해 온 가장 영향력 있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한국 선비 기풍의 한 패턴인 「청빈」의 연고지를 찾아온 필자에게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이미지에는 너무 역동적인 호화주택이 그 자리에 서있어야 했던 것이 상황의 장난으로만 받아 들여지는데 거기에 선비들의 재물에 대한 기본사상인 「소학」의 글이 주련에 쓰여 있었다는 데는 어처구니 없어 소리없이 웃고 말았던 것이다.

 

우산각골에서 있었던 이 조그마한 일은 곧 우리 한국의 전통적인 플러스적 가치가 얼마만큼 처참한 몰골로 현재에 잔존돼 있는가를 적시해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우산각골에서는 고려 말께 20년간 입사했고 이조에 들어 태조, 정종, 태종, 세종 4대에 걸쳐 35년간이나 입사했던 정승 유관(柳寬)이 살았던 마을이다. 그는 선비의 조건인 청빈을 체질화하고 살았던 많은 선비 가운데 전형적인 분이었다. 재상을 거쳐 정승이 됐을 때까지도 이 성 밖 우산각골에서 담장이나 대문마저도 없는 허술한 초가 너댓 칸 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의 청빈한 성품을 잘 알고 있는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밤에 몰래 가 울타리를 둘러놓게 했던 고사는 유명하다. 집이 허술하여 장마철이면 지붕이 새어 방안에 빗물이 떨어지곤 했다. 유정승은 그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하사받은 일산(日傘)을 방 안에서 펴들고 비를 피했다.

 

유 정승은 말했다.

 

『우산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내나.』

이 말을 들은 유정승의 부인은,

『우산 없는 집에서는 다른 마련이 다 돼 있답니다.』

고 말했다 한다.

 

이 비오는 날 방 안에서의 유정승의 대화가 연유가 되어 우산각골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정승이면 요즈음 장관보다 높은, 수상과 맞먹는 벼슬이다. 그 벼슬아치의 청빈도 이마만 하였다.

그의 집에는 꽃나무 두어 포기가 있을 뿐이고 집에 있을 때는 맨발에 짚신차림이었다. 손이 오면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는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로 술을 뜨게 하여 돌려 마셨다.

 

재상의 봉록(奉祿)으로 겨우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궁색한 살림은 면하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비의 조건을 위해 그는 그의 봉록을 집안 자제의 지묵값, 다리를 놓는 공공사업에의 시주, 무료숙박소인 원(院)에의 희사로 없애버리고 청빈한 삶의 테두리를 고수했던 것이다.

 

그 후 이 우산각골의 유정승 집에는 그의 외증손이요 태종의 아들 경녕군(敬寧君)의 현손(玄孫)인 이희검(판서) 역시 그 청빈의 전통을 살려 여생을 살았다.

「衣足以蔽身 食足以充腸」

을 신조로 살았던 이희검이 죽었을 때 친지들이 전곡을 추렴해서 장사를 지냈을 만큼 우산각골의 전통을 지켜 내렸던 것이다. 그는 이 집이 너무 초라하다고 충고했을 때

『우산에 비하면 이것도 과람하다.』

고 말했다 한다.

 

이 「청빈의 집」이 임진왜란에 타버리고 주춧돌만이 남았었다. 이에 이희검의 아들이요 저명한 학자인 지봉 이수광(芝峰 李睟光·판서)이 조촐한 당우(堂宇)를 짓고 그곳에 살므로서 그 전통을 이었다. 당호가 곧 근근히 비를 가린다는 뜻의 비우당(庇雨堂)이었다.

 

이수광은 행동적인 청빈을 사상적으로 승화시켜 비우사상이란 한 한국의 가치관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장유(張維)가 쓴 이수광의 묘지명에 보면 비우사상이란 곧

「향을 피우지 않으며 초를 밝히지 않고 잔치를 베풀지 않으며 성악을 듣지 않고 무색옷을 입지 않으며 가재에 칠이나 조각을 하지 않고 베옷으로 소식(素食)을 하는 생활철학」

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수광이 그 비우사상을 행동으로 살다 죽었다 한다.

 

■9만9천9백 99間 집

 

서울 남산에 사는 선비들을 「헛가리 선비 」라고 속칭했었다. 헛가리란 곧 가벽(假壁)을 뜻하며 요즈음 말로 바꿔 말한다면 판자집을 뜻한다. 곧 청빈을 전통으로 하는 지역적인 풍토가 남산에 형성돼 내린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수만 명의 헛가리 선비가 남산에 살았으며 이들의 청빈기개는 대단하여

「남산골 샌님 원하나 못 내도 떼기는 잘한다」

는 속담을 남기기까지 했다. 곧 남산골의 헛가리 선비는 벼슬아치 하나 못 내지만 벼슬아치의 목은 잘 뗀다는 말이다.

 

그중 인상적인 선비로 성종 때의 재상 손순효(孫舜孝)와 연산군 때의 재상 홍귀달(洪貴達)을 들 수가 있다.

 

어느 날 저무는 저녁 무렵 성종은 시종을 데리고 경회루의 루상을 소요하고 있었다. 지금은 고층 건물과 공해 때문에 경회루에서 남산을 원망(遠望)할 수 없지만 그 무렵에는 남산 숲속을 거니는 동태를 지각할 수가 있었다. 성종은 남산둔덕에 자리를 펴고 술잔을 주고 받는 두 사람의 모습을 알아보고

『저건 분명히 손찬성일 것이 분명하다. 내 말이 틀린 지 가서 알아보고 오너라고 시종을 시켰다. 손순효(孫舜孝)가 무척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건너짚어 본 것이다. 한데 성종의 가눔은 들어맞은 것이었다.

『손 찬성이 분명합니다.』

『술 안주는 뭐든가.』

『참외 한 개 썰어놓고 탁주로 수작합데다.』

 

그러려니 하면서 성종은 미주(美酒)와 교자상으로 술상을 하사하라고 분부하고 그 때문에 내일 사은하러 입궐하지 말라고 특별히 분부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재상이 초라한 초정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성종의 배려가 한폭 수채화처럼 담담하게 여운을 남긴다.

 

호주로 소문난 그였지만 그가 맞는 아무리 귀한 손님일지라도 술상에 얹힌 쟁반에는 기껏 노란콩 조린 것, 쓴나물, 솔순나물이 고작이었다.

 

그가 죽을 때 남긴 말은 유명하다.

 

『우리집은 초야에서 일어났기에 물려줄 물건도 없다. 다만 없는 것을 전해줄 뿐이다.』

고 말하고 가슴을 손가락질하며

『이 속에 더러운 것이라곤 조금도 없다. 』

면서 숨을 거두었다 한다.

 

재상이 죽으면 부장품도 많기 마련인데 손찬성의 무덤에는 그가 요구했던 대로 소주 한 병을 묻어 주었을 뿐이었다.

 

성종조에서 연산군조에 이르기까지 조선팔도에 다음과 같은 소문이 파다했었다.

한양 남산에 9만9천9백9십9 간의 산덩이 만한 큰집이 있다고.

 

그러하여 한양 구경 온 사람이나 과거 치러온 샌님들은 이 말을 믿고 남산에 이 거대한 집구경을 나서곤 했다 한다. 그리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 거대한 집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너무나 작은 집임을 보고 실망들을 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왜냐하면 세로 가로 겨우 두 길의 단칸집이었기 때문이다. 당호는「허백당(虛白堂)」-판서인 홍귀달의 집인 것이다.

 

하지만 더러는 이 허백의 9만9천9백9십9 간을 현상으로 파악하고 그 장중한 기개에 압도당한 선비도 있었을 것이다. 허백의 단간은 곧 10 만간의 마이너슴 한간이요, 육체라는 구상 9만9천9백9십9간이나 되는 마음을 발견한 선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富家不用買良田 書中自有千鍾粟」

 

「고문진보(古文眞寶)」의 황제근학문 가운데 있는 말이다. 종이란 6석 4두의 량의 단위로 책속에 천종이 있는데 좋은 밭을 굳이 사서 뭣하느냐는 청빈찬이다. 홍귀달의 허백당은 이「고문진보」의 청빈관을 형이상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본다.

 

자기 뜻에 거역하면 갖은 포악을 다했던 연산군이 홍귀달의 손녀가 출중하다 하여 세자비를 삼고자 프로포즈를 했었다. 홍귀달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이 거절에의 보복으로 그의 두 아들들을 유배시켰다. 이때 홍귀달은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유배지에 가서 농부가 된다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라고.

 

홍귀달의 연산폭정 비판은 유명하며

「허백당의 기개에 연산군은 손을 베었다」

는 말이 남아 있기까지 하다.

 

연산군의 손을 베게 한 기개의 칼날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비의 조건이 갖추어진 다음에 날카로와진 것이며 그 조건의 기조가 곧 청빈이요, 절(節)이요, 검(儉)이고, 질(質)이며, 박(樸)이고, 지족(知足)이다.

 

■ 清宦列傳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이 소시에 그 아버지가 항상 경계하기를,

『금을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하였기로 그 귀절을 큰 띠에 써서 종신토록 명념(銘念)하고 잊지 않았다. 비록 국정을 잡아 위엄이 중외(中外)에 행하여졌으나 털끝만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아니하고 집은 겨우 의식(衣食)에 족할 뿐이었다.

당시에 재상들이 서로 돌려 가며 초청하여 바둑으로 소일하고 맛난 음식을 차려서 호화롭고 사치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공은 손을 청하여 놓고 점심 때가 지나도 음식을 내오지 않다가 해가 저물 무렵에야 벼를 찧어 밥을 짓고 채소를 내왔는데 여러 손들이 배가 고프던 참이라 채소와 밥을 다 먹어 치우고는 말하기를,

『철성 (최영의 아호) 댁 음식이 매우 맛이 좋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군사를 쓰는 방법이다.』

했다 한다.

 

고려 때에 산원동정(散員同正) 노극청(盧克淸)이 집이 가난하여 집을 팔려다 집은 팔리지 않고 일이 있어 지방에 간 동안에 그 처가 낭중 현덕수(郞中 玄德秀)에게 백금 열두 근을 받고 집을 팔았다. 극청이 돌아와서 덕수에게 찾아가서,

『내가 이 집을 살 때에 다만 백금 아홉 근만 주었는데 수년 동안 거처하면서 서까래 하나 보탠 것 없이 백금 서 근을 더 받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하고 서근을 돌려주니 덕수가 말하기를,

『자네는 이처럼 의를 지키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라는 말인가』

하고 받지 않았다. 극청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불의의 짓을 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헐하게 사가지고 비싸게 팔아서 재물을 탐하겠는가. 자네가 만약 남은 서 근을 받지 않는다면 전부를 다 돌려보내고 내 집을 도로 찾겠다』

하며, 서로 사양하질 않았다는 것이다.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

 

성종 때 양관(梁灌)이 덕천(德川) 원이 되었다가 갈려서 돌아올 때에 어사 이색이 기다리다가 그 행장을 수색하여 보니 다만 소학과 이백 시집, 두보 시집, 그리고 활과 화살, 거문고, 학 한 마리 뿐이었다. 이색이 사실대로 표창하여 아뢰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승진시켜 의주 목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갈려 돌아올 때의 행색을 그림으로 그려서 벽에다 붙여 두게 하고 매양 수령들이 하직할 때에 반드시 그것을 가리키며 훈계하였다. <연주실기술(燃蘭室記述)>

 

정승 맹사성(孟思誠)의 집이 매우 좁고 작았다. 병조판서가 일을 의론하기 위하여 그 집에 갔다가 마침 소낙비를 만나 군데군데 빗물이 새어 내려서 의관(衣冠)이 다 젖었다. 병조판서가 집에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이와 같은데 내가 무엇 하러 바깥 행랑(行廊)을 지으리오.』

하고 한참 짓고 있던 행랑을 드디어 헐어 버렸다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사흘 굶고 산 燕岩 朴趾源

 

박언은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받은 녹을 모두 가난한 친척에게 나누어 주어 집이 무척 가난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미행하여 공을 방문하였다가 문 앞에서 조금 오래 서 있었는데 공이 좁쌀 밥을 먹다가 재채기가 나서 빨리 영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금이 심히 노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사실대로 대답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재상이 되어 좁쌀 밥을 먹는단 말인가.』

하고 사람을 시켜 들어가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임금이 감탄하여 특별히 청문(靑門) 밖 고암(鼓岩)의 토지 얼마를 내려 주었다 한다. 〈박씨가승(朴氏家乘)〉

 

장필무(張弼武)가 양산 군수로 있을 때 법에 규정된 이외의 청구에 대하여서는 일체 응하지 아니하니 병영 수영에서 다 이를 미워하였다. 하루는 병사와 수사가 군수 처소에 모여 묻기를,

『영문의 명령을 거절하고 시행하지 아니 하니 무엇을 믿고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하니,

『나는 믿는 바가 없고 다만 초가 두어 칸이 있으니 오직 그것을 믿을 뿐입니다.』

하였다. 병사와 수사가 서로 쳐다보고 안색이 변하였다 한다. 〈연려실기술(燃藥室記述)〉

 

대제학 김유(金楺, 1653~1719)의 집이 죽동(竹洞)에 있었는데 거처하는 사랑이 두 칸으로서 방과 마루로 나뉘었는데 여러 아들들이 뒤 처마 밑에서 자리를 펴고 거처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집을 넓히지 않고 그대로 거처하였다. 그가 평안 감사로 나갔을 때에 그 아들이 집이 무너지겠다고 중수하기를 청했는데도 허락치 않았다. 여름 장마비를 당하여 무너지게 되자 비로소 중수하기를 허락하면서 일체 옛날같이 그대로 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 아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나 다만 본시 너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사방으로 처마를 따라 반 칸씩을 더 달아 냈다. 공이 집에 돌아와서 보고는,

『어찌 처마끝이 넓은가』

하였다. 그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전일에 방 한 칸 마루 한 칸인데 지금도 그렇지 아니합니까』

하니 공이 다시 두루 돌아보더니,

『과연 그렇구나. 그러나 내 눈에는 어찌 이와 같이 넓은가.』

하였다.

그 뒤 수일 만에 조카가 다시 갔더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제야 자네한테 속은 줄 알았네』했다 한다. 〈이순록(二旬錄)〉

 

윤석보(尹碩輔)가 풍기 군수가 되어갈 때 남종 여종 한 사람씩을 데리고 가고 처자는 풍덕 초갓집에 머물게 하여 굶주리고 추워서 살아가기 힘들었다. 아내 박씨가 집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단옷을 팔아서 약간의 토지를 샀더니 공이 듣고는 급히 편지를 보내어 그 밭을 돌려주도록 했다.

『옛사람들은 한 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넓혀서 그 임금을 저버리지는 않았는데 지금 나는 대부(大夫)의 반열에서 임금의 녹을 먹으면서 집안 사람으로 하여금 토지를 사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백성과 사고 팔아서 나의 허물을 만들지 마시오』

하니 박씨가 부득이 그 토지를 도로 물렸던 것이다. 후에 성주목사가 되었을 때에 박씨가 임신한 지가 이미 팔 개월이었는데도 가마를 타지 못하게 하고 말을 타고 가게 했다. 박씨의 동생 중간(仲幹)이 상주 목사로 있을 때 성주에 갔다가 그 살림살이가 심히 가난한 것을 보고 소금 몇 말을 선사하였더니 공이 곧 이를 돌려주기도 했던 것이다.

 

좌의정 이행(李荇)은 키가 십 척이요, 얼굴이 모나고 수염이 많았다. 평생 다섯 번 옥에 갇히고 다섯 번 귀양 가 결국 유배지에서 죽은 기구한 일생이었다. 겸허한 차림에 풍류를 즐겼던 일대의 멋장이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 남산 청학동(靑鶴洞)에 집을 짓고 스스로 「청학도인」이라 일컬었다. 집에 드는 길 좌우에 소나무, 전나무, 복숭아, 버드나무를 심었고 공무에서 나오면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를 한가하게 하여 마치 야인(野人)과 같았다. 어느 날 날이 저물었는데 녹사(錄事)가 보고할 일이 있어 찾아가 보니 한 사람이 나막신을 신고 떨어진 옷을 입고 아기 하나를 데리고서 동구문을 나오길래 녹사가 말을 타고 지나다가,

『정승 계시오?』

하고 물었다. 이에,

『내 여기 있다. 』고 하니 녹사가 놀라 말에서 떨어졌다 한다. 겸허한 일면이 시적으로 부각된다.

 

명상(名相) 이원익(李元翼)의 청백함을 포상하는 뜻에서 인조(仁祖)가 흰 이불과 흰 요를 하사한 일이 있었다. 우리 옛 선조들은 빛깔의 상징적 용도를 실생활에 많이 이용하며 살았던 시적인 민족이었다.

 

이때 흰 이불을 전달한 승지가 돌아오자 왕은 어떻게 살던가고 물었다.

『기와도 아닌 초가집인데 비가 새어 벽이 얼룩이 지고 문틈에 바람이 들 지경입니다.』

고 하였다.

『입사(入仕) 40년에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 초가 둬 칸이더냐』

면서 왕은 정침(正寢)을 지어 주도록 시켰다. 그가 작고했을 때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장사를 치루었는데 관 값 한 푼 마련해 놓지 않았으니 조정의 부조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하려는지 모를 일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 府使)의 청빈도 대단했다.

『집을 지키던 계집종마저 달아나고 집과 아내가 있으면서도 나그네

나 중신세지만 마음은 더없이 편안했다. 책을 보다가도 잠이 오면 자는데 깨워줄 이 없어 어떤 때는 종일 자는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사흘을 굶기도 한다. 』

 

이 글은 그의 반체제적 사상과 행동 때문에 은거해 있던 「제비바위(燕岩)살이」의 일단이다.

 

■ 通川의 선비무덤

 

강원도 통천(通川)에 선비 무덤이라는 전설에 얽힌 무덤 하나가 있다. 지금 벼슬로 견주어 보면 도지사나 차관급 이상의 벼슬아치인 한 당상관(堂上官)이 선비의 조건인 청빈을 지키며 살다가 가엾게 죽어갔기로 옛 선비들이 그 청빈의 뜻을 흠모하여 이곳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들러, 성묘를 하고 과묘시(過墓詩)를 지었던 선비의 메카(聖地)이기도 하다.

 

이 상당선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기(李墍 1522~1604 )란 이가 지은 송와잡설(松窩雜說)에 상세하게 적혀있다.

 

선조 16년(1583)에 있었던 일이다.

이 선비는 겨울에도 입을 것은 묵은 솜과 헤어진 굵은 베옷뿐이었다. 소를 몰고 추지령 밑에 나무하러 갔을 때 마침 그날은 풍설이 너무도 차가왔다. 날이 저물자 몰고 갔던 소가 빈 길마로 홀로 돌아오니 그의 아내는 놀라서 몹쓸 짐승에게 해침을 당한 줄 알고 달려가 찾아 헤맸다.

중대(中臺)길에 이르니 그의 남편은 동상을 입고 눈 위에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내는 곧 옷을 벗고 가슴을 맞대고 안고 누웠다.

혹시 자신의 훈김으로 다시 깨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나 아내 또한 옷이 얇아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죽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집에 있던 두세 어린이가 엄마, 아빠를 찾아내어 시체 옆에서 마냥 울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고 통천군수 이응린(李應麟)이 매우 불쌍하게 여겨 조정에 다 상신, 가엾은 고아들을 구휼하고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한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것이 한국인의 사상과 연결되었기에 별나게 돋보이고 또「선비무덤 」이라 하여 구전되는 그 무덤에 선비들이 순례를 하였음은 그의 죽음이 여느 가난한 사람의 죽음과는 다른 어떤 정신적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당산관을 지낸 벼슬아치가 잘살려 들면 어찌 헤어진 굵은 베옷 하나로 겨울을 지냈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 살 수 있어도 호의호식을 배제하고 최저의 생계로 근근히 살아가는 선비의 의지력에 순교(殉敎)한 그였다.

 

■ 金正國의 清貧觀

 

우리 백성의 교회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참판 벼슬의 김정국(金正國)도 이 선비의 조건인 청빈으로 일생을 살았던 분이다.

 

그의 벗 가운데 황모라는 분이 살림살이를 사 모은다는 소식을 듣고 김정국은 다음과 같은 준엄한 내용의 편지를 써 훈계하였다.

 

「그대가 살림 모으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소

과연 사람들이 한 말과 같다면 그만 정리하고 고요하게 살면서 천명에 순응하느니만 못하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70세면 상수를 누린다 해도 남은 것은 불과 10년이 남았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노심하여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나무람을 자초한단 말이요.

내가 20년을 빈곤하게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답을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 두어 벌 있었으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고 신변에는 여벌 옷이 있고 주발 밑바닥에 남은 밥이 있었소.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 편하게 지냈소. 비록 넓은 집 천 칸과 옥 같은 곡식 만 섬과 비단옷 백 벌을 보아도 썩은 쥐같이 여겼고 이 한 몸 살아가는데 여유가 있었소.

듣건대 그대의 의식(衣食)과 제택(第宅)이 나보다 백 배라 하는데 어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들을 모으는 것이오.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적 한 시럼 · 거문고 한 벌 · 벗 한 사람 · 신 한 켤레 · 잠을 청할 베개 하나 . 환기할 창 하나 · 햇볕쬐일 마루 하나 · 차 다릴 화로 하나 ·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 봄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면 족하는 것이요.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기는 하나 하나도 빠질 수 없는 것이오.

늙바탕을 보내는 데에 있어 이외에 더 뭣을 구할 것이오. 분주하고 고단한 중에도 매양 열 가지 재미가 생각나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날뜀을 깨닫지 못하오만 몸을 빼낼 술책이 없으니 어찌하오. 오직 나의 친구만이 알아줄 것이오.」

 

김정국의 이 편지 속에 한국선비 사상의 청빈관과 그 청빈의 방법까지 명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정공 한계희(文靖公 韓繼禧)는 정승의 아들이요 또 부원군의 아우일 뿐 아니라 세도의 핵심을 잡고 있던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재종형이다.

 

대대로 공이 있고 덕을 쌓아 부귀가 혁혁하기 비길 데가 없었으나 그는 선비의 조건인 청렴결백을 고수, 그에게 주어지는 봉록은 꼭 친척 중의 부모 없는 사람이나 홀어미가 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근근히 살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아침저녁을 나물에다 조식(粗食)으로 지났는데도 그나마도 과분하다 하여 양을 줄이고 횟수를 줄였던 것이다.

 

정승인 형, 서원(西原)부원군이 민망하게 여겨 때때로 양식을 보내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어느 날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집에서 종중의 모임인 문회(門會)를 열었는데 모두들 서평군 한 계희의 빈한(貧寒)에 말이 미쳤다.

『나이가 이미 높은데도 생활이 너무 검소하고 모든 범절이 초라하여 보기에 몹시 미안하니 대책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

이에 가장 큰 영화를 누리고 있던 상당이,

『이것은 오로지 나의 책임이오 하고는 아이를 불러 종이를 가져오라 하여 한 장의 문서를 작성, 그 자리에 있던 친척들의 이름을 연명하고 위에는 공의 청렴결백한 덕을 서술하였다.

다음에는 문중에서 그를 받들지 못하였던 실수를 적고 끝에 변변치 못한 것이라 마음에 맞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을 하고서 곧 흥인문(興仁門=東大門)밖 鼓巖 밑에 있는 논 열 섬 지기를 바쳤는데 공이 굳이 사양하고 받질 않았다.

 

이에 한명회 이하 여러사람들이 연달아 일어나 절을 하며 소리를 모아 호소하며 떠나질 않음으로써 전답을 받지 않을 수 없게끔 몰아갔다.

 

공은 사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조심조심하여 불안해 하는 기색이 완연해 졌다.

이에 늙은이나 젊은이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불안한 기색을 가시게 했다.

이같이 하여 한계희는 고암 밑 열 섬 지기 논을 얻었으나 그는 그 논의 소출은 그의 집 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고암 둘레에 사는 어려운 집, 가장이 병든 집 등에 골고루 나누어 주어 구휼로서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 같은 자선사업은 그의 유업으로 가문에 전승되어 고암 밑에 사는 수백 농가들은 그 덕분으로 윤택하게 살게 되었고 이 장한 유업을 기리는 뜻으로 고암의 이름은 편안 안(安)자로 바꾸어 안암(安岩)으로 하였던 것이다.

곧 오늘날 동대문 밖의 안암동은 이 같은 한국인의 장한 청빈사상이 명명해준 영예로운 이름인 것이다.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사람이 세상에 살 때는 대충 세 가지의 발전동기(發展動機)에 얽매어 산다.

 

그 세 가지란

첫째, 학식과 인덕을 높이려는 인격적인 발전

둘째, 사회에서 신분과 계급을 높이려는 사회에서 신분과 계급을 높이려는 사회적 발전

세째, 돈많이 벌어서 잘살려는 경제적 발전이 그것이다.

 

시대와 세상에 따라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한 발전동기에 집착하여 나머지 두 발전동기를 희생시키는 것이 역사의 원칙처럼 돼 왔다.

 

이를테면 사회적 발전을 위해 인격과 돈을 희생한다든지 경제적 발전을 위해 인격과 사회적 발전을 헌신짝처럼 버린다든지.

한데 장했던 우리 옛 선비들은 인격적 발전을 위해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유복을 헌신짝처럼 버렸던 것이다.

청빈은 곧 선비들이 인격적 발전을 위해 희생한 경제적 발전동기라 할 것이다.

 

사람을 속이고 탐하고 훔치고 또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욕하고 하는 가장 근본된 원인이 재물 곧 경제적 발전 동기에 비롯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또 서양이나 동양이 다를 것이 없다.

이 인간악(人間惡)의 기본 요소를 제거시키지 않고는 인격적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한국 선비 사상의 뼈대 가운데 하나로서 이 청빈의 가치를 극대화시킨 것이다.

 

■ 清貧哲學

 

모든 한국의 선비들이 유관(柳寬)이며, 이수광이며, 손순효며 홍귀달 같은 청빈의 조건을 갖추진 못했다 하지만 어느 만큼씩의 청빈 요소를 지녔으며 그 가치관을 이상으로 삼고 살았었다. 적어도 재산이 많은 선비행세는 할 수 없다는 개념만은 확고했다.

 

만약 재물이 생기면 그 재물을 버리고 선비로서 그 우위의 신분계급을 지키느냐 재물을 택함으로써 그의 신분계급을 낮추느냐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막스 베버는 한국 사회구조의 특징으로서 곧 문인신분층을 들었다. 문인신분층은 곧 한국의 지식인이면서 행정에 참여하는 이원적 단위라고 지적하고 「행정의 후진성에서 생기는 부작용을 이 문인신분층이 지닌 인격적인 면이 보상을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곧 문인신분층은 선비를 말하며 이 선비와 인격적인 면이 한국 역사에 차지해온 비중을 막스 베버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선비의 조건인 청빈의 가치관이 행정을 맡든 정치를 맡든 이 선비들에게 결여돼 있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탈의 역사로 일관됐을 것이므로다.

한국의 정치사는 시행착오 끝에 정치가들에게 청빈의 가치를 부여했으며 이 가치 때문에 법률이나 규범 이전의 차원에서 통치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청빈이 가져다준 외면적인 가치 이외에 내면적인 가치도 찾아볼 수가 있다.

곧 청빈은 고행이요 본능의 억제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에게 부자연한 것이다.

그런 청빈을 굳이 택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항상 용기에는 플러스적인 가치가 수반된다.

 

이 고행에 가까운 청빈이 가져다준 반대 급부(給付), 곧 플러스적 가치는 무엇이었던가 하고 공리적(功利的)인 사고방식에 찌든 현대인은 반문할 것이다. 현대인은 항상 어떤 행동에건 가치(Value)나 효과(Effect)를 인정하지 않는 그 행동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이를테면 석가는 해탈을 위해 고행을 했고 예수는 만민의 구제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고행을 했다고 생각해야만이 후련하다.

물론 청빈에도 가치나 효과는 있다. 다만 그것들이 현대인이 바라는 것처럼 시간적으로 빨리 많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그런 근시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느리고 막연하게 암암리에 나타나는 그런 원시적인 차원의 것이다. 곧 어느 일생의 극히 작은 시공에의 가치나 효과보다 그 일생의 전체 또는 그 사람의 내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런 가치와 효과의 추구인 것이다. 곧 인격적 가치와 효과를 위한 조건으로 청빈은 파악돼야만 한다.

 

우리 선조들은 재력이 크다는 것에 가치 부여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재력의 크기는 곧 인격의 크기에 반비례했기 때문이다.

 

一家富貴는 千家怨이요(草木子)

富者는 衆之怨이라(十八史略)했다.

多藏必止이요(老子)

物薄而厚情(小學)이라 했으며

君子質而已矣(論語)라 했다.

 

부는 욕심을 낳고 오만을 낳고 상지(喪志)를 불러일으키고 게으르며 사물의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곧 선비로서 배제해야 하는 조건의 모두가 부에서 비롯된다. 단지 이 같은 인격적 마이너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벼슬자리에서 목민(牧民)하는 선비가 이 부에 빠지면 그 마이너스는 피목민(被牧民)의 전체에게 균배된다.

 

철학자 벤쟈에프는 인간유형을 나누는데 인격으로 구제하는 자유인간과 인격을 포기하는 노예인간을 들었다. 자유는 고되고 노예는 편하다 했다. 곧 청빈을 택하는 선비는 인격으로 구제한 자유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