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姜海壽의 人間試煉
「아브라함」은 성서에서 위대한 신앙적 영웅으로 추대받는다. 그는 인간적인 것의 상징적 표본인 그의 외아들과 신과를 둔 선택의 시련에서 신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은 그의 귀여운 딸을 풍신(風神)에게 바치고 희랍의 영웅이 되었고 [에프타」역시 그의 외동딸을 신전에 바치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다. 선택은 인간실존의 가장 진한 상황이다.
강화 선비인 첨정 강해수(僉正·姜海壽)는 이역 땅 심양에서 이 선택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자기 눈앞에는 그의 외아들과 그의 아우가 오랏줄에 묶인 채 등을 대고 있었다. 그 옆에 이모(異母)의 신주(神主)도 있었다. 이들은 정축호란(胡亂)때 강화에서 호병(胡兵)에게 납치당한 포로였다. 피로(被虜) 중에 어머니는 죽었으므로 신주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호(胡)나라에서는 이 한국인 포로의 인두(人頭)에 단가를 매겨 놓고 금품을 가져오면 속환(贖還)시켜 주었으므로 전란에 가족을 잃은 수십 만의 한국인들은 가산을 팔아 압록강 건너 이심양의 포로시장에 밀어 닥쳤었다.
가난한 강해수는 가산을 모두 팔아도 두 사람 몫의 속전밖에 만들 수가 없었다. 심양 땅에 가면 담배가 비싸므로 두 몫값으로 담배를 바꿔가면 세 사람 몫의 속전이 생긴다길래 담배를 사 가지고 갔더니, 혈연을 사러 온 많은 한국인이 모두들 담배를 사왔으므로 심양의 담배 값이 폭락했던 것이다. 두 몫밖에 못 건진 강해수는 세 혈연을 눈앞에 두고 둘 만을 선택해야 하는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셋 중 산 사람이 둘이니까 선택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악랄한 포로시장의 인신 상인들은 신주도 한 몫의 인두로 쳐서 매매했다. 한국은 신주를 산 사람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는 점을 알고 상혼을 부렸던 것이다.
지금 현대인에게 그 선택을 맡기면 산 사람 둘만 선택할 것이므로 「진한 상황」이 못된다. 그러나 당시의 강해수는 「인간본연」으로 선택 순위를 잡느냐, 「인륜규범」으로 선택 순위를 잡느냐에 시련을 겪었다. 전자의 순위면 아들을 맨 먼저 그 다음 아우를 선택했을 것이다. 한데 강해수의 영웅적인 행위는 본연의 「휴머니티」를 말살시켜 버렸다. 맨 먼저 친어머니도 아닌 이모의 신주를 속환하고 그 다음에 아우를 선택하였다. 가장 소중한 아들이 멀리 몽고의 노예상인에게 팔려 가는 것을 보고 돌아온 그의 소행은 「아브라함」의 시련이나 「아가멤논」의 시련과 마찬가지로 영웅적이다. 현대에 와서는 잔혹한 비정(非情)인 이 영웅적 행동을 당대 사람은 정문(旌門)을 세워 축복해 주었던 것이다. 자아에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가하면서 규범에 충실한 이 행동은 이조사회가 형성한 사상과 행동의 요체(要諦)였다.
다만 그 영웅적인 행동이 신이라든지 국가나 민족이라는 대국적인 것에까지 못 미치고 가족이나 가문 같은 소극적인 테두리에서 부려진 것만이 아쉽고 그만큼 한국적이랄 것이다. 한국에서 인간 휴머니티는 항상 제단(모럴)에서 생지(生贄)된 양(羊)이었다.
■ 神主英雄 列傳
임진왜란 동안 변변히 먹지도 못하면서 선친의 신주와 제기(祭器)만은 꼭 짊어지고 다니며 조석으로 유랑제사를 잊지 않았다는 교조적(敎條的)인 예행(禮行)의 이천경(李天慶), 그리고 병자년에 함락 직전의 강화에서 신주를 은폐하기 위해 스스로 패도로 자기 목을 자른 이일로(李逸老) 등에서도 신주지상의 행동습을 엿볼 수가 있다.
이일로는 종묘 봉사(奉事)로서 종묘의 신주들을 갖고 강화에 피난갔었다. 적이 임박하자 신주를 숨겨둔 곳간(庫間)에서 튀어나와 칼을 뺐다. 그대로 숨어 있거나 또 도망쳤다간 그 곳간에 불을 지를 것이요, 불을 지르면 신주가 타버리기 때문이었다.
고운 님 소식 뉘에게 물을까?
칼날 끝에 혼을 날려 찾아가 보리
하는 시를 남기고 한국인에게는 드물게 보는 자문(自勿)을 하면서 곳간의 신주를 사수하였다. 정표된 효자와 열녀 가운데 많은 행적이 곧 타오르는 집 속에서 어린 아이보다 신주를 먼저 꺼냈다는 윤리적 행동이었다. 즉 인간을 구하느냐 죽은 영혼을 구하느냐를 택일해야 할 긴박한 상황에서 인간을 죽이고 신주를 택한 행동이 그토록 영웅적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 신주 지상주의에 반역한 인간적 행실은 두고두고 저주받기 마련이었다.
북관정벌에 대공을 세운 선조조의 상신 윤승훈(尹承勳·영의정)이 임진란에 사인(舍人)으로서 피난 가는 임금을 호종(扈從)하겠다고 나서니까 양주에 살던 그의 아들 윤공 수찬(尹珙·修撰)이 옷자락을 붙들고 곡을 하며 버티었다. 평생 동안 충효가 뭣인가를 가르쳤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고 호통을 치자 공은 정(情)을 앞세우고 이(理)를 앞세운 아버지와 논쟁을 하였다. 두루마기 자락을 뿌리치고 호종은 했지만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서 이에 저항할 수 있었던 인간의 크기를 내세울 수 있었던 용기는 괄목할 만하다.
공은 그 후 실화(失火)로 집을 불태웠는데 불길이 온 집을 삽시간에 몰아 쌌다. 그는 선비면 의당 그러해야 했듯이 신주 구출을 위해 사당에 뛰어들지 않고 노모를 구출하려다 타죽었다.
불 속에 뛰어 들어가 타죽은 효자는 비단 윤공 뿐만 아니다. 다만 한국에 있어 효행살신(孝行殺身)의 경우가 성리(性理)의 「모럴」때문이었는가, 성정(性情)의 실존때문이었는가를 구분해 생각할 때 거의가 전자에 속한다고 봐도 대과는 없다. 왜냐하면 불에 타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 살신하는 「케이스」보다 부모의 신주를 구하기 위해 살신하는 「케이스」가 보다 많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윤공은 희귀하게 보는 성정의 소신있는 사상 아래서 죽음에 이르는 행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윤공의 행실이 후세의 교육자료로서 자주 인용되었던 것은 그가 아버지를 적진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또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타 죽은 효행 때문이 아니라 신주보다 인간을 구했다는 행실이 인간보다 신주를 구한 행실보다 못하다는 예시로서 인용되었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선비는 어느 만큼 이 신주의 노예이었느냐에 따라 그 품격을 평가받았던 것이다.
■ 살아있는 神主
선비에게 있어 신주는 죽어있는 조상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있는 조상이었다.
집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신주가 모셔진 사당에 가서 그 출입을 고해야 한다.
가까운 이웃에의 나들이면 대문 안에서 사당쪽을 바라보고 예만 하면 되지만 만일 하룻밤이라도 자고 돌아올 나들이면 사당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재배를 하고 떠나야 한다.
열흘 이상 걸리는 나들이면 분향재배에 다음과 같이 축문을 신주 앞에서 외워야 한다.
『아무개는 장차 아무 곳에 가겠사옵기 감히 고하나이다.』
하고 재배를 한다. 돌아와서도
『아무개는 아무 곳으로부터 돌아왔삽기 감히 뵙습니다.』
고 축문을 외워야 한다. 사당이 있는 종가에 살지 않는 지손(枝孫)들이 고향을 떠나 먼 나들이를 할 때도 이 사당을 찾아와 고별축문을 외워야 한다.
사당 동쪽의 섬돌을 조계(阼階)라고 하는데 이 돌은 신성한 돌이다. 이 돌에는 장자, 곧 제사를 주제하는 주인 이외는 어느 누구도 올라설 수 없는 돌이다. 철모르는 어린이가 멋모르고 올라섰거나 앉으면 그놈은 호되게 볼기를 맞아야 하고 그 돌을 깨끗이 물로 씻은 다음 그 신성을 오염시킨 실수를 사당에게 사죄하는 분향재배를 해야 한다.
나머지 가족은 아무리 연장자라 해도 모두 서쪽 섬돌인 서계(西階)에 서야 한다. 한국인의 집에는 경계는 없지만 침범하지 못할 공간이 너무 많으며 이 조계도 그런 공간 가운데 전형적인 것이었다.
나들이뿐만 아니라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사당의 신주에게 고사를 해야 했다.
이 축사는 사당에 모신 증조고 증조비(曾祖考 曾祖妣), 조고조비(祖考 祖妣), 아버지 어머니의 벼슬과 봉(封)을 열거하고서 감히 고한다고 전제하고 만약 벼슬을 받은 고사 같으면,
『아무는 아무달 아무날에 임금의 은혜를 입어 아무 벼슬을 제수받았사옵고 조상 어른들이 주신 교훈을 받들어 계승하와 녹과 지위를 얻었사오니 저희 집 남은 경사가 여기에 미친 것이옵니다. 감격하고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와 술과 과실을 가지고 여기에 삼가 고하나이다.』
고 아뢴다. 벼슬이 깎이면
『아무 벼슬을 깎였사와 조상의 남기신 교훈을 거칠게 하고 땅에 떨어뜨렸사오니 황공하기 그지없나이다.』
고 축사를 외운다.
이 사당 고사는 근세까지 남아있어 아들이 중학교에 합격하면 아버지가 데리고 가 두 섬돌 사이에서 엎드리게 하고 축사를 외게 했던 것이다.
아들을 낳으면 한 달 뒤에 향탁(香卓) 앞에 서서
『아무의 부인 아무씨가 아무달 아무날에 아들을 낳았사온데 이름은 아무라 했사옵기 감히 뵙나이다.』
고 축사를 외운다. 이때 애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나아가서 두 섬돌 사이에 서서 두 번 절한다.
딸을 낳았을 때는 고사를 않거나 고사를 해도 축사를 외지 않는 게 상례다. 가문에 따라 축사를 외는데 그 내용은 딸을 낳아 조상 뵈올 면목이 없다는 사죄의 축사이기 마련이다.
또 시식의(時食儀)라 하여 철마다 처음 나오는 음식이 나오면 먼저 사당의 신주 앞에 바치고 분향재배를 하므로써 조상이 먼저 맛보도록 했다. 오이 수박이 처음 나왔을 때, 햇보리로 처음 밥을 지었을 때, 농사지은 첫 메밀묵이며 심지어 첫 추어탕을 끓였을 때도 일단 사당에 바친 다음 먹는다.
바나나며 파인애플 등 우리 땅에 자라지 않는 남만(南蠻)음식이 나왔을 때 이것을 사당에 바치느냐 바쳐서는 안되느냐의 문제를 두고 향반에서 논쟁이 붙었던 일이 일제 때 신문에 보도되었었다. 신주들에게 낯선 음식은 오히려 조영(祖靈)을 놀라게 하여 쫓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반대하는 지론이었다.
이밖에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베푸는 삼예의(參禮儀)며 정월 보름에서 섣달 그믐에 이르는 그 수많은 속절(俗節)마다 베푸는 천헌의(薦獻儀)에 이르기까지 신주는 차라리 살아있는 조상에 베푸는 성의 이상으로 공경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인의 죽음은 서양인의 죽음처럼 완전한 사망이 아니며 죽어도 항상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오히려 그 이상의 인간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영생을 했다. 선비의 조건은 이같은 종교적 의미에까지 연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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