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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13.事大性向(사대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23

선비의 의식구조-13.事大性向(사대성향)

■ 天子의 졸린 목을 朝鮮백성이 아파해

 

중종 34년(1539)에 조선사신이 명나라에 갔을 때 명황제가 예부로 하여금 이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도록 하였다. 의당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대(事大)사상에 찌든 당시 한국조정에서는 의당한 일 이상의 감격을 하고 그 잔치를 베풀어준 데 대한 사은편(謝恩便)을 다시 몇 만리길 멀다 않고 북경(北京)에 보내고 있다.

 

그 사은편이 들고 간 표문(表文) 속에 진하게 흐르는 사대사상을 엿보기로 하자.

 

『천은이 깊이 어루만져 주심에 내외의 차별이 없고 하늘의 은택이 태연히 내려 넓으신 은총이 미천한 데까지 미쳤습니다. (중략)어찌 표를 받들고 간 아랫사람에게 특별히 잔치를 풀어주는 특수한 영광이 내릴 줄 알았겠읍니까. 은혜가 뼈에 사무치고 살에 젖었으니 몸소 넓은 덕택에 목욕하는 것 같고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불러 마치 온 국토에 널리 혜택을 입은 것 같사오니 이것이 어찌 배신(陪臣)만이 사사로이 차지할 것이리오. 참으로 온 나라가 함께 경하하는 바입니다. 』

 

명나라 황제(세종)이 단사(丹砂)를 잘못 먹고 정신이상을 일으켜 궁녀들을 해치는 일이 잦았다. 이에 궁녀 20여 명이 작당하여 황제가 취해 자는 틈을 타서 무명으로 목덜미를 졸라 죽이려다가 미수에 그치는 변이 있었다.

 

이 같은 천하의 변을 두고 위문하지 않고 견뎌낼 만큼 비사대적일 수는 없었다.

그 진하(進賀)표문에는 황제의 목이 졸린 아픔을 우리 온 조선백성의 목의 아픔으로 표현하고 있다.

 

명종 1년(1546)에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종이를 요구하여 사신으로 하여금 바쳤더니 댓가로 은을 내렸다.

그 은을 받아 옷담는 농 속에 넣어가지고 오다 산해장 밖에 이르러 차거(車去)에게 그 은을 도둑맞고 말았다.

 

여느 은 같으면 대수로울 것이 없으나 황제가 내린 은을 망실했다는 사실을 두고 조정이 초상난 집처럼 당황하였던 것이다. 이에 사죄편(謝罪便)을 보냈던 바 명나라 예부에서는 대단히 꾸짖고 있음을 본다.

 

『조선국 임금이 종이를 바친 것은 그 충성이 진실로 가상할 만하지만 조정에서 금폐와 칙서를 내렸으니 성은이 더욱 무거우므로 배신(陪臣) 이기(李芑)는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들고 갔어야 할 것이며....』

 

일련의 중국과의 외교를 종주국 외교 이외에 이 같은 사대성의 확인외교로 시종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 독립문이 있는 서쪽 둔덕에 중국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고 유숙케 하는 개화관(蓋華館)이 한말까지 있었다.

 

옛날에는 이 개화관 입구의 두 기둥에 붉은 나무문을 세우고 「영송조문(迎送詔門)」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명나라 사신 공운강이 왔을 때에 호신 김안노(金安老)의 건의에 의해 이 사육문의 규모를 크게 개조하므로써 사대성을 키워 놓은 것이다.

 

처음엔 중국의 패루(牌樓)를 모방해 3간 문루를 지으려 했던 것인데 중국의 제도를 잘 몰라 다만 1간만 지어 푸른 기와를 이고 편액을 영조지문(迎詔之門)이라 바꾼 것이다. 「송(送)」자가 든 것은 반사대(反事大)의 여운이 풍긴다 하여 그것을 제거한 것이다.

 

다시 그 3년 후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급사(給事) 벼슬의 설정총(薛延寵)이 보고

 

『맞는 것에는 조(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칙(勅)도 있고 상(賞)도 있는데 영조(迎詔)로만 이름하면 그 뜻이 편역된 것 같다. 만일 영은(迎恩)이라고 한다면 이것에나 저것에나 모두 합당하여 좋을 것이다.』

하여 영소를 다시 영은으로 바꿔 영은문이 되므로써 사대영역을 보다 확대했던 것이다.

 

문이름 하나에 사대의 크기가 맥락되어 달라져 왔음을 본다.

 

■ 썰물·밀물의 事大縄釋

 

이 같은 사대성향은 여느 선비의 사물을 판단하는 가치기준으로까지 정착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의 지식으로는 신비로왔던 밀물·썰물의 원인에 대한 사리판단을 들 수가 있다.

 

왜 동해안에는 밀물·썰물이 없는데 유독 서해안에만 있느냐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조수의 근원이 중국으로부터 나오니 우리 서해는 가까운 고로 조수가 미치고 동해는 중국으로부터 먼 고로 조수가 미치지않는다」

 

천사로 불리운 중국사신이 비록 그릇 이해하고 그릇 판단하고 또 무식해서 잘못 말했더라도 그 말, 그 판단을 어기지 않고 받아드려야 했던 철저한 사대성향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성정(成頂)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수어(秀魚)로 표기되는 숭어가 수어(水魚)로 바뀌어 표기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물은 산나물이 아닌 것이 아니되 상주뿌리를 산채라 이름하고 물고기가 수족이 아닌 것이 없는데 수어(秀魚)만을 수어(水魚)라 이름하는 것은 다음 같은 연유 때문이다. 기천 사(명나라 사신)가 우리나라에 와서 숭어를 먹어보고 맛이 좋으므로 『이 고기 이름이 뭣인가.』고 물었다. 이에 통사가 『수어(秀魚)라고 합니다.』하자 기 천사가 웃으며, 『비늘 있는 것이 수만 종이거늘 하필 이 고기만 수어라고 하느냐 물속에 사는 고기는 모두 수어라 해야 하지 않겠느냐.』했다

왜냐면 수(秀)와 수(水)는 발음이 같으므로 이를 분간 못하고 한 말이 있다. 이 착오에 대해 어떤 한국인도 정정시키질 못했으며 이처럼 오류가 자명한데도 천사가 수어(水魚)라 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본명인 수어(秀魚)로 써내리는 주체적 고집을 지닌 단 한 사람의 한국인도 없어 틀린 이름을 본 이름으로 써내렸던 것이다.

 

사대체질의 토착화는 이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주체적이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멸감 열등감이 싹터 한국인에게 열등의식을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기(李芑)가 정승이 되어 선비들을 모함, 많이 죽였을 때 어떤 이가 『사필(史筆)이 두렵지 않나.』하고 충고를 했다 한다. 이때 이기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 따위를 어떤 사람이 보던가.』<芝峰類說〉

 

한국의 사실을 적은 역사 따위 누가 보느냐, 쓸 테면 쓰라는 사대성향이 물씬한 고사다.

 

횡포가 심했던 홍윤성(洪允成)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있었을 때 청정기에 자기의 죄악을 낱낱이 써놓은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倭)종이에 박은 강목도 사람들이 즐겨보지 않는데 하물며 동국통감이랴. 너희 마음대로 써라. 누가 동국사기를 보겠느냐』

했다 한다. 〈月汁漫筆〉

 

왜 종이에 박은 강목도 보지 않는데 동국통감이라 함은 바로 사대 중국에서의 기준을 내세우고 자멸자비(自蔑自卑)하는 한국인의 사대체질의 입증인 것이다.

 

이 같은 사대의 오류 속에서도 저주(抵柱)같이 주체의식을 간직한 몇 드문 선비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목은 이색(牧隱 李穡) 같은 선비.

그가 북경에 가 명나라 고황제를 배알했을 때 몹시 조선을 업신여긴 말을 들었다.

 

이를테면

『너희들이 쓰는 말은 오랑캐 말과 흡사하구나.』

하는 것이라든지 이색의 모양이 훤출하지 못하다고 모욕을 주면서

『이 늙은이를 그림에 그려두면 재미있겠다.』

느니....

 

목은이 고국에 돌아와 대담하게도

『지금 황제는 속에 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고 말하므로서 주위 사람을 질리게 했던 것이다.

 

또 반사대의 선비로 백호 임제(白湖 林悌)를 들 수 있다.

그는 기질이 호협하여 구속이 없었다. 병이 들어 죽으려 할 때 여러 아들이 슬프게 통곡하니 임이 말하기를,

『사해(四海) 모든 나라가 제(帝)라고 칭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홀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그렇지 못하였다. 이런 누한 나라에 났으니 죽음이 족히 아깝겠는가.』

하고 곡하지 말게 하였다. 또 이전에 희롱으로 말하기를,

『만약 나로 하여금 중국에 나서 육조(六朝) 오대(五代)때를 만났다면 또한 돌림 천자(天子)가 되었을 것이다.』하니 세상 사람들이 전해 듣고 웃었던 것이다. 〈星湖僿說〉

 

■ 뜨내리재 이야기

 

한말 때만 해도 사대부 계급보다 귀히 여겨지고 또 自尊도 한 「조종족(朝宗族)」또는 「대보족(大報族)」이라는 계급이 있었다.

 

또 양반끼리 인사를 나누다가, 「조종계출(朝宗系出)이요」또는 「대보계출(大報系出)이요」하면 상대편 양반은 썼던 갓을 벗거나 물었던 담뱃불을 뒤로 돌리거나, 피었던 무릎을 꿇거나 하였다고 한다.

 

청평천 상류(淸平川 上流)인 조종현(朝宗縣·加平屬縣), 대보동(大報洞·지금 下面 大報里)의 피를 물려 받았다는 말이다. 명조(明朝)가 망하고 청조(淸朝)가 들어서자 반혁명을 기도하다가 한국에 망명한 구의사(九義士), 즉 왕미승(王美承), 빙삼사(馮三仕), 황공(黄功), 정선갑(鄭先甲), 양길복(梁吉福), 왕이문(王以文), 배삼생(裵三生), 왕문상(王文祥), 유한산(柳漢山)이 귀화 정착한 마을이요, 이들의 후손이거나 외손 등, 피를 나누어 가진 혈맥을 둔 한국인의 사대 자질이 그같이 초계급을 형성해 놓은 것이다. 대보(大報)란 마을 이름도 궁전의 숭명(崇明)제단인 대보단(大報壇)을 본따서 지은 이름이다.

 

한말에 되소금(胡鹽)이라 하여 청나라에서 밀수되는 식염이 나라 안에 꽤 나돌았었다. 재래염보다 한결 짜고, 아울러 부피가 작기 때문에 소금이 소중한 산골 사람들에게는 십상이어서 소금장수들은 장사가 무척 잘 되었었다.

 

그런데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소금길 만은 이 되소금 장수가 오갈 수 없었다. 소양강 건너 마작산(麻山作) 줄기의 뜨내리재 부침치(浮沈峙)를 넘어 가느라면 뜨내리재가 떴다 내렸다 들숙날숙하여 소금짐을 뒤엎어 놓고 만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호인(胡人)이 이 재를 넘는다면 그 뜨내리재의 조화때문에 머리가 돌아 발광하고 만다고도 구전되어 왔다.

 

그러기에 되소금이건 청인이건 호(胡)와 관계된 것이면 이 가까운 뜨내리재로 가질 못하고 두 곱이나 더 먼 낭천(狼川)길로 양구를 돌아가야만 했다. 반청주의(反淸主義)의 한국적인 저항방식을 이에서 또 하나 발견한다.

 

병자호란 때 일이다. 춘천 교외에 살던 천인 이석을봉(李石乙封)에게는 무작개라는 젊고 용감한 아내가 있었다. 호란에 호병이 무작개를 붙들고 겁탈하려 하자 무작개는 머리로 호병의 턱을 쳐받아 이를 부러뜨려 놓았다.

그 징벌로 호병은 무작개의 머리 가죽을 벌겋게 벗겨 놓았다. 그리고 다시 대어들자 호병의 국부를 두 손으로 붙들고 늘어져 결국 두 손이 잘리었다. 그리고 또 대어들자 입으로 코를 물어 잘랐더니 호병은 무작개의 입을 부숴뜨렸다. 구전 설화에 의하면 온몸이 잘리고 부숴지고 촌단(寸斷)이 되었는데도 살점이 도약하면서 반항했으며, 그 무작개의 뛰는 동체를 근처 굴속에 매장하자 그 인근의 땅이 들쑥날쑥 떴다 내렸다 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작개의 집요하고 강인한 저항을 설화 속에 구제한 것이며, 당시 지배적 국민감정이었던 반호주의(反胡主義)가 무작개가 묻힌 고개를 뜨내리재라 이름하고 그 산을 무작산(후에 마작산으로 전화)이라 불러 민족감정을 자연에 다 체질화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소금일지라도 청나라에서 나는 것이면 환영 속에서 배제를 하거나 보복을 함으로써 그 한이 된 민족감정을 홀가분하게 하였다.

 

적이 와도 나아가 싸우는 양성적 성향을 한 번도 못 누려온 약소 한국인은 그같이 「레지스땅스」에 연고가 있는 자연물에 의지하여 음성적으로 싸워온 것이다.

 

■ 시체가 흘린 눈물

 

오준(吳竣・禮曹判書)은 병자호란 때 절세의 명필이었으므로 호장(胡將) 앞에 화의 표하는 굴욕의 삼전비문(碑文)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비문을 쓴 것 때문에 두고 두고 마음이 괴로왔다. 이 굴욕에서 그의 양심을 구제하고자 벼슬을 버리고 산에도 들어가 보기도 하고 붓을 꺾곤 하는 갖은 자책과 자학을 하곤 했다. 그는 손을 들여다 보고는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글을 쓴 것에 마음을 못 가누어 돌로 찍어 피를 내기도 하였다.

 

한국의 많은 예술가 가운데 그 자신의 예술 때문에 이토록 마음 아파했고 또 극한 상황에서 허덕였던 예술가는 다시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근대 나 현대에는 그의 재능을 악마에게 팔고도 아무런 자책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허다하고 또 그것이 통속이 되어 있긴 하다. 그런 것들은 이전의 한국의 가치 체계에서 변질된 「현대」의 분량일 것이다. 오준의 인간적 갈등은 그의 한스러운 죽음에서 잘 표현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몸은 싸늘해진 지 오래인데 눈물은 따뜻하게 오랫 동안 흘렸다는 것이 된다. 즉, 시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된다.

 

병자호란 후 김시양(金時讓)이, 남한산성 때문에 나라가 아주 망하지 않았으니 그 산성은 보배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 말을 들은 김신국은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나라의 외적에 대한 수동(受動) 성향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경험이 있는 그는 모든 전쟁은 선공(先功), 즉 능동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한국 성들이 모두 피난을 위한 성이란 점에서 산성 무용론을 주장한 활달한 명신이었다.

 

그는 철저한 배청주의자(排淸主義者)였다. 그의 선조에 대해 추증(追贈) 의론이 있을 때 그는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내 선조가 어찌 순치(順治・淸國 太祖의 年號) 연월을 알리오. 』

 

청나라의 입김이 서린 그런 때묻은 벼슬로 선조를 때묻히기 싫다는 억압된 배청 사상의 강렬한 한 표시였던 것이다.

 

정묘호란 이후 기고만장해진 청나라 장군은 조선의 친왕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강요했다. 이에 왕실에서는 원창령(原昌令) 구(玖)를 왕자로 가장시켜 보냈다. 이때 이홍망(李弘望)이 수행했었는데 이를 눈치챈 성난 청장(淸將)을 기재로 꺾어 유명해졌다. 그 후 그가 한국인 포로 송환 교섭차 심양에 갔었을 때, 심양의 청주(淸主)가 병마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와 마중하였다. 이런 경우 으례히 설석(設席)하여 배례(拜禮)를 하는 것이 소국(小國)의 의례가 되어 있는데 이홍망은 설석도 하지 않았으려니와 꼿꼿이 선 채 배례를 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이홍망의 주체성 있는 옹고집으로 포로 송환교섭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원망들을 하는 가운데 그는 그 나름대로 외교를 진행하여 수백 명의 포로를 고국에 데려 오는데 성공했다. 그 돌아온 포로 가운데 해주에 사는 김굉인(金宏寅)형제는 후에 등과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죽을 때까지 이홍망의 기일(忌日)에는 잊지 않고 제사를 올렸다 한다.

 

이상과 같은 주체성 있는 행동이 순수하게 주체적 발로였다면 역사에서 훌륭한 가치관을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주체적 행동이 대보(大報)의 사대사상에서 빚어진 것이기에 아쉬운 맘 그지없다.

 

다만 명나라의 권위가 정형화하기 이전에 있었던 국초(國初), 태종의 주체적 행동과 한말 대원군이 취한 주체적 행동에서 권력자의 심혈에 흐른 비사대의 한 성향을 엿볼 수가 있다.

 

명의 영락제는 불교의 독신자였다. 태종 6년 제주도에 있는 동불(銅佛)을 욕심내어 칙신(勅臣) 황엄(黃嚴)을 시켜 가져오도록 했다.

이 사신이 화북(禾北)의 나루를 떠나던 날 제주의 심당(巫堂)들은 이 사신의 뱃길에 풍파를 비는 초풍 굿을 하였다고 구전되고 있다. 대담한 비사대의 저항인 것이다. 황엄이 서울에 들렀을 때 그는 황제가 숭불하니 태종더러 그 동불에 먼저 예배할 것을 요구하였고, 중신인 하윤(河崙), 조영규(趙英珪)도 그 예배를 권하였다.

 

이때 태종은 예배를 거절하고,

『나의 군신에게 수의자(守義者)가 하나도 없구나. 황엄을 이토록 무서워 하니… 고려 충혜왕(高麗忠惠王)이 원에 잡혀갔을 때 국인(國人) 중에 탈환하려 한 자 하나도 없었다더니 나 역시 그러할 게 아닌가. 차라리 벽도(僻島) 사람이 그립구나』

하며 조선인의 사대성을 개탄했다고 한다.

 

벽도라 함은 제주도를 뜻하며, 이것은 제주도 사람의 비사대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때 명신 황 엄은,

『번국(蕃國)의 화복(禍福)이 모두 천자에게 있을지라.』

고 공갈을 하였다 한다.

 

이조 역대 임금 중에 가장 비사대의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요, 주체주의자가 바로 태종이었다. 그 태종은 정신적 고향으로 제주를 원했었다.

 

□ 임금 위에 있는 萬東廟지기

 

대원군의 주체적 용기도 괄목할 만하다. 충청도의 끝바꿈 노래에 승경가(昇卿歌)라는 것이 있다. 높아지는 벼슬 이름을 대는 것이다.

 

원 위에 감사(監司)

감사 위에 참판(參判)

참판 위에 판서(判書)

판서 위에 삼상(三相)

삼상 위에 승지(承旨)

승지 위에 임금(王)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

 

임금 위에 있는 만동묘(萬東廟)지기의 대목이 익살스럽다. 묘지기란 천인이다. 이 천인이 임금 위에 있다 함은 한국 사대주의 존립의 한 당착(撞差)된 표현이며, 이 유우머의 단면에서 한국의 한 사고방식을 유추할 수가 있다.

 

청주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글씨를 받들고,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신종(神宗)을 모신 사당이다. 숭명(崇明) 사대주의의 정신적 고향이라 그 권위는 조선 왕실 위에 있었다. 이곳에 모여든 유생들은 그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하여 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한 실례를 들어 보겠다.

 

대원군이 집권 이전이었던 흥선군 시절에 청주에 갔다가 화양동을 유람하고 만동묘를 구경하러 갔었다.

하인들이 겨드랑을 부축하며 계단을 올라 묘문에 들어서자 만동묘의 수복(守僕・묘지기)이 이 모양을 보고 즉시 달려 나왔다. 가까이 다가와서는 발로 대원군의 발을 차서 계단 아래로 거꾸러뜨리는 것이었다.

 

『만동묘는 대명 황제를 모신 곳이다. 금상(今上)이 행행 (幸行)하여도 부액 (扶腋)치 못하시거든 누가 감히 전폐하 앞에서 부액할 수 있겠는가.』

라고 어처구니 없게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일생일대의 모욕적인 이 봉변에 분노가 치솟았으나 마음을 가다듬고 하인을 시켜 이 묘의 사제인 변장의(掌義)에게 전갈을 띄워 이 봉변을 말하고 그 하인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변장의로부터,

『수복(守僕)의 행위가 좀 과한 듯하나 사체(事體)는 당연하니 논죄키는 불능합니다.』

라는 의외의 강경한 회답이 왔다.

대원의 집권 후 첫 혁명적인 시정이 서원 철폐였다. 유생들의 고식적인 기풍이 나라에 백해무익하다는 뜻에서였다. 이 만동묘의 봉변에서 이 혁명이 싹텄다고 문헌들은 기록하고 있으나, 이 봉변 때문에 이 혁명이 가속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서원을 전폐시킨 것이 아니라 비중이 큰 서원은 존속시켰는데 그 비중 기준으로 보아 만동묘는 충분히 존속할 수 있었는데도 철폐하였다는 점, 그리고 이 서원 철폐의 단안 후에도 소문 등 여론을 들어 부활시키곤 했는데, 많은 유생들이 수십 차례 만동묘 부활에 대해 소문을 올렸으나 그의 집정 동안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는 점은 이 봉변의 보복이 작용했을 것이 뻔한 일이다.

 

서원 철폐 후 만동묘의 사제인 변장의를 형살(刑殺)하였다는 점으로도 대원군의 심정은 충분히 유추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동묘에 서린 이 至極 사대주의에 부치는 어린이들의 끝바꿈 노래는 일종의 건전한 서민의식의, 그 사대주의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다.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를 올려 놓았던 발상은 아이러니한 저항 표현이다. 비단 이 동요 뿐만 아니라 모든 시사를 비꼬는 동요는 건전한 서민의식의 공감대에서 빚어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동요로 미루어 절대성을 지녔던 숭명 사대주의가 서민층에까지는 염색되지 못했던 점을 미루어 생각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