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革新相臣의 受難
태종 말년에 계속해서 몹시 날이 가물었다. 그 가뭄을 자신의 부덕으로 돌리고 죽기 전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리고 들어앉을 만큼 가뭄이 혹심했던 것 같다.
가뭄은 민심을 소란케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됐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그것은 정사(政事)를 잘하지 못한 데 대한 응징의 천벌로 이해했었다. 그러기에 백성들은 그 혹심한 가뭄의 원인을 당시의 악정에서 찾는다는 것이 자연스런 추세였다.
전국 각지에 익명서(匿名書)가 나붙기 시작했는데 한결같이 이 가뭄은 하륜(河崙)이 정권을 잡아 구제(舊制)를 버리고 새 제도를 마냥 만들어냈기 때문이라 하였다. 결국 태종 말년의 가뭄은 옛부터 있었던 제도를 개혁한 데 대한 민심의 반동으로 귀결되며 이 같은 사실은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옛것을 숭상하고 보수하며 기리는 상고성향(尙古性向)인가를 입증해 주는 것이 된다.
하륜은 이 태조의 건국에 공이 커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의 두 공신에 좌의정까지 올랐던 혁신 정치가다. 국초에 정치적인 개혁을 정도전(鄭道傳)이, 경제적인 개혁을 조 준(趙浚)이 수행했으며 제도적인 개혁은 하륜이 다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고려시대부터 있던 문하부(門下府)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합쳐 의정부(議政府)로 하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없애는가 하면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좌우사간(左右司諫)으로 올려 계급을 정삼품으로 했으며 체궐(諦闕)이란 직책을 헌납(獻納)으로, 습유(拾遺)는 정언(正言)으로 성균제주(成均祭酒)는 사성(司成)으로, 사헌중승(司憲中丞)은 집의(執義)로, 시사(侍史)는 장령(掌令)으로, 잡단(雜端)은 지평(持平)으로 바꿔친 것이다. 또 저화(楮貨・지폐)를 처음 만들어 백성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등 그가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제도 개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 가뭄이란 이름의 천벌이 한국 선비의 상고 보수성에 영합되어 하륜에게로 밀어닥쳤으며 드디어 조정에서도 간관(諫官)의 규탄을 받기에까지 이르렀다.
『예전에는 재앙을 당하면 3공 (3정승)이 자리를 피하는 법인데 하륜은 임금의 총애만 탐하고 물러나지 아니하고 새로 제도를 세워서 선왕의 제도를 문란케 합니다. 』
고 간했던 것이다
나이 70에 고증사(考證使)로 함경도에 갔다가 객사했는데 태조가 몹시 성내어 나타나 구제를 존중하지 못함을 꾸짖는 꿈을 꾸고 정평(定平)에서 죽었다고 백성 간에 소문이 났던 것이다.
옛 선비들은 이미 있어 온 것이면 그것이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충분히 인정했다. 즉 과거의 사실, 선례 속에서 법칙에 가까운 기준을 찾았다. 과거의 선인들에 의해 경험된 것은 확정되고 안정된 것이며 적어도 수백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시행착오를 거쳐 형성된 것이다. 그 과거의 것을 숭상하고 그것을 좇아서 사는 사고 및 행동 습속이 체질화돼 있었으며 그것이 한국인의 상고 보수성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제도나 풍습 뿐만 아니라 학문도 옛것이 충실하게 전승될 뿐, 창의나 발전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훌륭한 학자요 훌륭한 지식인이란 바로 옛것을 얼마나 정확히 또 많이 아는가로 평가되었고 새로운 사고나 사상이나 풍습이나 제도는 이단시되어 철저하게 배격을 받았던 것이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울 때는 혁신 및 개혁이 선행돼야 했다. 그 새 왕조 형성의 필연적인 기반을 닦은 정도전, 조준, 하륜이 그 후의 선비 사회에서 이단시 당한 것은 이같은 상고보수성 때문이다.
■ 韓國的 名相의 條件
이와 같은 조선왕조 초기의 혁명에 대한 백성의 반감을 반응을 안정시킨 유수한 사고보수형의 정치가가 황희였다.
그는 백성들에게 유리된 반체제적 정치를 체제적 테두리 안에 안정시킨 정승으로 그 수단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인 상고보수성에 알맞은 정치였던 것이다.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선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기를 좋아하지 않았다(謏聞鎖錄)」
했으며 이따금 옛 제도를 변경하려고 의논한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신이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오니 무릇 제도의 변경에 있어서는 의논할 수가 없읍니다.」
하고 의논을 거부하곤 했던 것이다.(묘비)
황희의 정치철학은 적이 한국적이랄 것이다. 곧 과거의 것, 과거의 연장인 현재에 있는 것에 이단은 용납되지 않는다.
있을 수 있었으니까 있고, 있을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있었으며, 있었으면 존중한다는 것이다.
비판적 사안(史眼)은 죄악이었다. 그러기에 현재의 일들에 무한히 너그러워야 한다. 둘이 싸운다. 한쪽이 황희에게 자기의 주장을 일른다. 황희는 그 주장이 옳다고 말한다. 그럼 다른 한쪽이 또 자기주장을 내세운다. 황희는 그 주장도 옳다고 말한다. 양쪽 다 옳다고 말한 것을 곁에서 듣고 있던 제삼자가,
『시시비비를 가려야지 양쪽이 모두 옳다고 판단한 그 자체가 옳지 않지 않습니까.』
고 이의를 말하자, 황희는 이 제삼자의 이의도 옳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유명한 황희의 고사는, 한국적 보수성향이 형성한 너그러움과 무기력함이 얼마나 컸던가를 엿보여 주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상고보수성의 부산물인 사고방식은 신진사류(新進士流)들로부터 무척 비난을 받기도 했다.
언젠가 그는 길에서 성균관의 유생들을 만나 면박을 당한 일이 있었다.
『네 어찌 정승이 되어 임금의 그릇됨을 시시비비 가리지 못하고 받아들이기만 한단 말이냐.』<조광조의「筵奏」>
어느 시대건 혈기 넘치는 젊은 유생들은 혁신적이고 진보적이기 마련이다. 이 극단적 성향의 유생들에게 있어 황희의 보수적 너그러움은 대치된 극한일 수밖에 없고 아울러 이같은 비난을 받을 만했으며 면박을 받았다 해서 노여워할 황희도 또한 아니었다. 이같은 상고보수의 관용 정치는 그 후 이승소(李承召), 강사상(姜尙), 상진 김수동(尙眞 金壽童) 등 장수 선승들에게 전승돼 내렸고, 대개 이같은 성향의 정치를 한 사람은 그것이 한국인의 체질에 영합됐기 때문인지 名相이라 칭송되었던 것이며 그것은 반드시 현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승소는 문장으로도 이름났고 의약, 지리, 병형(兵刑) 등 실학에도 이름이 알려졌으며 또한 그의 너그러운 인간관계도 많은 실화를 남겨 놓고 있다. 그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낭관(郎官)이 날마다 술만 마시고 공무를 게을리하였으므로 동료들이 그를 내쫓고자 판서에게 품계를 하였다. 이에 그는 크게 웃으며 허승(許承)이 오랜 시일 동안 귀가 먹어 잘 듣지를 못했으나, 장관은 차마 그를 내쫓지 않았다는 한(漢)나라 고사를 들고,
『지금 그 낭관이 비록 항상 술이 취해 있으나 깨어 있을 때도 많으니 어찌 내쫓으랴.』
하였던 것이다. 그의 도량이 엿보여지는 일화다.
이와 같은 관용 정치의 단점인 무기력과 무저항은 난세를 당하여 무조건 영합하는 지당(至當) 정치 성향을 빚어 놓았고, 이 정계의 지당성향은 차츰 아부성향으로 변질되어 나갔던 것이다.
여기 연산조의 상신(相臣)인 김수동이 그 과도적 성격을 잘 대변해 주는 처신을 한 것을 소개한다.
상신 김수동 (영의정)은 서생 때부터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를 시비할 수 없었던 모나지 않은 원만한 정치가였다. 더우기 혼조(昏朝)인 연산군시대에 그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격적인 크기와 깊이를 말해 준다. 연산조 때의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임금에 대해서는 죄를 짓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구해 살렸다. 공의 힘으로 목숨을 보전한 이가 많았다. 연산군을 내쫓는 중종반정 때도 주모자인 성희안(成希顔)이 가서 말하니 함부로 굽혀 따르지도 않고 조급히 굴지도 아니하고 조용히 헤아린 뒤에 행동하여 사람들이 공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에 저항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당하고 갇힌 사람이 숱하게 많았다. 이에 대해 김수동도 저항을 느꼈지만 순응을 하였다. 그리고 반정 후에 다시 단상으로 못 치른 나머지를 치렀다. 이와 같은 처세는 한국의 어느 역사적 시간에서도 가장 현명하였다는 사실과 동시에 바로 한국인의 약점을 형성해 온 주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사실「마이너스」적 가치 요소가 많았던 한국 역사는 항상 당시 사람들에게 집념의「쓸개」가 없기를 강요해 왔고, 그 쓸개를 없애지 않는 사람은 모두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해온 것이다. 그렇게 역사가 흐르는 동안에 한국적 사고방식인 당세적(當世的) 표변(豹變)의 가벼운 기풍으로 정착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당세 영합적 성향 중에서도 미움받는 성향과 우럴음을 받는 성향으로 양분되는데 김수동은 우럴음을 받는 성향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발전적 요인을 이룬 가장 큰 저력을 들라면 이와 같은, 「우럴음을 받는 당세적 영합」이랄 수가 있다.
이를테면 개화기 때 「쿠데타」를 일으킨 김옥균(金玉均)의 과격한 개화행동이 한국개화를 위해 이루어 놓은 일의 분량보다, 당세영합을 한 김윤식(金允植)이 이루어 놓은 개화작업의 분량이 많았다는 것도 그런 한 예증이다. 하지만 김윤식이 별세했을 때 당세 영합적 성향 때문에 약간의 원망을 받았듯이 김수동도 약간의 아쉬움을 선비사회에 빚었던 것만도 부인할 수가 없다.
옛것이 곧 法이다.
세종 때 집현전에 송사(宋史)가 없어 명나라에 여러 차례 송사 한 질 보내줄 것을 소청했었다. 그 송사가 아직 보내오지 않았을 때 집현전 학사들은 송조(宋朝) 때 인물을 서로 논하면서 왕 안석(王安石)을 언급하게 됐다. 그 왕안석이 훌륭한사 람을 적는 열전에 들어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간신전에 들어있겠는가에 대해 의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대부분의 학사들은 간신전에 들어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이유로써 『왕안석은 새 법을 많이 만들어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진실로 소인』이기 때문이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고성향에서 이단이니 간신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학사 가운데서 유성원(柳誠源)만이 왕안석이 문장 절의(節義)가 있고 그가 새 법을 남조(濫造)한 것은 우국우민(憂國憂民)의 충정에서 나온 것이기에 열전에 올랐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후 송사가 도착하여 맨 먼저 왕안석이 기록된 것을 보니 유성원이 주장했던 대로 열전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많은 학사들의 착오는 곧 한국인의 상고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성원처럼 객관적 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조때 학자 김말(金末)은 평생 학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쳐 온, 정치를 외면한 선비였다. 그에게는 딸 하나만 있었을 뿐 아들이 없어 한 많은 여생을 살았었다. 이 대학자가 남긴 자탄의 글 가운데도 그에게 아들이 없음을 상고에 대해 충실치 못했기 때문으로 연결짓고 있는 대목이 있다.
『들은 천 사람의 눈을 열어주는 이는 음보(陰報)를 받는다 하던데,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간 학관의 직책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도 않았는데 마침내 자식이 없으니 나의 학문이 거칠어 선현의 뜻을 옛 대로 못 전하여 남을 덕되게 못한 것이나 아닐까.』
했던 것이다.
한글 창제마저도 예에 없던 일이라고 맹렬히 반대했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副提學 崔萬理)의 상고성향은 대단하여 환관이 쓰는 연각오사모(軟脚烏紗帽)의 오사(烏紗)의 얽음새가 고제(古制)와 다르다는 그 하찮은 일까지도 극론을 일으키고 있다.
훌륭한 우리 한글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 근간에 이르러서야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됐지만 한말까지 이르는 선비사회에서 최만리는 그의 극단적인 상고사상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을 뿐 아니라 선비의 한 우상으로 우럴음을 받았던 것이다.
중종 때의 명신 정광필(鄭光弼)은 우의정 때 각부의 하인과 각진(各津)의 수병들의 수가 적고 일이 많아 지탱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의 수효와 일의 많고 적음 고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평없이 일할 수 있게 구제를 재조정하자고 임금에게 주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임금 앞에 줄지어 선 모든 재상들은 단 한 사람 예외 없이 정광필의 주청을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였다.
『옛법은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
는 것이 그 이유였다.
몇백 년 동안 해봐서 가장 알맞은 것이 오늘의 현상이며 그러기에 옛법대로 하는 것이 옳고 편하다는 것이었다.
세조가 정란 후에 꿈을 꾸니 문종비요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나타나 자기 자식 죽인 것을 꾸짖었다 하여 왕후가 묻힌 소릉(昭陵)을 파헤쳐 물가에 묻으므로서 능을 폐했던 이다. 이 소릉은 복구돼야 한다는 것이 세조, 중종년간의 선비들이 지닌 가장 큰 지론이었다. 여기 <음애일기(陰崖日記)>를 찬(撰)한 이자(李耔, 1480~1533)가 유종룡(柳從龍)에게 소능복구를 역설하는 편지를 쓴 것이 있는데 당시 소능복구를 반대하는 이유로서 선왕이 한 옛일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고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상고성을 들고 있다.
『대개 고치는 것을 꺼려하고 옛 습관을 지키기를 즐겨하는 것은 세속의 소견이라, 이는 또 선왕의 중함을 끼고 고치지 않아야 한다는 체통에 고두한 것을 계속하고 잘못을 그대로 두고 있다.』라고 조상의 한 일은 절대선(絶對善)이란 상고성을 다음과 같이 규탄하고 있다.
『부모가 허물이 있으면 효자된 자는 마땅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비록 종아리를 맞아 피흐름을 당하더라도 그의 부모는 허물없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아비나 애비가 과실이 있으면 능히 과실을 뒤집는 것으로 허물을 깨끗이 했다고 하는 것이요. 그런데 지금은 이 허물을 깨끗이 하는 것을 가리켜 허물을 드러낸다고들 하지 않는가.』고 개탄하고 있다.
당시 사회의 상고에 대한 풍조를 적시한 것으로 옛것이 비록 잘못됐다 해도 그것을 고친다는 것은 바로 선인의 허물을 들어내게 되므로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는 논리가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상고성은 항상 선례 속에서 생활규범을 찾았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조적 사고는 위험시했다. 모든 지식인들이 선현의 고사나 한국 문화의 원천이 된 오경(五經)의 선례를 선례중의 선례로 인식했고 그 선례는 모든 것을 지배했던 것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이 선례를 원용하므로서 모든 진리는 확립되었고 무슨 언쟁이나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이선례만 끌어대면 판결이 났다. 우리 옛 선비들 간에 훈화(訓話)학이 그토록 발달된 것도 이 때문이며 정치에 있어서도 『열성조(列聖朝)에 없었던 분이옵니다』는 이 한마디 말은 어떤 정치의 이론보다 우선되었던 것이다. 곧 선례에 없었다는 것은 바로 가치를 형성하지 못할 뿐더러 악으로까지 인식해 버린다.
우리나라 행정기구가 근대화된 갑오개혁(甲午改革)때 6조(吏, 戶, 禮, 刑, 兵, 工)를 내부, 학부, 법부, 군부, 농상공부, 도지부, 외부로 고쳤는데 개정 도중에
① 외부는 둘 필요가 없고
② 농상공부는 공부로 도지부는 호부로 해야 한다는 논란이 심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병조를 군부로 예조를 학부로 고치는 것쯤은 묵과할 수 있지만 조 이름이 외자이던 것을 두 글씨 세 글씨로 늘인다는 것은 구제(舊制)를 크게 바꾼 것이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이런 6조에는 없던 외부가 들어 있음을 크게 어긋나는 것은 7조가 되는 모순 때문이었다. 이 6조제는 바로 주례(周禮)에 기재된 관제인 천관, 지관, 춘관, 하관, 추관, 동관을 본뜬 것으로 이 천지 4절(天地四節)의 기본 이치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끈질긴 상고성 때문이었다.
□ 넌센스
이 같은 선비들의 상고 보수성은 이따금 넌센스를 빚어 화제가 되어 전하기도 했었다.
양근(양평)지방에서 채집된 얘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글을 잘 모르는 어느 서민의 장모가 죽었다. 시골에는 제사 때 축문을 써 주거나 혼례 때 단자를 써 주는 문화센터를 겸한 서당선생이 있게 마련이다. 선비를 찾아가 장모가 죽었을 때 읽는 축문을 써달라고 의뢰했다.
이 서당선생은 예서(禮書)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자칫 잘못 보고 아내가 죽었을 때 읽는 축문을 써 주었던 것이다.
이 축문을 갖고 가서 읽어보니 사람들이 그 축문이 어딘가 좀 잘못된 것 같다고 하여 그 축문을 들고 서당 선생에게 찾아가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하고 잘 봐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 서당 선생이 한 말이 멋있다.
『이 축문은 버젓이 책 속에 있는 것이니 틀릴 리가 없다. 어딘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자네 아내가 죽을 것을 자네 장모가 바뀌어 죽은 것이겠지. 그것은 자네 댁내의 사정이니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네.』
하고 돌아앉았다 한다.
책은 과거의 것의 집대성이요 선례의 모음이기에 절대적이다. 그러기에 상고성향의 선비들은 책이 틀린다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음 얘기는 중국의 고사에 비롯된 것이긴 하나 우리 민중 간에 식자를 얕보는 일로 널리 퍼졌던 것 가운데 하나다.
중국의 학승(學僧)으로 이름난 혜원(慧遠)이 중병에 걸려 위독했을 때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중들이 몰려와서
『술로서 병을 낳으십시오.』
하고 청했다. 한데 이 스님은 율(律)에 술로 이 병을 낫노라는 조문이 없다고 말하고 거절했다. 뒤이어 미음이라도 잡수도록 권했다. 그는 이미 정오가 지났다는 이유로 먹질 않았다. 인도불교에서는 출가한 중은 정오를 지나면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계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꿀에 물을 타서 마시도록 청하자 그것이 계율상 허락된 일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율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책의 절반도 못넘겨 이 스님은 임종을 하고 만 것이다. 이 역시 상고성이 율이라는 향례에 야합된 그 강인한 집착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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