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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12.尊體性向(존체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21

선비의 의식구조-12.尊體性向(존체성향)

 

■自殺과 선비

 

인조 때에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에 장유(張維)가 말하기를,

 

『성이 만약 불행하게 된다면 칼을 가지고 자살하기는 어려우니 어찌하여야 잘 죽을 수 있겠는가.』

고 말한 일이 있다.

 

『칼을 빼어 제 목을 찌르는 것은 진실로 장사(壯士)의 할 일이지 선비로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중신(重臣)이니 오직 군부(君父)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만약 亂兵에게 죽지 아니하고 적이 잡아서 항복받으려 할 때에는 굴하지 아니할 뿐이다. 내가 비록 내 손으로 목을 찌르지 않더라도 적이 칼질을 하지 아니하겠는가. 잘 죽는 도리는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이식(李植)이 대꾸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장유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목을 칼로 찌르지 못하고 이식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평일에는 학문의 힘 때문에 얻은 것이 있다고 스스로 믿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힘이 되지 못하니 한평생 공부가 허사일 뿐이다. 』고 했던 것이다.<택당가록(澤堂家錄》

 

우리는 이 대화에서, 선비의 육신관(肉身觀)을 단적으로 들여다볼 수가 있다.

 

한국 선비의 행실 유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효경(孝經)에 보면.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損 孝之始也. 立身行直揚名得世 以顯父受 孝之終也.」

 

곧 우리들의 신체, 머리카락 하나, 피부 한 점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기에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이 효행의 첫걸음이라고 가르쳤으며 이 가르침을체질화시킨 선비들은 약간의 부상,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 뜯겨도 불효로 알고 용서를 빌고 자책을 하곤 했던 것이다.

 

하물며 자살이란 부모를 죽이는 죄악에 버금가는 큰일로 알았던 것이다.

 

개화기에 우리 선조들이 단발령에 그토록 저항했다는 것도 이 선비의 존체성향과 배치되는 율전이었기 때문이다.

 

■ 斷髮과 선비

 

단발령은 미국을 견문하고 돌아온 개화내각의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세 명의 해외견문 경험이 있는 대신들에 의해 발의되었었다. 내각에서 심의하여 대체로 성안이 되어 있었는데 국민의 반감이 두려워 발표를 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훈련대의 장교 셋이 칼을 빼어든 채 내각 회의실에 뛰어 들어와 단발령의 긴급 발표를 요구하고 정부의 관원들만이라도 즉각 단발하도록 하라는 시위를 하였다. 내각의 급진 개화세력이 사주한 하수인들이기에 이 요구는 그 자리에서 받아들여졌다. 다만 한 대신이 이 즉각 실시에 반대하고 민비(閔妃)의 장례가 끝난 후까지 그 발표를 보류하자고 하였으나 묵살되고 말았다. 황제의 재가가 나고 발표에 앞서 국왕, 황태자, 대원군이 차례로 단발하였다. 그 후, 1895년 11월 15일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고시가 내렸다.

 

「-단발은 위생적이고 집무상 편리하다. 성상폐하(聖上陸下)께옵서는 행정개혁과 국민생활 향상의 어견지(御見地)에서 맨 먼저 그 수범을 신민 앞에 내려 보이셨다. 대한국민인 자는 근엄히 이 성지를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금후의 복제는 다음과 같이 한다.

 

1. 국상(國喪)기간 중 의복은 모자와 더불어 백색으로 한다.

2. 망건(網巾)은 금후부터 일체 폐한다.

3. 양복 착용은 개인 의사대로 한다. 11월 15일 임시 내부대신 유길준」

 

이 단발령에 대한 반발은 놀라울 만한 것이었다. 그 단발령은 한국인의 가치관 가운데 가장 확고하고 큰 비중을 차지했던 효의 핵심 사상과 습속을 배반해야 했기 때문에 그 파문은 의외로 심층화했던 것이다. 머리를 깎는 것은 부모의 것을 무화시키는 것이요, 불효의 극치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단발령은 가치관의 전도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 단발령을 둔 저항의 양상을 살펴보기 이전에 두발에 서린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집념을 살펴보기로 한다.

태종의 외손자요, 권규(權眭)의 아들인 권총(權聰)은 태종이 항상 무릎 위에 두고 길렀으므로 버릇이 없었다. 이 버릇없는 개구장이를 두고 옥사(獄事)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태종의 근시(近侍) 가운데 수염이 길다란 노신(老臣)이 있었는데 어느날 총(聰)이 노리개 칼을 빼어 이 노근시의 수염을 잘라버렸다. 부모의 유체(遺體)라 하여 머리칼 하나도 자르지 못하고 상투로 남겨 두는 윤상(倫常) 지상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일대 윤상사건으로 번져 조정에서 이 어린이에게 죄주기를 청하는 데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법도로서 권력을 「콘트롤」했던 드물게 보는 현군(賢君)이었다. 또 어린이에게 죄를 주자는 조신희의의 고식성을 인간적인 면에서 비웃을 줄 아는 정군(情君)이기도 하였다.

 

『조정의 예절을 엄하게 아니할 수가 없으니 총의 죄는 죽음이 마땅하다. 하지만 어려서 예절을 모르고 한 것이니 죽음만은 면해주기 바란다.』

하고 그 사랑하는 손자를 숭례문 밖에 가두었다.

 

가둔 지 1년 후 태종은 병석에 누워 병세가 대단하였다. 중신들이 임종을 예감하고 문병하는 자리에서,

『나의 외손 총이 병중에 몹시 생각나지만 조정의 법도가 두려워 감히 오라고 못하겠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

권력의 절대권자가 권력을 법도로 묶는 비장한 양상이 수염사건으로 절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부모의 육체적 유물에 대한 집념의 크기를 역력히 볼 수 있는 고사(故事)이기도 하다. 거유 김장생(巨儒·金長生)은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다.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과,

둘째 내 자손은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의(誼)를 두터이 지내라는 것이었다.

영정물용(影幀勿用)의 그의 사상도 현대 인류학이 추구하는 한 원시속과 연관이 있어 주목을 끌게 하기도 하고 그 집념의 보편성을 이에서 또한 보는 것이다.

 

단발령 저항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단발령자진(斷髮令自盡)이라는 자살 「붐」을 들 수가 있다. 함양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인 사인 정순철(士人·鄭淳哲)에게 시집간 창녕조씨(昌寧曺氏)는 남편이 할아버지 밥상머리에서 상투를 자르겠으니 허락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그는 식도를 들고 들어가 단발한다니 중이요, 중은 처도 없고 자식도 없다고 들었다면서 안고 들어간 자식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식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거의 같은 무렵에 홍산(鴻山) 조씨 가문에 시집간 김씨부인도 남편이 상투를 자르고 들어오자,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처로 살 수 없다는 유서를 장롱에 넣어두고 자결하였다. 그때 김부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이충무공 후예인 덕수 이 규백(德水 李圭白)이 보은현감으로 있을 때 단발령이 내렸다. 그의 부인 창녕성씨(昌寧成氏)는 대군주(大君主) 폐하가 旣爲斷髮하였고 국령(國令)이니 당신도 단발치 않을 수 없을 테니 보은 현감의 도장을 던지고 귀향할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이규백은 남자의 일에 여자의 간섭이 깊다 하고 물리쳤다. 이튿날 부인은 목매어 죽어 있었다. 그가 남긴 유서는 명문으로 그 후 名家門에서 여자를 가르치는 교재가 되었다.

 

『대군주 폐하께서 능히 두발을 보전치 못하시는 지경이면 여타는 의론할 여지도 없으리로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은 머리털과 같이 끊어지고 나의 靈은 윤강(倫綱)을 따라 끊어지도다. 세상에 여자의 일신 정조를 보존할 수 없을 터이니 오늘까지 지켜온 이 세상의 정조를 욕되지 않게 하리로다. 』

 

이 斷髮自盡에 의해「모럴」을 지켜 내려는 노력은 그 후 출곧 지속되었고 일제시대의 중기(中期)에도 그 사실이 일어나고 있다.

1933년에 해주(海州)에서 두 노인이 단발에 저항하여 일제의 농촌어용단체인 농사진흥회 앞마당에서 나란히 앉아 동맹자살을 하였다. 그들이 남긴 유서에는 「거권삭구구의(拒勸削救舊義) 즉 단발을 거절하여 옛 의로움을 구한다」고 씌어 있었다.

 

□ 「중서방 주자고 날 길렀나」

 

그 무렵 한국에 와 있던 영국 여인 「버드 비숍」여사의 수기로 그 실정을 더 살펴본다.

 

『어떤 지방에 새로 부임한 관리가 상투가 없었다. 환영나간 군중이 이것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성난 그들은 그 환영을 단발 성토로 바꾸었다. 우리 고장에서는 여태껏 조선의 양반을 수령으로 모셔 왔었다. 한데 지금 상투도 없는 상놈이 수령이라고 왔으니 얻어먹는 중인가, 바다 건너온 양이(洋夷)인가』

하며 대들었다.

이 신임 수령은 당장에 쫓겨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아뭏든 단발령은 조선에 잡다한 희비극을 연출하였다. 상인이나 농민이 무슨 일이 있어서 성의 성문을 들어서면 붙들어다 강제로 상투를 잘랐다. 손을 머리에 얹어보면 상투는 이미 없었다. 마누라를 만나 볼 면목도 없고 또 향반의 박해도 두렵다. 그리하여 정처 없이 떠도는 개화 부랑인까지 생겨났다.

 

따라서 한성에는 식량이나 나무의 공급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용 필수품은 무섭게 등귀하였다. 연초이건만 歲拜를 다니지도 못했다. 궁중이나 관서의 문이란 문 앞에는 상투 자르는 풍경이 끊이질 않았다. 어떤 노인은 그의 두 아들이 단발한 것을 보고 분개하여 세상과 단교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안에 감옥을 만들고 들어 앉았다 한다. 아! 상투여, 조선 사회조직의 정점은 실로 상투에 맺어져 있다 할 것이다. 상투가 망하자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보니.』

 

단발령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인 저항은 민파(民派)의 근거지인 강원도 춘천에서였다. 강원도 관찰사 조인승(曹寅承)이 단발을 시도하자 이소응(李昭應)이란 유생이 분기하여 감사는 선조의 유속(遺俗)을 깨뜨리는 역적이라고 지탄하고, 민비를 죽인 자들이 단발족이라고 선동하여 관아를 점령하고 관찰사 조인승을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이 단발 반란에는 비도(飛盜)들이 끼어들었는데 관찰사를 잡아죽인 것은 바로 이 비도들이었음이 후에 밝혀졌다.

 

「강원도 재판쇼에서 심리한 비도 리덕일이가 전 춘천부 관찰사 조인승씨가 부림할 때에 머리 깎은 관찰사라고 후욕하고, 동리 백성들을 지휘하여 집유하얏다가 그 잇흔날 비도들이 잡아다 포살한 까닭으로 교에 쳐하기로 한다더라.(「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자)」

 

뒤이어 이 단발 반란은 지평, 원주, 제천으로부터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함경도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이 단발 반란에 강원 관찰사는 김규식(金奎軾)을 비롯한 군수급 이상의 고관 20여 명이 학살당했으며, 비록 학살당하기까진 않았더라도 양반들의 등살로 수령직에 있지 못하고 쫓겨온 군수가 부지기수였다. 지방의 여관은 옛처럼 상투망건을 쓰지 않은 손님은 숙박시키지 않았다. 설사, 숙박을 거절하지는 않는다 해도 후일 폭도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대개 기피하였다. 이러한 불황의 소용돌이가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단발로 인한 호경기로 제법 수지를 맞춘 경우도 있다.

 

「단발령 후 경성 및 그 부근은 석달 동안 불안 속에서 지새워야만 했었다. 1월 이래 성안 일반 상황(商況)은 극히 저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 단발령의 영향으로 진고개 일본인측의 양복점, 구두점, 모자점 기타 양복 부속품점 등에서는 경기가 어찌나 좋았던지 양복은 본 값의 두 배 이상, 신과 부속품은 5할 이상이나 가격이 폭등하였으며, 모자는 흑색 산고(山高) 모자가 가장 잘 팔려 모두 품절 소동을 벌였다. 또 일본 사람밖에 가질 않던 이발소에도 한국인이 쇄도하였었다. (경성부사제2권)」

 

교세 확장에 전전긍긍했던 당시의 많은 유사종교들도 이 단발에 저항하는 민심의 공감과 집약을 예민하게 노렸다.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하는 유사종교에서는, 「나를 죽이는 자가 누구뇨, 발없고 머리 작은 자니라(殺我者誰 小頭無足).」는 참문(讚文)을 유포시켜 단발 개화에 저항하는 백성들에게 영합하였다. 무족은 곧 발베일(斷足)「刖(월)」을 뜻하고 소두(小頭)는 월(刖)자에 소(小)자를 머리에 얹는다는 뜻으로 「삭(削)」자를 造字한다. 즉 삭(削)은 곧 삭발을 뜻하여 단발한 자를 의미한다. 보천교(普天敎)에서도 그들 교도들에게 「장발적(長髮賊)」이라는 패호를 들고 다니게 하여 단발에 저항하는 민심에 영합하였다. 또한 항간에 갖가지 요참(謠讚)도 유행했었다.

 

「우리 부모 나를 기를 제 중서방 [僧夫]주자고 나 길렀나.」

 

이것은 신(新)아리랑의 한 대목이기도 하다. 또 애발당(愛髮黨)이라는 지하결사(地下結社)가 있어 도처에 戱詩의 壁書를 붙여 민심을 선동하기도 했다. 춘천(春川)의 단발반란(斷髮反亂)에 직접 종군까지 했던 홍매사(洪梅史)는 그 일원으로 그가 지은 익명시,

 

自髮六旬 嗟爾禿

黃花九月 受誰香

 

은 많은 사람에게 암송되었었다.

 

□ 상투와 懲役一年

 

머리에 대한 집념을 말해주는 기록으로 당시 한국에서 살았던 일본 사학자 이마무라 [今村鞆]의 기록을 보자.

 

「나는 단발 때문에 겁을 먹고 있는 모(某) 군수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왜 군수는 단발을 하지 않습니까?

 

-가친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군수의 나이는 몇입니까?

 

-나는 예순 다섯 살이고 아버지는 여든 네 살입니다.

 

―허락을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팔백리 길이라 갈 수가 없읍니다.

 

-편지로 해도 되지 않겠읍니까.

 

-편지로 했다가는 그렇잖아도 허락할 것 같지가 않은데, 오히려 불손하다고 혹을 하나 더 붙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문명된 세상에서 비위생적이고 더러운 머리를 하고 있는 것은 중국과 조선뿐입니다.

 

-중국은 변발(辨髮)이라 호풍(胡風)입니다. 선왕의 유품을 지닌 것은 온 세계에서 조선뿐입니다.

 

이같이 상투머리를 자랑삼고 있었다. 또 도박한 자를 징계하는데 상투를 잘라 내쫓았다. 한데 나가지도 않고 눈이 붓도록 울고만 있는 것이었다. 징역 1년을 살겠느냐, 상투를 자르겠느냐고 범법자들에게 물으면 한결같이 징역편을 택하는 것이었다. 징계효과로서는 단발 이상의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내가 충북 각지에서 양반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 다음, 순사들을 시켜 그들의 감상을 살펴보도록 시킨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가장 감개무량하게 듣고 맘에 들어 했던 대목은, 여러분은 일본인 관리가 조선인 전부에게 단발을 강행한다는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고 있지만, 결코 강제로 단행하진 않을 것이며, 조선의 풍속습관은 존중하겠으니 안심하십시오, 하는 대목이었다.」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主事)로 있었던 이능화(李能和)씨의 회고담에 의하면, 관부(官府)에서 관리들을 강제로 단발시켰을 때,

 

『베인 머리카락을 종이에 정성들여 싸가지고 가는 이도 있고 또는 그 머리카락를 들고 통곡하는 이도 있었지만 나는 그 깎여진 머리카락을 난로 속에 던져버렸다.』

고 말해 놓고 있다.

 

한말 30여회의 접전에서 50여 명의 왜군을 잡아 죽인 의병장 이강년(李康)이 붙잡혀 당시 최고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에 끌려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냐 하니까, 검사가 가로되 조선의 금부(禁府)로 지금은 평리원(平理院)이라 이름을 갈았다고 말하였다. 이강년이, 금부는 본시 우리의 관부인데 왜 왜놈이 여기와 있느냐고 따졌다. 검사는 나 역시 한국인이며 일본 사람이 아니라고 대꾸하자 강년 가로되, 한국인이면 왜 머리를 깎았으며 검은 옷을 입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한국사료총서·기려수필)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바로 친일파란 표시였으며, 적어도 대한 백성은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이 여름 치발(薙髮・단발)한 자가 많이 늘어나 장안을 휩쓸면서 그 수치를 모르니 이것이 무슨 변고인고. 오히려 넓은 소매깃에 상투 꽃은 자를 보고 세상 모르는 자라고 비웃는다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이야말로 사람 얼굴에 짐승 맘이라, 일세의 운기(運氣)가 이렇게까지 막다다랐단 말인가. 변시(變時·갑오개혁) 때 분개하여 벼슬을 물러난 자 단지 수명이요, 그에 반대하여 죽음을 당한 자 겨우 과천(果川)의 나무장수와 완산(完山)의 영졸(營卒)뿐이니 서원이 썩었도다.』

 

이것은 보수파의 골수인 이병준(李秉瓚)의 문집 <연재집(淵齋集)>에 쓰인 글이다. 그는 양복 입고 머리 깎는 풍조에 분통을 참지 못하여 심산에 들어가 옛 법도를 지키며 살다가 1904년 양복 삭발에 대한 통문(痛文)을 써놓고 음독 자살하였다. 이상은 민족감정과 두발지상의 사고방식이 복합되어 강력한 행동으로 승화한 경우라 할 것이다.

 

□ 虚塚考

 

이처럼 신체발부에 비중을 크게 둬 온 선비사상이었기로 신체가 살았을 때가 아닌 죽은 유체(遺體)에까지도 존중하는 사고가 보편화 돼 있었다.

 

만약 유체가 없을 경우에는 그 유체를 대형할 만한 대리체를 매장하는 허총(壺塚)의 습속이 전통화되어 왔음도 이 신체를 존중하는 선비의 의식구조 때문일 것이다.

 

김복(金輻)은 화성(華城)의 상민이었다. 임란(壬亂) 때 의병으로 나가기 전날 밤의 일이었다. 그는 아내 차씨(車氏) 앞에 벌거벗은 등을 내어밀었다. 차씨는 울면서 굵은 바늘 몇 개를 모아 들고 그의 등을 쪼며 자자(刺字)를 하였다. 이 상민의 처참한 부병자자(赴兵刺字) 습속은 약체국가의 한 상황을 비극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된다.

 

전쟁에 나가면 죽는다. 죽은 다음 많은 떼 송장 속에서 남편이나 아버지 또는 아들, 형제의 시체를 식별하기 위해 이와 같이 자자를 하였던 것이다. 이 습속이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상황이 절박하고 또 살아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품지 않았다는 데서 한국 서민의 소중한 한 단면을 제시해 준다.

 

부병자자로 쪼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면 아내는 그의 속치마에다 그 피를 적셔 두어야 했다. 피를 닦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피를 적셔 보관해 두기 위해서다. 혹시 싸움터에 나가 유체마저 찾지 못하면 그 피묻은 치마를 유체의 대체물로 삼아 허총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복합의 비극적 효과를 위해 등을 쪼는 아내나 등을 쪼이는 남편은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金千一) 휘하에서 싸우다가 의주의 행재소(行在所)까지 달려가 선전관으로 일했던 유형의 등에도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자자가 돼 있었다. 말년에 자손들에게 이 등의 글씨를 보이며 임란 때 부병(赴兵)할 때 쪼은 것이며 그때 적셔 둔 피묻은 치마로 무덤을 만들지 않고 내 유체가 직접 묻히게 된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라고 말했다 한다. 우리 옛 선조, 특히 상민 가운데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을 간직한 호국의 전통이 깃들어 있었음은 표현되지 않고 또 기록되지도 않았지만 한국의 역사를 지탱해온, 어떤 저력을 암시해 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대장경(大藏經)을 목각하므로써 글안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알았고 또 왜군이 온 나라를 점거했는데 임금과 옥새만 피난하면 나라가 빼앗기지 않는 것으로 알고 강화나 의주 또는 나주로 피난행만 일삼던 그런 무기력한 호국사상의 전통에 역류하는 이 신선하고 억센 상민의 호국전통은 괄목할만한 것이다.

 

이같이 하여 우리 강토에는 「피 묻은 치마」를 묻은 허총(虛塚)이, 상민이기에 비석도 없이 역사의 누적에 비례해서 퍼졌을 게고, 그 이름 없는 치마무덤이 지닌 유명(幽明)의 저력으로 한국의 역사는 꾸려져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 치마무덤의 虛塚習이 널리 상습화돼 있었다는 증거로 다음과 같은 실례를 들 수가 있다.

 

하동 옥종면(玉宗面) 대곡리(大谷里)에 「삼장(三壯)마을」이 있다. 세 번 장원한 임천 조지서(林川 趙之瑞・湖堂・淸白吏·享書院)의 영예를 기리기 위해서 마을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登位 이전의 연산군의 스승이던 그는 시종 횡포를 말리고 탓하는 바람에 폭군에게는 귀찮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 폭군은 등위하자 당장 이 스승을 맷돌로 갈아 죽여 한강에 던져버렸다. 그의 아내 정(鄭)씨는 그의 피를 치마에 거두어다가 자칫 대해(大海)를 방황할 한 많은 넋을 잡아 둔 비가(悲歌)의 「히로인」이었다.

 

정씨는 열부(烈婦)였다.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 남편의 유체의 극히 일부를 그의 치마자락에 적셔 구제했으며 그로써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 선조 망실의 자손이란 오욕에서 가문을 구제했기 때문이었다. 피묻은 치마를 묻었으므로 이 연산군의 의로운 스승의 무덤도 치마무덤으로 속칭되어 내렸던 것이다.

 

녹도(鹿島) 만호였던 충장 이대원(忠將·李大源)은 변방을 침략한 왜적과 싸워 공을 많이 세웠으므로 싸움은 기피하고 공명만 노렸던 당시 수사 심암(水使・沈巖)과 불화하였다. 죽도(竹島)싸움에서 그가 선봉군을 이끌고 출진하여 대군을 맞아 고전하는데 약속된 심암 지휘의 후진군이 출동하지 않아 전멸할 궁지에 빠졌다.

 

이대원은 그 사경(死境)에서 손가락을 깨어 피를 내고 옷을 찢어 그곳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 종(奴)에게 집으로 전달, 시체는 못 찾을 테니 시총(詩塚)을 만들어 무덤을 삼으라고 시켰다.

 

일모원문도해래(日暮轅門渡海來)

병고세핍차생애(兵孤勢乏此生哀)

군친은의구무보(君親恩義俱無報)

한입수운결불개(恨入愁雲結不開)

 

이 죽도 싸움이 있기 직전 관찰사는 수사 심암의 불의를 알고 만호 이대원을 수시로 승격시켰으나 애석하게도 임명장이 녹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대원은 적에게 잡혀 갖은 악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不屈한 채 참형을 당한 후였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이 젊은 충장의 시총은 지나가는 선비들이 울고 가는 한 순례의 길목이 되었고 그 斷腸의 시는 백성들 간에 유행하여 한말 무렵까지 애송되었던 것이다. 혈총과 시총이 복합된 허총의 한 실례다.

 

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이나 이빨, 손톱, 발톱을 묻는 습속은 널리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생육신(生六臣)의 조여(趙派)의 5대손인 조민도(趙道敏)는 임진왜란 때 종군하면서 아내에게,

 

[나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테니 선영 아래 머리카락으로 허총을 만들라.]

면서 머리를 잘라놓고 떠났다. 그는 이일의 진중에 종군하여 전사했다. 물론 그의 시체는 찾을 질 없어 유언대로 발총(髮塚)을 만들었다고 한다.

 

■ 齒塚

 

고양(高陽) 벽제관 옆산에 이무덤(齒塚)으로 구전된 옛 무덤이 있었다. 서울 북촌에 사는 양반인 평양 조씨(趙氏)의 무덤으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채집되고 있을 뿐이다.

조씨는 경상도의 낙동강변에 조곡(租穀)을 받으러 갔다가 홍수를 만나 휩쓸려 가 버렸다. 이 가문에서는 무덤을 만들 궁리 끝에 그의 이빨을 찾아내기로 하였다. 이때 기습(妓習)으로는 선비가 기생에게 정을 팔면 그 정의 크기를 실증하는 시련으로 이빨을 빼서 사랑하는 기생에게 주어 정표로 삼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기생의 명성은 많은 이빨의 수로 보장받았으며 정표로 받은 이빨들에 벼슬과 이름을 써서 묶어 경대 서랍이나 자개 보갑 속에 소중히 간직하곤 했었다.

 

조씨 가문에서는 조씨가 사랑했던 기생을 찾아가 조씨가 빼준 이빨의 반환을 간청하자 그 기생은 나락 백 섬을 받고 그 이빨을 내주었으므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이빨이요, 또 가장 비싼 정값으로도 소문났었다. 이 무덤이 이같이 형성된 것이었다. 육신의 일부 이외에 필적(筆蹟)을 묻어 허총을 만들기도 했다. 만주지방에서 호(胡)나라의 세력이 대두되자 명(明)나라에서는 이를 협격하고자 조정에 원군을 청했다.

 

이때 종군했던 명장(名將) 김응하(金應河) 휘하의 이유길(李有吉・永柔縣令)이 김응하와 더불어 영예로운 전사를 했다. 죽을 즈음 이유길은 그의 한삼(汗衫) 찢어, 「오월 오일에 죽다(五月五日死)」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애마(愛馬)의 갈기에 매어 두었다. 이 말은 전진(戰陣)을 빠져나와 이유진의 고향까지 찾아갔으며 가족들은 이 이유진의 한삼유필(汗衫遺筆)로 허총을 만들었다. 이 무덤은 파주(坡州) 광탄(廣灘)에 있었으며, 이 충마(忠馬)와 더불어 묻혔으므로 속칭 「돌무덤」으로 구전되고 있다 한다.

 

이밖에 입었던 옷이나 갓, 신발을 묻는 허총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여말의 김주(金澍·禮儀判書·享書院)는 고려가 망하던 공양왕 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러 이조(李朝)가 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망서리다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종에게 조복과 신을 벗어주면서 부인이 죽으면 합장하라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내가 강을 건너가도 몸을 둘 곳이 없다. 압록강까지 왔다가 도로 명나라에 돌아가는 날, 즉 12월 22일을 내 기일(忌日)로 삼고 장사지낸 후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하지 말라. 』

 

그는 그 길로 명나라에 들어가 명의 조정으로부터 상서(尙書) 녹을 받으며 형초(荊楚·湖南·湖北省一帶)에 귀화해 살았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昭縣世子)는 돌아와서 얼마 있지 않아 죽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그를 수행했던 명나라 시녀가 몇 명 있었다. 태자가 죽자 발 붙일 곳이 없던 시녀들 가운데 더러는 귀국길에 올랐다.

 

임진강을 건너가던 두 명의 시녀가 겁간(怯奸)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신발을 벗고 강물에 투신했다. 뜻있는 이들이 이 신발을 묻어 임진강변에 허총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 무덤 앞을 지나다니는 문인들은 반드시 그 이국 여인의 원혼을 낭만적으로 승화시켜 시를 짓곤 했었다.

 

아무것도 없이 신주(神主)만을 묻은 허총의 실례도 발견되고 있다. 사육신인 성삼문이 순절한 뒤에 부인 김씨가 자기 손으로 신주를 써서 종에게 부탁하여 봉사(奉祀)하다가 김씨가 죽은 뒤에, 외손자 박호(朴壕)에게로 물렸는데 박호가 자손이 없으므로 인왕산 기슭에 자신의 신주와 함께 묻도록 유언하고 죽었다.

 

이때 묻은 신주가 2백년 후인 현종(顯宗) 임자년에 호조(戶曹)의 아전 엄의용(嚴義龍)에 의해 우연히 인왕산 비탈 무너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오지그릇을 주웠는데 그 속에 밤나무 신주가 세 개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승지 성삼문의 것이요, 다른 두 개는 참찬(參贊) 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 그 후 성삼문의 신주는 신여(神輿)에 실어 흥주에 사는 외후손들이 받들고 가서 흥주 노은(老隱)골에 있는 성삼문의 옛집에 봉안했다.

 

죽음을 수반시킨 숱한 정변과 전쟁은 많은 시체망실(屍體忘失)을 가져 왔다. 고려 때나 이조 초기만 해도 서민사회에서는 이 시체망실이 그다지 도리나 인격, 가문에 손상을 준다는 법은 없었다. 다만 예절이 성리학을 타고 정착하기 시작한 이조전기의 후반부터 이 선조시체의 망실은 커다란 실절(失節)이요, 가문의 오욕(汚辱)이 되었으므로 허총을 만드는 갖가지 습속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허총은 모두가 비극의 잔재이며 한국사의 가장 아픈 부분에서 죽어있는 증언적인 표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