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조선명인전

7.고구려-연개소문(淵蓋蘇文)

구글서생 2023. 4. 27. 03:27
반응형

고구려-7.연개소문(淵蓋蘇文)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세족(世族)으로서 동부(혹은 서부라고도 하며 「泉男生墓誌」에는 계루부로 보임) 대인의 계통을 받아 고구려 말경에 태어났다(강화 甑峯 위에는 그의 舊基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도 있음).

그의 祖는 자유(子遊)요 부는 태조(太祚)니 모두 막리지(莫離支 ; 병부상서와 중서령의 직책을 겸한 것)의 位에 올라 군국의 권병(權柄)을 쥐었었다.

개소문은 천자(天資)가 총명신무(聰明神武)하여 그의 영명은 15세 때부터 세간에 들렸던 것으로서 부친의 뒤를 받아 대인(大人)의 위를 계승할 때에 국인은 그의 지나친 성격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여 제27대 영류왕 25년(642)경에 유명한 고구려 장성(長城 ; 당에 방비키 위한 것이니 동북으로는 부여성으로부터 남으로 발해안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에 달하는 대장성임) 축조의 감독관이 되어 국방시설에 당하였으며, 이로부터 그의 두각은 점점 나타나 독재적 地盤을 다듬기에 이르렀다.

 

원래 非常時에 비상한 역량을 발휘하는 데에는 독재자의 출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정세를 살펴보면 영류왕 시대는 실로 고구려의 비상시이었으니, 지나에 있어서는 수(隋)가 거꾸러지고 신흥의 당이 나타나 虎視眈眈의 위세를 보였으며, 신라에는 진평, 선덕 양왕시대에 당하였던 것으로서 바야흐로 국세가 발전하려고 하였고, 그 위에 김춘추, 김유신 등의 활동으로 인하여 나·당 양국의 관계가 점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부에는 2, 3차에 恆하여 대규모의 수구(隋寇)를 격퇴한 뒤인 만큼 전후의 경영은 또한 범수(凡手)의 감당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내외의 정세는 위대한 힘의 출현을 필요로하여 위걸(偉傑) 개소문이 드디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소문은 그의 위세가 굳어짐을 따라 점점 위맹무쌍(威猛無雙)한 수완을 휘두르매 여러 대신은 크게 두려워하여 왕과 밀의하고 그를 베려 하였다. 개소문은 이 일을 탐지하고 드디어 결심을 굳게 하여 짐짓 성남(城南)에 부병(部兵)을 소취(召聚)하여 음식을 갖추어 검열을 같이 행하자 하며, 대신들을 招致하여 놓고 그 자리에서 180여 명을 무찌르고 궐내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弑)하였다.

그리하여 보장왕(영류왕의 조카)을 세운 다음에 스스로 막리지(太大對盧로도 보임)가 되어 군국의 대권을 거머쥐고 독재정치를 시작하였다(642).

 

먼저 독재관으로서의 면모를 몇 가지 들어 보면, 그는 위괴(偉魁)한 체구에 수염이 수미(秀美)하였으며 관대(冠帶)와 복식은 황금으로 꾸민 위에 오도(五刀)를 차고 있었다. 좌우의 사람들도 그의 위모에 눌려 감히 앙시(仰祝)치 못하였으며 출입할 때에는 귀인을 땅에 엎드려 놓고 하마석(下馬石)과 같이 그것을 밟고 말에 승강하며 거리에 나갈 때에는 전위대가 앞서 긴 소리로 행인을 禁斷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외피(畏避)하여 구렁에 몸을 던졌다고 전하니, 그의 풍모와 威姿 내지 氣槪가 어떠하였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개소문의 對外策은 실로 서로는 당(唐)에 당하고 동남으로는 신라를 누르려는 데에 있었으니, 이어서 우리 역사상에 대파란이 권기(捲起)한 것이다.

보장왕 원년에 신라의 구원(대야성에서 신라의 장군 品釋이 백제군에게 패하여 죽었으므로 신라의 김춘추는 백제를 치기 위하여 고구려에게 乞援하였던 것임)을 물리치고 도리어 백제로 더불어 신라의 변성(邊城)을 공취(攻取)하며 다시 신라의 도당요진(渡唐要津)인 당항성(黨項城; 남양만 연안?)을 빼앗아 그의 교통로를 끊으려 하였다.

이에 동남에 편재한 신라는 자주 당에 향하여 구원을 청하기에 이르렀으며 수(隋)를 가름하여 일어난 당으로 보면 고구려는 그의 세구(世仇)일 뿐만 아니라 서로 세불양립(勢不兩立)의 관계를 가진 것이다.

世仇:대대로 내려온 원수.

 

그리하여 정치적 허영심을 유달리 가진 당태종(이세민)은 드디어 고구려를 건드려 보기로 하고 먼저 보장왕 3년에 사농승상(司農丞相) 이현장(里玄獎)을 보내어 여·나(麗羅)의 화해를 권하기에 이르렀다.

 

개소문은 당사(唐使)에게 "우리와 신라와의 원극(怨隙)은 지금에 이르러 생긴 것이 아니다. 隋人이 침입할 때에도 신라는 그 틈을 타 우리의 500리 땅을 빼앗아 갔으니, 우리의 실지(失地)를 돌리지 않는 한 싸움을 그만둘 수는 없다.”라고 하여 섣부른 당의 간섭을 준거(峻拒)하였으며, 또 그 뒤에 국정 탐정의 목적으로 건너온 당사 장엄(蔣嚴)을 구수(拘囚)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한 일도 있었다.

원극(怨隙):원수 사이.

구수(拘囚) : 구속하여 가둠.

 

개소문의 이러한 태도는 당주(唐主)의 자존심을 적지 않게 해하였던 것으로서, 당주의 침략적 야심은 드디어 발동됨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는 褚遂良, 위지경덕(尉遲敬德), 정원도(鄭元鑄; 특히 정원도는 隋煬帝를 따라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경험을 가졌음) 등의 간하는 것을 물리치고, 보장왕 3년(당 정관 18년, 644)에 대군으로써 고구려 친정(親征)을 행하기로 되었으니, 그의 구실은 ‘시군학민(弑君虐民)’, ‘침포인국(侵暴隣國)’을 감행하는 개소문을 응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無名의 사(師)를 일으키려 하매 짐짓 붙인 구실에 불과한 것이니, 고구려의 개소문이 시군포민을 하건 隣國 신라와 싸우건 당 태종에게 무슨 관계가 있어, 그의 국운을 걸고 不測한 외국에 모험적 원정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 있으랴.

그는 漢族을 가름하여 역대의 구원(仇怨)을 갚는 동시에 동방 일대까지도 그의 호령 아래에 넣어 후환을 없이하자는 것이 眞目的이었으니 그는

“지금 천하가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빈공(賓貢)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군사와 전마를 강성하게 기르고 모신(謀臣)들이 이끌어 정벌하게 되면 난리가 바야흐로 시작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짐이 스스로 취해서 후세의 근심거리로 남겨 주지 않으련다.” (편집자 역)라고 솔직히 말한 바도 있었다.

당태종의 이 말은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으로 인하여 천하를 잃게 된 前鑑에서 나온 듯하다.

전감(前鑑): 전례.

 

당주는 먼저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을 선발대로 하여 유(幽)·영(營) 2 도독병과 거란, 해(奚), 말갈(고구려의 叛民으로 북지에 건너가 있던 무리인 듯함) 등 병을 거느리고 요동에 向하게 하고, 동년 11월에 주력을 동원하여 수륙 양로로 고구려에 향할새 장양(張亮)으로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을 삼아, 전함 500艘로써 산동 내주(萊州)를 출발하여 해로로 평양을 향케 하고, 이세적으로 요동(遼東)도행군대총관을 삼아 제군을 유주(幽州;지금의 북경)에 집중한 다음에 요동으로 진격케 하고, 당주는 이적의 뒤를 따라 6군을 친통(親統)하기로 하였다.

익년 4월에 이적 등이 요하를 건너오매 고구려에서는 먼저 수세를 취하여 원래(遠來)의 적을 피폐케 하려는 방침을 세웠던 듯하니, 원래 고구려는 오랫동안 대륙 각족(各族)의 침구를 받았으므로, 먼저 성을 교묘히 지켜 적의 예봉을 피하여 소위 '老師의 策'으로써 적을 疲弊케 한 다음에 기회를 엿보아 공세를 취하던 것은 그의 예가 허다한 것으로서, 수성(守城)을 잘하기로 일찍부터 한족에게 알려진 바이다.

노사(老師):전지에서 군사를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전술.

 

당시 당의 대군은 개모성(蓋牟城;요동성 동북. 지금 봉천·요양의 중간심리하 부근인 듯), 요동성(遼東城 ; 지금의 요양), 백암성(白巖城;요양부근) 등을 순차로 포위하였으나 다대한 희생과 많은 시일을 허비하여 겨우 빼앗게 되었던 것이니, 요동성의 일례를 들면 고구려병은 심호(深濠)에 둘러싸인 견성(堅城)을 굳게 지켜 농성전을 계속하고 그의 원군은 당군의 배후를 견제하였다. 이에 당군은 할 수 없이 심호를 메우고 흙을 쌓아 올려 성을 넘을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적의 뒤를 따르던 당주는 200여 리의 진펄에서 헤매다가 흙을 펴고 다리를 놓아 겨우 건너 요동성 밑에 이르렀더니, 그의 사졸들은 흙을 운반하기에 헐떡이는지라, 그는 마상(馬上)에서 흙일을 도와주었다 하니 그들의 窘狀은 이것으로도 상상할 수가 있는 바이다.

군상(署狀):곤궁한 모양.

 

그들은 다음에 안시성(安市城;봉천성 해성 동남 약 30리 지점에 있는 英城子 부근)으로 달려들게 되었던 것이니, 원래 안시성은 가장 험요한 성지로서 당군으로는 그 성을 빼앗지 못하는 한 동진키도 어려웠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서도 안시성 방호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안시성의 10만 군이 옹성철벽(甕城鐵壁)의 성지를 굳게 지킬 제, 개소문은 다시 북부 욕살(褥薩;도독)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고구려 말갈병 15만을 주어 당군의 배후를 충격케 하였다. 고연수 등은 대군으로써 안시성의 40리 지점에까지 진출하매 당주도 고구려 원군의 군용을 보고 크게 공포를 느꼈다 한다. 이에 당주는 정면충돌을 피하고 깊은 곳으로 고연수 등을 끌어들여 요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주는 고구려군을 깊은 곳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사자를 고연수 등에게 보내어

“개소문이 시군(君)을 하였으므로 응징코자 온 것이요, 교전하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

라고 譎計로써 그를 속이고 전비를 게을리하게 만든 다음에 갑자기 사면으로부터 습격하여 고연수 등을 항복하게 하였다.

휼계(譎計): 간사하고 능청스러운 꾀.

고구려 원군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당주는 이와 같은 의외의 승리에 놀라고 반가와서 '이것은 하늘이 도우신 바라' 하며 말에서 내려 하늘께 재배하고 고연수를 격파할 때에 그가 올랐던 산을 주필산이라 이름하여 승리를 갈망하던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였다.

 

어쨌든 고연수의 패항은 고구려에 자못 적지 아니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개소문은 다시 당을 견제키 위해 설연타(薛延陀; 터키족의 일종으로서 당시 알타이 서남 麓에 근거를 두었음)가한(可汗;왕의 호칭) 진주(眞珠)를 후리(厚利)로써 달래어 당의 배후를 충격케 하려고 노력하였으며(진주는 당의 위세에 눌려 움직이지 아니하였으나), 간첩을 놓아 당의 군정을 탐사하는 등 갖은 방법을 시험하고 있었다.

당군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안시성을 공취하는 것이 선결문제이므로 더욱 안시성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당군의 공격이 심할수록 안시성주는 險要한 성지와 정예의 무리로써 방비를 더욱 굳게 하며 때로는 성을 넘어 당군을 초격(抄擊)하기도 하고, 당주의 旗蓋가 나타나면 성에 올라 기세를 올려 적을 격분케 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안시성은 보통방법으로는 빼앗을 가망이 없게 되매, 당군측은 더욱 낭패하여 혹은 안시성 공격을 그만두고 모험을 하고라도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직충(直衝)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게 되었다.

 

당주는 끝끝내 안시성을 빼앗으려 하여 성의 동남우(東南隅)에 토산(土山)을 쌓아 성을 넘으려는 묘안을 내게 되었다. 그러나 성중에서도 이에 응하여 성을 높이매 날로 6, 7차의 교전이 일어났으며 당에서는 충차(衝車) 砲石으로써 누첩(樓堞)을 무너뜨리나, 성중에서는 무너지는 대로 목책을 세워 방어하였다. 이통에 토산 축조의 임(任)에 당하였던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발을 상하게 되매 당주는 친히 침까지 놓았던 것이다. 당군은 주야로 쉬지 아니하고 60일 동안에 50만 명을 들여 토산을 쌓아 올리고 산정에까지 5조(五條)의 길을 만들었던 것이니 토산은 성보다 오히려 수 장(丈)이나 높아 성중을 굽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토산이 무너지며 성의 일각이 쓰러질 때, 성중의 수백 군은 그 틈으로 기어올라 산상에 둔거(屯據)하던 당군을 무찌르고 토산을 탈거(奪據)하니 당군은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이 되었다.

 

그 위에 때는 9월이라 한기가 일찍 닥쳐오며 풀은 마르고 물을 얼어 사마(土馬)가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되고 식량도 거의 다한지라. 여기에서는 아무리 웅심(雄心)에 불타고 있던 당주라도 퇴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군을 몰아 요하를 건너갈 때 요동 진펄이 앞을 막아 군마가 통할 수가 없었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만인을 이끌고 풀을 베어 길을 내며 깊은 곳에는 수레를 박아 다리를 만들새 당주가 친히 섶을 마초(馬鞘)에 매어 나르게 되었으며 10월에 발착수(渤錯水)를 건널 때는 폭풍과 맹설(猛雪)에 거꾸러지는 자가 많았다.

 

이 원정에 당군은 치명적 손해를 받았으니 馬匹만 하여도 10에 7, 8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실패를 맛본 당주는 못내 후회하여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라고 탄식까지 하였다.

 

처음에 당주가 원정차로 정주(定州 ; 하북성 정현)를 떠날 때 그의 태자에게 자기가 입은 褐袍를 가리키며

“너를 만날 때를 기다려 이 옷을 갈아 입으리라.”

라고 하였더니 그는 할 수 없이 요동에서 성서(盛暑)를 겪고 가을에 걸치게 되매 옷이 해져 남루하였다. 그러나 폐의(弊衣)를 입고 있는 사졸을 생각하여 혼자서 새 옷을 갈아입기도 어려웠던 것으로서 임투관(臨渝關)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태자의 진의(進衣)를 받았다는 일화까지 있다.

 

이는 모두 당주가 고구려 정벌에 얼마나 열중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재료이거니와, 원래 당 태종의 원정에 관한 당측의 기록은 윤색과 秘諱가 많은 것으로 정평이 있는 바이며 우리 측의 사료는 인멸되어 천고의 명장인 안시성주의 이름조차 전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서 [안시성주를 梁(楊으로도 씀)萬春이라 한 것은 宋俊吉의 「經筵日記」에 의하면 “윤근수가 일찌기 중국에 건너갔다가 듣고 기록한 것이라” 하였으나 윤근수가 알게 된 근거는 어떠한 것인지 알 길이 없음] 「삼국사기」 등의 이에 대한 기사도 거의 저들의 사승(史乘)을 그대로 이끈 것에 불과하여 사실의 원형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안시성을 칠 때 당주는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상하였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이나 당시 사적(史籍)에는 나타나 보이지 아니한다. 이것은 지나 사가의 필법으로 보아 괴이히 여길 것이 아니니 중화의 천자가 외이(外夷)의 화살에 맞았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과 국가의 권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것으로서, 송 태종이 거란에게 패하여 다리에 두 화살을 맞았다는 것도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않는 바이니, 이런 유의 비휘는 그들의 필례(筆例)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에 있어 당 태종이 과연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였는지 아니하였는지는 적확히 알 길이 없으나, 다만 그가 敗歸하는 도상에 옹(癰)으로 인하여 보련(步輦)을 타게 되었으며 태자가 옹을 빨기까지 하였다는 기사로 보면 그가 고구려원정에 창상(創傷)을 입었던 것만은 사실과 같이도 생각되는 바이다.

(): 큰 종기.

步輦:가마.

창상(創傷): , 총검, 칼날에 다친 상처.

 

이같이 당 태종을 물리친 개소문의 기개는 자못 헌앙(軒昂)하여 더욱 거오(居傲)한 태도로 당에 대하여 항상 변극(邊隙)을 엿보고 있었다.

헌앙(軒昂):풍채와 의기가 당당하고 너그러워 인색치 않음.

가뜩이나 忿恨을 품고 雪恥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당주는 또다시 고구려 원정을 꾀하여 보장왕 6년(당 정관 21년) 3월에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로 청구(靑丘)도행군대총관을 삼아 산동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진격케 하고 이적은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육로로 침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맹렬한 배성전(背城戰)으로 인하여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그 익년에 다시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설만철(薛萬徹)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군으로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압록강에 들어와 박작성을 침노하매 고구려에서는 3만여 군으로써 부원(赴援)케 하였다. 그리하여 싸움이 오래 끌리고 또 당장(唐將) 사이에도 불화가 생겨 흐지부지 물러가고 말았다.

 

이같이 고구려 원정이 실패를 거듭하매 당주는 더욱 분만(憤懣)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또다시 그 익년을 기하여 30만 대군으로써 제4차의 대원정을 계획하고 劍南지방에 명을 내려 대선(大船)을 짓게 할새 파촉(巴蜀)에서까지 물자를 징발하였으므로 조족13) 의 반란이 일어난 사실도 있었다.

조족:서남 오랑캐 족속.

이에 방현령(方玄齡) 같은 사람은 임종하면서도 표를 올려 ‘안으로 양제를 위하여 雪恥하고 밖으로 신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려는’ 태종의 어리석음을 풍간(諷諫)하였고, 서원용(徐元容)도 위험성을 지적하여 말렸다. 그러나 당주는 착착 전비를 정돈하더니 익년 5월에 그의 사거(死去)로 말미암아 원정 준비도 파하게 되고 말았다.

 

당태종은 그의 父 高祖를 내세우고 먼저 수(隋)를 가름하여 지나를 차지한 다음에 돌궐과 철륵(鐵勒) 제부(諸部)며 토번(吐蕃), 고창(高昌) 등 서북 서남의 여러 강족(强族)을 경략하여 미증유의 세력을 떨쳐 지나 제왕 중에도 가장 뛰어난 영주이었다. 이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본래 그의 침략적 야심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표면으로는 개소문을 상대하고 싸운 것이며, 사실에 있어서 개소문이 당시 독재자로서 3번에 恆하여 당군을 물리쳐 당시 소향무적(所向無敵)에 천하를 호령하던 당태종으로 하여금 종생의 실패를 맛보게 한 것이니, 일찌기 송의 신종(神宗)이 왕안석(王安石)에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쳐 이기지 못한 것은 어떤 까닭이냐?” 하매 왕안석이 “개소문은 비상인(非常人)이라”고 대답한 것은 정곡을 맞춘 말이라 할 것이다.

 

당 태종의 야망을 꺾어 버린 개소문은 보장왕 12년(당 고종 永 4년)에 이르러는 안고(安固)를 보내어 고구려 말갈병으로써 거란을 쳤다. 이 싸움에 고구려에서는 자못 이(利)를 失하였으나 특히 거란을 치게 된 것은 당시 거란이 당에 복속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던 까닭이다.

 

그리고 때로는 동남에 향하여 백제로 더불어 신라를 쳐 그의 북경(北境) 30여 성을 攻取하였으므로 신라 무열왕은 당에 향하여 자주 구원을 빌기에 이르렀다. 이에서 당고종은 국가의 위협을 제거하고 선대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드디어 보장왕 14년에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을 출정케 하였다.

 

그들은 귀단수에서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신성(新城; 봉천 부근)부근에 이르렀으나 고구려군은 신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매 당군은 할 수 없이 외곽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었다. 그 다음 동 17년 6월에 적봉진(赤峰鎭) 싸움이 있었고 그 익년 11월에 고구려의 온사문(溫沙門)과 당의 설인귀(薛仁貴)와의 사이에 횡산(橫山)의 격전이 있었으며 동 19년 8월에 나·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공멸한 뒤에 12월에 이르러 당은 다시 글필하력(契芯何力), 소정방, 유백영(劉伯英), 정명진 등으로 고구려를 침공케 하다가 그 익년 4월에는 다시 진영을 고쳐 임아상(任雅相), 글필하력, 소정방, 소사업(蕭嗣業) 등이 여러 호병(胡兵)까지 규합하여 35군을 수륙으로 나누어 병진해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정방은 패강(대동강)에서 고구려병과 싸워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은 다음에 평양성을 포위하는 체세를 취하매 개소문은 도성을 중심으로 하여 당의 수륙 대군에 당하는 동시에, 타면(他面)에 있어서는 당시 신라가 당에 호응하여 고구려의 배후를 엿보므로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위(攻圍)하여 그의 양도(糧道)를 끊어 신라를 견제하였으며, 다시 그의 장자 남생(男生)에게 정병 수만을 주어 압록강을 지키게 하여 얼마동안 당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이와 같이 전황이 지리하게 됨을 따라 당에서는 드디어 그의 군을 소환하더니 익년에 들어 또다시 침입하는지라. 이에 개소문이 분기하여 당의 옥저(沃沮) 도총관 방효태(龐孝泰)를 사수(蛇水)에서 요격하여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인 이하 전군을 섬멸하였고 평양으로 진격하던 소정방을 물리쳐 당고종의 침략적 야심도 마침내 꺾어 버리고 말았다.

 

이상으로 개소문의 빛나는 무공의 대략을 적었거니와 개소문이 집권하던 때는 지나에서는 미증유의 대제국인 당이 나타나 태종, 고종을 중심으로 방현령, 장손무기, 이적, 소정방 등 다사제제(多士濟濟)의 문신 무장이 있었으며, 신라에도 김춘추, 김유신 등 일류 인물들이 출현하여 勃興의 기세가 바야흐로 오르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중간에 처하여 몇 차례나 당의 침구를 물리쳐 태종, 고종의 미몽을 깨뜨리는 동시에 신라를 단연히 압박하여 그 북경의 여러 요성을 빼앗는 등 나·당 양국 사이에서 국위를 떨치게 된 것은 전혀 개소문의 웅도대략(雄圖大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오인(吾人)의 의혹을 끌던 것은 고구려의 여국(與國)인 백제가 나·당의 연합세력에 멸망될 때 고구려의 태도이다. 원래 당이 신라를 도와 백제에 손을 댄 것은 그의 세수(世讐)요 강적인 고구려 정벌의 전제였으니, 이는 “주상께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면 먼저 백제를 쳐 없애시오(主上欲吞高麗 先誅百濟)”라 한 유인궤(劉仁軌)의 말을 빌 것도 없이 명백한 일이다. 이러한 사정을 개소문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거늘 고구려의 활동이 사상(史上)에 나타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물론 나·당 양국이 백제를 합(合)할 때에 먼저 고구려를 견제하였을 것도 넉넉히 추상할 수가 있으나 백제를 고립상태에 두어 나·당 양국으로 하여금 쉽사리 성공케 하여 마침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화를 입게 된 것은 아마도 개소문의 한 가지 遺算이라 할지니, 이것이 역시 개소문의 경륜에 있어 백규(白圭)의 일점이 아닐런가 한다.

유산(遺算):잘못된 계산.

백규(白圭)一點:옥의 티.

 

개소문은 국방시설과 정교(政敎) 방면에 있어서도 크나큰 자취를 남긴 바가 있다. 전거(前擧) 고구려의 대장성은 실로 그의 지획(指劃)하에 완성된 것이며 도교(道敎)도 개소문으로 인하여 공연(公然)히 전파케 된 것이니 (전에도 부분적으로 소개가 되었으나) 그는 ‘유·불·도(儒佛道) 3교는 정족(鼎足)과 같은 것'이라 하여 보장왕 3년에 당으로부터 구체적으로 도교를 채입(採入)하여 교화에 이용하던 것으로 보면 정교에 관한 식견이 또한 탁월하였음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보장왕 25년(666)에 개소문이 훙거(薨去)하매 그의 3자 남생(男生), 남건(南建), 남산(南産) 사이에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암우불초(暗愚不肖)한 남생은 국내성 등 6성으로써 숙적인 당에 반부(叛附)한 다음에 당군의 향도가 되어 보장왕 27년에 드디어 본국을 엎어버렸던 것이니 이로 보면 고구려를 멸한 것은 당이 아니라 실로 남생이었다. 기개가 일세를 덮고 국위를 사린에 빛내던 개소문의 영이 있다면 어찌 지하에서나마 그의 눈이 감겼으랴.

 

끝으로 개소문의 성명에 관하여 몇 가지 참고재료를 들까 한다. 개소문의 성이 연(淵)이었음은 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천(泉)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는 거의 전부가 당서(唐書)에 의거한 것으로서, 당에서는 고조 李淵의 이름을 忌諱하여 연(淵)을 천(泉) 또는 전(錢)으로 고쳐 쓴 것이다.

개소문은 또 개금(蓋金)으로도 쓰여 있으나 개금의 금(金)은 소문의 의역인 듯하다. 다시 개소문의 위명(威名)은 일본에까지 들리게 되었던 것으로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개금(蓋金) 또는 이리가스미(伊梨柯順彌)로 쓰여 있나니 이리(伊梨)는 '어을(於乙)’ 또는 ‘아리’와 동원(同源)의 말로서 연(淵), 천(泉) 또는 하(河)의 뜻이리라는 설도 있는 바이다. (참고서목 ; 삼국사기, 신구당서, 泉男生墓誌, 자치통감, 일본서기)

 

자유(遊) - 태조(太祚) - 개소문(蓋蘇文) - 남생(男生)

└ 정토(淨土) └ 남건(男)

└ 남산(男産)

 

 
반응형

'한글 文章 > 조선명인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9.백제-계백(階伯)  (0) 2023.04.28
8.고구려-을지문덕(乙支文德)  (1) 2023.04.27
6.고구려-평강공주(平岡公主)  (2) 2023.04.27
5.고구려-이문진(李文眞)  (0) 2023.04.27
4.고구려-王山岳  (0) 2023.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