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집주

맹자집주 고자장구 상 제6장

耽古樓主 2023. 3. 19. 05:40

孟子集注

 

公都子曰:
「告子曰:
『性無善無不善也.』
公都子가 말하였다.
“告子는 ‘性은 함도 없고 不善함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此亦 生之謂性·食色性也之意.
이 또한 生을 性이라 하고, 食色을 性이라 한 뜻이다.

近世蘇氏·胡氏之說蓋如此.
近世에 蘇氏(蘇軾)와 胡氏(胡宏)의 학설이 대체로 이와 같다.

或曰:
『性可以爲善可以爲不善;
是故文武興則民好善幽厲興則民好暴.』
或者는 말합니다.
‘性은 을 행할 수도 있으며 不善을 행할 수도 있으니,
이러한 연고로 文王과 武王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善을 좋아하고,
幽王과 厲王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暴惡함을 좋아한다.’

此卽湍水之說也.
이것은 곧 여울물에 관한 학설이다.

或曰:
『有性善有性不善;
是故以堯爲君而有象以瞽瞍爲父而有舜;
以紂爲兄之子且以爲君而有微子啓·王子比干.』
或者는 말합니다.
‘性이 한 이도 있으며 이 不善한 이도 있으니,
이러한 연고로 임금을 君主로 삼았으되 象이 있었으며瞽瞍를 아버지로 삼았으되 舜임금이 있었으며,
紂王을 의 아들로 삼고 또 君主로 삼았으되微子啓와 王子比干이 있었다.’

韓子性有三品之說蓋如此.
韓子(韓愈)의 性에 (上中下의) 三品이 있다는 학설이 대개 이와 같다.

按此文,
則微子·比干皆紂之叔父, 而書稱微子爲商王元子, 疑此或有誤字.
이 글을 상고해보면
微子와 比干이 모두 紂王의 叔父로되, 書經의 (微子之命)에는 微子는 商王의 元子하고 칭했으니, 의심컨대 여기에 혹 誤字가 있는 듯하다.

今曰
『性善』 ,
然則彼皆非與?」
지금 선생님께서
‘性이 善하다.’라고 말씀하시니그렇다면 저들은 틀린 것입니까?”

孟子曰:
「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乃所謂善也.
孟子가 말하였다.
그 타고난 才質인 情은 선하다고 할 수 있으니이것이 내가 이른바 선하다는 것이네.

乃若, 發語辭.
乃若은 發語辭이다.

情者, 性之動也.
情은 性이 發動한 것이다.

人之情, 本但可以爲善而不可以爲惡, 則性之本善可知矣.
사람의 情은 본래 다만 善이라 할 수 있고 惡이라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性이 본래 선함을 알 수 있다.

若夫爲不善非才之罪也.
不善을 하는 것은 타고난 才質의 罪가 아니다.

, 猶材質, 人之能也.
才는 材質과 같으니, 사람의 能함이다.

人有是性, 則有是才, 性旣善則才亦善.
사람이 이 性을 가지고 있으면, 이 材質을 가지고 있으니, 性이 善하다면 材質 또한 善하다.

人之爲不善, 乃物欲陷溺而然, 非其才之罪也.
사람들이 不善을 행함은 바로 物欲에 빠져서 그러한 것이니, 材質의 罪가 아니다.

惻隱之心人皆有之;
羞惡之心人皆有之;
恭敬之心人皆有之;
是非之心人皆有之.
惻隱之心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으며,
羞惡之心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으며,
恭敬之心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으며,
是非之心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다.

惻隱之心仁也;
羞惡之心義也;
恭敬之心禮也;
是非之心智也.
惻隱之心은 仁이요,
羞惡之心은 義요,
恭敬之心은 禮요,
是非之心은 智이다.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
智가 밖으로부터 나를 녹아 들어오는 것이 아니요나에게 고유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故曰:
『求則得之舍則失之.』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였다.
‘求하면 얻고버리면 잃는다.’

或相倍蓰而無算者不能盡其才者也.
혹은 (善惡의)거리가 서로 倍가 되고 다섯 배가 되어 계산할 수 없는 것은그 材質을 극진히 못했기 때문이다.

恭者, 敬之發於外者也; 敬者, 恭之主於中者也.
恭은 敬이 外貌에 드러난 것이요, 敬은 恭을 中心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 以火銷金之名, 自外以至內也.
삭(鑠)은 불로써 쇠를 녹이는 것의 명칭이니, 밖으로부터 안에 이르는 것이다.

, 數也.
算은 셈이다.


四者之心人所固有, 但人自不思而求之耳, 所以善惡相去之遠, 由不思不求而不能擴充以盡其才也.
말하였다.
‘네 가지의 마음은 사람에게 고유한 바이나,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여 구하지 않을 뿐이니, 善惡이 거리가 멀다고 여기고 생각하지도 구하지도 않아서 그 材質을 끝까지 확충하지 못한다.’

前篇言是四者爲仁義禮智之端, 而此不言端者, 彼欲其擴而充之, 此直因用以著其本體, 故言有不同耳.
前篇(公孫丑上) 에서는 이 네 가지가 仁義禮智의 단서가 된다고 말하였으나, 여기에서 단서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저기서는 그것을 확충하고자 하였음이요, 여기에서는 다만 作用(情)으로 인하여 本體(性)를 드러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에 같지 않음이 있을 뿐이다.

詩曰:
『天生蒸民有物有則.
民之秉夷好是懿德.』
詩經에 일렀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일이 있으면 법이 있도다.
사람들이 마음에 떳떳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니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孔子曰:
『爲此詩者其知道乎!
故有物必有則民之秉夷也故好是懿德.』」
孔子가 말하였다.
이 를 지은 사람은 아마도 道를 알 터이다.
그러므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고사람들이 떳떳한 本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詩大雅烝民之篇.
詩는 大雅 蒸民篇이다.

, 詩作烝, 衆也.
蒸은 詩經에 烝으로 되어 있으니 많음이다.

, 事也.
物은 일이다.

, 法也.
則은 法이다.

, 詩作彝, 常也.
夷는 시경에 彝로 되어 있으니, 떳떳함이다.

, 美也.
懿는 아름다움이다.

有物必有法:
如有耳目, 則有聰明之德; 有父子, 則有慈孝之心, 是民所秉執之常性也. 故人之情無不好此懿德者.
有物必有法이란
耳目이 있으면 聰明한 德이 있어야 하고,
父子가 있으면 慈孝의 마음을 지녀야 하니 이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떳떳한 性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情에 이 아름다운 德을 좋아하지 않음이 없다.

以此觀之, 則人性之善可見, 而公都子所問之三說, 皆不辯而自明矣.
이것을 관찰해보면
사람의 性이 善함을 볼 수 있으니, 公都子가 물은 세 가지 학설은 다 변론하지 않아도 自明해진다.

程子曰:
性卽理也, 理則堯舜至於塗人一也.
才禀於氣, 氣有淸濁, 稟其淸者爲賢, 禀其濁者爲愚.
學而知之, 則氣無淸濁, 皆可至於善而復性之本, 湯武身之是也.
孔子所言下愚不移者, 則自暴自棄之人也.
程子가 말하였다.
“性이 곧 理이니, 理는 堯舜으로부터 塗人에 이르기까지 같은 것이다.
才質은 氣에서 받으니 氣에는 淸濁이 있어 淸한 氣로 받은 자는 賢人이 되고, 濁한 氣를 받은 자는 愚人이 된다.
배워서 알면 氣의 淸濁에 관계없이 다 善에 이르러 性의 근본을 회복할 수 있으니, 湯武가 몸으로 실천한 것이 이것이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下愚不移는 自暴自棄하는 사람이니라.’”

又曰:
論性不論氣, 不備; 論氣不論性, 不明, 二之則不是.
또 말하였다.
“性만 논하고 氣를 논하지 않는다면 完備하지 못하고,
氣만 논하고 性을 논하지 않는다면 분명하지 못하니,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옳지 못하다.”

張子曰:
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弗性者焉.
張子가 말하였다.
“形이 있은 뒤에 氣質之性이 있으니, 이를 잘 회복하면 天地의 本性이 보존된다.
그러므로 氣質之性을 君子는 性으로 여기지 않는다.”

愚按: 程子此說才字, 與孟子本文小異.
蓋孟子專指其發於性者言之, 故以爲才無不善;
程子兼指其禀於氣者言之, 則人之才固有昏明强弱之不同矣, 張子所謂氣質之性是也.
내가 살펴보건대, 程子의 才字에 관한 이 설은 孟子의 本文과 조금 다르다.
孟子는 오로지 性에서 發한 것을 가리켜 말하였으므로, 才質에 不善함이 없다고 말하였고,
程子는 기에서 받은 것을 겸하여 가리켜 말하여, 사람의 才質에 본래 昏明과 强弱의 같지 않음이 있다고 하니, 張子가 말한 氣質之性이 이것이다.

二說雖殊, 各有所當, 然以事理考之, 程子爲密.
孟子와 程子의 설이 비록 다르나, 각기 합당한 바가 있다. 그러나 事理로써 상고해보면 程子의 학설이 더욱 치밀하다.

蓋氣質所禀雖有不善, 而不害性之本善; 性雖本善, 而不可以無省察矯揉之功, 學者所當深玩也.
氣質이 받은 바가 비록 不善함이 있으나 性이 본래 善함에는 無妨하고,
性은 비록 본래 선하나 省察하고 矯揉하는 공부가 없어서는 안 되니,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깊이 완미해야 할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