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우세남, 저수량과 함께 당나라 초기의 3대 서예가로 꼽히며, 서성 왕희지와 함께 해서 분야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구성궁예천명〉, 〈몽촌첩〉, 〈장한첩〉 등의 작품이 있으며, 《팔결》, 《삼십육법》 등의 서예 이론서를 저술했다.
구양순은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로 ‘서성(書聖)’이라고 불리는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 이래 해서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그는 중국 서예사상 ‘해서 제일’이라고 불리며 우세남(虞世南), 저수량(楮遂良)과 함께 당나라 초기의 3대 서예가로 꼽힌다.
자는 신본(信本)이며, 557년 남북조 시대 진(陳)나라 담주(潭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나라 광주 자사를 지낸 구양흘(歐陽紇)로 진무제 때 모반에 가담했다 죽임을 당했다.
이후 구양순은 아버지의 친구인 중서령 강총(江總)에게 입양되어 역사와 서예를 배웠다.
그는 아버지가 반역자인데다 원숭이를 연상시키는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으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총명했던 그는 많은 책을 읽었다.
경서(經書, 유교 사상과 교리를 기록한 책들의 총칭)뿐만 아니라 고금의 서적을 모두 읽어 《사기》, 《한서》, 《동관한기》의 3사(三史)에도 정통했다.
그는 수나라 양제 때 태상박사를 지냈고 후에 당 고조가 되는 이연의 상객이 되었다. 617년 이연이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나라를 건국하자 그는 급사중으로 발탁되었으며, 당 태종 때는 태자솔경령과 홍문관 학사 등을 지냈다.
구양순은 우세남과 더불어 홍문관에서 귀족 자제들에게 글씨를 가르쳤다.
처음에 구양순은 왕희지의 서체를 모방했으나 후에 독자적인 서체를 완성해 일가를 이루었다.
해서, 예서, 초서 등에 모두 조예가 깊었는데, 그중 해서가 으뜸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해서 작품의 글씨체는 세로로 길며, 구조가 독특하고, 필력에 힘이 느껴지고, 웅장하며, 엄정한 규범을 따르고 있어 후대 서예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의 서체는 ‘구체(歐体)’라고 불린다.
해서 작품으로는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행서는 〈몽촌첩(夢奠帖)〉과 〈장한첩(張翰帖)〉 등이 유명하다.
구양순은 84세의 고령으로 641년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세상에 전해지는 친필 작품으로는 〈복상첩(蔔商帖)〉, 〈장한첩〉 등이 있으며, 비석에 새긴 글로는 〈구성궁예천명〉, 〈황포탄비〉 등이 있다.
그의 아들 구양통(歐陽通) 또한 서예가로 유명하여, 그들 부자를 ‘대소구양(大小歐陽)’이라고 부른다.
2. 서예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왕(二王), 즉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고 있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서예가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체는 구양순의 서체로서, 자획과 결구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에 순간이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인 특색을 가진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書跡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불후의 명작인데 이 때문에 구양순의 서체를 이른바 '구성궁체' 또는 '구체'(歐體)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3. 구양순의서풍
처음에는 왕희지의 서를 배웠고 후에는 서풍이 변하여 필력이 강하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의 서는 굳세고 늠름하며 잘 정돈된 남파의 특징과 칼로 베고 도끼로 찍은 듯한 굳센 북파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구양순체(歐陽詢體)
중국 당나라 초의 서예가 구양 순의 서체.
자획(字畵)과 결구(結構)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謹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도 잠시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다고 하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였다.
구양 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하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한국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행했었다.
그의 글씨에 대해
'구양순의 만년 필력은 더욱 강하고 굳세며, 집필할 때 붓이 부서질 정도로 굳게 잡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풀 속에서 뱀이 놀라고, 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금강신이 눈을 부릅뜨고, 장군이 칼을 휘두르는 것 같다고 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구양순체의 특징
당대 해서 중에서 가장 세련미를 지니며 귀족적이 서체가 바로 구양순체이다.
구양순은 젊어서 왕희지 부자의 서체를 공부하여 그이 결체는 강건하면서도 세차고 잘 정돈된 형을 취하여 준엄하고 세찬점 즉 붓을 댈때 면도날도 베고 도끼로 찍는 듯한 명쾌한 날카로운 맛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구양순은 한가지 양식에 사로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자국이 둥글둥글 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구양순체의 기본글자의 취하는 형태는 세로로 길고 간가가 일정하며,안진경체의 향세와 달리 배세구조를 취한다.
★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이것은 구양순이 황제(太宗)의 명에 의하여 76세에 서하여 정관 6년에 刻하였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유현[隣遊縣]의 고궁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으로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 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고 황제의 덕을 칭송하여 건립하였다.
銘文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칙명에 의하여 찬(撰)하였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특징으로는 점, 획이 가늘고 직선적이고 자형이 길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점, 획의 간격이 고른 가 운데 변화가 있다.
方筆이 많아 다소 모가 나고 단정하고 근엄하며 背勢에 의해 점, 획이 중심으로 모아지며 긴장감이 돈다.
"근심 걱정이 병이 되니 살갗이 포(脯)와 같이 된 요임금과 같고, 심하기가 발에 굳은살이 박힌 우임금 같네."라는 뜻이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그 탁본은 이미 심하게 마멸되어 그 동안 수 많은 감상자들이 몰려들었던 사실을 말하여 준다.
이와는 별도로 송탁본(宋拓本)의 우수한 서첩(書帖)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4. 구양순의 평가
당대 서예가 장회관(張懷瓘)은 《서론서(書論書)》 〈서단〉에서 그의 서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전서체는 우아하고 정교하며 글씨가 하늘을 나는 듯 절묘하다. 그 모습이 마치 용과 뱀의 전투처럼 얽혀 있고, 운무가 가볍게 감싼 기세에 번개가 치듯 휘몰아치고 있어 신선이 붓을 휘두르면 이와 같을 것이다. 한편 행서는 무기고의 창과 비늘처럼 매섭다. 비록 갈고 다듬어진 것은 오세남보다는 덜하지만, 풍채는 수대의 서예가 지영(智永)보다 엄격하다. 또한 그의 초서는 막힘없이 자유분방하여 이왕(二王,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를 일컬음)을 엿볼 수 있으며, 가히 생동적이다.”
더불어 그는 예서에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는데, 예서 작품으로는 631년에 쓴 〈서주도독방언겸비(徐州都督房彦謙碑)〉가 전해진다.
붓의 쓰임을 연구하여,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고 당찬 기세를 겸비하여 “마치 풀 속에서 뱀을 놀라게 하고, 구름 사이에서 전기가 이는 듯하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눈을 부릅뜬 것 같으며, 장사가 주먹을 휘두르는 듯하다.”라는 평을 받았다.
그의 〈화도사읍선사사리탑명(化度寺邑禪師舍利塔銘)〉, 〈오공공온언박비(虞恭公溫彦博碑)〉, 〈황포탄비(皇甫誕碑)〉 등은 해서 작품이지만 그중 세로, 구부린 선, 삐침, 아래에 삐침이 있는 세로획 등의 필획은 예서로 쓰였다.
우세남은 그의 글씨를 보고 “지필을 고르지 않아도 모두 뜻대로 할 수 있다.”라고 극찬했다.
또한 구양순은 오랫동안 서예를 연구하여, 후학들이 서예를 연습하고 글씨를 배울 수 있도록 자신만의 서법 이론을 만들었는데 이를 ‘구양순 팔법(八法)’이라고 칭한다.
그의 팔법에 따르면 “점(点)은 높은 봉우리에서 돌이 떨어지듯, 삐침 있는 가로획(橫戈)은 긴 하늘의 갓 나온 달처럼, 가로(橫)는 천 리를 가르는 구름처럼, 세로(竪)는 만 년 된 마른 등나무처럼, 삐침 있는 세로(竪戈)는 힘 있는 소나무가 쓰러져 부러져 떨어지다 돌벼랑에 걸린 듯, 꺾는 획(折)은 만 근의 활을 당기듯, 비스듬히 왼쪽으로 내려오는 가로획(丿撇)은 날카로운 칼이 코끼리의 상아를 자르듯, 파임은 한 획에 세 번의 파도가 치는 듯” 쓸 것을 요구했다.
구양순은 《전수결(傳授訣)》, 《용필론(用筆論)》, 《팔결(八訣)》, 《삼십육법(三十六法)》 등의 서예 이론서를 저술했는데, 이것들은 그의 서예 경험이 총결된 것으로 서법과 붓 사용법, 결체, 장법 등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의 서예 이론서들은 서예에 필요한 형식 기교와 미학을 한데 묶은 것으로 중국 서예 이론의 귀중한 유산이다.
구양순은 국내외 서예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고구려 시대에는 특별히 장안으로 특사를 파견해 구양순의 서예를 배워 오게 할 정도였다. 이에 당고조 이연은 감탄하며 “구양순의 명성이 멀리 오랑캐들까지도 알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그들은 구양순의 필적을 보고는 그가 분명히 우람한 체구의 인물일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5.구양순에 관련 된 성어, 일화
능서불택필 能書不擇筆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 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우세남(虞世南) 저수량(遂良) 유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 [不擇筆紙]' 마음대로 글 씨를 쓸 수 있다 [能書] 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에 대하여 후인의 평가가 있다.
-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王肯堂筆塵)
-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 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 書)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 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주현종(周顯宗) 의 "논서(論書)"
아사히신문 題字
일본인은 구양순의 서예를 존경하여, 1879년 〈아사히신문〉을 창간할 때 한자 제목 네 글자를 구양순의 서체로 쓰고 싶어 했다.
일본 내의 유명한 서예가들로 구성된 기획준비위원회는 구양순의 작품 〈종성관기(宗聖觀記)〉를 토대로 ‘조(朝)’, ‘일(日)’, ‘문(聞)’ 세 글자를 골라내 쌍구법(雙鉤法)을 사용해 진본(眞本)을 그려 냈다.
그러나 서첩 속에서 ‘신(新)’ 자를 찾을 수 없어 ‘친(親)’ 자와 ‘석(析)’ 자를 찾아, ‘견(見)’ 자와 ‘목(木)’ 자를 빼내 ‘신(新)’ 자를 만들어 냈다. 이리하여 4개의 풍만하면서도 가늘고 힘 있는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졌다.
3일을 머물며 비석을 연구하다
그는 특히 서예를 좋아하여 거의 탐닉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한 번은 말을 타고 외출한 그가 우연히 서진 시대의 서예가 삭정(索靖)이 쓴 비석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말 위에서 비석을 한참 보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느끼는 바가 있어서 말을 돌려 되돌아왔다.
말에서 내려 반복해서 몇 번을 보고나서야 그곳에서 정교함과 절묘함을 발견했다.
결국 비석 옆에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삭정의 필획을 사흘 밤낮으로 연구한 후 비로소 떠났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삭정의 필체를 통해 붓을 놀리는 취지를 깨달았으며, 이로 인해 더욱 완벽하고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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