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 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있음.
1
고구려가 중흥기에 들어 날로 토경(土境)을 넓히고 국력을 뻗어 바야흐로 큰 통일국가 즉 권력국가로 약진하려 할 즈음에 웅재대략(雄才大略)을 품고 나타난 임금이 곧 이 영락대왕이었다.
영락대왕은 흔히 광개토왕(廣開土王) 또는 호태왕(好太王)이라고 일컫거니와 저 통구평야(通溝平野;강계 만포진 對岸)에 1,500년간 풍찬우학(風餐雨虐)을 무릅쓰고 올연(兀然) 흘립(屹立)한 왕의 훈업을 자랑하는 능비(陵碑)의 발견 이래로 더욱 널리 내외에 알려진 명주(名主)이다.
1) 풍찬우학(風餐雨虐): 바람이 깎고 비가 모질게 함.
2) 올연(然) : 우뚝한 모양.
3) 흘림(屹立): 우뚝하게 섬.
이 비에 의하면 왕의 완전한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되어 있으니 '광개토왕’이나 '호태왕’이라 함은 다 이것의 약칭에 불과하며 또 ‘영락대왕’은 본시 왕의 재위시의 칭호로 왕이 사용하던 연호가 영락이었던 까닭이다(東人이 자국의 연호를 사용한 사례가 역사에 나타남은이것이 최초일 것이다).
왕의 휘(諱)는 담덕(談德)이요, 부는 고국양왕이니 시조 추모왕(鄒牟王;주몽)으로부터 제 19엽(葉)이며 왕의 향수(享壽)의 2배 반을 넘긴 장수왕(98세)의 바로 부친이었다. 왕은 소수림왕 4년(374)에 탄생하여 13세(고국양왕 3년)에 태자에 책립되고 18세에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왕은 재위 불과 22년 향수 겨우 39세라는 너무도 춘추의 부(富)한 몸으로 안가(晏駕)하였지만 그동안 국가를 위하여 세운 공업은 매우 컸었다.
4) 안가(駕):임금이 세상을 떠남. 붕어.
5) 富: 세력이나 기운이 왕성하다
즉 원래 왕은 사람됨이 호매영특(豪邁英特)하고 병(兵)을 부림이 거의 신과 같아 즉위 이래로 남정북벌(南征北伐) 동토서략(東討西略) 간 곳마다 승리를 박(博)하여 가위 전필승 공필취(戰必勝 攻必取)의 상태이었고 따라서 토경의 개척이 광대하여 문자 그대로 광개토왕이었다.
5) 호매영특(豪英特): 호탕하고 영민함.
고구려가 비로소 만주대륙의 완전한 주인공이 되고 또 반도 내의 ‘고조선'의 땅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던 것은 이 대왕의 사업이며, 다음 장수왕이 남진을 꾀하여 백제를 정벌하고 후에 그 판도가 죽령(竹嶺) 내외에까지 이른 것도 이 대왕의 기성사업의 한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왕의 사업도 실상 그 이전 역대 제왕의 유업을 계승하여 거기에 몇 걸음을 내켜 비로소 완전 공고한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이므로 그 공적에 관하여 자세히 서술하기 전에 먼저 고구려란 어떠한 내력과 환경 속에서 자라왔던 나라인가에 대하여 잠깐 말하여 볼 필요가 있다.
2
고구려 추모왕조는 처음 동가강 유역인 졸본(卒本) 또는 홀본(忽本 ; 지금 회인현)에서 일어나 제2대 유리왕 때에 압록강안의 국내(지금 통구)로 옮겨, 거기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나라이지만 나의 연래(年來) 연구한 바에 의하면 양강 유역(압록강 상·중류 및 동가 유역)의 땅은 본시 예맥(濊貊;개마)족이 웅거하던 곳으로 대수(大水)인 압록강에는 대수맥(大水貊), 소수(小水)인 동가강에는 소수맥(小水貊;梁貊)이 있어 각각 부족을 통솔하여 오던 중 한 무제 때에 예군(아마 대수맥의 군장인 듯), 남려(南閭)라는 자가 한에 內屬하매 호전적인 무제는 그곳에 창해군(滄海郡)을 두고 교통로를 개척하다가 노비(勞費)의 과대로 인하여 군을 파하더니 그후 17~8년에 조선을 토멸하여 군현을 개치(開置)함에 미쳐 또한 이곳에도 현도(玄菟)란 1군을 두게 되었다(BC 107).
6) 노비(勞費): 노임.
당시 현도는 압록강안의 고구려현을 치부(治府)로 삼아 예맥족을 다스렸던 것이니 현의 소재는 바로 국내(통구) 그곳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군은 미구에 본토(맥)인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치부를 멀리 혼하(渾河) 상류인 홍경노성(興京老城) 부근으로 옮기는(BC 75) 동시에 동가강 이동의 땅을 방기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에 본토의 맥인들은 각자 부락을 할거하여 거의 무통일 상태로 지내오던 중, 소수맥의 일종인 졸본(홀본)부락이 차차 세력을 얻어 마침내 나라를 세워 수도를 현도의 구 고구려현인 국내에 정하는 동시에 국호도 그 지명에 의하여 고구려라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졸본시대에는 졸본부여 혹은 홀본부여라고 하였을 것이다).
어떻든 고구려는 이곳을 수도로 삼아 국기(國基)를 굳게 하고 사방으로 발전하게 되었거니와 압록강 유역의 땅은 대개 산악이 중첩하고 지미(地味)가 척박하여 근로와 절약에 의하지 아니하면 그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더구나 사린(四隣)에 강적을 가진 고구려로서는 전쟁과 침략으로써 그 진취 발전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7) 지미(味):흙이 메마르고 기름진 상태. 토리(土理).
당시 고구려의 주위에는 실로 무수한 대적이 있었다. 북에는 부여국(扶餘國; 지금 신경·농안 부근 중심)이 있고 서와 서남에는 중국의 군현인 현도(제2현도의 중심은 흥경노성, 제3현도의 중심은 봉천 동부), 요동(遼東;지금의 요양 중심), 낙랑(지금 평안남도), 대방(지금 황해도의 대부분)의 제군이 있고, 동북에는 읍루(挹婁; 장백산 동북), 동남에는 동부여 즉 옥저(沃沮)·예맥(지금 함남 및 강원도 북부) 등이 있어, 늘 이들과 사단(事端)을 일으키게 됨을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환경에 처한 고구려의 국민은 저절로 상무적(尙武的)이요 호용적(好勇的)이며 또 견인불발 백절불굴의 정신의 소유자이었다. 고구려라는 조그만 나라가 착착 사린을 정복하여 한 걸음 두 걸음씩 견실한 발전을 이루게 된 것도 이러한 국민의 기상과 정신에 부(負)한 바가 많았다.
고구려 사위(四圍)의 적 중에 가장 제일 강적은 현도, 요동, 낙랑 등의 중국 군현이었으니 이들은 문화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또 군사상으로 우월한 지위와 조직을 가져 고구려의 서진 남진을 늘 저지하고 방해하던 것이다. 즉 고구려로 하여금 늘 두통을 앓게 하고 그 발전을 지지하게 하여 일진일퇴를 면치 못하던 것은 이들 -- 물중지대(物衆地大)한 중국을 배경으로 한 -- 군현의 존재로 인함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주된 분투와 침략은 항상 이들 군현에 향하여 있었고 따라서 그 발전사의 대부분도 이들과의 끊임없는 충돌 전쟁의 사실로써 채워 있다.
8)물중지대(物衆地大): 생산하는 물건이 많아 번화하고 땅이 넓음.
고구려 제6대 태조왕(太祖王;궁) 때에는 현도, 요동 2군에 대한 침략이 가장 빈삭(頻數)하고 맹렬하여 현도군으로 하여금 지금 홍경 부근에서 봉천 동북쪽으로 퇴각하는 운에 빠지게 하고 또 동으로 옥저·예맥을 아우르고 남으로 살수(薩水;청천강) 유역에까지 진출하여 일시 강성을 치(致)하였거니와 그 후에도 차대왕(7대), 신대왕(8대), 고국천왕(9대), 산상왕(10대)의 영주(英主)들과 명림답부(明臨答夫;신대왕 때 사람), 을파소(고국천왕 및 산상왕 때 사람)와 같은 명상들이 속출하여 안으로 민력(民力)을 기르고 밖으로 2군에 대한 방어와 침략을 게으르게 하지 아니하였다.
9)빈삭(頻數):매우 잦음.
더우기 산상왕 때에는 험(險)을 택하여 국도(國都)를 서로 환도(초산의 대안인 유수림자 부근)에 옮겼다. 그러나 다음 동천왕(11대) 때에 이르러는 요동의 서안평(지금 九連城 부근)을 침략하다가 마침내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 등의 입구(入寇)를 받아 환도가 함락되고 왕이 일시 옥저 방면으로 출분(出奔)하는 등 유사 이래 미증유의 대타격을 입었었다. 이때 옥저·예맥도 그 화를 입어 드디어 위에 항속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이때) 고구려는 거의 멸망지경에 다다랐었으나 다행히 곧 나라를 회복하여 황산(荒散)을 정리하고 종사를 보전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후계 제왕의 노력에 의하여 서천왕(13대) 때에는 동으로 숙신(肅愼; 읍루)을 복속하고 미천왕(15대) 때에는 서로 현도와 서안평을 누차 공략하고 남으로 낙랑과 대방(일부분?)을 엄유(奄有)하여 일층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10) 엄유(奄有) : 남기지 아니하고 다 가짐.
물론 이에는 고구려인의 분투와 노력의 소치도 많았겠지만, 또한 이때 지나대륙에서 위·진(魏晋)의 교체, 진(晋)의 내란 내지 5호(五胡)의 競起로 인하여 동방 군현에 대한 주의의 여력이 넉넉히 미치지 못하였음에도 원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에는 새 강적이 서와 남에 나타났다. 하나는 5호의 하나인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前燕)의 굴기(崛起)이니 현도·요동은 고구려와 다투는 보배가 되었고, 또 하나는 남방 백제국과의 접촉이니, 낙랑·대방이 또한 여·제(麗濟)간의 쟁투하는 구슬(珠)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고국원왕(16대) 12년에는 모용씨의 입구(入寇)로 인하여 또 환도의 분략(焚掠), 국왕의 피난과 내지 미천왕 시(尸)의 발굴, 왕모(王母)의 탈거(奪去) 등 기막힌 화난(禍難)과 치욕을 겪고 만년에는 남으로 백제(근초고왕)의 내침이 있어 평양성 아래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돌아가는 비운에 봉착하였다. 이 모용씨의 입구는 앞서 위장 관구검의 그것과 아울러서 고구려 2대 국난의 하나이며, 또 이 국왕의 전사는 고구려인의 잊지 못할 깊은 원한이었다.
때마침 5호 중의 전진(前秦)이란 강국이 관중에서 일어나 전연 모용씨를 멸하매 고구려는 이와 호의(好誼)를 맺어 소수림왕 2년에는 전진으로부터 불교의 전래가 있었고, 그 후에도 사자와 승려의 왕래가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왕은 부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여 자주 백제와 병(兵)을 교(交)하였다.
동왕 만년에 전진왕 부견이 동진과 비수(肥水; 安徽)에서 자웅을 결하다가 크게 패배한 후로는 북방에 대변동이 일어나, 전연의 일족인 모용수(慕容垂)는 북지(北支)에서 후연을 일으키고, 또 전진은 마침내 후진에게 멸한 바 되니, 고구려는 서(西)로 유일한 우방을 잃고 대신 후연의 새 강적을 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고국양왕 때에는 후연과 현도·요동 2성의 쟁탈전을 행하고 또 남으로는 자주 백제를 침벌하였으나 조득모실(朝得暮失)의 상태가 되어 2성은 도로 후연의 소유에 돌아가고 남비(南鄙)는 또한 백제의 수차 침략을 입었다.
이때야말로 고구려는 일대 위기에 처하여 자칫 잘못하면 西南 兩敵에게 큰 봉욕을 면치 못할 판으로 국운 성쇠에 지대한 관계를 가진 때이었다.
다행히 영락대왕과 같은 영주의 현출이 이즈음에 있었으니 可謂 응기이출(應期而出)한 구국 중흥의 주(主)라고 할 수 있다.
3
영락대왕의 사적에 관하여 전하는 것은 전혀 그 외교 경략과 무훈을 기록한 동왕 능비와 「삼국사기」의 소략한 기사밖에 더 없거니와 능비 그것도 1,500여 년간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자획이 많이 파손되어 잘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더러 있다.
그러나 대왕에 관한 사료로는 이 능비가 유일무이한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나는 능비를 주로 하고 「삼국사기」를 참고하여 다음에 대왕의 사린에 대한 정토경략(征討經略)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보려 한다.
(1) 백제 방면의 정토
고구려·백제의 두 왕실은 본시 조종(祖宗)을 같이한 동족으로 1남 1북에 격재(隔在)하여 처음에는 하등의 충돌이 없더니, 중간에 개재한 낙랑·대방의 땅을 남북으로 서로 침략 잠식하여 지경이 상접함에 미쳐, 비로소 양국간에 충돌이 일어나 일진일퇴 평화를 볼 날이 없었고, 더우기 (위에도 말한)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로는 양국의 관계는 점점 험악하여 불구대천의 구수(仇讐)와 같이 되었다.
영락대왕은 부조(父祖) 이래의 유지를 이어 즉위 익년부터 백제에 대하여 복수적 병과(兵戈)를 교(交)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양국의 경계는 대체로 지금의 예성강 일대에 있었는데 대왕은 즉위 익년(왕의 즉위 연대는 「삼국사기」 고구려기의 것보다 실상 1년을 앞섬) 즉 영락 2년 7월에 친히 병 4만을 이끌고 백제의 북비(北鄙)를 쳐서 석현(石峴;지금 개풍군 북면 청석동 부근) 등 10여 성을 빼매, 제왕(濟王) 진사(辰斯)는 이미 여왕(麗王)의 용병함이 출중함을 듣고 감히 나아가 거전(拒戰)치 못하고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많이 잃었다고 한다.
동년 10월에 대왕은 또 백제의 요진인 관미성(關彌城;혹은 閣彌城)을 쳐서 함락하였다. 성은 사면이 초절(峭絶)하고 해수(海水)로 둘러 있는 험고한 곳이므로 왕은 군을 7도로 나누어 공격 20일 만에 비로소 이를빼앗았다고 한다.
11) 초절(峭絶):심히 험악함.
관미성의 위치는 지금의 어느 곳인지 분명치 못하나 그 지리로 보아 경기만의 교동도(喬桐島)나 강화도 그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해 백제에서는 진사왕이 돌아가고 아신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왕은 북비의 모든 중요한 성진(城鎭)이 고구려의 소유가 된 것을 매우 통석히 여겨 익년에 친구(親舅)인 진무(眞武)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좌장(左將)을 삼아 병 1만을 거느리고 가서 북비 제성의 탈환을 도모케 하였더니 무는 먼저 관미성을 공위(攻圍)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12) 친구(親舅):장인.
그 이듬해인 영락 4년에 백제는 또 장병을 보내어 우회하여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新溪)을 침공하매, 대왕은 친히 정기(精騎) 5천을 이끌고 이를 영격(迎擧)하여 크게 깨뜨린 후, 국남에 7성을 쌓아 백제의 침구를 방비하였다.
이에도 불구하고 다음 영락 5년에 백제 아신(화)왕은 또 좌장 진무를 명하여 고구려를 침벌하여 괴롭게 하거늘, 이에 대왕은 병 7천을 거느리고 패수(여기의 패수는 예성강의 하류)에서 싸워 백제군을 대파하니, 死者가 8천 인이나 되었다고 한다. 제왕은 이 패수의 치(恥)를 설(雪)하려 하여 이해 겨울 11월에 친히 7천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를 재침하려다가 중도에서 대설을 만나 군을 돌이키고 말았다.
이상의 여·제 관계 사실은 대왕의 능비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삼국사기」 고구려기와 백제기에 나타나거니와, 그것이 비에 실리지 아니한 것은 그 비에는 이보다 더 굵직굵직한 사실만을 들어 기재한 所以라고 생각한다.
이 비에 의하면 영락대왕의 백제에 대한 대정토는 정작 익년 영락 6년(396)에 행하였으니, 위의 제 사실은 이 대정토를 유치할 서막적 소충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왕은 즉 이해(백제 아신왕 5년)에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토하여 거의 파죽의 세로 한수 남북의 제 성진을 공파(攻破)할 새, 그 국도인 한성(漢城;광주 고읍인 春宮里 및 남한산성)은 오히려 병을 출(出)하여 거전(拒戰)하거늘 대왕은 이에 아리수(阿利水 : 한강)를 건너 정졸(精卒)을 보내어 그 국성(國城)에 박진하니 제왕 아신은 세의 궁함을 알고 남녀 1천 인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내어 항복하며 맹서하되, 이로부터 길이 노객(奴客;臣服)이 되겠다고 하였다. 대왕은 특히 이를 용서하여 볼모로 제왕의 제(弟) 및 그 대신 10인을 데리고 개선하니 이정벌에 있어 대왕이 공파한 성촌(城村)의 수가 성은 58, 촌은 700에 달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한수 이북의 대부분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고 말았다.
이 전역(戰役)은 고구려에 있어서는 고국원왕 전사 이래 부조(父祖)의 恥를 雪한 큰 복수적 정토로 볼 수 있는 것이거니와, 여기에 관한 기사가 「삼국사기」에 한 줄도 비치지 아니한 것은 유루(遺漏)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대왕 능비에는 백제를 ‘利殘’ 혹은 ‘百殘’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필자가 이미 타처에 발표한 바와 같이 이때 고구려인이 백제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악의로 書稱한 것이니 殘은 賊의 뜻으로 더욱 濟자와 음이 가까운 까닭에 백잔이라 한 것이며, 이잔은 아마 아리수의 적이란 뜻으로 쓴 것 같다).
이때 백제의 고구려에게 받은 타격은 정신상으로나 물질상으로나 대단히 컸으며, 또 국제적으로 매우 고립한 지위에 있었으니, 삼국의 하나요 백제의 인국(隣國)인 신라가 앞서 이미 고구려의 강성함을 알고 이와 호(好)를 맺어 질자(質子)를 보냈던 까닭이다.
13) 질자(質子) : 인질을 말함.
이 나·여(羅麗) 2국의 결호(結好)는 확실히 백제에 대하여 일대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국제적 균형을 구하기 위하여 익년에 멀리 동으로 일본과 우의를 맺는 동시에 태자 전지(腆支)를 질자로 삼아 일본에 보냈었다. 또 백제는 이후 여러 번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적 침벌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대왕 능비에 보면 영락 14년 갑진에 일본군이 해로를 통하여 고구려의 남계를 침입하다가 대왕의 군과 서로 충돌하여 크게 괴멸을 당하였다는 사실이 보이거니와, 이는 아마 이때 일본이 백제와의 밀약 즉 백제의 요청에 의하여 병선을 파견하여 고구려 地界에 침입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떻든 위의 대타격을 받은 백제로서는 독력(獨力)으로 강성한 고구려를 도모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도 빈약하였던 모양이다.
(2) 임나·가라 방면의 출병
조종을 같이한 여· 제 양국 사이에 영토의 침략으로 인하여 갈등을 생(生)한 것과 같이 이때 남한 방면에 있어서도 같은 종족의 신라와 가라 제국 사이에 자주 충돌이 일어났었다.
신라는 나물마립간(356~402) 즉위 이래로 부근의 여러 소부락을 완전히 통합하여 그 국력의 신장이 서(西)로 낙동강 유역의 가라 제국을 차차 압박하게 되매, 가라 제국은 안으로 연맹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밖으로 일본의 무력을 빌어 신라에 당하게 되었다. 가라 제국 중에 우이(牛耳)를 잡던 자는 임나(任那 ; 대가야. 지금의 고령)와 가라(加羅;본가야. 지금의 김해)와 안라(安羅;아라가야. 지금의 함안)의 삼국으로, 이들 제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일찍부터 특수하여 변진(弁辰)의 철, 금은, 직물, 재보(財寶;주옥), 기타 곡물은 왜인의 주요한 무역품이 되었고, 또 왜인의 무력은 이들 제국의 후원이 되었었다.
14) 우이(牛耳)를 잡다: 동맹국의 맹주가 되다.
가라 제국을 돕는 일본군의 신라 침습이 빈삭하고 活刺하매 신라는 북으로 고구려의 힘을 빌어 이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영락왕 9년(399)에 일본군이 신라 국경을 침입하여 성지(城池)를 파궤(破潰)하였을 때 신라(내물왕)는 사자를 고구려에 보내어 급(急)을 고하는 동시에 구원을 간청하였다. 대왕은 이를 낙(諾)하여 익 10년에 보기(步騎)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케 하니, 이에 가라를 돕는 일본군과 신라를 돕는 고구려군과의 충돌을 보게 되었다. 이 충돌에 관한 陵碑의 문자가 간간 결루(缺漏)되어 문리가 통하지 않는 곳도 있지만 그 대의를 따서 보면,
“이때 고구려군이 신라에 이르자 일본군은 퇴각하는지라 그 뒤를 좇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빼앗아 항복을 받았다.”고 하였다. 어떻든 고구려는 이 출정에 의하여 무위(武威)를 멀리 낙동강 유역의 임나·가라 방면에 떨쳤던 것을 알 수 있다.
(3) 후연에 대한 침략과 외교
다시 돌이켜 대왕의 후연에 대한 침략과 외교에 취하여 말하면 후연(後燕)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전연에 대(代)한 고구려의 서린(西隣) 강적으로 ─ 처음에는 중산(中山;直隷 定州)에 도(都)하여─고국양왕 때에 고구려와 요동·현도 2성의 쟁탈전을 행하여 드디어 2성을 소유하였거니와, 영락 8년에 연이 국도를 용성(龍城;지금의 朝陽)에 옮긴 후로는 고구려의 남고(南顧)의 허를 승(乘)하여 동 10년에 고구려의 신성(新城)·남소(南蘇;輝發 유역)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영락대왕은 남방에 대한 후려(後慮)가 적음을 엿보아 이에 서방으로 요동 경략에 종사하여, 영락 12년에는 대왕이 파견한 고구려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 멀리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지금의 廣寧)에 쳐들어가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로 하여금 성을 버리고 달아나게 하였으니 「삼국사기」의 명시는 없으나 고구려의 요동성 점령은 물론 이에 앞섰을 것이요, 또 현도성은 이보다도 더 먼저 고구려에 몰입되었을 것이며, 저 실지(失地) 700리도 이에 전후하여 탈환하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왕은 오히려 영락 14년 11월에 군을 내어 후연을 침략하매, 익년 정월에 후연왕 모용희(慕容熙)는 복수적으로 친히 장병을 거느리고 와서 요동성을 위(圍)하고 익년에 또 군을 진(進)하여 깊이 목저성(木城 ; 지금 興京·撫順 간)에까지 침입하였으나, 공히 성을 빼앗지 못하고 돌아갔었다.
이제야 요하 이동의 땅은 완전 또 영구히 고구려의 소유가 됨에 이르렀거니와, 저 옛날 6국의 연(燕)이 고조선의 땅을 침략하여 요동군을 개치(開置)한 이래 약 6, 7세기 동안 그곳이 외인의 지배 중에 놀다가 다시 후연으로부터 동인(東人)의 손에 옮겨온 것을 회상하여 볼 때, 우리는 한 이상한 느낌에 부딪침을 금치 못하겠다.
대왕 능비에는 이 의의있는 요동 경략에 관한 문자가 통 보이지 않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혹 당시 고구려인의 관념은 요동의 땅이란 거의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 중에 달렸던 것을 취득한 것이 되어, 왕의 이 방면 경략을 그다지 큰 훈업으로 보지 아니하였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대왕의 후연과의 외교에 있어 한 가지 더 말하여 둘 것은 영락 17년에 후연의 신하인 高雲이란 자가 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대신 자립하여 왕이 되매, 익년 18년에 대왕은 사신을 보내어 동종 동족의 의를서(敍)하고, 운도 또한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고구려에 보내어 회사(回謝)하였다는 그것이다.
운의 조(祖)는 고화(高和)이니, 화는 본래 고구려의 지서(支庶)로 일찌기 연에 들어가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예라 하고 행세하더니, 운에 이르러 연왕의 총우(寵遇)를 받아 성을 모용씨라고 사(賜)한 일까지 있었던 터이다. 대왕이 연의 찬립주(簒立主) 고운에 대하여 이와 같이 동종의 의를 펴고 호(好)를 맺으려 한 것은 일종의 정책적 의의를 가진 것일지도 모르나, 어떻든 여기에 또한 대왕의 동족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운은 자립한 지 불과 수년에 그 신하인 풍발(馮跋)에게 또한 찬시(纂弑)되고 말았었다.
(4) 동부여 경략
남고(南顧)·서고(西顧)의 후려를 제(除)한 대왕은 다시 동으로 동부여에 향하여 경력의 보(步)를 내키었다. 동부여는 지금의 함경남도 및 강원도 북부에 있던 옥저, 예맥을 이름이니 이를 또한 동예(東濊)라고도 한다.
나의 年來 연구에 의하면 동부여는 즉 고조선시대의 임둔국(臨屯國)으로 위만조선에 속하였다가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동방 4군을 설치함에 미쳐서 그중의 1군(임둔군)이 되었고, 그 후 25년에 4군의 폐합이 있어 임둔군을 폐하여 현도군(고구려 방면)에 속하고 진번군(지금의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은 폐하여 낙랑군(청천강 이남, 자비령 이북)에 속하더니, 또 그후 7, 8년에 현도군이 본토인의 침공에 의하여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겨 가매 소속을 잃은 임둔(옥저, 예맥)은 낙랑군에 환속하여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의 소관하에 있다가, 후한 광무제 때에 도위를 파한 후로는 부락이 각각 자립하여 옥저(함흥), 불내(不耐;영흥)등의 유력한 소국들이 나타났었다.
고구려 태조왕(6대) 때에 이들을 복속하여 이래 고구려의 법속에 종(從)하고 조세를 공납하더니, 동천왕(11대) 때에 魏의 入寇의 결과로 동부여의 땅은 고구려의 통치를 떠나 위(낙랑)에 예속하여 반독립적 후국(侯國)으로 화하였었다.
이후 고구려는 항상 서남 양 방면에 다사다단하여 하가(何暇)에 이 방면을 돌아다볼 겨를이 없더니, 영락 20년(410)에 이르러 비로소 대왕의 경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대왕 능비에 동부여 정벌의 이유에 “동부여는 본래 동명성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東扶餘 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라고 하였는데, 그중 ‘추모왕 속민’의 구는 과장의 말이나 ‘중반불공’은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왕은 즉 이해 몸소 군을 거느리고 동부여를 정벌하여 그 국성(不耐)에 다다르매, 성은 곧 무저항으로 귀복하였으며, 또 기타 미구루(味仇婁;즉 買溝婁니 지금의 문천?)등 여러 부락의 수장으로 자진하여 내항(來降)하는 자도 많았다. 이 경략의 결과로 철령(鐵嶺;安邊) 이북의 동부여의 땅은 완전히 고구려의 판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때 그 영토가 동으로 동해에 극(極)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5) 비려(碑麗) 정벌 및 帛愼 초략(鈔略)
15)帛: 판각된 글자가 마멸되어 확실히 알 수 없는 글자임.
비려는 즉 「진서(晋書)」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로 2백 일을 갈 수 있으며 영내의 호수(戶數)는 2만이다(稗離國在肅愼西北馬行可二百日 領戶二萬)”라 한 비리국 그것으로, 여기 소위 ‘마행가이백일’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그 위치가 대체로 숙신(읍루)의 서북이라고 하면 지금의 송화강 유역인 빈강성(濱江省)내 (특히 哈爾濱 부근)에 있었던 것이라고 추찰되거니와, 대왕의 무보(武步)는 일찍이 이곳에까지 내키었었다.
즉 대왕은 영락 5년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부락 6, 7백을 공파(攻破)하고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획득함이 부지기수라고 하였는데, 여기 주의할 것은 염수란 지명에 대하여다. 이 염수의 위치를 알면 곧 비려의 그것을 알게 되며, 또한 대왕 경략의 지역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고찰한 바에 의하면 염수는 동 대왕비문에 보이는 엄리대수(奄利大水)의 엄리와 같은 뜻으로, 엄리가 보통 학자의 설대로 곧 대수(大水 : 엄내)의 뜻이라고 하면 염수도 역시 대수를 의미한 말이 분명한 듯하며, 그리고 보면 이를 지금의 송화강에 비정(比定)하는 편이 유리, 타당함을 깨닫게 된다(한대의 소위 鹽離水란 것은 나는 연래 주장하여 오기를 지금의 압록강에 틀림없다고 하지만 이 염리도 실상 위의 염수, 엄리와 마찬가지의 '엄내' 즉 대수의 뜻일지니 이 수명은 일처에만 한하였던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대수면 그와 같이 명명하였던 모양이다. 단 비문의 엄리 대수는 나는 송화강도 아니요, 압록강 본류도 아니요, 압록의 대지류인 동가강을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염수를 송화강에 비정한다면 위의 비려(비리)를 지금의 빈강성 안에서 구하는 나의 견해는 더욱 유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대왕의 이 방면 경략에 의하여 고구려의 북계가 북으로 송화강 유역에 달하였던 것이라고 단정하여 주저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대왕의 帛愼 경략이니, 신이란 대체 어디를 지칭한 칭호일까?
帛은 대왕비문에 나타나는 고예(古隷)로, 혹 학자는 이를 숙(肅)자의 결획으로 보아 帛愼을 바로 숙신이라고 해(解)한 이도 있는데, 나도 그 결론에는 이의가 없지만 帛자를 ‘숙’으로 보는 데는 속히 좇고 싶지 않다.
나는 帛을 차라리 식(息)자로 보는 편이 자형(字形)에 훨씬 가까운 양으로 생각되는 동시에 숙신의 이역(異譯)인 식신(息愼) 그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식신은 혹은 직신(稷愼)이라고도 서칭(書稱)하거니와, 이것이 다 숙신의 異譯임은 학자간에 별로 이론이 없는 터이다.
그러면 이때의 소위 식신 즉 숙신은 지금은 어느 곳을 이름이었을까. 「위지(魏志)」 동이전에 보면 읍루는 “고지숙신씨지국(古之肅愼氏之國)”이라 하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도 그와 같이 보이니, 한·위(漢魏)시대의 중국인은 지금의 영고탑(寧古塔)으로부터 동북 연해주에 걸쳤던 읍루를 고전의 소위 숙신씨의 후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읍루가 과연 고전의 숙신씨일까에 대하여 혹 학자는 의심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고구려인의 문자 중에는 왕왕 한·위인(漢魏人)의 투습(套習)을 배워 쓰는 일이 많은즉, 여기 소위 식신도 한·위인의 지칭과 같이 읍루를 의미한 것만은 의심 없을 것이다.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숙신은 서천왕(13대) 때에 이미 고구려에 복속한 일이 있었지만, 그중의 어떤 부락들은 아직 고구려의 치화(治化) 밖에 있었던 까닭으로 대왕은 이에 이 방면을 온전히 개척하기 위하여 영락 8년에 군대를 파송하여 미복속의 부락들을 토벌하여 막신라성(莫新羅城)·가대라곡(加大羅谷 ; 미상)의 남녀 300여 인을 초략(鈔略)하매, 그들은 이로부터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하여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그런즉 이때 고구려의 세력은 동북으로 지금의 연해주 방면에 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대왕의 여러 방면 경략에 있어 공파한 성의 수는 64, 촌의 수는 모두 1,400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수효에 대하여는 미심(未審)한 점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백제 정토시에 공파한 성촌의 수만으로도 우선 58 성 700 촌에 달하였던 까닭이다. 여기에 타처의 것 ――즉 임나, 가라, 요동, 비려, 식신, 동부여 방면의 모든 것-- 을 가하여 총계한다면 이 어찌 64 성 1,400 촌에만 그칠 수 있으랴(실제는 반드시 이 이상의 훨씬 많은 수효를 나타냈을 것이다). 생각컨대 비문의 숫자는 필경 중요한 성촌의 것만을 擧示한 바에 불과할 것이다.
어떻든 대왕 일생의 무훈은 이와 같이 혁혁하여, 동서남북 四隣에 향하여 兵을 부림이 실로 신과 같았고 문자 그대로 ‘전필승 공필취(戰必勝 攻必取)’였다. 그리하여 그 무위(武威)는 서로 요하를 건너 광령에까지 이르고 남으로 멀리 낙동강 유역까지 미쳤었다.
그러나 이 두 방면에의 진출은 일시적 침략 혹은 구원적 출정으로 말미암아 마치 일종의 폭풍우와 같이 홀연히 달려갔다 홀연히 돌아온 것이므로 물론 그때 판도가 이와 같이 요서 요남에까지 미쳤다는 말은 아니다.
정작 그 완전히 경략한 지역의 사지(四至)는 남으로는 한강 유역에 이르고,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송화강, 동으로는 일본해에 극하였으니, 고구려의 세력이 이때 이만치 강대하였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에도 가장 의의있고 중요한 것은 서로 요하 이동의 땅을 완전히 경략하여 고조선의─연에게 잃었던 -서방 천리의 땅을 비로소 회복하게 되고 또 남으로 백제의 북비(北鄙), 동으로 동부여를 정복하여 옛날 위씨조선의 땅을 완전히 회복하게 된 그 사실이니 이는 특히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바이다.
만일 천(天)이 대왕의 수(壽;39세)에 반 배만 더 가하였더라도 그 얼마나 더 위대한 진취와 발전을 보았을는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왕의 외교 경략에 관한 훈업은 대개 상술함과 같거니와, 그 내치(內治)에 관하여는 이를 자세히 徵考할 만한 문헌이 絶乏된 것을 깊이 유감으로 여긴다.
다만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대왕 즉위 2년에 평양에 9사(九寺)를 개창(開創)하였다는 것과 16년에 궁궐을 증수하였다는 것뿐으로, 하등의 더 자세한 기사를 전하여 주지 아니하고, 비문에는 조선왕(祖先王) 능묘에 비로소 석비(石碑)를 세우고 수묘연호(守墓烟戶)로 하여금 조금도 차착(差錯)케 아니하였다는 것밖에는 더 내치에 관한 기재가 보이지 아니한다.
16) 수묘연호(守墓烟戶):왕릉을 지키는 것을 책임맡은 특별 가호를 지칭.
「삼국사기」의 有漏와 疏略은 말할 것도 없지만 대왕 일생의 偉績을 적는 능비에 있어, 그 성행(性行)이라든지 내치에 관하여 도무지 기재의 붓을 궐략한 것은 실로 큰 유감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이는 도리어 고구려인의 소방고박(疎放古樸)한 필법의 所致일지도 모르나 여기에 또한 고구려인의 무훈을 더 중히 여기던 심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대왕의 능비는 당시 고구려 국도(국내성)의 동인 지금 만주국 안동성 즙안현 동강(강계 만포진 대안)에 서 있으니, 그 건립은 영락대왕 조(殂)후 2년, 즉 장수왕 즉위 2년 갑인 (414)에 된 것으로 거금 1,526년 전의 것이다. 현존한 동인(東人)의 비갈(碑碣) 중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거대한 비석이다. 비는 부정사각형의 자연석으로 현재 지상에 나타난 부분의 높이는 2장(丈)여(약 21척), 광(廣)은 5척 내지 6척 5촌이다. 사면에 죄다 문자를 각(刻)하여 1행 41자 44행, 총 잣수는 1,800여 자에 달한다. 비문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역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 비석 소립처(所立處)에서 서남으로 약 3정허(三町許)에 ‘대왕릉’이란 고총(古塚)이 있는데 체제가 굉장하고 또 그 난석(石) 중에서 다수한 전이 발견되거니와, 전명에는 “무덤이 편안하기가 산과 같고 견고하기가 또한 산과 같기를 원하옵니다(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라는 문자가 보인다. 이 때문에 이 무덤을 태왕릉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능총(陵塚)은 필경 호태왕 즉 영락대왕의 능이 아닐까 하는 일부 학자의 추측이 있다. 또 이 비석에서 동북 약 15정허인 토구자산(土口子山)의 산록에 접한 고지에 ‘장군총’이라고 전하는 유명한 석총이 있는데, 역시 규모가 훌륭하여 이를 영락대왕의 능이라고 하는 일파의 설도 있다. 이 두설 중의 어느 것을 좇을지 나는 아직 이 방면의 실지조사를 행하지 못하여 말할 자격은 없지만, 전자의 태왕릉설을 더욱 합리한 양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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