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苑

說苑(설원) 제4권 立節(입절)

耽古樓主 2023. 11. 10. 12:41

이 은 節義를 생명보다 중요시한 사람들의 행위를 모아 밝힌 내용으로 되어 있다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전통적 관념과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는 군주에게는 충성하지 않는다는 民本思想의 기초 위에서 忠節을 제시하였다.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에 충성하고 백성에게 충성하며 임금에게 충성하여 진리와 정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절의를 세우는 일임을 천명하였다정의와 진리를 위해 昏君을 향하여 두려움 없이 直言하여 匡正함으로써 절의를 다한 대표적인 人物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이는 진리가 제왕이나 권세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1.節義를 생명보다 중요시한 사람들

士君子之有勇而果於行者,不以立節行誼,而以妄死非名,豈不痛哉!
지식인이 용기를 가지고 행동에 과감하면서절의를 세워 도의를 행하지 않고 명분 없이 함부로 죽으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士有殺身以成仁,觸害以立義,倚於節理而不議死地;
故能身死名流於來世,非有勇斷,孰能行之?
선비는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을 이루고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세우니절개와 이치에 의지하여 죽을 곳을 따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들의 몸은 죽을지라도 이름은 후세까지 전해질 수 있으니勇斷이 없다면 누가 행할 수 있겠는가?

子路曰:
「不能甘勤苦,不能恬貧窮,不能輕死亡;
而曰我能行義,吾不信也。」
子路가 말하였다.
부지런히 노력함을 달가워하지 않고가난을 편안히 여기지 않고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면서, ‘나는 正義를 행할 수 있다.’라고 하면 나는 믿지 못하겠다.”

昔者申包胥立於秦庭,七日七夜喪不絕聲,遂以存楚,不能甘勤苦,安能行此!
예전에 申包胥는 나라 조정에 서서 7일 밤낮을 곡하며 소리를 그치지 않음으로써마침내 나라를 보존하였으니부지런히 노력함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었겠는가!

曾子布衣縕袍未得完,糟糠之食,藜藿之羹未得飽,義不合則辭上卿,不恬貧窮,安能行此!
曾子는 베옷과 솜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하고술지게미와 쌀겨로 지은 밥과 명아주와 콩잎으로 끓인 국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으나의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上卿의 벼슬도 사양하였으니가난을 편안히 여기지 않았으면 어찌 이를 실천했겠는가!

比干將死而諫逾忠,伯夷叔齊餓死于首陽山而志逾彰,不輕死亡,安能行此!
比干은 곧 죽게 되어서도 더욱 충성스럽게 하였고伯夷叔齊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으면서도 지조가 더욱 드러났으니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를 실천할 수 있었겠는가!

故夫士欲立義行道,毋論難易而後能行之;
立身著名,無顧利害而後能成之。
그래서 선비가 의리를 세우고 도를 행하려고 한다면 어려움을 따지지 않은 뒤에야 능히 실천할 수 있다.
성공하여 이름을 날리려면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뒤에야 능히 성취할 수 있다.

《詩》曰:
「彼其之子,碩大且篤。」
非良篤修激之君子,其誰能行之哉?
<詩經>에 저기 저분은 위대하고 또 독실하네.”라고 하였으니선량하고 독실하며 수양하고 분발하는 군자가 아니면 그 누가 이를 능히 행할 수 있겠는가?

王子比干殺身以作其忠,伯夷叔齊殺身以成其廉.
왕자 比干은 자신을 희생하여 충성을 나타냈고백이숙제는 자신을 희생하여 청렴함을 나타내었다.

此三子者,皆天下之通士也,豈不愛其身哉?
이 세 사람은 모두 천하의 사리에 통달한 선비이니 어찌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았겠는가?

以為夫義之不立,名之不著是士之恥也,故殺身以遂其行。
正義를 세우지 못하고 명성을 드러내지 못함은 선비의 수치라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의 품행을 실현하였다.

因此觀之,卑賤貧窮,非士之恥也。
이에 의거하여 살펴보건대 비천과 빈궁은 선비의 수치가 아니다.

夫士之所恥者,天下舉忠而士不與焉,舉信而士不與焉,舉廉而士不與焉;
三者在乎身,名傳於後世,與日月並而不息,雖無道之世不能污焉。
선비가 수치로 여기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충성하는 사람을 천거함에 선비가 거기에 들지 못하며미더운 사람을 천거함에 선비가 거기에 들지 못하며청렴한 사람을 추천함에 선비가 거기에 들지 못함이다.
이 세 가지가 자기의 몸에 있으면 좋은 명성이 후세에 전해져서 日月과 함께 꺼지지 않아 비록 무도한 시대일지라도 더럽혀질 수 없다.

然則非好死而惡生也,非惡富貴而樂貧賤也,由其道,遵其理,尊貴及己,士不辭也。
그렇다고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며부귀를 싫어하고 빈천을 즐거워함은 아니니정도를 따르고 도리를 준수하여 존귀함이 자기에게 미치면 선비는 사양하지 않는다.

孔子曰:
「富而可求,雖執鞭之士,吾亦為之;
富而不可求,從吾所好。」
大聖之操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를 추구하여 얻을 수 있다면 말채찍을 잡는 자의 일이라도 내가 하겠지만만일 를 추구하여 얻을 수 없다면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라고 하셨으니이것이 위대한 聖人의 節操이다.

《詩》云:
「我心匪石,不可轉也,我心匪席,不可卷也。」 言不失己也;
能不失己,然後可與濟難矣,此士君子之所以越眾也。
<詩經>
내 마음이 돌이 아니매 굴릴 수 없고내 마음이 돗자리가 아니어서 말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니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은 뒤에야 남들과 함께 환난을 구제할 수 있으니이것이 선비가 일반 사람을 뛰어넘는 이유이다.

▶ 士君子 : 지식인. 선비.
▶ 行誼 : 품행과 도의
▶ 子路 : 仲由. 姓은 仲, 이름은 由, 字는 子路, 또는 季路이다. 공자의 핵심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자의 천하유세 동안 고난을 끝까지 함께 하였다.
▶ 勤苦 : 부지런히 힘쓰다.
▶ 恬 : 편안하다.
▶ 申鮑胥 : 춘추시대 초나라의 大夫. 申包胥가 秦나라에 가서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빌었다. 秦 哀公은 처음엔 응답하지 않았지만, 신포서가 조정의 뜰에서 꿇어앉아 곡한 지 7일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자 마침내 그 충성에 감동하여 군사를 내어 초나라를 구원하였다. <춘추좌씨전 魯定公 4기원전 506년><史記 권40.楚世家>
▶ 曾子 : 전국시대의 儒家 사상가. 이름은 參, 자는 子輿이며, 증자는 존칭이다. 南武城, 지금의 산둥 성 출신이다. 공자 만년의 제자로서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이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여 공자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켰다.
▶ 縕袍 : 두루마기. 솜옷.
▶ 藜霍 : 명아주 잎과 콩잎. 변변치 못한 반찬을 말한다.
▶ 比干 : 殷나라 紂王의 숙부. 주왕의 음란함을 간한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비간은 箕子와 微子와 아울러 은나라의 三仁으로 꼽힌다.<史記 권38.宋微子世家>
▶ 伯夷叔齊 : 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인 伯夷와 叔齊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서 죽었다.<史記 권61 伯夷列傳>
▶ 彼其之子,碩大且篤 : <詩經·唐風·椒聊>에 “椒聊之實、蕃衍盈匊。彼其之子、碩大且篤。椒聊且、遠條且。: 산초의 송이진 열매 무성하게 열어 두 손에 가득하다. 저기 저분은 위대하고 독실하다. 산초 송이 가지가 멀리 뻗었다.”라고 하였다. 이 시는 晉 文侯의 동생인 桓叔 成師의 힘이 강해짐을 묘사한 시이다.
▶ 通士 : 사리에 밝은 선비.
▶ 富而可求 : <論語·述而>에 “子曰:富而可求也,雖執鞭之士,吾亦為之。如不可求,從吾所好.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富를 만일 구해서 될 수 있다면, 내 말채찍을 잡는 자의 짓이라도 내 또한 그것을 하겠다. 그러나 만일 구하여 될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 我心匪石 : <詩經·邶風·柏舟>에서 인용한 것이다.
“我心匪石、不可轉也。我心匪席、不可卷也。威儀棣棣、不可選也。: 내 마음 돌이 아니어서 굴릴 수도 없고, 내 마음 돗자리가 아니어서 말 수도 없으며, 몸가짐 빈틈이 없어 나무랄 수가 없다.” 이 시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부인의 심정을 그린 시로 전해진다.

2. 나라가 망한 줄도 모르는 백성들

楚伐陳,陳西門燔,因使其降民修之,孔子過之,不軾,子路曰:
나라가 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의 西門을 불태우고이로 인해 항복한 나라 백성을 부려 그 성문을 수리하게 하니공자께서 지나시다가 에 기대어 경의를 표하는 예를 행하지 않자子路가 말하였다.

「禮過三人則下車,過二人則軾;
今陳修門者人數眾矣,夫子何為不軾?」
禮法에 세 사람 앞을 지나면 수레에서 내려 예를 행하고두 사람 앞을 지나면 에 기대어 예를 행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진나라의 성문을 수리하는 사람의 숫자가 저렇게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에 기대어 예를 행하지 않으십니까?”

孔子曰:
「丘聞之,國亡而不知,不智;
知而不爭,不忠;
忠而不死,不廉;
今陳修門者不行一於此,丘故不為軾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들으니, ‘나라가 멸망했는데도 모름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알면서도 쟁취하지 않음은 불충이고,
충성하면서도 나라를 위해 죽지 않음은 절조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지금 진나라의 성문을 수리하는 사람들은 이 중 한 가지도 행하지 않았으매 내가 에 기대어 행하는 예를 하지 않은 것이다.”

▶ 楚伐陳 : 陳나라는 舜임금의 후손 胡公 滿이 기원전 1045년 주나라 무왕에 의하여 陳에 책봉되어 성립되었으며, 기원전 478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史記 권36.陳杞世家>
▶ 軾 : 수레 앞턱의 횡목. 수레 앞의 횡목을 잡고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 丘 : 공자의 이름. “노 襄公 22년(기원전 551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정수리가 움푹 꺼져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丘라 했다고 한다. 자는 仲尼이고 성은 孔氏이다.” <史記 권47.孔子世家>

3-1. 명분 없는 재물을 거부한 사람들

孔子見齊景公,景公致廩丘以為養,孔子辭不受,出謂弟子曰:
「吾聞君子當功以受祿,今說景公,景公未之行而賜我廩丘,其不知丘亦甚矣!」
공자가 齊 景公을 알현함에 경공이 廩丘邑를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도록 하자공자는 거절하고 받지 않고 숙소에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군자는 응당 공로를 세움으로써 녹봉을 받는다.’라고 하는데지금 경공을 설득하였으나 경공은 시행하지 않고 나에게 廩丘를 주겠다고 하니그가 나를 알지 못함이 심하구나!”

遂辭而行。
그리고는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 齊景公 : 춘추시대 제나라의 군주로 姜杵臼. 景은 시호이다. 齊 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을 살해한 대부 崔杼에 의해 옹립되었다. 궁실을 짓고 사냥개와 말을 모으기를 좋아하였으며 세금과 형벌을 무겁게 하며 사치가 끝이 없었다. 재위 동안 제나라의 公室이 쇠퇴하고 田氏 세력이 대두하였다.
▶ 廩丘 : 춘추시대 齊나라의 읍.
▶ 養 : 食邑. 나라에서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조세를 받아쓰도록 떼어 준 고을.

3-2. 명분 없는 재물을 거부한 사람들

曾子衣弊衣以耕,魯君使人往致邑焉,曰:
「請以此修衣。」
曾子가 해진 옷을 입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나라 군주가 사람을 보내 食邑을 내리면서 말하였다.
이것으로 옷을 손질하기 바라오.”

曾子不受,反復往,又不受,使者曰:
「先生非求於人,人則獻之,奚為不受?」
증자는 받지 않으니 사신이 돌아갔다가 다시 왔으나 또 받지 않자사자가 말하였다.
선생이 남에게 요구한 게 아니라 남이 드리는데 어째서 받지 않소?”

曾子曰:
「臣聞之,受人者畏人,予人者驕人;
縱子有賜不我驕也,我能勿畏乎?」
증자가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남에게 물건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을 두려워하고남에게 물건을 준 사람은 남에게 교만하게 군다.’라고 합니다.
설령 군주께서 식읍을 주시면서 저에게 교만하지 않으셨겠지만 제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終不受。
기어이 받지 않았다.

孔子聞之曰:
「參之言,足以全其節也。」
孔子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曾參의 말은 그의 節操를 보전하기에 충분하다.”

▶ 曾子 : 曾參.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曾點의 아들로 字는 子輿이다.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겼으며,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공자의 손자 子思에게 전하였고, 자사가 孟子에게 그 도를 전하였다. 그는 행동함에 일정한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狂者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 致邑 : 食邑을 주다. 食邑은 나라에서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조세를 받아쓰도록 떼어 준 고을.
▶ 縱 : 설령. ~일지라도.

3-3. 명분 없는 재물을 거부한 사람들

子思居於衛,縕袍無表,二旬而九食,田子方聞之,使人遺狐白之裘,恐其不受,因謂之曰:
「吾假人,遂忘之;
吾與人也,如棄之。」
子思가 나라에 있을 때 솜옷에 겉이 없고, 20일에 고작 아홉 끼만을 먹으니田子方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狐白裘를 보내며그가 받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때문에 말하게 하였다.
나는 남에게 빌려주면 즉시 잊어버리고내가 남에게 줌에는 버리듯이 한다.”

子思辭而不受,子方曰:
「我有子無,何故不受?」
자사가 거절하고 받지 않으니 전자방이 말하였다.
나는 있고 그대는 없는데 무엇 때문에 받지 않소?”

子思曰:
「伋聞之,妄與不如棄物於溝壑,伋雖貧也,不忍以身為溝壑,是以不敢當也。」
자사가 말하였다.
나 이 듣기에 함부로 물건을 줌이 물건을 구렁텅이에 버림만 못하다.’라고 하였소.
내가 비록 빈곤하지만 차마 내 몸을 구렁텅이로 만들 수는 없으매 감히 감당하지 못하오.”

▶ 子思 : 孔伋. 춘추시대 魯나라의 선비로 공자의 손자이다. 이름은 伋이고, 子思는 字이다. 4서의 하나인 <中庸>의 저자로 전한다. 노나라에 살면서 曾子의 학을 배워 유학 전승에 힘썼다.
▶ 縕袍無表 : 입고 있던 솜옷은 겉이 다 닳아 떨어져 속이 보임. 縕袍는 솜을 넣은 옷. 無表는 겉이 다 닳아서 마치 겉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이다.
▶ 二旬而九食 : 20일에 아홉 끼를 먹는다는 뜻으로 극히 곤궁함을 말한다.
▶ 田子方 : 이름은 無擇이며 字는 子方. 衛나라의 현인으로 문후의 스승이다.
▶ 溝壑 : 구렁. 구덩이나 골짜기
▶ 狐白之裘 : 狐白裘.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만 모아서 만든 옷으로 희귀한 것이다.

4. 태자가 되기를 사양한 형제

宋襄公茲父為桓公太子,桓公有後妻子,曰公子目夷,公愛之,茲父為公愛之也欲立之,請於公曰:
「請使目夷立,臣為之相以佐之。」
宋 襄公 玆父가 桓公의 태자가 됨에환공에게 후처가 낳은 아들인 公子 目夷가 있어 환공이 목이를 사랑하니자보는 환공이 목이를 사랑함은 목이를 태자로 삼으려는 함이라 여겨 청하였다.
목이를 태자로 세우십시오저는 재상이 되어 보좌하겠습니다.”

公曰:
「何故也?」
환공이 말하였다.
무슨 까닭이냐?”

對曰:
「臣之舅在衛,愛臣,若終立則不可以往,絕跡於衛,是背母也。
且臣自知不足以處目夷之上。」
자보가 대답하였다.
제 외삼촌은 나라에 있으면서 저를 사랑하는데만일 끝내 태자가 되면 위나라에 가지 못할 터이니제가 위나라에 발길을 끊음은 어머니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제가 목이의 위에 있기에는 부족함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公不許,彊以請公,公許之,將立公子目夷,目夷辭曰:
환공이 허락하지 않다가 자보가 환공에게 강력히 요청하자 환공이 허락하고공자 목이를 태자로 세울 즈음에 목이가 사양하며 말하였다.

「兄立而弟在下,是其義也;
今弟立而兄在下,不義也;
不義而使目夷為之,目夷將逃。」
형이 태자가 되고 아우가 아래에 있음이 합당한 도의이고,
그런데도 아우가 태자가 되고 형이 아래에 있으면 도의가 아닙니다.
도의가 아닌데 저를 태자로 삼으신다면 저는 도망치겠습니다.”

乃逃之衛,茲父從之。
그러고는 위나라로 도망치니 자보도 따라가 버렸다.

三年,桓公有疾,使人召茲父,若不來,是使我以憂死也,茲父乃反,公復立之以為太子,然後目夷歸也。
3년이 지나 환공이 병들어 사람을 보내 자보를 부르며만일 오지 않으면 나를 근심으로 죽일 것이라고 하니자보가 마침내 돌아왔고환공이 다시 그를 세워 태자로 삼자그런 뒤에야 목이가 돌아왔다.

▶ 宋襄公玆父 : 宋襄公. 춘추시대 송나라의 군주로 이름이 玆父이며 桓公의 아들이다. 庶兄 子魚의 양보로 군위에 올랐다. 史家에 따라서는 춘추시대 五霸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기원전 638년 송 양공이 적은 병력으로 초나라와 싸웠는데, 초나라의 군대가 泓水를 반쯤 건넜을 때 司馬인 子魚(:목이)가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양공은 正道가 아니라 하여 듣지 않았으며, 초나라 군대가 홍수를 건너고 나서 미처 대열을 정리하기 전에 다시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역시 듣지 않다가, 초나라의 군대가 대열을 갖추기를 기다려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크게 패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宋襄之仁’이라 하여 이를 비웃었다. <춘추좌씨전 노희공 22년>[史記 世家] 권38.宋微子世家
▶ 桓公 : 춘추시대 송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御說이며, 閔公의 동생이다. 南宮萬이 민공을 살해하고 公子 游를 군주로 세웠는데 그 후 공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자 유를 살해하고 어열을 군주로 세웠으니 그가 환공이다.
▶ 公子目夷 : 송 환공의 아들. 양공의 어머니가 다른 형으로 字는 子魚이다. 송 환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目夷는 측실 소생이고, 작은아들 玆父는 정실 출생이어서 당연히 자보가 후계의 자격이 있었다. 두 형제는 비록 신분 차이가 있을망정 우애가 깊어 자보가 목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하려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玆父는 후일의 양공이 되며, 目夷는 양공의 재상이 된다.
▶ 兄立而弟在下 : 형이 태자가 되고 아우가 그 아래에 있는 것. 목이는 자보의 형이므로 이는 잘못 기록된 것이다.

5.驪姬가 獻公에게 태자 申生을 참소하다.

晉驪姬譖太子申生於獻公,獻公將殺之,公子重耳謂申生曰:
「為此者非子之罪也,子胡不進辭,辭之必免於罪。」
나라 驪姬가 獻公에게 태자 申生을 참소하여 헌공이 신생을 죽이려고 하자公子 重耳가 신생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됨은 그대의 죄가 아닌데그대는 어찌 해명을 올리지 않소?
해명하면 필시 죄를 면할 터이오.”

申生曰:
「不可.
我辭之,驪姬必有罪矣.
吾君老矣,微驪姬寢不安席,食不甘味,如何使吾君以恨終哉!」
신생이 말하였다.
안 되오.
내가 해명하면 틀림없이 여희가 벌을 받을 터이오.
우리 군주께서 연로하여 여희가 아니면 잠을 편히 못 주무시고 음식을 먹어도 달게 드시지 못하니어떻게 우리 군주께서 섭섭한 마음을 품고 돌아가시게 하겠소!”

重耳曰:
「不辭則不若速去矣。」
중이가 말하였다.
해명하지 않으려거든 빨리 떠남이 좋겠소.”

申生曰:
신생이 말하였다.

「不可.
去而免於此,是惡吾君也;
夫彰父之過而取美諸侯,孰肯納之?
안 되오.
떠나서 여기서 벗어나면 이는 우리 군주의 악행을 드러내는 것이오.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면서 제후에게 찬미를 받는다면 누가 나를 받아주겠소?

入困於宗,出困於逃,是重吾惡也。
나라 안에 있으면 일족에게 곤경을 당하고나라 밖에 나가면 도망하느라 곤란할 터이니이는 나의 죄악을 거듭함이오.

吾聞之,忠不暴君,智不重惡,勇不逃死,如是者,吾以身當之。」
내가 들으니 충신은 군주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지혜로운 사람은 죄악을 거듭하지 않으며용기 있는 사람은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이와 같은 상황을 나는 몸으로 감당하겠소.”

遂伏劍死。
그러고는 검을 안고 엎어져 자살하였다.

君子聞之曰:
「天命矣夫世子!」
군자가 이를 듣고 말하였다.
天命이로구나세자여!”

《詩》曰:
「萋兮斐兮,成是貝錦。
彼譖人者,亦已太甚!」
<시경>에 일렀다.
알록달록 빛나는 무늬조개 문양으로 비단을 짜네.
저 참소하는 사람 진정 너무나도 심하구나!”

▶ 驪姬 : 춘추시대 晉 獻公의 妃이다. 원래는 이민족인 驪戎 군주의 딸이지만 헌공이 驪戎을 정벌하였을 때 사로잡혀 동생과 함께 진 헌공의 後宮이 되었다. 헌공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된 뒤 태자인 申生을 모함하여 죽이며 정치의 혼란을 가져왔다. 자신의 자식인 奚斉를 태자로 삼으려고 태자인 申生을 비롯해 重耳, 夷吾 등을 모함하여 차례로 죽이려 하였다. 결국 태자인 신생은 죽었고 아버지인 獻公이 자신의 두 아들인 중이와 이오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晉나라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다. <춘추좌씨전 魯僖公 4년, 기원전 656년>
▶ 申生 : 晉 獻公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齊薑이다. 제강이 죽은 뒤 驪姬가 자신의 아들은 해제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 신생을 모함해 주위 사람이 달아나라고 했으나 달아나지 않고 끝내 新城에서 자살하였다.
▶ 晉獻公 : 춘추시대 晉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詭諸이고, 武公의 아들이다. 士蔿의 계책을 써서 진나라의 公子들을 모두 죽이고 처음으로 絳에 도읍을 정하였다. 헌공 16년 二軍을 설치해 霍나라와 魏나라, 耿나라를 멸망시켰다. 22년 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虢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아들이 여덟 있었는데 태자 申生과 공자 重耳, 夷吾 등이 모두 현명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나중에 嬖妾 驪姬를 총애하여 그의 아들 奚齊를 세우고자 태자 신생을 죽였다. 공자 중이와 이오는 외국으로 달아났다. 마침내 진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26년 동안 재위하였다.[史記 世家] 권39.晉世家
▶ 重耳 :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晋 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사망하고 자신은 진나라를 떠나 狄나라로 망명하였다. 19년간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秦나라의 도움으로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文公에 올랐다.
▶ 爲此者非子之罪也 : 祭肉과 술에 독약을 넣은 일이다. 驪姬가 申生을 모함해 죽이려고 신생의 어머니 齊薑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는 신생이 보낸 제육과 술에 독약을 넣은 다음, 사냥에서 돌아온 獻公에게 주면서 외부에서 온 음식은 믿을 수가 없으니 개와 환관에게 먼저 먹여보라고 하였다. 제육을 먹은 개와 환관은 즉사하고 술을 땅에 부었더니 땅이 부풀어 오르자, 헌공은 신생과 重耳‧夷吾가 공모하여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여희의 무고를 믿고 신생을 죽이려하자 신생이 자살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5년>[史記 世家] 권39.晉世家 <古文觀止<3권 周文·禮記·檀弓>17.晉獻公殺世子申生>
▶ 宗 : 一族. 獻公과 驪姬를 이른다.
▶ 詩曰 : <詩經·小雅·巷伯〉에 “萋兮斐兮、成是貝錦。彼譖人者、亦已大甚。: 알록달록 아름답게, 조개 문양 비단을 짜네. 저 모함하는 사람 진정 너무나도 심해라.”라고 하였다. 毛詩序에서는 寺人이 참소로 해를 입고 周幽王을 풍자한 시라고 하였다.
▶ 萋兮斐兮 : 문체가 화려하게 짜인 모양

6.태자 申生의 명령을 지킨 狐突

晉獻公之時,有士焉,曰狐突,傅太子申生.
晉 獻公 때 선비가 있어 狐突이라 하였으며태자 申生의 스승이었다.

公立驪姬為夫人,而國多憂,狐突稱疾不出。
헌공이 驪姬를 세워 부인으로 삼자이 때문에 나라에 우환이 많으매 호돌이 병을 핑계로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六年,獻公以譖誅太子,太子將死,使人謂狐突曰:
「吾君老矣,國家多難,傅一出以輔吾君,申生受賜以死不恨。」
6년이 지나 헌공이 참소를 믿고 태자를 죽임에태자가 죽을 즈음에 사람을 보내 호돌에게 말하였다.
우리 군주께서는 늙으셨고 나라에는 환난이 많으니스승께서 한번 나와서 우리 군주를 보필해주시면 신생은 은혜를 받아서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再拜稽首而死。
재배하고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죽었다.

狐突乃復事獻公,三年,獻公卒,狐突辭於諸大夫曰:
「突受太子之詔,今事終矣,與其久生亂世也,不若死而報太子。」
호돌이 이에 다시 헌공을 섬겼는데 3년 만에 헌공이 죽자 호돌이 大夫들에게 하직하면서 말하였다.
나 호돌은 태자의 명령을 받았다가 이제 일이 끝났으니난세에 오래 사느니보다 죽어서 태자에게 보답함이 낫겠소.”

乃歸自殺。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살하였다.

▶ 狐突 : 姓이 狐이며 이름은 突이며 字는 伯行이다. 신생의 사부로 중이의 외조부이다.
▶ 賜 : 은혜.
▶ 稽首 : 공경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리다.
▶ 不若 : 不如. ~만 못하다.


7. 楚 平王이 奮揚을 용서하다.

楚平王使奮揚殺太子建.
楚 平王이 奮揚을 시켜 태자 을 죽이라고 하였다.

未至而遣之,太子奔宋,王召奮揚,使城父人執之以至.
분양은 도착하기 전에 사람을 보내 알려주니 태자가 나라로 달아났고평왕이 분양을 소환하고 城父에 사는 사람을 시켜 분양을 잡아 오게 하였다.

王曰:
「言出於予口,入於爾耳,誰告建也?」
평왕이 말하였다.
태자를 죽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와 너의 귀에 들어갔는데누가 건에게 일러주었느냐?”

對曰:
「臣告之.
王初命臣曰 『事建如事余』,臣不佞,不能貳也;
奉初以還,故遣之.
已而悔之,亦無及也。」
분양이 대답하였다.
신이 일러주었습니다.
왕께서 처음 신에게 명하시기를 건을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이 하라.’라고 하셨으매신이 재주는 없지만 딴 마음을 품지 못하였습니다.
왕께서 처음 명하신 대로 봉행하고 돌아왔습니다.
태자를 가게하고 조금 뒤에 뉘우쳤으나 역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王曰:
「而敢來,何也?」
평왕이 말하였다.
네가 감히 내 앞에 온 것은 무엇 때문이냐?”

對曰:
「使而失命,召而不來,是重過也,逃無所入。」
분양이 대답하였다.
使命을 받고도 수행하지 못하고 소환을 당하고도 오지 않으면이는 거듭 過誤를 범함이니도망쳐도 갈 곳이 없습니다.”

王乃赦之。
평왕이 이에 사면하였다.

▶ 楚平王 : 춘추시대 초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棄疾이었는데, 즉위한 뒤에 居로 이름을 고쳤다. 초 공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楚 靈王이 진나라를 멸한 5년 뒤 楚公子 棄疾이 영왕을 살해하고 平王이 되었다. 태자 建을 위해 秦나라에서 태자비를 구하였는데, 신부가 될 孟嬴이 아름다운데다 費無忌의 책동을 받아 평왕이 妃로 삼아 아들을 낳았다.[史記 世家] 권40.楚世家
▶ 奮揚 : 춘추시대 초나라 大夫. 당시 城父의 司馬로 있었다.
“분양은 성보에 도착하기 전에 태자 건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일을 먼저 알렸다. ‘태자께서는 급히 떠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것입니다.’ 태자 건은 황급히 宋나라로 달아났다.” [史記列傳] 권66 伍子胥列傳
▶ 城父 : 초나라 북방의 성.
▶ 太子建 : 초 평왕의 아들. 楚 平王이 費無忌의 참언을 믿고 그에게 太子建을 죽이도록 하자 태자는 송나라로 달아났다. 당시 평왕에게 쫓겨난 태자 건은 송나라에 망명 갔다가 송나라의 혼란상을 보고 송 원공 편에 가담하였고, 다시 정나라로 달아났다가 鄭 定公과 재상인 子產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費無忌 : 費無極이라고도 하며,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 楚平王 2년 왕명을 받들어 秦나라에 가서 태자 建을 위해 아내감을 구해 돌아왔는데, 여자의 미모가 뛰어나자 평왕에게 아내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태자 건을 헐뜯으며 평왕에게 태자 건을 살해하게 하니, 태자 건이 宋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평왕에게 태자의 스승 伍奢(:오자서의 아버지)와 그의 아들 伍尙을 살해하게 하였다. 평왕이 죽은 뒤 令尹 子常에게 참언하여 郤宛을 죽이게 하였다. 초나라 사람이 이를 원망하니 결국 영윤 자상에게 살해당하였다.
▶ 貳 : 딴 마음을 품다.
▶ 已而 : 잠시 후. 그 후.
▶ 無及 : 손쓸 수 없다.

8. 백성이 의지할 사람은 죽일 수 없다.

晉靈公暴,趙宣子驟諫,靈公患之,使鉏之彌賊之;
晉 靈公이 포악하매 趙宣子가 여러 차례 간하자영공이 그를 미워하여 鉏之彌를 시켜 암살하게 하였다.

鉏之彌晨往,則寢門闢矣,宣子盛服將朝,尚早,坐而假寢.
서지미가 새벽에 조선자의 집에 가보니침실의 문은 열려 있고 조선자가 朝服을 입고 조회에 나가려다가 아직 시간이 일러서앉아 졸고 있었다.

之彌退,歎而言曰:
서지미가 물러나와 탄식하였다.

「不忘恭敬,民之主也。
군주에 대한 공경을 잊지 않으니 참으로 백성의 주인이다.

賊民之主,不忠;
棄君之命,不信。
백성의 주인을 암살함은 충성이 아니며,
군주의 명을 저버림은 신의가 아니다.

有一於此,不如死也。」
여기에 한 가지 길이 있으니죽는 편이 낫겠다.”

遂觸槐而死。
하고는 회화나무를 들이박고 죽었다.

▶ 晉靈公 : 춘추시대 晉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夷皐이며 襄公의 아들이다.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장성하자 사치하고 난폭해져 마구 사람을 죽였다. 조돈의 동생 趙穿에게 살해당하였다.[史記 世家] 권39.晉世家
▶ 趙宣子 : 趙盾(조돈). 이름은 盾이며, 시호는 宣,존칭으로 조맹 혹은 선맹이라 불리었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부로 조최의 아들이다. 襄公 7년 中軍元帥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였다. 양공이 죽자 先蔑과 士會를 시켜 公子 雍을 秦나라에서 맞으려 했는데 양공의 부인 穆嬴으로 인하여 靈公(:이고)을 세우고 공자 옹을 세우려는 秦나라 군대를 방어하였다. 영공이 즉위하여 음란하고 폭압을 일삼자 간언을 올렸지만 뜻이 맞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자 도망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아직 국경을 넘지 않았을 때 조돈의 동생 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자 晉나라로 돌아왔다.
▶ 驟 : 자주. 여러 번.
▶ 鉏之彌 : 晉나라의 무사. <사기>에는 ‘鉏麑’, <춘추좌씨전>에는 ‘鉏麛’로 기록하고 있다. 서지미로 인하여 ‘觸槐’라는 고사가 생겼다.
※ 觸槐 : 鉏麑(서예)가 晉 靈公의 명을 받아 趙盾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조돈의 자세가 엄숙함을 보고, 뜰에 있는 홰나무에 몸을 부딪쳐 죽었다는 고사이다.<左傳 宣公 2년>
▶ 賊 : 암살하다.
▶ 闢 : 열다.
▶ 主 : 靠山. 보호자. 믿고 의지할 사람.

9. 不義를 거절한 子蘭子

齊人有子蘭子者,事白公勝,勝將為難,乃告子蘭子曰:
「吾將舉大事於國,願與子共之。」
나라에 子蘭子라는 사람이 있어 白公 勝을 섬겼는데백공 승이 난을 일으키고자 하면서 자란자에게 일렀다.
내가 나라에서 큰일을 일으키려고 하니그대도 함께하기 바란다.”

子蘭子曰:
「我事子而與子殺君,是助子之不義也;
畏患而去子,是遁子於難也。
故不與子殺君以成吾義,契領於庭,以遂吾行。」
자란자가 말하였다.
내가 그대를 섬기면서 그대와 함께 군주를 죽이면 그대의 不義를 도움이고,
환난을 두려워하여 그대를 떠나면 그대를 환난에 放置함입니다.
그래서 그대가 군주를 죽임에 가담하지 아니하여 저의 정의를 보전하고뜰에서 목을 끊어 저의 義行을 이루겠습니다.”

▶ 子蘭子 : 춘추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일생 행적은 알 수 없다.
▶ 白公勝 :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이름이 勝이고, 楚平王의 손자라서 왕손 王孫 勝으로도 불린다. 아버지 太子建이 음해를 입어 鄭나라로 달아났다가 피살되자 伍子胥를 따라 吳나라로 달아났다. 楚 惠王 2년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그를 불러 백읍의 대부로 삼고 白公이라 하였다. 혜왕 6년 원수를 갚고자 令尹 子西에게 정나라를 공격할 병사를 청했는데, 자서가 허락하였다. 병사를 일으키기 전에 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했고,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여 두 나라는 동맹을 맺었다. 화가 난 백공 승은 子西와 司馬 子期를 죽이고 초 혜왕을 습격하여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나중에 葉公 子高와 싸우다가 패하자 목을 매 자살하였다. <춘추좌씨전 魯哀公 17년(기원전 478년)〉
▶ 遁 : 달아나다. 피하다.
▶ 契領 : 목을 끊다. 契은 ‘끊다’의 뜻, 領은 목.

10.忠과 孝는 동시에 완수할 수 없다

楚有士申鳴者,在家而養其父,孝聞於楚國.
나라에 申鳴이라는 선비가 집에 있으면서 아버지를 봉양하여 초나라에 효행으로 소문이 났다.

王欲授之相,申鳴辭不受,其父曰:
「王欲相汝,汝何不受乎?」
왕이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신명은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그의 아버지가 물었다.
왕이 너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는데 너는 어찌 받지 않느냐?”

申鳴對曰:
「舍父之孝子而為王之忠臣,何也?」
신명이 대답하였다.
아버지의 효자를 버리고 왕의 충신이 되라시니무엇 때문입니까?”

其父曰:
「使有祿於國,立義於庭,汝樂吾無憂矣,吾欲汝之相也。」
그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만약 나라에서 봉록을 받고 조정에서 道義를 세워 네가 즐거우면 내게 걱정이 없겠으니나는 네가 재상이 되기를 바란다.”

申鳴曰:
「諾。」
신명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遂入朝,楚王因授之相。
하고 조정에 들어가니초왕이 재상에 제수하였다.

居三年,白公為亂,殺司馬子期,申鳴將往死之,父止之曰:
「棄父而死,其可乎?」
3년이 지나白公이 난을 일으켜 司馬 子期를 죽이자신명이 그곳에 가서 죽으려 하니 아버지가 만류하였다.
아비를 버리고 가서 죽으면 그것이 옳으냐?”

申鳴曰:
「聞夫仕者身歸於君而祿歸於親,今既去子事君,得無死其難乎?」
신명이 말하였다.
제가 듣기에 벼슬하는 사람은 몸을 군주에게 귀속시키고 봉록을 어버이에게 귀속시킨다.’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자식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군주를 섬기고 있으니죽지 않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遂辭而往,因以兵圍之。
그러고는 하직 인사를 하고 난이 일어난 곳으로 가서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백공을 포위하였다.

白公謂石乞曰:
「申鳴者,天下之勇士也.
今以兵圍我,吾為之奈何?」
백공이 石乞에 말하였다.
신명은 천하의 용사다.
지금 군대를 거느리고 나를 포위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하면 좋겠는가?”

石乞曰:
「申鳴者,天下之孝子也,往劫其父以兵,申鳴聞之必來,因與之語。」
石乞이 말하였다.
신명은 천하의 효자이니 가서 그의 아버지를 무력으로 협박하면 신명이 소문을 듣고 틀림없이 올 터이니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와 담판을 하십시오.”

白公曰:
「善。」
백공이 말하였다.
좋다.”

則往取其父,持之以兵,告申鳴曰:
「子與吾,吾與子分楚國;
子不與吾,子父則死矣。」
가서 그의 아버지를 잡아서 무기로 협박하고 신명에게 알렸다.
그대가 나를 도우면 나는 그대와 초나라를 나누어 소유하겠지만,
그대가 나를 돕지 않으면 그대의 아버지는 죽을 터이다.”

申鳴流涕而應之曰:
「始吾父之孝子也,今吾君之忠臣也;
吾聞之也,食其食者死其事,受其祿者畢其能;
今吾已不得為父之孝子矣,乃君之忠臣也,吾何得以全身!」
신명이 눈물을 흘리며 응답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아버지의 효자였으나지금은 군주의 충신이다.
내가 듣기에, ‘남의 밥을 먹는 사람은 그의 일을 위해 죽고남의 봉록을 받는 사람은 자기의 재능을 다한다.’라고 하였다.
지금 나는 이미 아버지의 효자가 되지 못하고단지 군주의 충신이 될 수밖에 없으니 내 어찌 몸을 보전하겠는가!”

援桴鼓之,遂殺白公,其父亦死.
북채를 잡고 진격의 북을 쳐서 마침내 백공을 죽였으나 그의 아버지도 죽었다.

王賞之金百斤,申鳴曰:
왕이 상으로 금 백 근을 주자신명이 말하였다.

「食君之食,避君之難,非忠臣也;
定君之國,殺臣之父,非孝子也。
군주의 녹봉을 받으며 군주의 환난을 피하면 충신이 아니며,
군주의 국가를 안정시키며 저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효자가 아닙니다.

名不可兩立,行不可兩全也.
名分에 두 가지가 존립하지 못하고행위에 두 가지를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如是而生,何面目立於天下。」
이러한데도 산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겠습니까?”

遂自殺也。
그러고는 자살하였다.

▶ 申鳴 :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 사람으로 효행으로 소문나 초 혜왕이 左司馬로 삼았다.
▶ 王 : 楚惠王. 춘추시대 초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章이며, 昭王의 아들이다. 혜왕 10년 白公 勝의 위협을 받았는데, 葉公 子高의 도움으로 구조를 받고 백공 승을 죽인 뒤 복위하였다.
▶ 白公勝 :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이름이 勝이고, 楚平王의 손자라서 왕손 王孫 勝으로도 불린다. 白에 봉해지고 大夫가 되었다. 아버지 太子建이 음해를 입어 鄭나라로 달아났다가 피살되었다. 백공승은 伍子胥를 따라 吳나라로 달아났다. 楚 惠王 2년 그를 불러 백읍의 대부로 삼고 白公이라 하였다.
혜왕 8년(기원전 481년)에 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는 초나라에 위급함을 알렸으며, 초나라는 子西를 시켜 정나라를 구원하게 했으나, 자서가 뇌물을 받고 돌아와 버렸다. 백공 승이 노하여 용기와 힘을 갖추고 죽음도 불사하는 무사 石乞 등과 함께 영윤 子西와 子綦를 조정에서 습격하여 죽이고, 내친 김에 혜왕을 겁박하여 高府에 가둔 다음 죽이려 하였다. 혜왕의 시종 屈固가 왕을 들쳐 업고 昭王의 부인이 있는 궁으로 달아났다. 백공이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한 달 남짓 지나 葉公이 초나라를 구하러 오자 혜왕의 무리들이 함께 백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혜왕이 다시 자리에 올랐다.<史記 권40.楚世家><韓詩外傳 10>
※ 子西 : 초나라의 令尹. 平王의 庶長子이다.
▶ 司馬子期 : 子綦. 춘추시대 楚나라 司馬로 令尹 子西의 아우이다.
▶ 石乞 : 백공 勝의 부하.
▶ 劫持 : 협박하다. 납치하다.
▶ 桴鼓 : 북채와 북.

11. 齊 莊公이 莒나라를 공격하다.

齊莊公且伐莒,為車五乘之賓,而杞梁華舟獨不與焉,故歸而不食,其母曰:
齊 莊公이 나라를 공격하려고 五乘의 빈객을 선발함에杞梁과 華舟 만이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매 집에 가서도 밥을 먹지 못하자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汝生而無義,死而無名,則雖非五乘,孰不汝笑也?
네가 살아서 도의가 없고 죽어서도 명성이 없으면비록 오승의 빈객이 될지라도 누가 너를 비웃지 않겠느냐?

汝生而有義,死而有名,則五乘之賓盡汝下也。」
네가 살아서 도의가 있고 죽어서도 명성이 있으면오승의 빈객이 모두 네 밑의 사람일 터이다.”

趣食乃行,杞梁華舟同車侍於莊公而行至莒,莒人逆之,杞梁華舟下鬥,獲甲首三百.
서둘러 밥을 먹자 길을 떠나기량과 화주가 함께 병거를 타고 장공을 모시고 가서 거나라에 당도하니거나라 사람들이 맞아 싸웠고 기량과 화주는 병거에서 뛰어내려 전투하여 무장한 병사를 참수하기 3백 명이었다.

莊公止之曰:
「子止,與子同齊國。」
장공이 제지하였다.
자네들이 싸움을 그치면 자네들과 함께 나라를 향유하겠다.”

杞梁華舟曰:
「君為五乘之賓,而舟梁不與焉,是少吾勇也;
臨敵涉難,止我以利,是污吾行也;
深入多殺者,臣之事也,齊國之利,非吾所知也。」
기량과 화주가 말하였다.
군주께서는 오승의 용사를 선출하였으나 화주와 기량은 거기에 들지 못했으니우리의 용기를 경시한 것입니다.
적과 맞서서 위난을 겪음에 이익으로 우리를 제지하니 우리의 행동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적진에 깊이 들어가 많이 죽임이 신들의 일이지제나라를 함께 향유하는 이익은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遂進鬥,壞軍陷陣,三軍弗敢當,至莒城下,莒人以炭置地,二人立有間,不能入。
그러고는 진격하여 적의 軍陣을 무너뜨리니 적의 三軍이 감당하지 못하였고莒城 에 당도하니 거나라 사람들이 땅에 숯불을 깔아놓으매두 사람이 한동안 그대로 서 있으며 들어가지 못하였다.

隰侯重為右曰:
「吾聞古之士,犯患涉難者,其去遂於物也.
來,吾踰子。」
당시 車右인 隰侯重이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옛날 戰士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헤쳐나간 자는 자신을 버리어 공명을 이룬다.’라고 하였소.
오시오내가 그대들을 넘겨주겠소.”

隰侯重仗楯伏炭,二子乘而入,顧而哭之,華舟後息。
습후중이 방패를 잡고 숯불 위에 엎드려 두 사람이 그 위를 타고 들어가자돌아보며 곡하다가 화주가 나중에 그쳤다.

杞梁曰:
「汝無勇乎?
何哭之久也?」
기량이 말하였다.
너는 용기가 없느냐?
왜 그리 오래 곡하느냐?”

華舟曰:
「吾豈無勇哉,
是其勇與我同也,而先吾死,是以哀之。」
화주가 대답하였다.
내게 어찌 용기가 없겠느냐!
그의 용기는 우리와 같은데 우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매우 슬퍼하였네.”

莒人曰:
「子毋死,與子同莒國。」
거나라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우리를 죽이지 마시오그러면 그대들과 함께 거나라를 향유하겠소.”

杞梁華舟曰:
기량과 화주가 말하였다.

「去國歸敵,非忠臣也;
去長受賜,非正行也;
且雞鳴而期,日中而忘之,非信也。
조국을 저버리고 적국에 귀순함은 충신이 아니고,
군주를 저버리고 상을 받음은 바른 행위가 아니고,
더구나 새벽에 약속하고 한낮에 잊음은 신의가 아니다.

深入多殺者,臣之事也,莒國之利非吾所知也。」
적진에 깊이 들어가 많이 죽임이 신하의 일이니거나라를 향유하는 이익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遂進鬥,殺二十七人而死。
그러고는 진격하여 27명을 죽이고 자신들도 죽었다.

其妻聞之而哭,城為之阤,而隅為之崩。
그의 아내가 소식을 듣고 통곡하니 이 이 때문에 기울고 모퉁이가 이 때문에 무너졌다.

此非所以起也。
이는 기량의 아내에 관한 琴曲의 起源이다.

▶ 齊莊公 : 춘추시대 齊나라의 제25대 후작이며 이름은 光이다. 崔杼의 후처 당강과 정을 통했으며 이로 인해 최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史記 권32.齊太公世家>
▶ 莒 : 춘추시대 제후국명. 莒子의 나라. 기원전 431년 초나라에게 멸망하였다. 지금의 山東省 莒縣 지역이다. 제 장공이 거를 공격할 때는 기원전 550년이었다.
▶ 車五乘之賓 : 五乘之賓은 수레 다섯 채의 봉양을 받는 賓客으로, 용사를 우대하기 위하여 만든 벼슬[勇爵]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21년에 “장공이 용작을 만들었다.[莊公爲勇爵]” 하였으니, 이는 五乘으로 한 사람을 봉양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車는 衍文이다.
▶ 杞梁華舟 : 기량과 화주. 춘추시대 齊나라 大夫로 둘이 함께 莊公을 따라 莒나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左傳> 襄公 23년
▶ 雖非 : 비록. 非는 衍文.
▶ 趣 : 재촉할 ‘촉’. 서두르다.
▶ 逆 : 맞이하다. 맞아 싸우다.
▶ 甲首 : 갑옷을 입고 무장한 병사의 首級. 춘추시대에 전차 1대에 4필의 말이 끌고 전차에 3명이 타고 전차 아래에 무장한 병사 10명으로 전투하였다.
▶ 少 : 경시하다.
▶ 隰侯重為右 : 습후중은 사람이름으로 당시 車右였다. 車右는 兵車의 오른쪽에 타고서 병거에 탄 군주나 장수를 보호할 책임을 지는 무사. 兵車에는 장수가 병거의 왼쪽에 자리하고, 모는 사람이 중앙에 위치하고, 무력을 갖춘 사람이 오른쪽에서 비상사태를 대비한다.
▶ 其去遂於物也 : 자기의 몸을 버려 자연의 이치에 통달하다.
▶ 其妻 : <列女傳> ‘齊杞梁妻’에 杞梁의 처인 孟姜 만을 말하였다.
※ 杞梁妻 : 제나라 杞梁의 처의 故事로 杞梁이 戰死하여 그 아내가 통곡하며 “위로는 부모 없고 가운데로는 남편이 없고, 아래로는 자식 없으니 산 사람의 고통이 극에 이르렀다.”라고 하니, 기량 아내의 눈물과 行人의 눈물로 10일 만에 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烈女傳 齊杞梁妻>
▶ 阤 : 비탈 ‘치’. 경사지다.
▶ 此非所以起也 : 淸 盧文弨의 《群書拾補, 說苑》에는 “非자는 아마 琴曲이란 두 글자의 잘못인 듯하다.” 하였다. 이는 “杞梁의 아내 琴曲에 관한 起源이다.”라는 뜻으로, 《琴操》에 〈芑(杞와 通함)梁妻歎〉이 있다.



12. 越나라 군대가 齊나라 왕을 놀라게 한 죄

越甲至齊,雍門子狄請死之,齊王曰:
「鼓鐸之聲未聞,矢石未交,長兵未接,子何務死之?
為人臣之禮邪?」
나라 군대가 나라에 당도하자제나라 대부 雍門子狄이 죽이기를 요청하니 齊王이 말하였다.
진격의 호령 소리가 아직 들리지 않고화살과 돌이 아직 교차하지도 않고길이가 긴 병기로 접전할 정도도 아닌데그대는 무엇 때문에 굳이 죽으려 하는가?
신하된 사람의 예절 때문인가?”

雍門子狄對曰:
옹문자적이 대답하였다.

「臣聞之,
昔者王田於囿,左轂鳴、車右請死之,而王曰:『子何為死?』
신이 이렇게 들었습니다.
예전에 왕께서 園囿에서 사냥을 하실 때 왼쪽 수레바퀴가 삐걱거림에 車右 무사가 죽이기를 청하자왕께서 그대는 무엇 때문에 죽이라고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車右對曰:
『為其鳴吾君也。』
거우 무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군주에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기 때문입니다.’

王曰:
『左轂鳴者工師之罪也,子何事之有焉?』
왕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왼쪽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냄은 工師의 죄인데그대가 거기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車右曰:
『臣不見工師之乘而見其鳴吾君也。』
거우 무사가 말하였습니다.
신은 工師가 수레를 만듦은 보지 못했고우리 군주에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만 보았습니다.’

遂刎頸而死.
그러고는 마침내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知有之乎?」
그런 일이 있음을 아십니까?”

齊王曰:
「有之。」
제왕이 말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

雍門子狄曰:
「今越甲至,其鳴吾君也,豈左轂之下哉?
車右可以死左轂,而臣獨不可以死越甲也?」
옹문자적이 말하였다.
지금 월나라의 군대가 공격해 왔으니그 소리가 우리 군주를 놀라게 함이 어찌 왼쪽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보다 못하겠습니까?
車右 무사는 왼쪽 수레바퀴 때문에 죽을 수 있고신은 유독 침입한 월나라 군대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단 말입니까?”

遂刎頸而死。
그러고는 목을 찔러 죽었다.

是日越人引甲而退七十里,曰:
「齊王有臣,鈞如雍門子狄,擬使越社稷不血食。」
이날 월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인솔하고 70리를 퇴각고 말하였다.
齊王의 신하가 모두 옹문자적과 같다면아마도 나라의 사직은 제사를 받지 못하겠구나.”

遂引甲而歸,齊王葬雍門子狄以上卿之禮。
그러고는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가니齊王이 上卿의 예를 갖추어 옹문자적을 장례하였다.

 

▶ 越甲 : 월나라 군사.
▶ 雍門子狄 : 전국시대 齊나라의 열사. 雍門은 복성이며 이름이 子狄이다.
▶ 鼓鐸 : 고대 전쟁이 있을 때 흔드는 큰 방울.
▶ 長兵 : 长形的兵器。如枪、大刀
▶ 務 : 반드시. 꼭. 필히.
▶ 田於囿 : 田은 사냥하다. 囿는 원유園囿. 궁궐 안에 있는 동산.
▶ 車右 : 고대 전차를 타고 오른쪽에서 호위하는 무사. 兵車는 장수가 병거의 왼쪽에 자리하고, 모는 사람이 중앙에 위치하고, 무력을 갖춘 사람이 오른쪽에서 비상사태를 대비한다.
▶ 刎頸 : 목을 베다.
▶ 工師 : 工人. 司空의 밑에서 百工을 거느리며 건축과 工匠의 일을 주관하던 직책.
▶ 血食 : 피 묻은 산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낸 데서 생긴 말로 나라의 儀式으로 祭祀를 지내는 것을 이르는 말.
▶ 上卿 : 전국시대 제후국 대신 중 최고의 관직. 上‧中‧下 三卿 중에 가장 존귀한 관직이다.

13.전쟁을 회피한 초나라 장군 子囊

楚人將與吳人戰,楚兵寡而吳兵眾,楚將軍子囊曰:
「我擊此國必敗,辱君虧地,忠臣不忍為也。」
나라 군주가 나라 군주와 전쟁을 하려 함에楚軍은 적고 吳軍은 많았으므로 楚將軍 子囊이 말하였다.
우리가 이 나라를 공격하면 틀림없이 패하여 군주를 욕보이고 국토는 줄어들겠으니충신은 차마 하지 못한다.”

不復於君,黜兵而退,至於國郊,使人復於君曰:
「臣請死!」
군주에게 보고하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여 국도의 교외에 당도하여 사람을 시켜 복명하게 하였다.
신을 죽여주십시오!”

君曰:
「子大夫之遁也,以為利也,而今誠利,子大夫毋死!」
군주가 말하였다.
그대 대부가 전쟁을 피함은 국가에 이롭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지금 과연 이로우니 그대 대부는 죽지 마시오!”

子囊曰:
「遁者無罪,則後世之為君臣者,皆入不利之名而效臣遁.
若是則楚國終為天下弱矣,臣請死。」
자낭이 말하였다.
전쟁을 피한 사람을 죄주지 않으면후세에 군주의 신하 된 자가 모두 불리하다는 명분을 빌려 신의 회피를 본받을 터입니다.
이같이 되면 초나라는 결국 천하의 弱體가 될 터이니신을 죽여주십시오.”

退而伏劍。
물러 나와서 칼을 안고 엎어져 죽었다.

君曰:
「誠如此,請成子大夫之義。」
군주가 말하였다.
진실로 그러하니 그대 대부의 충의를 이루어주겠소.”

乃為桐棺三寸,加斧質其上,以徇於國。
이에 세 치 두께의 오동나무 관을 만들어 도끼와 모탕을 그 위에 올려놓고 온 나라에 돌려 보여주었다.

▶ 子囊 : 춘추시대 楚 莊王의 아들 公子 貞으로 子囊은 字이다. 共王 때 令尹이 되었다.
▶ 虧地 : 땅을 잃다.
▶ 桐棺三寸 : 세 치 두께의 오동나무 관. 보잘것없는 관을 말한다.
▶ 加斧質其上 : 死刑에 처했음을 표시한 것이다. 斧는 도끼, 質은 모탕인데, 사형을 집행할 때 죄인을 모탕 위에 올려놓고 도끼로 찍었다. ‘質’은 ‘鑕’과 통용이다. 《晏子春秋 問下》‧《呂氏春秋 貴直》


14. 변명을 일삼던 成公趙

宋康公攻阿,屠單父,成公趙曰:
宋 康公이 阿邑을 공격하고 單父를 도륙하자 成公趙가 말하였다.

「始吾不自知,以為在千乘則萬乘不敢伐,在萬乘則天下不敢圖。
당초 나는 스스로 사리를 알지 못하여 千乘의 제후국에 살고 있으면 萬乘의 천자의 나라에서 감히 정벌하지 못하고만승의 천자의 나라에 살고 있으면 천하 사람이 감히 도모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今趙在阿而宋屠單父,則是趙無以自立也​。
지금 내가 阿邑에 살고 있는데 송왕이 선보를 도륙하였으니이 때문에 내가 세상에 자립할 수가 없다.

且往誅宋!」
장차 송나라에 가서 송왕을 죽이겠다!”

趙遂入宋,三月不得見。
성공조가 이어 송나라에 들어갔으나 3개월 동안 송왕을 만나지 못하였다.

或曰:
「何不因鄰國之使而見之。」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 이웃 나라에서 온 사신을 통하여 송왕을 만나지 않는 게요?”

成公趙曰:
「不可.
吾因鄰國之使而刺之,則使後世之使不信,荷節之信不用,皆曰趙使之然也,不可!」
성공조가 말하였다.
안 되오.
내가 이웃 나라의 사신을 이용하여 송왕을 찔러 죽이면 후세의 사신을 불신하게 할 터이며지닌 符節의 신용이 쓸모없게 되면 모두 성공조가 그렇게 만들었다.’라고 말할 터이니안 되오!”

或曰:
「何不因群臣道徒處之士而刺之。」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 신하들이 隱士를 인도하여 뵙게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찔러 죽이지 않는 게요?”


成公趙曰:
「不可.
吾因群臣道徒處之士而刺之,則後世之臣不見信,辯士不見顧,皆曰趙使之然也。不可!
吾聞古之士怒則思理,危不忘義,必將正行以求之耳。」
성공조가 말하였다.
안 되오.
내가 신하들이 은사를 인도하여 뵙게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찔러 죽이면 후세의 신하가 신임을 받지 못할 터이고辯士는 접견을 받지 못하여 모두 성공조가 그렇게 만들었다.’라고 말할 터이니안 되오!
내가 듣건대 옛날의 선비는 화냄에 事理를 생각하고위험해도 도의를 잊지 아니하여반드시 정당한 행위로 구할 따름이라 하였소.”

期年,宋康公病死,成公趙曰:
1년이 지나 송 강공이 병이 들어 죽자 성공조가 말하였다.

「廉士不辱名,信士不惰行,今吾在阿,宋屠單父,是辱名也;
청렴결백한 선비는 명예를 욕되게 하지 않고미더운 선비는 행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그런데 내가 아읍에 살고 송왕이 선보를 도륙하였으니 명예를 욕되게 한 것이다.

事誅宋王,期年不得,是惰行也。
송왕을 죽이려 일하여 1년이 되도록 이루지 못했으니 게으른 행동이다.

吾若是而生,何面目而見天下之士。」
내가 이러고도 산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선비들을 보겠는가!”

遂立槁於彭山之上。
이어 彭山 위에 서서 말라 죽었다.

▶ 宋康公 : 宋康王. 이름은 偃이다. 재위 11년 만에 스스로 왕을 칭하여 강왕이라 하였다. 형 剔成君을 축출하고 왕이 되었다. 성질이 포악무도하여 제후들이 桀宋이라 불렀다. 전국시대 송나라의 최후의 군주로 齊, 楚, 魏의 연합군에 의해 송나라가 멸망했으며 강왕이 달아났으나 魏나라의 온읍에서 죽임을 당하였다.[史記 世家] 권38.宋微子世家
▶ 阿 : 춘추시대 齊나라 땅.
▶ 單父 : 춘추시대 魯나라 읍. 지금의 산동성 單縣.
▶ 成公趙 :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成公은 複姓, 趙는 이름이다. 일생 행적은 미상이다.
▶ 千乘 : 諸候. 乘은 수레를 세는 단위. 周나라 때, 戰時에 天子는 萬乘을, 諸侯는 干乘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 荷節 : ‘符節’을 잘못 기록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符節은 사신의 증표로 돌이나 대나무·옥 따위로 만들어 신표로 삼던 물건.
▶ 道 : 인도하다, 이용하다.
▶ 徒處之士 : 隱士, 處士의 무리.
▶ 顧 : 접견하다.
▶ 期年 : 만 1년.

15.청렴결백한 선비는 남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廉士不恥人>

佛肸用中牟之縣畔,設祿邑炊鼎曰:
「與我者受邑,不與我者其烹。」
佛肸이 中牟縣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며 祿邑과 가마솥을 준비하고 말하였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은 녹읍을 받고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솥에 넣어 삶아 죽이겠다.”

中牟之士皆與之。
중모현의 사람들이 모두 가담하였다.

城北餘子田基獨後至,袪衣將入鼎曰:
「基聞之,義者軒冕在前,非義弗受;
斧鉞於後,義死不避。」
城北에 사는 餘子 田基만 늦게 도착해서 옷을 걷어 올리고 솥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의로운 사람은 벼슬과 많은 녹봉을 앞에 늘어놓아도 의롭지 않으면 받지 않으며형벌의 도끼를 뒤에 들이대도 의로운 죽음을 회피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소.”

遂袪衣將入鼎,佛肸播而止之.
그러고는 옷을 걷어 올리고 솥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니필힐이 손을 저어 그를 제지하였다.

趙簡子屠中牟,得而取之,論有功者,用田基為始,田基曰:
「吾聞廉士不恥人,如此而受中牟之功,則中牟之士終身慚矣。」
趙簡子가 중모현을 도살하여 그곳을 다시 취하고 공이 있는 사람을 논할 때 田基를 첫째로 꼽으니 전기가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청렴결백한 선비는 남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이렇게 하고서 중모를 평정한 공을 받으면중모의 선비들은 죽을 때까지 부끄러워할 터이오.”

襁負其母,南徙於楚,楚王高其義待以司馬。
어머니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남쪽으로 초나라에 이사가니초나라 왕이 그의 의로움을 높이 사서 司馬 벼슬로 대우하였다.

▶ 佛肸 : 晉나라 大夫. 趙簡子의 邑宰. ‘佛’은 ‘필‘로 읽는다.
▶ 中牟 : 춘추시대에는 晉나라의 읍이었으나 晉나라가 분열된 이후에 조나라 영토가 되어 한때 수도가 되었다. 현재의 河南省 鶴壁 서쪽이다.
▶ 設祿邑炊鼎 : 상으로 줄 食邑과 팽형에 처할 형구를 준비하다. 食邑은 나라에서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조세를 받아쓰도록 떼어 준 고을
▶ 餘子 : 아직 成年이 되지 않은 젊은이.
▶ 田基 : 춘추시대 晉나라 中牟 사람
▶ 袪衣 : 옷을 걷어 올리다.
▶ 軒冕 : 사대부의 수레와 옷. 높은 벼슬과 많은 녹봉.
▶ 趙簡子 : 趙鞅. 춘추시대 말기 晉나라의 大夫.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진나라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나라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16.무도한 군주를 위해 죽은 邢蒯瞶

齊崔杼弒莊公,邢蒯瞶使晉而反,其僕曰:
「崔杼弒莊公,子將奚如?」
나라 崔杼가 莊公을 시해함에邢蒯瞶가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자 그의 마부가 말하였다.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는데 나리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邢蒯瞶曰:
「驅之,將入死而報君。」
형괴귀가 말하였다.
수레를 빨리 몰아라들어가서 죽음으로 군주께 보답해야겠다.”

其僕曰:
「君之無道也,四鄰諸侯莫不聞也,以夫子而死之不亦難乎?」
그의 마부가 말하였다.
군주의 무도함은 사방 이웃 제후까지도 듣지 못한 사람이 없는데선생께서 그를 위해 죽는다면 나무라지 않겠습니까?”

邢蒯瞶曰:
「善能言也,然亦晚矣.
子早言我,我能諫之,諫不聽我能去,今既不諫又不去;
吾聞食其祿者死其事,吾既食亂君之祿矣,又安得治君而死之?」
형괴귀가 말하였다.
말은 잘했지만 역시 이미 늦었다.
네가 일찍 말해주었더라면 내가 잘 했을 터이고간하여 듣지 않으면 나는 떠날 수 있었을 터이나지금은 이미 간하지 못했고 떠나지도 못하였다.
내가 들으니 그 사람의 봉록을 먹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일에 죽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내 이미 亂君의 봉록을 먹었으니또 어떻게 현명한 군주를 만나 죽겠느냐?”

遂驅車入死。
그렇게 말하고는 수레를 빨리 몰아 도성으로 들어가서 죽었다.

其僕曰:
「人有亂君,人猶死之;
我有治長,可毋死乎?」
그의 마부가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亂君을 모시다가 그래도 그를 위해 죽었는데나는 도리를 아는 윗사람을 모셨으니 죽지 않고야 되겠는가?”

乃結轡自刎於車上。
이에 말고삐로 목을 매어 수레에서 자살하였다.

君子聞之曰:
군자가 이 소문을 듣고 말하였다.

「邢蒯瞶可謂守節死義矣;
형괴귀는 충절을 지켜 의리를 위해 죽었다고 이를 만하다.

死者人之所難也,僕夫之死也,雖未能合義,然亦有志之意矣.
죽음이란 사람이 꺼리는 바이며마부의 죽음은 비록 道義에 부합하지는 않으나 또한 志士의 본의를 가졌다.

《詩》云:
『夙夜匪懈,以事一人。』
邢生之謂也。
<詩經>에서 이르기를,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여왕 한 사람을 섬기고 있다.’
라고 하였으니형괴귀 같은 사람을 이름이다.

孟子曰:
『勇士不忘喪其元。』
僕夫之謂也。」
孟子께서 말씀하기를,
용사는 자기 목을 잃을 각오를 잊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마부 같은 사람을 이름이다.

崔杼 : 나라의 大夫. 崔武子 또는 崔子로도 불린다. 자신의 후처와 사통한 莊公을 시해하고 景公을 세워 전권을 휘둘렀지만 집안의 불화를 틈탄 慶封에 의해 멸문 당하였다.[史記 世家] 32.齊太公世家

▶ 邢蒯瞶 : 춘추시대 齊나라 大夫로 일생 행적은 미상이다. 원문에는 瞶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 다수이나 聵로 인용한 책들이 있다.
▶ 亂君 : 무도한 군주.
▶ 結轡自刎 : 말고삐를 매고 자살하다.
▶ 夙夜匪懈,以事一人 : <詩經·大雅·蒸民>에 “肅肅王命、仲山甫將之。邦國若否、仲山甫明之。既明且哲、以保其身。夙夜匪解、以事一人。: 엄숙하신 왕의 명을 중산보가 모두 다 맡고 나라의 정치가 잘되고 안 됨을 중산보가 밝히고 있다. 밝고도 어질게 그 몸을 보전하고 밤낮으로 꾸준하게 왕 한 사람만 섬기고 있다.”라고 노래하였다. 이 시는 宣王의 명령을 받고 중산보가 제나라로 성을 쌓으러 떠나갈 때 윤길보가 중산보를 찬미한 노래이다.
▶ 勇士不忘喪其元 : <孟子 滕文公 下>에 “志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 志士는 곤궁한 데 빠질 각오가 되어 있으며, 용사는 자기 목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다.”라 하였다.

17. 忠臣不事二君

燕昭王使樂毅伐齊,閔王亡,燕之初入齊也,聞蓋邑人王歜賢,令於三軍曰:
「環蓋三十里毋入。」
燕 昭王이 樂毅를 보내 나라를 공격하니 齊 閔王이 도망쳤는데燕軍이 처음 제나라에 진입함에 蓋邑 사람 王歜이 어짊을 알고 三軍에 명령하였다.
합읍 주변 30리로 들어가지 말라.”

以歜之故,已而使人謂歜曰:
「齊人多高子之義,吾以子為將,封子萬家。」
이는 왕촉 때문이었으며곧 사람을 보내 왕촉에게 말하였다.
제나라의 사람에 그대의 의로움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으니나는 그대를 장군으로 삼고 그대에게 萬戶의 봉읍을 주겠소.”

歜固謝燕人,燕人曰:
「子不聽,吾引三軍而屠蓋邑。」
왕촉이 연왕의 말을 완강히 사양하자연왕이 말하였다.
그대가 듣지 않으면 나는 삼군을 이끌고 합읍을 도륙하겠다.”

王歜曰:
왕촉이 말하였다.

「忠臣不事二君,貞女不更二夫;
齊王不聽吾諫,故退而耕於野。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소.
齊王이 내가 간하는 말을 듣지 않으매 나는 물러나서 초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소.

國既破亡,吾不能存,今又劫之以兵,為君將,是助桀為暴也,與其生而無義,固不如烹。」
나라가 이미 망하여 내가 보존할 수 없는데도 또 군대로 위협하니연나라 군주를 위하여 장군이 되면이것은 桀王을 도와 포악한 짓을 함이니이처럼 살아서 도의가 없기보다는 차라리 삶겨 죽음이 낳겠소.”

遂懸其軀於樹枝,自奮絕脰而死.
그러고는 몸을 나뭇가지에 매고 스스로 힘껏 머리를 끊어 죽었다.

齊亡大夫聞之曰:
「王歜布衣義猶不背齊向燕,況在位食祿者乎?」
제나라의 도망쳤던 大夫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왕촉은 평민의 도의로서도 제나라를 배신하고 연나라로 가지 않았는데하물며 高位에 있으면서 봉록을 먹는 자임에랴?”

乃相聚如莒,求諸公子,立為襄王。
그리하여 서로 모여 나라에 가서 제민왕의 아들을 찾아 襄王으로 옹립하였다.

▶ 燕昭王 : 전국시대 연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平이다. 시호는 昭襄王이지만, 약칭 시호로는 昭王 혹은 襄王으로도 불린다. 郭隗와 鄒衍, 樂毅 등 어진 선비를 초빙하여 父王 때 잃었던 땅을 齊나라로부터 되찾았고 제나라의 수도 臨淄에 진입하고 莒와 卽墨을 제외한 제나라의 70여 성을 점령하여 연나라가 가장 강성한 시기를 이루었다.<史記> 권34.燕召公世家
▶ 樂毅 : 전국시대 연나라의 上將軍. 본래 中山國 사람이었으나 중산국이 조나라에 망한 뒤 조나라 사람이 되었다가 燕 昭王에게 중용되어 상장군이 되었다. 여러 제후국과 연합하고 제나라를 토벌하여 제나라의 70여 성을 항복받고 昌國君에 봉해졌다. 昭王이 죽고 태자인 惠王이 즉위하였는데, 혜왕이 제나라의 反間計에 말려들어 樂毅를 의심하고 대장군의 직위를 박탈하자, 趙나라로 망명하였다.<사기 권80. 樂毅列傳>
▶ 閔王 : 齊湣王. 전국시대 齊나라의 군주로 ‘閔’은 ‘湣’으로도 쓴다. 田 성에 이름은 地이고 제선왕의 아들이다. 재위한 지 40년에 燕나라의 樂毅가 秦‧楚‧趙 등의 연합군을 이끌고 齊나라를 쳐서 수도 臨淄에 들어가자, 閔王이 衛나라로 망명하였다.
▶ 蓋邑 : 전국시대 齊 나라의 고을 이름. <史記> 권82 田單列傳에는 “畵邑”으로 기록하고 있다.
▶ 王歜 : 戰國時代 齊나라 사람으로, 제나라가 燕나라에 멸망하자 자결하였다. <사기 전단열전>에는 '王蠋'으로 기록하고 있다.
▶ 忠臣不事二君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史記列傳] 권82 田單列傳
▶ 桀 : 夏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걸왕. 역사적으로 유명한 暴君이다
▶ 脰 : 목.
▶ 布衣 : 평민. 서민.
▶ 食祿者 : 나라의 봉록을 먹는 자.
▶ 如莒 : 거 땅으로 가다. 如는 가다.
▶ 立為襄王 : 淖齒가 齊 湣王을 죽이자 莒나라 사람들은 민왕의 아들 法章을 즉묵 땅에서 田單과 합세해 명실상부하게 왕으로 옹립하니, 이가 齊 襄王이다.




18.刎頸之交 - 左儒와 杜伯

左儒友於杜伯,皆臣周宣王,宣王將殺杜伯而非其罪也,左儒爭之於王,九復之而王弗許也,王曰:
「別君而異友,斯汝也。」
左儒는 杜伯와 벗하고 모두 周 宣王에게 신하가 되었는데선왕이 두백을 죽이려고 하나 그의 죄가 아니매좌유가 선왕에게 간언하되 여러 차례 반복하였으나선왕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군주를 제쳐두고 친구만 챙기는 자가 바로 너로구나!”

左儒對曰:
「臣聞之,君道友逆,則順君以誅友;
友道君逆,則率友以違君。」
좌유가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군주가 도의를 행하고 친구가 거스르면 군주에게 순종하여 친구를 꾸짖고,
친구가 도의를 행하고 군주가 거스르면 친구를 좇아 군주의 명을 어긴다.’라고 하였습니다.”

王怒曰:
「易而言則生,不易而言則死。」
선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 말을 바꾸면 살겠지만 네 말을 바꾸지 않으면 죽을 터이다.”

左儒對曰:
「臣聞古之士不枉義以從死,不易言以求生,故臣能明君之過,以死杜伯之無罪。」
좌유가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옛날의 선비는 정의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따르고말을 바꾸면서 살기를 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매신은 군주의 잘못을 밝힘으로써 두백의 무죄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王殺杜伯,左儒死之。
선왕이 두백을 죽이자 좌유도 죽었다.

▶ 左儒, 杜伯 : 周 宣王 때의 大夫.
▶ 周宣王 : 周나라의 제11대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靜이다. 아버지 주 여왕은 기원전 842년에 국민 폭동에 의해 彘로 도망했고 이후 왕이 부재한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기원전 828년에 여왕이 사망한 후, 아들인 靜을 선왕으로 세웠다. 厲王의 衰亂한 정치를 이어받아 尹吉甫‧方叔 등의 名臣을 등용하여 中興을 이루었다. 《史記 周本紀》
▶ 九復 : 여러 차례 반복하다.
※ 刎頸之交 :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우정 또는 그런 벗을 뜻한다. 刎頸은 목을 벰.


19. 군주에 대한 원망으로 목숨을 바치려는 朱厲附

莒穆公有臣曰朱厲附,事穆公,不見識焉,冬處於山林食杼栗,夏處於洲澤食蔆藕。
莒 穆公에게 朱厲附라는 신하가 있었는데목공을 섬겼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여 겨울에는 산속에 살면서 도토리와 밤을 먹고여름에는 늪이나 못가에 살면서 마름과 연뿌리를 먹고 살았다.

穆公以難死,朱厲附將往死之。
목공이 난리로 죽었는데주려부가 목공을 위해 가서 죽으려고 하였다.

其友曰:
「子事君而不見識焉,今君難吾子死之,意者其不可乎!」
그의 친구가 말하였다.
자네가 군주를 섬겼으나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지금 군주의 환난에 그대가 죽으려고 하니아무래도 옳지 않은 듯하네!”

朱厲附曰:
「始我以為君不吾知也,今君死而我不死,是果不知我也;
吾將死之,以激天下不知其臣者。」
주려부가 말하였다.
처음에 나는 군주가 나를 몰라준다고 여겼으나지금 군주가 죽었는데도 내가 죽지 않으면 이것이 정말로 군주가 나를 몰라준 것이 되네.
내가 죽어서 천하에서 자신의 신하를 몰라보는 자를 격려하려고 하네.”

遂往死之。
그리하여 가서 죽었다.

▶ 莒穆公 : 莒敖公(: 莒穆公) 춘추시대 莒나라의 군주. 지금의 산동성 거현. 기원전 431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 朱厲附 : 柱厲叔. 莒 穆公의 신하. 거나라의 오공을 섬기던 주려숙이 군주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떠나 바닷가에 살다가 군주가 위험을 당하자 자신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列子·說符>에서는 주려숙이 군주에 대한 원망으로 자신의 목숨까지도 잊었던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呂氏春秋·恃君>에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주려숙의 행위는 신하를 알아주지 못하는 군주를 분발시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 杼栗 : 상수리와 밤.
▶ 蔆藕 : 마름과 연뿌리.



20. 申公 子倍의 목숨을 건 충성.

楚莊王獵於雲夢,射科雉得之,申公子倍攻而奪之,王將殺之,大夫諫曰:
「子倍自好也,爭王雉必有說,王姑察之。」
楚 莊王이 雲夢에서 사냥하며 科雉를 쏘아 잡았는데申公 子倍가 달려들어 빼앗으매 장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大夫들이 하였다.
자배는 自重하는 사람인데왕과 꿩을 다툼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이니왕께서는 우선 살펴보십시오.”

不出三月,子倍病而死。
석 달 동안 외출하지 않다가 자배가 병들어 죽었다.

邲之戰,楚大勝晉,歸而賞功,申公子倍之弟請賞於王曰:
「人之有功也,賞於車下。」
의 전투에서 나라가 나라에 크게 승리하고 돌아와서 전공을 따져 상을 줌에신공 자배의 아우가 장왕에게 상을 청하면서 말하였다.
남들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웠고신의 형은 왕의 수레 아래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王曰:
「奚謂也?」
그러자 장왕이 물었다.
무엇을 말하느냐?”

對曰:
「臣之兄讀故記曰:
射科雉者不出三月必死.
臣之兄爭而得之,故夭死也。」
자배의 아우가 대답하였다.
신의 형이 옛날의 기록을 읽고 말하였습니다.
科雉를 쏘아 잡은 사람은 석 달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죽는다.’
신의 형이 과치를 다투어 빼앗았기 때문에 요절하였습니다.”

王命發乎府而視之,於記果有焉,乃厚賞之。
장왕은 서고에서 책을 찾게 하여 보니옛 기록에 과연 그런 말이 있기에 곧 후하게 상주었다.

▶ 楚莊王 : 초나라의 제22대 군주로 이름은 侶이다. 성왕의 손자이자 穆王의 아들이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陳나라의 내란을 틈타 진 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장왕 17년(기원전 597년) 봄에 정나라를 포위하여 석 달 만에 함락시켰다.[史記] 권40.楚世家
▶ 雲夢 : 전국시대 楚나라의 七澤 중 하나로서 屈原의 楚辭에 이곳을 소재로 하기도 하였다.
▶ 科雉 : 특이한 꿩. 둥지를 갓 나온 어린 꿩. 科는 둥지. <呂氏春秋 至忠>에는 ‘隨兕(:외뿔소)’로 기록하고 있다.
▶ 申公子倍 : 춘추시대 楚 莊王의 신하로 이름이 子倍이다. <吕氏春秋>에는 ‘子培’로 기록하고 있다.
▶ 自好 : 자신의 몸을 아껴 自重함을 이른다.
▶ 姑 : 잠시.
▶ 邲之戰 : 초 장왕 17년(기원전 597년) 자중이 초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晉나라와의 邲전투에서 진나라를 대패시켰다.
▶ 人之有功也, 賞於車下 : 人之有功也 賞於車下 : 이 문장은 誤脫이 있는 듯하여 뜻이 통하지 않는다. 《太平御覽》 권417에 《呂氏春秋》 〈至忠〉의 인용문에 “남들은 전장에서 공을 세웠고, 신의 형은 왕의 사냥하는 수레 아래에서 공을 세웠습니다.[人之有功也於軍旅 臣兄之有功也於車下]”로 되어 있어서 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太平御覽》 인용문에 ‘臣兄之有功也於車下’가 ‘臣之兄有功也於車下’로 되어 ‘之兄’이 바뀌어 있다. 畢沅本 《呂氏春秋》에는 ‘臣兄之有功也於車下’로 되어 있다.
▶ 乎府 : ‘平府’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여씨춘추>. 평부는 부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