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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書賸語

第5章 臨古(임고)

耽古樓主 2024. 1. 29.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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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書賸語




1

自運在服古 臨古須有我 兩者合之則雙美 離之則兩傷
自運은 服古에 있고 臨古에는 모름지기 가 있어서兩者가 합해지면 모두 아름답고 遊離되면 모두 하게 된다.

自運과 臨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自運은 자신의 創作이고 臨古는 古典의 臨書이다.

創作하려면 반드시 古法을 익혀야만 하고 臨古에는 自己의 主觀이 있어야만 한다.

창작과 臨書가 調和統一되면 아름답지만 둘이 遊離되면 둘 모두 실패한다.

글씨를 공부하는 사람은 대부분 창작과 臨古를 따로 하고 있다.

평소에는 古法帖을 臨書하거나 門下生에게 臨書의 방법 등을 가르치는 書家도, 막상 전람회에 출품할 때는 古法을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으며, 流行作家나 심사위원의 書風을 그대로 모방해서 스스로 창작이라 하고 服古 따위는 조금도 없다.

2

臨古須是無我.
臨古에는 모름지기 가 없어야 한다.

一有我只是己意 必不能與古人相消息
조금이라도 가 있으면 다만 자기의 뜻에 불과해서 반드시 古人과 서로 뜻을 통할 수 없다.

前文에서는 「臨古須有我」라 말하고 本文에서는 「臨古須無我」라고 말한다.

완전히 정반대이나, 이것이 동양철학의 논리이며, 書에서는 때때로 이 논리를 사용한다.

臨에 만약 我가 있으면 臨古가 되지 않으니, 그것은 자기의 뜻에 따라 썼을 뿐이고, 그래서는 古人과 통할 수 없다.

前文의 我는 主觀이고 本文의 我는 分別心이다. 古名跡을 보고 감상하여 그 妙趣에 감동함은 主觀이다. 이 主觀이 없어서는 어떠한 古名跡도 단순한 모양에 지나지 않는다. 主觀을 작용시켜 筆을 잡고 臨書할 때는 無我에서 古人을 따라야만 한다. 古人을 따르지 않으면 古人의 마음으로 될 수 없다. 그곳에는 조금의 분별력도 있어서는 안 된다.

 

3

習古人書 必先專精一家.
古人의 를 익힘에 반드시 먼저 一家에 오로지 精進해야 한다.

至於信手觸筆無所不似 然後兼收並蓄 淹貫衆有.
손에 맡겨 마음대로 을 대어도 닮지 아니한 바가 없음에 이르고 나서數家를 두루 익히면 諸體에 널리 통한다.

然非淹貫衆有亦決不能自成一家.
그러나 諸體에 두루 통하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 一家를 이룰 수 없다.

若專此一家 到得似來 只爲此家所蓋 枉費一生氣力.
만약 一家만을 오로지 익히면 닮음에 이를 수는 있으나一家에 가려져 일생의 氣力만 헛되이 소비하게 된다.

古人의 書를 익힐 때는 반드시 一家의 書를 專修하여 精進해야 한다.

처음부터 數家의 書를 兼하려 하면 머리가 어지러워 얻을 수 없다. 書法은 생각을 많이 한 후 체험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몸에 익히기 전에 많은 書法이 重疊되면 하나의 法에 집중이 철저하게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起筆의 요령만도 여러가지가 있다.

歐法과 顔法을 동시에 몸에 익힐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의 法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一家를 專修해야만 한다. 근래에 글씨를 공부하는 생각이 바뀌어 처음부터 많은 法을 배우려 해서 도리어 한 法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의 法을 익히고 나서 第二의 法, 第三의 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法이라 할지라도 一法에만 그치면 奴書가 된다.

信手觸筆이란 그다지 수고하지 않고 筆을 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古人의 書에 닮는 것이 無所不似이다. 無所不似의 경지에 든 후에 第二의 法으로 옮겨야 한다.

이렇게 하여 名家法을 차례차례 익힌다. 이것이 兼收이고 並蓄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다. 많은 古書를 자기의 主觀으로 널리 通하여야 비로소 자기의 것이 된다. 많은 古書를 淹貫할 수 없으면 결코 一家를 이루지 못하고, 다만 一家에 가려서 그야말로 奴書가 된다. 枉은 수고해도 功이 없음을 말한다. 일생의 정력을 소비해도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4

窮其源流 究其變化 然後作字有本.
그 源流와 變化를 窮究한 然後에 글자를 쓰면 根本이 있게 된다.

不理其本 但取半路 撏撦不濟事.
그 根本을 이해하지 않고 다만 半路를 갈라서 하면 성공할 수가 없다.

理는 條理이다.

『大學』에 「物에 本末이 있고 事에 終始가 있는데 그 先後하는 바를 알면 道에 가깝다」1)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 條理를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根本을 이해한다는 것은 事物의 先後를 알고 이것을 實行한다는 뜻이다.

撏撦의 撏은 손끝으로 집고 撦는 가르는 것이다. 路의 半만을 끊어 取함을 取半路撏撦라고 한다. 濟는 完成의 뜻인데 일에 성공하지 못함을 不濟事라고 한다.

書의 源流와 變遷의 과정을 窮究하여 글씨를 쓰면 根本이 있게 된다. 그 根本을 실행하지 않고 半路 만을 끊어서 取하려고 하면 일을 이룰 수 없다.
1)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

5

臨古須透一步翻一局乃適得其正.
臨古는 모름지기 一步에 透徹하여 一局을 바꾸어야만 그 을 얻을 수 있다.

古人言:
智過其師 方名得髓.
古人은 말하였다.
智力이 그의 스승을 능가할 때 바야흐로 眞髓를 얻었다고 부른다

此最解人語.
이것은 가장 이치를 잘 이해한 사람의 말이다.

一步에 透徹하여 一局을 바꿈은 쉬운 일이 아니다. 一步를 내디딜 때 단단히 밟듯이 一字一劃이라도 古典을 臨할 때는 단단히 하는데, 그것을 透라고 한다. 透徹 또는 徹底의 뜻이다.

그러나 어디까지 철저하면 좋은가? 一局을 바꿀 때까지 철저해야 한다. 局을 바꿈은 局面을 打開하는 것이고 새로운 경지를 여는 것이다.

예를 들어, 南帖을 배워서 자기의 것으로 한 사람이 새로 北碑를 익힌다고 하자. 거기에는 我를 無로 하여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從來의 作風을 一變하지 못했다면 철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用筆에 큰 변화가 생겨서 깊이 깨달음이 있으면 一局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으나, 一時的 모방으로 끝나고 말면 臨에 철저함이 아니다.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훌륭한 書家는 모두 이것을 실행하고 있다.

乃는 그래서의 뜻이고 適은 適宜·適當의 뜻이다. 得其正이란 그것이 바른 臨書라는 뜻이다.

古人의 말은 누구의 말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智力이 그 스승을 능가한 때에 眞髓를 얻는다는 뜻이다.

得髓란 眞髓를 얻은 사람이다. 곧 스승의 法을 배워서 스승의 法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스승 이상의 실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解人은 능히 이치를 이해한 사람이다. 書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臨古를 하고 있지만, 진실로 臨古의 意義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더구나 이것을 실행함에는 더욱 많은 勞力이 필요하다.

6

攝天地和明之氣 入指腕間 方能與造化相通而盡物之變態.
天地和明의 를 모아서 의 사이에 들일 때 바야흐로 造化와 하고 萬物의 變態를 다할 수 있다.

然非窮極古今 一步步脚踏實地 積習久之 至於縱橫變化無適不當 必不能地負海涵 獨扛百斛.
그러나 古今을 窮究하고 한걸음 한걸음 實地를 밟아 오래 익혀서 縱橫으로 변화하여 어디에도 마땅하지 않음이 없음에 이르지 않으면大地가 만물을 짊어지고 大海가 만물을 함유하고 있듯이 홀로 百斛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

故知千里者跬步之積 萬仞者尺寸之成
그러므로 千里란 한 걸음의 쌓임이요萬仞은 尺寸이 이룬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수식어가 많아서 단어를 먼저 해석하고 나서 意譯하겠다.

天地和明의 氣란 天地의 元氣이고 이것이 나누어져서 陰陽 二氣로 된다.

天地陰陽의 氣는 小我를 초월하는 것으로, 일단 造化에 相通하면 天地之氣는 그대로 나의 氣가 된다. 孟子는 「나는 나의 浩然之氣를 잘 기른다(我善養吾浩然之氣)」라고 말했다. 浩然의 氣는 天地의 氣로서 인간은 스스로 그 氣를 수 있다.

和明이란 調和된 透明함이다. 인간에게는 分別智나 執着이 있고 自我意識이 작용하므로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음이 투명하게 되지 않는다. 그것이 無心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조화와 일체가 될 수 있다.

攝天地和明之氣 入指腕間은 그 氣에 同化하여 筆을 잡고 쓰는 것이다.

마음이 和明하여 조화와 통하면 我가 조화로 되므로 천지만물의 變態를 다할 수가 있다.

만물의 變態란 이 경우 書에 있어서의 變態이다. 書의 변화란 관념의 작업에 의한 것이 아니고 無心의 작업이라, 그것을 天工이라고 말한다. 『書經』에 「天工, 이것을 사람이 대신해서 한다.」3)라는 말이 있다.

3) 書經大禹謨天工 人其代之란 글이 있다.

 

一步步脚踏實地는 一步一步 발로써 實地를 밟아 다지는 것을 착실히 古典을 臨書하여 古法을 몸에 익히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無適不當이란 縱橫變化하는 어디에도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다.

地負海涵獨打百斛이란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大海가 만물을 함유하고 있듯이 혼자서 斛의 물건을 들어 올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書에 있어서 아주 크고 많은 힘을 가리키고 있다. 斛은 과의 열 배이다.

眭는 한번 발을 옮기는 것으로 三尺 즉 半步이다. 步는 두 번 발을 옮기는 것으로 六尺 즉 一步이다. 요즈음의 용법과는 다르다. 千里의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

仞은 周나라 尺度인데 八尺높이를 재는데 사용하는 단위이다. 萬仞의 高山도 尺寸의 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본문을 意譯해 보자.

無心으로 조화와 일체가 되면 스스로 千變萬化한다. 一步一步 實地에 따라서 古今의 名跡을 연구해야 한다. 한 번에 큰 힘을 얻을 수는 없다.

7

孫虔禮云:
學之者4)尚精 擬之者貴似.
孫虔禮가 말하였다.
배우는 사람은 을 숭상하고 모방하는 사람을 닮기를 급하게 여긴다.
4) 書譜의 原文에 學之者의 은 로 되어 있다.

凡臨古人 始必求其似.
일반적으로 古人을 할 때는 처음에 반드시 그를 닮기를 추구해야 한다.

久久剝換 遺貌取神 則相契在牝牡驪黄之外 斯謂神似.
오래되어 껍질을 벗겨서 바꾸고 모양을 버리고 정신을 취한다면 잘 어울림이 牝牡나 驪黄의 밖에 있으니 이것을 神似라고 한다.

宋人謂:
顏書學褚 顔之與褚絶不相似.
宋人이 말하였다.
顔書는 를 배웠는데 은 와 전혀 닮지 않았다

此可悟臨古之妙也
이것에서 의 를 깨달을 수 있다.

孫過庭5)의 『書譜』의 말을 인용하여 學書의 처음에는 반드시 法書에 닮도록 하라고 한다.

5) 孫過庭 (648~703 以前) : 富陽人. 虔禮(一說에는 虔禮, 過庭, 河南 陳留人). 저술로는 書譜, 草書千字文, 景福등이 있다.

 

擬는 모방이고 似는 닮음이니 둘 다 뜻이 같다.

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字形의 似가 아니고 用筆의 似이니, 前句의 精을 숭상한다고 함도 用筆의 精이다.

用筆을 輕視하고 字形의 精과 似를 구한다면 剝換할 수는 없다.

剝은 깎음이고 換은 바꿈이다.

王羲之의 書를 오래 익혀서 王羲之와 같음을 깎아내어 자기 것으로 바꾼다. 이 전환이 剝换인데 그것은 철저한 닮음에서 가능하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古典을 臨書하고 있어도 스스로 모양을 버리고 정신을 취하게 된다.

그것을 契한다 함은 단단히 결부시켜 一體로 만든다는 뜻이며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牝은 陰性에 속하는 짐승이고 牡는 陽性에 속하는 짐승으로, 곧 雌雄이다.

驪는 純黑色의 말이고 黄은 누런색의 말이니 말의 表面의 色을 말한다.

이것에 관해서는 故事가 있다.

『列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九方皐는 말을 잘 보았다. 秦의 穆公이 그에게 말을 구하게 했다.

3개월이 지나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제가 沙丘에서 말을 구했는데 암컷으로 황색입니다.”

그러나 말을 가지고 온즉 수컷으로 검은 말이었다.

穆公이 怒하여 伯樂을 불러 말하였다.

“皐는 암수와 色조차 모르니 어찌 말을 잘 본다고 말할 수 있는가?”

伯樂이 대답하였다.

“阜가 보는 바는 天機입니다. 精을 얻으면 粗를 잃으며, 內面을 얻으면 外面을 잃습니다.”

그 말은 사실은 天下의 良馬였다.」

名馬 中의 名馬가 牝牡驪黄의 外形에 있음이 아니라 神氣에 있듯이, 書도 또한 그러하다.

宋人은 말하였다.

「顔眞卿의 書는 褚遂良을 배웠는데도 顔은 褚와 아주 다르다.」

이 한 가지 例만 보더라도 臨古의 묘미를 깨달을 수 있을 터이다.

 

8

正書樂毅爲主黄庭內景洛神佐之.
正書는 樂毅를 로 하고 黃庭內景洛神을 로 한다.

行書蘭亭爲主 聖教爭座佐之.
行書는 蘭亭을 로 하고 聖敎·爭座를 로 한다.

草書十七帖爲主 書譜絶交佐之.
草書는 十七帖을 로 하고 書譜·絶交를 로 한다.

正書는 眞書이다.

眞書는 王右軍의 書인 『樂毅論』을 主로 하여 익히고 補助敎材로서 『黃庭內景經』과 『洛神』을 익히는 것이 좋다. 洛神賦는 王獻之6)의 書이지만 그 刻本에 관해서는 諸家의 論議가 있다.

6) 王獻之(344388) : 子敬, 王羲之第七子. 王羲之와 더불어 二王이라고 한다. 그의 楷書로는 洛神賦가 전해지나 眞跡 여부에 異論이 많다. 그외 中秋帖, 鴨頭丸帖, 地黃湯帖등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黃庭內景經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王右軍이 山陰 道士와 거위로써 交換했다고 하는 것으로 黃庭經說과 道德經說이 있고, 黄庭內經의 筆者에 관해서도 王羲之說과 楊羲和說이 있으므로 王虛舟가 어느 黃庭內景經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行書를 익힘에는 『蘭亭叙』의 臨書를 主로 하라고 한다.

蘭亭叙가 王羲之의 書라는 것은 古來로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中國의 郭洙若7)이 새로운 説을 발표하여 蘭亭叙는 僞書라고 말하고 있다.

7)郭末若(1892~1978) : 四川樂山人. 中國古代社會研究, 殷周青銅器銘文研究, 甲骨文字研究등의 著述이 있다.

또 行書의 補助敎材로서 『集字聖教序』와 顔眞卿의 『爭座位帖』을 들고 있다. 聖敎에는 眞書에 가까운 글자가 많고 爭座位에는 草書에 가까운 글자가 많다.

또 草書에서는 王羲之의 『十七帖』을 主로 하고 補助教材로서 孫過庭의 『書譜』와 李懷琳8)의 『絶交書』가 좋다고 한다.

8)李懷琳(生卒未群) : 唐 洛陽人. 書史會要, 絶交書등이 있다.

絶交書는 右軍의 書라는 說이 있고, 右軍의 書를 臨書한 것이라는 説도 있다.

以上은 다만 古名跡 中에서 初學者의 교과서가 될만한 것을 들었을 뿐이다. 虛舟의 말에 따라서 이들의 法書를 선택하는 사람은 그들의 刻本에 관해서 미리 선배에게 물어서 考証할 필요가 있다.



 

9

人必各自立家 乃能與古人相抗.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一家를 세워서 古人과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

魏晋迄今無有一家同者.
魏晋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一家도 같은 자가 없다.

匪獨風會遷流 亦緣規模自樹.
왜냐하면 風格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規模도 스스로 樹立되었기 때문이다.

僕嘗説
使右軍在亦學不得正恐爲古人所蓋也.
나는 말한 적이 있다.
右軍이 오늘에 살아있더라도 배워서 을 얻지 못하면아마도 古人에 가려질 터이다

書家느 스스로 一家를 세우고 古人과 서로 대항할 만한 글씨를 써야 한다.

魏晋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名家라 부르는 사람 중에 一家도 같은 書風은 없다.

다만 그 風格·風味가 바뀌어 갈 뿐만 아니라 造形도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王羲之와 같은 뛰어난 名人과 비교하기 때문에 약간 뒤떨어져 보인다. 가령 王右軍이 오늘날 살아있더라도 學書의 方法에 바름을 얻지 못한다면 아마도 우리처럼 古人에 가려지지나 않을까?

이 말은 조금 極論에 가깝지만 暗示에는 충분한 말이다.

물론 역사를 바꾸어 추측함은 무의미하지만 思索의 자료로 하기에는 충분하다.

 


 

10

作一字 須筆筆有原本乃佳 一筆杜撰便不成字.
한 를 쓸 때 모름지기 마다 根源이 있어야만 이에 훌륭하니한 이라도 에 어긋나게 되면 좋은 글씨가 될 수 없다.

한 字를 쓸 때 一筆一筆에 古法에서 익힌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훌륭한 글씨가 될 수 있다. 만약 一筆이라도 古法에 어긋나면 그 하나로 인해서 훌륭한 글씨가 되지 못한다.

杜撰은 본래 著作에 틀림이 많다는 말이지만 요즈음은 무엇을 만드는데 질서가 없음을 말하게 되었다.

 

11

作書不可不通篆隷.
글씨를 쓸 때 篆書와 隸書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今人作書別字滿紙 只縁未理其本 隨俗亂寫耳.
今人은 글씨를 쓸 때 근거 없는 글자를 종이에 가득 채우는데그 이유는 다만 그 근본은 이해하지 않고 世俗에 따라서 亂寫하기 때문이다.

通篆法則字體無差 通法則用筆有則.
篆法에 하면 字體에 誤差가 없으며隷法에 하면 用筆에 法則이 있게 된다.

此入門第一正步.
이것이 入門의 첫 번째 바른 길이다.

요즈음 書家들의 글씨를 보면 근거 없는 글자를 종이에 채우고 있다. 그것은 다만 俗體에 따라서 亂寫하되, 그 根本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 근본을 부여하려면 篆書·隸書에 通하지 않으면 안 된다.

篆法에 通하면 字體(間架·結構)에 誤差가 없게 되며, 隷法에 通하면 用筆에 法則이 있게 된다. 이것이 入門의 첫 번째 바른길이라고 虛舟는 말한다.

따라서 虛舟는 學書의 入門을 篆書와 隷書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篆書를 字體의 근본으로 삼고 隷書를 用筆의 근본으로 삼는다면, 用筆의 入門은 篆筆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虛舟가 말하는 隸書는 八分9)이 아니고 古隷를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9)八分: 篆文 十分中 八分을 남겼다 하여 程邈이 붙인 명칭이다. 漢碑 대부분이 이에 속하며 후세 統稱된다. 八分分數, 즉 나누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도 있다.

古隷10)라고 한다면 물론 篆筆과 隷筆을 兼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篆書에 의해서만 篆筆을 익힐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10)古隷 : 今隸對稱 개념으로 小篆에서 隸書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書體이다. 筆劃曲線直線化되고 또한 생략되며 에서 으로 변화한다. 대표적인 것으로魯孝王刻石,開通褒斜道刻石, 三老諱字忌日刻石, 祀三公山碑등이 있다.

字體는 시대에 따라서 변천하기 때문에 지금 大篆11)이나 小篆12)의 字體에만 구애될 필요가 없지만 書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려는 사람은 그 原流를 찾아 篆書의 字體를 알아야만 한다. 다만 俗體에 따라서 亂寫하여서는 안 된다.
11)大篆 : 殷代甲骨, 周代鐘鼎에 나타나는 文字古文이라 칭하며, 小篆 이전의 모든 書體大篆이라 總稱한다.

12)小篆 : 秦始皇中國을 통일한 후 李斯, 趙高, 胡母敬 등이 大篆을 정리한 것으로 楷隷가 된다. 대표적인 것으로 泰山刻石, 琅邪臺刻石등이 있다.


12

凡臨古人始在能取繼在能舎.
대체로 古人의 를 臨書함에 처음에는 古法을 잘 취하고 다음에는 古法을 잘 버려야 한다.

能取易能舎難 不能力取無由得舎.
하기는 쉬우나 버리기는 어렵고힘들여 잘 취하지 못하면 잘 버릴 수가 없다.

본문은 臨書의 取舎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는 古法을 취함에 힘쓰되, 취하여 자기의 것이 되면, 아까워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언제까지나 古法을 관념상 기억하고 있어서는 자유로운 運筆을 할 수 없다. 사람도 먹고 排泄함이 건강을 지키는 기본이다.

먹기는 쉽지만 排泄은 어렵다.

먹고 배설하지 못하면 病이 생김다.

臨書도 사람과 같다.

心理現象도 生理現象과 이치는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먹지 않으면 배설하지 못한다.

 

13

善學柳下惠莫如魯男子 於此可悟舎法.
柳下惠를 잘 배운 사람은 男子만한 사람이 없으니여기서 舎法을 깨달을 수 있다.

非析骨還父 析肉還母 何由現得清淨法身來?
뼈를 쪼개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살을 잘라서 어머니에게 돌려주지 않고 어떻게 清淨한 法身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柳下惠와 魯男子에 관한 故事가 있다.

『詩經』小雅·巷伯篇의 毛傳에 보면 魯나라의 어떤 남자가 한 채의 집을 혼자 쓰고 있었다. 밤에 폭풍우가 몰아닥쳐 어떤 부인의 집이 붕괴되었다. 부인은 남자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 남자는 문을 걸어 잠그고 이 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자는 60歳를 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대도 젊고 나도 젊다. 그러므로 들어올 수 없다.」
다음에 부인이 밖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는 柳下惠를 모르십니까? 여자와 단둘이서 同宿하였는데도 아무런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어찌하여 그렇게 위험시합니까?」
그래도 남자는 거절하고 또 이렇게 말했다.
「柳下惠는 훌륭한 사람이므로 그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없음으로써 柳下惠가 할 수 있음을 배우고 싶을 따름이다. 」
이 故事에서 알 수 있듯이 柳下惠는 자기의 방에서 女와 同宿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魯男子는 자신이 없었으므로 여자를 방에 들이지 않았다. 들임과 들이지 않음은 전혀 다르지만, 그것은 형식이 다른 것이지, 남녀 간의 不義를 두려워하는 심정은 같다. 魯男子가 柳下惠를 잘 배웠다고 孔子는 칭찬하였다.

臨古도 역시 이 魯男子와 같이 모양을 잊고 정신을 취함과 같아야 한다. 여기에 버리는 法이 있다고 虛舟는 말한다. 또한 王虛舟는 儒學과 藝術에 뛰어난 사람이면서 佛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하는 그의 佛敎思想을 가지고 書의 舎法을 설명하고 있다.

“骨은 아버지의 것이며 肉은 어머니의 것이다. 그것을 쪼개서 부모에게 되돌려 보낸다. 그러면 육체에 자리 잡은 본능적인 욕망이 없어진다. 그때의 無垢한 清淨心이야말로 부처이고 거기에서 眞我가 나타난다. 이렇게 書에서도 臨古에 의해서 배워온 形式을 모두 되돌려 보내버리면 본래의 자기가 나타난다. 본래의 자기란 造化 그 자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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