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秦의 相邦. 秦昭王의 외삼촌이며 宣太后의 異父동생이다. 작위는 穰侯.
소양왕과 선태후를 보좌하면서 白起를 중용해 서북쪽의 義渠를 멸망시켜 秦의 배후를 안정시키고 영토를 넓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다. 당시 穰 땅을 봉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穰侯라고도 부른다. 수십년간 秦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가 親政을 꾀한 소왕과 范睢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었다.
지나친 축재와 사치로 비판받았다. 범수에 의해 함곡관 밖으로 내쫓길 때, 짐을 실은 수레가 1,000대가 넘었다고 한다. 조숭이 장개에게 살해당할 때 재물을 실은 수레가 100대였다고 하니, 양후의 재산은 조씨 일가의 것의 10배가량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그가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에는 실권자나 다름없어서 소왕 시기의 업적은 대부분 그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위염이 축출된 후 秦은 한동안 그가 있던 시절만큼 六國을 압박하지 못하였다.
穰侯魏冉者,秦昭王母宣太后弟也。
穰侯 魏冉은 秦昭王의 어머니 宣太后의 동생이다.
其先楚人,姓羋氏。
그 선조는 楚 사람으로 성은 羋氏이다.
秦武王卒,無子,立其弟為昭王。
秦武王이 세상을 떴는데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 동생이 진소양왕으로 즉위하였다.
昭王母故號為羋八子,及昭王即位,羋八子號為宣太后。
소왕의 어머니는 본래 羋八子라고 불렸으나, 소왕이 즉위하자 미팔자에서 선태후라고 불렀다.
宣太后非武王母。
선태후는 진무왕의 어머니가 아니다.
武王母號曰惠文后,先武王死。
진무왕의 어머니는 惠文后라고 불렸는데, 진무왕보다 먼저 죽었다.
宣太后二弟:
其異父長弟曰穰侯,姓魏氏,名冉;
同父弟曰羋戎,為華陽君。
선태후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다른 큰동생은 穰侯로 불렸고 성은 魏氏이고 이름은 염이며,
아버지가 같은 동생은 羋戎으로 華陽君이다.
而昭王同母弟曰高陵君、涇陽君。
또, 진소양왕에게는 어머니가 같은 동생인 高陵君 嬴巿과 涇陽君 嬴悝가 있었다.
而魏冉最賢,自惠王、武王時任職用事。
이 중에 위염이 가장 현명했기에 진혜왕 때부터 진무왕 때까지 직임을 받아 국사에 관여하였다.
武王卒,諸弟爭立,唯魏冉力為能立昭王。
진무왕이 죽고 동생들이 왕위를 다투었으나, 오직 위염의 힘으로 진소왕을 옹립할 수 있었다.
昭王即位,以冉為將軍,衛咸陽。
진소양왕이 즉위하자 위염을 장군으로 삼고 咸陽을 지키게 하였다.
誅季君之亂,而逐武王后出之魏,昭王諸兄弟不善者皆滅之,威振秦國。
季君 贏壯의 난을 진압하고 무왕의 왕후를 魏로 내쫓았으며, 진소왕의 형제 중에 반란에 가담한 자를 모두 죽이니 그 위세가 秦에 진동하였다.
昭王少,宣太后自治,任魏冉為政。
진소왕이 어렸으므로 선태후가 섭정하며 위염에게 정권을 맡겼다.
昭王七年,樗里子死,而使涇陽君質於齊。
진소왕 7년, 樗里子가 죽자 경양군을 齊에 인질로 보냈다.
趙人樓緩來相秦,趙不利,乃使仇液之秦,請以魏冉為秦相。
趙 사람 樓緩이 와서 秦의 재상이 되었는데, 趙는 이를 불리하다고 여겨, 仇液을 秦으로 보내 위염을 秦의 재상으로 삼으라고 청하려고 하였다.
仇液將行,其客宋公謂液曰:
구액이 길을 떠나려는데, 그 식객 宋公이 구액에게 말하였다.
「秦不聽公,樓緩必怨公。
“秦이 공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누완은 틀림없이 공을 원망할 터입니다.
公不若謂樓緩曰
『請為公毋急秦』。
공께서 누완에게 『저는 공을 위해 秦에 다급하게 부탁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함이 낫습니다.
秦王見趙請相魏冉之不急,且不聽公。
진왕이 趙가 위염을 재상으로 삼아달라는 요청이 급하지 않음을 알면, 도리어 공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公言而事不成,以德樓子;事成,魏冉故德公矣。」
공의 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누완에게 덕을 베푼 셈이고,
일이 이루어진다면 위염은 공에게 고마워할 터입니다.”
於是仇液從之。
이에 구액이 송공의 말을 따랐다.
而秦果免樓緩而魏冉相秦。
秦은 과연 누완을 면직하고 위염을 재상으로 삼았다.
▶ 季君: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05년에 죽은 秦惠王의 아들이다. 贏 성에 이름은 壯으로 公子壯이라 부르고 계군은 그의 자이다. 무왕이 그를 庶長에 임명하였다. 무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이 왕위를 다투었다. 그는 혜문왕후의 지지를 얻었으나 위염이 소왕을 세웠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었다.
후에 다른 공자들과 귀척 및 대신들과 모의하여 소왕 2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위염에 의해 살해되었다.
欲誅呂禮,禮出奔齊。
呂禮를 죽이려고 하자 여례는 齊로 달아났다.
昭王十四年,魏冉舉白起,使代向壽將而攻韓、魏,敗之伊闕,斬首二十四萬,虜魏將公孫喜。
진소왕 14년, 위염이 白起를 천거하여 向壽 대신 장수로 삼고 韓ㆍ魏를 공격하여, 伊闕에서 물리치고 24만을 참수하고, 魏 장수 公孫喜를 포로로 잡았다.
明年,又取楚之宛、葉。
이듬해, 또 楚의 宛과 葉을 빼앗았다.
魏冉謝病免相,以客卿壽燭為相。
위염이 병들어 사직을 청하니 재상에서 면직되었으며, 客卿 壽燭을 재상으로 삼았다.
其明年,燭免,復相冉,乃封魏冉於穰,復益封陶,號曰穰侯。
이듬해, 수촉이 면직되고 위염을 재상에 복직하고, 위염을 穰에 봉하고 다시 더하여 陶에 봉하여 穰侯라고 불렸다.
穰侯封四歲,為秦將攻魏。
양후에 봉해지고 4년째, 秦의 장수가 되어 魏를 공격하였다.
魏獻河東方四百里。
魏가 黃河 동쪽 지방 4백 리를 바쳤다.
拔魏之河內,取城大小六十餘。
魏의 황하 남쪽 땅을 점령하여 크고 작은 城 60여 개를 빼앗았다.
昭王十九年,秦稱西帝,齊稱東帝。
진소왕 19년, 秦은 西帝를 칭하고 齊는 東帝를 칭하였다.
月餘,呂禮來,而齊、秦各復歸帝為王。
한 달쯤 지나자 여례가 돌아왔으며, 齊와 秦은 각각 帝號를 버리고 다시 王號를 썼다.
魏冉復相秦,六歲而免。
위염이 다시 秦의 재상이 되고 6년 만에 면직되었다.
免二歲,復相秦。
면직되고 2년째에 다시 秦의 재상이 되었다.
四歲,而使白起拔楚之郢,秦置南郡。
재상이 되고 4년째, 백기를 보내 楚의 郢을 점령하고 秦이 南郡을 두었다.
乃封白起為武安君。
이에 백기를 武安君에 봉하였다.
白起者,穰侯之所任舉也,相善。
백기는 양후 위염이 천거한 인물로 서로 사이가 좋았다.
於是穰侯之富,富於王室。
이때 양후의 부유함은 왕실보다도 더욱 부유하였다.
昭王三十二年,穰侯為相國,將兵攻魏,走芒卯,入北宅,遂圍大梁。
진소왕 32년, 양후가 상국이 되고, 병사를 이끌고 魏를 공격해 芒卯를 쫓아내고 北宅으로 들어가 마침내 大梁을 포위하였다.
梁大夫須賈說穰侯曰:
魏 대부 須賈가 양후에게 말하였다.
「臣聞魏之長吏謂魏王曰:
『昔梁惠王伐趙,戰勝三梁,拔邯鄲;趙氏不割,而邯鄲復歸。
“신이 듣기를, 魏의 높은 관리가 魏王에게 말하였습니다.
『옛날 魏惠王이 趙를 정벌하여 三梁에서 싸워서 이기고, 邯鄲을 점령했으나 趙는 땅을 나누어 주지 않았고, 한단 땅은 다시 趙에 돌아갔습니다.
齊人攻衛,拔故國,殺子良;衛人不割,而故地復反。
齊 사람들이 衛를 공격하여 옛 도읍을 점령하고 子良을 죽였으나, 衛는 땅을 나누어 주지 않았고, 옛 땅은 다시 衛에 돌아갔습니다.
衛、趙之所以國全兵勁而地不并於諸侯者,以其能忍難而重出地也。
衛와 趙가 강한 병사로 나라를 온전히 하며 제후에게 땅이 병합되지 않은 이유는, 어려움을 참고 땅을 내놓음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宋、中山數伐割地,而國隨以亡。
송과 중산국은 여러 차례 공격당하여 땅을 나누어 주었기에 나라도 따라서 망해버렸습니다.
臣以為衛、趙可法,而宋、中山可為戒也。
신은 衛와 趙를 본받고, 송과 중산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秦,貪戾之國也,而毋親。
秦은 욕심이 많고 도리에 벗어난 나라이기에 가까이해선 안 됩니다.
蠶食魏氏,又盡晉國,戰勝暴子,割八縣,地未畢入,兵復出矣。
魏를 잠식하여 옛 晉 땅을 모두 빼앗았으며, 暴鳶과 싸워서 이기고 8개의 현을 나누어 받아, 땅을 편입하기도 전에 또 出兵하였습니다.
夫秦何厭之有哉!
秦에게 어찌 만족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今又走芒卯,入北宅,此非敢攻梁也,且劫王以求多割地。
지금 또 망묘를 내쫓고 北宅에 들어왔으나, 이는 魏를 공격함이 아니라, 왕을 위협하여 많은 땅의 割讓을 요구하려는 것입니다.
王必勿聽也。
왕께서는 절대로 秦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今王背楚、趙而講秦,楚、趙怒而去王,與王爭事秦,秦必受之。
지금 왕께서 楚와 趙를 배반하고 秦과 강화하면, 楚와 趙는 노여워하며 왕을 버리고 왕과 다투어 秦을 섬길 터이고, 秦은 틀림없이 이를 수용할 터입니다.
秦挾楚、趙之兵以復攻梁,則國求無亡不可得也。
秦이 楚·趙의 병사를 끼고 다시 魏를 공격하면, 魏를 구함에 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願王之必無講也。
부디 왕께서는 절대로 강화해선 안 됩니다.
王若欲講,少割而有質;不然,必見欺。』
왕께서 굳이 講和하려면, 땅을 조금 떼어주되 人質을 받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속을 터입니다.』
此臣之所聞於魏也,願君之以是慮事也。
이것은 臣이 魏에서 들은 이야기이니, 부디 장군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주십시오.
《周書》曰
『惟命不于常』,
此言幸之不可數也。
<周書>에 이르기를
『천명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이 말은 행운은 자주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夫戰勝暴子,割八縣,此非兵力之精也,又非計之工也,天幸為多矣。
暴鳶과 싸워서 이기고 8개의 현을 할양받았는데, 이는 병력이 정예임도 아니고, 또 계략이 교묘함도 아니며, 하늘이 준 행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今又走芒卯,入北宅,以攻大梁,是以天幸自為常也。
지금 또 芒卯를 내쫓고 北宅에 들어와서 大梁을 공격함은, 하늘의 행운이 자신을 위하여 변치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智者不然。
지혜로운 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臣聞魏氏悉其百縣勝甲以上戍大梁,臣以為不下三十萬。
신이 듣기에 魏는 百縣 넘는 곳에서 병사를 모조리 동원하여 대량 땅을 지킨다고 하는데, 적어도 30만은 될 터입니다.
以三十萬之眾守梁七仞之城,臣以為湯、武復生,不易攻也。
그 30만의 병사로 大梁 7仞 높이의 성을 지키니, 신은 湯王이나 周武王이 다시 살아나도 쉽게 공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夫輕背楚、趙之兵,陵七仞之城,戰三十萬之眾,而志必舉之,臣以為自天地始分以至于今,未嘗有者也。
배후의 楚ㆍ趙 병사를 가벼이 여기고 7仞 높이의 성을 기어올라 30만의 병사와 싸워서 그 뜻을 꼭 관철하려 하시니, 신이 생각하기에 천지가 개벽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없었던 것입니다.
攻而不拔,秦兵必罷,陶邑必亡,則前功必棄矣。
공격해서 함락하지 못하면 秦軍은 틀림없이 지칠 테고, 陶邑을 틀림없이 잃은 테니, 이전의 공적은 물거품이 됩니다.
今魏氏方疑,可以少割收也。
지금 魏는 머뭇거리고 있으니, 땅을 조금 나누어 받을 수 있습니다.
願君逮楚、趙之兵未至於梁,亟以少割收魏。
부디 장군께서는 楚ㆍ趙의 군대가 大梁에 아직 이르지 않은 틈에, 재빨리 魏로부터 땅을 조금 나누어 받으십시오.
魏方疑而得以少割為利,必欲之,則君得所欲矣。
魏는 머뭇거리고 있으나 땅을 조금 割讓함이 이롭다고 생각되면 필시 그리할 터이며, 장군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습니다.
楚、趙怒於魏之先己也,必爭事秦,從以此散,而君後擇焉。
楚ㆍ趙는 魏가 자신들보다 먼저 강화하였음을 노여워하면서 틀림없이 앞다투어 秦을 섬겨서, 이것으로 합종은 무산될 터이니, 장군은 후에 하고 싶은 일을 고르시면 됩니다.
且君之得地豈必以兵哉!
장군께서 땅을 얻기 위해 꼭 군대를 동원해야 합니까!
邦晉國,秦兵不攻,而魏必效絳安邑。
옛 晉 땅을 얻음에, 秦軍이 공격하지 않아도 魏는 絳과 安邑을 줄 것입니다.
又為陶開兩道,幾盡故宋,衛必效單父。
또한, 陶로 통하는 두 길을 엶에, 옛날 宋을 차지한다면, 衛는 필시 單父를 바칠 터입니다.
秦兵可全,而君制之,何索而不得,何為而不成!
秦軍을 온전히 하면서 장군은 천하를 제어할 수 있으니, 구하여 무엇을 얻지 못하고, 행하여 무엇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願君熟慮之而無行危。」
부디 장군께서는 이를 헤아리고 위태로운 일을 하지 마십시오.”
穰侯曰:
「善。」
양후가 말하였다.
“좋소.”
乃罷梁圍。
이에 大梁의 포위를 풀었다.
明年,魏背秦,與齊從親。
이듬해, 魏가 秦을 배반하고 齊와 합종하였다.
秦使穰侯伐魏,斬首四萬,走魏將暴鳶,得魏三縣。
秦은 양후를 보내서 魏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4만을 참수하고 魏의 장수 暴鳶을 달아나게 하였으며, 魏의 세 縣을 얻었다.
穰侯益封。
양후의 봉토가 더욱 넓어졌다.
▶ 呂禮: 작위가 五大夫였던 전국 때 秦의 장군이다. 진소왕 13년 기원전 294년 魏로 망명하였다. 19년 秦에 귀국하였다. 후에 다시 진소왕이 죽이려고 하자 또다시 齊로 달아나 齊의 상국이 되어 맹상군을 모함하였다. 여례 때문에 齊에서 쫓겨난 맹상군이 위염에게 齊를 정벌하라고 요청하자 여례는 齊에서 도망쳤다.
▶疑: 멈추다. 머뭇거리다
▶逮: 1. (잡을 체)
a. 잡다, 체포하다(逮捕--)
b. 뒤따라 가서 붙잡다
c. 쫓다(어떤 자리에서 떠나도록 몰다)
d. 미치다(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e. 보내다
f. 옛날에, 이전에
g. 편안(便安)한 모양, 안온(安穩)한 모양
2. (탈 태)
a. (기회를)타다
▶ 穰: 지금의 하남성 鄧縣으로 원래 楚 땅이었으나 韓에 속하였다. 다시 秦의 령이 되었다. 기원전 301년, 韓襄王 11년, 秦昭王 6년 秦가 韓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 三梁: 여러 가지 설이 있다.
① 史記索隱: 南梁으로 河南, 夏陽, 大梁을 삼량이라고 하였다.
②戰國策釋地: 趙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永年縣 동남인 廣平府 동남에 있는 曲梁을 말한다. 三은 曲의 와전이다.
③水經·浣水注: 지금의 하북성 唐縣 동북에 三梁亭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 北宅: 지금의 하남성 정주 북쪽의 고을로 宅陽이라고도 한다.
▶ 仞: 고대 중국에서의 길이 단위. 일인은 약 7-8자에 해당 함.
참고로 춘추전국시대 때 한 자의 길이는 22-23cm 였음.
성벽의 높이가 7인이라 함은 즉 15미터 이상이라는 의미로 대량성이 견고하다는 의미다.
明年,穰侯與白起客卿胡陽復攻趙、韓、魏,破芒卯於華陽下,斬首十萬,取魏之卷、蔡陽、長社,趙氏觀津。
이듬해, 양후는 白起ㆍ客卿 胡陽과 함께 다시 趙ㆍ韓ㆍ魏를 공격하여 華陽에서 芒卯를 무찌르고 10만을 참수하였으며, 魏의 卷 ㆍ蔡陽ㆍ長社와 趙의 觀津을 빼앗았다.
且與趙觀津,益趙以兵,伐齊。
趙에 觀津을 돌려주고, 趙에 군사를 더해주어 齊를 정벌하였다.
齊襄王懼,使蘇代為齊陰遺穰侯書曰:
齊襄王은 두려워하고 蘇代를 시켜 齊를 위해 은밀히 양후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臣聞往來者言曰
『秦將益趙甲四萬以伐齊』,
臣竊必之敝邑之王曰
『秦王明而熟於計,穰侯智而習於事,必不益趙甲四萬以伐齊』。
“신이 듣기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말하였습니다
『秦이 장차 趙에 甲兵 4만을 더해 齊를 정벌할 것이다.』
신은 삼가 우리 왕에게 말했습니다.
『진왕은 현명하여 계략에 능숙하고, 양후는 지혜로와 일 처리에 익숙하므로, 절대로 趙에 병사 4만을 더해 齊를 정벌하지 않을 터입니다.』
是何也?
어째서이겠습니까?
夫三晉之相與也,秦之深讎也。
무릇 三晉이 연합함은 秦에 심각한 위협이기 때문입니다.
百相背也,百相欺也,不為不信,不為無行。
그들은 백 번 배반하고 백 번 속여도, 신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無道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今破齊以肥趙。
지금 齊를 무찌르면 趙를 살찌웁니다.
趙,秦之深讎,不利於秦。
趙와 秦은 깊이 원수졌으니 秦에는 불리합니다.
此一也。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秦之謀者,必曰
『破齊,獘晉、楚,而後制晉、楚之勝』。
秦의 謀士들은 모두 말합니다.
『齊를 무찌르면 삼진과 楚를 피폐하게 할 터이니, 그 후에 삼진과 楚를 정벌하면 이길 터입니다.』
夫齊,罷國也,以天下攻齊,如以千鈞之弩決潰癕也,必死,安能獘晉、楚?
무릇 齊는 황폐한 나라라서, 천하가 齊를 공격함은 천 鈞의 쇠뇌로 종기를 터트림과 같아 필시 죽을 터인데, 어찌 삼진과 楚를 지치게 하겠습니까?
此二也。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秦少出兵,則晉、楚不信也;
多出兵,則晉、楚為制於秦。
秦이 적게 출병하면 삼진과 楚가 믿지 않을 터이며,
많게 출병하면 삼진과 楚가 秦에 제압될 터입니다.
齊恐,不走秦,必走晉、楚。
齊는 두려워서 秦과 교제하지 않고 필시 삼진과 楚과 왕래할 터입니다.
此三也。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秦割齊以啖晉、楚,晉、楚案之以兵,秦反受敵。
秦이 齊의 땅을 받아서 삼진과 楚를 회유하면, 삼진과 楚는 그 때문에 군대를 머물러둘 터이니, 秦은 도리어 적을 맞게 됩니다.
此四也。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是晉、楚以秦謀齊,以齊謀秦也,何晉、楚之智而秦、齊之愚?
삼진과 楚가 秦으로써 齊를 도모거나, 齊로써 秦을 도모하니, 어찌 그리 삼진과 楚은 지혜롭고 秦과 齊는 어리석습니까?
此五也。
이것이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故得安邑以善事之,亦必無患矣。
그러므로 秦은 안읍을 얻어 잘 다스리기만 하면 필시 근심거리가 없습니다.
秦有安邑,韓氏必無上黨矣。
秦이 안읍을 차지하면 韓은 필시 上黨을 잃게 됩니다.
取天下之腸胃,與出兵而懼其不反也,孰利?
천하의 胃腸과 같은 上黨을 빼앗음과 출병해놓고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함, 어느 것이 이롭겠습니까?
臣故曰秦王明而熟於計,穰侯智而習於事,必不益趙甲四萬以代齊矣。」
신은 그러므로 말합니다.
진왕은 현명하여 계략을 쓰는데 능숙하고, 양후는 지혜로와 일처리에 익숙하므로, 틀림없이 趙에 갑병 4만을 더해 齊를 정벌하지 않을 터입니다.”
於是穰侯不行,引兵而歸。
이에 양후는 나아가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 必: 모두
▶ 制: 바로잡다
▶ 走: (친척이나 친우 사이에) 왕래하다. 다니다. 오가다. 교제하다. 방문하다.
昭王三十六年,相國穰侯言客卿灶,欲伐齊取剛、壽,以廣其陶邑。
진소왕 36년, 상국 양후는 객경 灶와 상의하고 齊를 정벌하여 剛과 壽를 빼앗아 봉토인 陶邑을 넓히려고 하였다.
於是魏人范睢自謂張祿先生,譏穰侯之伐齊,乃越三晉以攻齊也,以此時奸說秦昭王。
이때 魏 사람 范睢가 자신을 祿先生이라 이르며, 양후가 齊를 정벌함은 삼진을 넘어 齊를 공격함이라며, 이때 진소왕에게 奸說(간세)하였다.
昭王於是用范睢。
소양왕은 이에 범수를 등용하였다.
范睢言宣太后專制,穰侯擅權於諸侯,涇陽君、高陵君之屬太侈,富於王室。
범수가 말하기를, 선태후가 제멋대로 정권을 휘두르고, 양후가 제후에게 권세를 함부로 부리며, 경양군과 고릉군의 무리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워서 왕실보다도 부유하다고 하였다.
於是秦昭王悟,乃免相國,令涇陽之屬皆出關,就封邑。
이에 진소왕이 깨닫고 상국을 면직시키고 경양군 등의 무리는 모두 관 밖으로 내쫓아 봉토로 가게 하였다.
穰侯出關,輜車千乘有餘。
양후도 관을 나갔는데, 짐을 실은 수레가 천 대를 넘었다.
穰侯卒於陶,而因葬焉。
양후는 陶에서 세상을 뜨니 그곳에 장사지냈다.
秦復收陶為郡。
秦은 다시 陶를 거두어 군으로 삼았다.
▶奸說: 有所干求而游说(벼슬을 구하려 유세함)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穰侯,昭王親舅也。
양후는 진소왕의 친외삼촌이다.
而秦所以東益地,弱諸侯,嘗稱帝於天下,天下皆西鄉稽首者,穰侯之功也。
秦이 동쪽으로 땅을 넓히고, 제후를 약하게 만들면서, 일찍이 천하에 제호를 칭하고, 천하가 모두 서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게 함은, 양후의 공적이다.
及其貴極富溢,一夫開說,身折勢奪而以憂死,況於羈旅之臣乎!
그의 존귀함이 극에 달하고 부유함이 넘쳤으나, 한 사내의 말에 의해 몸은 꺾이고 권력은 빼앗겨 근심 속에 죽었으니, 타국 출신의 신하는 어떻겠는가!
索隱讚述
穰侯智識 應變無方 :
양후의 지혜와 지식은 변화무쌍하여 그 끝이 없었다.
內倚太后 外輔昭王 :
안으로 태후에 의지하고, 밖으로 소양왕을 보좌하였다.
四登相位 再列封疆 :
네 번 相國에 오르고 두 번 列侯가 되어 封地를 얻었다.
摧齊撓楚 破魏圍梁 :
齊를 압박하고 楚를 굴복시켰으며 魏를 격파하고 대량을 포위하였다.
一夫開說 憂憤而亡 :
선비 한 사람이 한 번 유세하자 울분을 품고 죽었다.
▶ 史記索隱: 당나라 때 사마천의 후손 司馬貞이 지은 사기 주석서이다
▶ 撓: 굴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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